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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hor: 네입클로버
온하준이 결국 금기를 깨고 술을 마셨다. 목소리만 들어도 이미 조금 취한 게 느껴졌다. 하지만 온하준이 이렇게까지 큰 소리로 웃고 떠드는 사람이었나?

강지연이 알고 있는 온하준은 이랬다.

고등학교 때 그는 차갑고 무뚝뚝한 수재였다. 문제집을 풀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운동장에서조차 그를 좋아하는 여자애가 물을 건네도 한 번도 받아 준 적이 없었다.

나중에 자신의 남편이 된 온하준은 더더욱 공손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감정 기복이란 게 전혀 없는 사람 같았다. 웃지도 화내지도 않고 언제나 담담했다. 너무 담담해서 가끔 그의 손가락에 스치기라도 하면 체온마저 차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영상 속 카메라는 사람들 얼굴을 하나씩 훑고 지나갔다.

그 사이로 살짝 취기가 오른 온하준이 보였다. 눈동자에는 빛이 번쩍였고, 그는 잔을 들고 카메라를 향해 웃으며 외쳤다.

“이하나, 돌아온 거 환영한다!”

그제야 알았다.

그도 웃을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걸. 그에게도 저렇게 뜨거운 순간이 있다는 걸. 그도 여자의 이름을 이토록 다정하게 불러 줄 줄 안다는 걸.

다만 그 웃음을 그녀에게는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고, 그 뜨거움을 그녀를 향해 준 적도 없으며, 그 입에서 그녀의 이름이 다정하게 나온 적은 더더욱 없었다.

“사모님, 일어나셨어요?”

문밖에서 진경숙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지연의 하루는 늘 정해진 패턴대로 흘러갔다.

진경숙은 아직 그가 일어날 기척이 없자, 혹시 도움이 필요할까 봐 일부러 물어보는 것이다. 어쨌든, 강지연의 다리에 문제가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강지연은 휴대폰을 옆에 내려놓았다.

“일어났어요, 바로 나갈게요.”

말을 꺼내는 목소리가 쉰 데다가 코끝이 막힌 것처럼 뭉개져 나왔다.

아침 식탁에는 진경숙이 만든 만두가 올라와 있었다. 하지만 강지연은 하나를 겨우 먹고는 더 이상 넘어가지 않았다.

“사모님, 점심하고 저녁은 뭐로 챙겨 드릴까요?”

진경숙이 우유 한 잔을 건네며 물었다.

“아무거나요, 그냥 먼저...”

그녀는 예전처럼 온하준이 좋아하는 걸 먼저 준비하면 된다고 말하려다가 뒷부분을 꿀꺽 삼켜 버렸다.

진경숙은 그래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단번에 알아들었다. 매일 반복되는 대화였으니까. 그래서 서둘러 말했다.

“대표님께서 오늘은 집에서 밥 안 먹는다고 하셨어요. 약속 있으시대요.”

강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집에 들어와 밥을 먹을 리가 없었다. 조금 전 이미 SNS에서 봤으니까.

이하나는 앞으로 일주일 동안 누가 밥을 사 주는지, 어디에서 무엇을 먹을지, 일정표처럼 차곡차곡 올려놨다.

[역시 학생 때의 감정이 제일 진짜야. 나는 이렇게 많은 오빠들한테 예쁨받는 귀여운 막내 시절로 돌아간 거라고요!]

낮 시간 동안, 강지연은 보통 두 시간 정도 영어 공부를 하고, 그 뒤에는 몇 시간 동안 예술 이론을 공부했다.

스스로에게 할 일을 만들어 주지 않으면 이 끝도 없이 긴 시간을 도대체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평생을 다 써서 한 사람의 귀가만을 기다리며 보낼 수는 없지 않겠나?

하지만 강지연은 이미 한 번 그렇게 기다려 본 적이 있었다.

그 기다림의 맛은 너무나도 괴로웠다. 그렇지만 오늘은 이전과 조금 달랐다.

이번에 받은 메일은 학교에서 내준 마지막 합격 통지에 가까운 것일 테고, 그녀는 서둘러 등록 의사를 밝혀야 했다.

그래서 오늘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학교에 등록금을 결제하는 일이었다.

휴대폰 화면에 카드 결제 완료 알림이 떠올랐을 때, 그녀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온하준에게서 떠나게 될 날이 또 하루 가까워졌다.

해 질 무렵, 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나갈 채비를 했다.

진경숙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사모님, 어디 가세요?”

온하준이 함께하지 않는 이상, 강지연은 거의 밖에 나가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 대학교 친구가 여기 근처에서 공연을 해서 잠깐 얼굴 보자고 했어요.”

강지연은 그렇게 말했다. 실제로는 시험장 근처 호텔에서 묵을 생각이었다.

내일 그녀에게는 영어 시험이 있었다. 그것도 아침 시험이었다.

아침에 집에서 출발했다가는 혹시라도 길이 막혀 시험장에 늦을까 봐 걱정되는 상황이었다.

마지막으로 시험을 본 건 몇 달 전이었다. 그때는 원하는 점수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유학 지원 마감 시기가 다가와 어쩔 수 없이 먼저 지원서를 넣었고, 설마 붙을 줄은 생각도 못 한 채 며칠 전 다시 이번 시험을 예약한 것이다.

다행히 학교 측에서는 영어 성적을 나중에 보충 제출해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진경숙은 강지연의 다리를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같이 가 드릴까요?”

“괜찮아요, 아주머니. 여자들끼리 모이는 자리라 한 명 더 가면 민폐예요.”

강지연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럼 대표님께는 제가 따로 말씀드릴게요.”

진경숙은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나 싶어 책임이 두려웠다.

“괜찮아요, 그냥 편하게 약속 즐기라고 해요. 괜히 방해하지 말고. 나도 친구들이랑 다 놀고 나서 전화할 거라고 전하면 돼요.”

강지연은 가방을 들고 현관문을 나섰다.

그녀의 다리가 불편한 걸 고려해, 결혼할 때 그들이 선택한 신혼집은 엘리베이터가 바로 연결되는 구조였다.

강지연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대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햇빛이 내리비치는 밖으로 한 발 내디디는 순간, 그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모자를 눌러쓰고 코트 깃을 세웠다.

다리를 다친 뒤로, 무대 위에서 누구보다 당당하던 강지연은 사라졌다. 절뚝거리는 강지연은 더 이상 사람들 앞에 나설 용기를 잃어버렸다.

진경숙은 항상 말했다. 밖에 나가려면 웬만하면 온하준과 같이 나가라고.

온하준 역시 입버릇처럼 말했다. 자신이 동행하지 않는 이상 그녀는 집에 있는 편이 좋겠다고.

하지만 그들 둘 다 모르는 게 있었다.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건 혼자 나가는 게 아니라 온하준과 함께 나가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 눈에는 늘 이런 말이 적혀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저렇게 완벽한 남자가 왜 절뚝거리는 여자랑 결혼했지?’

강지연은 택시를 불러 호텔 쪽으로 향했다.

차 안에서 창밖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길가 주차 구역에 세워져 있는 차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온하준의 차였다.

“잠깐만요, 여기 세워 주세요.”

그녀는 서둘러 기사에게 말했다.

온하준의 차는 한 음식점 앞에 서 있었다.

어제는 온하준의 친구 중 한 명이 쏘는 자리였고, 오늘은 온하준이 사는 날이라고 이하나가 SNS에 적어 둔 걸 그녀는 분명히 봤다.

강지연은 마치 홀린 듯 차에서 내렸다.

식당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강지연은 곧장 말했다.

“일행이 도착해 있어요. 아마 온하준으로 예약했을 거예요.”

그러면서 온하준 휴대폰 번호 뒷자리를 불러 주었다.

종업원은 강지연을 곧장 안쪽으로 안내했다.

“여기입니다.”

“고맙습니다.”

강지연은 그렇게 인사를 건네고 혼자 문 앞에 남겨졌다.

사실 그녀도, 자신이 여기에 도대체 왜 온 건지 잘 몰랐다.

집에 있을 때까지는 가슴속에서 자꾸 뭔가가 치밀어 올라 여기까지 한달음에 달려와 버렸는데, 막상 이 문 앞에 서 보니 문을 밀어볼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안에서는 이미 떠들썩한 목소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오늘은 너무 늦게까지 못 놀고, 술도 많이 못 마셔. 어제 취해서 들어갔다가 우리 집 호랑이한테 들켜서 죽는 줄 알았다니까.”

온하준의 어느 한 친구 목소리였다.

“진짜 내 알던 그 오빠 맞냐? 예전에 뭐라 그랬어, 누가 와도 동생이 1순위라고 했던 사람이 지금은 완전 와이프한테 쩔쩔매고 있다니까? 그래도 우리 하준이 오빠가 제일 의리 있지.”

이번에는 이하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말투는 나른하고도 달콤하게 들렸다.

이하나는 이런 성격이었다. 그리고 온하준이 좋아하는 타입의 여자도 이런 스타일이었다.

안타깝게도 강지연은 도저히 이런 사람을 연기할 수 없었다. 흉내조차 낼 수 없었다.

안에서 온하준의 친구가 말을 이었다.

“하준이는 뭐 말해 뭐 해. 강지연이 감히 한 마디라도 토를 달 수 있겠냐?”

“맞다, 생각났어.”

이하나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하준아, 내가 들었는데 네 와이프가 절뚝거린다며? 왜야?”

아무도 이하나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강지연의 가슴은 움켜쥔 것처럼 조여 왔다.

온하준의 친구들이 슬슬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까 말이야, 하준아. 우리는 진짜 네가 아깝다니까. 너 봐, 돈도 많지, 얼굴도 되지, 어디 내놔도 빠지는 데가 없는데, 어떤 여자를 못 만나서 하필 절뚝거리는 사람을 데려와?”

“진짜로, 하준아. 넌 우리 중에서도 제일 잘나가잖아. 그런데 지금 네가 강지연이랑 결혼한 덕에, 밖에서 회의를 하든, 접대를 하든, 기자회견을 하든, 어디든 부인 데리고 나가야 하는 자리는 죄다 포기해야 되는 거야. 그게 손해가 아니고 뭐냐?”

‘그래서였구나...’

온하준은 늘 말했다. 자기 일에는 그녀가 굳이 나설 필요가 없다고. 그저 얌전히 집에 있으면서, 자신이 벌어 오는 돈을 쓰기만 하면 된다고.

친정 식구들은 그런 온하준을 두고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모두 그녀더러 팔자 좋다고 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온하준은 그녀를 사람들 앞에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곧이어 실내에서 온하준의 쓴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쨌든 나한테는 은인이야. 내가 빚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빚진 거라면 너 그동안 돈도 얼마나 줬냐? 그 정도면 다 갚은 거지 뭐!”

“그러게. 그때 그냥 돈 넉넉하게 쥐여 주고 끝냈어야지, 뭐 하러 평생을 걸었냐?”

“내 말이. 하준아, 너 차라리 집에다 부처를 한 분 모셔다 놓고 매일 향 피우고 절이라도 하면 재물운이라도 기원할 수 있지. 근데 지금 같이 이런 사람을 아내로 들여놔서 집에 둬 봐야 뭐가 좋냐고?”

“그러니까, 네 인생에 뭐가 도움이 되냐? 접대 자리에도 못 데려가지, 집에서는 차 한 잔 주는 것도 쏟을까 봐 걱정될 거고. 하준아, 너 물 마셔...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걷는 거 맞냐?”

문틈 사이로 웃음소리가 한 번에 터져 나왔다.

그 가운데 이하나의 까르르 웃음까지 섞여 있었다.

“하준아, 너희 와이프 진짜 그렇게 걸어?”

문에 몸을 붙이고 듣고 있던 강지연은 온몸의 피가 죄다 머리로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분노와 수치심이 뒤엉켜 그녀의 중심을 무너뜨렸다.

강지연의 몸이 문을 밀어 올리듯 들이받았고, 결국 문이 벌컥 열렸다. 안은 마침 한창 큰 웃음으로 뒤덮여 있는 순간이었다.

온하준의 친구 중 한 명인 김도윤이라는 남자가 컵에 물을 들고, 일부러 다리를 심하게 절뚝이며 과장된 걸음으로 방 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목소리까지 높게 깔아 잡으며 떠들어댔다.

“하준아, 하준아, 하준아, 물 마셔, 하준아. 아... 넘어졌다, 하준아, 안아 줘...”

강지연은 온하준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남편,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그 사람이 바로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떤 태도라도 보여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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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며칠 동안 벌어진 모든 일은 모두가 그녀를 위해 짜맞춘 하나의 꿈 같았다.그 아름다운 꿈속에서 강지연은 병든 식물이 햇빛과 비를 맞으며 다시 꽃을 피워 가듯 서서히 숨을 되찾고 있었다.그 모두 속에는 온하준도 포함돼 있었다. 어쩌면 그는 그 중심에 있었을지도 모른다.강지연은 더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대신 살짝 방향을 틀어 돌아 나왔다.잠에서 깬 홍순자는 강지연이 방에 없는 걸 보고 깜짝 놀라 밖으로 뛰쳐나왔다.사람들은 강지연과 홍순자가 아직 자고 있을 거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강지연이 사라졌다는 말에 목장 전체가 순식간에 술렁였다.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찾던 끝에 번식 구역에서 송아지를 받는 아저씨 옆에 쪼그려 앉아 있는 강지연을 발견했다.막 떠오른 햇살이 목장을 비추고 있었고 초록빛 풀밭은 금을 입힌 듯 반짝이고 있었다. 그 황금빛 속에서 강지연은 손을 흔들며 환하게 웃었다.“할머니, 고모, 오빠! 빨리 와 봐요. 젖소가 송아지를 낳았어요!”세 사람은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그녀의 미소를 바라보며 조용히 눈시울을 적셨다.평소엔 좀처럼 오지 않는 목장이기도 했고 강지연이 이렇게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오랜만이어서 모두 이곳에서 하루 더 머물기로 뜻을 모았다.그래서 오전에는 강시우가 그녀를 데리고 말을 탔고 오후에는 목장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치즈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버터는 또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하나하나 직접 보여주었다.저녁이 되자 온종일 지칠 정도로 돌아다닌 강지연은 가족들과 함께 다시 야외에 자리를 잡았다.둥근 달이 높이 떠 있는 밤하늘 아래, 그녀는 할머니의 어깨에 기대어 목장에서 만든 시원한 요구르트를 마시며 고소한 바비큐를 먹었다.지금 이 순간이 꿈인지, 아니면 지난 모든 일들이 꿈이었는지 현실감이 뒤섞이는 기분이었다.강시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기 접시 하나를 들고 뒤쪽 숙소로 향했다.“오빠.”강지연이 불렀다.“누구 주려고요?”가로등 불빛 아래, 누군가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에서   제54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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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에서   제54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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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에서   제543화

    온하준은 더 이상 자신을 변명할 생각이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어떻게 하면 강지연의 불안을 가라앉힐 수 있을지, 최소한 마음 편히 잠을 잘 수 있게 만들 수 있을지 그 생각뿐이었다.그는 나뭇잎을 한 아름 따 와 홍순자와 강희라 그리고 강시우에게 미리 말해 두었다.강지연이 잠든 뒤 조금이라도 불안해 보이면 바로 자신에게 알려 달라고.강시우는 그의 방법이 반신반의였지만 지금은 무엇이든 해볼 수밖에 없었다.밤 열 시. 강지연이 잠든 지 겨우 삼십 분쯤 지났을 무렵이었다.집안 사람들은 혹여 그녀가 깰까 봐 숨소리조차 조심했고 발걸음도 죽였다.그런데 그때, 거리에서 갑자기 차 한 대가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지나갔다.잠들어 있던 강지연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꿈속에서 장시범의 얼굴이 끝없이 커지며 그녀를 향해 주문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어떻게 갚을 거야? 내가 너를 위해 그렇게 많은 걸 바쳤는데 어떻게 갚을 거야?”가슴이 조여 오고 호흡이 가빠졌다. 바로 그 순간, 나뭇잎으로 휘파람을 부는 소리가 들려왔다.곡은 ‘아름다운 강산’이었는데 너무 못 불어서 장시범의 얼굴이 순식간에 흩어지듯 사라져 버렸다.강지연의 꿈속 풍경은 곧 연습실로 바뀌었다. 지역 대회가 열린다며 하나의 작품을 준비해야 했고 그녀가 추는 춤은 바로 ‘아름다운 강산’이었다.그런데 저 남자애들은 왜 이렇게 얄미운지. 못 불기만 하면 다행일 텐데 소리가 너무 커서 음악 소리를 전부 덮어 버리고 있었다.‘박자가 안 들린단 말이야.’강지연은 창가로 달려갔다. 해가 지는 시간, 붉은 노을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어디선가 치자꽃이 피었는지 향기가 밀려 들어왔다.초여름 저녁 공기에 맑은 향이 섞여 들었다.“야, 좀 그만 불면 안 돼? 음악이 안 들리잖아!”막 화를 내려던 순간, 아이들은 아이스크림이 든 봉지를 흔들며 말했다.“강지연, 아이스크림 먹을래?”‘쳇, 아이스크림이니까 봐준다.’나뭇잎 소리는 계속 이어졌고 음악도 함께 흘렀다. 치자꽃 향기는 열린 창을 타

  •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에서   제542화

    “알고 있어요. 저는 다시 강지연을 붙잡으려 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 이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잘 알아요.”온하준은 강시우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스스로 선을 그었다.“그 정도 분별은 있어서 다행이네. 우리 집으로 와.”강시우는 결국 온하준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온하준은 강시우가 보낸 운전기사의 차를 타고 집에 도착했고 문 앞에서 근심이 가득한 홍순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가슴이 시큰하게 저렸다.한때 자신을 누구보다 많이 아껴 주던 할머니였다. 정말 오랜만에 마주한 얼굴 앞에서 진심으로 잘 모시고 싶다고 생각했던 그 시절의 마음이 불쑥 떠올랐다.“할머니, 저 지연이 보러 왔어요.”홍순자 앞에 쪼그려 앉는 순간 온하준은 눈시울이 붉어졌다.이미 강시우에게서 그의 사정을 들어 알고 있었던 홍순자는 지금의 온하준을 보며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한때는 모든 기대를 이 아이에게 걸었고 강지연을 행복하게 해줄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결국 이렇게 되어 버렸다.“가 봐라.”짧은 말 속에 쓰림과 원망이 함께 얽혀 있었다. 강지연을 떠올리면 가슴이 미어지고 그가 저지른 일들을 생각하면 미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하지만 지금은 강지연을 다시 온하준에게 맡겨야 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홍순자의 마음을 괴롭혔다.온하준은 강시우를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우리 엄마가 안에 같이 있어. 사람 없으면 안 돼. 그리고 문도 안 열려고 해.”강시우는 이미 강지연의 상태를 어느 정도 설명해 둔 뒤였다. 온하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너만 들어가. 나는 안 들어가는 게 나을 거야. 사람 많으면 더 안 좋아.”방문이 열리고 작은 거실을 지나 안쪽으로 침실이 이어져 있었다.온하준은 깔끔한 차림이었고 이마 앞으로 살짝 흐트러진 짧은 머리칼 사이로 차분하면서도 서늘한 눈빛이 비쳤다.침대 머리에 반쯤 기대앉아 있는 강지연이 보였다. 눈빛은 텅 비어 있었고 얼굴은 창백했다. 불과 며칠 사이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듯했다.얼마 전 예술제 무대에

  •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에서   제541화

    이 시점에 온하준의 전화가 반가울 리 없었던 강시우는 미간을 찡그리며 전화받았다.“저기... 강시우 씨.”머뭇거리며 내뱉는 온하준의 호칭에 강시우의 미간이 더 깊게 접혔다.“강시우 씨, 갑작스럽게 전화해 죄송한데 혹시 강지연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건지 여쭤보고 싶어서요.”“네가 어떻게 알아?”강시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추측해 본 거예요.”온하준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며칠째 한의원에도 안 가고 연습에도 안 나갔다고 들었어요. 무용단 단원들도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모르고 있고요. 강지연 성격에 공연이 그렇게 성공했으면 보통은 더 열심히 연습에 매달렸을 텐데. 그래서 아픈 건지 아니면...”온하준의 말을 듣는 동안 강시우의 머릿속에 문득 한 생각이 스쳤다.“너, 지연이에 대해 잘 알고 있지?”강지연의 성장 과정에서 그는 사실상 부재한 오빠였다.온하준이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는 건 분명했지만 강지연과 십여 년을 알고 지낸 사이이기도 했다.학창 시절 삼 년, 부부로 산 세월이 오 년.어쩌면 온하준이 그녀 마음속 매듭을 풀 실마리를 쥐고 있을지도 몰랐다.“그렇죠. 이 세상에서 강지연을 가장 잘 아는 사람 중 하나라고는 할 수 있겠죠. 최소한 장시범보다는요.”강시우는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무슨 낯짝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야?”온하준의 목소리에 잠깐의 망설임이 스쳤다.“그래요. 제가 쓰레기같이 굴었던 건 사실이죠.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나니 여전히 강지연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강지연, 마음이 많이 다친 것 같은데 아닌가요? 그것도 가벼운 상처는 아닌 것 같고요.”온하준이 이렇게 확신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강지연은 어릴 때부터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 가정환경에서 자라면서도 거센 바람 속의 풀처럼 쉽게 꺾이지 않았다.상처를 논하자면 지난 오 년의 결혼 생활에서 자신이 준 상처가 가장 컸을 것이다.그럼에도 그녀는 한 번도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잃지 않았다.그랬던 그녀가 장시범 때문에 지금은 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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