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제 명함에 왜 ‘잘생긴데 무뚝뚝함’이라고 썼죠?”이서가 오래된 명함을 뒤집자 도진이 끝내 웃음을 터뜨렸다. 서재의 작은 스탠드 아래, 이름과 연락처가 인쇄된 명함 뒷면에는 익숙한 제 글씨가 비스듬하게 남아 있었다. ‘잘생긴데 무뚝뚝함.’ 그 밑에는 작게 동그라미까지 쳐져 있었다. 이서는 명함과 남편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그의 팔뚝을 툭 쳤다.“웃지 마요. 이거 제가 직접 쓴 거예요?”“응. 행사장에서 나한테 건네면서 적었어. 이름 잘못 부른 게 미안하다더니 그 자리에서 아주 솔직하게 평가까지 해 주더라.”“남편 될 사람 앞에서 그런 무례를 했다고요?”“그땐 남편 후보도 아니었잖아. 근데 난 이미 면접 보고 있었나 봐. 당신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이서는 뺨에 손을 댔다. 기억나지 않는 자신이 꽤나 당돌했나 보다. 도진은 명함을 빼앗지 않고 그녀가 마음껏 들여다보도록 기다렸다. 종이 모서리는 여러 번 만져 낡았고, 볼펜 자국은 세월이 흘렀는데도 선명했다. 그는 그날 이후 이 명함을 버린 적이 없다고 했다. 이서가 어이없다는 듯 웃자 남편은 보물이라도 자랑하듯 서랍 속 작은 보관함까지 열어 보였다.“그럼 이거 때문에 저한테 반했어요? 얼굴 칭찬 한 줄에 넘어가다니, 대표님 의외로 쉬운 남자네요.”“얼굴은 칭찬이고 무뚝뚝함은 감점이잖아. 그래도 당신이 내 이름 다시 정확하게 부르고, 내가 한 발표 내용까지 물어봤어. 그때부터 자꾸 생각났지.”이서는 명함을 스탠드 가까이 가져갔다. 처음 발견한 문장 아래에는 작은 글씨가 빼곡했다. ‘사용자가 이 화면을 처음 보면 어디부터 누를까.’ ‘색을 고른 근거는?’ ‘실제 이용자 의견은 받았나.’ 사선으로 내려간 마지막 줄에는 ‘자료 다시 요청하기’라는 메모가 있었다. 모두 디자인과 고객의 반응에 관한 질문이었다. 웃기는 외모 평가 뒤에 이런 질문들을 숨겨 놓았다는 사실이 의외였다.“저, 그날 진짜 일하러 갔네요.”“당연하지. 내 발표 끝나고 질문이 제일 많았어. 네가 나한테 말 걸려고 핑계 만든 줄 알
“당신, 나를 언제 처음 좋아했어요?”이서가 사진을 뒤집어 든 채 묻자, 도진의 손끝이 잠깐 멈췄다. 뒷면에는 유리의 둥근 글씨로 ‘오빠 첫사랑 시작한 날’이라고 적혀 있었다. 조금 전까지 거실을 채우던 웃음이 잦아들고, 탁자 위에 펼쳐진 인화 사진들 사이로 늦은 햇살이 길게 누웠다. 이서는 사진의 앞면을 다시 들여다봤다. 디자인 행사장의 전시 패널 옆에서 어색하게 서 있는 자신과, 그쪽을 바라보는 젊은 도진이 보였다.“유리야, 이거 네가 쓴 거야?”“응. 그날 오빠가 이상하게 웃길래 찍었어. 근데 나중에 사진 정리하다 보니까 이유를 알겠더라고.”“강유리, 입이 너무 가볍다.”도진이 동생의 손에서 다른 사진을 거두려 했지만 유리는 얼른 사진들을 한데 모았다. 이서가 눈을 반짝이며 남편을 바라보자 그는 결국 두 손을 들었다. 유리는 둘만 이야기하라며 액자를 정리할 핑계로 복례를 따라 나갔다. 문이 닫히자 이서는 사진을 무릎에 올리고 그의 옆으로 바싹 다가앉았다.“자, 이제 증인도 없어요. 처음 본 순간부터 자세히 설명하세요.”“여보, 그건 아주 오래된 비밀인데. 나 지금 심문받는 거야?”“네. 혐의는 아내 몰래 첫사랑한 죄.”“유죄 인정. 지금도 매일 재범 중입니다.”이서가 웃자 도진은 손가락으로 사진 모서리를 조심스럽게 눌렀다. 처음 만난 곳은 여러 회사의 디자인 작업을 소개하던 행사장이었다. 당시 이서는 마케팅 관련 일을 하며 그 자리에 참석했고, 도진은 발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명이 지나치게 밝고 사람들이 빽빽하게 앉아 있어 누구나 긴장하던 자리였다고 했다. 도진은 당시 행사용 자료를 든 사람들 사이에서 이서를 처음 보았다고 했다. 그녀는 전시물 앞의 안내 문구가 비뚤어진 걸 발견하고 혼자 바로잡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관람객이 읽을 글씨부터 살피는 태도가 이상하게 눈에 들어왔단다.그런데 발표를 소개하는 순서에 이서가 그의 이름을 잘못 불렀다. ‘강도진’을 ‘강도전’이라고. 누군가 소리 죽여 웃었고, 이
“저 사람이 회사에서는 한 번도 안 웃는다면서요?”이서가 은빛 초대장에 끼워진 도진의 공식 사진을 가리키자, 도진은 어젯밤 거실에서 추던 춤이 생각났는지 그녀의 손부터 붙잡았다. 커플 가운을 입고 양말이 미끄러져 엉거주춤하던 남자와 사진 속 빈틈없는 대표가 같은 사람이라는 게 아무리 봐도 우스웠다.“사진 속 남자는 좀 무섭지? 그런데 실제로는 아내가 웃어 주면 꼬리가 흔들리는 편이야.”“꼬리는 어디 숨겼는데요?”“당신이 손 내밀면 바로 보일걸. 사랑에 빠진 남편은 비밀이 없거든.”초대장은 하주그룹이 후원하는 자선 행사에 부부를 초청한다는 내용이었다. 정장 차림의 참석자들이 음악에 맞춰 춤추는 시간도 있었다. 어젯밤 자신이 먼저 꺼낸 ‘진짜 무도회’라는 말이 갑자기 현실이 되자, 이서는 반듯한 글씨를 다시 읽었다.도진은 참석을 재촉하지 않았다. 사람이 많아 부담스러우면 가지 않아도 되고, 가더라도 언제든 먼저 나올 수 있다고 했다. 이서는 초대장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잠시 창밖을 보았다. 그와 함께 공개된 자리에 서는 일이 여전히 낯설었지만, 이번만큼은 다른 사람의 기대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원했다. 초대장 한쪽에 인쇄된 무도회장 사진에는 둥근 조명 아래로 사람들이 짝을 지어 서 있었다. 이서는 한때 낯설기만 했던 도진의 세계 속으로 누가 등을 떠밀어서가 아니라 자기 발로 들어가 보고 싶었다. 사진 가장자리를 매만지던 그녀가 고개를 들자 도진은 아무 말 없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갈래요. 대신 하나만 부탁해도 돼요?”“열 개도 괜찮아. 내 월급까지 내놓으라면 비서실과 상의해 볼게.”“간단한 춤 수업이요. 어제처럼 당신 발을 밟을 순 없잖아요.”그날 오후, 거실의 카펫이 걷히고 작은 스피커에서는 느린 춤곡이 흘렀다. 초빙된 강사가 발을 움직이는 순서와 손을 놓는 위치부터 설명했다. 이서는 발끝으로 바닥에 작은 선을 그으며 숫자를 셌다. 반면 도진은 첫발을 내딛기도 전에 왼쪽과 오른쪽을 헷갈리는 척했다.“여보, 남편이 큰일 났어. 오른발이
“잠옷에 양말 신고 춤추는 재벌 부부, 신고 대상 아닌가요?”이서가 내민 손을 도진이 붙잡자 거실 한복판에서 또 한 번 우스꽝스러운 발소리가 났다. 영화 속 주인공은 화면 너머 광장에서 팔을 휘두르고 있었고, 현실의 강도진은 크림색 목욕가운 자락을 걷어 올리느라 한 박자 늦었다. 앞서 그의 춤을 보고 한참 웃었던 이서는 손끝에 힘을 주어 남편을 자기 쪽으로 끌었다.“자, 영화 속 주인공보다 멋있게 해 봐요.”“여보, 난 당신이 손 내민 순간 이미 대상을 받았어. 남우주연상 말고 남편 행복상.”“수상 소감은 춤 끝나고요. 발부터 움직이세요.”도진은 정말로 격식을 갖춘 무도회에 나온 사람처럼 한 손을 등 뒤로 돌리고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고개를 드는 순간 발끝이 이서의 양말 위에 살짝 올라갔다. 이서가 앗, 하고 웃자 그는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가 이번에는 가운 끈을 밟았다. 마룻바닥 위에서 양말이 미끄러졌고, 두 사람은 서로의 팔을 붙든 채 소파 쪽으로 비틀거렸다.“미안! 발 괜찮아? 아프면 바로 앉자.”“안 아파요. 다만 우리 남편 춤 실력이 생각보다 위험하네요.”“회사에선 아무도 내 발 가까이 안 오는데. 당신이 첫 피해자야.”그가 이서의 발등을 살핀 뒤 안도하자 그녀는 자기 양말 앞코를 흔들어 보였다. 도진은 벗겨진 가운 끈을 고쳐 묶고 거실 탁자를 조금 밀어 공간을 만들었다. 넓어진 바닥에 영상의 푸른빛이 흘렀다. 과자 접시는 이미 한쪽으로 치워져 있었고, 창밖에서는 밤바람이 얇은 나뭇가지를 흔들었다.둘만 있는 집에서 괜히 공연을 앞둔 사람처럼 긴장하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이서는 발코니에서 처음 춤 비슷한 걸 추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는 도진이 품을 조금만 좁혀도 심장이 먼저 놀랐는데, 지금은 스스로 그를 당겨 놓고 다음 걸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음악보다 제 마음이 먼저 바뀌었다.도진이 다시 손을 내밀자 이서는 이번에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는 그녀의 허리 가까이에 손을 가져갔다가 눈을 맞췄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손바닥이
“로맨스 영화를 고른 사람이 그렇게 뻣뻣하게 앉아요?”이서의 물음에 도진의 어깨가 움찔했다. 조금 전 “이번에는 내가 고른 영화 봐도 돼?”라고 묻기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더니, 남자는 커플 가운의 허리끈까지 반듯하게 고쳐 매고 리모컨을 눌렀다. 과자 그릇이 치워진 거실에는 빔프로젝터의 작은 작동음만 남았고, 화면에서는 오랜만에 재회한 부부가 서툰 첫 데이트를 시작하고 있었다.“뻣뻣한 게 아니라 집중 중이야. 아주 중요한 장면이라서.”“당신이 고른 영화인데 왜 제 표정만 검사해요?”“그야 당신이 좋아할지 궁금하니까. 웃으면 나도 안심되고.”도진은 곧장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주인공들이 손을 잡을 때마다 눈동자가 이서 쪽으로 움직였다. 극 중 아내가 남편의 취향을 하나씩 물으며 다시 연애하자고 하는 장면에서는 아예 팝콘을 집던 손까지 멈췄다. 이서는 그가 자신의 반응을 기다린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영화가 싫지는 않았다. 다만 남편이 좋아해서 고른 작품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이 겪는 일과 닮아서 고른 것 같았다. 이서는 화면 아래에 놓인 그의 손을 살폈다. 엄지손가락이 무심코 가운 끈을 문지르고 있었다. 자신을 기쁘게 해 주려다 정작 자기 취향은 뒷전으로 밀어 놓는 사람. 그 다정함을 오래 받으려면 자신도 한 걸음쯤 그에게 다가가야 했다.“혹시 이거 저 때문에 골랐어요?”“응. 두 사람이 처음부터 다시 알아 가잖아. 보고 나면 당신도 기분 좋을까 해서.”그는 멋쩍게 웃으며 가운 소매를 접었다. 이서는 리모컨을 가져와 일시정지 버튼을 눌렀다. 화면 속 부부가 마주 웃는 얼굴로 멈추자 도진이 그녀를 돌아봤다.“재미없어? 그럼 다른 거 틀게. 당신 좋아하는 건 목록으로 다 준비했어.”“그 목록에 강도진 씨가 좋아하는 건 몇 개나 있는데요?”대답이 없었다. 도진은 과자 봉지를 정리하는 척하다 이서와 눈이 마주치자 손을 내려놓았다. 오늘의 커플 가운도 이서가 고른 차림이었다. 정작 이 사람은 쉬는 저녁에 어떤 영화를 보며 웃을까. 함께 사는 남편인데도
“이 넓은 집에서 영화 보는데 왜 꼭 옆에 앉아요?”이서가 소파의 빈자리를 가리키자 도진은 크림색 가운의 소매를 한 번 걷어 올리고는 아주 당당하게 그녀 옆에 앉았다. 낮에 발견한 커플 가운을 입고 영화를 보자던 약속대로였다. 두 사람의 가슴에는 이름이 수놓인 하트가 나란히 놓여 있었고, 거실 벽에는 빔프로젝터가 쏘아 올린 푸른 화면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여보, 저쪽에 앉으면 영화는 잘 보이겠지. 그런데 내 최애 배우 얼굴은 안 보이잖아.”“최애 배우가 누군데요?”“한이서. 출연작은 내 결혼생활 전편. 평점은 별 오조오억 개.”“그 배우 지금 계약 해지하고 싶은데요?”“안 돼. 내가 평생 전속 팬클럽 회장이야. 회비는 매일 사랑으로 내고 있어.”이서는 웃다가 그의 가운 깃을 바로 펴 주었다. 이름표 아래의 하트가 맞닿자 도진이 그것을 내려다보며 괜히 어깨를 붙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와 같은 옷을 입는 일이 상상조차 되지 않았는데, 이제는 이런 유치한 장난을 기다리는 자신이 더 신기했다.영화 준비는 이미 끝났다고 했다. 하지만 이서가 테이블을 보는 순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감자 과자부터 팝콘, 말린 과일, 젤리, 작은 빵과 견과류까지 그릇마다 수북했다. 소파 앞 탁자도 모자라 보조 의자 위까지 과자가 쌓여 있었다.“우리 오늘 영화 보러 온 거예요, 과자 창고 재고 조사하러 온 거예요?”“당신이 뭘 먹고 싶어 할지 몰라서 조금씩 준비했어.”“조금씩이 이렇게 많으면 많이는 얼마나 사요?”“그건 아직 비밀인데. 당신 생일에는 거실 하나 더 빌려야 할지도.”이서는 팝콘 한 그릇과 따뜻한 차 두 잔만 남겨 두었다. 도진은 남은 간식들을 정리하면서도 한 번씩 그녀를 돌아봤다. 혹시 다른 것이 먹고 싶지는 않은지 확인하는 눈이었다. 이서는 그를 붙잡아 옆자리에 앉혔다. 무엇을 준비했느냐보다 함께 앉아 있는 시간이 좋다고 말하자, 도진은 과자 봉지를 쥔 손을 천천히 내려놓았다.정리된 탁자에는 팝콘 그릇과 찻잔 두 개만 남았다. 빔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