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 도련님께서 무슨 자격으로 그걸 물으시는 겁니까?] 이진영의 목소리는 여전히 나른하고 게으른 기색이 역력했다. 박유진은 차갑게 웃으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한밤중에 사람을 병원에서 몰래 데려가시는 겁니까? 그것도 말 한마디 없이?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거, 너무하지 않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낮고 강하게 울려 퍼졌다. 빈 복도를 가득 채우며 마치 망치질처럼 묵직한 메아리를 남겼다. 처음 심미연이 이진영을 의심했을 때 박유진은 혹시 오해가 아닐까 생각했다. 이진영이야 원래 자유롭고 제멋대로인 인간이지만 적어도 이렇게 무례하고 비합리적인 짓을 할 사람은 아니라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그가 보인 태도와 말투, 모든 게 박유진을 확신하게 만들었다. 신하린을 데려간 건 분명 이진영이었다. 전화기 너머로 잠시 적막이 흘렀다. 박유진이 이렇게까지 묻는 걸 보면 심미연이 이미 모든 걸 눈치챈 게 분명했다. ‘아마 곧 직접 날 찾아오겠지.’ 하지만... 신하린을 돌려줄 생각 따위, 애초부터 없었다. 그 여자는 평생 그의 곁에 있어야 하니까. 다시는 어디에도 가지 못하게. [신하린을 데려간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박유진의 목소리는 낮고도 위협적이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이빨 사이로 스며 나오듯 묵직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이진영은 비웃음을 흘리며 조롱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박유진 씨, 너무 간섭하는 거 아닌가요? 신하린은 제 여자입니다. 그 여자가 어디 있는지 굳이 아실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그는 언제나 자유롭고 방종한 삶을 살아왔고 감히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박유진은 복도 끝에 서서 도시의 불빛이 그의 차가운 얼굴을 스치듯 비추는 가운데 핸드폰을 단단히 쥐었다. 그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졌지만 그 안에 담긴 경고는 더욱 날카로웠다. [이진영 씨, 정도껏 하시죠.] 그는 확신했다. 심미연이라면 자신이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곧바로 이진영의 위치
그는 문득 심미연의 정체에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심미연은 아무것도 모른 채 태연하게 노트북을 켜더니 곧바로 작업을 시작했다. 도진혁의 시야에 그녀의 손가락이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리는 모습이 들어왔다. 순식간에 화면에는 쉴 새 없이 복잡한 코드들이 펼쳐졌다. 도진혁은 순간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심 변호사님이... 단순히 변호사인 줄만 알았는데?’ ‘대체 정체가 뭐야?’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알 수 없는 감각이 온몸을 감쌌다. 그녀는 정말 예측 불가한 인물이었다. 한편, 박유진은 맞은편에서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흔히 진지하게 일하는 남자가 가장 멋있다고 말하지만 그는 이제야 깨달았다. 진지하게 일하는 여자의 모습은 상상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더 깊이 빠져들 것만 같았다. “됐다!” 심미연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순간, 생각에 잠겨 있던 두 사람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찾아냈어요?” 도진혁이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그는 이미 영상을 몇 번이나 돌려봤지만 자신이 나갔던 시간대의 기록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데 심 대표님이 찾아냈다고?’ ‘대체... 이분 정체가 뭐야?’ 도진혁은 본능적으로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 정도 실력이라면 혹시 이미 자신의 모든 정보를 조사한 게 아닐까? 그는 이쯤 되니 고민이 밀려왔다. ‘지금이라도 신 대표님한테 솔직히 말해야 하나?’ ‘근데 사실을 털어놓으면 신 대표님이 화내겠지?’ 그녀를 속인 게 무려 3년이다. 도진혁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 한편, 박유진은 자연스럽게 심미연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익숙한 듯 그녀의 볼을 살짝 잡아당기며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미연이 진짜 대단한데?” 심미연은 환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당연하지.” 맑고 밝은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퍼지자 주변까지 환
신하린은 입술을 꽉 깨물고 눈을 부릅떴다. 그 눈빛에는 꺾이지 않는 의지와 자유를 향한 갈망이 서려 있었다. 마치 말없이 결심을 다지며 자신을 단단히 세우는 듯했다. “이렇게 한다고 내가 순순히 당신 말을 들을 거라고 생각해요?” 신하린은 단호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목소리는 약했지만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단단하게 울려 퍼졌다. “날 놓아주지 않으면 그냥 죽어버릴 거예요. 분명히 말했어요.” 이진영은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아릿하게 조여들었다. 그러나 곧 냉소를 머금으며 비웃듯 말했다. “신하린, 그 남자 때문에 절식하면서까지 죽겠다고 난리치는 거야? 그렇게까지 사랑해?” 그제야 그의 말뜻을 정확히 이해한 신하린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요. 난 그 사람을 그렇게 사랑해요.” 도진혁이 한때 자신에게 고백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고백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신하린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망가진 자신은 그처럼 빛나는 사람과 어울릴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그저 그의 말에 맞춰 대답했을 뿐이지만 그 한마디가 오히려 이진영을 격분하게 만들었다. 그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신하린을 거칠게 밀쳐내더니 방 한쪽으로 가서 차가운 쇠사슬을 꺼냈다. 신하린은 순간 두려움에 휩싸였지만 이내 차분함을 되찾았다.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진영의 성격을 잘 아는 그녀는 그 앞에서 한 번이라도 약해지면 더 끔찍한 결과를 맞이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두려워할 이유가 뭐가 있을까?’그녀는 폭풍이 더 거세게 몰아친다면 차라리 그것에 맞서 싸우자는 결심을 했다. “이렇게 해도 네가 어떻게 죽나 한번 보자.” 이진영은 차갑게 말하며 쇠사슬을 신하린의 가느다란 손목에 감고 ‘딸깍’ 소리와 함께 자물쇠를 잠갔다.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너 어릴 때 이미 남자한테 처음을 빼앗겼잖아. 그런데도 내 앞에
그도 알고 있었다. 이렇게 그녀를 가둔다고 해서 문제의 본질이 해결되는 건 아니라는 걸. 하지만 신하린의 단호한 태도 앞에서 그는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신하린은 그를 똑바로 노려보며 비웃었다. 그 눈빛에는 싸늘한 조소가 서려 있었다. “당신 여자가 된다는 건 결국 남의 가정을 깨는 불륜녀가 된다는 거잖아요.” 그녀는 비웃음을 감추지 않은 채 조용히 말했다. “난 그런 거 관심 없어요. 그러니까 다시 한 번 묻죠. 날 놓아줄 건가요? 아니면 끝까지 가보겠다는 건가요?” 이진영은 그녀의 눈빛과 마주치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강한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대체 뭘 하려는 거야?”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신하린이 갑자기 미친 듯한 웃음을 터뜨렸다. “죽어야죠.” 그녀의 목소리는 맹렬한 불꽃처럼 타올랐다. “죽지 않으면 어쩌겠어요? 당신이 숨겨야 할 비밀처럼 몰래 숨어 살아야 하는 거예요? 또다시 그 더러운 상황을 겪으면서?” 그녀는 차라리 죽어도 다시는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빛을 향해 나아가고 싶었다. 더 이상 어둠 속에서 숨죽이며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아침이 오길 바랐다. 차갑고 긴 밤을 견디면서 희망이 떠오르길 기다렸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라고? 절대 그럴 수 없었다. “그래. 그럼 죽어 봐.” 이진영은 비웃으며 말했다.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신하린이 절대 그럴 리 없다는 걸. 하지만 그 순간, 그는 신하린의 입술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리는 걸 보았다. 그는 온몸이 얼어붙었다. 차가운 절망이 한순간에 심장을 조여 왔다. ‘신하린, 안 돼. 죽으면 안 돼.’아래층. 심미연은 차가운 표정의 경호원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 긴장감은 마치 끊어질 듯 팽팽하게 얽힌 실처럼 긴박했다. 달빛이 비스듬히 내리쬐며 그녀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고 그 그림자 속에서 그녀의 눈빛은 단호한 결연함으로 반짝였다.
심미연은 고개를 숙이고 신하린의 몸을 천천히 살폈다. 그녀의 심장은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시선이 움직일 때마다 그 박동이 가슴 속에서 더 세게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신하린의 손목에는 분명히 묶었던 흔적이 있었다. 밧줄로 꽉 묶은 듯한 자국이 깊게 새겨져 있었다. ‘하린이 다리는... 이미 쓸 수 없을 텐데.’‘도망도 못 갔을 거야...’ ‘도대체 왜 이런 애까지 묶어둔 거지?’ 심미연은 가슴 속에서 밀려오는 고통을 애써 누르며 계속해서 신하린의 몸을 점검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손목 외에는 다른 상처가 보이지 않았다. ‘하린이는 왜 이렇게 쓰러졌을까?’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신하린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던 심미연은 그때 그녀의 얼굴이 마치 겨울 첫눈처럼 창백해져 있음을 알아챘다. 입술은 단단히 굳어 있었고 입가에서 붉은 기운이 미세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심미연의 시선은 그 입술에 고정되었고 그 순간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과 분노가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급히 손을 뻗어 그녀의 입을 강제로 벌려보자 신하린의 혀는 이미 스스로 물어 찢어져 있었다. 그 속에서 피와 침이 섞여 흘러나오고 그 모습은 끔찍할 정도였다. 그 순간, 심미연의 눈은 마치 얼어붙은 듯 굳어졌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머릿속에서 폭발적인 충격이 울려 퍼졌다. ‘하린이는 도대체 어떤 고문을 당했던 거야...’‘어떻게 혀를 깨물고 자살하려고까지 했을까?’ 그 생각이 그녀의 심장을 차갑게 찔러왔다. 마치 날카로운 칼날이 박히듯 숨이 멎을 만큼 강렬한 고통이 몰려왔다. 심미연은 갑자기 고개를 들며 눈속에서 타오르는 분노가 마치 불꽃처럼 일어났다. 그 불길은 세상의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 거세게 타올랐다. 그녀는 천천히 일어섰다. 그 움직임은 단순히 힘이 아니라 압도적인 에너지를 내뿜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땅이 미세하게 떨리는 듯한 그 발걸음은 마치 사자처럼 분노에 휩싸여 사냥감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는 모습이었다.
도진혁은 그의 말 속에서 몇 개의 키워드만을 추려내고는 머릿속에서 조각을 맞추듯 상상을 덧붙였다. “나 때문에 하린이가 너랑 헤어지려고 했다고? 그럼... 하린이도 나를 좋아했다는 거네?”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천진하게 내뱉은 말이었지만 그 안엔 은근한 기쁨이 묻어 있었다. 이진영의 눈빛이 차갑게 빛나더니 순간적으로 도진혁의 손목을 잡아챘다. 뼈가 부서질 듯한 힘이었다. 그의 손가락은 쇠처럼 단단히 조여들어 도진혁이 조금이라도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았다. 이진영의 입꼬리가 비뚤어지게 올라갔다. “네가 감히 나한테 덤비겠다고?”“야, 신하린을 망가뜨리더라도 절대 너한테 넘겨주진 않아.” 그 순간, 그의 머리속엔 오직 신하린이 이 남자 때문에 자신과 심하게 다퉜던 기억만이 떠올랐다. ‘하찮은 비서 주제에 감히 나와 맞서려고 든다고?’그때였다. 예고 없이 날아든 발길질이 이진영의 옆구리를 세게 후려쳤다. “이진영 씨, 정말 선을 넘네요.”심미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하린이는 살아 있는 사람이에요.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요. 대체 무슨 권리로 하린이를 망가뜨려서라도 그 행복을 막겠다는 거예요?” 심미연은 예전엔 두 사람이 잘 되길 바랐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강지한과 이진영, 두 사람은 결국 같은 부류였다. 비슷한 사람들끼리 끌리고 결국 같은 길을 가게 되어 있다. 심미연은 순간 자신의 안목이 형편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심미연 씨, 당신이 지금 은성의 대표가 됐다고 해서 내가 어쩌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요?”이진영의 목소리에는 독기 어린 조소가 서려 있었다. “다시 한 번 손대 봐요. 이번엔 은성을 박살 내줄 테니까. 결국 신하린도 예전처럼 내 앞에서 기어 다니면서 내가 던져주는 밥 한 조각에 매달리게 될 거고.”신하린의 자살 시도로 인해 그의 정신은 극도로 날카로워져 있었다. 이성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그러던 순간, 도진혁의 주먹이 날아와 이진영의 얼굴
심미연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신하린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리며 마치 나비의 날개가 살짝 움직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신하린의 옆에 앉았다. 그녀의 눈빛 속에는 걱정과 따스함이 가득했다. “어때? 어디가 아파? 빨리 말해줘.” 신하린은 천천히 눈을 떴다. 마치 아침 햇살이 처음 비추는 듯 흐릿한 눈빛 속에 고통이 스쳐갔다. 그녀의 손가락이 힘없이 올려지더니 미세하게 떨리며 입술을 가리켰다. 그 후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고 그 모습은 무력함과 고통에 대한 몸부림처럼 보였다. 심미연은 그 모습에 마음이 급격히 가라앉았다. 신하린이 입술을 가리킨 걸 보며 그녀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혀의 통증을 말하려는 것임을 알았다. 심미연은 신하린을 부드럽게 품에 안았다. “괜찮아. 병원에 가서 치료받자.” 신하린은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알았어.” 그 순간, 이진영은 신하린이 깨어나는 모습을 보고 마치 광풍처럼 그녀에게 달려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의 눈빛에는 걱정과 불안이 가득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손을 내밀어 신하린의 손을 잡으려 했다. 신하린은 재빨리 손을 빼며 그를 노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가까이 오지 마세요. 당신을 보고 싶지 않아요.” 말을 할 때마다 혀 끝에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 그 고통은 가슴 깊숙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이진영은 신하린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빛 속에 결심과 애정이 섞인 감정을 담았다. 그는 낮고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린아, 내 곁으로 돌아와. 나랑 결혼해줘. 평생 너에게 잘할게.” 그의 목소리는 마치 간절히 구걸하는 듯 또 한편으로는 뭔가를 약속하는 듯했다. 신하린은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그가 쇠사슬로 자신의 손목을 묶던 장면이 떠올랐다. 순간 몸이 무의식적으로 떨리기 시작했고 거절하려던 찰나 뒤에서 들려오는 한마디에 멈췄다. “신하린, 그 사람한테
도진혁은 마치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이진영을 향해 자랑스럽게 눈을 깜박였다. 그 모습은 마치 무언의 도발처럼 보였다. 신하린과 함께 있으니 도진혁은 이진영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이진영은 주먹을 꽉 쥐며 도진혁을 한 대라도 날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신하린이 옆에 있기에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미연아, 병원에 데려다줘.” 신하린은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가슴 속에 불안감이 차오르며 이진영이 자신을 강제로 붙잡아 둘까 봐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 먼저 병원으로 가자.” 심미연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진영은 손을 내밀어 신하린을 안으려 했지만 도진혁이 먼저 그녀를 안고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차에 태워줄게. 가자.” 신하린은 내리겠다고 말하려 했지만 도진혁은 그녀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며 속삭였다. “이진영이 안게 하고 싶으면 지금 바로 내려줄게.” 비록 신하린의 몸무게는 가벼운 편이지만 심미연은 그녀를 안을 수 없었다. 신하린은 그 말을 삼키고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진영과 도진혁 사이에서 도진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진영이 남긴 상처가 너무 깊어 지금도 그를 마주치면 몸이 긴장되고 마음이 불안해졌다.도진혁은 신하린을 안고 이진영 옆을 지나며 일부러 그를 향해 웃었다. 맞아서 부풀어 오른 얼굴이 유난히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심미연은 신하린의 다리를 걱정하며 두 남자 사이의 긴장된 상황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빠르게 앞서 걸어갔다. 이진영은 분노가 치밀어 올라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저 자식이 감히 나한테 도발하다니.’ 그를 어떻게든 제압해주겠다고 결심한 이진영은 경호원들에게 눈빛을 보냈다. 경호원들은 즉시 다가가 도진혁을 둘러쌌다. 도진혁의 눈썹이 살짝 떨렸다. ‘이진영이 설마 나를 강제로 막아보겠다고?’ 그는 신하린을 안고 있었기에 이렇게 많은 경호원들과 맞서 싸울 수는 없었다. 신하린의 창백한 얼굴이 더욱
육현성이 입가를 만지며 말했다.“이진영, 네가 감히 나한테 주먹질을 날려? 내가 집에 가서 이다은 저년을 아주 제대로 혼쭐 내줄 거야. 이번엔 최소 몇 달은 못 일어날걸?”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같이 기고만장했다.“보아하니 육씨 가문이 요즘 꽤 살 만한가 보네. 감히 나 이건명의 딸을 건드려?”이건명이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육현성의 뺨을 힘껏 후려쳤다.“감히 어디서 제멋대로 굴어!”그는 자신의 앞날을 위해 딸을 육씨 가문에 시집보냈었다. 그래도 육씨 가문은 4대 가문 중 하나인데 비록 육현성이 이다은을 사랑하진 않더라도 최소한의 예우는 할 줄 알았다.그래서 이다은이 이혼하겠다고 했을 땐 괜히 유난 떠는 줄 알았는데 방금 그 모든 생각이 송두리째 무너졌다. 이다은이 육씨 가문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이제야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이건명의 등장에 육현성은 순식간에 기세가 꺾였다. 아무리 육씨 가문이 돈 많고 배경 있는 집이라도 지금의 이건명을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었다.“아버님, 화내지 마세요. 이건 오해예요. 저는 전혀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육현성이 다급히 변명하려 들었다.“됐어. 변명은 필요 없어.”이건명이 이다은의 손을 꽉 잡았다.“다은아, 미안해. 아빠가 잘못했어. 너 이혼하고 싶으면 해. 내가 최고로 실력 좋은 변호사를 붙여줄게.”이다은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아빠가... 나를 이렇게 감싸준다고? 늘 냉정하기만 했던 사람이?’그때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들렸다.“정말 감동적인 부녀지간이네요. 좋은 아버지십니다, 정말.”이진영이 자신의 아버지를 조롱하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본 순간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그... 그쪽이 왜 여기 있어요?”강혁승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는 한 모금 빨아 연기를 뿜으며 웃었다.“나요? 부모 찾으러 왔죠.”이미 이진영이 그의 정체를 눈치챘기에 더 숨길 이유도 없었다. 오늘 이 자리에 이 사람들이 모두 모인 것도 하늘의 뜻이라 생각한 강혁승은 오늘 결판을 보려 했다.“너...
“문자를 보낸 건 그 여자가 아니라 나예요!”강혁승의 음울한 얼굴에 스며든 미소는 왠지 모르게 오싹했다.이건명의 시선이 그의 얼굴에 멈췄다. 얼굴에 난 깊은 흉터만 아니었다면 이건명 본인과도 놀랍도록 닮은 얼굴이었다.하지만 그의 아내가 낳은 자식은 이다은, 이진영 남매 둘뿐이었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누구란 말인가?“건명 씨는 여기 왜 왔어요? 어서 나가요!”문소영이 다급하게 외쳤고 목소리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왜 이렇게 쫓아내려고 안달이에요? 여기까지 왔는데 문제는 해결하고 가야죠.”강혁승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고 그의 눈빛엔 싸늘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왜 저 사람한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 저 사람이랑은 아무 관련도 없어!”문소영은 이건명을 붙잡아 두고 싶지 않았다.심미연은 눈을 가늘게 떴다.‘이 와중에도 이건명을 감싸려 하다니, 그래도 한때는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이었나 보네.’“관련이 없다고요? 저 사람이 내 아버지인데?”강혁승은 조소를 띤 채 반문했다.“내가 저 사람이 수십 년 동안 도와준 일들을 전부 알고 있는데 한 번 읊어볼까요?”문소영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헛소리하지 마!”“입 다물지 못해!”이건명이 서늘한 눈빛으로 강혁승을 노려보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하지만 마음속으로는 큰일 났다고 생각했다.‘저 자식이 모든 걸 알고 있단 말이야?’심미연은 입술을 깨문 채 이건명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방원호가 넘겨준 자료가 전부 사실이었던 것이다.하지만 이건명이 한 여자를 위해 불법까지 저질렀다는 건 예상 밖이었다. 진심으로 사랑해서였을까?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던 걸까?“심미연, 이리 와!”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심미연이 깜짝 놀라 돌아보니 깊고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그는 의식이 없었는데 분위기는 여전히 무게감이 있었다. 이런 것이 바로 한 회사를 이끄는 대표만의 카리스마와 아우라인가.“멍하니 있지 말고 어서 오라고.”강지한의 말에 심미연은 정신을
문도현은 심미연의 표정이 굳은 걸 보고 머리를 쉴 새 없이 굴리기 시작했다.‘안 되겠어. 일단 지금 이 상황부터 어떻게든 모면해야 해.’하지만 심미연은 그렇게 쉽게 속을 여자가 아니었다. 그가 아무 말이나 둘러대면 단번에 꿰뚫어 볼 게 뻔했다.‘어쩌지?’그때 마침 심미연의 휴대폰이 울렸다.“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요.”“네, 가서 일 봐요. 난 여기 있을게요!”문도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심미연은 대답도 제대로 못 하고 황급히 사무실을 나섰다.문도현은 기지개를 한껏 켠 뒤 슬며시 일어나 그녀의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책상 위에 액자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그 안에 심미연이 다른 사람과 같이 찍은 사진이 한 장 있었다.그런데 그 사진 속에서 심미연의 옆에 박유진이 서 있는 걸 본 순간 문도현은 마치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박유진이랑 심미연이 왜 같이 있어? 말도 안 돼! 절대 이 둘이 이어지게 두면 안 돼!’문도현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홱 돌아서 사무실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때 마침 임현이 문을 열고 들어오다 그와 정면으로 부딪쳤다.“아야! 아이고, 아파라...”임현이 낮게 신음하며 얼굴을 찡그렸다.하지만 문도현은 그녀를 밀치고 나가버렸다.임현은 어이없다는 듯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아니, 누가 건드리기라도 했나? 왜 저렇게 화가 나 있지?”마침 그때 심미연이 다시 들어왔다.“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어요? 문 대표님은요?”“방금 나가면서 저랑 부딪혔어요. 엄청 화난 얼굴이던데요? 아무 말도 안 하고 나가더라고요.”임현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저 남자, 감정 기복 진짜 심하네.’“잘됐네요. 나 급한 일이 있어서 나가야 해요. 오늘은 임현 씨가 사무실 좀 맡아줘요.”심미연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방을 챙겨 들고 서둘러 나가버렸다.방금 강지한이 의식을 되찾았다고 한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에게 직접 물어봐야 했다.그가 어떻게 그녀가 교통사고를
문도현의 치명적인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떠올랐고 깊고 그윽한 눈빛엔 묘하게 사람 마음을 사로잡는 기운이 스쳤다. 그 눈으로 마음속 깊은 비밀까지 꿰뚫어 볼 것만 같았다.“정말 여기서 얘기할 거예요?”그는 나직하면서도 묘하게 귀를 간질이는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사진이라도 찍으면 어쩌려고요?”그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하면서도 이상하리만치 매혹적이었다. 마치 한 음절 한 음절이 심장을 울리는 현처럼 듣는 이의 감정을 툭툭 건드렸다.유흥가를 오래 드나든 남자답게 문도현의 말투나 몸짓 하나에도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서려 있었다. 그의 존재만으로도 상대방은 쉽게 그에게 빠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 뒤에 자리 잡은 견고한 집안 배경은 그의 존재에 신비로움과 권위를 덧씌웠다. 한 번만 눈빛을 주고받아도 수많은 여자가 그를 위해 기꺼이 심연으로 빠져들곤 했다.심미연은 가늘고 곧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그래요. 그럼 위에 올라가서 얘기하죠.”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차 문을 잠그고는 성큼성큼 앞서 걸었다. 그녀의 발걸음엔 흔들림 없는 결의가 담겨 있었다. 아무리 개인적으로 복잡한 감정이 얽혀 있더라도 문도현은 사건을 의뢰하러 온 손님이었다. 심미연은 일과 사적 감정을 분명히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문도현의 시선은 무심결에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라인을 훑고 지나갔다. 그러자 곧 뇌리에 수많은 기억의 파편이 번뜩이듯 스쳐 지나갔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길들지 않은 야수 하나가 깨어나는 느낌이었다.이제야 그는 자신이 여자에게 설레는 감정을 잃은 게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다만 평범한 여자들에게 더 이상 설레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흔한 여자들은 이제 그의 마음을 건드릴 수 없지만 심미연은 예외였다.그 순간 심미연의 차분하고 냉정한 목소리가 그의 흐트러진 정신을 다시 현실로 끌어당겼다.“문 대표님께서 소송을 의뢰하신다네요. 임 변호사님께서 맡아주세요.”“알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문 대표님.”임현이 공손하게 몸을 살짝 기울이며 안내했
심미연은 흩날리던 생각을 차분히 거두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궁금한 듯 물었다.“우리 태하 진짜 똑똑하네.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거야?”아직 겨우 세 살이지만 심태하의 마음은 놀랄 만큼 세심하고 예민했다. 또렷한 눈망울은 마치 세상의 감정 흐름을 꿰뚫어 보는 듯했고 그렇게 꼼꼼히 살피는 모습에 심미연은 종종 놀라곤 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박유진이 심태하를 정성스럽게 길러온 시간이 아이를 이토록 똑똑하고 배려 깊게 자라게 만든 것이다.“아까 아빠랑 통화할 때 엄마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어요. 뭔가 걱정하는 게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저한테 말 걸었을 때도 평소처럼 웃고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엄마가 혹시 슬픈 건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어요.”심태하의 말은 또렷하면서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단어 하나하나에 엄마를 향한 깊은 애정과 이해가 담겨 있었다.심태하가 보기에 박유진이 집에 있을 땐 심미연은 늘 기분이 좋아 보였고 환하게 웃는 얼굴이 참 예뻤다.“엄마가 안 웃었어?”심미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녀석, 정말 못 말려.’겨우 세 살에 이 정도인데 나중에 더 크면 얼마나 영리해질지.“네, 안 웃었어요.”심태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심태하의 목소리는 여전히 앳됐지만 말투는 왠지 어른스러웠다. 꼭 사람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기라도 한 듯했다.심미연의 마음은 그 말 한마디에 확 풀렸다. 그녀는 아들의 코끝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자, 얼른 아침 먹자.”그녀의 말투엔 아낌없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이 아이는 정말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다.“아빠가 보고 싶으면 아빠한테 전화하면 되죠!”심태하가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윙크했다.‘나도 아빠가 보고 싶은데 엄마가 안 보고 싶을 리가 없지. 맞아, 분명 그럴 거야!’심미연은 그 말에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네 말대로 할게.”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박유진이 보고 싶지만 그에게 전화하진
하지만 그 깊은 애정과 놓기 싫은 마음은 오히려 박유진을 현실이라는 갈림길 앞에서 망설이게 만들었다.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심미연만 괴로운 상황에 빠질 것이라는 걸. 그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자신의 망설임으로 인해 흐려지는 건, 그녀의 세상이 자신 때문에 흔들리는 건 차마 보고 있을 수 없었다.그렇다고 그녀를 놓아버리면 영원히 잃게 될 텐데... 그 아픔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박유진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아빠, 왜 말이 없으세요? 허락한 거죠?”심태하의 목소리는 천진난만하게 들떴다. 마치 머릿속에 따뜻한 한 가족의 그림이 그려지기라도 한 듯.‘아빠가 돌아오면 엄마랑 나랑 셋이 모여 저녁 먹고 같이 웃고 얘기하고...’심태하의 마음속에서 그려낸 가장 순수한 행복의 모습이었다.그러나 그 순수한 소망 앞에서 박유진의 마음은 송곳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그는 알고 있다. 이번 결정을 가볍게 내려서는 안 된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게 하려면 정말 신중해야 했다.하지만 사랑과 책임 사이에서 그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그는 지금 사랑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심미연과 아이를 지킬 방법을 찾고 있다.하지만 그런 길이 과연 있을까? 이 선택은 너무나도 어려웠다.“아빠, 나 이렇게 열심히 얘기하고 있는데 왜 아무 말도 안 해요?”심태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미간을 찌푸렸다.평소 같았으면 박유진은 재밌는 얘기도 해주고 자기 말에 웃어주었을 텐데, 오늘따라 너무 이상했다.‘혹시... 내가 말실수했나?’그때 박유진의 다급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심태하의 귀에 들려왔다.“태하야, 곧 비행기가 이륙해서 아빠가 휴대폰을 꺼야 돼. 오늘 밤에 다시 이야기하자. 꼭이야.”박유진은 심미연을 당장이라도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고 말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네! 알겠어요, 아빠! 그럼 오늘 밤에 꼭 통화해요. 약속했으니까 안 하면 안 돼요!”심태하의 목소리에 눈치채기 힘든 외로움이 살짝 섞여 있었다.
심미연은 멍해졌고 아까 자신이 박유진에게 연락을 시도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날아온 건 단 한 줄의 차갑고 무미건조한 메시지. 기대했던 목소리는 끝내 들을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 아들 심태하가 전화를 걸자 박유진은 놀랍게도 전화를 받았다.“아빠, 지금 어디예요? 이틀 뒤면 제 생일이에요! 아빠가 놀이공원 같이 가자고 했던 거 잊으시면 안 돼요!”심태하의 말투엔 아이 특유의 해맑은 기쁨이 가득 담겨 있었고 단어 하나하나가 살아서 튀어나오는 듯했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박유진의 목소리는 한겨울 얼음도 녹일 만큼 다정했다.“아빠 지금 진성으로 가는 비행기 타러 가는 중이야. 곧 이륙이라 휴대폰 꺼야 해. 진성에 도착하면 바로 전화할게. 약속!”그 말에는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득 실려 있었다.사실 박유진은 심태하가 생일 이야기를 할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어젯밤에 워낙 정신이 없어 그런 중요한 약속마저 깡그리 잊고 있었던 것이다.“아빠가 보내준 선물 잘 받았어요!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심태하는 아직 다 하지 못한 말이 많은 듯 아빠에게 털어놓고 싶은 게 가득한 눈치였다.박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햇살이 쏟아져 내려 유난히 눈부셨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가늘게 떴고 그 강렬한 빛이 속눈썹 아래에 그림자를 드리웠다.그 순간 그의 마음속엔 오로지 한 사람, 심미연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그녀와 떨어져 있는 모든 시간이 하나같이 그리움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그리움이 너무 커서 박유진은 당장이라도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달려가고 싶을 만큼 벅찼다.“아빠... 지금 너무 힘들죠? 그럼 회사 팔고 그냥 집으로 돌아와요. 제가 돈 많이 벌어서 아빠랑 엄마 다 먹여 살릴게요!”심태하의 순수한 눈빛에 진심 어린 다짐이 담겨 있었다. 그에겐 돈을 많이 벌어서 가족을 지킬 거라는 꿈이 있었다.심미연은 그런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통통한 볼살에 아직 아기 티가 남았지만 심태하의 마음속
심미연 역시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이지연이 잘못 알아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지연 씨, 다시 한번 제대로 확인해 봐요. 결과가 똑같은지 꼭 잘 봐요.”혹시라도 착오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그럼 제가 다시 확인해 볼게요! 뭐든 나오면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보스, 그럼 끊을게요!”이지연은 말 끝나기가 무섭게 전화를 뚝 끊었다.심미연은 휴대폰을 쥔 채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까 이지연이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이건명과 문소영이 예전에 그런 사이였다고?’그런데 왜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걸까? 아무도 깊게 파고들지 않았기에 묻혀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결혼 전에 누굴 만나든 그건 사생활인데 그걸 굳이 숨긴 이유가 뭘까?심미연이 이 모든 게 어딘가 석연치 않다고 느끼고 있을 즈음, 밖에서 누군가 소리쳤다.“엄마! 나 배고파요! 우리 빨리 아침 먹으러 가요!”심미연은 생각을 접고 고개를 들어 활짝 웃는 아들을 바라봤다.“그래, 가자.”심태하가 달려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엄마, 며칠 뒤면 제 생일이잖아요. 생일 파티에 상미도 초대하고 싶은데, 그래도 돼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젯밤의 친자 확인 결과가 떠올랐다. 강상미는 그녀의 딸, 즉 심태하와 쌍둥이였다. 그래서 둘의 생일도 당연히 같았다.심태하의 생일 파티에 강상미가 온다면 그건 곧 둘이 같이 생일을 보내게 되는 셈이다.“엄마, 안 돼요?”심미연이 대답하지 않자 심태하가 다급히 물었다.그녀는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켰다.“그럼, 당연히 초대해야지. 너희 둘이 같이 생일 파티하면 되겠네.”“정말요? 엄마 최고! 사랑해요!”심미연은 아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태하야, 너 엄마가 어제 말한 거 잊은 거 아니지? 상미가 바로 태영이야. 너랑 똑같이 엄마 배에서 나왔고 너희 둘은 쌍둥이야. 그래서 생일도 똑같아.”강상미에 관한 일은 이미 방원호에게 조사를 맡긴 상태였다. 꼭 알아내야 한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