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미연은 그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하린이 말고 내 친구가 또 누가 있는데?”‘나는 지금 분명 하린이 문제를 얘기하고 있는데 이 인간은 또 누구를 끌어들이려는 거야? 유진인가?’“네가 나보다 더 잘 알잖아?”강지한은 그녀와 박유진의 관계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었다.하지만 그녀는 박유진에 관한 이야기를 피하며 그의 말을 못 알아들은 척했다.이 여자는 분명 뭔가 숨기고 있었다.심미연은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나와 유진은 예전에 이웃이었고 지금은 그냥 아는 사이일 뿐이야. 지금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그녀의 이런 설명이 강지한을 만족시킬지는 알 수 없었다.강지한은 웃으며 말했다.“듣자 하니, 박씨 가문에서 널 며느리로 점찍었다던데?”심미연은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그의 속마음을 읽어 내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는 너무나 능숙하게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 있어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생각하다가 진지하게 물었다.“남들이 하는 농담에도 그렇게 신경 쓰여?”그녀와 박유진 사이의 농담은 아주 오래전 이야기였고 지금은 다시 꺼낼 만한 가치도 없었다.게다가 열다섯 살에 처음 강지한을 본 이후로 그녀의 마음속에는 오직 그만이 자리하고 있어 다른 누구도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그녀에게 박유진은 오빠 같은 존재일 뿐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너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었어?”강지한은 그녀의 눈을 보며 비웃듯이 말했다.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난 당신이랑 결혼했잖아?”만약 그녀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박유진이었다면 어떻게든 그와 함께하려고 했을 것이다.그런데 중요한 건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은 강지한이었으니 박유진과 결혼할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는 것이다.강지한이 오늘따라 이 얘기를 꺼내는 건 혹시 그녀가 쓴 이혼 서류 때문인가?그녀는 이혼 서류에 강지한을 유책 배우자로 명시하고 재산분할을 요구했다.만약 그녀가 외도해서 유책 배우자가 된다면 재산분할을 요구할 자격이 없어진다. 이런 생각에 심미연은 웃음이
남자의 차가운 숨결이 코끝으로 스며들었다.심미연은 의사의 말이 떠올라 깜짝 놀라 그를 밀어내며 소리쳤다.“지한 씨, 배 누르지 마! 아파!”어제 강지한 때문에 배가 아팠던 기억이 떠올랐다.다시는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았다.강지한은 인상을 찌푸리며 붉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분명 자신에게도 호감이 있는 것 같은데 자꾸만 거부하는 모습이었다.아까도 그랬다. 차라리 손으로 해결해 줄지언정 그와 잠자리를 하려 하지 않았다.그러니 이 여자가 다른 마음이 없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강지한의 시선에 심미연은 등골이 오싹해져 다급하게 말했다. “나... 배 아파.”“어제도 배 아프다더니 오늘 또 아프다고? 내일 무진에게 연락해서 병원 검진 예약해 놓으라고 할게.”강지한은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당연히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잠자리할 때마다 배가 아플 리가 없었다.분명 거짓말을 하거나, 아니면 그와의 관계를 거부하기 위한 핑계였다.심미연은 반사적으로 즉시 거절했다.“아니... 괜찮아!”성무진이 병원 검진을 예약하면 임신 사실을 숨길 수 없었다.만약 강지한이 임신 사실을 알게 되면 낙태를 강요할 것이 뻔했다.이 아이는 그녀의 아이이니 그녀는 반드시 낳을 것이다.강지한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미연아, 너 나한테 숨기는 게 있지?”이 여자의 반응은 너무 이상했다.심미연은 몰래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키고 말했다.“요즘 재판이 몇 건이나 잡혀 있어서 자료 준비에 현장 조사까지 해야 돼. 너무 바빠서 병원 갈 시간도 없는데 일 끝나고 검사받으면 안 될까?”그녀는 어떻게든 빨리 강지한과 이혼해야 했다.임신 초기 3개월 동안은 관계를 하면 안 되는데 그는 그쪽으로 워낙 혈기왕성한 사람이라 한두 번 거절하는 건 가능해도 여러 번 거절하기는 힘들었다.자칫 잘못하면 아이를 유산할 수도 있었다.설사 3개월 동안 강지한과의 관계를 피한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배가 불러오기 시작할 것이고 그때는 임신
“지한 씨, 나 피곤해. 자자.”심미연은 예쁜 눈을 깜빡이며 이불 속에서 웅얼거렸다. 마치 어린아이가 애교를 부리는 듯 나른하고 달콤했다.하지만 속으로는 온지유가 빨리 강지한에게 전화해 주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강지한은 잠옷을 들고 침대에 올라 이불을 잡아당겨 심미연을 앞으로 밀었다.그 바람에 그녀는 침대 위에서 굴렀고 이불은 풀어졌다.그녀는 황급히 잠옷을 움켜쥐었다.끝났다!더는 버틸 수 없었다.온지유는 정말 도움이 안 돼!“지...”심미연이 입을 열자 남자는 그녀의 팔을 잡아끌어 품에 안았다.“내가 갈아입혀 줄까, 아니면 네가 갈아입을래?”그는 꼭 보겠다는 심산이었다.심미연은 입술을 깨물고 그를 유혹하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안 갈아입으면 안 돼?”아까 그녀는 강지한을 유혹해서 신하린을 봐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다.근데 열심히 유혹했더니 결국 손만 더럽히고 신하린도 구해내지도 못했다.만약 이제 와서 이 잠옷을 입는다면 강지한은 순식간에 짐승으로 돌변할 것이다.그녀는 그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배 속의 아기를 위해서라도 절대 입을 수 없었다.강지한은 그녀와 길게 말하기 귀찮아 그녀의 옷을 벗기고 빨간색 잠옷을 억지로 입혔다.심미연은 어쩔 수 없이 잠옷을 입었다.그러자 남자는 그녀를 안은 채 화장대 거울 앞으로 데려가 뒤에서 껴안고 그녀의 귓불을 깨물며 속삭였다.“오늘 밤, 거울 속에 비친 네 모습을 보면서 널 괴롭혀 줄게!”야한 빨간 잠옷은 그녀의 차갑고 도도한 분위기와 묘하게 어우러져 남자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다.심미연은 부끄럽고 분해서 미칠 지경이었다.함정을 판 결과, 강지한에게 묻히게 생겼으니 말이다.강지한은 말을 마치고 그녀의 상체를 화장대에 밀어붙였다.심미연의 몸이 순식간에 뻣뻣하게 굳었다.그는 인상을 찌푸리고 낮은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미연아, 긴장 풀어.”심미연은 배 속의 아기를 생각하며 몸을 더 웅크렸다.강지한은 아픔에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그는
“지유가 교통사고를 당한 사실을 왜 집안에 숨겼어? 그 애가 지금 임신 중인 거 몰라! 그것도 네 형의 아이를! 잘못되기라도 하면 미연은 목숨이 열 개라도 모자라!”문소영은 따지듯이 물었다.강지한은 인상을 찌푸렸다.“별일 없었는데 왜 호들갑이에요?”그는 성무진에게 온지유의 교통사고 소식을 막으라고 지시했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네가 숨긴 건 미연을 감싸주려는 거잖아! 네 속셈을 내가 모를 줄 알아?”심미연 이야기만 나오면 문소영의 기분은 나빠졌다.강지한은 차분하게 말했다.“내 일에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렇게 지유가 걱정되면 사람을 많이 붙여서 돌보던가요.”그는 온지유의 교통사고를 조사하고 있었다.심미연의 행동을 보면 그녀가 사고를 낸 것 같지는 않았다.비록 그녀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억울한 누명을 씌우고 싶지도 않았다.“내가 네 엄마인데 어떻게 네 일에 신경을 안 써! 그리고 너 미연이랑 언제 이혼할 거야? 그날 백화점에서 이씨 가문 사모님을 만났는데, 그 집 막내딸이 돌아왔대. 지금 그 애한테 어울릴 만한 집안 아들을 찾고 있다던데, 예전에 걔가 너 쫓아다녔던 거 기억나? 차라리 너희 둘이 잘해 보는 건 어떻겠니?”문소영은 속마음을 털어놓았다.강지한은 코웃음을 쳤다.“내 가정을 박살 내고 나를 다른 여자에게 넘기려고 이 밤중에 여기까지 온 거예요?”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한밤중에 찾아오다니, 정말 어이없었다.“넌 미연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가정은 무슨 가정이야!”강지한은 짜증을 냈다.“늦었으니까 가보세요. 나 잘 거예요!”“미연은? 내가 왔는데 인사도 안 해? 꼭 거지 같은 집안에서 자란 티를 낸다니까. 예의도 모르고!”문소영은 위층을 보면서 빈정거렸다.그녀의 말에 강지한은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미연은 내 마누라인데 그녀를 무례하다고 하는 건 나를 무례하다고 욕하는 거랑 마찬가지예요. 한밤중에 와서 왜 미연에게 시비예요? 걔가 뭘 잘못했다고?”그의 면전에서 아내를 욕하다니, 정말 어처
가까이 다가간 강지한은 여자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채고 허리를 굽혀 침대에 앉아 그녀의 이마를 만져보았다.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지만 열은 없었다.“미연아, 왜 그래? 어디가 안 좋아?”강지한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방금 아래층으로 내려갈 때만 해도 괜찮았는데, 잠깐 사이에 왜 이렇게 힘들어하는 걸까.심미연은 그의 목소리를 듣고 본능적으로 남자의 품으로 파고들며 나긋나긋하게 말했다.“지한 씨, 배가 아파.”정말 너무 아팠다!병원에 가고 싶었다.“병원에 데려다줄게!”강지한은 말과 동시에 그녀를 안아 올리고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려 했다.이때 심미연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눈을 크게 뜨고 강지한을 바라보며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내려줘, 병원에 안 갈 거야!”병원에 가면 임신 사실이 들통날 것이다.그러면 아이를 지킬 수 없게 된다.그럴 순 없었다!강지한은 그녀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병원에 가기를 거부하자 얼굴이 굳어지며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죽고 싶어도 내 집에서는 안 돼! 밖에 나가서 죽어!”아파도 병원에 안 가다니, 이 여자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건가!심미연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화를 냈다.“살살 하라고 했잖아! 꼭 그렇게 힘을 줘야 했어? 지금 내 배가 아픈 게 누구 때문인데! 왜 나한테 화를 내!”다 그가 저지른 일인데 이제 와서 밖에 나가 죽으라니, 정말 너무했다.강지한의 얼굴에 잠시 어색한 기색이 스쳤지만 금방 평정심을 되찾고 말했다.“병원에 가서 검사받아 보자.”‘부부끼리 조금 친밀한 행동을 했다고 병원에 가야 할 정도라니, 정말 유난스러운 여자야.’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그렇게 말하는 사이, 두 사람은 이미 아래층에 도착했다.심미연은 초조해졌다.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바로 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강지한은 눈썹을 치켜올리고 심미연에게 말했다.“내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 좀 꺼내 줘.”심미연은 알았다고 대답하고 마지못해 남자의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휴대
심미연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응, 안 아파.”지금 그녀는 어떻게든 남자를 보내고 싶었다. 그러니 배가 아파도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강지한은 입술을 깨물더니 허리를 굽혀 그녀를 바닥에 내려놓고 말했다.“혼자 방으로 돌아가. 난 간다.”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가버렸다.심미연은 남자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재빨리 배에 손을 얹었다.“아가야, 얌전히 있어. 엄마가 금방 병원에 데려가 줄게!”이때 임혜자가 방에서 나와 심미연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다급하게 물었다.“사모님, 괜찮으세요?”심미연은 심호흡을 하고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임혜자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 그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사모님, 정말 괜찮겠어요?”심미연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괜찮아요. 그런데 지금 잠깐 나갔다 올게요. 만약 내가 돌아오기 전에 지한 씨가 먼저 오면, 거짓말 좀 해 주세요.”임혜자는 이유를 묻지 않았지만, 속으로 무슨 일인지 몹시 궁금했다.임혜자와 작별 인사를 한 후, 심미연은 서둘러 신하린에게 전화를 걸었다.신하린은 전화를 곧바로 받았다.“미연아, 이렇게 늦은 시간에 무슨 급한 일이야?”보통, 그들은 늦은 시간에 통화하지 않았다.그러니 분명 심미연에게 무슨 일이 있다고 짐작했던 것이다.“하린아, 빨리 나 좀 데리러 와 줘. 방금 너한테 위치 보냈어!”심미연은 다급한 목소리로 무의식적으로 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배가 너무 아파. 빨리 병원에 가야 해. 안 그러면, 아기가 위험할지도 몰라!”아이가 이런 때에 오기로 했다면 그건 인연이 있다는 뜻일 테니, 그녀는 당연히 아이를 잘 보살펴야 했다.“강지한은 집에 없어? 이렇게 늦었는데 아직 안 들어왔어?”신하린은 연달아 물었다.심미연은 매정하게 떠나버린 강지한의 모습을 떠올리며 마음이 씁쓸해졌다.“방금 온지유한테서 전화가 와서 가버렸어.”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신하린이 수화기 너머로 욕을 퍼붓는 소리가 들렸다.“개자식, 진짜 머리가 돌았나! 자기 마누
‘지한이 녀석, 어떻게 엄마보다 남을 더 챙겨!’하지만 그녀는 온지유에게 이 말을 할 수 없었다.“어머니, 지한 씨가 진짜 그렇게 말했어요?”온지유는 눈이 번쩍 뜨이며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안 돼! 지한 씨는 심미연을 사랑할 리가 없어! 설령 사랑한다고 해도, 난 두 사람이 함께하게 둘 수 없어. 축복해 준다고? 절대 못 해!’“어. 그렇게 말했어! 자, 이제 시간이 늦었으니 넌 어서 자!”문소영은 온지유와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서 말을 마치자마자 전화를 끊었다.‘온지유, 이 여자는 강지한에게 너무 관심이 많은 것 같아. 뭔가 이상해! 설마...’문소영은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그만두었다.온지유는 전화를 끊자마자 화를 냈다.이때 간병인이 문을 열고 들어오다가 하마터면 그녀가 던진 재떨이에 맞을 뻔했다. 간병인은 혼비백산하여 벌벌 떨며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온지유의 더러운 성질머리에 돌보던 사람들은 거의 다 떠나고 없었다.다만 그녀는 아버지 병원비 때문에 온지유가 아무리 못되게 굴어도 참고 견디고 있었다.그녀가 한창 눈물을 훔치고 있는데 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온지유 씨 주무세요?”“온지유 씨는... 지금 화내고 계세요!”간병인은 말을 마치고 어깨를 움츠렸다. “방금 던진 재떨이에 하마터면 이마에 맞을 뻔했어요!”그녀는 고자질하고 있었다.강지한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쉬러 가세요. 다른 사람이 올 거예요.”그의 기억 속 온지유는 상냥한 여자였다. 말투도 나긋나긋하고 큰 소리로 말하는 법이 없었다.그런 그녀가 화를 낸다고?간병인이 헛소리하는 게 틀림없다.“네!”간병인은 황급히 자리를 떴다.온지유의 간병인은 여러 명이라 교대로 돌봤는데, 금방 다른 간병인이 왔다.강지한을 보자마자 간병인은 인사했다.“오셨어요.”간병인은 강지한과 온지유가 약혼한 사이라고 생각했고 그의 비싼 옷차림을 보고 부자인 것을 눈치채고는 아주 공손하게 대했다.강지한은 간병인을 흘끗 보고 병실 문을 열었다.온지유는
바로 그때, 신하린은 갑자기 잠에서 깼다. 살기 가득한 눈과 마주치자 순간 정신이 번쩍 든 그녀는 소리를 질렀다.“사람 살려!”그녀가 갑자기 깨어날 줄 몰랐던 남자는 입을 막으려고 달려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그는 상황을 판단하고 재빨리 문밖으로 도망쳤다.너무 급한 나머지, 주사기와 바늘이 그의 몸에서 떨어졌다.바닥에 떨어진 주사기와 바늘을 본 신하린은 머릿속에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녀는 심미연의 손에 꽂힌 바늘을 뽑았다.방금 깨어난 심미연은 그녀의 행동을 보고 어리둥절했다.“하린아, 무슨 일이야?”신하린은 주사기와 바늘을 주워들고 심미연에게 말했다.“방금 누가 들어와서 네 링거병에 뭔가를 주입했어. 어쨌든 링거는 빼자. 이 안에 든 걸 검사해 봐야겠어.”신하린은 어려서부터 부잣집에서 벌어지는 온갖 추악한 일들을 많이 봐 왔고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죽이기 위해 온갖 수단을 쓰는 사람들도 보았다.비록 심미연의 임신 사실은 외부에 비밀로 하고 있었지만 다른 누군가 알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심미연은 순간 잠이 확 달아나 벌떡 일어나 앉으며 물었다.“방금 그 사람, 어떻게 생겼는지 봤어?”그녀가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은 온지유였고 오직 온지유만이 이처럼 악독한 짓을 할 수 있었다.“흰 가운을 입고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얼굴은 못 봤고 눈만 봤어.”신하린은 아무리 생각해도 남자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심미연의 표정이 심각해졌다.“하린아. 뭔가 이상해. 링거병이랑 주사기, 바늘 잘 챙겨 놔. 내가 아는 사람한테 검사를 맡겨야겠어.”신하린은 알겠다고 대답하고 링거병과 주사기, 바늘을 봉투에 담아 보관했다.바로 그때, 의료진이 들어왔다.신하린은 간호사에게 서둘러 말했다.“손등에서 피가 나니까 지혈 좀 해 주세요.”방금 바늘을 너무 급하게 뽑다 보니 손등에서 피가 났다.심미연은 의사에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혈액 검사를 해 주세요.”만약 그 사람이 링거병에 낙태약을 넣었다면, 방금
심미연은 흩날리던 생각을 차분히 거두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궁금한 듯 물었다.“우리 태하 진짜 똑똑하네.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거야?”아직 겨우 세 살이지만 심태하의 마음은 놀랄 만큼 세심하고 예민했다. 또렷한 눈망울은 마치 세상의 감정 흐름을 꿰뚫어 보는 듯했고 그렇게 꼼꼼히 살피는 모습에 심미연은 종종 놀라곤 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박유진이 심태하를 정성스럽게 길러온 시간이 아이를 이토록 똑똑하고 배려 깊게 자라게 만든 것이다.“아까 아빠랑 통화할 때 엄마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어요. 뭔가 걱정하는 게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저한테 말 걸었을 때도 평소처럼 웃고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엄마가 혹시 슬픈 건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어요.”심태하의 말은 또렷하면서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단어 하나하나에 엄마를 향한 깊은 애정과 이해가 담겨 있었다.심태하가 보기에 박유진이 집에 있을 땐 심미연은 늘 기분이 좋아 보였고 환하게 웃는 얼굴이 참 예뻤다.“엄마가 안 웃었어?”심미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녀석, 정말 못 말려.’겨우 세 살에 이 정도인데 나중에 더 크면 얼마나 영리해질지.“네, 안 웃었어요.”심태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심태하의 목소리는 여전히 앳됐지만 말투는 왠지 어른스러웠다. 꼭 사람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기라도 한 듯했다.심미연의 마음은 그 말 한마디에 확 풀렸다. 그녀는 아들의 코끝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자, 얼른 아침 먹자.”그녀의 말투엔 아낌없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이 아이는 정말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다.“아빠가 보고 싶으면 아빠한테 전화하면 되죠!”심태하가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윙크했다.‘나도 아빠가 보고 싶은데 엄마가 안 보고 싶을 리가 없지. 맞아, 분명 그럴 거야!’심미연은 그 말에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네 말대로 할게.”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박유진이 보고 싶지만 그에게 전화하진
하지만 그 깊은 애정과 놓기 싫은 마음은 오히려 박유진을 현실이라는 갈림길 앞에서 망설이게 만들었다.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심미연만 괴로운 상황에 빠질 것이라는 걸. 그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자신의 망설임으로 인해 흐려지는 건, 그녀의 세상이 자신 때문에 흔들리는 건 차마 보고 있을 수 없었다.그렇다고 그녀를 놓아버리면 영원히 잃게 될 텐데... 그 아픔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박유진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아빠, 왜 말이 없으세요? 허락한 거죠?”심태하의 목소리는 천진난만하게 들떴다. 마치 머릿속에 따뜻한 한 가족의 그림이 그려지기라도 한 듯.‘아빠가 돌아오면 엄마랑 나랑 셋이 모여 저녁 먹고 같이 웃고 얘기하고...’심태하의 마음속에서 그려낸 가장 순수한 행복의 모습이었다.그러나 그 순수한 소망 앞에서 박유진의 마음은 송곳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그는 알고 있다. 이번 결정을 가볍게 내려서는 안 된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게 하려면 정말 신중해야 했다.하지만 사랑과 책임 사이에서 그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그는 지금 사랑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심미연과 아이를 지킬 방법을 찾고 있다.하지만 그런 길이 과연 있을까? 이 선택은 너무나도 어려웠다.“아빠, 나 이렇게 열심히 얘기하고 있는데 왜 아무 말도 안 해요?”심태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미간을 찌푸렸다.평소 같았으면 박유진은 재밌는 얘기도 해주고 자기 말에 웃어주었을 텐데, 오늘따라 너무 이상했다.‘혹시... 내가 말실수했나?’그때 박유진의 다급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심태하의 귀에 들려왔다.“태하야, 곧 비행기가 이륙해서 아빠가 휴대폰을 꺼야 돼. 오늘 밤에 다시 이야기하자. 꼭이야.”박유진은 심미연을 당장이라도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고 말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네! 알겠어요, 아빠! 그럼 오늘 밤에 꼭 통화해요. 약속했으니까 안 하면 안 돼요!”심태하의 목소리에 눈치채기 힘든 외로움이 살짝 섞여 있었다.
심미연은 멍해졌고 아까 자신이 박유진에게 연락을 시도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날아온 건 단 한 줄의 차갑고 무미건조한 메시지. 기대했던 목소리는 끝내 들을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 아들 심태하가 전화를 걸자 박유진은 놀랍게도 전화를 받았다.“아빠, 지금 어디예요? 이틀 뒤면 제 생일이에요! 아빠가 놀이공원 같이 가자고 했던 거 잊으시면 안 돼요!”심태하의 말투엔 아이 특유의 해맑은 기쁨이 가득 담겨 있었고 단어 하나하나가 살아서 튀어나오는 듯했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박유진의 목소리는 한겨울 얼음도 녹일 만큼 다정했다.“아빠 지금 진성으로 가는 비행기 타러 가는 중이야. 곧 이륙이라 휴대폰 꺼야 해. 진성에 도착하면 바로 전화할게. 약속!”그 말에는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득 실려 있었다.사실 박유진은 심태하가 생일 이야기를 할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어젯밤에 워낙 정신이 없어 그런 중요한 약속마저 깡그리 잊고 있었던 것이다.“아빠가 보내준 선물 잘 받았어요!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심태하는 아직 다 하지 못한 말이 많은 듯 아빠에게 털어놓고 싶은 게 가득한 눈치였다.박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햇살이 쏟아져 내려 유난히 눈부셨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가늘게 떴고 그 강렬한 빛이 속눈썹 아래에 그림자를 드리웠다.그 순간 그의 마음속엔 오로지 한 사람, 심미연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그녀와 떨어져 있는 모든 시간이 하나같이 그리움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그리움이 너무 커서 박유진은 당장이라도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달려가고 싶을 만큼 벅찼다.“아빠... 지금 너무 힘들죠? 그럼 회사 팔고 그냥 집으로 돌아와요. 제가 돈 많이 벌어서 아빠랑 엄마 다 먹여 살릴게요!”심태하의 순수한 눈빛에 진심 어린 다짐이 담겨 있었다. 그에겐 돈을 많이 벌어서 가족을 지킬 거라는 꿈이 있었다.심미연은 그런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통통한 볼살에 아직 아기 티가 남았지만 심태하의 마음속
심미연 역시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이지연이 잘못 알아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지연 씨, 다시 한번 제대로 확인해 봐요. 결과가 똑같은지 꼭 잘 봐요.”혹시라도 착오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그럼 제가 다시 확인해 볼게요! 뭐든 나오면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보스, 그럼 끊을게요!”이지연은 말 끝나기가 무섭게 전화를 뚝 끊었다.심미연은 휴대폰을 쥔 채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까 이지연이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이건명과 문소영이 예전에 그런 사이였다고?’그런데 왜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걸까? 아무도 깊게 파고들지 않았기에 묻혀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결혼 전에 누굴 만나든 그건 사생활인데 그걸 굳이 숨긴 이유가 뭘까?심미연이 이 모든 게 어딘가 석연치 않다고 느끼고 있을 즈음, 밖에서 누군가 소리쳤다.“엄마! 나 배고파요! 우리 빨리 아침 먹으러 가요!”심미연은 생각을 접고 고개를 들어 활짝 웃는 아들을 바라봤다.“그래, 가자.”심태하가 달려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엄마, 며칠 뒤면 제 생일이잖아요. 생일 파티에 상미도 초대하고 싶은데, 그래도 돼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젯밤의 친자 확인 결과가 떠올랐다. 강상미는 그녀의 딸, 즉 심태하와 쌍둥이였다. 그래서 둘의 생일도 당연히 같았다.심태하의 생일 파티에 강상미가 온다면 그건 곧 둘이 같이 생일을 보내게 되는 셈이다.“엄마, 안 돼요?”심미연이 대답하지 않자 심태하가 다급히 물었다.그녀는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켰다.“그럼, 당연히 초대해야지. 너희 둘이 같이 생일 파티하면 되겠네.”“정말요? 엄마 최고! 사랑해요!”심미연은 아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태하야, 너 엄마가 어제 말한 거 잊은 거 아니지? 상미가 바로 태영이야. 너랑 똑같이 엄마 배에서 나왔고 너희 둘은 쌍둥이야. 그래서 생일도 똑같아.”강상미에 관한 일은 이미 방원호에게 조사를 맡긴 상태였다. 꼭 알아내야 한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