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데려다줘도 돼. 필요 없다고 했잖아.” 심미연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를 지나쳐 앞쪽으로 걸어갔다. 강지한은 그녀를 재빨리 따라잡아 손목을 꽉 잡았다. “심미연, 이렇게 늦은 시간에 혼자 가는 건 위험해. 그것도 몰라?” 게다가 이 여자는 너무나 아름다워서 이렇게 늦은 시간에 혼자 다니는 게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내 일에 간섭하지 마.” 심미연은 짜증이 나서 그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 “강지한, 제발 좀 귀찮게 하지 마! 우린 이미 이혼했잖아. 왜 아직도 이러는 거야?” 강지한의 행동은 심미연을 더욱 짜증나게 만들었다. 그녀의 거절이 계속되자 강지한은 얼굴에 민망한 기색이 떠올랐다. “심미연, 난 그저 널 집까지 데려다주고 싶은 것뿐이야. 아무 뜻도 없어.”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알아 들었겠지?’“안 데려다줘도 된다고 했잖아. 강지한, 사람 말 못 알아듣는 거야?” 심미연은 강지한의 말에 조금도 겁먹은 기색 없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예전의 강지한은 그녀에게 관심도 없었는데 이제는 꼼짝없이 그녀에게 들러붙어 매일같이 그녀를 쫓아다니는 모습이 심미연에게는 낯설고 불편하게 느껴졌다. 강지한은 얼굴이 굳어졌다. “심미연, 내가 너 생각해서 이렇게 하는 거잖아. 뭐가 불만이야?” 그는 분명 그녀에게 잘해주려고 했지만 그녀는 고마워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비난하고 있었다. 강지한은 심미연을 마주할 때마다 힘 빠지는 느낌을 받았다. ‘예전엔 내 말이라면 다 듣던 여자가 왜 이렇게 변했을까?’ “그냥 내가 불만이 많은 걸로 하자.”심미연이 말을 끝내자마자 손목이 잡히고 귀에 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에 가자.” 따뜻한 손길이 손바닥을 통해 퍼져 나가며 그녀의 몸 속까지 온기가 전해지듯 점점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심미연은 돌아서서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빠, 왜 여기 있어?” “계속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어.” 박유진은 그녀를 품에 끌어당기며 부드럽게 말했다.
강지한은 심미연이 자신에게 손을 댈 거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잠시 멍하니 서 있던 그는 정신을 차리자 간신히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여자가 남자의 입술을 닦아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강지한의 눈은 혈안이 되어 붉어지고 온몸의 피는 끓어오르며 가슴속에서 뚫인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심미연은 나를 가장 사랑한다고 했었잖아.’ ‘도대체 어떻게 변할 수 있지?’ ‘아니야. 심미연이 변한 게 아니야. 박유진이 심미연을 강제로 데리고 있는 거야.’ ‘그래. 그게 맞아.’ 그때 성무진이 조용히 다가와 말했다. “대표님, 시간이 늦었습니다. 이제 돌아가셔서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강지한은 그 말에 반응하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심미연, 돌아와. 가지 마. 널 보내지 않을 거야.” 성무진은 강지한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보며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몰랐다. 그저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예전엔 대표님이 사모님을 떠나고 싶어 했었죠.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애절하게 잡으려 하다니. 무슨 의미일까요?’ ‘어떤 사람은 한 번 놓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인데...’ ‘대표님처럼 똑똑한 분이 왜 그런 걸 못 깨닫는 걸까요?’“성 비서, 빨리 아래로 내려가서 심미연을 데려와. 상미가 갑자기 호흡이 어려운 것 같다고 말해. 어떻게 된 건지 와서 봐 달라고 해.” 강지한은 갑자기 무언가 깨달은 듯 손을 휘저으며 급하게 말했다. 성무진은 거절할 수 없어 어쩔수 없이 대답했다. “그럼 대표님은 병실로 돌아가셔서 쉬세요. 제가 바로 심미연 씨를 쫓아가겠습니다.” “빨리 가. 심미연이 떠나지 못하게 해.” “알겠습니다.” 성무진은 급히 말을 마친 뒤 서둘러 걸어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성무진은 계속 생각에 잠겼다. ‘대표님이 이렇게 변했다는 건 심미연 씨에게 마음이 생긴 걸까?’ ‘하지만 심미연 씨는 분명 대표님과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것 같았는데.’ ‘대표님이
‘심미연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지?’강지한의 반문에 성무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이 불필요한 말을 꺼냈다는 것을 깨닫고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강지한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예전엔 대표님이 심미연 씨를 원하지 않으셨던 게 아닌가?’ ‘그런데 왜 지금은 심미연 씨에게 버림받은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는 걸까?’ 한참의 침묵이 흐른 뒤 강지한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너는 먼저 들어가. 내일 오전 회의는 네가 진행해. 난 회사에 나가지 않을 거야.” 성무진은 짧게 대답한 뒤 병실을 빠져나갔다. ‘심미연 씨가 다시 나타난 이후로 대표님은 점점 더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 같아.’성무진이 떠난 후 강지한은 흡연실로 향했다. 그 시간대의 흡연실은 뜻밖에도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여러 남자들이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앉아 있었고 공기는 자욱한 연기로 가득했다. 강지한은 문 앞에서 잠시 눈살을 찌푸리더니 결국 안으로 들어갔다. 그를 본 한 남자가 자연스럽게 담배 한 개비를 내밀며 말했다. “형님, 같이 태웁시다.” 강지한이 그를 흘끗 쳐다보자 그 남자는 얼른 말을 덧붙였다. “지난번에 한 대 빌려 가셨잖아요? 또 담배 안 가져오셨을까 봐 챙겨뒀습니다.” 강지한은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갑을 꺼내더니 오히려 그에게 한 개비를 건넸다. “제가 드릴게요.” 남자는 순간 눈앞의 담배를 보고 깜짝 놀랐다. 한 개비의 가격이 자신의 며칠 치 밥값에 맞먹는 담배였다. 그는 슬쩍 자신이 내밀었던 담배를 다시 집어넣고 강지한이 준 담배를 공손히 받으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형님, 굳이 허세 부릴 필요 없어요. 아껴 쓰세요.” 옆에 있던 다른 남자가 강지한에게 손을 뻗으며 말을 걸었다. “형님, 저도 한 대만요.” 그 남자는 비싼 담배라 구경만 했지 피워 본 적은 없었다. 강지한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 남자의 얼굴을 스쳐 보더니 말없이 담배
강지한은 고상한 눈빛으로 말을 건 남자를 차갑게 쏘아보았다. 마치 구역질 나는 쓰레기를 바라보는 듯한 눈초리였다. 그의 입꼬리에는 비웃음이 번지며 천천히 올라갔다. “심미연은 내 여자야. 너희 그 더럽고 추악한 생각은 접어둬. 감히 남의 여자를 탐내려고 해?” 강지한의 눈빛에서 위험한 불꽃이 번뜩였다. 마치 바로 그 순간 상대를 태워버릴 듯한 위협적인 기운이 감돌았다.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은 듯 모두가 그의 강렬한 기세에 압도되어 움직일 수 없었다. 그는 이런 천박한 자들이 심미연을 더럽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뭐, 뭐라고요...” 그 남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아름다운 여자가 바로 저 사람의 여자라니. 그래서 이 남자가 이렇게 화가 난 거였구나.’ 다른 남자가 그의 아내를 그렇게 더럽히려 했다면 그도 죽을 힘을 다해 싸웠을 것이다. “끌어내.” 강지한이 차갑게 명령했다. 경호원들이 남자들을 하나씩 잡아끌어 내자 그들은 강지한이 얼마나 강력한 인물인지 실감했다. 이렇게 많은 경호원을 두고 있다는 사실만 봐도 분명히 대단한 인물일 거라 짐작했다. ‘망했다.’ ‘입을 가볍게 놀리지 말았어야 했어! 큰일을 벌였네.’ 강지한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정신을 차리고 담배불을 끄며 공허한 마음으로 비어 있는 흡연실을 빠져나갔다. 마치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듯 마음이 텅 비어 있었다.같은 시각, 심미연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손에 계란 하나를 들고 조심스럽게 그것을 박유진의 얼굴 위에 굴리고 있었다. 그녀의 집중된 다정한 표정은 주변의 공기마저 부드럽게 만드는 듯했다. 그러나 그 순간 심미연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재채기를 했다. 박유진은 그 모습을 보고 급격히 긴장하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미연아, 감기 걸린 거야? 왜 갑자기 재채기한 거야?” 그의 목소리에는 걱정과 초조함이 가득했다. 심미연의 작은 변화 하나하나가 그의 마음을 흔드는 듯했다. 심미연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공기 중에 불꽃이 튕기는 듯한 긴장감과 뜨거움이 교차했다. 박유진의 숨이 가빠지며 눈빛에는 갈망과 확고함이 담겨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심미연의 허리를 감싸며 그녀를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마치 그녀를 뼛속까지 담아두고 싶은 듯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으며 마치 오랫동안 목마른 사막의 여행자가 간절히 물을 구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애절하고 기대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미연아, 언제 나랑 결혼할 거야?” 심미연은 그의 갑작스러운 고백과 행동에 놀라 심장이 요동치는 소리가 귀에 들릴 듯했다. 그녀는 이 순간, 자신의 세계가 뒤집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박유진의 숨결이 그녀를 감싸며 숨이 막힐 듯했지만 그 따뜻함과 안전감을 갈망하는 마음도 함께 밀려왔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돌려 그의 뜨거운 시선을 피하려 했다.박유진의 눈빛이 잠시 어두워졌고 그의 목소리에는 쓸쓸함이 묻어났다. “나는 너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그냥 우리 관계가 좀 더 확실했으면 좋겠어. 이렇게 같이 살고 있는데 사람들이 너한테 뭐라고 할까 봐 걱정돼.” 심미연은 박유진의 깊은 눈을 응시하며 가슴속에서 울리는 심장 박동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마치 그 소리가 귀로 들릴 정도로 강하게 울리며 점점 빨라져 거의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심미연은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금세 붉어졌다. 잠시 후,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입술이 마른 채로 살짝 다물었다. 깊은 숨을 들이쉬고 용기를 내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우리 먼저 혼인 신고하러 갈까?”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긴장된 채로 두 손을 꼬며 힘을 줘 손끝이 하얗게 변했다. 마음속에서는 불안과 초조함이 밀려왔다. 그녀는 자신이 박유진과 부부로서의 삶을 잘 이어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 부부 사이의 갈등이 커질까 봐 두려웠다. 그런 결혼 생활은 너무 고통스러울 것 같았다. 박유진은 그 말을 듣고 눈빛이 잠깐 흔들
심미연은 정신을 차리고서야 얼굴이 달아오른 걸 깨달았다. “나 먼저 전화 받을게.”박유진은 아쉬운 기색이 스쳤지만 조용히 손을 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먼저 받아.” 심미연은 순간 미안한 감정이 스쳤다. 깊게 숨을 들이쉬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전화를 받는 순간,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건 도진혁의 다급함이 묻어나는 거의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큰일 났어요! 신 대표님이... 사라졌어요!] 그 말은 마치 묵직한 망치로 심미연의 가슴을 내리치는 듯했다. 손끝이 차갑게 식으며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몸을 떨며 핸드폰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뭐라고요? 무슨 소리예요?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자세히 말해봐요!] 심미연은 몰아치는 불안을 애써 누르며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다. [신 대표님이 갑자기... 새우찜이 먹고 싶다고 하셔서 제가 급히 포장하러 다녀왔거든요. 그런데 돌아와 보니까... 대표님이 안 계셨어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아서 CCTV를 확인하려 했는데... 하필이면... 그 타이밍에 CCTV가 고장 나 있었어요.] 도진혁의 목소리에는 깊은 자책과 초조함이 가득했다. 순간, 서늘한 기운이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차갑고 날카로운 불안이 척추를 타고 전신을 휘감았다. 심미연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이성을 되찾으려 애썼다. [일단 경찰에 신고하세요. 저도 바로 갈게요.] 최대한 차분하게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에는 어쩔 수 없이 긴장과 조급함이 배어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도진혁은 짧게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자 심미연은 저도 모르게 온몸이 떨렸다. 차가운 불안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와 심장을 옥죄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옆에 있던 박유진을 꽉 끌어안았다. 떨리는 목소리로 하지만 최대한 또렷하게 말했다. “오빠... 하린이가 사라졌어. 미안해... 나 지금 당장 병원에 가봐야 해.” 심미연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박유진이 조용히 핸들을 돌리며 차를 계속 몰았다. 심미연은 창밖을 바라보며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하린이는 지금 뭐하고 있을까?’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박유진이 차를 세우기도 전에 심미연은 문을 열고 급히 차에서 내렸다. 한 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병실로 달려갔다. 숨을 헐떡이며 병실 문을 밀어젖혔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건 희미한 조명 아래 외롭게 앉아 있는 남자의 뒷모습이었다. 그의 어깨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적막한 병실 안에는 낮고 거칠게 흐느끼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한 남자가, 그토록 강해 보이던 사람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온 마음을 놓고 울고 있었다. 끊어진 실처럼 떨어지는 눈물은 하얀 침대보 위로 조용히 스며들었다. 그 작은 물방울들이 마치 보이지 않는 파문을 일으키듯 공기마저 깊고 무겁게 슬픔에 잠긴 듯했다. 심미연은 그 모습을 보고 목이 칼칼하고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크게 놀랐다. 도진혁과 많은 시간을 함께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녀가 아는 도진혁은 언제나 냉철하고 흔들림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가 이렇게까지 무너진 모습을 보니 심미연은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린이를 얼마나 사랑하면 저렇게까지 울 수 있을까...’ 그녀는 문 앞에서 그대로 멈춰 섰다. 그리고 한 발짝도 내딛을 수 없었다. 이 순간만큼은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그때 도진혁이 갑자기 고개를 돌리며 예상치 못하게 심미연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붉게 부은 눈에서는 놀람과 당황이 엇갈리고 있었다. 순간, 그는 서둘러 팔을 들어 옷소매로 얼굴에 묻은 눈물을 급히 닦아내며 예전의 차분함을 되찾으려 애썼다. 도진혁이 심미연을 발견한 순간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병실로 들어갔다. “심 대표님...”도진혁의 목소리는 깊고 낮으며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순간 쌓여온 감정을 억누르려 애쓰며 고통을 숨기려 비틀어진 미소를 지었다. 심미연은 차분하게 응답하며 깊게 숨을 들
[유진 도련님께서 무슨 자격으로 그걸 물으시는 겁니까?] 이진영의 목소리는 여전히 나른하고 게으른 기색이 역력했다. 박유진은 차갑게 웃으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한밤중에 사람을 병원에서 몰래 데려가시는 겁니까? 그것도 말 한마디 없이?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거, 너무하지 않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낮고 강하게 울려 퍼졌다. 빈 복도를 가득 채우며 마치 망치질처럼 묵직한 메아리를 남겼다. 처음 심미연이 이진영을 의심했을 때 박유진은 혹시 오해가 아닐까 생각했다. 이진영이야 원래 자유롭고 제멋대로인 인간이지만 적어도 이렇게 무례하고 비합리적인 짓을 할 사람은 아니라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그가 보인 태도와 말투, 모든 게 박유진을 확신하게 만들었다. 신하린을 데려간 건 분명 이진영이었다. 전화기 너머로 잠시 적막이 흘렀다. 박유진이 이렇게까지 묻는 걸 보면 심미연이 이미 모든 걸 눈치챈 게 분명했다. ‘아마 곧 직접 날 찾아오겠지.’ 하지만... 신하린을 돌려줄 생각 따위, 애초부터 없었다. 그 여자는 평생 그의 곁에 있어야 하니까. 다시는 어디에도 가지 못하게. [신하린을 데려간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박유진의 목소리는 낮고도 위협적이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이빨 사이로 스며 나오듯 묵직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이진영은 비웃음을 흘리며 조롱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박유진 씨, 너무 간섭하는 거 아닌가요? 신하린은 제 여자입니다. 그 여자가 어디 있는지 굳이 아실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그는 언제나 자유롭고 방종한 삶을 살아왔고 감히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박유진은 복도 끝에 서서 도시의 불빛이 그의 차가운 얼굴을 스치듯 비추는 가운데 핸드폰을 단단히 쥐었다. 그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졌지만 그 안에 담긴 경고는 더욱 날카로웠다. [이진영 씨, 정도껏 하시죠.] 그는 확신했다. 심미연이라면 자신이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곧바로 이진영의 위치
심미연은 흩날리던 생각을 차분히 거두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궁금한 듯 물었다.“우리 태하 진짜 똑똑하네.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거야?”아직 겨우 세 살이지만 심태하의 마음은 놀랄 만큼 세심하고 예민했다. 또렷한 눈망울은 마치 세상의 감정 흐름을 꿰뚫어 보는 듯했고 그렇게 꼼꼼히 살피는 모습에 심미연은 종종 놀라곤 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박유진이 심태하를 정성스럽게 길러온 시간이 아이를 이토록 똑똑하고 배려 깊게 자라게 만든 것이다.“아까 아빠랑 통화할 때 엄마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어요. 뭔가 걱정하는 게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저한테 말 걸었을 때도 평소처럼 웃고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엄마가 혹시 슬픈 건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어요.”심태하의 말은 또렷하면서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단어 하나하나에 엄마를 향한 깊은 애정과 이해가 담겨 있었다.심태하가 보기에 박유진이 집에 있을 땐 심미연은 늘 기분이 좋아 보였고 환하게 웃는 얼굴이 참 예뻤다.“엄마가 안 웃었어?”심미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녀석, 정말 못 말려.’겨우 세 살에 이 정도인데 나중에 더 크면 얼마나 영리해질지.“네, 안 웃었어요.”심태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심태하의 목소리는 여전히 앳됐지만 말투는 왠지 어른스러웠다. 꼭 사람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기라도 한 듯했다.심미연의 마음은 그 말 한마디에 확 풀렸다. 그녀는 아들의 코끝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자, 얼른 아침 먹자.”그녀의 말투엔 아낌없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이 아이는 정말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다.“아빠가 보고 싶으면 아빠한테 전화하면 되죠!”심태하가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윙크했다.‘나도 아빠가 보고 싶은데 엄마가 안 보고 싶을 리가 없지. 맞아, 분명 그럴 거야!’심미연은 그 말에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네 말대로 할게.”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박유진이 보고 싶지만 그에게 전화하진
하지만 그 깊은 애정과 놓기 싫은 마음은 오히려 박유진을 현실이라는 갈림길 앞에서 망설이게 만들었다.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심미연만 괴로운 상황에 빠질 것이라는 걸. 그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자신의 망설임으로 인해 흐려지는 건, 그녀의 세상이 자신 때문에 흔들리는 건 차마 보고 있을 수 없었다.그렇다고 그녀를 놓아버리면 영원히 잃게 될 텐데... 그 아픔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박유진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아빠, 왜 말이 없으세요? 허락한 거죠?”심태하의 목소리는 천진난만하게 들떴다. 마치 머릿속에 따뜻한 한 가족의 그림이 그려지기라도 한 듯.‘아빠가 돌아오면 엄마랑 나랑 셋이 모여 저녁 먹고 같이 웃고 얘기하고...’심태하의 마음속에서 그려낸 가장 순수한 행복의 모습이었다.그러나 그 순수한 소망 앞에서 박유진의 마음은 송곳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그는 알고 있다. 이번 결정을 가볍게 내려서는 안 된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게 하려면 정말 신중해야 했다.하지만 사랑과 책임 사이에서 그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그는 지금 사랑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심미연과 아이를 지킬 방법을 찾고 있다.하지만 그런 길이 과연 있을까? 이 선택은 너무나도 어려웠다.“아빠, 나 이렇게 열심히 얘기하고 있는데 왜 아무 말도 안 해요?”심태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미간을 찌푸렸다.평소 같았으면 박유진은 재밌는 얘기도 해주고 자기 말에 웃어주었을 텐데, 오늘따라 너무 이상했다.‘혹시... 내가 말실수했나?’그때 박유진의 다급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심태하의 귀에 들려왔다.“태하야, 곧 비행기가 이륙해서 아빠가 휴대폰을 꺼야 돼. 오늘 밤에 다시 이야기하자. 꼭이야.”박유진은 심미연을 당장이라도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고 말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네! 알겠어요, 아빠! 그럼 오늘 밤에 꼭 통화해요. 약속했으니까 안 하면 안 돼요!”심태하의 목소리에 눈치채기 힘든 외로움이 살짝 섞여 있었다.
심미연은 멍해졌고 아까 자신이 박유진에게 연락을 시도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날아온 건 단 한 줄의 차갑고 무미건조한 메시지. 기대했던 목소리는 끝내 들을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 아들 심태하가 전화를 걸자 박유진은 놀랍게도 전화를 받았다.“아빠, 지금 어디예요? 이틀 뒤면 제 생일이에요! 아빠가 놀이공원 같이 가자고 했던 거 잊으시면 안 돼요!”심태하의 말투엔 아이 특유의 해맑은 기쁨이 가득 담겨 있었고 단어 하나하나가 살아서 튀어나오는 듯했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박유진의 목소리는 한겨울 얼음도 녹일 만큼 다정했다.“아빠 지금 진성으로 가는 비행기 타러 가는 중이야. 곧 이륙이라 휴대폰 꺼야 해. 진성에 도착하면 바로 전화할게. 약속!”그 말에는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득 실려 있었다.사실 박유진은 심태하가 생일 이야기를 할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어젯밤에 워낙 정신이 없어 그런 중요한 약속마저 깡그리 잊고 있었던 것이다.“아빠가 보내준 선물 잘 받았어요!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심태하는 아직 다 하지 못한 말이 많은 듯 아빠에게 털어놓고 싶은 게 가득한 눈치였다.박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햇살이 쏟아져 내려 유난히 눈부셨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가늘게 떴고 그 강렬한 빛이 속눈썹 아래에 그림자를 드리웠다.그 순간 그의 마음속엔 오로지 한 사람, 심미연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그녀와 떨어져 있는 모든 시간이 하나같이 그리움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그리움이 너무 커서 박유진은 당장이라도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달려가고 싶을 만큼 벅찼다.“아빠... 지금 너무 힘들죠? 그럼 회사 팔고 그냥 집으로 돌아와요. 제가 돈 많이 벌어서 아빠랑 엄마 다 먹여 살릴게요!”심태하의 순수한 눈빛에 진심 어린 다짐이 담겨 있었다. 그에겐 돈을 많이 벌어서 가족을 지킬 거라는 꿈이 있었다.심미연은 그런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통통한 볼살에 아직 아기 티가 남았지만 심태하의 마음속
심미연 역시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이지연이 잘못 알아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지연 씨, 다시 한번 제대로 확인해 봐요. 결과가 똑같은지 꼭 잘 봐요.”혹시라도 착오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그럼 제가 다시 확인해 볼게요! 뭐든 나오면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보스, 그럼 끊을게요!”이지연은 말 끝나기가 무섭게 전화를 뚝 끊었다.심미연은 휴대폰을 쥔 채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까 이지연이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이건명과 문소영이 예전에 그런 사이였다고?’그런데 왜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걸까? 아무도 깊게 파고들지 않았기에 묻혀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결혼 전에 누굴 만나든 그건 사생활인데 그걸 굳이 숨긴 이유가 뭘까?심미연이 이 모든 게 어딘가 석연치 않다고 느끼고 있을 즈음, 밖에서 누군가 소리쳤다.“엄마! 나 배고파요! 우리 빨리 아침 먹으러 가요!”심미연은 생각을 접고 고개를 들어 활짝 웃는 아들을 바라봤다.“그래, 가자.”심태하가 달려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엄마, 며칠 뒤면 제 생일이잖아요. 생일 파티에 상미도 초대하고 싶은데, 그래도 돼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젯밤의 친자 확인 결과가 떠올랐다. 강상미는 그녀의 딸, 즉 심태하와 쌍둥이였다. 그래서 둘의 생일도 당연히 같았다.심태하의 생일 파티에 강상미가 온다면 그건 곧 둘이 같이 생일을 보내게 되는 셈이다.“엄마, 안 돼요?”심미연이 대답하지 않자 심태하가 다급히 물었다.그녀는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켰다.“그럼, 당연히 초대해야지. 너희 둘이 같이 생일 파티하면 되겠네.”“정말요? 엄마 최고! 사랑해요!”심미연은 아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태하야, 너 엄마가 어제 말한 거 잊은 거 아니지? 상미가 바로 태영이야. 너랑 똑같이 엄마 배에서 나왔고 너희 둘은 쌍둥이야. 그래서 생일도 똑같아.”강상미에 관한 일은 이미 방원호에게 조사를 맡긴 상태였다. 꼭 알아내야 한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