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하야, 엄마 여기 있어.” 그녀의 목소리는 사람들로 가득한 하원 인파 속에서 사라졌다. 심태하는 엄마를 발견하자 눈이 반짝이며 작은 발걸음으로 달려와 심미연의 품에 안겼다. 마치 세상 모든 것이 이 포옹 속에서 녹아내리는 듯했다. “엄마, 너무 보고 싶었어요.” 심미연은 허리를 굽혀 그를 안으며 따뜻하게 웃었다. “엄마도 우리 태하 너무 보고 싶었어.” “태하 어머니, 오늘 태하가 유치원에서 정말 잘했어요. 친구들도 도와주고 생활 선생님께 작은 책상도 정리해드렸답니다.” 선생님은 심미연 품에 안겨 있는 아이를 보며 칭찬의 눈빛을 보냈다. 이렇게 어린 아이가 지능도 뛰어나고 감정 조절도 잘하다니. 정말 3살 어린이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선생님이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반의 다른 아이들이 아직 분유를 먹고 작은 울음에도 쉽게 따라 우는 경우가 많아 자주 힘겨운 상황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태하는 달랐다. 울지 않고 떼쓰지도 않았으며 작은 일도 차분하게 처리했다.평범한 장난감으로도 상상력을 발휘해 다양한 놀이를 해내는 모습을 보며 선생님들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10년 넘게 유치원에서 일한 선생님은 이런 기특한 3살 아이는 처음 봤다. 그동안 수많은 아이들을 봤지만 심태하처럼 차분하고 똑똑한 아이는 없었다. 심미연은 선생님의 칭찬을 듣고 잠시 놀랐다가 이내 아들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며 미소 지었다. “우리 태하는 정말 최고야.” 그녀는 심태하가 지능이 뛰어나 친구들 사이에서 잘 적응하지 못할까 봐 걱정했지만 오히려 예상보다 더 착하고 말 잘 듣는 아이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당연하죠. 내가 누구 아들인데.” 심태하는 심미연의 목을 끌어안으며 귀엽게 애교를 부렸다. 옆에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선생님은 은근히 부러워하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보기 좋은 따뜻한 장면이었다. 어쩐지 아이가 이렇게 잘 자란 이유가 모두 엄마 덕분인 것 같았다. 심미연은 웃으며 자신의 코로 아들
“먼저 약속해 주세요. 화내지 않겠다고요.” 심태하는 심미연에게 미리 주의를 주었다. 심미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았어. 화 안 낼게.” 그렇지만 마음속에서 ‘이 녀석이 무슨 엉뚱한 짓이라도 했다면 내가 이 말로 태하에게 면죄부를 준 거 아닐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심태하는 그녀의 대답을 듣고 마치 자신이 괜찮다는 것을 확인하려는 듯 잠시 눈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마법처럼 책가방 깊은 곳에서 반짝이는 공주 드레스를 꺼냈다. 드레스의 치맛자락은 가볍게 휘날리며 햇빛을 받아 다양한 색깔로 반짝였다. 심미연은 그 드레스를 보고 깜짝 놀라며 물었다. “이거 엄마한테 주는 거야?” ‘이건 분명 여자아이에게 줄 선물 아닌가?’ 심태하는 급히 해명했다. “엄마, 이건 상미한테 줄 선물이야.” 그의 목소리에는 확고한 의지와 기대가 담겨 있었고 눈빛은 순수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심미연은 그제야 예전에 심태하가 자신에게 말했던 일을 떠올리며 살며시 그의 머리를 쓰다듬고 부드럽게 대답했다. “알았어. 바로 병원에 가자.”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고 심미연은 핸들을 꽉 쥐고 앞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수많은 생각들이 휘몰아쳤다. 심태하는 누구에게나 이렇게 신경 쓰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는 다소 차갑고 냉담한 성격을 가진 아이였다. 그런데 유독 강상미한테만 특별한 감정을 보였다. 그 이유도 없이 단순히 좋아한다는 감정이었다. 심태하는 엄마가 거절하지 않자 안도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제 곧 강상미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떠 있었다. 병원에 도착한 심미연은 서둘러 심태하를 품에 안고 병원으로 들어갔다. 길게 뻗은 복도는 심하게 울리는 발걸음 소리와 때때로 들려오는 응급실 벨 소리로 더 짙어지며 숨이 막히는 듯했다. 의사로서 이곳에서 일한 지 2년, 심미연은 너무 많은 생과 사를 목격했다. 그래서 병원은 항상 불편했다.그때 문소영과 강지한의 모습이 정확히 그 지점에서 빛에
‘아니야. 그럴 리 없어.’ ‘혼자서 겁먹으면 안 돼.’ 문소영은 마음속의 혼란을 가라앉히고 심태하의 얼굴을 노려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강지한에게 말을 꺼냈다. “지한아, 상미가 몸 상태도 좋지 않은데 아무한테나 방해받을 순 없잖아.” 심미연은 그녀의 말 속에 숨겨진 의도를 금세 파악하고 강지한을 바라보며 물었다. “너도 이렇게 생각하는 거야?” 심미연은 자신이 선의로 행동한 것이 잘못된 것처럼 비난받는 기분이었다. “당연히 그렇지.” 문소영은 자랑스러운 듯이 말을 내뱉었다. 심미연은 더 이상 그녀와 싸울 생각이 없었고 그저 비웃듯 문소영의 창백한 얼굴을 한참 응시했다. “당신, 도대체 뭘 그렇게 걱정하는 거예요? 내가 아들과 함께 그 가짜의 모든 걸 빼앗을까 봐 두려운 거예요?” ‘상미가 억울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지.’ ‘어쨌든 그 아이는 강지한의 딸이니까.’ “너 진짜 뻔뻔하다.” 문소영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치쳤다. ‘예전의 심미연은 그냥 당하기만 했던 사람 아닌가?’‘어떻게 이렇게 강해졌지?’강지한은 차가운 표정으로 얼굴을 굳히며 날카롭게 경고했다. “다시 한 마디 더 하시면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내가 그렇게 간절히 원해도 가질 수 없는 심미연을 이렇게 욕하다니.’‘어머니라고 해서 함부로 심미연을 욕할 수는 없어.’ 문소영은 강지한의 무자비한 경고에 순간 얼어붙어 입을 꾹 다물었다. 하나는 강지한의 성격을 너무 잘 알았기에 그를 진심으로 화나게 했다간 결코 가벼운 대가를 치르지 않을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지금의 심미연에게서 느껴지는 그 강력한 기세에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문소영이 물러서자 강지한은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끝이 심태하의 작은 얼굴에 닿을 듯했지만 그 순간 심미연은 민첩하고 단호하게 몸을 틀며 손을 피했다. 심미연의 눈빛 속에는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었다. 오직 차가운 결단력만이 가득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엄마, 예전에도 사람들이 오늘처럼 엄마한테 그랬어요?” 심태하는 심미연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애틋하게 물었다. 그는 엄마가 너무나 안쓰러웠다. 과거에 그 나쁜 아빠와 함께했을 때 엄마가 얼마나 많은 서러움을 겪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심미연은 순간 놀라 살짝 붉어진 눈으로 심태하의 얼굴을 바라보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아니야.” 사실 문소영이 그녀에게 차가운 태도를 보인 건 주로 가족 모임에서였고 평소엔 마주칠 기회조차 없었다. 문소영이 그녀를 괴롭히고 싶어도 기회가 없었던 셈이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강지한이었다. 강지한은 언제나 냉당했고 심미연은 그의 차가운 태도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 시절의 자신은 정말 강했던 것 같다. 그렇게 힘든 나날들도 다 버텨냈으니까.“나중에 그 사람이 또 엄마한테 그러면 바로 경찰에 신고해요. 가만두지 말고 본때를 보여줘야죠. 엄마가 만만한 줄 알면 안 돼요.” 심태하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차가운 눈빛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그 모습은 강지한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그 순간 심미연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태하가 이렇게 어린 나이에 강지한을 미워하고 있다니...’ ‘나랑 강지한 사이의 문제가 태하에게 너무 큰 상처를 준 걸까?’‘아직 어린 아이인데 이렇게 마음에 증오를 품고서 제대로 성장할 수 있을까?’ 심미연은 처음으로 자신이 잘못한 건 아닌지 깊이 반성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강지한과 진지하게 얘기할 기회를 만들어야 해.’ 비록 두 사람의 관계는 끝났지만 적어도 아이만큼은 사랑이 가득한 환경에서 자라도록 해야 한다. 그게 심태하를 위한 길이니까.“엄마, 걱정 마세요. 제가 빨리 자라서 엄마를 지켜줄게요. 누가 엄마를 괴롭히면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심태하는 살짝 붉어진 심미연의 눈을 바라보며 속으로는 밥도 많이 먹고 고기고 많이 먹어 빨리 자라겠다고 다짐했다. 심미연은 그런 아들의 말에 가슴이 아려
심미연은 심태하의 작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조용히 물었다. “태하야, 너는 상미 아빠를 싫어하면서 왜 상미는 좋아하는 거야?” 심태하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처음 봤을 때부터 지켜주고 싶었어요. 내가 좋아하는 장난감도 간식도 다 주고 싶고... 그냥 좋아요.”아직 세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는 마음속의 감정을 더 이상 말로 표현하지 못했지만 그 순수한 진심은 고스란히 전해졌다. 심미연은 아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져 그저 대견하다는 듯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쩜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말을 할 수 있지?’그때 핸드폰 벨소리가 울리면서 심미연은 하려던 말을 꾹 삼켰다. 전화를 받자 부드럽고 상냥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미연 씨, 남편이 빠르게 회복해서 오늘 오후에 퇴원했어요. 저녁에 식사 대접하고 싶은데 시간 괜찮으세요?] 목소리의 주인은 며칠 전 심미연이 구해준 남자의 아내였다. 원래는 주말에 식사를 대접하려 했지만 일이 예상보다 빨리 진행된 모양이었다. [오늘 바쁘시면 다른 날로 조정해도 괜찮아요.] 여성이 덧붙였다. 심미연은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미소 지었다. [아니요. 오늘 괜찮아요. 장소만 알려주시면 돼요.] [네. 그럼 이만 끊을게요. 이따 뵐게요.] 전화를 끊고 심미연은 전에 조사했던 그 남자의 신분이 떠올랐다. 군부대 고위 간부로 젊은 나이에 이미 수많은 전공을 세운 인물. 이런 인연이라면 당연히 잘 관계를 맺어야 했다.“엄마, 오늘 약속 있어요? 아니면 제가 택시 타고 아빠 회사에 가서 기다릴까요?” 심태하는 배려 깊게 물었다. “엄마가 널 집에 데려다줄게. 요즘 아빠가 바빠서 시간 맞추기가 힘들어. 너도 아빠 사무실에 가면 심심할 거야.” “알겠어요.” 심미연은 아이에게 안전벨트를 채워주고 운전석에 올라 차를 몰고 집으로 향했다. 같은 시각 VIP 병실.강상미는 창백한 얼굴로 병상에 누워 있었다. 기운이 없어보이
문소영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그가 가진 차가운 얼굴에 질투가 일었다. “방금 임지혜 씨한테 전화했어. 지금 식당으로 가고 있대. 너도 지금 가는 게 어때?” 그녀의 의도는 명백했다. 강지한에게 새로운 여자를 소개하고 싶었던 것이다. 심서연은 이미 죽었고 돌아올 일은 없었다. 강상미는 엄마가 필요했다. 강지한이 차갑게 얼굴을 굳히자 문소영은 그가 거절할 것이라 확신한 듯 먼저 말을 꺼냈다. “너 전에 분명히 약속했잖아.” 그 말에 강상미가 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상미 새엄마 찾으러 가는 거예요? 저는 싫어요.” 문소영은 분노가 치밀어 올라 강상미를 더욱 강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강상미, 너는 어른들 일이 뭔지 모르면서 왜 끼어들어. 입 좀 다물어.” ‘이 아이는 그때 죽였어야 했어.’ ‘강지한에게 맡기지 말았어야 했다고.’ ‘따지고 보면 심서연이 제일 멍청해.’ ‘3년이나 강지한 옆에 있으면서 그 침대 한 번 못 차지하다니.’ ‘그렇게 쓸모없는 여자를 왜 썼을까.’ 강상미는 그 말에 겁을 먹고 눈물을 터뜨렸다. 강지한은 급히 강상미를 안아 올리고 부드럽게 달래며 말했다. “울지 마. 괜찮아. 아빠 여기 있어.” 강상미는 그의 목을 꽉 붙잡고 문소영의 시선을 피하며 눈물을 흘렸다. 강지한은 얼굴을 굳히고 차가운 눈빛으로 문소영을 쏘아보며 말했다. “다시는 여기에 발도 들이지 마세요.”강지한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비록 강상미가 친딸은 아니지만 그 아이는 그가 데려다 키운 딸이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함께 지내면서 애정이 없을 리 없었다. 그런데 왜 문소영은 강상미에게 그렇게 차갑고 냉정한 태도를 보이는 것인지 그 이유를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문소영은 잠시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상미는 내 손녀야. 내가 상미를 보러 오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 왜 날 못 오게 하는 거야?” 그녀는 강지한이 강상미를 소중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유치원에서 더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고 혼자 외롭게 지내는 일도 없을 거야.’ “아빠, 빨리 오빠 엄마한테 전화해요.” 강상미는 작은 목소리로 강지한을 재촉했다. 아이는 이미 그들과 만날 생각에 들떠 있었다. 강지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꺼내 심미연의 번호를 눌렀다. 그 번호는 성무진에게 부탁해서 구한 업무용 번호였다. 개인 번호는 아니었다. 전화가 울리던 중 아무도 받지 않았다. 강지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심미연이 전화를 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 때 전화기 너머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상미가 태하랑 놀고 싶다고 해서 지금 네 집에 보내려고.] 그의 말투는 단호하고 거절할 여지가 없어 보였다. [저녁 약속 있어. 내 아들도 집에서 가정부가 돌보고 있고 네 딸은 몸이 안 좋다며? 집에서 쉬게 해. 무슨 일이 생기면 누가 책임져?] 심미연은 차분한 목소리로 거절했다. ‘강지한, 진짜 한심하다.’ ‘자기 딸이 아프면 자기가 돌봐야지. 왜 나에게 떠넘기려는 거야? 진짜 웃기지도 않네.’[약속 취소하고 집에서 내 딸 좀 돌봐.]강지한은 마치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말했다. ‘여자는 집에서 남편과 자식을 돌봐야지. 왜 밖에서 나돌며 얼굴을 내밀고 다니는 건데?’ 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입술이 비틀리며 비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네 딸에겐 엄마가 있는데 왜 나한테 맡기려고 해? 나는 그저 남인데, 무슨 얼굴로 나한테 명령하는 거야?] ‘강지한,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알는 거지?’‘한마디 반박도 없으니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 줄 착각하는 모양이네.’[심미연, 너무 냉정하게 굴지 마.]강지한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며 분노가 서서히 감돌았다. ‘심미연이 내 딸을 돌보는 걸 거절한다고?’ ‘상미가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상처받을까...’“아빠, 아줌마 시간이 없으신 거예요? 그럼 저는 그냥 병실에 있을게요.” 강상미는 아주 똑똑했다. 강
강지한은 핸드폰을 손에 쥔 채 화면을 가볍게 스치며 전화를 끊었다. 그 순간 주변의 모든 소음과 혼란이 마치 사라진 듯했다. 그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단단해지며 깊어졌고 품에 안은 어린 아이를 바라보며 입가에 부드럽고 따뜻한 미소가 스쳤다. “상미야, 아빠가 지금 오빠 엄마한테 데려다줄게. 괜찮지?” 방금 전 그는 문득 깨달았다. 심미연은 그를 거절할 수도 있고 그를 싫어할 수도 있지만 강상미에 대한 사랑만큼은 진심이었다. 강상미가 무엇을 요구하든 심미연은 결국 다 들어줄 것이다. 이제 그는 매일 딸을 핑계로 심미연을 찾아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기분이 한층 나아졌다. 예전엔 심미연이 곁에 있을 때 그녀가 그저 귀찮고 피하고 싶기만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다면 아이 핑계로만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어이없으면서도 웃기게 느껴졌다. 강상미는 아빠의 말을 듣고 눈을 반짝이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 눈빛은 마치 밤하늘에서 가장 밝은 별처럼 반짝였다. 작은 손은 아빠의 목을 꽉 감으며 얼굴에는 억누를 수 없는 기쁨이 가득했다. “정말요? 빨리 가요.”아이의 목소리엔 순수한 기쁨과 흥분이 묻어 있어 마치 세상 모든 것이 그 순간 빛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강지한은 딸을 더 꼭 안아주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빨리 가자.” 강상미는 아빠의 품에서 행복하게 웃으며 작은 손을 공중에 가볍게 치면서 그 순수하고 진심 어린 기쁨이 주변의 모든 공기를 감동시키는 듯 퍼져 나갔다. 바로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열리며 ‘딩’하는 가벼운 소리가 울렸다. 마치 모험을 떠나려는 아빠와 딸의 여정을 위한 서곡처럼 들렸다. 강지한은 단호한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다. 그의 걸음은 묵직하고 강인했으며 품에 안은 강상미는 더욱 꽉 껴안으며 아빠의 품에서 세상의 모든 안정을 느끼는 듯했다. 문소영은 급히 병실을 빠져나왔지만 눈앞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공기 속에는 여전히 강지한과 강상미 부녀의
육현성이 입가를 만지며 말했다.“이진영, 네가 감히 나한테 주먹질을 날려? 내가 집에 가서 이다은 저년을 아주 제대로 혼쭐 내줄 거야. 이번엔 최소 몇 달은 못 일어날걸?”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같이 기고만장했다.“보아하니 육씨 가문이 요즘 꽤 살 만한가 보네. 감히 나 이건명의 딸을 건드려?”이건명이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육현성의 뺨을 힘껏 후려쳤다.“감히 어디서 제멋대로 굴어!”그는 자신의 앞날을 위해 딸을 육씨 가문에 시집보냈었다. 그래도 육씨 가문은 4대 가문 중 하나인데 비록 육현성이 이다은을 사랑하진 않더라도 최소한의 예우는 할 줄 알았다.그래서 이다은이 이혼하겠다고 했을 땐 괜히 유난 떠는 줄 알았는데 방금 그 모든 생각이 송두리째 무너졌다. 이다은이 육씨 가문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이제야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이건명의 등장에 육현성은 순식간에 기세가 꺾였다. 아무리 육씨 가문이 돈 많고 배경 있는 집이라도 지금의 이건명을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었다.“아버님, 화내지 마세요. 이건 오해예요. 저는 전혀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육현성이 다급히 변명하려 들었다.“됐어. 변명은 필요 없어.”이건명이 이다은의 손을 꽉 잡았다.“다은아, 미안해. 아빠가 잘못했어. 너 이혼하고 싶으면 해. 내가 최고로 실력 좋은 변호사를 붙여줄게.”이다은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아빠가... 나를 이렇게 감싸준다고? 늘 냉정하기만 했던 사람이?’그때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들렸다.“정말 감동적인 부녀지간이네요. 좋은 아버지십니다, 정말.”이진영이 자신의 아버지를 조롱하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본 순간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그... 그쪽이 왜 여기 있어요?”강혁승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는 한 모금 빨아 연기를 뿜으며 웃었다.“나요? 부모 찾으러 왔죠.”이미 이진영이 그의 정체를 눈치챘기에 더 숨길 이유도 없었다. 오늘 이 자리에 이 사람들이 모두 모인 것도 하늘의 뜻이라 생각한 강혁승은 오늘 결판을 보려 했다.“너...
“문자를 보낸 건 그 여자가 아니라 나예요!”강혁승의 음울한 얼굴에 스며든 미소는 왠지 모르게 오싹했다.이건명의 시선이 그의 얼굴에 멈췄다. 얼굴에 난 깊은 흉터만 아니었다면 이건명 본인과도 놀랍도록 닮은 얼굴이었다.하지만 그의 아내가 낳은 자식은 이다은, 이진영 남매 둘뿐이었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누구란 말인가?“건명 씨는 여기 왜 왔어요? 어서 나가요!”문소영이 다급하게 외쳤고 목소리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왜 이렇게 쫓아내려고 안달이에요? 여기까지 왔는데 문제는 해결하고 가야죠.”강혁승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고 그의 눈빛엔 싸늘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왜 저 사람한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 저 사람이랑은 아무 관련도 없어!”문소영은 이건명을 붙잡아 두고 싶지 않았다.심미연은 눈을 가늘게 떴다.‘이 와중에도 이건명을 감싸려 하다니, 그래도 한때는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이었나 보네.’“관련이 없다고요? 저 사람이 내 아버지인데?”강혁승은 조소를 띤 채 반문했다.“내가 저 사람이 수십 년 동안 도와준 일들을 전부 알고 있는데 한 번 읊어볼까요?”문소영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헛소리하지 마!”“입 다물지 못해!”이건명이 서늘한 눈빛으로 강혁승을 노려보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하지만 마음속으로는 큰일 났다고 생각했다.‘저 자식이 모든 걸 알고 있단 말이야?’심미연은 입술을 깨문 채 이건명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방원호가 넘겨준 자료가 전부 사실이었던 것이다.하지만 이건명이 한 여자를 위해 불법까지 저질렀다는 건 예상 밖이었다. 진심으로 사랑해서였을까?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던 걸까?“심미연, 이리 와!”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심미연이 깜짝 놀라 돌아보니 깊고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그는 의식이 없었는데 분위기는 여전히 무게감이 있었다. 이런 것이 바로 한 회사를 이끄는 대표만의 카리스마와 아우라인가.“멍하니 있지 말고 어서 오라고.”강지한의 말에 심미연은 정신을
문도현은 심미연의 표정이 굳은 걸 보고 머리를 쉴 새 없이 굴리기 시작했다.‘안 되겠어. 일단 지금 이 상황부터 어떻게든 모면해야 해.’하지만 심미연은 그렇게 쉽게 속을 여자가 아니었다. 그가 아무 말이나 둘러대면 단번에 꿰뚫어 볼 게 뻔했다.‘어쩌지?’그때 마침 심미연의 휴대폰이 울렸다.“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요.”“네, 가서 일 봐요. 난 여기 있을게요!”문도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심미연은 대답도 제대로 못 하고 황급히 사무실을 나섰다.문도현은 기지개를 한껏 켠 뒤 슬며시 일어나 그녀의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책상 위에 액자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그 안에 심미연이 다른 사람과 같이 찍은 사진이 한 장 있었다.그런데 그 사진 속에서 심미연의 옆에 박유진이 서 있는 걸 본 순간 문도현은 마치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박유진이랑 심미연이 왜 같이 있어? 말도 안 돼! 절대 이 둘이 이어지게 두면 안 돼!’문도현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홱 돌아서 사무실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때 마침 임현이 문을 열고 들어오다 그와 정면으로 부딪쳤다.“아야! 아이고, 아파라...”임현이 낮게 신음하며 얼굴을 찡그렸다.하지만 문도현은 그녀를 밀치고 나가버렸다.임현은 어이없다는 듯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아니, 누가 건드리기라도 했나? 왜 저렇게 화가 나 있지?”마침 그때 심미연이 다시 들어왔다.“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어요? 문 대표님은요?”“방금 나가면서 저랑 부딪혔어요. 엄청 화난 얼굴이던데요? 아무 말도 안 하고 나가더라고요.”임현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저 남자, 감정 기복 진짜 심하네.’“잘됐네요. 나 급한 일이 있어서 나가야 해요. 오늘은 임현 씨가 사무실 좀 맡아줘요.”심미연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방을 챙겨 들고 서둘러 나가버렸다.방금 강지한이 의식을 되찾았다고 한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에게 직접 물어봐야 했다.그가 어떻게 그녀가 교통사고를
문도현의 치명적인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떠올랐고 깊고 그윽한 눈빛엔 묘하게 사람 마음을 사로잡는 기운이 스쳤다. 그 눈으로 마음속 깊은 비밀까지 꿰뚫어 볼 것만 같았다.“정말 여기서 얘기할 거예요?”그는 나직하면서도 묘하게 귀를 간질이는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사진이라도 찍으면 어쩌려고요?”그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하면서도 이상하리만치 매혹적이었다. 마치 한 음절 한 음절이 심장을 울리는 현처럼 듣는 이의 감정을 툭툭 건드렸다.유흥가를 오래 드나든 남자답게 문도현의 말투나 몸짓 하나에도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서려 있었다. 그의 존재만으로도 상대방은 쉽게 그에게 빠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 뒤에 자리 잡은 견고한 집안 배경은 그의 존재에 신비로움과 권위를 덧씌웠다. 한 번만 눈빛을 주고받아도 수많은 여자가 그를 위해 기꺼이 심연으로 빠져들곤 했다.심미연은 가늘고 곧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그래요. 그럼 위에 올라가서 얘기하죠.”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차 문을 잠그고는 성큼성큼 앞서 걸었다. 그녀의 발걸음엔 흔들림 없는 결의가 담겨 있었다. 아무리 개인적으로 복잡한 감정이 얽혀 있더라도 문도현은 사건을 의뢰하러 온 손님이었다. 심미연은 일과 사적 감정을 분명히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문도현의 시선은 무심결에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라인을 훑고 지나갔다. 그러자 곧 뇌리에 수많은 기억의 파편이 번뜩이듯 스쳐 지나갔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길들지 않은 야수 하나가 깨어나는 느낌이었다.이제야 그는 자신이 여자에게 설레는 감정을 잃은 게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다만 평범한 여자들에게 더 이상 설레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흔한 여자들은 이제 그의 마음을 건드릴 수 없지만 심미연은 예외였다.그 순간 심미연의 차분하고 냉정한 목소리가 그의 흐트러진 정신을 다시 현실로 끌어당겼다.“문 대표님께서 소송을 의뢰하신다네요. 임 변호사님께서 맡아주세요.”“알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문 대표님.”임현이 공손하게 몸을 살짝 기울이며 안내했
심미연은 흩날리던 생각을 차분히 거두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궁금한 듯 물었다.“우리 태하 진짜 똑똑하네.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거야?”아직 겨우 세 살이지만 심태하의 마음은 놀랄 만큼 세심하고 예민했다. 또렷한 눈망울은 마치 세상의 감정 흐름을 꿰뚫어 보는 듯했고 그렇게 꼼꼼히 살피는 모습에 심미연은 종종 놀라곤 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박유진이 심태하를 정성스럽게 길러온 시간이 아이를 이토록 똑똑하고 배려 깊게 자라게 만든 것이다.“아까 아빠랑 통화할 때 엄마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어요. 뭔가 걱정하는 게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저한테 말 걸었을 때도 평소처럼 웃고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엄마가 혹시 슬픈 건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어요.”심태하의 말은 또렷하면서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단어 하나하나에 엄마를 향한 깊은 애정과 이해가 담겨 있었다.심태하가 보기에 박유진이 집에 있을 땐 심미연은 늘 기분이 좋아 보였고 환하게 웃는 얼굴이 참 예뻤다.“엄마가 안 웃었어?”심미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녀석, 정말 못 말려.’겨우 세 살에 이 정도인데 나중에 더 크면 얼마나 영리해질지.“네, 안 웃었어요.”심태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심태하의 목소리는 여전히 앳됐지만 말투는 왠지 어른스러웠다. 꼭 사람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기라도 한 듯했다.심미연의 마음은 그 말 한마디에 확 풀렸다. 그녀는 아들의 코끝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자, 얼른 아침 먹자.”그녀의 말투엔 아낌없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이 아이는 정말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다.“아빠가 보고 싶으면 아빠한테 전화하면 되죠!”심태하가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윙크했다.‘나도 아빠가 보고 싶은데 엄마가 안 보고 싶을 리가 없지. 맞아, 분명 그럴 거야!’심미연은 그 말에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네 말대로 할게.”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박유진이 보고 싶지만 그에게 전화하진
하지만 그 깊은 애정과 놓기 싫은 마음은 오히려 박유진을 현실이라는 갈림길 앞에서 망설이게 만들었다.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심미연만 괴로운 상황에 빠질 것이라는 걸. 그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자신의 망설임으로 인해 흐려지는 건, 그녀의 세상이 자신 때문에 흔들리는 건 차마 보고 있을 수 없었다.그렇다고 그녀를 놓아버리면 영원히 잃게 될 텐데... 그 아픔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박유진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아빠, 왜 말이 없으세요? 허락한 거죠?”심태하의 목소리는 천진난만하게 들떴다. 마치 머릿속에 따뜻한 한 가족의 그림이 그려지기라도 한 듯.‘아빠가 돌아오면 엄마랑 나랑 셋이 모여 저녁 먹고 같이 웃고 얘기하고...’심태하의 마음속에서 그려낸 가장 순수한 행복의 모습이었다.그러나 그 순수한 소망 앞에서 박유진의 마음은 송곳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그는 알고 있다. 이번 결정을 가볍게 내려서는 안 된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게 하려면 정말 신중해야 했다.하지만 사랑과 책임 사이에서 그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그는 지금 사랑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심미연과 아이를 지킬 방법을 찾고 있다.하지만 그런 길이 과연 있을까? 이 선택은 너무나도 어려웠다.“아빠, 나 이렇게 열심히 얘기하고 있는데 왜 아무 말도 안 해요?”심태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미간을 찌푸렸다.평소 같았으면 박유진은 재밌는 얘기도 해주고 자기 말에 웃어주었을 텐데, 오늘따라 너무 이상했다.‘혹시... 내가 말실수했나?’그때 박유진의 다급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심태하의 귀에 들려왔다.“태하야, 곧 비행기가 이륙해서 아빠가 휴대폰을 꺼야 돼. 오늘 밤에 다시 이야기하자. 꼭이야.”박유진은 심미연을 당장이라도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고 말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네! 알겠어요, 아빠! 그럼 오늘 밤에 꼭 통화해요. 약속했으니까 안 하면 안 돼요!”심태하의 목소리에 눈치채기 힘든 외로움이 살짝 섞여 있었다.
심미연은 멍해졌고 아까 자신이 박유진에게 연락을 시도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날아온 건 단 한 줄의 차갑고 무미건조한 메시지. 기대했던 목소리는 끝내 들을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 아들 심태하가 전화를 걸자 박유진은 놀랍게도 전화를 받았다.“아빠, 지금 어디예요? 이틀 뒤면 제 생일이에요! 아빠가 놀이공원 같이 가자고 했던 거 잊으시면 안 돼요!”심태하의 말투엔 아이 특유의 해맑은 기쁨이 가득 담겨 있었고 단어 하나하나가 살아서 튀어나오는 듯했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박유진의 목소리는 한겨울 얼음도 녹일 만큼 다정했다.“아빠 지금 진성으로 가는 비행기 타러 가는 중이야. 곧 이륙이라 휴대폰 꺼야 해. 진성에 도착하면 바로 전화할게. 약속!”그 말에는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득 실려 있었다.사실 박유진은 심태하가 생일 이야기를 할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어젯밤에 워낙 정신이 없어 그런 중요한 약속마저 깡그리 잊고 있었던 것이다.“아빠가 보내준 선물 잘 받았어요!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심태하는 아직 다 하지 못한 말이 많은 듯 아빠에게 털어놓고 싶은 게 가득한 눈치였다.박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햇살이 쏟아져 내려 유난히 눈부셨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가늘게 떴고 그 강렬한 빛이 속눈썹 아래에 그림자를 드리웠다.그 순간 그의 마음속엔 오로지 한 사람, 심미연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그녀와 떨어져 있는 모든 시간이 하나같이 그리움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그리움이 너무 커서 박유진은 당장이라도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달려가고 싶을 만큼 벅찼다.“아빠... 지금 너무 힘들죠? 그럼 회사 팔고 그냥 집으로 돌아와요. 제가 돈 많이 벌어서 아빠랑 엄마 다 먹여 살릴게요!”심태하의 순수한 눈빛에 진심 어린 다짐이 담겨 있었다. 그에겐 돈을 많이 벌어서 가족을 지킬 거라는 꿈이 있었다.심미연은 그런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통통한 볼살에 아직 아기 티가 남았지만 심태하의 마음속
심미연 역시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이지연이 잘못 알아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지연 씨, 다시 한번 제대로 확인해 봐요. 결과가 똑같은지 꼭 잘 봐요.”혹시라도 착오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그럼 제가 다시 확인해 볼게요! 뭐든 나오면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보스, 그럼 끊을게요!”이지연은 말 끝나기가 무섭게 전화를 뚝 끊었다.심미연은 휴대폰을 쥔 채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까 이지연이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이건명과 문소영이 예전에 그런 사이였다고?’그런데 왜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걸까? 아무도 깊게 파고들지 않았기에 묻혀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결혼 전에 누굴 만나든 그건 사생활인데 그걸 굳이 숨긴 이유가 뭘까?심미연이 이 모든 게 어딘가 석연치 않다고 느끼고 있을 즈음, 밖에서 누군가 소리쳤다.“엄마! 나 배고파요! 우리 빨리 아침 먹으러 가요!”심미연은 생각을 접고 고개를 들어 활짝 웃는 아들을 바라봤다.“그래, 가자.”심태하가 달려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엄마, 며칠 뒤면 제 생일이잖아요. 생일 파티에 상미도 초대하고 싶은데, 그래도 돼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젯밤의 친자 확인 결과가 떠올랐다. 강상미는 그녀의 딸, 즉 심태하와 쌍둥이였다. 그래서 둘의 생일도 당연히 같았다.심태하의 생일 파티에 강상미가 온다면 그건 곧 둘이 같이 생일을 보내게 되는 셈이다.“엄마, 안 돼요?”심미연이 대답하지 않자 심태하가 다급히 물었다.그녀는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켰다.“그럼, 당연히 초대해야지. 너희 둘이 같이 생일 파티하면 되겠네.”“정말요? 엄마 최고! 사랑해요!”심미연은 아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태하야, 너 엄마가 어제 말한 거 잊은 거 아니지? 상미가 바로 태영이야. 너랑 똑같이 엄마 배에서 나왔고 너희 둘은 쌍둥이야. 그래서 생일도 똑같아.”강상미에 관한 일은 이미 방원호에게 조사를 맡긴 상태였다. 꼭 알아내야 한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