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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감정의 방치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25 10:12:48

며칠 뒤, 유리는 그를 직접 만났다. 

카페는 조용했고,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녀는 늦게 도착했고, 이현은 그보다 훨씬 일찍 와 있었던 눈치였다.

“기다렸어요?”

“아니요, 그냥… 일찍 도착했어요.”

그는 그녀를 보며 애써 웃었지만,

그 웃음 뒤로 묘한 불안이 드러나 있었다.

“요즘 어때요?”

그녀가 물었다.

이현은 순간 대답하지 못하고,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솔직히… 별로예요. 뭔가 계속 허전하고, 생각 많고.”

“저 때문이에요?”

그의 시선이 다시 그녀에게 닿았다.

“네.”

짧은 대답. 그 안엔 너무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미소를 짓지 않았다.

“그럼, 계속 그렇게 두죠.”

그 말에 이현은 숨을 멈췄다.

“계속 그렇게…?”

“생각하게 두고, 기다리게 두고, 애타게 두고.”

그녀의 말투는 차분했고, 감정 하나 얹지 않은 목소리였다.

그는 그 앞에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날 밤, 유리는 침대에 누워 스스로에게 다짐을 남겼다.

[지금이 가장 위험한 시기다. 그를 무너뜨리는 것도, 내가 무너지는 것도, 동시에 시작될 수 있다.]

그리고 다음 줄엔 이렇게 적었다.

[조유리. 잊지 마. 너는 검사가 될 여자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자백을 받아낼 여자다.]

불 꺼진 방 안.

그녀는 눈을 감고 한 번 더 다짐했다.

“끝까지, 흔들리지 말 것.”

이현은 요즘, 자신이 말수를 줄이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무리해서 웃지도 않았고, 사람들 앞에서 일부러 장난을 치지도 않았다.

평소처럼 ‘놀고사는 놈’으로 보이기엔, 내면이 너무 고요했고, 너무 시끄러웠다.

그녀에게 보내는 문자 횟수는 점점 늘어났고,

답장은 여전히 짧았다. 하지만 그는 더 많은 말 대신,

그녀의 반응 하나를 곱씹는 데 하루를 쓰고 있었다.

[오늘은 뭘 하고 있어요?] [다음에 봐요.] [좋은 하루 보내요.]

“다음에, 다음에, 다음에…”

이현은 혼잣말을 중얼이며 창밖을 내다봤다.

비가 올 듯, 맑은 듯, 우울한 하늘. 그의 머릿속도 그랬다.

유리는 낮에는 형법 총론, 

밤에는 이현과의 대화를 복기했다.

검사가 되기 위한 공부는 어김없이 이어졌고,

그의 감정을 무너뜨리기 위한 대화 시뮬레이션도 계속되었다.

그녀는 노트에 이렇게 썼다.

[그는 지금, 사랑을 고백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들어서는 안 된다.

그 고백은 자백을 끌어내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자백. 그 입에서 ‘내가 그랬어’라는 말을 듣는 것이 목표였다. 

사랑은 함정이었고, 지금은 미끼를 던져야 할 타이밍이었다.

이현이 그녀를 만난 건 그로부터 며칠 후였다.

그는 이번에도 먼저 연락했고,

유리는 단 한 번의 '그래요'라는 말로 약속을 수락했다.

“보고 싶었어요.”

그는 말하자마자 민망한 듯 웃었다.

유리는 대답 대신 물만 마셨다.

이현은 손끝으로 컵을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사실… 나, 요즘 좀 이상해요.”

“어떤 식으로요.”

“당신 생각이 계속 나요. 별 일도 아닌데… 이상하게 기대하게 되고.”

그의 고백은 간절했지만, 유리는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럴 수도 있죠. 사람이니까.”

“그냥 그게 다예요?”

“그 이상은, 제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 말은 대답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현은 그조차도 받아들였다.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날 밤, 유리는 다이어리에 이렇게 적었다.

[이현 상태: 감정적 고백 직전 / 신뢰 강화 단계 / 심리 종속화 완료]

그 아래, 한 줄을 더 추가했다.

[다음 단계: 그의 과거를 꺼낼 것.]

복수는 감정이 아니라, 흐름이다.

흐름은 타이밍이고, 타이밍은 틈이다.

그의 말, 그의 눈빛, 그의 불안. 그 안에서 진짜 ‘과거’가 나온다.

그가 숨기고 있는, 혹은 말하지 않고 있는 어떤 장면들.

그리고 그 순간이 오면 그녀는 마침내, 질문을 던질 것이다.

‘그때, 당신은 어디 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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