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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hor: 네입클로버
온하준이 결국 금기를 깨고 술을 마셨다. 목소리만 들어도 이미 조금 취한 게 느껴졌다. 하지만 온하준이 이렇게까지 큰 소리로 웃고 떠드는 사람이었나?

강지연이 알고 있는 온하준은 이랬다.

고등학교 때 그는 차갑고 무뚝뚝한 수재였다. 문제집을 풀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운동장에서조차 그를 좋아하는 여자애가 물을 건네도 한 번도 받아 준 적이 없었다.

나중에 자신의 남편이 된 온하준은 더더욱 공손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감정 기복이란 게 전혀 없는 사람 같았다. 웃지도 화내지도 않고 언제나 담담했다. 너무 담담해서 가끔 그의 손가락에 스치기라도 하면 체온마저 차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영상 속 카메라는 사람들 얼굴을 하나씩 훑고 지나갔다.

그 사이로 살짝 취기가 오른 온하준이 보였다. 눈동자에는 빛이 번쩍였고, 그는 잔을 들고 카메라를 향해 웃으며 외쳤다.

“이하나, 돌아온 거 환영한다!”

그제야 알았다.

그도 웃을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걸. 그에게도 저렇게 뜨거운 순간이 있다는 걸. 그도 여자의 이름을 이토록 다정하게 불러 줄 줄 안다는 걸.

다만 그 웃음을 그녀에게는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고, 그 뜨거움을 그녀를 향해 준 적도 없으며, 그 입에서 그녀의 이름이 다정하게 나온 적은 더더욱 없었다.

“사모님, 일어나셨어요?”

문밖에서 진경숙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지연의 하루는 늘 정해진 패턴대로 흘러갔다.

진경숙은 아직 그가 일어날 기척이 없자, 혹시 도움이 필요할까 봐 일부러 물어보는 것이다. 어쨌든, 강지연의 다리에 문제가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강지연은 휴대폰을 옆에 내려놓았다.

“일어났어요, 바로 나갈게요.”

말을 꺼내는 목소리가 쉰 데다가 코끝이 막힌 것처럼 뭉개져 나왔다.

아침 식탁에는 진경숙이 만든 만두가 올라와 있었다. 하지만 강지연은 하나를 겨우 먹고는 더 이상 넘어가지 않았다.

“사모님, 점심하고 저녁은 뭐로 챙겨 드릴까요?”

진경숙이 우유 한 잔을 건네며 물었다.

“아무거나요, 그냥 먼저...”

그녀는 예전처럼 온하준이 좋아하는 걸 먼저 준비하면 된다고 말하려다가 뒷부분을 꿀꺽 삼켜 버렸다.

진경숙은 그래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단번에 알아들었다. 매일 반복되는 대화였으니까. 그래서 서둘러 말했다.

“대표님께서 오늘은 집에서 밥 안 먹는다고 하셨어요. 약속 있으시대요.”

강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집에 들어와 밥을 먹을 리가 없었다. 조금 전 이미 SNS에서 봤으니까.

이하나는 앞으로 일주일 동안 누가 밥을 사 주는지, 어디에서 무엇을 먹을지, 일정표처럼 차곡차곡 올려놨다.

[역시 학생 때의 감정이 제일 진짜야. 나는 이렇게 많은 오빠들한테 예쁨받는 귀여운 막내 시절로 돌아간 거라고요!]

낮 시간 동안, 강지연은 보통 두 시간 정도 영어 공부를 하고, 그 뒤에는 몇 시간 동안 예술 이론을 공부했다.

스스로에게 할 일을 만들어 주지 않으면 이 끝도 없이 긴 시간을 도대체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평생을 다 써서 한 사람의 귀가만을 기다리며 보낼 수는 없지 않겠나?

하지만 강지연은 이미 한 번 그렇게 기다려 본 적이 있었다.

그 기다림의 맛은 너무나도 괴로웠다. 그렇지만 오늘은 이전과 조금 달랐다.

이번에 받은 메일은 학교에서 내준 마지막 합격 통지에 가까운 것일 테고, 그녀는 서둘러 등록 의사를 밝혀야 했다.

그래서 오늘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학교에 등록금을 결제하는 일이었다.

휴대폰 화면에 카드 결제 완료 알림이 떠올랐을 때, 그녀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온하준에게서 떠나게 될 날이 또 하루 가까워졌다.

해 질 무렵, 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나갈 채비를 했다.

진경숙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사모님, 어디 가세요?”

온하준이 함께하지 않는 이상, 강지연은 거의 밖에 나가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 대학교 친구가 여기 근처에서 공연을 해서 잠깐 얼굴 보자고 했어요.”

강지연은 그렇게 말했다. 실제로는 시험장 근처 호텔에서 묵을 생각이었다.

내일 그녀에게는 영어 시험이 있었다. 그것도 아침 시험이었다.

아침에 집에서 출발했다가는 혹시라도 길이 막혀 시험장에 늦을까 봐 걱정되는 상황이었다.

마지막으로 시험을 본 건 몇 달 전이었다. 그때는 원하는 점수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유학 지원 마감 시기가 다가와 어쩔 수 없이 먼저 지원서를 넣었고, 설마 붙을 줄은 생각도 못 한 채 며칠 전 다시 이번 시험을 예약한 것이다.

다행히 학교 측에서는 영어 성적을 나중에 보충 제출해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진경숙은 강지연의 다리를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같이 가 드릴까요?”

“괜찮아요, 아주머니. 여자들끼리 모이는 자리라 한 명 더 가면 민폐예요.”

강지연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럼 대표님께는 제가 따로 말씀드릴게요.”

진경숙은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나 싶어 책임이 두려웠다.

“괜찮아요, 그냥 편하게 약속 즐기라고 해요. 괜히 방해하지 말고. 나도 친구들이랑 다 놀고 나서 전화할 거라고 전하면 돼요.”

강지연은 가방을 들고 현관문을 나섰다.

그녀의 다리가 불편한 걸 고려해, 결혼할 때 그들이 선택한 신혼집은 엘리베이터가 바로 연결되는 구조였다.

강지연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대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햇빛이 내리비치는 밖으로 한 발 내디디는 순간, 그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모자를 눌러쓰고 코트 깃을 세웠다.

다리를 다친 뒤로, 무대 위에서 누구보다 당당하던 강지연은 사라졌다. 절뚝거리는 강지연은 더 이상 사람들 앞에 나설 용기를 잃어버렸다.

진경숙은 항상 말했다. 밖에 나가려면 웬만하면 온하준과 같이 나가라고.

온하준 역시 입버릇처럼 말했다. 자신이 동행하지 않는 이상 그녀는 집에 있는 편이 좋겠다고.

하지만 그들 둘 다 모르는 게 있었다.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건 혼자 나가는 게 아니라 온하준과 함께 나가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 눈에는 늘 이런 말이 적혀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저렇게 완벽한 남자가 왜 절뚝거리는 여자랑 결혼했지?’

강지연은 택시를 불러 호텔 쪽으로 향했다.

차 안에서 창밖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길가 주차 구역에 세워져 있는 차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온하준의 차였다.

“잠깐만요, 여기 세워 주세요.”

그녀는 서둘러 기사에게 말했다.

온하준의 차는 한 음식점 앞에 서 있었다.

어제는 온하준의 친구 중 한 명이 쏘는 자리였고, 오늘은 온하준이 사는 날이라고 이하나가 SNS에 적어 둔 걸 그녀는 분명히 봤다.

강지연은 마치 홀린 듯 차에서 내렸다.

식당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강지연은 곧장 말했다.

“일행이 도착해 있어요. 아마 온하준으로 예약했을 거예요.”

그러면서 온하준 휴대폰 번호 뒷자리를 불러 주었다.

종업원은 강지연을 곧장 안쪽으로 안내했다.

“여기입니다.”

“고맙습니다.”

강지연은 그렇게 인사를 건네고 혼자 문 앞에 남겨졌다.

사실 그녀도, 자신이 여기에 도대체 왜 온 건지 잘 몰랐다.

집에 있을 때까지는 가슴속에서 자꾸 뭔가가 치밀어 올라 여기까지 한달음에 달려와 버렸는데, 막상 이 문 앞에 서 보니 문을 밀어볼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안에서는 이미 떠들썩한 목소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오늘은 너무 늦게까지 못 놀고, 술도 많이 못 마셔. 어제 취해서 들어갔다가 우리 집 호랑이한테 들켜서 죽는 줄 알았다니까.”

온하준의 어느 한 친구 목소리였다.

“진짜 내 알던 그 오빠 맞냐? 예전에 뭐라 그랬어, 누가 와도 동생이 1순위라고 했던 사람이 지금은 완전 와이프한테 쩔쩔매고 있다니까? 그래도 우리 하준이 오빠가 제일 의리 있지.”

이번에는 이하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말투는 나른하고도 달콤하게 들렸다.

이하나는 이런 성격이었다. 그리고 온하준이 좋아하는 타입의 여자도 이런 스타일이었다.

안타깝게도 강지연은 도저히 이런 사람을 연기할 수 없었다. 흉내조차 낼 수 없었다.

안에서 온하준의 친구가 말을 이었다.

“하준이는 뭐 말해 뭐 해. 강지연이 감히 한 마디라도 토를 달 수 있겠냐?”

“맞다, 생각났어.”

이하나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하준아, 내가 들었는데 네 와이프가 절뚝거린다며? 왜야?”

아무도 이하나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강지연의 가슴은 움켜쥔 것처럼 조여 왔다.

온하준의 친구들이 슬슬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까 말이야, 하준아. 우리는 진짜 네가 아깝다니까. 너 봐, 돈도 많지, 얼굴도 되지, 어디 내놔도 빠지는 데가 없는데, 어떤 여자를 못 만나서 하필 절뚝거리는 사람을 데려와?”

“진짜로, 하준아. 넌 우리 중에서도 제일 잘나가잖아. 그런데 지금 네가 강지연이랑 결혼한 덕에, 밖에서 회의를 하든, 접대를 하든, 기자회견을 하든, 어디든 부인 데리고 나가야 하는 자리는 죄다 포기해야 되는 거야. 그게 손해가 아니고 뭐냐?”

‘그래서였구나...’

온하준은 늘 말했다. 자기 일에는 그녀가 굳이 나설 필요가 없다고. 그저 얌전히 집에 있으면서, 자신이 벌어 오는 돈을 쓰기만 하면 된다고.

친정 식구들은 그런 온하준을 두고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모두 그녀더러 팔자 좋다고 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온하준은 그녀를 사람들 앞에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곧이어 실내에서 온하준의 쓴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쨌든 나한테는 은인이야. 내가 빚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빚진 거라면 너 그동안 돈도 얼마나 줬냐? 그 정도면 다 갚은 거지 뭐!”

“그러게. 그때 그냥 돈 넉넉하게 쥐여 주고 끝냈어야지, 뭐 하러 평생을 걸었냐?”

“내 말이. 하준아, 너 차라리 집에다 부처를 한 분 모셔다 놓고 매일 향 피우고 절이라도 하면 재물운이라도 기원할 수 있지. 근데 지금 같이 이런 사람을 아내로 들여놔서 집에 둬 봐야 뭐가 좋냐고?”

“그러니까, 네 인생에 뭐가 도움이 되냐? 접대 자리에도 못 데려가지, 집에서는 차 한 잔 주는 것도 쏟을까 봐 걱정될 거고. 하준아, 너 물 마셔...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걷는 거 맞냐?”

문틈 사이로 웃음소리가 한 번에 터져 나왔다.

그 가운데 이하나의 까르르 웃음까지 섞여 있었다.

“하준아, 너희 와이프 진짜 그렇게 걸어?”

문에 몸을 붙이고 듣고 있던 강지연은 온몸의 피가 죄다 머리로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분노와 수치심이 뒤엉켜 그녀의 중심을 무너뜨렸다.

강지연의 몸이 문을 밀어 올리듯 들이받았고, 결국 문이 벌컥 열렸다. 안은 마침 한창 큰 웃음으로 뒤덮여 있는 순간이었다.

온하준의 친구 중 한 명인 김도윤이라는 남자가 컵에 물을 들고, 일부러 다리를 심하게 절뚝이며 과장된 걸음으로 방 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목소리까지 높게 깔아 잡으며 떠들어댔다.

“하준아, 하준아, 하준아, 물 마셔, 하준아. 아... 넘어졌다, 하준아, 안아 줘...”

강지연은 온하준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남편,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그 사람이 바로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떤 태도라도 보여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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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맞아요, 사모님. 이 집은 단지 내에서도 최고급 뷰를 자랑해요. 봄이면 호수에 백조들이 날아와 앉는데 마치 동화 속 풍경 같답니다.”부동산 책임자도 진지한 표정으로 한마디 덧붙였다.온하준은 강지연을 발코니로 이끌었다.호숫가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머릿결을 스쳤고 공기 속에 섞인 풀 내음이 코를 간질였다.마음이 저절로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어때? 마음에 들어?”온하준의 손이 그녀의 손을 따뜻하게 감쌌다.강지연은 자신의 손을 잡은 온하준의 손을 뿌리치려다 집이 마음에 들어서 한번 참기로 했다.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온하준의 눈가에 만족스러운 빛이 스쳤다.“나도 이 집이 마음에 들어. 인테리어가 끝나면 우리가 먼저 들어와서 살아도 되겠어. 강태하 결혼 집은 나중에 다시 보지 뭐.”강지연은 발코니 아래 마당을 내려다보며 텃밭을 만들 공간을 상상했다.‘할머니가 이곳에 묵으시면 저쪽에 직접 채소도 심고 너무 좋겠네. 할머니도 기뻐하시겠지?'온하준의 말은 어느새 귓전으로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안쪽도 들어가 보자.”온하준은 자신이 들어와 살 생각으로 집에 대한 애정이 생겼는지 공간을 하나하나 자세히 살피고 싶어 했다.“1층 이 침실은 할머니 방으로 쓰면 좋겠어. 할머니 연세도 있어서 계단 오르내리시기가 불편하실 테니까.”강지연은 진심으로 온하준의 말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태도에 온하준은 흐뭇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너도 내 말에 동의하는 거지? 그러면 할머니를 설득하는 일은 네가 책임지고 해야 해.”온하준은 슬슬 미래에 대해 계획을 짜기 시작했고 강지연은 한심하다는 듯 눈을 흘겼다.2층으로 올라가자 온하준은 안방과 자녀 방을 지정했다.“3층은 전부 서재로 꾸미고 도우미 방은 따로 마련하자. 네 생각은 어때?”강지연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좋아.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다만, 안방에 너는 없을 것이고 너랑 이혼하고 결혼은 안 할 테니 아이도 없겠지.'온하준은 강지연의 손을 꽉 잡으며 입

  •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에서   제95화

    다시 운전을 시작했지만 차는 할머니 댁이 아닌 전혀 다른 길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너랑 같이 집 보러 가는 거야.”온하준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어제 네 주민등록증을 가져간 것도 너한테 집을 사주고 싶어서였어.”강지연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집을 샀다고?”“네 부모님이 강태하가 결혼할 집을 알아보고 계시잖아.”“또 너한테 연락했어?”강지연의 목소리에는 경계심이 담겨있었다.온하준은 대답 대창 창밖을 응시했고 그의 침묵이 곧 긍정이었다.“언제? 왜 나는 아무것도 몰랐던 거야?”고개를 돌려 강지연을 바라보는 온하준의 눈가에는 왠지 모를 웃음기가 담겨있었다.“네가 그렇게 싸늘하게 굴었는데 어떻게 너한테 말을 걸어?”강지연은 알릴 듯 말 듯한 온하준의 웃음이 오히려 더 기분 나쁘게 다가왔다.매번 자기 발목을 잡는 가족들 때문에 화가 치밀었고 항상 그녀로 하여금 온하준 앞에서 작아지게 만드는 가족들이 원망스러웠다.“온하준, 너는 무슨 만나는 사람마다 다 집을 사주고 다녀? 다른 사람들은 돈을 준다던데 넌 뭐 집을 나눠주는 사람이야? 아는 사람은 전부 다 사줄 생각이야?”하지만 온하준은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갔다.“나는 네가 그렇게 화를 내는 모습을 처음 봤어. 그날, 네 모습에 정말 놀랐거든.”‘그 이야기는 왜 또 꺼내는 건데!’“온하준! 너...”“알았어. 내가 무슨 아무한테나 집을 사주고 그러는 줄 알아? 너니까 그러는 거지. 그리고 내가 너를 몰라? 매번 말은 독하게 하지만 속은 여린 사람이잖아. 너도 어제 네 동생한테 주려고 집을 알아본 거 아니었어? 그동안 내가 준 용돈으로 살았잖아. 고작 그 돈으로 모아봤자 얼마나 모았겠다고 네가 집을 사? 겨우 모은 건데 널 위해서 써.”‘나를 잘 아는 척 말하네? 게다가 집을 사겠다고 한 말을 진짜로 받아들인 거야? 그건 그냥 지어낸 변명에 불과했는데.’“돈이...”5년 동안 온하준이 그녀한테 준 돈은 고작 정도가 아니었다.강지연은 돈을 모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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