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지유의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듣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육현성은 또다시 그 주범이 심미연이라고 생각했고 날 잡아서 심미연과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 같았다.만약 말로 통하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무력을 쓸 수밖에.“지유 씨,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무조건 도울게요. 그런데 지금은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않아도 돼요. 전 이만 갈 테니까 푹 쉬어요.”육현성은 말을 마친 뒤 바로 자리를 떴다.병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서야 온지유는 침대에서 일어나 손에 감은 붕대를 풀었다.사실 상처는 그리 깊지 않았고 거즈에 묻은 피도 그녀가 일부러 묻혀놓은 것이다.자살 시도도 당연히 쇼였고 상처는 살짝 났지만 빠르게 아물었다.이제 자살 쇼로도 강지한을 못 붙잡았으니 무조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한창 달게 자고 있던 심미연은 갑자기 누가 몸을 누르고 있는 듯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 잠에서 깼다.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건 강지한의 얼굴이었는데 무드등의 따뜻한 빛이 남자의 얼굴에 드리워지니 한층 다정해 보이기도 했다.그러다가 문득 뱃속의 아이가 생각나면서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지한 씨, 왜 그래요?”잠에서 금방 깨어난 탓에 목소리는 한결 부드러웠는데 괜히 어두운 불빛 때문에 더욱 야하게 들렸다.“방금까지 계속 나랑 하자고 애원하길래 난 또 시작해도 되는 줄 알았지.”강지한의 말에 심미연은 어리둥절했다.그와 3년 동안 같은 침대를 쓰면서 매일 그의 품 안에서 잤던 건 사실이다.하여 잠결에 자연스레 또 그의 품에 기어들어 갔나 싶었다.‘그렇다고 해도 아까 분명 자기 전에 이불을 각자 덮을 수 있도록 두 개로 나눴는데 왜 지금 내가 저 사람의 품에 안겨 있는 걸까?’“우리 사모님께서 원한다고 하시는데 제가 어찌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강지한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한껏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의 귀를 간지럽혔다.방금 진짜로 심미연이 그의 이불 안으로 파고들면서 자기 품에 안기는 바람에 그도 잠에서 깼다.그리고 쌕쌕거리면서 세상모르
심미연은 짜릿함에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지한 씨, 하지 마요!”“끝까지 안 하고 그저 기분이 좋아지게만 해줄게. 그래도 싫어?”“싫어. 난 잘 거야!”심미연은 한껏 단호하게 답했지만 남자가 억지로 강요하면 어쩌나 걱정되었다.“내가 이렇게나 열심히 서비스해 주는데도 싫다고? 사모님, 거짓말 좀 그만하시죠.”남자는 부드럽게 심미연의 몸을 훑으며 또 끊임없이 그녀의 귀에 입김을 내뿜었다.더는 참을 수 없었던 심미연은 그를 힘껏 밀쳐내고 침대에서 한 바퀴 구른 뒤 조심스레 배를 움켜쥐고 침대 한쪽에 앉았다.그제야 강지한과 거리를 둘 수 있었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자는 순간 낯빛이 어두워졌다.눈앞의 여자는 지금 명백히 자신과의 잠자리를 거부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박유진 때문이야?’‘아까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까?’심미연은 그가 아무런 말도 없이 빤히 바라보자 괜히 마음에 찔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그러자 강지한은 단번에 다시 그녀의 팔을 잡아당겨 몸 아래에 깔고 그녀의 잠옷을 열어젖혔다.“넌 아직 내 아내야. 그러니까 부부의 임무를 다하는 건 당연하고 날 거부할 권리가 없다는 소리야!”분명 심미연과 박유진 사이에 자기가 모르는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한 강지한은 오늘 무조건 그녀와 잠자리를 가져야겠다고 마음먹었다.빠르게 그녀의 잠옷이 활짝 열렸는데 아직 실내 온도가 차가운 탓에 심미연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지한 씨, 이건 부부로서의 임무가 아니라 명백한 성폭행에 해당해서 내가 고소할 수도 있어!”심미연은 죽을힘을 다해 반항했지만 남자는 끄떡도 없었다.“네 실력만 믿고 지금 우리 쪽 법률팀과 싸우겠다는 거야? 심미연 씨, 꿈도 참 야무지네요.”여자의 하얀 피부를 보고 있으니 강지한은 또다시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순간 남자는 끓어오르는 욕망을 참지 못해 한껏 거칠게 움직였다.심미연은 긴장되고 두려운 마음에 침대 머리맡에 손을 뻗다가 손에 집히는 핸드폰으로 그의 머리를 힘껏 내리쳤다
심미연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으면 그녀가 지난달 생리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다.“너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고 지금 나를 탓하는 거야?”강지한은 자기도 모르게 이마를 짚다가 계속 흐르는 피를 보고 다시 얼굴이 어두워졌다.아내랑 한번 잠자리를 가지려다가 맞아서 머리가 깨졌다는 소문이 퍼지기라도 하면 어디 얼굴을 들고 다닐 수나 있을까 싶었다.심미연은 그의 이마를 보고 더 이상 입씨름하기 싫어 곧바로 옷방으로 향했다.그리고 빠르게 캐주얼한 차림으로 나오면서 강지한에게 욕실 가운 하나를 건넸다.“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옷 갈아입을 시간이 없을 것 같아. 대충 이거라도 먼저 걸쳐.”강지한이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그녀에게 되물었다.“지금 나더러 알몸으로 병원에 가라고? 사모님, 괜찮으시겠어요?”순간 심미연은 얼굴이 화끈거려 재빨리 속옷 한 장을 그에게 다시 건네줬다.“빨리 입어!”“날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스스로 입으란 거야?”강지한은 코웃음을 치며 침대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결혼한 지도 이제 3년이 넘어가지만 심미연은 여전히 이런 게 많이 쑥스러운 것 같았다.고민 끝에 심미연은 어쩔 수 없이 이를 악물고 허리를 굽혀 손을 뻗었다.“발 들어.”그의 알몸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니지만 막상 이런 상황에 부딪히니 너무 부끄러웠다.“피가 눈에 들어가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어디로 다리를 뻗으면 될까?”강지한은 순간 그녀를 놀리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담담하게 말했다.“지한 씨!”심미연도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지만 그의 뻔뻔함에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그럼 안 입을래. 그냥 이대로 병원에 가자.”강지한은 말을 마친 뒤 곧바로 일어서서 알몸 그대로 자리를 뜨려 했다.그 모습에 순간 당황한 심미연이 다급히 그를 불러 세웠다.“잠깐만. 내가 입혀줄게!”강지한은 그제야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짓더니 침대에 다시 앉아 두 다리를 벌렸다.“지금 내가 과다 출혈로 죽는 걸 보고 싶어서 일부러 느릿느릿 움직이는 거지? 내가 죽으면 내
“지한 씨, 먼저 올라가. 난 주차해 놓고 바로 따라갈게.”심미연은 최대한 자연스레 말했지만 역시나 호락호락하지 않은 강지한이 눈썹을 들썩이며 물었다.“날 이렇게 만들어놓고 지금 그냥 튀려는 건 아니지?”“아니야!”심미연은 그저 너무 부끄러울 뿐이었다.“그럼 나도 같이 갈래.”강지한은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는지 덤덤하게 말했다.심미연은 점점 조급해진 마음에 입술을 꽉 깨물고 그를 다시 설득했다.“빨리 내려. 오늘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왜 자꾸 따라오겠다고 고집부리는 거야!’“심미연, 솔직하게 말해. 이대로 가려고?”왠지 불안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분명 도망칠 것 같았다.‘그렇게 내버려둘 수는 없지!’“알겠으니까 빨리 내려.”심미연은 어쩔 수 없이 시동을 끈 뒤 차에서 내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모자 달린 후드라도 입을걸, 그러면 얼굴이라도 조금 가릴 수 있었을 텐데.’하지만 남자는 차에서 꼼짝하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심미연은 깊은 한숨을 한 번 내쉰 뒤 반대쪽 차 문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내려.”그러자 강지한이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부축해 줘.”“...”어리광 부리는 그의 모습에 심미연은 할 말을 잃었지만 문득 가운에 묻은 피를 보고는 재빨리 팔을 뻗어 부축해 줬다.“머리 부딪히지 않게 조심해.”작은 소리로 속삭이는 그녀에게 고개를 돌리자 어슴푸레한 불빛이 그녀의 반쪽 얼굴만 비쳐 유난히 신비롭고 아름답게 느껴져 한참 동안 뚫어져라 바라보았다.“이따 어떻게 다쳤는지 물어보면 무조건 실수로 넘어졌다고 해. 헛소리하지 말고!”심미연은 얼굴이 빨개진 채 다시 그에게 당부했다.혹시나 사실이 밝혀지면 이제부터 제대로 얼굴을 들고 밖에 나갈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하지만 강지한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더니 그녀에게 되물었다.“날 때린 게 부끄럽긴 한가 봐?”사실 아까 처음 맞았을 때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심미연의 목을 당장에라도 졸라
강지한이 거의 그녀에게 눕다시피 기댄 바람에 엘리베이터에 오르니 심미연은 이미 온몸이 땀범벅이었다.강지한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벽에 기대어 한참 동안 바라보았는데 어디 극한 훈련이라도 하고 온 사람처럼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사실 심미연의 얼굴은 보고만 있어도 사람을 기분 좋아지게 만들었다.위층으로 올라간 뒤 강지한은 곧바로 응급실로 향했다.솔직히...응급실에 갈 만큼 심하게 다친 건 아니다.하지만 병원 관계자들은 혹시나 강지한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걱정되어 재빨리 응급실로 안내했다.응급실 문이 닫힌 뒤에야 심미연은 의자에 앉아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오는 길 내내 강지한은 마치 뼈가 없는 사람처럼 그녀에게 기댔는데 힘들어 죽을 뻔했다.이제 숨 좀 돌리려고 하는데 마침 핸드폰이 울렸다.발신인을 확인해 보니 신하린이었는데 그제야 오늘 병원에 안 간 사실을 깨닫고 재빨리 통화버튼을 눌렀다.“하린아, 내가 다 설명할게...”“심미연, 너 진짜 강지한 씨를 때려서 그 사람이 지금 병원에 입원했어?”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신하린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심미연이 어리둥절해서 되물었다.“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설마 자기 핸드폰에 도청 장치라도 달았나 싶었다.“네가 강지한 씨를 폭행했다는 사실이 지금 실검에 떴어. 그리고 강지한 씨가 가운만 입고 너한테 기댄 채 병원에 온 사진이 인터넷에서 마구 퍼지고 있거든.”신하린은 말하다가 갑자기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미연아, 잘했어! 강지한 같은 인간은 좀 맞아야 해.”“나 때문에 다친 건 맞는데 일부러 때린 건 아니야. 억지로 잠자리를 요구해서 내가 핸드폰으로 머리를 찍어버렸어.”심미연은 억울한 얼굴로 신하린에게 해명했다.그나저나 이 일이 실검에 올랐다는 건 모든 사람이 다 알게 되었다는 소리다.‘할아버지께서 듣고 또 쓰러지는 건 아니겠지?’또한 시어머니인 문소영은 원래부터 심미연을 달가워하지 않았는데 이번 일까지 더해지면 분명 가만두지 않을 것 같았다.하여 혹시나
얼굴이 뜨겁게 화끈거렸다. 심미연은 고개를 들어 온지유의 살기 어린 눈빛을 마주했다. 이어 얼굴을 매만지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키는 온지유보다 살짝 컸기에 내려다보며 차갑게 웃었다. “나랑 지한 씨가 부부 사이에서 하는 장난일 뿐인데 네가 뭔 상관이야!” “이 뻔뻔한 년이!” 온지유가 손을 들고 다시 그녀를 때리려 했지만 심미연은 눈빛이 차갑게 변하더니 단번에 그녀의 손목을 잡고는 재빨리 반대 손으로 얼굴을 거세게 내리쳤다. “내가 뻔뻔하다고? 강지한이 아직 내 합법적인 남편인 거 잊지 마! 너무 오래 남의 남편한테 들러붙어 있더니 환각까지 생긴 거야?” 평소 강지한과 온지유에 대한 실시간 검색어를 볼 때마다 그녀는 애써 외면하려 하며 자기 소모를 하지 않으려 했다. 결국 인생은 자기 것이니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저 가치 없는 사람 때문에 자신을 망쳐서는 안 된다. 하지만 지금 온지유는 당당히 여기 와서 그녀를 때리며 따지고 있었다. 진짜 자신을 만만하게 보고 마음대로 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온지유는 얼굴에 화끈거리는 통증을 느끼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심미연을 바라보았다. “네가 감히 나한테 손을 대?” ‘지금까지 강지한을 위해 참아왔던 온지유가 아무리 도발해도 반응하지 않더니 오늘은 대체 무슨 일이야? 감히 반격해?’ “네가 먼저 친 거잖아. 나랑 무슨 상관이야?” 온지유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분명히 말하는데 앞으로 또 날 자극하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어떻게든 되갚아줄 테니까 각오해!” 원래는 강지한과 빨리 이혼해서 온지유와 잘되도록 해주려 했었다. 지금은 외할머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남아야 하지만 앞으로 온지유와의 갈등은 끊이질 않을 것이며 그녀가 참을수록 온지유는 점점 더 나아갈 것이다. ‘이제 남자의 사랑도 받지 못하는데 왜 그런 뻔뻔한 불륜녀까지 참아줘야 해?’ 심미연은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온지유
심미연은 입가에 조용히 웃음을 띠며 눈꼬리를 올렸다. “그 사람 너 사랑한다면서 결혼은 안 해주고 불륜녀로 만들어? 완전 쓰레기네!”예전에 온지유가 그녀 앞에서 이런 말을 하면 그녀는 오랫동안 괴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에게 강지한은 평생의 연인이 아니라 그저 파트너일 뿐이다. 파트너에게 끝까지 변치 않기를 바란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 물론 그럴 수 없다! 그래서 온지유가 그런 말을 해도 이제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너 그때 뻔뻔하게 그 사람 침대에 올라가지 않았으면 너랑 결혼까지 했겠냐!” 3년 전, 강지한이 심미연과 결혼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가슴 찢어질 듯한 아픔은 아직도 뚜렷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강지한이 평생 그녀만 기다리고 지켜줄 줄 알았다. 하지만 아무런 예고도 없이 결혼한다는 폭탄이 그녀에게 떨어졌다. 그녀가 심미연을 증오한 지 벌써 3년! 심미연을 몇 번이고 죽여버리고 싶었던 적이 많았다. “너도 뻔뻔하게 그 사람 침대에 올라갔는데 왜 널 아내로 안 받아들이는 걸까? 내가 더 예쁘거나 내가 더 괜찮아서? 스스로 반성해 봐!”복도에는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고 심미연은 온지유와 크게 싸우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목소리를 낮췄다. 그녀는 마치 별것 아닌 일을 얘기하듯 얼굴에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심미연의 말은 칼날처럼 온지유의 마음을 파고들었고 그 고통에 이성을 잃은 그녀는 미친 듯이 심미연에게 달려들며 얼굴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심미연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고 등은 벽에 부딪혀 아프게 쑤셨다. 온지유는 허공을 잡고 말았고 몸은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바로 그때 응급실 문이 열리며 이마에 붕대를 감은 남자가 안에서 나왔다. 온지유가 분명 모든 책임을 그녀에게 떠넘길 거라 심미연은 속으로 큰일 났다고 생각했다. 본능적으로 머리 위의 CCTV를 잠깐 살폈고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되었다. “지한 씨, 나 배가 너무 아파...” 온지유의 목소리는 울먹임이 섞여 있었고 얼굴에는 눈물
“됐어. 말은 그만하고 바로 응급실로 가자.” 강지한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한 뒤 옆에 서 있는 심미연을 보며 얼굴을 굳혔다. “여기서 얌전히 기다려. 책임 회피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심미연은 ‘우리 아이’라는 말이 들리자 가슴이 순간 저릿하게 아파졌지만 잠시 숨을 고르며 차분히 말했다. “지한 씨, 내가 밀지 않았어. 여기 CCTV도 있으니까 당신이 직접 확인해 봐!” “굳이 볼 필요 없어. 난 내가 본 걸 믿어! 심미연, 만약 그 여자 뱃속의 아이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넌 각오해야 할 거야!” 강지한의 목소리는 뼛속까지 서늘해질 정도로 차가워져 있었고 그 날카로운 눈빛은 마치 두 자루의 칼처럼 심미연을 베어낼 듯했다. 심미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약 온지유 뱃속의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녀도 마음이 무거울 것이다. 결국 그날 그녀가 한 말이 온지유를 자극해 넘어지게 했으니까. 곧 의사가 도착했고 심미연은 닫힌 응급실 문을 한 번 보고서는 조용히 몸을 돌려 떠났다. 그녀의 뒷모습은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1층 로비에 내려와서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한참을 앉아 있었다. 기운을 차리고 나서야 천천히 밖으로 나섰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곧장 침대에 누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푹 자고 나니 아침이 되어 있었다. 눈을 떴을 때 옆자리엔 아무도 없었고 손을 뻗어보니 차갑기만 할 뿐 한 점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밤새 돌아오지 않은 게 분명했다. 온지유가 그렇게 되었으니 병원에 있는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이미 익숙해졌잖아. 안 그래?” 그녀는 감정을 추스르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신하린과 병원에 가기로 했으니 씻고 서둘러 내려가 아침을 먹었다. 임신하고 나서 그녀는 쉽게 배가 고파졌다. 어제 밤새 정신이 없었더니 아침에 참지 못하고 죽 한 그릇을 더 먹었다. 그 모습을 본 도우미 아줌마 임혜자는 웃으며 말했다. “사모님, 요즘 정말 잘
심미연은 흩날리던 생각을 차분히 거두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궁금한 듯 물었다.“우리 태하 진짜 똑똑하네.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거야?”아직 겨우 세 살이지만 심태하의 마음은 놀랄 만큼 세심하고 예민했다. 또렷한 눈망울은 마치 세상의 감정 흐름을 꿰뚫어 보는 듯했고 그렇게 꼼꼼히 살피는 모습에 심미연은 종종 놀라곤 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박유진이 심태하를 정성스럽게 길러온 시간이 아이를 이토록 똑똑하고 배려 깊게 자라게 만든 것이다.“아까 아빠랑 통화할 때 엄마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어요. 뭔가 걱정하는 게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저한테 말 걸었을 때도 평소처럼 웃고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엄마가 혹시 슬픈 건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어요.”심태하의 말은 또렷하면서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단어 하나하나에 엄마를 향한 깊은 애정과 이해가 담겨 있었다.심태하가 보기에 박유진이 집에 있을 땐 심미연은 늘 기분이 좋아 보였고 환하게 웃는 얼굴이 참 예뻤다.“엄마가 안 웃었어?”심미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녀석, 정말 못 말려.’겨우 세 살에 이 정도인데 나중에 더 크면 얼마나 영리해질지.“네, 안 웃었어요.”심태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심태하의 목소리는 여전히 앳됐지만 말투는 왠지 어른스러웠다. 꼭 사람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기라도 한 듯했다.심미연의 마음은 그 말 한마디에 확 풀렸다. 그녀는 아들의 코끝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자, 얼른 아침 먹자.”그녀의 말투엔 아낌없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이 아이는 정말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다.“아빠가 보고 싶으면 아빠한테 전화하면 되죠!”심태하가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윙크했다.‘나도 아빠가 보고 싶은데 엄마가 안 보고 싶을 리가 없지. 맞아, 분명 그럴 거야!’심미연은 그 말에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네 말대로 할게.”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박유진이 보고 싶지만 그에게 전화하진
하지만 그 깊은 애정과 놓기 싫은 마음은 오히려 박유진을 현실이라는 갈림길 앞에서 망설이게 만들었다.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심미연만 괴로운 상황에 빠질 것이라는 걸. 그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자신의 망설임으로 인해 흐려지는 건, 그녀의 세상이 자신 때문에 흔들리는 건 차마 보고 있을 수 없었다.그렇다고 그녀를 놓아버리면 영원히 잃게 될 텐데... 그 아픔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박유진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아빠, 왜 말이 없으세요? 허락한 거죠?”심태하의 목소리는 천진난만하게 들떴다. 마치 머릿속에 따뜻한 한 가족의 그림이 그려지기라도 한 듯.‘아빠가 돌아오면 엄마랑 나랑 셋이 모여 저녁 먹고 같이 웃고 얘기하고...’심태하의 마음속에서 그려낸 가장 순수한 행복의 모습이었다.그러나 그 순수한 소망 앞에서 박유진의 마음은 송곳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그는 알고 있다. 이번 결정을 가볍게 내려서는 안 된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게 하려면 정말 신중해야 했다.하지만 사랑과 책임 사이에서 그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그는 지금 사랑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심미연과 아이를 지킬 방법을 찾고 있다.하지만 그런 길이 과연 있을까? 이 선택은 너무나도 어려웠다.“아빠, 나 이렇게 열심히 얘기하고 있는데 왜 아무 말도 안 해요?”심태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미간을 찌푸렸다.평소 같았으면 박유진은 재밌는 얘기도 해주고 자기 말에 웃어주었을 텐데, 오늘따라 너무 이상했다.‘혹시... 내가 말실수했나?’그때 박유진의 다급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심태하의 귀에 들려왔다.“태하야, 곧 비행기가 이륙해서 아빠가 휴대폰을 꺼야 돼. 오늘 밤에 다시 이야기하자. 꼭이야.”박유진은 심미연을 당장이라도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고 말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네! 알겠어요, 아빠! 그럼 오늘 밤에 꼭 통화해요. 약속했으니까 안 하면 안 돼요!”심태하의 목소리에 눈치채기 힘든 외로움이 살짝 섞여 있었다.
심미연은 멍해졌고 아까 자신이 박유진에게 연락을 시도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날아온 건 단 한 줄의 차갑고 무미건조한 메시지. 기대했던 목소리는 끝내 들을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 아들 심태하가 전화를 걸자 박유진은 놀랍게도 전화를 받았다.“아빠, 지금 어디예요? 이틀 뒤면 제 생일이에요! 아빠가 놀이공원 같이 가자고 했던 거 잊으시면 안 돼요!”심태하의 말투엔 아이 특유의 해맑은 기쁨이 가득 담겨 있었고 단어 하나하나가 살아서 튀어나오는 듯했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박유진의 목소리는 한겨울 얼음도 녹일 만큼 다정했다.“아빠 지금 진성으로 가는 비행기 타러 가는 중이야. 곧 이륙이라 휴대폰 꺼야 해. 진성에 도착하면 바로 전화할게. 약속!”그 말에는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득 실려 있었다.사실 박유진은 심태하가 생일 이야기를 할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어젯밤에 워낙 정신이 없어 그런 중요한 약속마저 깡그리 잊고 있었던 것이다.“아빠가 보내준 선물 잘 받았어요!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심태하는 아직 다 하지 못한 말이 많은 듯 아빠에게 털어놓고 싶은 게 가득한 눈치였다.박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햇살이 쏟아져 내려 유난히 눈부셨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가늘게 떴고 그 강렬한 빛이 속눈썹 아래에 그림자를 드리웠다.그 순간 그의 마음속엔 오로지 한 사람, 심미연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그녀와 떨어져 있는 모든 시간이 하나같이 그리움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그리움이 너무 커서 박유진은 당장이라도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달려가고 싶을 만큼 벅찼다.“아빠... 지금 너무 힘들죠? 그럼 회사 팔고 그냥 집으로 돌아와요. 제가 돈 많이 벌어서 아빠랑 엄마 다 먹여 살릴게요!”심태하의 순수한 눈빛에 진심 어린 다짐이 담겨 있었다. 그에겐 돈을 많이 벌어서 가족을 지킬 거라는 꿈이 있었다.심미연은 그런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통통한 볼살에 아직 아기 티가 남았지만 심태하의 마음속
심미연 역시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이지연이 잘못 알아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지연 씨, 다시 한번 제대로 확인해 봐요. 결과가 똑같은지 꼭 잘 봐요.”혹시라도 착오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그럼 제가 다시 확인해 볼게요! 뭐든 나오면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보스, 그럼 끊을게요!”이지연은 말 끝나기가 무섭게 전화를 뚝 끊었다.심미연은 휴대폰을 쥔 채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까 이지연이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이건명과 문소영이 예전에 그런 사이였다고?’그런데 왜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걸까? 아무도 깊게 파고들지 않았기에 묻혀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결혼 전에 누굴 만나든 그건 사생활인데 그걸 굳이 숨긴 이유가 뭘까?심미연이 이 모든 게 어딘가 석연치 않다고 느끼고 있을 즈음, 밖에서 누군가 소리쳤다.“엄마! 나 배고파요! 우리 빨리 아침 먹으러 가요!”심미연은 생각을 접고 고개를 들어 활짝 웃는 아들을 바라봤다.“그래, 가자.”심태하가 달려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엄마, 며칠 뒤면 제 생일이잖아요. 생일 파티에 상미도 초대하고 싶은데, 그래도 돼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젯밤의 친자 확인 결과가 떠올랐다. 강상미는 그녀의 딸, 즉 심태하와 쌍둥이였다. 그래서 둘의 생일도 당연히 같았다.심태하의 생일 파티에 강상미가 온다면 그건 곧 둘이 같이 생일을 보내게 되는 셈이다.“엄마, 안 돼요?”심미연이 대답하지 않자 심태하가 다급히 물었다.그녀는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켰다.“그럼, 당연히 초대해야지. 너희 둘이 같이 생일 파티하면 되겠네.”“정말요? 엄마 최고! 사랑해요!”심미연은 아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태하야, 너 엄마가 어제 말한 거 잊은 거 아니지? 상미가 바로 태영이야. 너랑 똑같이 엄마 배에서 나왔고 너희 둘은 쌍둥이야. 그래서 생일도 똑같아.”강상미에 관한 일은 이미 방원호에게 조사를 맡긴 상태였다. 꼭 알아내야 한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