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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착륙하지 않았다

사랑은 착륙하지 않았다

By:  깃나래Completed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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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건하는 8년째 조종사로 비행 중이었다. 심건하가 부기장에서 기장으로 승진하기까지, 나는 늘 이 남자의 곁을 지켰다. 심건하가 가장 바쁘던 해에 나는 내가 다니던 회사까지 그만뒀다. 남편의 비행 일정에 맞춰 매일 밥을 차리고, 그가 돌아올 시간을 기다렸다. 나는 딱 한 번,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언젠가 한 번만, 당신이 보는 하늘을 나도 볼 수 있을까? 정말 한 번이면 돼.” 심건하는 젓가락질조차 멈추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 “거긴 일하는 곳이야. 놀러 가는 데가 아니고.” 나는 알겠다고 했다. 그 뒤로 다시는 묻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밤이었다.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가, 심건하의 핸드폰 갤러리에서 우연히 ‘비밀 앨범’ 하나를 발견했다. 앨범 안에는 사진이 40 장 넘게 들어 있었다. 전부 조종석에서 내려다본 풍경이었다. 구름바다, 노을, 비가 갠 뒤 떠오른 쌍무지개, 높은 하늘 위로 번진 은하수. 그 사진들은 모두 같은 사람에게 보내져 있었다. 저장명은 곰돌이 이모티콘 하나. 가장 최근에 저장된 사진은 사흘 전에 찍은 아름다운 노을이었다. 비행기 날개 끝에는 반쯤 기운 해가 걸려 있었다. 심건하가 덧붙인 말은 이랬다. [오늘 것도 참 예뻐. 다음에 오면 조종실의 오른쪽 관찰석에 앉아. 거기가 제일 잘 보여.] 상대는 포옹 이모티콘 하나와 함께 짧게 답했다. [내가 휴가 낼 때까지 기다려주세요!] 나는 핸드폰을 원래 있던 자리에 내려놓았다. 비밀번호도 바꾸지 않았고, 앨범도 지우지 않았다. 날이 밝자 평소처럼 조용히 커피를 내렸다. 조용히, 끝까지 마셨다. 그런 다음 노트북을 열어 사직서를 썼고, 달운시로 가는 항공권을 한 장 예매했다. 8년이었다. 이제 더는 심건하의 비행 일정에 맞춰 밥때를 맞추지 않기로 했다. 빈집에 혼자 남아 그가 어디쯤 날고 있을지 짐작하지 않기로 했다. 심건하가 바라보는 하늘에 내가 없다면, 이제 나도 이 남자를 기다리는 대신... 나는 내가 보고 싶은 노을을 보러 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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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오늘은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심건하가 비행 캐리어를 끌고 안방에서 나왔다. 미간이 살짝 접혀 있었다.

나는 머그잔을 든 채, 심건하가 흰 파일럿 셔츠 어깨에 네 줄짜리 금색 견장을 하나하나 맞춰 다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잠이 안 와서. 커피나 한잔하려고.”

심건하는 아일랜드 식탁 앞으로 와서, 내가 막 따라 둔 따뜻한 우유 한 잔을 아무렇지 않게 들어 마셨다.

“넌 어젯밤에 또 그 쓸데없는 드라마 보느라 밤새웠어?”

“아니.”

“너 요즘 생활 패턴이 점점 엉망이야.”

심건하는 손목시계를 흘깃 보고, 늘 하던 훈계조로 말을 이었다.

“나 조금 뒤에 프랑크푸르트행이야. 왕복 나흘 걸려.”

“알았어.”

심건하는 내 반응이 지나치게 담담한 게 낯설었는지 잠시 나를 보았다.

평소 심건하가 장거리 비행을 나갈 때면, 나는 호들갑을 떨며 하루 전부터 위장약, 수면 보조제, 목베개 등 비행에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 비행 캐리어 안에 넣어 두었다.

착륙하면 꼭 연락하라고 몇 번씩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늘 나는 평소와 달리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높은 의자에 앉아 심건하를 바라보기만 했다.

“내 위장약 어디에다 뒀어?”

심건하는 캐리어 옆 주머니를 뒤적였다.

“거실장 아래 두 번째 서랍. 직접 가져가.”

심건하의 손이 멈췄다.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오늘 왜 그래? 몇 걸음 걷는 것도 귀찮아?”

“좀 피곤해서.”

심건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거실장 앞으로 갔다. 서랍을 열어 약통을 꺼낸 뒤 주머니에 넣었다.

“하루 종일 집에만 있으면서 뭐가 그렇게 피곤한지 모르겠네.”

인조석으로 된 협탁 상판 위에 놓인 핸드폰 화면이 켜졌다.

그때 톡 알림이 하나 떠올랐다.

저장명은 곰돌이 이모티콘이었다.

[선배, 프랑크푸르트 오늘 기온 뚝 떨어졌대요. 두꺼운 외투 꼭 챙기세요.]

심건하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에서 나오는 빛이 심건하의 살짝 올라간 입꼬리를 비췄다.

심건하는 한 손으로 빠르게 답장을 썼다. 캐리어 지퍼가 열린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동료가 보낸 메시지야?”

나는 그 곰돌이 이모티콘을 보며 물었다.

심건하는 화면을 잠그고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응, 진한나. 오늘 같은 노선 타. 뒤쪽 객실에 있어.”

“진한나 씨는 내선 사무장 아니었어?”

“회사에서 임시 배정했어. 신입 승무원들 좀 봐 주러 오는 거야.”

심건하의 대답은 너무 자연스러웠다. 핑계조차 오래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듯했다.

나는 곧게 선 심건하의 뒷모습을 보며, 지난밤 ‘비밀 앨범’ 속 그 많은 사진을 떠올렸다.

사진마다 심건하가 직접 비행 중에 찍은 하늘 풍경이 담겨 있었다.

심건하는 내게는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았던 비행기에서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을 진한나에게 아낌없이 나누고 있었다.

“여보.”

“왜?”

심건하는 현관에서 구두를 신고 있었다.

“다음 주 수요일이 무슨 날인지 기억해?”

심건하는 신발을 신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다음 주 수요일? 회사에서 시뮬레이터 정기 훈련 있는데. 왜?”

“아니야, 됐어.”

다음 주 수요일은 우리가 함께한 지 8년째 되는 날이었다.

8년 전 그 수요일, 심건하는 부기장 채용 통지를 받고 낡은 원룸에서 나를 안고 빙글빙글 돌았다.

심건하는 앞으로 비행할 때마다 가장 예쁜 구름을 골라 내게 보여 주겠다고 했다.

심건하는 잊었다.

“나 나간다. 착륙하면 연락할게.”

심건하가 문을 열었다.

“여보.”

나는 다시 불렀다.

심건하는 문손잡이에 손을 얹은 채 짜증을 숨기지 못했다.

“또 왜? 크루 픽업 차가 밑에서 기다린단 말이야.”

“비행 캐리어 지퍼가 덜 잠겼어.”

심건하는 아래를 내려다보고 대충 지퍼를 끌어 올렸다.

“알았어. 오늘 정말 이상하네.”

문이 닫혔다.

집 안은 다시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나는 노트북 앞에 앉아 조금 전에 써 둔 사직서를 전송했다.

그다음 예매 앱을 열어, 일주일 뒤 달운시로 떠나는 편도 항공권을 확인했다.

일주일이면 충분했다. 8년의 흔적을 말끔히 지우기에.

핸드폰이 울렸다. 내 절친 문나은의 전화였다.

[사직서 냈어?]

“냈어.”

[한번 결정했으면 이제 무르기 없기다. 심건하한테는 언제 말할 건데?]

“떠나는 날.”

나은은 전화기 너머에서 몇 초간 말을 멈췄다.

[소이야, 네 8년이 이렇게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끝나도 괜찮아?”

“응, 이제 필요 없어.”

나는 아일랜드 식탁 위에 식어 버린 우유를 보았다.

“나은아, 너는 심건하가 다른 여자를 위해 찍어 보낸 노을을 본 적 있어?”

[뭐?]

“정말 예쁘더라. 비행기 날개 위로 내려앉은 빛마저 다정하더라고.”

나는 핸드폰을 엎어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아쉽게도, 나한테 보내온 건 아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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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오늘은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심건하가 비행 캐리어를 끌고 안방에서 나왔다. 미간이 살짝 접혀 있었다.나는 머그잔을 든 채, 심건하가 흰 파일럿 셔츠 어깨에 네 줄짜리 금색 견장을 하나하나 맞춰 다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잠이 안 와서. 커피나 한잔하려고.”심건하는 아일랜드 식탁 앞으로 와서, 내가 막 따라 둔 따뜻한 우유 한 잔을 아무렇지 않게 들어 마셨다.“넌 어젯밤에 또 그 쓸데없는 드라마 보느라 밤새웠어?”“아니.”“너 요즘 생활 패턴이 점점 엉망이야.”심건하는 손목시계를 흘깃 보고, 늘 하던 훈계조로 말을 이었다.“나 조금 뒤에 프랑크푸르트행이야. 왕복 나흘 걸려.”“알았어.”심건하는 내 반응이 지나치게 담담한 게 낯설었는지 잠시 나를 보았다.평소 심건하가 장거리 비행을 나갈 때면, 나는 호들갑을 떨며 하루 전부터 위장약, 수면 보조제, 목베개 등 비행에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 비행 캐리어 안에 넣어 두었다.착륙하면 꼭 연락하라고 몇 번씩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오늘 나는 평소와 달리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높은 의자에 앉아 심건하를 바라보기만 했다.“내 위장약 어디에다 뒀어?”심건하는 캐리어 옆 주머니를 뒤적였다.“거실장 아래 두 번째 서랍. 직접 가져가.”심건하의 손이 멈췄다.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오늘 왜 그래? 몇 걸음 걷는 것도 귀찮아?”“좀 피곤해서.”심건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거실장 앞으로 갔다. 서랍을 열어 약통을 꺼낸 뒤 주머니에 넣었다.“하루 종일 집에만 있으면서 뭐가 그렇게 피곤한지 모르겠네.”인조석으로 된 협탁 상판 위에 놓인 핸드폰 화면이 켜졌다.그때 톡 알림이 하나 떠올랐다.저장명은 곰돌이 이모티콘이었다.[선배, 프랑크푸르트 오늘 기온 뚝 떨어졌대요. 두꺼운 외투 꼭 챙기세요.]심건하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에서 나오는 빛이 심건하의 살짝 올라간 입꼬리를 비췄다.심건하는 한 손으로 빠르게 답장을 썼다. 캐리어 지퍼가 열린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동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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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오후에 나는 관리사무소에 다녀왔다.이 집 출입 시스템에서 내 지문을 삭제했다.관리소 직원은 정 많은 중년 여성이었다. 내 손끝이 인식기 위에서 움직이는 걸 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사모님, 멀쩡한 지문은 왜 지우세요? 앞으로 드나들 때 불편하실 텐데요.”“이제 필요 없어서요.”나는 살짝 웃었다.집으로 돌아와 창고에서 큰 종이상자 두 개를 끌어냈다.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이 집은 꽤 넓은 평수였다. 옆으로 강이 내려다보이는 60평대 고층 아파트였고, 심건하가 한 번에 값을 치른 집이었다.심건하는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함께 견뎌 준 나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라고 했다.나는 이곳이 우리 둘의 집이라고 믿었다.이제야 알았다. 내 물건은 놀랄 만큼 적었다.드레스룸에서 내 옷은 달랑 옷장 두 칸을 차지했다.나머지는 모두 심건하의 계절별 유니폼, 정장, 코트, 운동복이었다.나는 평소 자주 입던 옷을 접어 캐리어에 넣었다.심건하가 사 주었지만 내 취향과는 전혀 맞지 않던 값비싼 이브닝드레스들은 손도 대지 않고 그대로 걸어 두었다.침대 옆 협탁에는 항공사에서 제작한 비행기 모형 하나가 놓여 있었다.심건하가 처음 장거리 노선을 마치고 돌아오며 사 온 기념품이었다.모형을 들어 올리자 아래에 사진 한 장이 눌려 있었다.4년 전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그때 심건하는 막 기장으로 승진해 세상 모든 걸 다 가진 사람처럼 반짝반짝 빛났다.나는 사진을 조심히 빼내 옆 쓰레기통에 던졌다.비행기 모형은 제자리에 돌려놓았다.저녁 무렵, 핸드폰이 짧게 떨렸다.심건하의 메시지였다.[착륙했어. 호텔 도착.]평소라면 나도 바로 답장을 보냈을 것이다. 몸이 피곤하지는 않은지, 호텔 침대는 괜찮은지 그의 안부를 물었을 것이다.오늘 내가 보낸 답은 한 글자였다.[응.]30분쯤 지나 또 다른 메시지가 왔다.[프랑크푸르트 쪽은 상당히 추워.][아, 맞다. 면세품 뭐 살 거 있어?]나는 세면대 위에 늘어져 있던 화장품 병들을 파우치에 쓸어 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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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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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그날 밤 심건하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심건하는 집에 들어왔다. 몸에서는 옅은 향수 남새가 났다.진한나가 늘 쓰던 향수였다.심건하는 차 키를 현관에 던져 놓고 차가운 눈으로 나를 보았다.“어젯밤에 성질 다 부린 거야? 이제 다 풀렸어?”나는 종이상자에 테이프를 붙이는 중이었고, 고개도 들지 않았다.“못 들은 척해?”심건하가 다가와 상자를 발로 툭 찼다.“이 잡동사니는 다 뭐 하러 이렇게 싸?”“안 쓰는 것들 좀 정리하는 거야.”심건하가 비웃었다.“네가 이렇게 나랑 밀당하는 거 참 유치해. 며칠 차갑게 굴면 내가 너한테 와서 사과하고 널 달래러 올 줄 알았어?”나는 허리를 펴고 손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달래 달라고 한 적 없어.”“그럼 지금 이 태도는 뭔데? 한나는 어젯밤 네 말 한마디 때문에 30분 넘게 울었어. 너 한나한테 사과해.”“사과 안 해.”“진짜 말이 안 통하네!”심건하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기고 소파에 앉았다.“너랑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 다음 주 수요일에 오로라 항로로 레이캬비크에 가야 해.”“네가 순순히 잘못한 거 인정하면, 원래 한나한테 주려고 했던 가족석 무료 항공권을 너한테 줄게. 약속했던 오로라 보여 준다고.”나는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오로라...’6년 전, 나는 갑상샘 결절이 발견됐다. 양성이었지만 당시엔 너무 무서웠다.심건하는 병상 옆에서 내 손을 잡고 말했다.“나으면 오로라 보러 가자. 내가 모는 비행기 타고,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밤하늘을 같이 보자.”이 약속을... 그는 자그마치 6년을 미뤘다.이제 와서 그 6년 전의 약속을, 나를 달래기 위한 선심처럼 내밀었다.심지어 그 무료 항공권은 원래 진한나에게 주려던 것이었다.“싫어?”내가 말이 없자 심건하는 눈살을 찌푸렸다.“이 노선 무료 항공권 구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 그 노선 무료 좌석이 얼마나 구하기 어려운지 몰라? 한나가 오래 부탁해서 겨우 들어준 거야. 그래도 너랑 결혼 8주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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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심건하는 미친 듯이 나를 아는 모든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가장 먼저 찾은 사람은 문나은이었다.“나은 씨, 소이 어디 있어요? 어디 갔어요?”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심건하는 다급히 물었다.나은은 전화기 너머에서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우리 대단하신 기장님, 휴가는 실컷 즐기고 돌아오실 마음이 드셨나 봐요? 오로라는 예뻤나요?”“그런 말 할 때 아니에요! 소이가 도대체 어디 있어요? 화를 내도 정도가 있죠!”[화...?]나은의 목소리가 몇 단이나 높아졌다.[심건하 씨, 머릿속엔 비행기밖에 없어요? 누가 화났다고 전화번호까지 없애요?]“소이가 나한테 고개 숙이고 들어오라고 그러는 거잖아요!”심건하는 이를 악물었다.“내가 오로라 못 보여 준 게 그렇게 큰일이에요? 아니면 내가 그 비행기표 한나한테 준 게? 내가 보상하면 되잖아요!”[아직도 소이가 왜 떠났는지 모르겠죠?]나은은 담배를 깊이 빨아들였다가 천천히 내뱉었다.[6년 전 소이가 갑상샘 결절 진단받았을 때, 당신은 장거리 비행 중이었어요. 조직검사 결과 기다릴 때 병원에 같이 있던 건 나였고요.][소이가 무서워서 울면서 당신한테 전화했는데, 당신은 곧 이륙하니까 기분 망치지 말라고 했어요.]“나는... 그때 소이가 아픈 줄 몰랐어요...”[그래요, 당신은 몰랐지. 소이가 나중에 그냥 가벼운 염증이라고 당신을 속였으니까요.][그럼 혹시 이건 알아요? 3년 전에 당신이 기장 승급 심사받던 그 무렵, 소이 엄마가 고향에서 심장 우회 수술을 받으셨어요.][소이가 양쪽을 오가면서, 낮엔 남편 챙기고 밤엔 병원에서 엄마 돌보느라 밤새우다가, 지쳐서 복도에 쓰러졌어.]전화기 너머에서 심건하의 숨이 거칠어졌다.“소이가 말 안 했어요... 정말 아무 말도 안 했다고요...”[왜 안 했을까요?!]나은이 소리쳤다.[소이가 자기 집안에 일이 있어서 같이 있어 달라고 메시지 보냈잖아요. 당신이 뭐라고 답했는지 기억해요? ][당신이 진한나 시뮬레이터 훈련 봐 주는 중이라고 말했고, 심지어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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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진한나는 심건하의 고함에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이런 심건하의 모습을 한 번도 본 적 없었다.예전 진한나 앞에서 심건하는 늘 온화하고 여유 있는 기장 선배였다.“선배, 왜 나한테 화를 내요?”진한나의 눈가가 곧바로 붉어졌다. 눈물이 떨어질 듯 말 듯 고여 있었다.“사모님이 또 오로라 일로 뭐라고 했어요? 내가 비행기표 돌려드리자고 했잖아요. 선배가 굳이 나 데려간 거잖아요. 그런데 사모님이 집 나갔다고, 왜 나한테 화풀이해요?”심건하는 진한나를 뚫어지게 보았다.진한나가 억울함에 젖은 모습을 보자, 심건하는 속이 뒤집힐 듯한 메스꺼움을 느꼈다.자신이 4년 동안 마음에 얹어 놓고 ‘챙겼던' 사람의 진짜 모습이었다.내가 떠난 뒤 진한나의 첫 반응은 미안함이 아니었다. 책임을 피하고, 나를 탓하는 것이 먼저였다.“너 소이가 떠난 걸 진작 알고 있었지?”심건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진한나에게 한 걸음씩 다가갔다.“그날 대기 구역에서 일부러 내 팔을 잡았지? 건너편에 소이가 있는 걸 보고 그랬던 거 아니야!”진한나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곧 숨겼다.“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선배, 진정해요. 사모님은 그냥 친정에 간 걸 수도 있잖아요.”“입 다물어!”심건하는 진한나 손에 있던 예비 키를 낚아챘다. 핑크색 캐리어까지 함께 문밖으로 밀어냈다.“앞으로 내 앞에 나타나지 마. 업무는 공적인 일만 해. 사적으로는 연락하지 마.”“선배 미쳤어요?”진한나는 결국 참던 가면을 벗고 비명을 질렀다.“나를 내쫓겠다고요? 그러면 앞으로 내 스케줄 누가 도와줘요? 시뮬레이터는 누가 봐 줘요? 그동안 나 도와줬던 거 다 끊으면 나는 회사에서 어떻게 버티라고요!”그 말을 듣고 나자, 심건하의 마음은 완전히 식어 버렸다.걱정도, 의문도 없었다. 잃게 될 이득에 대한 분노만 있었다.“꺼져!”심건하는 문을 세게 닫았다.진한나의 비명은 문밖에 갇혔다.그 뒤 며칠 동안 심건하는 미친 사람처럼 집 안을 대청소했다.청소업체를 불러 진한나가 만졌거나,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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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심건하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났지만 나는 내 손에 든 그릇이 흔들릴 정도로 놀라지 않았다.나는 남은 오미자화채를 마지막까지 마시고, 휴지를 뽑아 입가를 닦았다.“잘못 찾아오셨네요. 여기는 개인 주택이에요.”심건하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와, 뒤돌아 마당 문을 닫았다.이 남자는 많이 말라 있었다. 살이 많이 빠졌고, 턱에는 시퍼런 수염이 돋아 있었다. 평소 늘 빳빳하게 다려 입던 셔츠가, 지금은 구깃구깃하게 몸에 들러붙어 있었다.이 초라한 모습은, 늘 번드르르하던 기장의 겉모습과는 딴사람 같았다.“소이야, 내가 잘못했어.”심건하는 내 앞에 섰다. 목소리는 심하게 쉬어 있었고, 눈에는 핏줄이 선명했다.“진한나는 내보냈어. 진한나 물건도 다 버렸고, 앞으로 내 조종실의 관찰석은 너한테만 줄 거야. 핸드폰 비밀번호도 네 생일로 바꿨어. 나랑 집에 돌아가자.”심건하는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자신이 고쳤다고 믿는 것들을 급히 늘어놓았다.나는 담담하게 그를 바라봤다. 낯선 사람을 보듯이.“이 먼 데까지 날아와서 하는 이야기가 고작 쓰레기 다 버렸다는 이야기야?”심건하가 멈칫했다.그는 내가 화를 내거나, 울고불고하거나, 큰 소리로 따질 거라 예상했었다.이렇게까지 차갑게, 물결 하나 일지 않을 줄은 몰랐다.“아니야... 이거, 너 주려고 가져왔어.”심건하는 품에서 갈색 종이봉투 하나를 꺼내 두 손으로 내 앞에 내밀었다.예전에는 내가 아무리 매달려도 절대 내주지 않던 것이었다.“이거 회사에서 특별 승인받은 관찰석 출입증이야. 기간 제한도 없어. 네가 구름 위의 하늘을 보고 싶을 때, 언제든 나랑 같이 가자.”이어서 심건하는 주머니에서 네모나게 접힌 ‘소이에게 빚진 목록'을 꺼냈다.“이건 내가 너한테 빚진 것들이야. 결절 수술 때 네 곁에 없던 건 되돌릴 수 없지만, 제일 좋은 검진 센터 예약해 놨어.”“오로라 보러 다음 달에 바로 가자. 네가 가고 싶은 곳이면 내가 어디든 함께 갈게. 장모님 병은 서림시의 심장 전문의를 알아봤고...”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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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심건하가 달운시를 떠난 뒤로, 내 삶은 완전히 평온을 되찾았다.나은이는 톡으로 심건하가 돌아가 큰 병을 앓았다고 알려주었다.열이 40도까지 올라 병원에서 사흘 동안 수액을 맞았다고 했다.퇴원한 뒤 그는 회사에 화물 노선으로 옮겨 달라고 신청했고, 더는 여객기를 몰지 않게 됐다.[객실에 들어가서 비어 있는 오른쪽 관찰석만 보면 넋을 놓는대. 하마터면 운항 사고 날 뻔해서 회사가 화물기 쪽으로 돌렸다는 말도 있어.]나은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안타까움도 있었지만, 그보다 통쾌함이 더 컸다.진한나는 심건하라는 ‘보호막’을 잃자 회사에서 누리던 ‘특별 대우'를 모두 빼앗겼다.예전에 진한나 때문에 불편을 겪었던 동료들이 하나둘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진한나는 그 압박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회사를 그만두었다.나는 핸드폰 화면 속 문자 내용을 보면서도, 마음에 아무런 동요도 느끼지 않았다.두 사람이 어떤 결말을 맞든, 이제 내 관심 밖의 일이었다....한 달 뒤.달운시에는 장마가 찾아왔다. 가느다란 비가 돌길 위를 오래 두드렸다.우편 기사가 문밖에서 벨을 눌렀다.“한소이 씨, 택배 왔습니다.”나는 우산을 쓰고 나가, 납작한 종이 상자 하나를 받아 서명했다.보낸 사람은 심건하였다.집 안으로 돌아와 가위로 포장 테이프를 갈랐다.안에는 두 가지가 들어 있었다.첫 번째는 이미 서명이 끝난 이혼합의서와 카드 한 장이었다.이혼합의서에는 심건하가 강변의 고층 아파트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아파트 명의를 내 앞으로 이전하며, 관련 비용까지 전부 부담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카드 아래에는 쪽지 하나가 눌려 있었다.[이건 내가 그동안 모은 전부야. 비밀번호는 네 생일. 집은 이미 다 비워 뒀고, 키는 관리사무소에 맡겼어. 내가 너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보상이야.]나는 조항들을 훑어본 뒤, 이혼합의서를 따로 챙겼다.거절할 생각은 없었다. 내 8년의 청춘에 대한 대가라고 여겼다.상자 바닥에는 또 하나의 물건이 있었다.정교한 나무 오르골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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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달운시에 마침내 비가 그쳤다.나는 색이 다 바랜 운동복 재킷을 걸치고, 머리를 대충 하나로 묶은 채 마당 문을 밀고 나섰다.주머니 속 핸드폰이 한 번 울렸다.나는 자전거 자물쇠를 풀며 핸드폰을 꺼냈다.화면에 뜬 건 나은의 메시지였다. 느낌표 세 개가 붙어 있었다.[집 명의 이전 끝났대!!! 공인중개사가 바로 매물로 내놔도 된대. 얼마에 팔 거야?]그 집은... 내 과거가 있는 그곳에 남겨 둔 마지막 연결고리였다.나는 자전거에 올라탔다. 한 발은 땅을 짚은 채 한 손으로 답장을 보냈다.[시세대로 하자. 판 돈으로, 우리 둘이 여기서 게스트하우스나 하나 차리는 거 어때?]메시지를 보낸 지 10초도 지나지 않아 나은의 답장이 터지듯 날아왔다.나은은 바닥에 엎드려 절하는 판다 이모티콘을 보냈다. 머리 위에는 ‘사장님 통 크십니다'라는 글자가 떠 있었다.곧이어 음성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 내가 눌러 듣자, 나은이 낮춘 목소리로 소리치고 있었다.[사장님! 기다려! 나 지금 당장 사표 쓴다! 오늘 밤에 바로 비행기 예매할게!!]책상 밑에 핸드폰을 숨긴 채, 사무실 자리에서 웅크리고 몰래 메시지를 보내는 나은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나는 웃음을 터뜨리고 핸드폰을 재킷 주머니에 넣었다. 페달을 밟자 자전거가 골목을 따라 부드럽게 미끄러졌다.골목 모퉁이에는, 꽃 파는 할머니 둘이 접이식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앞에 놓인 플라스틱 통에는 물방울이 맺힌 백합 몇 다발이 꽂혀 있었다.할머니들이 쓰는 이곳 사투리는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느릿한 억양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졌다.할머니 한 분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고, 이 빠진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골목을 벗어나자 바다를 두른 길이 이어졌고, 시야가 한꺼번에 탁 트였다.나는 속도를 늦췄다. 바람이 귓가를 스쳐 지나가게 두었다.그 느낌은 뭐라 설명하기 어려웠다. 바람에는 지하철 객차의 붐비는 냄새도, 프린터 토너 냄새도, 사무실에 밴 지난밤 배달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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