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서해 항만의 바람은 차가웠다.
연막이 완전히 걷힌 폐창고 안에는 깨진 의자와 쓰러진 철제 선반, 총알 자국이 남은 벽면만 남아 있었다.
조금 전까지 총성이 울리던 공간은 거짓말처럼 조용해졌지만, 공기에는 여전히 화약 냄새가 짙게 남아 있었다.엘리아나는 사라졌다.
강시온은 2층 난간 쪽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조금 전까지 그곳에 사람이 있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내던 사람이.그런데 결국 놓쳤다.
시온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이거… 실패한 거죠?”
잠시 침묵.
아무도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한채린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인질 구출은 실패했습니다.”
“역시.”
“하지만 현장 체포 인원 여섯 명, 무기 확보, 조직 구조 일부 파악, 그리고 배후 세력 존재 확인.”
“그건 성공이에요?”
“절반은 그렇습니다.”
“절반 성공이면 결국 반은 망했다는 뜻 아닌가요?”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그렇습니다.”
“그걸 긍정적이라고 하나요?”
시온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바닥에는 투항했던 젊은 남성이 의료진 치료를 받고 있었다.
복면은 벗겨졌고, 앳된 얼굴이 드러나 있었다.정말 어려 보였다.
스무 살 조금 넘은 정도.
그는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었다.
시온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천천히 다가갔다.
임태건이 바로 옆을 따라붙었다.
“위험할 수 있습니다.”
“총도 내려놨는데요.”
“사람은 총보다 예측이 어렵습니다.”
“팀장님 말은 항상 무섭네요.”
남성 앞에 멈춰 선 시온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아요?”
남성은 고개를 숙인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저한테 사과했습니까.”
“네?”
“우릴 다 쓰레기 취급할 줄 알았는데…”
시온은 잠시 생각하다 어깨를 으쓱했다.
“잘못한 건 맞죠.”
남성의 몸이 움찔했다.
“근데 힘들었던 것도 맞잖아요.”
남성은 결국 얼굴을 감싸며 울음을 터뜨렸다.
“우린 진짜… 방법이 없는 줄 알았어요…”
시온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채린은 멀리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표정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시선은 이전과 조금 달라져 있었다.
그때.
오민석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각하! 큰일 났습니다!”
시온이 질린 얼굴로 돌아봤다.
“또요?”
“이번엔 좋은 쪽입니다!”
“좋은 큰일도 있어요?”
오민석은 흥분한 얼굴로 태블릿을 내밀었다.
실시간 뉴스 속보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대통령, 총격 현장 직접 방문… 무장 세력 설득 장면 화제]
[강시온 대통령 “몰라서 미안합니다” 발언 전국 확산] [SNS 반응 폭발… ‘사람 냄새 나는 대통령’] [실시간 검색어 1위 강시온]시온은 눈을 깜빡였다.
“이게 왜 찍혀 있어요?”
“기자 드론, 시민 촬영 영상, 경찰 바디캠까지 전부 퍼졌습니다!”
“그럼 보안 사고 아닌가요?”
“원래는 그런데…”
오민석은 화면을 넘겼다.
국정 지지율 실시간 예측 +18%
시온은 얼어붙었다.
“…제가 뭘 했다고요?”
한채린이 담담하게 말했다.
“솔직했고.”
“……”
“도망치지 않았고.”
“……”
“사람을 살렸습니다.”
시온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이었다.
“그걸로 이렇게 올라요?”
“원래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그 순간.
근처에서 특수부대 요원 둘이 작게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근데 진짜 들어갈 줄은 몰랐습니다.”
“저도요. 보통은 뒤에서 지휘하지 않나?”
“겁먹은 건 보였는데 끝까지 안 물러나더라고.”
시온은 괜히 민망해졌다.
“다 들리거든요…”
요원 둘은 동시에 자세를 바로잡았다.
“죄송합니다!”
“아니, 혼내는 건 아닌데요…”
오민석은 슬쩍 웃었다.
“각하 이미지 엄청 좋아졌습니다.”
“전 아직 현실감이 없어요.”
“팬카페도 생겼습니다.”
“…뭐라고요?”
“이름은 ‘시온을 믿어봐’입니다.”
“너무 빠른 거 아니에요?!”
“회원 수 벌써 만 명 넘었습니다.”
“무서워…”
“굿즈 문의도 들어왔습니다.”
“제가 아이돌이에요?”
임태건이 앞쪽에서 낮게 말했다.
“…응원봉 디자인은 조금 궁금하군요.”
모두가 동시에 그를 돌아봤다.
정적.
임태건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표정하게 덧붙였다.
“농담입니다.”
시온은 소름이 돋은 얼굴이었다.
“팀장님도 농담하실 줄 아세요?”
“오늘 처음 해봤습니다.”
“그게 더 무섭다니까요.”
오민석은 작게 중얼거렸다.
“경호팀장님이 농담하면 세계 멸망 징조라는 소문 있었는데…”
“들립니다.”
“죄송합니다.”
한채린은 여전히 태블릿으로 보고서를 정리 중이었다.
“들뜨실 때가 아닙니다.”
분위기가 바로 차분해졌다.
시온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요.”
한채린은 화면을 넘기며 설명했다.
“엘리아나는 아직 실종 상태입니다.”
화면에는 항만 지도와 도주 경로가 표시돼 있었다.
“오늘 현장에 있던 조직원들은 말단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실제 지휘 세력은 이미 빠져나갔습니다.”
“그 목소리 바뀌었던 사람?”
“네.”
“잡을 수 있습니까?”
“아직은 정보가 부족합니다.”
임태건도 말을 보탰다.
“도주 루트가 지나치게 깔끔했습니다. 내부 정보가 새어나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시온의 표정이 굳었다.
“내부에 협력자가 있다는 거네요.”
“가능성이 큽니다.”
조금 전까지 들떠 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시온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진짜 영화 같은 상황이네…”
한채린이 말했다.
“영화였다면 훨씬 편했을 겁니다.”“왜요?”
“대본이 있으니까요.”
시온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그는 지금 아무 준비도 없이 대통령이 됐다.
정치도 모르고 외교도 모르고 군사도 모른다.그런데 나라 전체가 그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복귀 차량 안.
시온은 태블릿으로 기사 댓글을 읽고 있었다.
“처음으로 대통령이 사람 같아 보인다.”
“무능할 수도 있는데 이상하게 응원하게 됨.” “저렇게 무서워하면서도 안 도망친 게 신기하다.” “비서실장이 더 무서워 보임.”시온은 마지막 댓글에서 고개를 들었다.
“한 실장님.”
“말씀하십시오.”
“지금 국민들이 한 실장님 무서워한대요.”
“다행이군요.”
“다행이라고요?”
“무서워해야 말을 잘 듣습니다.”
오민석이 작게 중얼거렸다.
“맞는 말이라 반박 못 하겠네…”
시온은 피식 웃다가 문득 물었다.
“근데 한 실장님은 안 궁금해요?”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제가 오늘 왜 그랬는지요.”
한채린은 태블릿을 덮었다.
그리고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 조용히 말했다.
“…조금은 궁금합니다.”
시온은 머리를 긁적였다.
“저도 무서웠어요.”
“알고 있습니다.”
“진짜 도망치고 싶었고요.”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근데…”
시온은 잠시 말을 멈췄다.
항만에서 봤던 엘리아나의 눈빛.
울고 있던 청년의 얼굴. 총소리 속에서도 자신을 지키려 뛰던 사람들.그 장면들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누군가는 저보다 더 무서울 것 같더라고요.”
차 안이 조용해졌다.
한채린은 잠시 시온을 바라봤다.
그리고 처음으로 아주 희미하게 눈빛이 누그러졌다.
“…이상한 사람.”
시온은 피식 웃었다.
“오늘 두 번째 듣네요.”
“아직 칭찬은 아닙니다.”
“가능성은 있다는 거죠?”
한채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주 미세하게 입꼬리가 움직인 것 같았다.
대통령 집무궁 도착 직전.
정문 앞에는 이미 수십 명의 시민과 기자들이 몰려 있었다.
“강시온 대통령님!”
“응원합니다!”
“다치신 건 아니죠?!”
“오늘 멋있었어요!”
시온은 깜짝 놀랐다.
“저 사람들 왜 여기 있어요?”
오민석이 감동한 얼굴로 말했다.
“지지자들입니다.”
“벌써요?”
“응원봉은 아직 없습니다.”
“그건 이제 안 궁금해요.”
시온은 조심스럽게 창문을 내렸다.
그리고 손을 흔들었다.
환호성이 더 커졌다.
플래시가 연달아 터졌다.
한채린이 바로 말했다.
“창문 닫으십시오. 경호상 위험합니다.”
“5초만요.”
“3초 드리겠습니다.”
“너무 짧잖아요.”
“2초.”
“독재예요?”
“1초.”
시온은 급하게 창문을 올렸다.
“진짜 독재 같아…”
집무실로 돌아오자마자 긴급 회의가 시작됐다.
대형 스크린에는 엘리아나 이동 추정 경로, 체포 조직원 진술, 국제 반응이 빠르게 떠오르고 있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하나였다.
[프랑시아 정부 공식 발표 예정]
오민석이 침을 삼켰다.
“만약 프랑시아가 우리 책임이라고 발표하면…”
“외교 전면전입니다.” 한채린이 말했다.
회의실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시온도 긴장한 얼굴로 화면을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는 지지율이 올랐다고 들떠 있었는데, 현실은 훨씬 무거웠다.
그때였다.
비서 한 명이 급히 회의실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각하! 프랑시아 측에서 직접 연락이 왔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누가요?” 시온이 물었다.
비서는 침을 삼켰다.
“프랑시아 대통령께서… 영상 회담을 요청하셨습니다.”
순간 회의실 공기가 얼어붙었다.
세계 3위 강국 정상과의 첫 통화.
그것도 납치 사건 직후.
오민석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각하…”
“네…”
“외국어 되시죠?”
시온도 창백해졌다.
“…안녕하세요밖에 안 되는데요.”
한채린은 조용히 이마를 짚었다.
“지금부터 통역 포함 긴급 회담 준비합니다.”
“잠깐만요.”
시온이 급하게 손을 들었다.
“정상회담 전에 유튜브 영어 회화라도 보면 안 됩니까?”
“10분 안에?”
“…포기할게요.”
임태건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도피 경로는 미리 확보해두겠습니다.”
“왜 다들 제가 망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아무도 부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10분 뒤.
강시온의 인생 첫 세계 정상 회담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한서준은 동생을 한번 살폈다.“얼굴 좋아졌네.”“갑자기?”“전에는 맨날 피곤해 보였잖아.”한채린은 대답 대신 보온병을 내려다봤다.한서준이 돌아섰다.“센터 들어간다.”“응. 조심해서 가.”몇 걸음 가던 그가 돌아봤다.“둘 다 무리하지 마.”강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예.”한서준은 그대로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강시온이 작게 물었다.“저도 포함해서 걱정해 주신 거 맞죠?”“욕심내지 마십시오.”한채린이 먼저 걸었다.강시온이 웃으며 따라갔다.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박은호가 보낸 메시지였다.「제이드 리 관련 최종 보고. 치료 종료 후 보호 관찰 전환. 잔여 조직 수사 협조 완료.」그 아래에는 제이드 리가 남긴 문장이 있었다.「이제는 남이 정한 길 말고 제 길로 가보겠습니다.」강시온은 화면을 잠시 바라봤다.“좋은 소식입니까?”“예.”그는 휴대전화를 넣었다.“이번에는 정말 자기 선택대로 살아보겠답니다.”한채린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후 7시 15분.대통령 관저 정원.공식 일정이 끝난 뒤 강시온은 약속대로 한채린과 저녁을 먹고 정원으로 나왔다.휴대전화가 울렸다.루카가 보낸 사진이었다.야외 카페에서 엘리아나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데이트 중입니다. 대통령님도 열심히 하세요.」강시온이 피식 웃었다.“이 사람은 연애를 해도 여전하네요.”한채린이 사진을 확인했다.“엘리아나 씨가 고생하시겠네요.”“그래도
몇 달 후.오전 8시 30분.대통령 관저 집무실.강시온은 책상 위의 보고서 첫 장을 바라봤다.「뉴(New) 세계 평화 프로젝트 제1차 공동운영회의」첫 장 아래에는 한 사람의 이름 대신 참여국들의 서명이 빼곡했다.“현재 참여국은 62개 국가입니다.”한채린이 태블릿을 확인했다.“오늘 회의 이후 추가 참여를 결정할 국가도 있습니다.”강시온이 다음 장을 넘겼다.“최고 승인권자는 없고요?”“없습니다.”“후보 평가도?”“없습니다.”“몰래 사람을 관찰하는 일도?”한채린이 그를 바라봤다.“그 질문을 매번 하실 생각입니까?”“확인할 때마다 기분이 좋아서요.”강시온이 웃었다.과거의 세계 평화 프로젝트 자료는 공개됐고.누군가를 몰래 고르고 움직이던 조직은 사라졌다.새 프로젝트는 각국이 같은 권한으로 참여하고 주요 결정과 예산을 공개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었다.사람을 선택하는 계획이 아니라 문제가 생겼을 때 함께 움직이기 위한 약속이었다.강시온은 마지막 페이지에 서명했다.“이제 조금 실감이 나네요.”“무엇이 말입니까?”“이전과는 다른 프로젝트가 시작됐다는 게요.”“시작만 했습니다.”“좋은 분위기를 오래 두는 법이 없으시네요.”“오늘 일정이 많으니까요.&rdquo
강시온이 천천히 웃었다.“그러면 한 번 더 해도 됩니까?”이번에는 한채린이 대답 대신 그의 재킷을 가볍게 잡아당겼다.두 번째 입맞춤은 첫 번째보다 조금 길었다.멀리서 사람들의 박수가 다시 터졌다.World Harmony Fest의 마지막 순서가 끝나고 있었다.두 사람이 천천히 떨어졌다.한채린이 말했다.“이제 정말 돌아가셔야 합니다.”강시온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 미소로 그녀를 바라봤다.“같이 가시는 거죠?”“예.”강시온이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한채린은 망설이지 않고 그 손을 잡았다.두 사람은 맞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행사장으로 돌아갔다.오후 7시 34분.World Harmony Fest 메인 행사장.마지막 공식 일정까지 모두 끝난 뒤였다.루카는 무대 뒤 통로에 기대 서 있었다.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아직 안 가셨어요?”루카가 고개를 들었다.엘리아나가 걸어오고 있었다.“누굴 좀 기다렸어요.”“누구를요?”루카가 웃었다.“그걸 꼭 물어봐야 알아요?”엘리아나는 잠깐 그를 바라보다 말했다.“오늘 무대 좋았어요.”“봤어요?”“네. 끝까지요.”루카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그럼 됐네요.”“뭐가요?”
“이번에는 기다리지 않게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한채린의 말이 끝난 뒤 강시온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수없이 미뤘던 말인데, 막상 허락을 받고 나니 준비했던 문장들은 필요 없었다.“좋아합니다.”한채린의 눈빛이 멈췄다.“한채린이라는 사람을 좋아합니다.”“처음에는 저도 잘 몰랐습니다.”강시온이 조금 어색하게 웃었다.“늘 옆에 계셔서 의지하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그런데 일이 없어도 보고 싶었고, 안 보이면 찾게 됐습니다.”그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대통령이라서 제 곁에 있어 달라는 말이 아닙니다.”“비서실장이라서 옆에 계셨으면 하는 것도 아니고요.”강시온은 결국 가장 쉬운 말로 돌아갔다.“그냥 제가 한채린이라는 사람 옆에 있고 싶습니다.”한채린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시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제가 너무 늦었습니까?”“많이 늦으셨습니다.”강시온의 표정이 굳자 한채린이 아주 작게 웃었다.“그래도 기다렸습니다.”이번에는 강시온이 말을 잃었다.한채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저도 처음에는 이 감정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각하를 걱정하는 것도, 찾는 것도 업무라고 생각하면 편했으니까요.”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걸 업무라고 부르는 게 더 이상해
한채린이 그를 바라봤다.“그렇게 멀리 앉으실 필요는 없습니다.”강시온이 고개를 돌렸다.“가까이 앉아도 됩니까?”“아까는 제 어깨에도 기대셨잖습니까.”강시온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그건 꽤 강력한 근거네요.”그는 한채린의 옆자리에 앉았다.어깨 사이에 손 하나 들어갈 만큼의 거리만 남았다.멀리서는 아직 박수와 음악이 이어지고 있었다.한채린이 조용히 말했다.“오늘은 이상하게 그 소리가 멀게 들립니다.”“저도요.”강시온은 정면을 바라봤다.“지금은 저쪽보다 여기가 더 신경 쓰여서요.”한채린의 손이 무릎 위에서 잠깐 멈췄다.강시온은 그 손을 잡지 않았다.대신 자신의 손을 벤치 위에 내려놓았다.한채린도 손을 치우지 않았다.둘 사이의 거리는 그대로였지만, 먼저 물러나는 사람도 없었다.서로 기대지도, 붙잡지도 않았지만 이제는 굳이 멀리 있을 이유가 없는 사이 같았다.강시온이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한채린이 그 움직임을 보고 물었다.“왜 그러십니까?”“괜히 손이 움직일 것 같아서요.”“무슨 뜻입니까?”강시온이 그녀의 손을 한번 내려다봤다.“오늘은 안 잡으려고요.”한채린의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다.“왜요?”이번에는 질문이 그녀에게서 먼저 나왔다.강시온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오후 6시 19분.World Harmony Fest 행사장 뒤편 정원.강시온은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와 정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한채린의 태블릿이 무대 뒤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정원 끝에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한채린은 난간 앞에 서서 멀리 행사장 불빛을 바라보고 있었다.늘 다음 일을 준비하던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서 있는 모습이 낯설었다.한채린이 먼저 그를 알아차렸다.“각하.”강시온이 가까이 다가갔다.“여기 계셨습니까?”“잠시 바람을 쐬고 있었습니다.”“태블릿까지 두고요?”한채린이 짧게 웃었다.“그 정도로 급하게 나온 건 아닙니다.”“저한테는 꽤 큰일처럼 보였습니다.”“왜요?”“한 실장님이 태블릿을 두고 자리를 비우는 건 거의 처음 보는 것 같아서요.”한채린은 다시 행사장 쪽을 바라봤다.멀리서 폐막을 알리는 음악이 희미하게 들려왔다.강시온은 그녀 옆에 섰다.이번에는 이유를 재촉하지 않았다.잠시 뒤 한채린이 먼저 말했다.“연설을 듣고 있으니까 조금 이상해졌습니다.”“뭐가요?”“처음 각하를 만났던 날이 생각났습니다.”강시온의 표정이 멈췄다.대통령이 된 이유조차 몰랐고, 일정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날.“좋은 기억은 아닐 것 같은데요.”“그때는 아니었습니다.&rd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