تسجيل الدخول‘의사? 갑자기 왜 의사를 부르라는 거지?’숨을 들이쉴 때마다 짙은 치자꽃 향이 가슴을 채웠다.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던 강지연은 문득 이곳이 해성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여기는 베르덴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다시 돌아온 상태였다.그렇다면 그 긴 시간은 전부 꿈이었을까.현실과 꿈의 경계가 흐릿하게 겹쳤다.문이 열리고 홍순자와 강시우가 함께 들어왔다.“이제야 눈 떴구나, 지연아. 이번엔 정말 놀랐어.”홍순자의 목소리가 떨렸다.“미안해요, 할머니.”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던 탓인지 목이 잠겨 있었다.“괜찮아. 깨어난 게 어디냐.”홍순자는 그녀의 손을 토닥이며 물었다.“어디 아픈 데는 없니? 속은 괜찮아?”강지연은 고개를 저었다.아픈 곳은 없었다. 다만 극심한 피로가 밀려왔다. 한여름 낮잠을 너무 오래 자고 난 뒤처럼 몸이 무겁고 맥이 빠진 느낌이었다.“급한 거 없다. 조금 더 누워 있어. 뭐 먹고 싶니? 할머니가 해줄게.”먹고 싶은 건 없었다.강지연은 침대 옆 수액 거치대에 아직 반쯤 남은 링거병이 매달려 있는 걸 발견했다. 그제야 잠드는 동안 또 영양제를 맞았다는 걸 알았다.“할머니, 저 이번엔 얼마나 잔 거예요?”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홍순자는 잠시 멈칫했다. 사실대로 말하면 괜히 강지연이 놀랄까 봐 걱정되었다.“별로 안 잤어. 며칠이야.”“며칠이요?”‘꿈속에서는 몇 달은 산 것 같았는데.’삼십 분쯤 뒤 도착한 의사는 기본 검사를 마친 뒤 고개를 끄덕였다.“현재로선 특별한 이상은 없어 보입니다. 그래도 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한 번 더 받는 게 좋겠습니다.”“네, 감사합니다.”강시우는 의사를 배웅하러 나갔고 강희라와 홍순자는 침대 양옆에 앉아 복잡한 표정으로 강지연을 바라봤다.깨어난 건 기쁜 일이었지만 원인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더 답답했다.다시 방으로 돌아온 강시우는 침대 끝에 서서 걱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강지연은 주변을 둘러보며 피식 웃었다.“다들 그렇게 서 있지 마
결국 다시 홍순자를 해외로 모시는 이야기로 돌아왔지만 할머니는 끝내 고개를 저었다.이유는 단 하나였다. 강지연을 혼자 둘 수 없다는 것.강지연이 국내에서 학교를 마친 뒤 따라가겠다고, 잠시만 먼저 가 계시라고 아무리 설득해도 소용이 없었고 강시우가 국내 일을 모두 정리하고 강지연에게 위험한 일 없게 하겠다고 맹세해도 소용없었다.결국 고모와 강시우는 어떻게 해도 할머니를 설득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그래서 강시우는 다른 계획을 세웠고 그동안 줄곧 해성 곳곳을 다니며 사정을 살폈다.“집은 봐뒀어요. 내일 직접 가 보죠. 할머니 마음에 들면 바로 계약할게요.”그 말에 강지연은 주소를 물었다. 그리고 그 주소를 듣는 순간 멈칫했다.전생에서 오빠가 샀던 바로 그 집이었다. 이번에는 더 이르게, 앞당겨진 셈이었다.큰 별장이라는 말에 홍순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그렇게 큰 집은 필요 없어. 그냥 여기서 사는 게 편해. 텃밭도 있어서 채소도 심을 수 있고 얼마나 좋아. 무엇보다 도심 외곽이라 동네가 조용해.”“새집도 마당 넓어요. 꽃도 채소도 다 키울 수 있어요.”강시우가 웃으며 말했다.“그리고 할머니랑 지연이 둘만 사는 거 아니에요. 저랑 엄마도 자주 와서 살 거예요.”“너희도 함께 산다고?”홍순자의 눈이 반짝였다.“요즘 국내 투자 환경이 좋아요. 엄마, 저 여기 지사 하나 두는 걸 진지하게 생각 중이에요.”강시우는 다시 홍순자를 바라보았다.“그래서 자주 왔다 갔다 해야 할 것 같아요.”그 말에는 운전기사, 경호원, 요리사, 정원사까지 함께 머무르게 될 거라는 뜻도 자연스럽게 담겨 있었다.“엄마.”강희라가 홍순자 곁에 바짝 다가앉으며 말했다.“그동안 너무 고생하셨어요. 이제는 우리가 효도할 차례예요. 그리고 시우가 이곳에 투자할 생각이라면 지낼 집도 필요하잖아요.”홍순자는 한참 생각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좋지. 대신 내 이름으로는 하지 마라. 누가 사면 그 사람 이름으로 해.”“그건 걱정하지 마세요.”그날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이미 서른을 넘겼고 뜨겁게 사랑해도 보고 처절하게 미워도 해봤다. 그러니 이제는 말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온하준.”강지연이 단호하게 말했다.“난 돌려 말하는 거 안 좋아해. 내가 네 뜻을 잘못 이해했을 수도 있어. 그래도 내가 이해한 대로 말할게.”잠깐 숨을 고른 뒤 또렷한 목소리로 덧붙였다.“예전의 강지연은 너를 좋아했을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아니야.”온하준의 눈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 순간 강지연은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는 걸 알았다.‘참 이상하지, 온하준. 왜 너는 늘 강지연이 너를 사랑하지 않을 때야 강지연을 사랑하게 되는 걸까.’“왜?”그는 한 번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끝장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오늘은 꼭 답을 듣고 말겠다는 얼굴이었다.“말했잖아.”강지연이 부드럽게 웃었다.“지금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았다고. 그리고 그게 너는 아니야.”그 순간 휴대전화 화면이 밝아졌다. 도착했으니 내려오라는 강시우의 문자였다.“이만 갈게.”강지연은 빵 봉투를 들고 등을 돌렸다.온하준은 그 자리에 서서 그녀의 뒷모습을 끝까지 바라봤다.길가로 나가는 모습, 차 문을 여는 모습, 그리고 올라탄 차.낮은 조명이 비친 차체는 한눈에도 값비싸 보였고 운전석에는 또래로 보이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소년의 자존심이 마지막 질문을 삼키게 했다.지금의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서냐고.하지만 그 질문은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집에 돌아와서도 그 물음은 머릿속을 맴돌았다.온하준은 책장에서 시집 한 권을 꺼냈다. 책을 펼치자 한 장의 책갈피가 끼워져 있었다.오동잎을 말려 정갈하게 다듬은 나뭇잎이었다. 그 위에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그는 그 잎을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이 실린 페이지에 끼워 두었다.한때 그는 이 시가 자신의 삶 같다고 여겼다. 홀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끝없이 이어진 어둠을 바라보는, 외롭고 말 없는 사람.온하준은 잠시 망설이다가
어딘가 토라진 기색이 스며 있어 강지연은 괜히 그가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닐지 마음이 쓰였다.그녀는 정말 그날 계단에서 이승우와 나눴던 대화를 의식해 받아친 게 아니었다. 다만 자신도 모르게 그의 영향을 받은 것뿐이었다.과거의 온하준은 늘 그녀의 선물을 화려하기만 하고 실속 없는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무의식중에 그렇게 말해 버린 것이다.“그날...”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강지연은 계단에서의 대화를 들은 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고 온하준은 혹시 들은 거냐고 묻고 싶었다.하지만 강지연은 문득, 굳이 풀 필요도 없는 오해라는 생각이 들어 화제를 돌렸다.“온하준.”그녀는 트레이에 담은 빵을 안고 계산대로 다가섰다.“계산해 줘.”그 한마디에 온하준은 하고 싶던 말을 다시 속으로 밀어 넣을 수밖에 없었다.빵을 하나씩 집어 스캔하고 포장지에 담으며 화면에 찍히는 가격을 보는 순간, 온하준의 가슴에 억울한 감정이 차올랐다.언제부터 두 사람의 관계가 빵을 사고파는 사이가 되었는지, 왜 이렇게까지 멀어졌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그 수정구, 원래 나한테 주려고 만든 거지?”마침내 억눌려 있던 감정이 정점에 이르자 그는 무심코 그 말을 던졌다.강지연은 봉투를 정리하던 손을 멈췄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아니.”그는 믿지 않는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렸다.늘 무심한 얼굴을 하던 온하준은 정말 아플 때일수록 먼저 웃는 버릇이 있었다. 자신만이 아는, 코끝이 시린 웃음이었다.“내 거였다는 거 다 알아. 강지연, 난 그냥 이유가 궁금한 거야.”“무슨 이유?”강지연은 휴대전화를 한 번 확인했다. 강시우가 거의 도착한 모양이었다.“왜 갑자기 달라졌어?”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조심스럽게 만 원을 건네며 문제 풀이를 부탁하던 강지연은 어디로 갔을까.예쁜 나뭇잎 하나만 주워도 참지 못하고 그와 나누고 책갈피로 만들어 예쁜 글귀까지 적어 건네던 강지연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누가 데려간 걸까.“이제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았
“버스에 그렇게 사람이 많은데 뭐가 무서워.”강지연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정류장에서 건물까지 이어진 길에는 오동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고 퇴근 시간의 인파가 끊임없이 오갔다. 사람들 틈을 따라 두 사람은 나란히 걸었다.“강지연...”온하준은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가 밀려드는 사람들에 가로막혀 말을 삼켰다. 건물 앞에 도착할 때까지 그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강지연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전혀 모른 채 1층 빵집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나 이만 올라갈게. 잘 가.”온하준은 그녀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목구멍까지 올라온 수많은 말을 끝내 삼켰다.두 시간이 지나고 강지연이 연습을 마치고 내려왔다. 강시우에게 데리러 와 달라고 연락은 해 두었지만 길이 막혀 한 이십 분쯤 늦는다고 했다.그녀는 건물 앞에 잠시 서 있었다. 길가에서 기다릴지, 아니면 안으로 들어가 있을지 고민하던 찰나 온하준과 시선이 마주쳤다.“아르바이트 아직 안 끝났어?”그녀가 가볍게 물었다.“곧 끝나.”온하준은 가로등 불빛에 비쳐 은은히 빛나는 그녀의 이마 위 땀방울을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강지연은 춤출 때면 머리를 단정하게 올려 묶어 목선이 훤히 드러났다. 그 모습은 마치 한 마리의 백조처럼 단정하고 우아했다.“차 기다려?”“응.”“얼마나 남았어?”“한 이십 분.”“그러면 안에 들어와서 앉아 있어. 밖에 너무 덥잖아.”온하준은 콧등까지 땀이 맺힌 강지연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음... 그래.”해는 이미 졌지만 열기는 가시지 않았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더운 공기에 숨이 막힐 듯해 강지연도 고개를 끄덕였다.에어컨만 쐬고 나가기도 애매해 그녀는 빵이라도 몇 개 사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트레이를 들었다.고모와 오빠가 집에 있고 두 사람 모두 빵을 좋아하니 많이 사도 낭비는 아닐 터였다.“강지연.”가게 안에는 다른 손님이 없었고 그날 근무자는 온하준 혼자였다. 그는 빵을 담고 있는 그녀 곁을 맴돌며 말을 걸었다.“응?”강지연은
이제 버스 안에서 남자가 휴대전화를 훔쳤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사람들은 앞다투어 강지연을 거들며 휴대전화를 꺼내 보라고 재촉했고 할머니도 다급한 목소리로 애원했다.“내 휴대전화 좀 돌려줘요. 거기 우리 애들 사진이 다 들어 있는데...”남자의 얼굴이 점점 굳어 갔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버텼다.“안 훔쳤다니까! 내가 안 훔쳤다는데 다들 왜 이래? 지금 여기서 몸수색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당신들한테 그럴 권리가 있어? 이건 명예 훼손이라고!”그는 갑자기 온하준을 향해 소리쳤다.“그리고 넌 함부로 내 손목을 꽉 잡고 안 놓았지! 이것도 폭행으로 고소할 거야. 합의금 물어내야 할 걸?”“좋아요.”온하준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그러면 지금 하세요. 기사님, 문 좀 열어 주세요. 바로 내려서 고소하러 가죠.”“어딜 가겠다는 거야!”남자는 다시 손목을 비틀며 빠져나가려 했지만 온하준의 손은 여전히 단단했다.“경찰서로 가야죠.”온하준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저를 폭행으로 고소하신다면서요. 같이 가죠.”남자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끝까지 허세를 부렸다.“그래! 가자면 못 갈 줄 알아? 가자고! 내려!”속셈은 분명했다. 버스에서 내리면 상대는 학생 하나뿐이니 틈을 봐 도망치겠다는 생각이었다.그 순간,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승객들이 한꺼번에 외쳤다.“그래요! 다들 내려서 같이 가요! 저 사람 신고합시다!”남자의 얼굴이 완전히 굳었다.운전기사는 잠시 더 달리다가 방향을 틀어 한 정거장에 버스를 세우며 말했다.“조급해하지 마세요. 여기서 내리면 바로 경찰서입니다. 다들 같이 내려서 신고하세요.”창밖에는 정말로 경찰서 간판이 보였다.“기사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소란스럽게 해서 죄송합니다. 저희만 내릴 테니 다른 분들은 그대로 가세요.”온하준의 말에 한 중년 남자가 손을 저으며 나섰다.“그건 안 되지. 어른으로서 학생 혼자 저런 놈 상대하게 둘 수는 없어. 같이 내려서 경찰서로 갑시다.”“맞아요. 같이 가요.”결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