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모르게 사모님이라는 호칭을 내뱉은 임현은 당장이라도 제 혀를 뽑아버리고 싶었지만 온지유는 그 호칭이 꽤나 마음에 들었는지 웃으며 대답했다.사모님이라는 호칭을 들은 심미연은 손에 들고 있던 자료를 찢어버리고는 임현을 향해 말했다.“임현 씨는 나가서 의뢰인 상황 좀 알아봐요, 나는 온 팀장님과 얘기 좀 해야겠어.”심미연 손에 들린 찢겨진 자료를 보던 임현은 화가 나 보이는 심미연에 뭐라 묻지도 못하고 방을 나섰다.온지유가 심미연의 팀장 자리를 뺏어서 화가 난 줄로만 알지 화를 내는 이유가 강지한과 온지유 사이 때문일 거라고는 전혀 예상을 못 하는 임현이었다.“심미연, 뭐 하자는 거야? 전화는 왜 안 받아?”임현이 나가자마자 소리를 지르는 온지유에 심미연은 고개를 들어 올리며 대꾸했다.“일 처리에 어려운 게 있으면 회사 단톡방에 물어보세요, 직원들이 착해서 다들 대답은 해줄 거에요. 저는 팀장님 부하직원일 뿐인데 너무 가깝게 지내면 다들 오해하잖아요. 그럼 저는 어쩔 수 없이 사실을 말해야 하는데, 제가 지한 씨 아내고 팀장님이 불륜녀라는 사실을 직원들이 다 알게 돼도 괜찮으세요?”심미연은 일부러 말을 천천히 하며 불륜녀라는 단어에는 더 힘을 주었다.온지유가 이곳에 온 건 그저 자신의 기를 꺾어놓기 위함임을 알기에 심미연은 오히려 더 당당하게 말해야만 했다.강지한이 없으니 연기를 할 필요도 없었던 온지유는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너랑 지한 씨 사이가 밝혀지면 지한 씨가 널 가만둘 것 같아?”그에 심미연은 눈꼬리를 접어 올리며 대꾸했다.“우리 사이가 밝혀지면 곤란한 건 너겠지, 그러게 누가 내연녀로 살래?”“아직 제대로 핀트가 나가진 않았으니까 그 전에 할 말 있으면 빨리하고 꺼져.”“네가 감히 그럴 수나 있겠어?”자신을 죽어라고 노려보는 온지유를 보며 심미연은 머리칼을 쓸어넘겼다.“나는 못 해도 할 사람은 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한번 해볼까 진짜?”“심미연, 이 미친년이!”할아버지를 언급하는 심미연에 그가 심
“내가 방금 들었는데, 심미연이 전에 대표였던 사람하고 묘하게 엮여 있었대. 둘이 자주 같이 다녔고 사무실에 들어가면 반나절씩 있다가 나오고 그랬다던데? 사람들이 그러는데 리우에서 실적이 좋은 것도 다 그런 더러운 방법으로 얻어낸 거래. 경성 변호사들 사이에서도 남자랑 잤다는 말들 엄청 많아!”온지유는 일부러 말끝을 흐리며 입에 담기도 힘들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온지유, 너 이제 변호사야. 헛소리로 사람 욕할 거면 확실한 증거부터 들고 와. 로펌에 떠도는 소문을 나한테 와서 떠들 시간이 있으면 네 일부터 똑바로 해. 나 바쁜 거 너도 알잖아. 앞으로 이런 쓸데없는 얘긴 확실해지고 나서 말해.”강지한은 짜증 난다는 듯 손가락으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결혼한 지 3년 동안 심미연은 늘 바빴지만 그래도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아침을 준비했고 퇴근 후에도 저녁을 직접 만들어왔으며 강지한의 옷은 항상 손으로 빨아놨었다.그래서 강지한은 그녀가 마음속에 다른 사람을 품고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몸을 이용해 거래까지 할 사람은 아니라고 믿고 있었다.남자의 직감은 때로는 놀랍도록 정확해서 머리로는 심미연을 전혀 의심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래도 자신의 여자가 다른 남자와 엮였었다는 말을 듣는 건 언제나 기분 나쁜 일이었다.강지한이 심미연을 질색하게 만들어 그녀를 집에서 쫓아내려고 일부러 과장해서 떠들던 온지유는 예상치 못한 강지한의 반응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냥 거절도 아니고 자신을 타박하기까지 하니 더 이상 말을 이을 수도 없었다. 전에는 그녀가 하는 말이라면 뭐든 믿어줬던 강지한이 지금은 조금 변한 것 같았다.“리우는 이제 네 소관이야.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문 퍼뜨리는 사람은 바로 잘라.”싸늘한 강지한의 목소리에 온지유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나 팀장 단지도 얼마 안 됐는데 갑자기 사람부터 자르면 직원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우선 경고부터 주고 또 그러면 그때 자를게. 그래도 돼?”강지한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불안해진 온지유는 좀처럼 알 수
임현은 잠시 벙쪄 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오늘 새로 부임한 대표가 직접 온지유를 데리고 왔다는 건 대놓고 ‘공식 발표’를 한 거나 다름없었기에 온지유가 대표 부인일 거라고 다들 추측하고 있었지만 심미연이 아니라고 했으니 그녀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는 임현은 그렇게 믿기로 했다.그때 갑자기 울린 전화벨 소리에 심미연은 대화를 멈추고 핸드폰을 들어보았다.“안녕하세요, 리우 로펌 심미연입니다.” 처음 보는 번호라 잠시 고민하던 심미연이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로 차가운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야.”그 익숙한 목소리에 심미연은 금세 그녀가 강지한의 어머니라는 걸 알아차리고는 입술을 말아 문 채 낯선 사람 대하듯 대꾸했다. “무슨 일이시죠, 여사님?”결혼 이후, 어미님이라는 호칭 대신 여사님이라고 부르도록 요구한 문소영에 심미연은 외부 사람들 앞에서 보여주기식으로 부를 때 말고는 늘 깎듯이 여사님이라고 불렀었다.“운정카페로 와. 할 말 있어.”문소영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본론부터 말했다.“지금 근무 시간이라 퇴근하고 다시 연락드려도 될까요?”심미연은 상대방이 흠잡을 수 없을 정도로 공손한 말투로 예의 바르게 물었다. 한 번도 자신을 좋아한 적이 없는 문소영의 부름인지라 이번 만남도 좋은 일이 아닐 게 뻔해서 심미연은 마음의 준비라고 하고 싶었지만 문소영은 제 할 말만 마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내가 지금 리우 앞 카페로 갈 거야. 30분 뒤에 봐.”자신의 의견을 묵살해버리는 문소영에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가 찾아올 만한 이유에 대해 생각해봤다. 혹시 할아버님이 준 지분 때문인가.여러 가지 가능성을 떠올리던 심미연은 30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서둘러 책상 위의 서류를 정리한 뒤 가방을 챙겨 일어서며 임현에게 말했다.“저 잠깐 나갔다 올게요. 급한 일 있으면 연락 주세요.”“네, 변호사님. 조심히 다녀오세요.”심미연이 사무실을 나가자마자 들어온 온지유에 임현은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심미연, 너 뭐 하는 거야? 어머니를 네가 왜 몰래 만나!” 마음이 급해진 온지유는 임현을 한 번 노려보고는 급히 사무실을 빠져나갔다.새로 온 기 센 팀장 때문에 이미 혼이 반쯤 나가 있던 임현은 그녀가 나가자마자 긴 한숨을 내뱉었다.한편 사무실을 나와 바로 엘리베이터로 향하던 온지유는 다급하게 협박조로 말했다.“심미연, 당장 로펌으로 돌아와. 내 말 안 듣고 계속 어머니 만나면 너 지금 바로 해고할 거야!”대답하기도 귀찮았던 심미연은 전화를 끊고 길 건너에 있는 리우로펌을 한 번 바라보았다. 예쁜 눈으로 그곳을 한참동안이나 주시하던 심미연은 익숙한 인영이 급히 정문을 나오는 게 보이자 그제야 몸을 돌려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문소영은 한참 만에 온 그녀를 보며 얼굴을 찡그린 채 짜증부터 냈다.“그냥 길만 건너면 되는데 뭐가 이렇게 오래 걸려, 너 때문에 30분이나 기다렸잖아. 할아버님이 너 감싸주신다고 내가 너 못 건드릴 거라고 생각하는 거니?”문소영 맞은편의 의자를 꺼내며 앉던 심미연은 웃으면서 말했다.“들어오려고 했는데 우연히 의뢰인을 만나서 잠깐 얘기했어요. 늦어서 죄송해요 여사님.”공손하면서도 친절한 태도였지만 문소영은 뭐가 그렇게 못마땅한지 차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네가 직접 일해서 번 돈? 고작 그거 가지고 가방 하나는 사겠니? 뭐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한다고 그렇게 유세야, 안 부끄러워?”심미연은 갑자기 자신을 찾아와 쓸데없는 말들만 늘어놓는 그녀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시어머니와 싸우는 건 옳지 않았기에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강지한 씨랑 저 사이엔 아무 감정도 없는 거 여사님도 아시잖아요. 그 사람한테 못 기대니까 제가 직접 벌어야죠.”강지한 매달 주는 2천만 원은 전부 집에 들어가는 돈이었기에 심미연 본인의 차 할부, 생활비, 기름값 등 나머지 지출은 심미연이 직접 벌어야만 했다. 강지한에게 손을 벌리는 건 심미연도 원치 않았고 손을 벌린다 해도 줄 강지한이 아니었다.심미연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문소
자신과 강지한의 결혼으로 인해 친조카 일은 포기한 줄로 알았는데 오늘 문소영의 태도를 보니 아직도 계획 중인 것 같았다.3년 동안 잠잠하다가 이번에 찾아온 것도 할아버님이 주식을 주시니 계획을 서둘러야겠다 싶어서 온 것 같았다.문소영이 이토록 이혼을 재촉하는 건 이혼을 해야 다른 여자를 강지한의 침대에 올려보낼 수 있어서 일 것이다.심미연이 강지한과 결혼할 수 있었던 것도 다 그 이유 때문이니까.“누가 불륜이고 누가 사실혼이야.”그때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오는 차가운 목소리에 심미연은 몸이 얼어붙어 버렸다.그 목소리는 틀림없이 강지한인데 그가 여기는 어떻게 알고 온 건지 의아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하지만 심미연은 이내 감정을 추스르고 머리를 넘기며 고개를 돌려 예쁜 눈을 접어 웃어 보였다.“여기 공공장소인데 그런 얘기는 자제하는 게 좋지 않을까?”“너 어떻게 지한 씨를 두고 그런 얘기를 해? 지한 씨가 너한테 얼마나 진심인데, 미안하지도 않니?”그때 또 슬픈 척 연기를 하며 끼어드는 온지유에 심미연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네가 무슨 염치로 감히 그런 말을 해?”“기사에 얼굴 비추고 싶은 거면 말만 해. 너희가 방을 몇 번이나 잡았고 선물은 또 몇 번이나 오갔는지 내가 하나하나 다 읊어줄 테니까.”“미연아, 제발 나 좀 내버려 둬. 왜 자꾸 모함하는 거야, 나 이제 더는 내 명예 실추시키고 싶지 않아.”그에 온지유가 눈시울 붉힌 채 몸을 떨어대자 심미연은 어이없다는 듯 대꾸했다.“누가 널 모함해, 헛소리도 정도껏 해야지.”유언비어는 책임질 필요가 없다고 저렇게 마음껏 떠들어대는 온지유가 심미연은 추해 보이기만 했다.하지만 온지유는 자신의 연기를 계속 이어나갔다.“네가 며칠 전에 기사 올려서 나 상도 취소될 뻔했어. 다행히 상은 지켰지만 이제 무용단에도 못 돌아가게 생겼어. 우리 사이에 도대체 무슨 원한이 있다고 나를 이렇게 못살게 구는 거야?”흥분했는지 말을 하면서 딸꾹질까지 해대는 모습이 남이 보기에는 아주 가여워 보였
가시지 않는 고통에 심미연은 희미해진 시야에 강지한을 담으며 말했다.“쟤가 연기하는 건 눈에 안 보여?”강지한처럼 똑똑한 사람이 온지유의 얕은수를 못 보아낼 리 없었지만 강지한은 늘 그녀에게 속아줬었다.그러면서 상처를 입은 자신한테만 이토록 가혹했다.아무리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적어도 사람이면 걱정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거 아닌가.“지유는 쓰러지려고 했고 너는 멀쩡히 서 있잖아, 지금 나 안 따라 나오면 내일부터 출근 못 하게 될 거야.”내연녀가 아내에게 누명을 씌우는 걸 보고만 있으면서 내연녀를 감싸기 위해 일로 협박까지 해오는 강지한과 자신이 처한 우스운 상황에 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았던 심미연은 주먹을 꽉 쥐고 말했다.“공사는 명확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내 착각이었나 보네.”“지유 쓰러지잖아, 얼른 병원부터 보내. 미연이는 내가 잘 돌려보낼게.”그때 방관만 하던 문소영이 갑자기 입을 열자 강지한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엄마가 어른인데 뭐하러 여기까지 찾아와요. 앞으로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연락해요, 내가 심미연 데리고 가면 돼요.”강지한은 이내 심미연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어나갔다.“계속 버티고 있으면 지유 잘못되라고 일부러 시간 끄는 걸로 생각할 거야. 오해의 소지가 충분하잖아. 너 감당 할 수 있겠어?”차갑기만 한 게 아니라 시리기까지 한 말에 심미연은 한기가 피부를 뚫고 뼈를 타고 온몸에 전해지는 것만 같아 저도 모르게 몸이 떨려왔다.가슴에서 느껴지던 통증도 이젠 무뎌지고 그저 치가 떨리게 시린 느낌만이 몸을 에워싸고 있었다.온지유가 기절한 척 연기하는 것만 아니었으면 잔인한 강지한의 말에 진작에 웃음을 터뜨리고도 남았을 것이다.한편 문소영은 심미연과 대화하는 강지한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그의 속내를 알아내려고 했지만 워낙 속마음을 감추는데 능숙한 강지한이라 그녀는 아무것도 보아내지 못했다.하지만 이상하게 어딘가 찝찝했다.“심미연.”그때 강지한이 다시 낮은 목소리로 심미연을 부르자 심미연
어쩐지 3년 동안 그 흔한 파티하나 참석하라는 말이 없다 했는데 그게 다 자신이 예의를 몰라서 강씨 집안 얼굴에 먹칠이라도 할까 봐 걱정돼서였다는 걸 심미연은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물론 집안에서는 내놓은 자식 취급을 받았던 건 맞지만 그래도 외할머니랑 살면서 할머니가 사람까지 붙여줘서 웬만한 건 다 교육을 받은 상태였다.웃는 모습부터 인사, 식사예절까지 빠지지 않고 다 배워서 어느 재벌 집 딸들과 비겨도 뒤지지 않을 자신은 충분했다.강지한과 결혼한 뒤에도 늘 행동거지에 심혈을 기울이며 나름대로 재벌 집 사모님 노릇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오늘 보니 그건 다 저만의 착각이었던 것 같았다.강지한에게 저는 그저 잠자리 상대에 불과한 것 같았다.침대 위에서는 그 어떤 예의도 필요하지 않았으니까.한편 심미연에게 예절을 가르치라는 강지한의 말에 그제야 마음이 편해진 문소영이 웃으며 대꾸했다.“그래, 내가 시간 내서 잘 가르쳐놓을게.”“그럼 좀 서둘러주세요, 얼마 뒤에 한원 그룹 어르신 생신이신데 그날 심미연도 데려갈 거에요. 엄마가 잘 가르쳤는지 그날 확인할게요.”심미연을 한원 그룹 회장의 생일파티에 데리고 가는 걸 지금 결정했다는 듯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강지한이었지만 그의 품에 안긴 온지유는 무언가 이상했다.하지만 굳이 또 어디가 이상하다고 짚어낼 수는 없어서 그저 눈을 감고만 있었다.문소영은 온지유를 안고 있는 강지한을 보며 문득 심미연이 불쌍하게 느껴졌다.남편 사랑을 못 받으면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게 여자인데 그런 상황에 닥친 게 심미연이라 같은 여자로서 생긴 측은지심인 것 같았다.할 말을 마친 강지한은 온지유를 안고 카페를 나섰다.카페 앞에는 심미연이 서 있었는데 가만히 서 있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얌전해 보여 그녀의 외모만 봐서는 그녀가 법정에서 목에 핏대를 세우며 싸우는 변호사일 거라고는 전혀 상상이 가지 않았다.강지한은 그런 심미연을 보며 그녀에게로 다가가 말했다.“가서 차 가져와.”그 목소리에 생각을 멈
“그래, 온지유는 남이 아니라 당신 여자지, 내가 남이야!”강지한을 차갑게 노려보며 말을 마친 심미연은 바로 등을 돌려 걸어갔다.여기서 더 말하면 그에게 손을 댈 것만 같아 간신히 참은 건데 양심이라고는 없는 강지한은 또 한숨을 쉬며 짜증 섞인 말을 내뱉었다.“심미연, 너 진짜 속 좁은 거 알아?”온지유는 강씨 집안 족보에 이름을 올린 한 집안사람인데 그녀에게만 매정한 심미연이 강지한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의 말에 발걸음을 멈춘 심미연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그렇게 내가 형님보다 못난 사람인 것 같으면 빨리 서류에 사인이나 해, 이혼하고 각자 갈 길 가자.”강지한은 이혼서류에는 사인도 안 하면서 또 이래저래 꼬투리만 잡고 있었기에 심미연은 그가 자신을 괴롭히려고 일부러 그런다고만 생각했다.“이혼 얘기 한 번만 더해.”하지만 강지한은 강지한대로 이혼을 시도 때도 없이 입에 올리며 결혼을 애들 장난으로 생각하는 심미연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낮은 목소리로 화를 참으며 말했다.강지한이 막무가내로 나오자 심미연도 그동안 마음에 담아두었던 말들을 하기 시작했다.“이혼 얘기 듣기 싫으면 너부터 온지유랑 거리 유지해, 둘이 같이 기사에 오르는 거 나 더는 못 봐줘. 약속하면 나도 이혼 얘기는 안 꺼낼게.”일말의 보장도 없는 결혼생활은 심미연에게도 고통에 불과했기에 결코 오랫동안 지속될 수 없는 것이었다.“심미연...”강지한이 그 말에 대답하려고 할 때 그 품에 안겨있던 온지유가 눈을 비비며 말했다.“지한 씨, 여기 어디야? 나 쓰러졌었어?”지금 눈을 뜨지 않으면 강지한이 그녀의 말에 응할 것만 같아 온지유는 연기도 집어치워 버렸다.정말 강지한이 심미연 말대로 자신과 거리를 두면 둘 사이는 여기서 끝이 날 것만 같아서 일단은 그걸 막는 게 먼저였다.강지한도 그제야 온지유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너 아까 쓰러졌었어. 괜찮아? 병원 갈까?”“저혈당으로 쓰러진 걸 거야. 괜찮으니까 병원은 안 가도 돼.”간드러지는 목소리로 고개를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
박유진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빛이 그녀를 감쌌고 낮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말해 봐.” 심미연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과 마주친 순간, 마음 한켠에서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마치 오래도록 감춰온 비밀이 이제야 드러날 것만 같은 예감처럼. “왜 그래, 미연아?” 박유진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따뜻했다. 그녀의 불안을 감싸 안으려는 듯 아주 섬세하게 묻는 말이었다. 심미연은 입을 열 듯 말 듯 망설였다. 떨리는 입술이 달싹이기만 할 뿐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끌어올리고 있는 건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던 진실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결심한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강지한의 딸, 강상미. 들어본 적 있지?” 박유진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아이가 왜?” 툭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그의 마음속에 조용한 파문이 일었다. ‘미연이랑 강지한의 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 지금에서야 그 아이를 말하는 걸까.’ 심미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짐하듯 눈을 감았다가 뜨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실 예전에 내가 잃어버린 내 딸... 그 애는 세상을 떠난 게 아니었어.” 그 말 한마디를 꺼내기 위해 그녀는 거의 모든 용기를 다 쏟아부었다. “정말이야?” 박유진의 목소리는 놀라움에 젖어 있었다.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그때 너 분명히 말했잖아. 아이 숨 안 쉬고 있었다고. 직접 확인했었잖아... 확신했었어.” 그 순간, 박유진의 머릿속을 스친 단 하나의 가능성. ‘설마... 지금 미연이가 말하려는 게... 그 아이가 강상미라는 말이야?’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껏 맞춰지지 않던 조각들이 하나로 이어지고 복잡하게 얽혔던 퍼즐이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박유진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손끝이 얼어붙고
박시훈은 눈을 깜빡이며 바로 앞에 있는 얼굴을 바라봤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있을 수가 있지?’ 심장이 터질 듯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심장 박동이 너무 빠른데요? 정상은 아닌 것 같네요.” 심미연은 이마를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박시훈은 민망해서 땅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왜 비정상이야... 완전 정상이거든...’ 심미연은 아무렇지 않게 그의 상처를 확인했다. 상처는 붉게 부어 있었고 피도 조금 배어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약을 꺼내 상처 위에 다시 발라주었다. 상처는 쓰라렸지만 박시훈은 이 순간이 영원히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곁에 있는 지금이 너무도 소중했다. 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상처를 감싸고 도구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마무리를 한 뒤 장갑을 벗으며 병실을 나갈 준비를 했다. “저... 방금 야식 시켜놨는데... 같이 먹고 가주면 안 돼요?” 박시훈은 괜히 목이 메여 말끝이 흐려졌다. 자신이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었다니, 스스로도 놀라웠다. ‘내가 왜 이 사람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거야...’ “저는 밤에 야식 먹는 습관 없어요.” 심미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야식 너무 자주 먹지 마요. 건강에 안 좋아요. 전 이만 갈게요. 야식 먹고 푹 쉬세요.” 그녀의 말에 박시훈은 마치 한겨울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얼어붙었다. 심지어 발끝까지 저릿했다. 그녀가 간다. 그를 남겨두고 그냥 떠나버린다. 속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심미연은 이미 등을 돌린 채 병실을 나서고 있었고 박시훈의 낙담한 얼굴은 그녀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병실을 벗어난 심미연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깊게 숨을 들이켰다. 몇 시간째 이어진 수술에, 온몸이 녹초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강지한을 살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로비로 걸어 나왔을 때 문 앞에 서 있는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심미연의 시선이 하얗게 눈처럼 샌 강준형의 머리카락에 머물렀다. 가슴 어딘가가 저릿하게 아려왔다. 만약 시간이 되돌릴 수 있다면. 그저 아무 걱정 없이 웃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땐 주저 없이 말했을 것이다. ‘네. 할게요.’그때 그녀는 강지한을 사랑했고 그의 가족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강지한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강준형이 걱정된다고 해서 그 바람을 무조건 들어줘야 할 이유도 없었다. 곁에서 조용히 그녀를 훔쳐보던 가정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모님은 역시 마음이 떠나신 거구나...’ ‘이러다 어르신 또 며칠을 우울하게 보내시겠네...’강준형도 그녀의 침묵에서 모든 걸 느낄 수 있었다. 인연이란 게 억지로 붙잡는다고 이어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비록 아쉬움은 남지만 그 역시 그녀의 선택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할아버지, 사실 저랑...”“딩.” 심미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려는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고개를 든 그녀는 곧장 부드러운 눈빛을 머금은 박유진과 눈이 마주쳤고 그 말은 다시 목구멍 깊숙이 삼켜졌다. “오빠, 여긴 어떻게 왔어?”박유진은 따뜻한 미소로 대답했다. “너 데리러 왔어.” 그리고 곧 예의를 갖춰 강준형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강준형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유진아, 너랑 미연이...?” 어딘가 모르게 다정해 보이는 둘의 분위기.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의심이 스쳤다.“할아버지, 제가 차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심미연은 사실 내일 박유진과 혼인신고를 하러 갈 거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조금 전, 강준형이 ‘강지한과 다시 잘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던 말이 떠오르자 그 말을 도저히 꺼낼 수 없었다.‘말하지 말자. 괜히 말했다가 할아버지 마음만 상할 수도 있어.”그 순간, 박유진의 손이 저절로 움켜쥐어졌다. ‘할아버지한테
하지만 정작 온지유의 칼끝을 막나낸 사람은 그다지 친하다고 할 수 없었던 박시훈이었다. 심미연의 진지한 얼굴을 본 강준형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단박에 알아챘다. 더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그를 의자에 앉히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만 앉아 계세요. 옷만 갈아입고 금방 나올게요.” “그래. 다녀오너라.” 강준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냈다. 심미연이 등을 돌려 복도로 사라지자 그는 그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곁에 서 있던 가정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요즘 사모님이 예전보다 훨씬 더 예뻐지신 것 같아요. 성격도 훨씬 부드러워지셨고요. 만약 사모님이 도련님과 다시 재결합하신다면 어르신께서도 도련님 혼자 남을까 봐 걱정 안 하셔도 될 텐데요.” 강준형은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미연이가 돌아온다면 지한이도 지금처럼 외롭진 않겠지. 상미도 엄마 손길이 필요하고... 지한이가 아무리 잘 챙긴다 해도 아빠는 아빠일 뿐이지. 엄마처럼 섬세하긴 어렵잖니. 게다가 지한이는 이노하이브를 이끄는 입장이라 상미를 온전히 돌보기엔 시간도 턱없이 부족하고 말이다.” “나중에 사모님께 슬쩍 한번 말씀드려보시는 건 어떠세요?” 가정부는 늘 심미연을 좋게 봐왔다. 도련님과 이혼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요즘 세상에 외모, 인품, 성격, 효심까지 갖춘 여자를 다시 만나긴 정말 쉽지 않으니까. 강준형은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분위기 봐서 말해보지. 미연이가 듣기 싫어하면 더는 꺼내지 않을 거다.”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가정부도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심미연이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가시죠. 할아버지.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