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미연이 깨어나 보니 자신은 병실 침대에 누워있었고 문득 맡게 된 소독수 냄새에 얼굴이 찌푸려졌다.신하린은 그녀가 깨어난 모습을 보고 그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미연아, 좀 괜찮아?”그러자 심미연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괜찮아.”그리고 재빨리 이불을 걷고 일어나려 하자 신하린이 그녀를 말렸다.“좀 더 자.”“마지막으로 외할머니 곁에 있고 싶어. 이제 날이 밝으면 재가 되어 그 작은 항아리에 담길 텐데 다시는 외할머니 얼굴을 볼 수 없잖아.”심미연의 말투는 유난히 차분하게 들렸는데 듣고 있던 신하린은 오히려 그녀가 더욱 걱정되었고 차라리 아까처럼 통곡하고 슬픈 감정을 마음껏 표현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저렇게 자기 감정을 계속 감췄다가는 한 방에 무너져 내리기 쉽기 때문이다.“미연아, 시간도 늦었는데 가지 마. 임산부라 너무 무리하면 안 되잖아.”신하린은 원래 임산부가 영안실에 자주 드나들면 그곳에는 음기가 많아 뱃속의 아이한테 안 좋다고 하려 했지만 차마 솔직하게 말을 뱉을 수 없었다.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심미연을 예뻐해 줬던 사람이 양경자였고 그런 사람이 지금 죽어서 마지막으로 보고 싶다는데 어찌 막을 수 있을까.“괜찮아. 잠깐만 보고 올 거야.”심미연이 조심스레 침대에서 내려왔다.그러자 신하린은 냉큼 그녀에게 외투를 건네주며 말했다.“감기 걸리지 않게 따뜻하게 입어.”심미연은 옷을 건네받고 나지막하게 답했다.“하린아, 고마워.”다행히 신하린이 곁에 있었기에 그나마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고맙긴!”외할머니가 돌아간 것도 모자라 강지한의 냉정한 태도에 분명 지금 큰 충격일 텐데 자기 앞에서도 애써 괜찮은 척하는 심미연이 너무 안쓰러웠고 그녀가 얼마나 괴로울지 가늠조차 가지 않았다.“지금 갔다가 외할머니 장례가 끝나는 대로 사무실에 갈게.”“사무실 일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네가 괜찮으면 다시 나와.”바보같이 이 와중에 일은 무슨 일인가 싶었다. 심미연은 그렇게 병실 밖으로 나갔고 신하린은 엘리베
영안실에서 나오자마자 심미연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외할머니의 사망 사건을 조사해 보기로 결심했다.이미 범인은 한 사람으로 추려졌는데 슬퍼할 일이 뭐가 더 있나 싶었다.그렇게 외할머니 빈소를 마련하자마자 조은하가 전화를 걸어왔다.심미연은 주소를 알려준 뒤 친척들에게도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양경자는 몇 년 동안 병원에서 쓸쓸하게 누워있었기만 했었는데 틀림없이 보고 싶은 사람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여 다른 장례식보다 시끌벅적하게 차려주고 싶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조은하가 심동현과 심서연을 데리고 도착했다.하지만 세 식구는 오자마자 먼저 양경자에게 인사하는 게 아니라 곧바로 심미연에게 다가갔다.그리고 심미연이 그녀인 걸 알아채기도 전에 조은하는 갑자기 그녀의 뺨을 내리쳤다.“외할머니의 재산만 노리고 지금까지 가둬놨다가 이제 돌아가시니까 가증스럽게 우리를 불러 마지막 인사하라고? 미연아, 좋게 말할 때 외할머니 유산 전부 다 내놔. 아니면 진짜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현장에 있던 조문객들이 순간 깜짝 놀랐다.친딸이라는 사람이 어머니 장례식장에 와서 향도 꽂기 전에 유산을 내놓으라고 협박하다니!정말 막장 드라마에서만 봤던 장면이다.심미연은 얼굴을 감싸고 있다가 다시 매서운 눈빛으로 조은하를 쏘아보았다.“양심이 없는 인간이란 건 진작에 알아챘지만 이 정도로 쓰레기일 줄은 몰랐네요. 오늘 이 자리에도 부르지 말아야 했는데!”저런 사람이 자기 어머니란 현실이 너무 가혹했다.양경자가 저런 사람도 친딸이라고 생전에 계속 그리워하지만 않았다면 오늘 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지금 우리 몰래 외할머니 유산을 혼자 꿀꺽하려는 거잖아!”조은하가 화를 못 참고 또다시 그녀를 때리려고 팔을 들자 심미연이 단번에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외할머니께 마지막 인사하라고 불렀지, 깽판 부리라고 부른 게 아니에요. 생전에 잘못을 저질렀던 일은 이제 사과해도 못 들으니까 외할머니께 무릎이라도 꿇어요!”조은하는 심미연보다 키가 작아 손목이 붙잡힌 채 그녀를 올려다
“상주로 왔다면 영전에 꿇어앉아 울어야 하지 않겠나요. 이경 씨, 심 부인을 영전 앞으로 모셔 무릎을 꿇게 해!”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심미연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고 그 자리에서 불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박유진을 보았다. 온화한 분위기와 얼굴에 떠오른 담담한 미소는 마치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다가가 모든 상처를 치유하는 듯했다. 그 순간 그녀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집에서 혼나고 울 때마다 박유진은 항상 다정하게 달래주었었다. 그녀의 감정은 언제나 그가 나타나면 금방 진정되곤 했다. 수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그의 존재는 여전히 그녀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다. 반면 조은하는 강제로 끌려가 양경자의 영전에 무릎을 꿇게 되었다. 커다란 영정 사진 속 그 눈빛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선명하게 다가왔고 조은하는 그 눈을 무심코 한 번 바라보다가 공포에 질려 울기조차 잊어버렸다. ‘죽은 노인네가 여기서까지 나를 겁주고 있네!’ 뒤에서 조은하를 잡아끌려고 하던 신하린은 이 광경을 보고는 조용히 다시 자리로 물러났다. ‘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니 잘된 거지.’ 심서연은 박유진을 보고 얼굴에 밝은 미소를 가득 띠며 그에게 다가가 한층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 씨, 회사 일 바쁘다고 안 온다고 하지 않았어? 어떻게 이렇게 왔어?”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을 박유진에게 집중시키기 위해 일부러 이렇게 말한 것이다. 심씨 가문이 하룻밤 사이에 몰락하며 그들은 완전히 무일푼이 되었다. 다행히 떠나기 전 몇 벌의 옷과 보석, 가방 등을 챙겨 팔아 겨우 호텔에서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고 가족들 모두 수입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곧바로 돈이 바닥날 게 뻔했다. 그래서 오늘 그들은 심미연에게 유산을 받으러 온 것이다. 그런데 박유진이 갑자기 나타나자 그녀는 유산 따위는 제쳐두고 일단 박유진을 붙잡아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녀가 박 부인이 되기만 하면 남은 인생은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박유진은 어린 시절부터 심미연이 자라는 모습을 봐왔기에 그녀의 성격을 모를 리 없었다. 강준형이 그녀를 그토록 아끼는 데도 알리지 않았다는 건 분명 그녀와 강지한 사이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짐작은 했지만 심미연이 스스로 말하지 않는 한 그 역시 굳이 물어볼 생각이 없었다. “어젯밤 한숨도 못 잔 거 아니야? 눈이 벌게져 있잖아. 얼른 가서 좀 쉬어.” 강지한이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고도 제대로 아껴주지 않는 모습에 박유진은 꼭 한 번 제대로 혼을 내주고 싶었다. “안 피곤해. 쉬지도 않을 거야.”심미연은 고집스럽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할머니를 곁에서 지켜드릴 시간이었고 그녀는 이 자리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박유진은 설득이 안 되자 그녀 곁에 남기로 했다. 혹여라도 심미연이 쓰러지게 된다면 바로 병원으로 데려갈 수는 있으니까. 박유진이 심미연과 다정하게 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심서연은 이를 갈며 분노가 치밀었다. 이 남자는 분명 자신과 한 끗 차이로 결혼할 뻔했던 사람인데 말이다. 심동현은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는 광경을 보며 속으로 계산하기 시작했다. 심서연은 이제 쓸모가 없어졌다! 그가 붙잡을 수 있는 사람은 심미연뿐이었다. 조은하는 심미연을 당장이라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 강지한 하나만으로 심씨 가문을 몰락시킨 것도 모자라 이제는 박유진까지 끼어들었다. 둘이 합치면 그들은 아예 다시 일어서지 못할 처지로 몰릴지도 모른다. ‘심미연 이년이 정말 재주는 꽤 있는 것 같네.’‘아쉽게도 어릴 적부터 우리와 전혀 정을 쌓지 않았으니 우리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거지!’ 그러나 심미연은 이 세 사람의 속내를 알 리 없었고 박유진은 곧 그들을 내보냈다. 심씨 가문 일가가 떠난 후 조문객들 사이에서 수군거림이 터져 나왔다. “유진 도련님은 심씨 가문과 언제 약혼을 깼지? 아무런 발표도 없었잖아!” “심씨 가문은 하룻밤 사이에 경성에서 사라졌고 지금은 가장 저렴한 호텔에
신하린은 문 쪽을 바라보다가 은발을 휘날리며 걸어오는 강준형을 보고 급히 심미연을 불렀다. “미연아, 네 할아버지 오셨어.”심미연은 잠시 멈칫하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강준형은 지팡이를 짚고 그녀 쪽으로 걸어왔다.“미연아, 이렇게 큰 일이 있는데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니!” 강준형은 그녀의 너무 지친 모습에 마음이 몹시 아팠다. ‘정말 바보 같은 애구나.’ ‘어떻게 혼자서 이 모든 걸 짊어지려고 했을까.’ 심미연은 일어나려 했지만 무릎이 너무 아파 일어설 수 없어 결국 무릎을 꿇은 채 말했다. “할아버지, 어떻게 오셨어요?”그녀는 강지한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서 강씨 가문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는 강지한에게 외할머니의 죽음을 이용해 책임을 피하려는 교활한 사람일 테니 그 이미지대로 남기로 했다. “하루 종일 연락도 안 되고 전화는 꺼져 있더라. 걱정돼서 사람을 시켜 확인해 봤더니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걸 알게 됐어. 미연아, 나는 네가 강지한 그 자식에게 마음이 떠난 걸 알아. 그런데 그놈은 그놈이고 나는 나야. 이런 일을 나한테까지 숨기지 말았어야지.”강준형은 빈소를 잠시 바라보며 심미연이 혼자 바쁘게 모든 걸 처리하는 모습을 생각하며 마음이 아팠다. ‘결국 이 모든 게 강지한 그 자식 때문이야!’ 강지한을 생각하니 강준형의 속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심미연도 연락이 안 됐고 강지한도 연락이 안 되었다. 고의로 잠적을 한 건지 뭔 일이라도 생긴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알아내면 반드시 그 자식에게 따지겠다고 생각했다. “너무 바빳어요. 핸드폰도 꺼져버려서 잊고 있었어요.”심미연의 목소리는 피곤함에 찌든 느낌이었다. “할아버지, 기사님이 데려다주신 건가요?” 그녀는 강지한에게 알려지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에 강준형에게 진짜 생각을 말할 리 없었다. 강준형은 심미연의 눈에 짙게 퍼져 있는 혈관과 창백한 얼굴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 “내가 사람을 데려왔어. 나머지 일은 그들이
그는 그냥 강준형에게 더 이상 강지한의 일을 강제로 강요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싶었다. 강지한 같은 사람은 절대로 다른 사람이 정해놓은 길을 따라갈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강준형은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미연이가 지난 3년 동안 겪은 그 모든 불공정한 대우는 다 내 잘못이야.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걸 인정하기가 싫어서 계속 모른 척하고 싶었어. 하지만 이제는 알겠어! 그만둘 거야. 미연이가 이혼을 원한다면 그건 그 자식이 감당할 문제야.” 3일 후 양경자의 장례식이 있었다. 하늘에는 잔잔한 비가 내리고 있었고 심미연은 검은 옷을 입고 우산을 쥔 채 묘비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차분한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아 보였다. 마치 외할머니가 영원히 떠난 것이 아니라 잠시 어디론가 여행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올 것처럼 말이다. 신하린은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그녀의 옆에 서 있었다. 3일 동안 심미연은 잠을 2시간 정도밖에 자지 않았다. 사실 심미연이 잠을 자지 않은 것보다 이 3일 동안 한 번도 울거나 소란을 피우지 않고 지나치게 조용했던 사실이 신하린을 더 두렵게 했다. 신하린은 심미연이 극단적인 생각이라도 할까 봐 두려웠다. 박유진이 다가와 신하린과 짧게 눈빛을 주고받은 뒤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연아, 외할머니는 이제 편히 잠드셨어. 집에 데려다줄게.” 이 3일 동안 그는 심미연에게 휴식을 취하라고 여러 번 말했지만 그녀는 전혀 듣지 않았고 그녀가 하루하루 지쳐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외할머니는 편히 안장되었으니 그녀가 잘 수 있도록 집으로 데려가야 했다. 심미연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오빠랑 하린이는 먼저 가. 난 할머니랑 좀 더 있다가 갈게.” “너 3일 내내 잠도 자지 않았잖아. 더 버티면 몸이 망가져!” 신하린은 목소리가 떨렸고 눈가는 이미 붉어져 있었다. 이 3일 동안 그녀는 심미연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신하린은 깜짝 놀라 손을 급히 떼었고 다시 돌아섰을 때 남자의 차가운 눈빛과 마주쳤다. 최근 며칠 동안 그의 전화를 피했던 신하린은 마음속에서 불안이 밀려왔다. 여기서 이 남자가 자신한테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 두려웠다. 박유진도 있는데 말이다. 이진영은 신하린의 창백한 얼굴을 보자 속에서 폭발할 듯한 분노가 일렀다. ‘이렇게 겁을 먹은 정도로 내가 무서운 거야?’ 신하린은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차가운 기운이 곧 폭발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급히 그 앞에 다가가 애교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긴 어떻게 왔어요?” “여긴 내 병원이야. 점검하러 왔는데 무슨 문제 있어?” 남자의 말투는 거칠었고 이미 화가 난 것이 분명했다. 신하린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그를 끌어당기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녁에 제가 직접 요리할게요. 함께 와서 먹을래요?” 심미연의 임신 사실이 절대 누설되지 않도록 이진영이 이미 말해둔 상태여서 신하린은 심미연을 이곳으로 데려왔지만 여기서 이진영을 만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정말 예상 밖이었다. “나한테는 수석 셰프가 요리해 주는데 넌 셰프 자격증은 있어? 나한테 밥 해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이진영은 차갑게 웃으며 날카로운 말투로 말했다. 며칠 동안 이 여자는 전화도 받지 않았고 문자도 답장하지 않았으며 영상통화는 아예 무시했었다. 그는 매우 화가 난 상태였다. 이제 와서 한 끼 식사로 그를 달래려고 한다니 그건 어림도 없었다. “그럼 됐어요!” 신하린은 약간 당황한 채로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이 남자가 살짝 꼬리를 내리면 풀릴 줄 알았지만 이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 셰프 수준은 아니지만 요리를 꽤 잘하는 그녀였고 남자의 말은 그녀를 정말 난처하게 했다. 박유진은 이진영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그와 신하린 사이의 관계가 그리 단순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심미연은 알고 있을까?’ ‘모르고 있다면 알려야 할까?’
신하린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박유진에게 말했다. “잠깐 다녀올게요. 먼저 여기서 미연이 기다리고 있어요.” 이진영은 인내심이 없는 사람이라 조금이라도 더 기다리게 하면 화를 낼 게 분명했다. 박유진은 그저 응답했을 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일에는 관심이 없었으니까. 신하린은 그를 그윽하게 한 번 쳐다보고 그제야 돌아서서 떠났다. 박유진과 그녀는 이제 더 이상 가능성이 없었다! 사실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마음을 접고 있었다.안전 통로에서 이진영은 난간에 기대어 담배를 물고 있었다. 연기가 퍼져 나가면서 그의 잘생긴 얼굴이 그 속에서 아련하게 비쳤다. 신하린은 문 앞에서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얼굴은 참으로 잘생겼다. 그때 남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하며 인상을 조금 찌푸리며 말했다. “왜 안 와? 내가 널 잡아먹니?” 신하린은 시선을 떼고 한 발짝씩 그에게 다가갔고 마음속은 불안하고 떨렸다. 남자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나랑 있는 게 그렇게 싫은 건가?’ 신하린은 그의 앞에 다가가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미연이가 쓰러져서 박유진 씨와 함께 병원에 데려왔어요.” 이진영은 자연스레 그날 밤 강씨 가문에서 봤던 그 여자가 떠올랐다. 정말 독특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있었고 분위기 또한 차분하고 목소리는 매우 부드럽고 온화했다. 경성에서 그녀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는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토록 아름다웠음에도 강지한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아마 그런 남자들은 결코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는 걸지도 모른다.“미연이의 외할머니가 사흘 전에 돌아가셨어요. 그동안 혼자서 지키며 사흘을 보냈고 오늘 아침에 외할머니 장례식을 마친 후 쓰러졌어요.” 박유진과 자신 사이에 무언가 있다고 오해받길 원치 않았기에 그녀는 스스로 설명했다. 이진영은 눈을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
박유진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빛이 그녀를 감쌌고 낮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말해 봐.” 심미연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과 마주친 순간, 마음 한켠에서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마치 오래도록 감춰온 비밀이 이제야 드러날 것만 같은 예감처럼. “왜 그래, 미연아?” 박유진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따뜻했다. 그녀의 불안을 감싸 안으려는 듯 아주 섬세하게 묻는 말이었다. 심미연은 입을 열 듯 말 듯 망설였다. 떨리는 입술이 달싹이기만 할 뿐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끌어올리고 있는 건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던 진실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결심한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강지한의 딸, 강상미. 들어본 적 있지?” 박유진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아이가 왜?” 툭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그의 마음속에 조용한 파문이 일었다. ‘미연이랑 강지한의 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 지금에서야 그 아이를 말하는 걸까.’ 심미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짐하듯 눈을 감았다가 뜨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실 예전에 내가 잃어버린 내 딸... 그 애는 세상을 떠난 게 아니었어.” 그 말 한마디를 꺼내기 위해 그녀는 거의 모든 용기를 다 쏟아부었다. “정말이야?” 박유진의 목소리는 놀라움에 젖어 있었다.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그때 너 분명히 말했잖아. 아이 숨 안 쉬고 있었다고. 직접 확인했었잖아... 확신했었어.” 그 순간, 박유진의 머릿속을 스친 단 하나의 가능성. ‘설마... 지금 미연이가 말하려는 게... 그 아이가 강상미라는 말이야?’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껏 맞춰지지 않던 조각들이 하나로 이어지고 복잡하게 얽혔던 퍼즐이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박유진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손끝이 얼어붙고
박시훈은 눈을 깜빡이며 바로 앞에 있는 얼굴을 바라봤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있을 수가 있지?’ 심장이 터질 듯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심장 박동이 너무 빠른데요? 정상은 아닌 것 같네요.” 심미연은 이마를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박시훈은 민망해서 땅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왜 비정상이야... 완전 정상이거든...’ 심미연은 아무렇지 않게 그의 상처를 확인했다. 상처는 붉게 부어 있었고 피도 조금 배어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약을 꺼내 상처 위에 다시 발라주었다. 상처는 쓰라렸지만 박시훈은 이 순간이 영원히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곁에 있는 지금이 너무도 소중했다. 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상처를 감싸고 도구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마무리를 한 뒤 장갑을 벗으며 병실을 나갈 준비를 했다. “저... 방금 야식 시켜놨는데... 같이 먹고 가주면 안 돼요?” 박시훈은 괜히 목이 메여 말끝이 흐려졌다. 자신이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었다니, 스스로도 놀라웠다. ‘내가 왜 이 사람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거야...’ “저는 밤에 야식 먹는 습관 없어요.” 심미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야식 너무 자주 먹지 마요. 건강에 안 좋아요. 전 이만 갈게요. 야식 먹고 푹 쉬세요.” 그녀의 말에 박시훈은 마치 한겨울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얼어붙었다. 심지어 발끝까지 저릿했다. 그녀가 간다. 그를 남겨두고 그냥 떠나버린다. 속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심미연은 이미 등을 돌린 채 병실을 나서고 있었고 박시훈의 낙담한 얼굴은 그녀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병실을 벗어난 심미연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깊게 숨을 들이켰다. 몇 시간째 이어진 수술에, 온몸이 녹초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강지한을 살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로비로 걸어 나왔을 때 문 앞에 서 있는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심미연의 시선이 하얗게 눈처럼 샌 강준형의 머리카락에 머물렀다. 가슴 어딘가가 저릿하게 아려왔다. 만약 시간이 되돌릴 수 있다면. 그저 아무 걱정 없이 웃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땐 주저 없이 말했을 것이다. ‘네. 할게요.’그때 그녀는 강지한을 사랑했고 그의 가족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강지한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강준형이 걱정된다고 해서 그 바람을 무조건 들어줘야 할 이유도 없었다. 곁에서 조용히 그녀를 훔쳐보던 가정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모님은 역시 마음이 떠나신 거구나...’ ‘이러다 어르신 또 며칠을 우울하게 보내시겠네...’강준형도 그녀의 침묵에서 모든 걸 느낄 수 있었다. 인연이란 게 억지로 붙잡는다고 이어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비록 아쉬움은 남지만 그 역시 그녀의 선택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할아버지, 사실 저랑...”“딩.” 심미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려는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고개를 든 그녀는 곧장 부드러운 눈빛을 머금은 박유진과 눈이 마주쳤고 그 말은 다시 목구멍 깊숙이 삼켜졌다. “오빠, 여긴 어떻게 왔어?”박유진은 따뜻한 미소로 대답했다. “너 데리러 왔어.” 그리고 곧 예의를 갖춰 강준형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강준형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유진아, 너랑 미연이...?” 어딘가 모르게 다정해 보이는 둘의 분위기.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의심이 스쳤다.“할아버지, 제가 차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심미연은 사실 내일 박유진과 혼인신고를 하러 갈 거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조금 전, 강준형이 ‘강지한과 다시 잘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던 말이 떠오르자 그 말을 도저히 꺼낼 수 없었다.‘말하지 말자. 괜히 말했다가 할아버지 마음만 상할 수도 있어.”그 순간, 박유진의 손이 저절로 움켜쥐어졌다. ‘할아버지한테
하지만 정작 온지유의 칼끝을 막나낸 사람은 그다지 친하다고 할 수 없었던 박시훈이었다. 심미연의 진지한 얼굴을 본 강준형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단박에 알아챘다. 더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그를 의자에 앉히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만 앉아 계세요. 옷만 갈아입고 금방 나올게요.” “그래. 다녀오너라.” 강준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냈다. 심미연이 등을 돌려 복도로 사라지자 그는 그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곁에 서 있던 가정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요즘 사모님이 예전보다 훨씬 더 예뻐지신 것 같아요. 성격도 훨씬 부드러워지셨고요. 만약 사모님이 도련님과 다시 재결합하신다면 어르신께서도 도련님 혼자 남을까 봐 걱정 안 하셔도 될 텐데요.” 강준형은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미연이가 돌아온다면 지한이도 지금처럼 외롭진 않겠지. 상미도 엄마 손길이 필요하고... 지한이가 아무리 잘 챙긴다 해도 아빠는 아빠일 뿐이지. 엄마처럼 섬세하긴 어렵잖니. 게다가 지한이는 이노하이브를 이끄는 입장이라 상미를 온전히 돌보기엔 시간도 턱없이 부족하고 말이다.” “나중에 사모님께 슬쩍 한번 말씀드려보시는 건 어떠세요?” 가정부는 늘 심미연을 좋게 봐왔다. 도련님과 이혼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요즘 세상에 외모, 인품, 성격, 효심까지 갖춘 여자를 다시 만나긴 정말 쉽지 않으니까. 강준형은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분위기 봐서 말해보지. 미연이가 듣기 싫어하면 더는 꺼내지 않을 거다.”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가정부도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심미연이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가시죠. 할아버지.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