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미연은 잠시 망설이다 그에게 물었다.“내가 휴가를 내는 건 온지유의 뜻이야 아니면 어머니 뜻이야?”온지유가 했던 말들을 그녀는 한 자 한 자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내 뜻이야!”강지한은 그녀의 뺨을 꼬집었다.“집에서 임신 준비하라고!”심미연의 동공이 수축했다.“정말 아이를 갖고 싶어?”왠지 강지한이 자신을 떠보는 것 같았다.마음이 불안했다.“아까 이야기하지 않았어? 우리 아이 갖자고.”강지한은 단순히 심미연이 아이를 낳으면 두 사람의 관계가 더 굳건해질 거라고 생각했다.그는 이혼하고 싶지 않았고 다른 여자를 찾고 싶지도 않았다.설령 심미연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평생 같이 살고 싶었다.“아까도 말했잖아. 애 낳으려면 당신이랑 온지유가 완전히 끝내야 한다고! 당신들 아직 계속 만나고 있는데 무슨 애를 낳아? 그리고 나 내일부터 하린의 작업실에 출근하기로 결정했으니까 임신 준비는 아직 급하지 않아!”심미연은 무덤덤한 표정에 차분한 말투였다.강지한이 떠보는 건지 아닌지와 상관없이 그녀는 아이를 낳겠다는 말은 쉽게 할 수 없었다.첫째, 강지한과 온지유의 관계는 아직 애매했고 이대로라면 못 참고 이혼할 게 뻔했다.둘째, 강지한이 자신에게 휴가를 주려는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장기 휴가라면 일자리를 구해야 할 것이고 임신 준비에 동의한다면 집에 있어야 할 텐데 그녀는 하루 종일 할 일 없이 있는 것을 원치 않았다.“지유의 일을 다 정리하고 나면 안 만난다고 약속했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애 낳는 거로 나더러 지유의 관계를 끊으라고 강요하는 거야?”강지한은 화가 나서 얼굴이 좋지 않았다.심미연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당신 마음속에 아이는 단지 강씨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한 도구일 뿐이니 낳기만 하면 신경 쓸 필요 없다는 거지?”“집에 가정부도 있고 아이가 태어나면 전문 육아 도우미, 영양사도 부를 거야... 네가 키우고 싶으면 키우고 싫으면 그들에게 맡기면 돼. 그때 네가 출근하고 싶다고 해도 난 말리지 않을 거야! 그런데 뭐가
심미연은 남자의 음흉한 눈동자를 보며 심장이 욱신거려 한참이 지나서야 조용히 소리를 냈다.“”온지유가 천신만고 끝에 얻은 아이인데 정말 소중히 여겨야 해. 나는 낳고 싶지 않으니 내가 호의를 모르는 거로 생각해.”말이 끝나자 그녀는 남자를 힘껏 밀치고 엘리베이터를 나갔다.그는 온지유가 임신으로 고생한 것은 안타까워하면서 그녀를 출산의 기계로 여겼다.차이도 너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온지유가 아이를 낳아 줄 수 있는데 또 구태여 그녀를 찾을 필요가 있겠는가.강지한은 빠른 걸음으로 쫓아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기고는 차갑게 웃었다.“네 마음대로 안 돼!”기분이 좋지 않은 심미연은 더는 말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숙이고 그의 손을 덥석 물고 남자가 아파서 손을 놓은 틈을 타 달아났다.강지한은 어두운 표정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이 여자는 정말 갈수록 통제를 벗어나네?’휴대폰 벨 소리가 갑자기 울리자 강지한은 눈을 돌려 전화를 받았다.“지한 도련님, 우리 거래를 해.”스피커에서 남자의 조롱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관심이 없어.”그는 한마디로 거절했다.“당신 부인에 관한 일인데도 관심이 없어?”남자가 갑자기 언성을 높이자 강지한은 눈살을 찌푸렸다.‘심미연이 찾아갔나?’보아하니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능력이 있는 것 같았다.“당신이 관심이 없다면 이 거래는 그만두어야지.”강지한이 침묵하자 상대방은 그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말을 잇지 못했다.“말해봐.”그는 심미연이 도대체 자기 몰래 무엇을 했는지 보려고 했다.“앉아서 이야기할 곳을 찾아. 두세 마디로 분명하게 말할 수 없으니.”“네가 찾아!”상대방이 곧 주소를 보내왔고 그는 심미연에 전화를 걸었다.여러 번 연속 걸어서야 심미연은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야?”말투가 귀찮게 들려왔다.“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어. 이따가 데리러 갈 테니 함께 밥 먹으러 가자.”강지한은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저녁에 박유진과 심서연의 일을 이야기할 테니 그는 당연히 그녀를
강지한은 이때 한참 달아올라 당연히 그녀 혼자 하게 놔두지 않았다.“얌전히 서 있어.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를 어떻게 혼내는지 볼래?”그는 낮은 소리로 위협했다.심미연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조그마한 얼굴이 창백한 채 말했다.“배가 아파. 소란피우지 마.”강지한의 표정이 차가워졌다.“왜 또 배가 아파?”그녀를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는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이 여자는 걸핏하면 배가 아프다고 하는데 틀림없이 그를 속이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심미연은 가슴이 조여와 강지한이 무슨 실마리를 알아낼까 봐 그를 바라보며 애교 섞인 말투로 말했다.“네가 어제 너무 달려들어 아픈 거잖아. 아직 낫지 않았어.”강지한은 믿는 건지 안 믿는 건지 입술을 감빨더니 잘생긴 얼굴에 웃음기를 더했다.“너 나랑 처음 자는 것도 아닌데 내가 어떤지 잘 알고 있지 않아?”심미연의 말은 결국 그의 흥취를 불러일으켰고 기분이 좋아진 그는 말투도 조금 전처럼 그렇게 냉담하지 않았다.심미연은 이 기회를 틈타 그를 밀쳤다.“나 다 나으면 다시 이야기하는 게 어때?”나긋나긋한 말투에 예쁜 두 눈으로 쳐다보니 얌전한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너는 지난번처럼...”강지한이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귓가에 낮은 소리로 한마디 하자 심미연의 얼굴이 즉시 귀밑까지 빨개졌다.“빨리 나가. 나 옷을 갈아입어야 해.”지난번에 그녀의 손이 오랫동안 시큰거렸는데 더 하기 싫었다.여자의 수줍은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강지한은 마음이 간지러워 손을 뻗어 그녀를 품에 안고 고개를 숙이더니 입술에 뽀뽀하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너도 보고 나도 보고하지 뭐.”그 모습은 횡포 적이고 멋있었다.심미연은 고개를 돌리더니 돌아서서 옷장을 열고 단아한 긴 치마 한 벌을 꺼내 곧장 밖으로 나갔다.그녀는 강지한 앞에서 옷을 다 벗을 용기가 없었다.강지한은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잡았다.“심미연, 어디 가?”심미연이 막 말을 하려고 할 때 휴대폰 벨이 울렸다.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살
왜 강지한에게 스피커폰을 누르라고 했을까?그녀는 정말 스스로 학대를 찾는 것 같았다.“의사가 신신당부했잖아. 너무 흥분하지 마. 말 듣지 않으면 앞으로 나도 너를 상관하지 않을 거야.”강지한은 다시 한번 그녀를 상관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온지유는 마음이 급하고 두려웠다.“지한 씨, 나 흥분하지 않았어. 의사의 말을 잘 들을게. 지한 씨가 나를 상관하지 않으면 안 돼.”강지한의 말에 그녀는 울고 싶었지만 감히 울지 못하고 목소리는 억눌린 울음을 띠고 있었다.“그래, 나 바빠. 너 좀 쉬어. 내가 시간이 있으면 너를 보러 갈게.”강지한은 결국 차마 모진 말을 할 수 없어 한 걸음 물러섰다.“그럼 몸조심해. 나 쉬러 갈게. 지한 씨, 기다리고 있을게.”온지유는 눈물을 흘리며 웃었는데 목소리에 웃음기가 조금 물들었다.심미연은 힘껏 심호흡하고 고개를 숙인 채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그녀는 이미 손을 놓을 준비가 다 되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아직 완전히 준비되지 않았으니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 걷잡을 수 없이 괴로울 것이다.강지한은 심미연의 뒷모습을 보고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은 그는 밖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심미연은 자신을 욕실에 가두고 옷을 갈아입었는데 마음이 괴로웠고 위도 괴로워 토하고 싶었다.강지한이 다가와 문을 두드리자 심미연은 경계하는 얼굴로 물었다.“무슨 일이야?”“옷 다 갈아입었어?”강지한은 손을 뻗어 문을 두드리며 문에 비치는 그 영롱하고 우아한 그림자에 눈빛을 고정한 채 마음이 좀 조급해졌다.많은 경우 분명 심미연이 그를 유혹하지 않았지만 그는 여전히 통제할 수 없이 반응을 일으켰다.막 결혼했을 때 그는 그 방면의 수요가 매우 컸다. 또 자신이 방금 여자를 접했기에 육현성과 함께 벨라비타에 가서 특별히 여자를 몇 명 불렀는데 결국 그는 그 여자들에 반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녀들의 향수 냄새에 질려 토하고 싶고 징그러워서 안 되었다. 그는 심지어 그 여자들을 앉히지도 않고 직접 내쫓았다.결혼 3
심미연은 목이 메어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강지한을 정말 화나게 하면 그는 정말 의료진을 철수시킬 가능성이 있다.그렇게 되면 외할머니는 치료를 받지 못하고 눈 뜨고 죽을 수밖에 없다.“화나지? 나를 물어 죽이고 싶은 충동이 들지?”강지한은 그녀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고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만지며 직설적으로 말했다.“결국, 네가 강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에게 잡히는 거야.”심미연은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강지한의 말대로 확실히 그녀는 강하지 못하다.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강지한을 떠날 생각이 들었을 때 이미 떠나 지금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내가 말했잖아. 순순히 내 곁에 있으면서 가져서는 안 될 마음을 갖지 말라고. 그렇지 않으면 너의 외할머니는 죽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어.”강지한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예전에 그는 심미연과 잠자리를 하고 싶을 때 할 수 있었고 심미연에게 뭘 시키든 그녀는 순순히 따랐다.지금 심미연은 그와의 스킨십을 거절하고 있다. 그가 심미연에게 뭔가 시켜도 그녀는 이리저리 미루고 있다.그는 심미연이 그 통제할 수 없는 사고가 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그는 그녀가 영원히 그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려고 한다.비열한 수단일지라도 말이다.강지한이 외할머니로 위협하니 심미연은 울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지만 울 수도 없었다.생각을 정리하고 그녀는 화장대에 가서 머리를 빗고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아래층, 차 안.강지한이 전화를 받고 있었다.차 문은 닫지 않았는데 남자의 얼굴은 반쯤 불빛 속에서 잘생긴 윤곽만 보였다.심미연은 그가 온지유와 전화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온지유와 통화할 때만 이렇게 부드러운 표정을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이 멈춘 그녀는 다가가서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그러면 좀 곤란할 것이다.강지한은 전화를 마치고 고개를 돌리다가 여자의 예쁜 눈동자를 마주했다.그 순간 마음속에 어느 정도 기쁨이 일렁이었다.마치 예전에 집에 돌아가면 여자의 모습을
심미연은 이제 강씨 가문 사모님을 직업으로 생각하는 간가?그녀는 그에게 협조하고 있다. 사랑하는 게 아니라 말이다.분명히 이것은 그가 원하는 결과인데 왜 그는 여전히 즐겁지 않은 걸까.심미연은 다리에 올려놓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감정에 조금도 기복이 없었다.그녀는 일에 대해 줄곧 진지한데 이 일은 외할머니가 더 나은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해준다.외할머니의 건강만 좋아지신다면 자기를 팔더라도 상관없었다.강지한은 기분이 좋지 않아 차를 빨리 몰았고 가는 내내 두 사람은 더는 아무런 교류도 없었다.강지한도 말을 하지 않고 심미연도 말을 하지 않았다.곧 차가 레스토랑 문 앞에 세워졌다.문 앞을 지키고 있던 직원에게 차 키를 던져주고 주차를 맡긴 강지한은 심미연을 향해 구부린 팔을 내밀며 많다.“팔짱 껴.”심미연은 그를 힐끗 보고 순순히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잡고 억지로 다정한 척했다.“울상 짓지 말고 미소 좀 지어.”강지한은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잡고 힘을 주어 얼굴에 옅은 자국을 냈다.심미연 눈썹을 찡그린 채 다행히 옅은 화장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이 힘으로 화장이 모두 번졌을 것이다.“언니, 형부, 오셨어요? 빨리 들어가세요!”심서연의 목소리에 심미연은 들어 고개를 들어 눈앞의 심서연를 바라보았다.특별히 빨간 외투를 입어서 그녀의 피부는 더 검게 보였다.방금 외출할 때 그녀는 강지한이 어디로 밥을 먹으러 가는지 물어본 적이 없는데 뜻밖에도 그녀를 여기에 데리고 올 줄은 몰랐다.현재 자신이 맡은 역할을 잘 알고 있어서 그녀의 마음은 매우 평온했다.이것은 단지 일에 불과하니 정서적 안정을 유지해야 한다.“언니, 얼굴이 왜 안 좋아 보여? 아픈 거 아니야?”심서연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고 두 눈은 심미연 몸을 왔다 갔다 하며 훑어보았다.그녀는 철이 들었을 때부터 주변 사람들로부터 심미연이 예쁘고 다재다능하며 배우는 대로 할 줄 아는 천재 어린이라는 말을 들었다.가끔 사람들은 심미연을 추켜세움과
박유진은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고 손을 뻗어 심서연의 손을 잡고 말했다.“제대로 앉아.”그와 심서연 사이는...거래일 뿐이었다.사랑하는 척하는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면 되는데 그러는 자신에게 구역질이 났다.“룸에는 모두 지인들이니 유진 씨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심서연은 박유진의 보기 흉한 안색을 보지 못한 척하면서 한쪽 팔을 다시 뻗어 그의 허리를 껴안고는 나긋나긋하고 매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심미연에게 어떻게 질 수 있겠는가.짙은 향수 냄새가 코에 파고들자 박유진의 부드러운 표정이 순식간에 차가워지더니 심서연를 밀치고 일어섰다.“나가서 담배 피우고 올게.”더 있으면 그는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온화한 가면을 직접 뜯어낼 것 같았다.“박유진! 가지 마!”심서연은 씩씩거리며 일어나 그의 팔을 잡아당겨 가지 못하게 했다.그가 가면 그녀의 체면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이미자의 안색이 좀 안 좋게 변했다.심서연은 횡포만 부리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모르니 앞으로 어떻게 박씨 가문의 안주인이 될 것인지 걱정스러웠다.박지훈은 침묵한 채 마음속으로 심서연이 박씨 가문에 시집오는 것을 찬성하지 않았지만 박유진이 원한다니 그도 막기가 쉽지 않았다.심동현이 눈살을 찌푸리며 얼른 조은하에게 눈짓하자 조은하가 급히 일어나서 심서연을 말렸다.“빨리 앉아. 여기서 창피하게 굴지 말고.”“엄마...”심서연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지만 조은하는 표정이 어두워진 채 그녀를 의자에 눌러 앉혔다.“조용히 있어.”그녀는 박유진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심서연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녀가 이런 장소에서 엉뚱한 행동을 하는 것을 방임할 수는 없었다.박씨 가문은 아직 그녀와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일단 사이가 틀어지면 박씨 가문은 여러 가지 구실을 찾아 결혼을 지연시킬 것이다.심서연은 엄마가 화를 내는 것을 보고 얌전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조은하는 그녀를 힐끗 본 후 박유진에게 말했다.“유진아, 너 담배 피우러 가.”박유진은 강지한 앞에
눈을 마주친 박지훈과 이미자는 마음이 서로 달랐다.박지훈은 박유진이 심서연과 결혼하면 앞으로 강지한과 한 가족인데, 만약 바렐 그룹과 이노 하이브가 손을 잡을 수 있다면 바렐 그룹의 미래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이미자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건 박유진이 심서연과 결혼한 후에 심미연에 관한 생각을 완전히 끊으리라는 것이다. 아들은 그녀가 키웠으니 그가 어떤 사람인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책임감이 있고 감정을 중시한다. 유일한 결점은 너무 감정이 한결같다는 것이다.그때 강지한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언제 밥을 먹어요? 심미연이 배가 고파요.”심미연은 식사 시간이 항상 규칙적이었는데 매일 저녁 6시 반에 식사를 시작했다.갓 결혼한 그 기간에 심미연은 매일 그가 집에 돌아와 함께 먹기를 기다리며 음식을 한 번또 한 번 데웠다. 후에 그녀는 그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밥을 먹고 바로 치웠다. 때로는 그가 집에 돌아와 조금도 먹지 못했다.지금 벌써 8시가 다 되어 가니 그녀는 틀림없이 배가 고플 것이다.가뜩이나 몸이 안 좋은데 조금만 더 굶으면 몸이 견디지 못하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심미연은 눈을 들어 그를 한 번 보고는 마음속으로 어이없게 웃었다.그녀의 부모는 그녀의 생사도 돌보지 않는데 그녀가 배고프든 말든 상관할 리 없지 않은가?강지한이 아무리 그녀가 배고플 거라고 해도 그들은 못 들은 척하며 얼버무릴 뿐이다.조은하는 심미연이 배가 고프다는 말을 듣고 조건반사처럼 욕설을 퍼부었다.“굶어 죽어도 싸!”어려서부터 심보가 사나운 사람인데 누가 그녀의 생사에 관심이 있겠는가.차가운 눈빛으로 조은하를 바라보는 강지한의 몸에서는 차가운 기운이 흘렀다.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심미연의 등에 흉측한 흉터가 있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심미연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고 심미연은 어머니가 화상을 입었다고 말했다.그는 사람을 찾아 두 사람의 DNA를 조사했는데 모녀가 확실했다.그는 어떻게 딸에게 그렇게 독한 어머니가
심미연은 흩날리던 생각을 차분히 거두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궁금한 듯 물었다.“우리 태하 진짜 똑똑하네.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거야?”아직 겨우 세 살이지만 심태하의 마음은 놀랄 만큼 세심하고 예민했다. 또렷한 눈망울은 마치 세상의 감정 흐름을 꿰뚫어 보는 듯했고 그렇게 꼼꼼히 살피는 모습에 심미연은 종종 놀라곤 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박유진이 심태하를 정성스럽게 길러온 시간이 아이를 이토록 똑똑하고 배려 깊게 자라게 만든 것이다.“아까 아빠랑 통화할 때 엄마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어요. 뭔가 걱정하는 게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저한테 말 걸었을 때도 평소처럼 웃고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엄마가 혹시 슬픈 건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어요.”심태하의 말은 또렷하면서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단어 하나하나에 엄마를 향한 깊은 애정과 이해가 담겨 있었다.심태하가 보기에 박유진이 집에 있을 땐 심미연은 늘 기분이 좋아 보였고 환하게 웃는 얼굴이 참 예뻤다.“엄마가 안 웃었어?”심미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녀석, 정말 못 말려.’겨우 세 살에 이 정도인데 나중에 더 크면 얼마나 영리해질지.“네, 안 웃었어요.”심태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심태하의 목소리는 여전히 앳됐지만 말투는 왠지 어른스러웠다. 꼭 사람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기라도 한 듯했다.심미연의 마음은 그 말 한마디에 확 풀렸다. 그녀는 아들의 코끝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자, 얼른 아침 먹자.”그녀의 말투엔 아낌없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이 아이는 정말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다.“아빠가 보고 싶으면 아빠한테 전화하면 되죠!”심태하가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윙크했다.‘나도 아빠가 보고 싶은데 엄마가 안 보고 싶을 리가 없지. 맞아, 분명 그럴 거야!’심미연은 그 말에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네 말대로 할게.”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박유진이 보고 싶지만 그에게 전화하진
하지만 그 깊은 애정과 놓기 싫은 마음은 오히려 박유진을 현실이라는 갈림길 앞에서 망설이게 만들었다.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심미연만 괴로운 상황에 빠질 것이라는 걸. 그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자신의 망설임으로 인해 흐려지는 건, 그녀의 세상이 자신 때문에 흔들리는 건 차마 보고 있을 수 없었다.그렇다고 그녀를 놓아버리면 영원히 잃게 될 텐데... 그 아픔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박유진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아빠, 왜 말이 없으세요? 허락한 거죠?”심태하의 목소리는 천진난만하게 들떴다. 마치 머릿속에 따뜻한 한 가족의 그림이 그려지기라도 한 듯.‘아빠가 돌아오면 엄마랑 나랑 셋이 모여 저녁 먹고 같이 웃고 얘기하고...’심태하의 마음속에서 그려낸 가장 순수한 행복의 모습이었다.그러나 그 순수한 소망 앞에서 박유진의 마음은 송곳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그는 알고 있다. 이번 결정을 가볍게 내려서는 안 된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게 하려면 정말 신중해야 했다.하지만 사랑과 책임 사이에서 그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그는 지금 사랑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심미연과 아이를 지킬 방법을 찾고 있다.하지만 그런 길이 과연 있을까? 이 선택은 너무나도 어려웠다.“아빠, 나 이렇게 열심히 얘기하고 있는데 왜 아무 말도 안 해요?”심태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미간을 찌푸렸다.평소 같았으면 박유진은 재밌는 얘기도 해주고 자기 말에 웃어주었을 텐데, 오늘따라 너무 이상했다.‘혹시... 내가 말실수했나?’그때 박유진의 다급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심태하의 귀에 들려왔다.“태하야, 곧 비행기가 이륙해서 아빠가 휴대폰을 꺼야 돼. 오늘 밤에 다시 이야기하자. 꼭이야.”박유진은 심미연을 당장이라도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고 말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네! 알겠어요, 아빠! 그럼 오늘 밤에 꼭 통화해요. 약속했으니까 안 하면 안 돼요!”심태하의 목소리에 눈치채기 힘든 외로움이 살짝 섞여 있었다.
심미연은 멍해졌고 아까 자신이 박유진에게 연락을 시도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날아온 건 단 한 줄의 차갑고 무미건조한 메시지. 기대했던 목소리는 끝내 들을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 아들 심태하가 전화를 걸자 박유진은 놀랍게도 전화를 받았다.“아빠, 지금 어디예요? 이틀 뒤면 제 생일이에요! 아빠가 놀이공원 같이 가자고 했던 거 잊으시면 안 돼요!”심태하의 말투엔 아이 특유의 해맑은 기쁨이 가득 담겨 있었고 단어 하나하나가 살아서 튀어나오는 듯했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박유진의 목소리는 한겨울 얼음도 녹일 만큼 다정했다.“아빠 지금 진성으로 가는 비행기 타러 가는 중이야. 곧 이륙이라 휴대폰 꺼야 해. 진성에 도착하면 바로 전화할게. 약속!”그 말에는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득 실려 있었다.사실 박유진은 심태하가 생일 이야기를 할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어젯밤에 워낙 정신이 없어 그런 중요한 약속마저 깡그리 잊고 있었던 것이다.“아빠가 보내준 선물 잘 받았어요!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심태하는 아직 다 하지 못한 말이 많은 듯 아빠에게 털어놓고 싶은 게 가득한 눈치였다.박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햇살이 쏟아져 내려 유난히 눈부셨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가늘게 떴고 그 강렬한 빛이 속눈썹 아래에 그림자를 드리웠다.그 순간 그의 마음속엔 오로지 한 사람, 심미연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그녀와 떨어져 있는 모든 시간이 하나같이 그리움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그리움이 너무 커서 박유진은 당장이라도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달려가고 싶을 만큼 벅찼다.“아빠... 지금 너무 힘들죠? 그럼 회사 팔고 그냥 집으로 돌아와요. 제가 돈 많이 벌어서 아빠랑 엄마 다 먹여 살릴게요!”심태하의 순수한 눈빛에 진심 어린 다짐이 담겨 있었다. 그에겐 돈을 많이 벌어서 가족을 지킬 거라는 꿈이 있었다.심미연은 그런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통통한 볼살에 아직 아기 티가 남았지만 심태하의 마음속
심미연 역시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이지연이 잘못 알아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지연 씨, 다시 한번 제대로 확인해 봐요. 결과가 똑같은지 꼭 잘 봐요.”혹시라도 착오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그럼 제가 다시 확인해 볼게요! 뭐든 나오면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보스, 그럼 끊을게요!”이지연은 말 끝나기가 무섭게 전화를 뚝 끊었다.심미연은 휴대폰을 쥔 채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까 이지연이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이건명과 문소영이 예전에 그런 사이였다고?’그런데 왜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걸까? 아무도 깊게 파고들지 않았기에 묻혀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결혼 전에 누굴 만나든 그건 사생활인데 그걸 굳이 숨긴 이유가 뭘까?심미연이 이 모든 게 어딘가 석연치 않다고 느끼고 있을 즈음, 밖에서 누군가 소리쳤다.“엄마! 나 배고파요! 우리 빨리 아침 먹으러 가요!”심미연은 생각을 접고 고개를 들어 활짝 웃는 아들을 바라봤다.“그래, 가자.”심태하가 달려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엄마, 며칠 뒤면 제 생일이잖아요. 생일 파티에 상미도 초대하고 싶은데, 그래도 돼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젯밤의 친자 확인 결과가 떠올랐다. 강상미는 그녀의 딸, 즉 심태하와 쌍둥이였다. 그래서 둘의 생일도 당연히 같았다.심태하의 생일 파티에 강상미가 온다면 그건 곧 둘이 같이 생일을 보내게 되는 셈이다.“엄마, 안 돼요?”심미연이 대답하지 않자 심태하가 다급히 물었다.그녀는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켰다.“그럼, 당연히 초대해야지. 너희 둘이 같이 생일 파티하면 되겠네.”“정말요? 엄마 최고! 사랑해요!”심미연은 아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태하야, 너 엄마가 어제 말한 거 잊은 거 아니지? 상미가 바로 태영이야. 너랑 똑같이 엄마 배에서 나왔고 너희 둘은 쌍둥이야. 그래서 생일도 똑같아.”강상미에 관한 일은 이미 방원호에게 조사를 맡긴 상태였다. 꼭 알아내야 한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