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연아, 무슨 일인데?” 박유진이 먼저 입을 떼며 성큼성큼 다가와 심미연 옆에 앉았다. 심미연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깊게 숨을 내쉬었다. “태하 해외 계좌에 갑자기 사백억이 들어왔어. 확인해 보니까 이노하이브 그룹에서 보낸 돈이더라.” ‘우리 아들, 진짜 대단한데?’ 박유진은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노트북을 덮으며 피식 웃었다. “예전엔 네가 공짜로 방화벽을 관리해 줬으니까 그나마 버틴 거지. 네가 빠지니까 이노하이브 보안망이 엉망이 된 거고. 태하 같은 세 살짜리 애한테 뚫릴 정도면 이노하이브 정보기술팀은 단체로 폐급 인증한 거지.”심미연이 피식 웃었다. “태하가 오빠 시켜서 내 기분 좀 풀어보라고 보낸 거지? 그 녀석, 진짜 약아빠졌네.” “네가 화나면 스트레스라도 받을까 봐 걱정되긴 했는데 막상 어떻게 풀어줘야 할지 몰라서 내가 자진해서 올라왔지.” 박유진은 그녀 얼굴에 웃음이 번지는 걸 보고서야 비로소 안심했다. 사실 심미연이 계속 화를 안 풀면 어쩌나 걱정됐다. 한번 토라지면 좀처럼 쉽게 풀리지 않으니까. “내가 생각하는 바로는 태하가 강지한한테 그렇게 많은 돈을 빼앗았으니 강지한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그 사람은 원한을 갚는 데 철저하고 잔인한 성격이니까 분명 나를 찾아올 거야.” 심미연은 원래 지금 강지한과 만날 생각이 없었다. 이번에 경서시 프로젝트 입찰에 참여해서 그를 완전히 당황시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심태하의 행동으로 그녀의 계획은 예상치 못하게 틀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돈을 돌려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강지한이 자신에게 갚아야 할 건 단지 사백억에 그치지 않았다. ‘그냥 미리 이자 챙기는 거지 뭐.’“괜찮아. 내가 있잖아.” 박유진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널 지켜줄게.” 심미연은 장난스럽게 그를 쳐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나도 오빠를 지킬 수 있어.” 지금의 그녀는 몇 년 전 강지한 앞에서 억울해도
“그럼 이따가 어머니한테 전화할게.” 박유진은 입가의 미소가 한층 깊어졌다. 심미연이 그의 부모님을 뵙겠다고 하니 그는 당연히 기뻤다. 사실 그들은 이미 20년 넘게 얼굴을 봐 온 사이였지만 이제 그때와는 전혀 다른 관계가 되어 있었다.“얼른 회사 가 봐. 일 빨리 끝내고 집에 일찍 가자.” 심미연은 박유진을 살짝 밀며 재촉했다.그와 함께 있으면 늘 마음이 편안했다. 불필요한 걱정도 애써 꾸밀 필요도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일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심태하가 놀이 매트 위에 앉아 레고를 맞추고 있었다. 작은 손으로 블록을 하나하나 끼우며 제법 진지한 얼굴로 집중하고 있었다. 박유진은 고개를 숙여 심미연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회사 다녀올게. 퇴근하면 바로 너랑 태하 데리러 올게.” 심미연은 눈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얼른 다녀와. 기다리고 있을게.” 박유진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곤 한층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이를 불렀다. “태하야, 아빠 회사 갔다 올게. 엄마랑 집에서 재미있게 놀고 있어.” 심태하는 그제야 고개를 번쩍 들고 통통한 손을 흔들며 밝게 외쳤다. “아빠, 잘 다녀오세요.” 박유진은 아이를 향해 한 번 더 미소 짓고 나서야 아쉬운 듯 천천히 몸을 돌려 집을 나섰다. 심태하는 손에 쥐고 있던 레고를 내려놓고 천천히 일어섰다. 고개를 푹 숙이고 두 손은 몸 옆에 붙인 채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엄마...” 심미연은 깊은 숨을 내쉬며 가슴 속 복잡한 감정을 억누르고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태하야, 미안해. 엄마가 네 친아빠에 대해 제대로 얘기해주지 못했어.” 심태하는 급히 말을 끊으며 고개를 들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저 알아요. 내 친아빠는 엄마한테 못된 짓만 한 나쁜 사람이에요. 바람도 피웠잖아요.”비록 그 기사들이 이미 모두 삭제됐지만 심태하는 여전히 인터넷에서 몇
대화 기록 속에서 두 사람은 본처를 어떻게 죽일지 끔찍하게 의논하고 있었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 남자와 불륜녀가 인터넷으로 청산가리와 쥐약 같은 독극물을 구매한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두 사람은 이를 사용할 용기는 없었다. 심미연은 분노를 억누르며 계속해서 기록을 넘겨보았다. ‘요즘 불륜녀들은 정말 뻔뻔하네.’ ‘남자 하나 차지하려고 뭔 짓이든 가리지 않더라.’계속해서 걸려오는 박유진의 전화를 확인한 후 심미연은 그제야 컴퓨터를 껐다. 임현이 수집한 모든 증거를 다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두 사람의 대화 내용과 인터넷에서 청산가리와 쥐약같은 독극물을 구매한 사실만으로도 그들이 본처를 죽이려 했다는 점은 명백히 드러났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했다. 그 두 사람이 직접 입으로 고백하게 만들어야 했다. 재판이 열리기 전에 반드시 그들이 본처를 죽였다는 사실을 인정한 녹음 파일을 손에 넣어야만 했다. 물건을 정리한 후 아래층으로 내려가 보니 심태하가 레고로 거대한 성을 완성해 놓았다. 심미연은 가끔 심태하의 집중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번 자리에 앉으면 오후 내내 꼼짝도 하지 않고 몰입해서 만들기만 했다. 다른 아이들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지 않고 오직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엄마, 다 끝났어요?” 심태하는 그녀가 내려오자마자 급히 일어나 그녀에게 달려갔다. “위층 가서 옷 갈아입고 아빠 집에 가서 할머니랑 할아버지 뵙자.” 심미연은 그를 품에 안고 기분 좋게 말했다. “좋아요! 바로 갈게요.” 심태하는 서둘러 그녀의 품을 벗어나 위층으로 달려갔다. 짧은 다리가 빠르게 흔들리며 공중을 나는 듯했다. 심미연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태하가 있으면 아무리 피곤해도 행복하네.’그때 갑자기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심미연은 정신을 가다듬고 서둘러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미연아, 나다. 할아버지야.”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노인의 격앙된 목소
“알겠어요. 일이 끝나면 그때 다시 함께 식사해요.” 최근 몇 건의 소송 때문에 심미연은 정말 바빴다. “그래. 그럼 방해하지 않을게. 나중에 보자.” 강준형은 마음이 아팠지만 그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심미연도 해야 할 일이 있으니 그를 만날 수 없는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미연이가 일이 끝난 후에나 보면 되지.’ 심미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전화를 끊었다.“엄마, 누구한테서 온 전화예요?” 심태하는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조용히 물었다. 심미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나중에 엄마가 다 말해줄게.” 강지한과 강씨 가문에 관한 모든 이야기는 시간이 될 때 천천히 말해주기로 했다. “뭐야? 둘이 무슨 얘기를 이렇게 진지하게 하고 있어?” 박유진이 신발을 갈아 신고 들어오며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보고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오빠가 돌아오는 걸 기다리고 있었어.” 심미연은 그에게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 미소는 눈과 입꼬리가 함께 올라가면서 마치 그의 마음을 뒤흔드는 듯했다. 박유진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는 잠시 눈을 내리깔고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속으로 깊게 숨을 들이켰다. “준비 다 끝났으면 얼른 가자.” 심미연이 자신과 함께 집으로 가 부모님을 만날 생각에 박유진은 마치 하늘을 나는 듯한 기분으로 들떠 있었다. 웃음이 절로 얼굴에 번졌다. “태하야, 가자.” 심미연은 아들의 작은 손을 잡고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박유진은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오늘 저녁 너를 위한 특별한 서프라이즈가 준비되어 있어.” “서프라이즈?” 심미연은 큰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긴 속눈썹이 두 마리 나비처럼 깜빡였다. 박유진은 항상 기념일마다 그녀를 위해 선물을 준비하는 사람이었다. ‘오늘은 무슨 기념일일까?’“곧 알게 될 거야.” 박유진은 신비로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섰다
“소식을 듣자마자 그 사람을 찾아갔는데 그 사람이 지금 조사를 받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이런 일이 갑자기 일어나다니 분명 누군가 뒤에서 손을 쓴 거예요.”심미연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마음속의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알겠어요. 고위층에 연락해서 긴급 회의를 소집하세요. 지금 바로 회사로 갈게요.”“네. 그럼 제가 먼저 공지 보내겠습니다.”전화를 끊자마자 박유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 있어? 도와줄 거 있으면 말해.” 그는 도와주고 싶었지만 허락 없이 도와주면 그녀가 화낼까 봐 걱정됐다. 심미연은 잠시 숨을 고르고 그의 눈을 바라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 오늘 저녁에 어머님, 아버님 만나러 못 갈 것 같아. 회사에 일이 생겼거든. 하린이는 지금 병원에 있고 내가 회사 일 처리하러 가야 해. 도움이 필요하면 전화할게.” 심미연은 박유진 가족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괜찮아. 회사 일 먼저 처리해. 밥은 다음에 같이 먹어도 돼.” 말은 그렇게 했지만 박유진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씁쓸한 감정이 남아 있었다. 그가 준비한 서프라이즈도 이제 다음으로 미뤄져야 했다. “그럼 오빠랑 태하는 먼저 가고 나는 차로 회사로 갈게.” 심미연은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내가 데려다줄게.” 박유진이 급히 그녀를 불렀다. “아니야. 오빠가 나 데려다주면 시간만 더 걸릴 거야. 아버님, 어머님 기다리실 거잖아. 얼른 가.” 심미연은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태하야, 할아버지, 할머니 댁 가면 말 잘 들어야 해.”심태하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작게 투덜거렸다. ‘돌아온 후로 엄마는 진짜 너무 바쁜 것 같아.’‘나랑 밥 먹는 시간도 많이 줄어든 것 같아.’ 심미연은 차에 올라타자 바로 가속을 밟았다. 차는 주차장을 빠져나가며 도로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박유진은 출구를 바라보며 손을 주머니에 넣어 작은 보석 상자를 꺼냈다.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다
마치 일부러 그런 것처럼 여러 번 걸었지만 전화는 모두 끊어졌다. 심미연은 화가 난 나머지 웃음이 나왔다. ‘강지한, 정말 대단하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성무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심미연은 거침없이 말했다. “성 비서님, 전화 바꿔요. 강지한 대표님한테 할 말이 있어요.” “심미연 씨, 대표님은 지금 많이 바쁘신데요...” “그럼 지금 어디 있는지 말해봐요. 내가 찾아갈 테니까.” 심미연은 속에서 뜨거운 분노가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강지한에게 꼭 한바탕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회사에 있습니다.” “좋아요. 10분 내로 도착할 테니 기다리고 있어요.” 심미연은 말을 마친 뒤 곧장 전화를 끊었다. 강지한은 손에 든 서류를 보면서도 성무진과 심미연의 대화를 놓치지 않으려 귀를 기울였다. 성무진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은 후에야 강지한이 든 서류가 뒤집혀 있음을 알아챘다. 잠시 망설인 성무진은 결국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대표님, 서류가 거꾸로 되어 있습니다.” 강지한은 서류를 던지듯 내려놓고 목을 풀며 짧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심미연 씨가 회사로 오겠다고 하셨습니다.” 성무진은 강지한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그런데 강지한의 표정은 생각보다 온화해 보였다. “난 만나겠다고 말한 적 없잖아.” 강지한은 입술을 살짝 삐죽이며 중얼거렸다. “알았다. 너 나가 있어. 서류 좀 볼게.” 성무진은 그를 한 번 더 힐끗 쳐다봤다. ‘대표님도 참...’ 만약 강지한의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았다면 성무진은 그가 심미연을 만나는 걸 정말로 싫어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내색은 안 해도 아마 누구보다 심미연 씨를 보고 싶어할 거야.’성무진은 대표님의 사무실을 나온 후 강지한이 자주 찾는 회전식 고공 레스토랑을 세심하게 예약했다. 몇 년 동안 강지한이 가장 좋아했던 레스토랑이었다. 높이도 충분하고 시야는 탁 트여 있어 멀리까지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심미연은
심미연은 문을 두드리지도 않고 대표님 사무실로 곧장 들어섰다. 문이 크게 열리며 들린 소리에 강지한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예전보다 훨씬 더 아름다워졌다. 마치 잘 가꿔진 꽃처럼 눈에 띄게 싱그럽고 매혹적이었다. 강지한은 심장이 한 박자 빠르게 뛰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잠시 숨을 고쳤다. “강지한, 비겁한 놈. 너 진짜 역겨워.” 심미연은 그동안 쌓였던 분노를 한꺼번에 터뜨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우울증을 극복하고 나서 이렇게 감정을 폭발시킨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강지한이 너무 지나쳤다. 강지한의 눈빛은 깊고 어두웠다. “심미연, 여긴 내 구역이야. 내 앞에서 이렇게 난리치면 내가 경찰에 신고할 거라는 생각 안 해?” 강지한의 목소리는 차갑고 담담했다. 예전 이 여자는 그 앞에서 항상 온화하고 단정한 모습만 보여줬다. 그를 향해 화를 내는 일도 없었고 목소리조차 높아진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여자는 그에게 소리치며 거침없이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그에게 유난히 생동감 있게 다가왔다. 그의 마음속에 뜨겁게 불타는 불씨가 하나 떨어진 듯 그의 심장은 뜨겁게 뛰기 시작했다. “어디 한 번 신고 해 봐. 경찰이 그 더럽고 비열한 짓을 한 널 잡을지 아니면 나를 잡을지 한 번 보자고.” 심미연은 망설임 없이 그의 책상 앞으로 다가가 위에 있던 펜통을 들고 강지한에게 던졌다. “정말 뻔뻔하네.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평소 그녀는 차분하고 이성적이었다. 변호사로서 무엇이 가능한지 무엇이 불가능한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강지한과 마주한 그녀는 더 이상 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냥 미쳐버려도 상관없다. ‘강지한이 그토록 추악한 짓을 했는데 내가 어떻게 침착할 수 있겠어.’비록 그녀가 미리 뒷문을 통해 프로젝트를 가져왔지만 그것도 그녀의 실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
강지한은 그녀를 정말 마음대로 쥐고 흔들 수 있는 장난감이라도 된는 것처럼 생각하는는 것 같았다. 원하면 가지겠고 필요 없으면 버리고. “네가 동의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난 최고의 변호사를 써서 아들을 빼앗아 올 거니까. 심미연, 그때 와서 나한테 구걸하지 마.” 강지한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담담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심미연은 이미 임현에게서 강지한이 자신을 상대로 소송을 걸어 아들 심태하의 양육권을 빼앗으려 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이렇게 직접 듣게 되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강지한은 어떻게 이렇게 무자비할 수 있지?’ ‘정말 한 점의 인간미도 없네.’“강지한, 너랑 이혼하고 나서 낳은 아이야. 너랑은 아무런 상관도 없어.” 심미연은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분노 어린 시선을 꽂았다. 그 짧은 순간 그녀는 강지한이 온지유때문에 자신을 얼마나 괴롭혀왔는지 수많은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이 남자는 단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나랑 상관있는지 없는지는 친자 검사를 하면 바로 나오겠지. 심미연, 못 하겠어?” 강지한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이미 그는 심태하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걸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어떻게든 아들을 자기 품에 데려오는 것뿐이었다. 아들만 손에 넣으면 심미연도 결국 그의 뜻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내 아들이야. 네가 무슨 자격으로 친자 검사를 하겠다는 거야?” 심미연은 싸늘하게 웃으며 쏘아붙였다. “그렇게 친자 검사가 하고 싶으면 차라리 집에 가서 네 딸 샘플이나 가져와서 해보는 게 어때?” 이제야 그의 역겨운 속내를 똑똑히 알게 되었다. 그걸 알고도 가만히 있을 이유는 없었다. 이런 문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했다. 강지한의 표정이 굳었다. 그가 3년 동안 키운 딸이었지만 단 한 번도 그 아이의 친부모를 찾으려 하거나 친자 검사를 해본 적이 없었다. 그 아이는 애초부터 그가 주운 아이였고 자신의 친딸이 아니라는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
박유진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빛이 그녀를 감쌌고 낮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말해 봐.” 심미연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과 마주친 순간, 마음 한켠에서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마치 오래도록 감춰온 비밀이 이제야 드러날 것만 같은 예감처럼. “왜 그래, 미연아?” 박유진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따뜻했다. 그녀의 불안을 감싸 안으려는 듯 아주 섬세하게 묻는 말이었다. 심미연은 입을 열 듯 말 듯 망설였다. 떨리는 입술이 달싹이기만 할 뿐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끌어올리고 있는 건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던 진실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결심한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강지한의 딸, 강상미. 들어본 적 있지?” 박유진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아이가 왜?” 툭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그의 마음속에 조용한 파문이 일었다. ‘미연이랑 강지한의 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 지금에서야 그 아이를 말하는 걸까.’ 심미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짐하듯 눈을 감았다가 뜨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실 예전에 내가 잃어버린 내 딸... 그 애는 세상을 떠난 게 아니었어.” 그 말 한마디를 꺼내기 위해 그녀는 거의 모든 용기를 다 쏟아부었다. “정말이야?” 박유진의 목소리는 놀라움에 젖어 있었다.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그때 너 분명히 말했잖아. 아이 숨 안 쉬고 있었다고. 직접 확인했었잖아... 확신했었어.” 그 순간, 박유진의 머릿속을 스친 단 하나의 가능성. ‘설마... 지금 미연이가 말하려는 게... 그 아이가 강상미라는 말이야?’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껏 맞춰지지 않던 조각들이 하나로 이어지고 복잡하게 얽혔던 퍼즐이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박유진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손끝이 얼어붙고
박시훈은 눈을 깜빡이며 바로 앞에 있는 얼굴을 바라봤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있을 수가 있지?’ 심장이 터질 듯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심장 박동이 너무 빠른데요? 정상은 아닌 것 같네요.” 심미연은 이마를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박시훈은 민망해서 땅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왜 비정상이야... 완전 정상이거든...’ 심미연은 아무렇지 않게 그의 상처를 확인했다. 상처는 붉게 부어 있었고 피도 조금 배어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약을 꺼내 상처 위에 다시 발라주었다. 상처는 쓰라렸지만 박시훈은 이 순간이 영원히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곁에 있는 지금이 너무도 소중했다. 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상처를 감싸고 도구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마무리를 한 뒤 장갑을 벗으며 병실을 나갈 준비를 했다. “저... 방금 야식 시켜놨는데... 같이 먹고 가주면 안 돼요?” 박시훈은 괜히 목이 메여 말끝이 흐려졌다. 자신이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었다니, 스스로도 놀라웠다. ‘내가 왜 이 사람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거야...’ “저는 밤에 야식 먹는 습관 없어요.” 심미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야식 너무 자주 먹지 마요. 건강에 안 좋아요. 전 이만 갈게요. 야식 먹고 푹 쉬세요.” 그녀의 말에 박시훈은 마치 한겨울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얼어붙었다. 심지어 발끝까지 저릿했다. 그녀가 간다. 그를 남겨두고 그냥 떠나버린다. 속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심미연은 이미 등을 돌린 채 병실을 나서고 있었고 박시훈의 낙담한 얼굴은 그녀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병실을 벗어난 심미연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깊게 숨을 들이켰다. 몇 시간째 이어진 수술에, 온몸이 녹초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강지한을 살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로비로 걸어 나왔을 때 문 앞에 서 있는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심미연의 시선이 하얗게 눈처럼 샌 강준형의 머리카락에 머물렀다. 가슴 어딘가가 저릿하게 아려왔다. 만약 시간이 되돌릴 수 있다면. 그저 아무 걱정 없이 웃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땐 주저 없이 말했을 것이다. ‘네. 할게요.’그때 그녀는 강지한을 사랑했고 그의 가족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강지한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강준형이 걱정된다고 해서 그 바람을 무조건 들어줘야 할 이유도 없었다. 곁에서 조용히 그녀를 훔쳐보던 가정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모님은 역시 마음이 떠나신 거구나...’ ‘이러다 어르신 또 며칠을 우울하게 보내시겠네...’강준형도 그녀의 침묵에서 모든 걸 느낄 수 있었다. 인연이란 게 억지로 붙잡는다고 이어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비록 아쉬움은 남지만 그 역시 그녀의 선택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할아버지, 사실 저랑...”“딩.” 심미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려는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고개를 든 그녀는 곧장 부드러운 눈빛을 머금은 박유진과 눈이 마주쳤고 그 말은 다시 목구멍 깊숙이 삼켜졌다. “오빠, 여긴 어떻게 왔어?”박유진은 따뜻한 미소로 대답했다. “너 데리러 왔어.” 그리고 곧 예의를 갖춰 강준형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강준형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유진아, 너랑 미연이...?” 어딘가 모르게 다정해 보이는 둘의 분위기.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의심이 스쳤다.“할아버지, 제가 차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심미연은 사실 내일 박유진과 혼인신고를 하러 갈 거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조금 전, 강준형이 ‘강지한과 다시 잘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던 말이 떠오르자 그 말을 도저히 꺼낼 수 없었다.‘말하지 말자. 괜히 말했다가 할아버지 마음만 상할 수도 있어.”그 순간, 박유진의 손이 저절로 움켜쥐어졌다. ‘할아버지한테
하지만 정작 온지유의 칼끝을 막나낸 사람은 그다지 친하다고 할 수 없었던 박시훈이었다. 심미연의 진지한 얼굴을 본 강준형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단박에 알아챘다. 더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그를 의자에 앉히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만 앉아 계세요. 옷만 갈아입고 금방 나올게요.” “그래. 다녀오너라.” 강준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냈다. 심미연이 등을 돌려 복도로 사라지자 그는 그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곁에 서 있던 가정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요즘 사모님이 예전보다 훨씬 더 예뻐지신 것 같아요. 성격도 훨씬 부드러워지셨고요. 만약 사모님이 도련님과 다시 재결합하신다면 어르신께서도 도련님 혼자 남을까 봐 걱정 안 하셔도 될 텐데요.” 강준형은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미연이가 돌아온다면 지한이도 지금처럼 외롭진 않겠지. 상미도 엄마 손길이 필요하고... 지한이가 아무리 잘 챙긴다 해도 아빠는 아빠일 뿐이지. 엄마처럼 섬세하긴 어렵잖니. 게다가 지한이는 이노하이브를 이끄는 입장이라 상미를 온전히 돌보기엔 시간도 턱없이 부족하고 말이다.” “나중에 사모님께 슬쩍 한번 말씀드려보시는 건 어떠세요?” 가정부는 늘 심미연을 좋게 봐왔다. 도련님과 이혼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요즘 세상에 외모, 인품, 성격, 효심까지 갖춘 여자를 다시 만나긴 정말 쉽지 않으니까. 강준형은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분위기 봐서 말해보지. 미연이가 듣기 싫어하면 더는 꺼내지 않을 거다.”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가정부도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심미연이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가시죠. 할아버지.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