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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Author: 네입클로버
그 과장된 몸짓에 안에서는 웃음이 그칠 줄을 몰랐다.

이하나는 온하준의 옆에 딱 붙어 앉아 아예 그의 어깨에 기대 쓰러지듯 깔깔 웃고 있었다. 그리고 온하준은 그런 와중에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김도윤이 웃으면서 몸을 돌렸다.

“하준아, 이게 딱 네 와이프...”

‘맞지?’라는 말은 끝내 나오지 못했다.

문 쪽에 서 있는 강지연을 본 순간, 그의 얼굴에 걸려 있던 웃음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형... 형수님...”

모두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전부 얼어붙었다.

이하나는 온하준의 어깨에서 몸을 떼고 일어나 웃으면서 말했다.

“어, 여기서 소문만 듣던 하준이 아내분이구나? 안녕하세요, 얼른 들어와요. 저는 하준이 절친이에요.”

강지연은 룸 안에 있는 사람들을 쭉 훑어봤다. 가슴속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온하준이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쪽으로 걸어왔다.

“지연아, 너 어떻게 왔어? 다들 그냥 장난친 거야, 신경 쓰지 마.”

강지연은 온하준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가 이렇게까지 낯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사람들이 자기 아내를 비웃고 있을 때, 그가 서 있는 자리는 아내 곁이 아니라 그 사람들 쪽이었다.

“맞아요, 형... 형수님, 미안해요. 나 그냥 장난 좀 쳐 본 거예요. 화 풀어요.”

김도윤이 잔을 내려놓으며 사과했다.

“지연아!”

온하준이 다가와 그녀를 끌어안으려 했다.

그 순간, 강지연은 문득 조금 전 온하준의 어깨에 기대 웃던 이하나를 떠올렸다. 욕실에서 스스로를 위로하던 그의 손을 떠올렸다. 그리고 절정의 순간, 그가 목이 터져라 불렀던 ‘하나’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그 생각이 스치자, 지금 자기 허리로 뻗어 오는 이 손이 갑자기 견딜 수 없을 만큼 더럽게 느껴졌다.

그녀는 황급히 몸을 피했다.

“지연아.”

허공만 허우적대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던 온하준은, 그런 반응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대신 사과할게. 화 좀 풀어, 응? 집에 돌아가면 선물 사 줄게.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뭐든 말해.”

이하나는 새침하게 눈을 부릅뜨고 김도윤을 째려보았다.

“하준이 와이프까지 화나게 해 놓고 아직도 사과가 안 나와? 너는 진짜 맨날 그렇게 둔하고 털털하니까 아무 말이나 해도 되는 줄 알게 만드는 거야. 다른 여자들도 다 나 같은 줄 알아? 대충대충 아무 말이나 해도 안 삐지는 줄 아냐고.”

강지연은 속으로 비웃었다.

‘이 멘트 진짜 클래식하네...’

하지만 눈앞의 남자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다들 그 말에 오히려 더 즐거워 보였다.

한 소리 들은 김도윤은 억울하다는 듯 입을 내밀었다.

“나 이미 사과했잖아! 나도 형수가 갑자기 들이닥칠 줄은 몰랐어. 진짜 그냥 장난친 거라니까.”

“장난이면 당하는 사람도 웃겨야 장난이죠.”

강지연은 온몸을 떨면서도 그 말을 끝까지 했다. 지금 그녀가 짜낼 수 있는 모든 용기를 다 끌어모은 말이었다.

그녀는 절뚝거리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온하준과 어울릴 자격이 없다고, 그 인식이 지난 5년 동안 마치 저주처럼 그녀를 옭아매고 있었다.

단 한 번이라도 자신을 의심하거나 깔보는 눈빛이 느껴지면, 그녀는 언제나 뒷걸음질 치기만 했다. 제 집 속으로 쑥 숨어버려 한참 동안 나오지 못하고, 혼자 상처를 핥으며 버텼다.

김도윤은 중얼거렸다.

“그래서 저 사과 했잖아요...”

“저... 저는 못 받아들이겠어요...”

강지연의 떨림은 더 심해졌다.

누군가의 조롱 앞에서 이렇게 정면으로 맞받아치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김도윤이 또 투덜거렸다.

강지연도 자신이 어떻게 하길 바라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남편 친구들이 자기 다리를 흉내 내며 비웃는 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고, 그런 상황에서 남편이 그들 편을 들어서 있는 모습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됐어, 다들 그만해.”

온하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와 김도윤 사이에 서서 둘을 가로막았다.

이 모임에서 그는 중심이었다.

대학교를 졸업한 뒤, 바로 이 무리를 이끌고 여기까지 올라온 것도 그였다.

타고난 사업 감각과 실행력으로 지금 회사의 판을 키운 주역이 바로 온하준이었다. 그래서 그가 말만 꺼내면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순식간에 입을 닫았다.

“강지연.”

온하준의 눈빛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담담했다.

조금 전 영상 속, 이하나를 바라보며 눈을 반짝이던 그 눈과는 완전히 다른 빛깔이었다.

“다들 나랑 오래 알고 지낸 친구들이야. 악의는 없어. 그냥 장난 좀 심하게 친 거뿐이야. 내 얼굴 좀 봐서라도,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 줄래? 기사 불러서 집에 데려다줄게.”

“형수님...”

이하나는 입술을 내밀며 온하준의 옆으로 바짝 다가섰다.

“정 화낼 거면 저한테 화내요. 하준이한테 화내지 말고요. 오늘 이 자리도 제가 다시 돌아와서 만든 자리잖아요. 하준아, 아내분 같이 앉아서 밥 먹게 해. 내가 형수님께 한 잔 올리면서 제대로 사과할게.”

‘하, 정말 가지가지 하네.’

“미안한데요.”

강지연은 온하준을 똑바로 바라봤다.

이하나가 이런 말을 거리낌 없이 내뱉을 수 있게 된 건, 전부 그가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줬기 때문이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쓰라림을 겨우 눌러 삼키며 그녀가 말했다.

“저는 술 안 마셔요. 특히 연극 소품 같은 술은 더더욱.”

이하나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온하준을 올려다봤다.

“하준아, 나... 나 욕먹은 거야? 나 보고 하는 말이지? 나...”

곧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은 표정으로 겨우 버티는 척 연기했다.

“됐어, 괜찮아. 형수가 나를 오해한 거야. 내가 한 소리 좀 듣는 건 상관없어. 하준아, 형수한테 너무 뭐라 하지 마, 응?”

온하준의 표정이 굳어졌다.

“강지연, 하나가 이렇게까지 신경 써서 말하는데 네가 그렇게까지 날카롭게 받아칠 필요가 있나?”

‘신경 써 준다고?’

이 말을 진심이라고 믿는 건 세상 가장 순진한 바보뿐일 것이다.

온하준이 바보일까?

아니다.

그는 다 알았다. 다 알면서도 옳고 그름 사이에서 철저하게 ‘편애’를 택했을 뿐이다.

가슴이 기우는 쪽이 곧 정답이 되는 법이었다.

강지연은 눈앞의 두 사람, 그리고 그들 뒤에 서 있는 몇 명의 얼굴을 차례로 바라봤다. 그녀와 그들 사이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깊은 골짜기가 하나 놓여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같은 편이었다. 한 줄로 서 있는 ‘우리 편’이었고 단단히 묶인 하나의 집단이었다.

반면 그녀는 그들의 세계에 잠깐 잘못 발을 들여놓은 이방인에 불과했다. 아니, 애초에 발을 들여놓은 적조차 없었는지도 모른다. 바깥 가장자리에서 맴도는 것조차 이미 지나치게 넘치는 은혜였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겨우겨우 눈물을 참으며 작게 코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돌아서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등 뒤로 이하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준아, 형수님은...”

“괜찮아, 원래 착한 애야. 내가 나중에 달래면 돼. 자, 계속하자. 신경 쓰지 마.”

겉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슬쩍 고개를 돌려 강지연의 뒷모습을 한 번 더 확인했다. 그러고는 운전기사에게 메시지를 보내 그녀를 따라 나가 보라고 지시했다.

강지연은 사실 침착하게 걷고 싶었다. 흔들리지 않는 걸음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녀의 다리는 감정이 격해질수록 더 심하게 흔들렸다.

지금 이 순간, 이렇게 비틀거리며 허둥대는 모습이 조금 전 김도윤이 흉내 내던 바로 그 모습과 얼마나 닮아 있을까.

아마 자기 등이 사라진 뒤에도 그들은 계속 웃으면서 그 장면을 떠올릴 것이다.

그녀는 눈물을 거칠게 한 번 훔쳤다. 그리고 더 빠르게, 더 심하게 흔들리는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온하준의 운전기사가 허겁지겁 뒤따라 나왔을 때 식당 앞에는 이미 강지연의 그림자도 남아 있지 않았다.

기사는 돌아가 그 사실을 온하준에게 알렸다.

온하준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강지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 그리고 곧바로 통화를 끊었다.

다시 걸었을 때는 이미 전원이 꺼져 있었다.

애초부터 마음이 개운치 않았던 김도윤이 이때를 틈타 입을 열었다.

“하준아, 형수 그 성격 진짜 너니까 봐주는 거다. 너 지금 어느 정도 위치고, 이미지가 어떤데. 너랑 결혼만 하면 누가 집에서 너를 안 모시고 살겠냐. 그런데 형수는 이렇게 얼굴까지 붉혀 가면서 너한테 성질을 내네. 네가 너무 착해서 그래.”

온하준은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김도윤의 말에 거들며 나섰다.

“도윤이 말이 맞지. 네가 그동안 형수랑 집을 위해 얼마나 애썼는데. 밖에서 그렇게 고생하고, 힘들게 일하고, 다 그 집 때문이잖아. 그걸 이해해 주지도 못하고, 챙겨 주지도 않고, 이런 일 하나로 눈 흘기고 나가 버리면 그게 말이 되냐?”

“그러니까 말이야. 네가 걔랑 결혼해 준 것만으로도 이미 하늘이 내린 은혜지. 아니었으면 다리 저는 애를 누가 데려가? 네가 아니면 나중에 남는 건 그냥 장애인하고 결혼하는 길밖에 없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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