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에서 더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고 혼자 외롭게 지내는 일도 없을 거야.’ “아빠, 빨리 오빠 엄마한테 전화해요.” 강상미는 작은 목소리로 강지한을 재촉했다. 아이는 이미 그들과 만날 생각에 들떠 있었다. 강지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꺼내 심미연의 번호를 눌렀다. 그 번호는 성무진에게 부탁해서 구한 업무용 번호였다. 개인 번호는 아니었다. 전화가 울리던 중 아무도 받지 않았다. 강지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심미연이 전화를 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 때 전화기 너머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상미가 태하랑 놀고 싶다고 해서 지금 네 집에 보내려고.] 그의 말투는 단호하고 거절할 여지가 없어 보였다. [저녁 약속 있어. 내 아들도 집에서 가정부가 돌보고 있고 네 딸은 몸이 안 좋다며? 집에서 쉬게 해. 무슨 일이 생기면 누가 책임져?] 심미연은 차분한 목소리로 거절했다. ‘강지한, 진짜 한심하다.’ ‘자기 딸이 아프면 자기가 돌봐야지. 왜 나에게 떠넘기려는 거야? 진짜 웃기지도 않네.’[약속 취소하고 집에서 내 딸 좀 돌봐.]강지한은 마치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말했다. ‘여자는 집에서 남편과 자식을 돌봐야지. 왜 밖에서 나돌며 얼굴을 내밀고 다니는 건데?’ 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입술이 비틀리며 비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네 딸에겐 엄마가 있는데 왜 나한테 맡기려고 해? 나는 그저 남인데, 무슨 얼굴로 나한테 명령하는 거야?] ‘강지한,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알는 거지?’‘한마디 반박도 없으니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 줄 착각하는 모양이네.’[심미연, 너무 냉정하게 굴지 마.]강지한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며 분노가 서서히 감돌았다. ‘심미연이 내 딸을 돌보는 걸 거절한다고?’ ‘상미가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상처받을까...’“아빠, 아줌마 시간이 없으신 거예요? 그럼 저는 그냥 병실에 있을게요.” 강상미는 아주 똑똑했다. 강
강지한은 핸드폰을 손에 쥔 채 화면을 가볍게 스치며 전화를 끊었다. 그 순간 주변의 모든 소음과 혼란이 마치 사라진 듯했다. 그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단단해지며 깊어졌고 품에 안은 어린 아이를 바라보며 입가에 부드럽고 따뜻한 미소가 스쳤다. “상미야, 아빠가 지금 오빠 엄마한테 데려다줄게. 괜찮지?” 방금 전 그는 문득 깨달았다. 심미연은 그를 거절할 수도 있고 그를 싫어할 수도 있지만 강상미에 대한 사랑만큼은 진심이었다. 강상미가 무엇을 요구하든 심미연은 결국 다 들어줄 것이다. 이제 그는 매일 딸을 핑계로 심미연을 찾아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기분이 한층 나아졌다. 예전엔 심미연이 곁에 있을 때 그녀가 그저 귀찮고 피하고 싶기만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다면 아이 핑계로만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어이없으면서도 웃기게 느껴졌다. 강상미는 아빠의 말을 듣고 눈을 반짝이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 눈빛은 마치 밤하늘에서 가장 밝은 별처럼 반짝였다. 작은 손은 아빠의 목을 꽉 감으며 얼굴에는 억누를 수 없는 기쁨이 가득했다. “정말요? 빨리 가요.”아이의 목소리엔 순수한 기쁨과 흥분이 묻어 있어 마치 세상 모든 것이 그 순간 빛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강지한은 딸을 더 꼭 안아주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빨리 가자.” 강상미는 아빠의 품에서 행복하게 웃으며 작은 손을 공중에 가볍게 치면서 그 순수하고 진심 어린 기쁨이 주변의 모든 공기를 감동시키는 듯 퍼져 나갔다. 바로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열리며 ‘딩’하는 가벼운 소리가 울렸다. 마치 모험을 떠나려는 아빠와 딸의 여정을 위한 서곡처럼 들렸다. 강지한은 단호한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다. 그의 걸음은 묵직하고 강인했으며 품에 안은 강상미는 더욱 꽉 껴안으며 아빠의 품에서 세상의 모든 안정을 느끼는 듯했다. 문소영은 급히 병실을 빠져나왔지만 눈앞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공기 속에는 여전히 강지한과 강상미 부녀의
심미연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으며 다급하게 말했다. [주소 보내줘요. 바로 갈게요.] 전화를 끊고 그녀는 곧바로 돌아서서 심태하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빠르고 또박또박 말했다. “태하야, 엄마는 지금 당장 바다에 가야 해. 긴급한 상황이 생겼어. 조금 있으면 상미랑 상미 아빠가 올 텐데 태하가 잘 맞이해줄 수 있지?” 심태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엄마. 얼른 다녀오세요.”아이의 대답을 들은 심미연은 망설임 없이 방을 나섰다. 밤은 어둡고 깊었다. 심미연은 차를 몰아 텅 빈 도로를 질주했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어디에도 머물지 못했다. 심장은 차의 속도에 맞춰 점점 더 빠르게 뛰었고 머릿속에는 심서연의 과거가 끊임없이 떠올랐다. 심서연을 미워했지만 그녀의 죽음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짭짤한 바닷바람이 얼굴을 강하게 스쳤다. 바닷가에 도착했을 때 심미연의 눈앞에는 깜빡이는 경고등과 몰려든 인파가 보였다. 그 순간 그녀의 가슴속에 남아 있던 작은 희망은 차가운 불빛 아래에서 서서히 꺼져갔다.심장이 쿵쿵 뛰고 발걸음은 무겁게 내딛어졌다. 바람은 마치 울부짖듯 불었고 자연마저 이 순간을 슬퍼하는 듯했다. 심미연은 온 힘을 다해 바다로 달려갔다.한 걸음 한 걸음이 무겁고 불안한 짐처럼 느껴졌고 마침내 붉게 물든 바다를 마주했을 때 모든 것이 현실로 다가왔다. 해변에는 차가운 파도에 잠긴 여인이 조용히 누워 있었다. 파도가 그녀의 몸에 닿을 때마다 마치 생명이 사라졌음을 고백하는 듯한 고요함이 느껴졌다. 심미연의 발걸음이 멈췄다. 시간이 멈춘 듯 모든 것이 정적에 잠겼다. 천천히 다가가자 점차 또렷해지는 심서연의 창백하고 고요한 얼굴이 보였다. 바다에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붙어 예전의 생기와 활력을 모두 잃은 모습이었다. 심미연의 가슴은 손에 움켜쥔 듯 조여들었고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그녀는 그 아픔에 짓눌려 발이 땅에 박힌 듯 움직일 수
심미연은 순간 얼어붙었지만 이내 조은하의 손목을 거칠게 움켜쥐고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좋은 마음으로 알려줬더니 되레 나한테 죄를 뒤집어씌우세요? 저를 비난하기 전에 서연이가 최근에 무슨 일을 했고 누구를 만났는지나 제대로 생각해보시죠.”이게 바로 그녀의 어머니였다. 평생 단 한 번도 자신을 사랑해준 적 없는 사람. 조은하의 눈과 마음에는 오직 심서연만이 존재했다. 어릴 때부터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애지중지하던 보물같은 존재. 심서연이 사라졌을 때 조은하에게는 인생에서 가장 깊은 상처이자 후회로 남았고 심미연은 그 상처의 원흉으로 낙인찍혔다. 마치 심서연의 복수를 위해 살아가는 존재처럼. 그러다 심서연을 다시 찾은 날부터 그녀는 그 집에서 완전히 외면당한 타인이 되었다. 결혼 후 강지한이 집에 돈을 보내준 덕분에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는 부모에 대한 원망이 서려 있었다. 어릴 때부터 그녀가 살아온 것은 삶이 아니라 끝없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예전엔 상처받고 눈물 흘렸지만 이제는 그런 감정조차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들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 그녀도 그들을 낯선 사람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낯선 사람에게 마음 아파할 이유는 없으니까.조은하는 심미연의 차가운 표정에 압도당해 순간 얼어붙었다. “분명히 심동현이야.” 그녀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얼마 전 심서연이 심동현에게 칼을 휘두른 일이 있었다. 심동현은 그 일로 심서연을 증오했고 그가 심서연에게 손을 썼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심미연은 미묘하게 눈썹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확실해요?” 심동현이 밖에서 내연녀와 아들을 키우며 심서연을 눈엣가시처럼 여긴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정말 서연이를 죽일 만큼 잔인할까?’ “확실해...” 조은하는 말끝을 흐리며 눈앞에 서 있는 심미연을 의식하곤 입을 닫아버렸다. “내가 왜 너한테 이런 걸 말해야 하지? 심미연, 이 못된 것아. 내 손 놔.” 조은하는
“심미연 씨, 살려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남자가 한 걸음 다가오며 고마움을 표했다. 그때 심미연이 아니었다면 그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심미연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살리고 치료하는 건 의사의 본분이에요. 그날 다른 의사라도 같은 결정을 내렸을 겁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어찌됐든 심미연 씨가 저를 살려주셨으니 감사한 건 당연한 일이죠.” 남자는 아직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얼굴이 창백해 보였다. “몸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으니 앉아서 편히 얘기하죠.” 여자가 다가와 심미연의 손을 잡았다. “심미연 씨, 그날 제가 오해한 거 정말 죄송해요. 진심으로 사과드려요.” 그날 그녀가 심미연이 남편을 구하는 것을 막았다면 지금쯤 그녀는 홀로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그날의 일을 계속 떠올리며 왜 그렇게 남의 말에 휘둘렸을까 고민해왔다. “그때 심정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사과하지 않으셔도 돼요.” 심미연은 예의 바르게 답했다. “자, 먼저 앉으세요. 밥 먹으면서 계속 이야기 나누죠.” 남자는 신사답게 심미연의 의자까지 당겨주며 말했다. “심미연 씨, 앉으세요.” 심미연은 감사의 뜻을 전하며 조용히 앉았다. 남자는 아내를 데리고 심미연의 맞은편에 앉았다. “곧 음식이 나옵니다.”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심미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다고 답했다. “먼저 제 소개를 할게요. 저는 오태진입니다. 이분은 제 아내 장혜윤입니다.” “심미연입니다.” 서로 인사를 나눈 후 오태진이 심미연에게 물었다. “심미연 씨는 지금 어디 병원에서 일하고 계신가요?” 심미연은 웃으며 답했다. “저는 변호사로 천성 로펌에서 일하고 있어요. 병원에서는 일하지 않아요.” “아! 맞아요. 어제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온 그 심 변호사님 맞죠?” 장혜윤이 존경의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정말 대단하세요.” 심미연은 부끄러워하
“오늘 너무 늦었어요. 집에 어린 아이도 있고 먼저 가봐야 해요. 내일 전화 주세요. 그때 자세히 검사해드릴게요.” 심미연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 그녀는 누군가가 장혜윤에게 독을 타서 주고 있다는 의심을 품고 있었다. 그 목적이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혜윤은 심미연의 말을 듣고도 여전히 긴장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알겠어요. 내일 전화할게요.” “여보, 내일 출근 안 하면 나랑 같이 가자.” 오태진 역시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내일 휴가 낼게.” 그는 항상 딸을 원했지만 아이는 생기지 않았다. 병원 검사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그는 그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보니 누군가가 장혜윤이 임신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정되면 꼭 연락 주세요. 먼저 가볼게요.” 심미연은 급하게 돌아가야 했다. 그녀는 이미 박유진에게 강상미가 집에 올 거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래서 박유진이 집에 있는지, 강지한이 떠났는지 걱정이 되었다. 두 남자가 마주치면 일이 커질까 봐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심미연 씨, 안녕히 가세요.” 장혜윤은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심미연도 손을 흔들며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장혜윤은 심미연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심미연 씨의 의술이 정말 경지에 달한 건가?” 그저 맥을 짚어본 것뿐인데 몸에 이상이 있다는 걸 정확히 알았다. 병원에서는 아무 이상 없다고 했는데 그게 너무 이상했다. “왜 이렇게 멍하니 있어? 집에 가자.” 오태진은 장혜윤의 허리를 감싸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의 목숨을 구한 사람이 심미연이었기에 그는 심미연의 의술을 전적으로 믿고 있었다.“내 친구가 아까 전화로 헤어졌다고 해서 위로하러 가야 해. 잠깐 가서 얘기 좀 하고 올게. 여보, 먼저 집에 가도 괜찮아?” 장혜윤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얼굴은 이미 평소의 차분한
장혜윤의 가슴 속 불안은 마치 밀려오는 파도처럼 요동쳤다. 그녀는 텅 빈 거실을 급히 훑어보았지만 결국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의도적으로 시선을 내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윤미는 어디 있어요?” 남자는 소파에 앉아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가볍게 두드리며 그 리듬이 고요한 공기 속에서 유난히 거슬리게 들렸다. 그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리며 깊고 복잡한 눈빛으로 장혜윤을 바라보았다. 마치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꿰뚫어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 순간 장혜윤은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지며 알 수 없는 공포가 가슴 속에서 솟구쳐 올라 전신을 타고 퍼져 나갔다. “위층에 있어요.” 그의 목소리는 낮고 깊었다. 하나하나의 단어가 의도적으로 무게를 두고 내뱉어지며 저항할 수 없는 권위가 담겨 있었다. “위로 가서 잘 위로해 주세요.” 장혜윤은 등줄기가 차갑게 느껴지며 억지로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얼굴의 긴장은 감추기 어려웠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손을 가방 안으로 넣었다. 손끝이 차가운 핸드폰을 만지자 그것이 지금 그녀의 유일한 의지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핸드폰을 꽉 쥐고 손톱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힘을 주었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첫 번째로 남편에게 전화를 해서 도움을 청할 것이다. “빨리 올라가세요.” 남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날카롭게 들렸다. 장혜윤은 간신히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어요.”장혜윤은 마음을 가다듬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올라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마치 솜털 위를 걷는 듯 부드럽고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심장이 빠르게 뛰고 숨이 가빠지는 걸 느꼈다. 자신에게 침착하라고 다짐했지만 내면의 두려움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처럼 그녀의 목을 꽉 조여왔다. 마침내 2층에 도착한 장혜윤은 떨리는 손끝으로 문을 밀어 열었다. 문이 열리며 삐걱거리는 소리가 공기 중에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이 조용한 공간에서는 유난히 거슬리게 들렸다. 문이 열리자 눈앞
나윤미는 마침내 붉게 부은 눈을 들어올렸다. 그 시선은 공허하고 혼란스러워 마치 끝없는 악몽에서 이제 막 깨어난 사람 같았다. 그녀는 떨리는 입술로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힘겹게 단어를 짜내듯 말했다. “그... 그 사람은 악마야. 나를 두렵게 만들고 살아 있는 게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게 느껴지게 했어...” 말을 마치자마자 나윤미는 다시 울음을 터뜨렸고 몸은 두려움과 슬픔에 심하게 떨렸다. 장혜윤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차가운 한기가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밀려왔다. 그녀는 나윤미의 손을 꼭 잡으며 자신의 온기를 전하려 애썼지만 나윤미의 눈에 서린 공포는 끝없는 심연과 같았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깊은 절망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봐.” 장혜윤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나윤미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말하면 안 돼.” 그녀의 목소리에는 절박함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마치 무언가를 입 밖에 내는 순간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장혜윤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감정을 억누르려 애썼다. “내가 정말 유능한 변호사를 알고 있어. 그 사람한테 도움을 요청해보자.” 그러나 ‘변호사’라는 단어를 듣자 나윤미의 몸은 더욱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변호사는 그녀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악몽이었다. “안 돼! 절대 변호사한테는 안 돼!” 나윤미는 절규하듯 외치며 더욱 깊은 공포에 빠졌다. “윤미야, 도대체 왜 그래? 네가 아무 말도 안 하면 내가 어떻게 도와줄 수가 없잖아.” 장혜윤은 초조함에 목소리가 떨렸다. 나윤미는 이제 조금 진정된 상태였다. 감정도 가라앉았고 머리도 어느 정도 맑아진 듯했다. “혜윤아, 그냥 가. 다시는 나 찾아오지 마.” 나윤미는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인생은 이미 끝났어. 너한테 진 빚은 다음 생에 갚을게. 앞으로 내가 전화하더라도 무슨 말을 하든 절대 날 찾지 마. 알겠지?” 그 말은 마치
육현성이 입가를 만지며 말했다.“이진영, 네가 감히 나한테 주먹질을 날려? 내가 집에 가서 이다은 저년을 아주 제대로 혼쭐 내줄 거야. 이번엔 최소 몇 달은 못 일어날걸?”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같이 기고만장했다.“보아하니 육씨 가문이 요즘 꽤 살 만한가 보네. 감히 나 이건명의 딸을 건드려?”이건명이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육현성의 뺨을 힘껏 후려쳤다.“감히 어디서 제멋대로 굴어!”그는 자신의 앞날을 위해 딸을 육씨 가문에 시집보냈었다. 그래도 육씨 가문은 4대 가문 중 하나인데 비록 육현성이 이다은을 사랑하진 않더라도 최소한의 예우는 할 줄 알았다.그래서 이다은이 이혼하겠다고 했을 땐 괜히 유난 떠는 줄 알았는데 방금 그 모든 생각이 송두리째 무너졌다. 이다은이 육씨 가문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이제야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이건명의 등장에 육현성은 순식간에 기세가 꺾였다. 아무리 육씨 가문이 돈 많고 배경 있는 집이라도 지금의 이건명을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었다.“아버님, 화내지 마세요. 이건 오해예요. 저는 전혀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육현성이 다급히 변명하려 들었다.“됐어. 변명은 필요 없어.”이건명이 이다은의 손을 꽉 잡았다.“다은아, 미안해. 아빠가 잘못했어. 너 이혼하고 싶으면 해. 내가 최고로 실력 좋은 변호사를 붙여줄게.”이다은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아빠가... 나를 이렇게 감싸준다고? 늘 냉정하기만 했던 사람이?’그때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들렸다.“정말 감동적인 부녀지간이네요. 좋은 아버지십니다, 정말.”이진영이 자신의 아버지를 조롱하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본 순간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그... 그쪽이 왜 여기 있어요?”강혁승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는 한 모금 빨아 연기를 뿜으며 웃었다.“나요? 부모 찾으러 왔죠.”이미 이진영이 그의 정체를 눈치챘기에 더 숨길 이유도 없었다. 오늘 이 자리에 이 사람들이 모두 모인 것도 하늘의 뜻이라 생각한 강혁승은 오늘 결판을 보려 했다.“너...
“문자를 보낸 건 그 여자가 아니라 나예요!”강혁승의 음울한 얼굴에 스며든 미소는 왠지 모르게 오싹했다.이건명의 시선이 그의 얼굴에 멈췄다. 얼굴에 난 깊은 흉터만 아니었다면 이건명 본인과도 놀랍도록 닮은 얼굴이었다.하지만 그의 아내가 낳은 자식은 이다은, 이진영 남매 둘뿐이었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누구란 말인가?“건명 씨는 여기 왜 왔어요? 어서 나가요!”문소영이 다급하게 외쳤고 목소리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왜 이렇게 쫓아내려고 안달이에요? 여기까지 왔는데 문제는 해결하고 가야죠.”강혁승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고 그의 눈빛엔 싸늘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왜 저 사람한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 저 사람이랑은 아무 관련도 없어!”문소영은 이건명을 붙잡아 두고 싶지 않았다.심미연은 눈을 가늘게 떴다.‘이 와중에도 이건명을 감싸려 하다니, 그래도 한때는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이었나 보네.’“관련이 없다고요? 저 사람이 내 아버지인데?”강혁승은 조소를 띤 채 반문했다.“내가 저 사람이 수십 년 동안 도와준 일들을 전부 알고 있는데 한 번 읊어볼까요?”문소영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헛소리하지 마!”“입 다물지 못해!”이건명이 서늘한 눈빛으로 강혁승을 노려보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하지만 마음속으로는 큰일 났다고 생각했다.‘저 자식이 모든 걸 알고 있단 말이야?’심미연은 입술을 깨문 채 이건명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방원호가 넘겨준 자료가 전부 사실이었던 것이다.하지만 이건명이 한 여자를 위해 불법까지 저질렀다는 건 예상 밖이었다. 진심으로 사랑해서였을까?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던 걸까?“심미연, 이리 와!”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심미연이 깜짝 놀라 돌아보니 깊고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그는 의식이 없었는데 분위기는 여전히 무게감이 있었다. 이런 것이 바로 한 회사를 이끄는 대표만의 카리스마와 아우라인가.“멍하니 있지 말고 어서 오라고.”강지한의 말에 심미연은 정신을
문도현은 심미연의 표정이 굳은 걸 보고 머리를 쉴 새 없이 굴리기 시작했다.‘안 되겠어. 일단 지금 이 상황부터 어떻게든 모면해야 해.’하지만 심미연은 그렇게 쉽게 속을 여자가 아니었다. 그가 아무 말이나 둘러대면 단번에 꿰뚫어 볼 게 뻔했다.‘어쩌지?’그때 마침 심미연의 휴대폰이 울렸다.“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요.”“네, 가서 일 봐요. 난 여기 있을게요!”문도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심미연은 대답도 제대로 못 하고 황급히 사무실을 나섰다.문도현은 기지개를 한껏 켠 뒤 슬며시 일어나 그녀의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책상 위에 액자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그 안에 심미연이 다른 사람과 같이 찍은 사진이 한 장 있었다.그런데 그 사진 속에서 심미연의 옆에 박유진이 서 있는 걸 본 순간 문도현은 마치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박유진이랑 심미연이 왜 같이 있어? 말도 안 돼! 절대 이 둘이 이어지게 두면 안 돼!’문도현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홱 돌아서 사무실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때 마침 임현이 문을 열고 들어오다 그와 정면으로 부딪쳤다.“아야! 아이고, 아파라...”임현이 낮게 신음하며 얼굴을 찡그렸다.하지만 문도현은 그녀를 밀치고 나가버렸다.임현은 어이없다는 듯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아니, 누가 건드리기라도 했나? 왜 저렇게 화가 나 있지?”마침 그때 심미연이 다시 들어왔다.“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어요? 문 대표님은요?”“방금 나가면서 저랑 부딪혔어요. 엄청 화난 얼굴이던데요? 아무 말도 안 하고 나가더라고요.”임현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저 남자, 감정 기복 진짜 심하네.’“잘됐네요. 나 급한 일이 있어서 나가야 해요. 오늘은 임현 씨가 사무실 좀 맡아줘요.”심미연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방을 챙겨 들고 서둘러 나가버렸다.방금 강지한이 의식을 되찾았다고 한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에게 직접 물어봐야 했다.그가 어떻게 그녀가 교통사고를
문도현의 치명적인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떠올랐고 깊고 그윽한 눈빛엔 묘하게 사람 마음을 사로잡는 기운이 스쳤다. 그 눈으로 마음속 깊은 비밀까지 꿰뚫어 볼 것만 같았다.“정말 여기서 얘기할 거예요?”그는 나직하면서도 묘하게 귀를 간질이는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사진이라도 찍으면 어쩌려고요?”그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하면서도 이상하리만치 매혹적이었다. 마치 한 음절 한 음절이 심장을 울리는 현처럼 듣는 이의 감정을 툭툭 건드렸다.유흥가를 오래 드나든 남자답게 문도현의 말투나 몸짓 하나에도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서려 있었다. 그의 존재만으로도 상대방은 쉽게 그에게 빠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 뒤에 자리 잡은 견고한 집안 배경은 그의 존재에 신비로움과 권위를 덧씌웠다. 한 번만 눈빛을 주고받아도 수많은 여자가 그를 위해 기꺼이 심연으로 빠져들곤 했다.심미연은 가늘고 곧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그래요. 그럼 위에 올라가서 얘기하죠.”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차 문을 잠그고는 성큼성큼 앞서 걸었다. 그녀의 발걸음엔 흔들림 없는 결의가 담겨 있었다. 아무리 개인적으로 복잡한 감정이 얽혀 있더라도 문도현은 사건을 의뢰하러 온 손님이었다. 심미연은 일과 사적 감정을 분명히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문도현의 시선은 무심결에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라인을 훑고 지나갔다. 그러자 곧 뇌리에 수많은 기억의 파편이 번뜩이듯 스쳐 지나갔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길들지 않은 야수 하나가 깨어나는 느낌이었다.이제야 그는 자신이 여자에게 설레는 감정을 잃은 게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다만 평범한 여자들에게 더 이상 설레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흔한 여자들은 이제 그의 마음을 건드릴 수 없지만 심미연은 예외였다.그 순간 심미연의 차분하고 냉정한 목소리가 그의 흐트러진 정신을 다시 현실로 끌어당겼다.“문 대표님께서 소송을 의뢰하신다네요. 임 변호사님께서 맡아주세요.”“알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문 대표님.”임현이 공손하게 몸을 살짝 기울이며 안내했
심미연은 흩날리던 생각을 차분히 거두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궁금한 듯 물었다.“우리 태하 진짜 똑똑하네.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거야?”아직 겨우 세 살이지만 심태하의 마음은 놀랄 만큼 세심하고 예민했다. 또렷한 눈망울은 마치 세상의 감정 흐름을 꿰뚫어 보는 듯했고 그렇게 꼼꼼히 살피는 모습에 심미연은 종종 놀라곤 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박유진이 심태하를 정성스럽게 길러온 시간이 아이를 이토록 똑똑하고 배려 깊게 자라게 만든 것이다.“아까 아빠랑 통화할 때 엄마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어요. 뭔가 걱정하는 게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저한테 말 걸었을 때도 평소처럼 웃고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엄마가 혹시 슬픈 건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어요.”심태하의 말은 또렷하면서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단어 하나하나에 엄마를 향한 깊은 애정과 이해가 담겨 있었다.심태하가 보기에 박유진이 집에 있을 땐 심미연은 늘 기분이 좋아 보였고 환하게 웃는 얼굴이 참 예뻤다.“엄마가 안 웃었어?”심미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녀석, 정말 못 말려.’겨우 세 살에 이 정도인데 나중에 더 크면 얼마나 영리해질지.“네, 안 웃었어요.”심태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심태하의 목소리는 여전히 앳됐지만 말투는 왠지 어른스러웠다. 꼭 사람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기라도 한 듯했다.심미연의 마음은 그 말 한마디에 확 풀렸다. 그녀는 아들의 코끝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자, 얼른 아침 먹자.”그녀의 말투엔 아낌없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이 아이는 정말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다.“아빠가 보고 싶으면 아빠한테 전화하면 되죠!”심태하가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윙크했다.‘나도 아빠가 보고 싶은데 엄마가 안 보고 싶을 리가 없지. 맞아, 분명 그럴 거야!’심미연은 그 말에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네 말대로 할게.”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박유진이 보고 싶지만 그에게 전화하진
하지만 그 깊은 애정과 놓기 싫은 마음은 오히려 박유진을 현실이라는 갈림길 앞에서 망설이게 만들었다.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심미연만 괴로운 상황에 빠질 것이라는 걸. 그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자신의 망설임으로 인해 흐려지는 건, 그녀의 세상이 자신 때문에 흔들리는 건 차마 보고 있을 수 없었다.그렇다고 그녀를 놓아버리면 영원히 잃게 될 텐데... 그 아픔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박유진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아빠, 왜 말이 없으세요? 허락한 거죠?”심태하의 목소리는 천진난만하게 들떴다. 마치 머릿속에 따뜻한 한 가족의 그림이 그려지기라도 한 듯.‘아빠가 돌아오면 엄마랑 나랑 셋이 모여 저녁 먹고 같이 웃고 얘기하고...’심태하의 마음속에서 그려낸 가장 순수한 행복의 모습이었다.그러나 그 순수한 소망 앞에서 박유진의 마음은 송곳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그는 알고 있다. 이번 결정을 가볍게 내려서는 안 된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게 하려면 정말 신중해야 했다.하지만 사랑과 책임 사이에서 그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그는 지금 사랑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심미연과 아이를 지킬 방법을 찾고 있다.하지만 그런 길이 과연 있을까? 이 선택은 너무나도 어려웠다.“아빠, 나 이렇게 열심히 얘기하고 있는데 왜 아무 말도 안 해요?”심태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미간을 찌푸렸다.평소 같았으면 박유진은 재밌는 얘기도 해주고 자기 말에 웃어주었을 텐데, 오늘따라 너무 이상했다.‘혹시... 내가 말실수했나?’그때 박유진의 다급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심태하의 귀에 들려왔다.“태하야, 곧 비행기가 이륙해서 아빠가 휴대폰을 꺼야 돼. 오늘 밤에 다시 이야기하자. 꼭이야.”박유진은 심미연을 당장이라도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고 말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네! 알겠어요, 아빠! 그럼 오늘 밤에 꼭 통화해요. 약속했으니까 안 하면 안 돼요!”심태하의 목소리에 눈치채기 힘든 외로움이 살짝 섞여 있었다.
심미연은 멍해졌고 아까 자신이 박유진에게 연락을 시도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날아온 건 단 한 줄의 차갑고 무미건조한 메시지. 기대했던 목소리는 끝내 들을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 아들 심태하가 전화를 걸자 박유진은 놀랍게도 전화를 받았다.“아빠, 지금 어디예요? 이틀 뒤면 제 생일이에요! 아빠가 놀이공원 같이 가자고 했던 거 잊으시면 안 돼요!”심태하의 말투엔 아이 특유의 해맑은 기쁨이 가득 담겨 있었고 단어 하나하나가 살아서 튀어나오는 듯했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박유진의 목소리는 한겨울 얼음도 녹일 만큼 다정했다.“아빠 지금 진성으로 가는 비행기 타러 가는 중이야. 곧 이륙이라 휴대폰 꺼야 해. 진성에 도착하면 바로 전화할게. 약속!”그 말에는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득 실려 있었다.사실 박유진은 심태하가 생일 이야기를 할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어젯밤에 워낙 정신이 없어 그런 중요한 약속마저 깡그리 잊고 있었던 것이다.“아빠가 보내준 선물 잘 받았어요!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심태하는 아직 다 하지 못한 말이 많은 듯 아빠에게 털어놓고 싶은 게 가득한 눈치였다.박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햇살이 쏟아져 내려 유난히 눈부셨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가늘게 떴고 그 강렬한 빛이 속눈썹 아래에 그림자를 드리웠다.그 순간 그의 마음속엔 오로지 한 사람, 심미연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그녀와 떨어져 있는 모든 시간이 하나같이 그리움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그리움이 너무 커서 박유진은 당장이라도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달려가고 싶을 만큼 벅찼다.“아빠... 지금 너무 힘들죠? 그럼 회사 팔고 그냥 집으로 돌아와요. 제가 돈 많이 벌어서 아빠랑 엄마 다 먹여 살릴게요!”심태하의 순수한 눈빛에 진심 어린 다짐이 담겨 있었다. 그에겐 돈을 많이 벌어서 가족을 지킬 거라는 꿈이 있었다.심미연은 그런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통통한 볼살에 아직 아기 티가 남았지만 심태하의 마음속
심미연 역시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이지연이 잘못 알아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지연 씨, 다시 한번 제대로 확인해 봐요. 결과가 똑같은지 꼭 잘 봐요.”혹시라도 착오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그럼 제가 다시 확인해 볼게요! 뭐든 나오면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보스, 그럼 끊을게요!”이지연은 말 끝나기가 무섭게 전화를 뚝 끊었다.심미연은 휴대폰을 쥔 채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까 이지연이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이건명과 문소영이 예전에 그런 사이였다고?’그런데 왜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걸까? 아무도 깊게 파고들지 않았기에 묻혀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결혼 전에 누굴 만나든 그건 사생활인데 그걸 굳이 숨긴 이유가 뭘까?심미연이 이 모든 게 어딘가 석연치 않다고 느끼고 있을 즈음, 밖에서 누군가 소리쳤다.“엄마! 나 배고파요! 우리 빨리 아침 먹으러 가요!”심미연은 생각을 접고 고개를 들어 활짝 웃는 아들을 바라봤다.“그래, 가자.”심태하가 달려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엄마, 며칠 뒤면 제 생일이잖아요. 생일 파티에 상미도 초대하고 싶은데, 그래도 돼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젯밤의 친자 확인 결과가 떠올랐다. 강상미는 그녀의 딸, 즉 심태하와 쌍둥이였다. 그래서 둘의 생일도 당연히 같았다.심태하의 생일 파티에 강상미가 온다면 그건 곧 둘이 같이 생일을 보내게 되는 셈이다.“엄마, 안 돼요?”심미연이 대답하지 않자 심태하가 다급히 물었다.그녀는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켰다.“그럼, 당연히 초대해야지. 너희 둘이 같이 생일 파티하면 되겠네.”“정말요? 엄마 최고! 사랑해요!”심미연은 아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태하야, 너 엄마가 어제 말한 거 잊은 거 아니지? 상미가 바로 태영이야. 너랑 똑같이 엄마 배에서 나왔고 너희 둘은 쌍둥이야. 그래서 생일도 똑같아.”강상미에 관한 일은 이미 방원호에게 조사를 맡긴 상태였다. 꼭 알아내야 한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