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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_무례한 여자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4 17:04:55

"이번 패션 프로젝트, 광고팀 어디야."

이룸 그룹 본사, 32층 팀장실.

이태현은 미간을 깊게 찌푸린 채 서류를 넘기다 말고 안경을 거칠게 벗어 던졌다.

피로감이 섞여 있었지만, 여전히 날카로운 칼날 같은 눈빛이었다.

"마케팅 2팀입니다."

옆에 서 있던 한태풍 비서가 직립부동 자세로 대답했다.

태풍은 태현의 기색을 살피며 식은땀을 흘렸다.

"형편없네."

태현의 메마른 입술 사이로 서늘한 평가가 흘러나왔다.

"팀장님이 승인하신..."

"내가 승인한 기획안이 이거라고?"

태현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이전에 올라온 기획안이랑 내용이 완전히 달라졌잖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류 뭉치가 책상 위로 던져졌다.

"디자이너도 바뀌고, 콘셉트는 작년 거 그대로 답습하고 있군. 이게 이룸의 이름으로 나갈 퀄리티인가?"

손가락이 책상을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탁, 탁, 탁.

사형 선고처럼 울리는 그 소리가 정적뿐인 방 안을 채웠다.

"또 이 본부장 쪽에서 손댄 모양이지."

태현의 냉소적인 물음에 태풍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상대는 이영돈 본부장.

양자인 자신과는 달리 진짜 이룸의 피를 가진 자.

"그래서 공모전은?"

화제를 전환하는 태현의 목소리에 무게가 실렸다.

"이번에도 디자이너 S가 수상했습니다. 압도적인 점수 차이였습니다."

'디자이너 S.'

얼굴도, 나이도, 성별도 밝혀지지 않은 채 오직 천재적인 감각으로 업계를 뒤흔드는 익명의 인물.

태현은 그 디자이너를 반드시 영입해야 했다.

썩어가는 기획팀에 새 피를 수혈할 수 있는 건 그 방법뿐이었으니까.

"연락은."

"여전히 안 됩니다."

태현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건 통제 불가능한 변수였다.

"메일은 확인하지만, 데뷔 제안만 들어가면 답이 없답니다."

태현이 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대며 말했다.

"연락처 구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앞에 데려와."

그때였다.

정적을 깨고 책상 위 휴대폰이 진동했다.

화면에 뜬 이름은 예비 신부라 불리는 여자, '백가은'이었다.

태현은 잠시 서늘한 눈으로 화면을 내려다보다가, 귀찮다는 듯 전화를 받았다.

"네, 이태현입니다."

[안녕하세요. 백가은입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예상보다 훨씬 차분했고, 어딘가 당당했다.

태현은 대답 없이 침묵을 지켰다.

상대를 파악하려는 본능적인 탐색전이었다.

[상견례 전에 뵙기로 했던 거, 오늘 어떠세요?]

태현의 눈썹이 움찔하며 올라갔다.

"...오늘이요?"

[안 되면 괜찮아요.]

상대의 말투에는 아쉬움이 전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안 된다고 말해주길 간절히 바라는 뉘앙스마저 느껴졌다.

태현은 묘한 불쾌감을 느끼며 옆에 서 있는 한태풍을 흘끗 봤다.

태풍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수신호를 보냈다.

오늘 오후부터 저녁까지 빡빡하게 들어찬 스케줄.

하나라도 어긋나면 연쇄적으로 터질 일정들이었다.

절대 안 된다는 무언의 압박.

태현은 남의 제안에 끌려다니는 건 죽기보다 싫은 성미지만, 상대가 던진 이 무례하고도 당돌한 공을 그냥 넘기고 싶지 않았다.

"...아니요. 오늘 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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