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한은 입술을 감빨고 나서 말했다.“그럼 내가 찾아볼게.”요즘 메일이 너무 많아서 그는 다 열어볼 수가 없었다.“또 무슨 일 있어요?”“넌 먼저 나가 있어. 내가 일이 있으면 다시 부를게.”강지한은 말하면서 메일을 찾았다.하지만 귀신이 들린 듯 그는 [중독]이라는 발신자의 메일을 눌렀다.아마 이 이름이 특별해서일 지도 모른다.그러나 강지한의 예상과는 달리 이 메일에는 온지유의 범행이 모두 적혀 있었다.메일을 지우고 난 강지한은 검색창을 껐다.‘[중독]이 누구지? 어떻게 온지유에 대해 그렇게 잘 알지? 만약... 이 사람이 보낸 것들이 모두 진짜라면...’그럼 그가 3년 동안 심미연에게 했던 말들, 한 일들...강지한은 더는 생각할 수 없었다.숨을 깊게 들이쉬며 마음속으로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삭이고 있을 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려 그의 생각을 끊었다.그는 휴대폰을 들고 통화버튼을 눌렀다.“할아버지, 무슨 일이세요?”“인터넷 검색어 봤어?”그는 어르신의 목소리를 타고 들려오는 억눌린 분노를 분명히 알아차렸다.“못 봤어요. 왜요? 무슨 일인데요?”강지한은 모르는 척했다.“실시간 검색은 이미 취소되었지만 내가 동영상을 저장했으니 바로 너에게 보낼게!”할아버지는 노발대발하며 그를 향해 소리쳤다.“이번에는 걔를 감싸주지 마. 반드시 처벌을 받게 해야 해!”강지한은 손을 뻗어 미간을 비볐다.“할아버지, 일단 흥분하지 마세요. 이 일은 제가 사람을 시켜 조사하게 할 거예요. 진실을 밝힌 후 법정에 세울 거예요.”사실이라면...“조사할 필요 없어. 이 동영상이 진짜라는 것을 다 알고 있어!”할아버지는 코웃음 치며 말했다.“온지유처럼 악독한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온지유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아무런 증거도 없이 억울하게 할 수는 없어요.”강지한은 감정을 억누르고 침울하게 말했다.“온지유를 향한 편견은 강지성과 결혼한 날부터 있었어요. 왜 그랬어요?”
수화기 쪽에서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지고서야 할아버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이건 내가 너를 도울 수 없어.”설사 다시 그를 도와 심미연에게 돌아오라고 사정한다고 하더라도 심미연은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다.무엇보다 강지한이 한마음 한뜻으로 심미연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심미연에게 자신의 삶을 잘 살게 하는 것이 낫다.“미연이는 할아버지의 말을 가장 잘 듣잖아요? 할아버지가 얘기하면 틀림없이 들을 거예요. 3년 전에 할아버지가 나에게 미연이와 결혼하라고 강요했듯이 이번에 할아버지가 미연이에게 나와 결혼하라고 강요할 수 있잖아요.”강지한의 말투는 마치 어린아이가 소꿉놀이하는 것처럼 할아버지의 말 한마디면 되는 일인 것 같았다.“미연이는 너와 3년이 지냈는데 만약 이미 단념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혼을 제기할 수 있었겠어?”할아버지는 냉담하게 중얼거렸다.“어렵게 이혼했으니 미연이는 틀림없이 절대 돌아오지 않을 거야.”강지한은 원래 할아버지에게서 위로를 구하려고 했는데 결국 할아버지의 의기소침한 말에 난처해졌다.“심미연이 돌아올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마. 네가 정말 포기할 수 없다면 스스로 쫓아가서 자신의 실력으로 되돌려.”할아버지는 심미연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전에 강지한 앞에서 항상 다소곳한 모습을 보였는데 그것은 강지한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일단 그녀가 강지한에 대한 사랑을 내려놓으면 절대 남에게 좌지우지될 그런 사람이 아니다.강지한은 심미연을 몰라서 더는 말하기 귀찮았다.“아직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만 끊어요.”강지한은 할아버지가 도와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더는 이 일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이번 주 안에 온지유의 일은 반드시 나에게 처리 결과를 주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내가 직접 손을 쓸 거야!”할아버지는 강지한이 온지유를 감싸주느라 사람을 보내 조사하지 않을까 봐 걱정했다. 나중에 묻는다면 아무렇게나 핑계를 대고 얼버무리기 때문에 그에게 이런 명령을 내린 것이다.“알아요.”강지한의 머릿속에는 방
“아니요. 절친과 함께 작업실을 운영할 예정이에요.”할아버지가 그녀의 일에 관심이 있으니 그녀는 이것을 핑계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핑계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정말 신하린과 함께 작업실을 동업하려고 한다.“작업실 이름이 뭐야?”할아버지는 그녀를 도와주겠다는 태도였다.“할아버지, 저는 제 노력으로 작업실을 잘하고 싶어요. 할아버지는 연세도 있으시니 제일에까지 신경 쓰지 마세요.”그녀는 정말 할아버지가 그녀의 일을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좀 듣기 거북하게 말하자면, 그녀가 일하지 않아도 지금은 이노하이브의 주식이 있으니 매년 배당금도 적지 않았다.더군다나 이혼할 때 강지한이 준 돈은 일반인들이 몇 평생 일해도 다 벌지 못할 만큼 많았다.그녀는 지금 자신의 생활을 걱정할 필요가 없이 단지 건강한 쌍둥이를 낳아서 잘 키울 생각뿐이었다.“그건 안 돼.”할아버지는 분명히 기분이 나빠 보였다.“빨리 나에게 말해줘. 그렇지 않으면 나 정말 화낼 거야.”심미연은 어쩔 수 없이 신하린의 작업실 이름을 그에게 알려주며 주소도 함께 말했는데, 할아버지가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그녀도 잘 몰랐다.“자, 내가 다 적어놨어. 출근할 필요가 없으니까 좀 더 자. 방해하지 않을게.”강준형은 말을 마치자마자 전화를 끊었다.휴대폰을 들고 있는 심미연은 할아버지가 이 전화를 한 의도를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휴대폰 벨 소리가 또 울리기 시작했다.그녀는 서둘러 생각을 접고 통화버튼을 눌렀다.“변호사님, 아주 좋은 소식이에요!”전화를 받자마자 임현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 마이크를 사이에 두고 그녀의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심미연은 방금 할아버지가 걸었던 그 전화가 생각났다.기분이 좋은 모양인데 설마, 할아버지는 사실 그녀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려 했던 걸까?“변호사님, 제 말 듣고 있어요?”임현은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마음이 조급해졌다.“듣고 있어요. 말해봐요. 무슨 좋은 일인데요?”심미연은 조용히 웃고 있었는데 목소리가 듣기 좋았
심미연이 넋을 잃고 생각할 때 신하린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미연아, 깨어났어?”“막 깨어났는데 네가 왔어. 어서 들어와.”심미연이 커튼을 열자마자 신하린에 문을 밀고 들어왔다.침대에 앉아 있는 심미연을 본 그녀는 재빨리 달려와 말했다.“미연아, 내가 어젯밤에 술에 취했는데 네 배를 건드린 거 아니야?”심미연은 손을 뻗어 그녀를 안고 웃으며 말했다.“너에게 샤워할 거냐고 물었는데 한사코 게스트룸 침대에 가서 자야 한다고 갔어. 배를 건드릴까 봐 걱정된다고 하던데 취중 진담인 가 봐.”어젯밤 신하린은 정말 조금도 그녀를 괴롭히지 않았고 착하기만 했다. 만약 이진영이었다면 어떻게 미쳤는지 모를 것이다.설령 술에 취했다 하더라도 그녀는 배 속의 아이를 생각할 수 있다.신하린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질하며 심미연의 귓가에 대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미안해, 미연아. 앞으로 다시는 취하지 않을 거야.”이진영과 5년 동안 함께 있으면서 그는 한 번도 자신이 그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지난번에 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조금도 괴로워하지 않았다.하지만 어젯밤 이진영이 그녀에게 한 말은 그녀를 슬프게 했다.이진영은 비즈니스 결혼할 것이며 그녀는 내연녀로 살아야 한다고 했다.그렇게 파렴치한 말을 그는 도대체 어떻게 할 수 있는 건지.“마음이 힘들면 다 털어놔. 마음속에 오래 참으면 언젠가는 병이 날 거야.”심미연은 그녀의 등을 다독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내 앞에서는 진실한 자신이 되어도 돼. 네가 어떤 모습인지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어.”그들은 비록 혈연적인 관계는 없지만 가족보다 낫다.그녀는 신하린이 그녀의 앞에서 분명히 괴로워 죽을 지경인데도 즐거운 척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전혀 그럴 필요 없었다!신하린은 눈시울이 빨갛게 변하더니 심미연을 꼭 안았다. 목구멍에 숨이 막혀 있는 것 같아 숨이 좀 막혔다.심미연은 조용히 그녀를 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신하린과 이진영 사이의
신하린에 얼른 휴대폰을 꺼내서 사진을 찍었다.심미연은 그녀가 사진을 찍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물었다.“뭘 찍어?”“너를 찍고 있어. SNS에 올려야지.”신하린은 고개를 숙이고 휴대폰 안의 사진을 만지작거리며 정말 너무 아름답다고 속으로 감탄했다.심미연은 그녀가 웃는 것을 보고 SNS 올리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신하린이 사진을 올리자마자 이진영이 마침 보였다.강지한이 기분이 좋지 않다는 생각에 그는 신하린이 올린 그 사진을 강지한에게 보냈다.잠시 기다리다가 강지한의 답장을 기다리지 못한 그는 아예 강지한의 전화번호로 직접 걸었다.“일 있어?”강지한의 목소리는 얼음 저장고에서 흘러나온 것처럼 차가워 온몸을 오싹하게 했다.“내가 방금 보낸 사진 봤어?”이진영은 강지한의 냉담함을 완전히 무시하고 입을 열어 웃음기를 띠며 물었다.강지한이 아닌 척해도 그는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이진영, 한가하구나?”분명히 불쾌했던 그는 심지어 말투에 조금의 분노를 품고 있었다.“난 매우 바빠. 그만 끊어.”이진영은 말을 마치자마자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그는 강지한이 화가 난 모습을 보고 싶었다.그러나 강지한이 정말 화가 났을 때 그는 또 무서웠다.이때 강지한은 사무실의 소파에 앉아 휴대폰 스크린을 주시하고 있었다. 스크린에는 확대된 여자의 사진이 있었는데 사진 속 얼굴에는 화창한 웃음이 가득했다. 커다란 두 눈은 부드럽고 다정했으며 코끝의 하얀 밀가루는 그녀를 다소 익살스럽게 보이게 했다.왠지 기분이 언짢았다.‘이 여자는 나를 떠나 조금도 슬프지 않은가 봐. 나는 여전히 늘 이 여자 생각뿐인데.’같은 시각, 미르 파크.온지유는 깨어나자마자 휴대폰 벨 소리가 울리는 것을 들었다.숨겨진 번호인 것을 보고 그녀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황급히 거실을 떠났다.임혜자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누구 전화길래 얼굴이 다 하얗게 질리는 거야.”“뭘 중얼거리고 있어요?”집사가 와서 그녀가 중얼거리는 것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말이 끝나자 휴대폰 너머로 한참 뒤에야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누군지 아세요?”목소리는 높지도 낮지도 않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견결함이 묻어 있었다.집사는 고개를 저으며 미간을 찌푸렸는데 두 눈에는 후회스러운 눈빛이 스쳤다.“아직은 누가 한 짓인지 모르지만 저는 많은 사람을 보았어요. 우리 쪽 사람들의 안전이 걱정되어...”여기까지 말한 집사는 뭔가 생각이 났는지 안색이 더 어두워졌고 목소리도 낮아졌다.“죄송합니다. 사모님. 제가... 사모님께서 이미 둘째 도련님과...”휴대폰에서 잠자코 침묵이 흘렀다.전화가 끊긴 줄 의심할 때 휴대폰 너머로 여자의 깔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당장 비상 계획을 가동해 별장 내 모든 사람의 안전을 보장하세요. 그리고 포위한 사람들의 정체를 알아내야 해요. 제일 중요한 것은 할아버지가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진행하세요.”심미연은 다급하지 않은, 분명하고 힘 있는 말투로 말했는데 위엄이 서려 있었다.이 말을 들은 집사는 그제야 미간을 조금씩 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사모님, 알겠습니다. 제가 바로 집행하겠습니다.”지난 3년 동안 미르 파크의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해 집사는 모두 심미연에게 보고하며 그녀의 지시를 따랐다.솔직히 집사는 처음에 심미연이 골탕먹는 꼴을 보고 싶었다.둘째 도련님이 좋아하지 않는 여자에 대해 그들도 좋은 태도를 보여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후 함께 지내면서 그들은 심미연을 점점 더 잘 대해줬다.집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해 심미연은 효율적으로 해결했고 그들에게 난제를 남겨주지도 않았다.시간이 지날수록 집사는 사사건건 심미연의 결정을 따르는 습관이 생겼다.전화를 끊기 전에 심미연은 다시 한번 당부했다.“할아버지는 건강이 좋지 않으니 이번 일을 절대 알리지 마세요. 반드시 속전속결 해야지 밖에서 생긴 일 때문에 할아버지에게 영향 줘서는 안 돼요.”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집사는 마음이 복잡해졌다.‘둘째 도련님이 사모님을 이렇게 심하게 대했는데도 사모님은 어
못된 짓만 하던 온지유도 강지한에게 붙어 잘살고 있다.사람은 너무 착하면 업신여김을 당하기 마련이니 독해질 필요도 있다.심미연은 물이 끓자 칼국수를 집어넣고 한쪽으로 수도꼭지를 틀어 채소를 씻기 시작했다.채소를 다 씻고 수도꼭지를 닫으며 그녀는 부드럽게 말했다.“할아버지가 지한 씨 편을 드는 건 당연한 거야. 하지만 이것 때문에 나에게 잘해줬던 과거를 지울 수 없어. 특히 내가 지한 씨와 이혼하려는 걸 알고도 이노하이브의 주식을 나에게 넘겨줬으니 이것만 보더라도 난 할아버지를 위해 배려해야 해.”다른 사람들은 심미연이 바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녀는 그저 은혜를 갚을 뿐이다.신하린은 잠자코 말이 없었다.심미연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의 은혜를 원수로 갚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한다면 이건 짐승보다 못한 짓이다.“지한 씨가 나에게 미안한 짓을 했지만 이건 할아버지와 상관없어!”심미연은 능숙하게 토마토를 썰기 시작했다.“날 걱정한다는 걸 알아. 괜찮아. 난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어.”신하린은 그녀의 굳은 표정을 보고 이미 방법을 생각해냈다는 것을 알았다. 변호사인 심미연은 머리가 잘 돌았다.이렇게 되니 신하린은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국수도 금방 삶아졌다. 야채, 토마토, 달걀로 만든 이 칼국수는 녹색, 빨강 노랑 등 여러 가지 색이 어우러져 보기에도 식욕을 돋웠다.심미연은 그릇을 쟁반에 담고 젓가락을 든 후 테이블로 향했다.국수를 다 먹은 후 신하린이 자발적으로 설거지를 하러 갔고 심미연은 그녀와 다투지 않고 오히려 서재로 가서 노트북을 열고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주방을 정리하고 서재로 간 신하린은 컴퓨터 앞에서 한창 작업하는 심미연을 보고 차마 방해하지 못하고 방으로 돌아갔다.어제 입은 옷을 심미연이 이미 드라이 해줘 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작업실로 갔다.이때 휴대폰이 울렸는데 작업실 전화인 걸 보고 그녀는 급한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서둘러 받았다“대표님, 한 사모님이 찾아오셨는
“신 대표님, 지금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있어요.”소민은 그녀를 보더니 손으로 회의실을 가리켰다.신하린은 입술을 감빨며 말했다.“알았어. 일 보러 가봐.”“대표님, 소문이 있어요.”소민이 그녀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이노하이브에서 새 건물이 완공되어 정원 설계에 관해 입찰을 진행할 예정이래요. 우리도 도전해 볼 까요?”“이노하이브 회사의 입찰 요구는 아주 높아서 우리 같은 작은 작업실은 기회가 없어. 됐어. 헛생각하지 말고 일하러 가.”그들이 디자인할 수 있다고 해도 이렇게 작은 작업실은 입찰에 참여할 자격조차 없었다.“그냥 아쉬워서 그래요.”소민이 낮은 소리로 감탄했다.만약 작업실이 이번 정원 디자인을 따낸다면 이 분야에서 널리 소문을 퍼뜨릴 것이다.신하린은 웃으며 회의실로 들어갔다.회의실 내, 정교한 창살을 통해 부드럽고 화사한 빛이 여러 가지 그림자를 드리웠다.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온화한 얼굴을 한 이씨 가문 사모님은 의자에 앉아 있었지만 그 눈빛은 칼을 머금은 것처럼 날카로웠다.깐깐히 훑어보는 그녀의 시선에 신하린은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평온하게 보이려고 노력했다.이씨 가문 사모님은 부드럽고 예의 바르게 웃으며 말했는데 내뱉은 말은 정성껏 다듬은 것처럼 친근해 보이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아 마치 보이지 않는 그물을 엮은 것 같았다.신하린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는 몸을 곧게 펴며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게 말했다.“사모님, 안녕하세요. 제가 신하린이에요.”“하린 씨, 앉아봐. 우리 잠깐 얘기할까?”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온화한 말투로 말했다.신하린은 입술을 깨물었다.‘난 성이 하씨가 아닌데 왜 친근한 척 성씨를 빼고 하린이라고만 부르지?’“아휴, 우리 진영이는 속을 썩이잖아.”그녀는 무심코 이진영의 신분을 언급했다. 신하린은 그 존귀한 신분에 압박감을 받은 것처럼 저도 모르게 등을 곧게 폈다.곧이어 화제는 미묘하게 이진영의 결혼 문제로 향했는데 그녀의 말은 정성껏 파놓은 함정처럼 은밀하면서도 암시로 가득했다. 신하
심미연은 흩날리던 생각을 차분히 거두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궁금한 듯 물었다.“우리 태하 진짜 똑똑하네.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거야?”아직 겨우 세 살이지만 심태하의 마음은 놀랄 만큼 세심하고 예민했다. 또렷한 눈망울은 마치 세상의 감정 흐름을 꿰뚫어 보는 듯했고 그렇게 꼼꼼히 살피는 모습에 심미연은 종종 놀라곤 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박유진이 심태하를 정성스럽게 길러온 시간이 아이를 이토록 똑똑하고 배려 깊게 자라게 만든 것이다.“아까 아빠랑 통화할 때 엄마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어요. 뭔가 걱정하는 게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저한테 말 걸었을 때도 평소처럼 웃고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엄마가 혹시 슬픈 건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어요.”심태하의 말은 또렷하면서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단어 하나하나에 엄마를 향한 깊은 애정과 이해가 담겨 있었다.심태하가 보기에 박유진이 집에 있을 땐 심미연은 늘 기분이 좋아 보였고 환하게 웃는 얼굴이 참 예뻤다.“엄마가 안 웃었어?”심미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녀석, 정말 못 말려.’겨우 세 살에 이 정도인데 나중에 더 크면 얼마나 영리해질지.“네, 안 웃었어요.”심태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심태하의 목소리는 여전히 앳됐지만 말투는 왠지 어른스러웠다. 꼭 사람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기라도 한 듯했다.심미연의 마음은 그 말 한마디에 확 풀렸다. 그녀는 아들의 코끝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자, 얼른 아침 먹자.”그녀의 말투엔 아낌없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이 아이는 정말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다.“아빠가 보고 싶으면 아빠한테 전화하면 되죠!”심태하가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윙크했다.‘나도 아빠가 보고 싶은데 엄마가 안 보고 싶을 리가 없지. 맞아, 분명 그럴 거야!’심미연은 그 말에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네 말대로 할게.”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박유진이 보고 싶지만 그에게 전화하진
하지만 그 깊은 애정과 놓기 싫은 마음은 오히려 박유진을 현실이라는 갈림길 앞에서 망설이게 만들었다.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심미연만 괴로운 상황에 빠질 것이라는 걸. 그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자신의 망설임으로 인해 흐려지는 건, 그녀의 세상이 자신 때문에 흔들리는 건 차마 보고 있을 수 없었다.그렇다고 그녀를 놓아버리면 영원히 잃게 될 텐데... 그 아픔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박유진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아빠, 왜 말이 없으세요? 허락한 거죠?”심태하의 목소리는 천진난만하게 들떴다. 마치 머릿속에 따뜻한 한 가족의 그림이 그려지기라도 한 듯.‘아빠가 돌아오면 엄마랑 나랑 셋이 모여 저녁 먹고 같이 웃고 얘기하고...’심태하의 마음속에서 그려낸 가장 순수한 행복의 모습이었다.그러나 그 순수한 소망 앞에서 박유진의 마음은 송곳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그는 알고 있다. 이번 결정을 가볍게 내려서는 안 된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게 하려면 정말 신중해야 했다.하지만 사랑과 책임 사이에서 그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그는 지금 사랑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심미연과 아이를 지킬 방법을 찾고 있다.하지만 그런 길이 과연 있을까? 이 선택은 너무나도 어려웠다.“아빠, 나 이렇게 열심히 얘기하고 있는데 왜 아무 말도 안 해요?”심태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미간을 찌푸렸다.평소 같았으면 박유진은 재밌는 얘기도 해주고 자기 말에 웃어주었을 텐데, 오늘따라 너무 이상했다.‘혹시... 내가 말실수했나?’그때 박유진의 다급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심태하의 귀에 들려왔다.“태하야, 곧 비행기가 이륙해서 아빠가 휴대폰을 꺼야 돼. 오늘 밤에 다시 이야기하자. 꼭이야.”박유진은 심미연을 당장이라도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고 말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네! 알겠어요, 아빠! 그럼 오늘 밤에 꼭 통화해요. 약속했으니까 안 하면 안 돼요!”심태하의 목소리에 눈치채기 힘든 외로움이 살짝 섞여 있었다.
심미연은 멍해졌고 아까 자신이 박유진에게 연락을 시도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날아온 건 단 한 줄의 차갑고 무미건조한 메시지. 기대했던 목소리는 끝내 들을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 아들 심태하가 전화를 걸자 박유진은 놀랍게도 전화를 받았다.“아빠, 지금 어디예요? 이틀 뒤면 제 생일이에요! 아빠가 놀이공원 같이 가자고 했던 거 잊으시면 안 돼요!”심태하의 말투엔 아이 특유의 해맑은 기쁨이 가득 담겨 있었고 단어 하나하나가 살아서 튀어나오는 듯했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박유진의 목소리는 한겨울 얼음도 녹일 만큼 다정했다.“아빠 지금 진성으로 가는 비행기 타러 가는 중이야. 곧 이륙이라 휴대폰 꺼야 해. 진성에 도착하면 바로 전화할게. 약속!”그 말에는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득 실려 있었다.사실 박유진은 심태하가 생일 이야기를 할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어젯밤에 워낙 정신이 없어 그런 중요한 약속마저 깡그리 잊고 있었던 것이다.“아빠가 보내준 선물 잘 받았어요!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심태하는 아직 다 하지 못한 말이 많은 듯 아빠에게 털어놓고 싶은 게 가득한 눈치였다.박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햇살이 쏟아져 내려 유난히 눈부셨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가늘게 떴고 그 강렬한 빛이 속눈썹 아래에 그림자를 드리웠다.그 순간 그의 마음속엔 오로지 한 사람, 심미연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그녀와 떨어져 있는 모든 시간이 하나같이 그리움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그리움이 너무 커서 박유진은 당장이라도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달려가고 싶을 만큼 벅찼다.“아빠... 지금 너무 힘들죠? 그럼 회사 팔고 그냥 집으로 돌아와요. 제가 돈 많이 벌어서 아빠랑 엄마 다 먹여 살릴게요!”심태하의 순수한 눈빛에 진심 어린 다짐이 담겨 있었다. 그에겐 돈을 많이 벌어서 가족을 지킬 거라는 꿈이 있었다.심미연은 그런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통통한 볼살에 아직 아기 티가 남았지만 심태하의 마음속
심미연 역시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이지연이 잘못 알아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지연 씨, 다시 한번 제대로 확인해 봐요. 결과가 똑같은지 꼭 잘 봐요.”혹시라도 착오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그럼 제가 다시 확인해 볼게요! 뭐든 나오면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보스, 그럼 끊을게요!”이지연은 말 끝나기가 무섭게 전화를 뚝 끊었다.심미연은 휴대폰을 쥔 채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까 이지연이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이건명과 문소영이 예전에 그런 사이였다고?’그런데 왜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걸까? 아무도 깊게 파고들지 않았기에 묻혀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결혼 전에 누굴 만나든 그건 사생활인데 그걸 굳이 숨긴 이유가 뭘까?심미연이 이 모든 게 어딘가 석연치 않다고 느끼고 있을 즈음, 밖에서 누군가 소리쳤다.“엄마! 나 배고파요! 우리 빨리 아침 먹으러 가요!”심미연은 생각을 접고 고개를 들어 활짝 웃는 아들을 바라봤다.“그래, 가자.”심태하가 달려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엄마, 며칠 뒤면 제 생일이잖아요. 생일 파티에 상미도 초대하고 싶은데, 그래도 돼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젯밤의 친자 확인 결과가 떠올랐다. 강상미는 그녀의 딸, 즉 심태하와 쌍둥이였다. 그래서 둘의 생일도 당연히 같았다.심태하의 생일 파티에 강상미가 온다면 그건 곧 둘이 같이 생일을 보내게 되는 셈이다.“엄마, 안 돼요?”심미연이 대답하지 않자 심태하가 다급히 물었다.그녀는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켰다.“그럼, 당연히 초대해야지. 너희 둘이 같이 생일 파티하면 되겠네.”“정말요? 엄마 최고! 사랑해요!”심미연은 아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태하야, 너 엄마가 어제 말한 거 잊은 거 아니지? 상미가 바로 태영이야. 너랑 똑같이 엄마 배에서 나왔고 너희 둘은 쌍둥이야. 그래서 생일도 똑같아.”강상미에 관한 일은 이미 방원호에게 조사를 맡긴 상태였다. 꼭 알아내야 한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