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미연은 문도현을 마치 쓰레기를 보는 듯한 차가운 시선으로 응시했다. 그녀의 작은 얼굴에는 마치 극지에서 온 얼음처럼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고 그 눈빛은 끝없이 냉담했다. 입가에는 차가운 미소가 스치며 그 웃음은 마치 겨울의 날카로운 칼날처럼 차 안에 메아리쳤다. “문도현 씨, 제가 프로젝트 하나 받는다고 해서 당신과 잠자리를 함께할 거라고 생각하셨나요? 아쉽지만 전 돈이 부족하지 않아요.” 예전에 강지한이 그녀를 팔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부부였기에 그녀는 그 말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문도현은 왜 돈으로 자신과 관계를 맺으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주위 공기는 얼어붙은 듯 무겁고 침울했다. 박 기사는 운전석에서 한 움직임도 없이 숨조차 조심스럽게 내쉬고 있었다. 그도 듣고 있다는 사실이 들키지 않기를 바라는 듯 서둘러 숨을 참았다. 그는 항상 심미연이 뛰어난 변호사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순간, 그녀가 만들어내는 분위기에 압도되어 두려움이 밀려왔다. 문도현은 그 자리에 앉아 여전히 젖은 옷을 입고 있었지만 전혀 당황한 기색 없이 고고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는 심미연을 바라보며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솔직히 말해서 심미연 씨는 외모, 몸매, 능력 모든 면에서 제 취향에 완벽하게 맞아요. 만약 돈이 부족하지 않으시다면 원하는 걸 말씀해 보세요. 제가 드리죠.” 그 역시 돈은 부족하지 않으니까. 심미연은 문도현을 바라보며 차가운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문도현 씨, 외출할 때 머리도 안 챙기고 나오신 거예요? 사람 말을 못 알아듣는 건가요?” 명백하게 거절하는 말을 듣고도 문도현은 이해하지 못한 채 반응했다. “너무 급하게 거절하지 마세요. 천천히 생각해보고 답변해 주세요.”문도현은 화가 내기보다는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경성에 있으면 분명히 저를 필요로 할 때가 있을 거예요.” 그는 마음에 드는 여자를 보면 시간을 아끼지 않고 정
자료를 정리한 뒤 이미 자정이 넘었다. 심미연은 하품을 하며 사무실에서 잠을 청했다. 박유진과 심태하는 집에 없었고 집에 가봐야 혼자일 것 같아 사무실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강상미 부모님과 함께 강지한을 찾으러 가기로 마음먹었다....섬에서. 다음 날 아침 일찍, 심태하가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 낯선 아줌마가 장난감을 들고 강상미를 달래고 있었다. 강상미는 소파에 앉아 큐브를 돌리고 있었다. 어제 오빠가 가르쳐줬지만 아직 잘 못 하고 있었다. 강상미는 잘 못 해서 조금 초조해했다. 하지만 아줌마는 계속해서 말하며 방해했다. 정말 시끄러웠다. 오빠의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줌마는 큐브를 어떻게 하는지 알려줄 수 있을 텐데...’ ‘계속 말을 하지도 않으실 거야.’ 심태하는 예쁜 큰 눈을 반짝이며 속으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는 서둘러 방으로 올라가서 옷장에 숨겨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임혜자는 그가 내려오는 걸 보고 서둘러 다가와 손을 잡으며 말했다. “작은 도련님, 아침 준비됐어요. 지금 드실까요?” 심태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임 할머니. 수고 많으셨어요.” 임혜자는 그의 모습에 마음이 먹먹해졌다. ‘이렇게 착한 아이를 도련님은 왜 섬에 가둬두고 엄마와 만나지 못하게 할까?’ “저는 괜찮아요. 얼른 가서 아침 드세요.”임혜자는 마음을 가다듬고 아이를 이끌고 식당으로 갔다. 심태하는 손을 씻고 나서 식탁에 앉아 조용히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는 항상 음식을 먹을 때 예의 바르고 좋아하는 음식을 많이 먹지 않으며 싫어하는 것도 남기지 않았다. 음식을 다 먹은 후 그가 싫어하는 음식에 대해서도 고백하곤 했다. 임혜자는 그의 그런 점을 특히 좋아했다. “임 할머니, 저 아줌마 누구에요?” 심태하가 샌드위치를 들고 고개를 돌려 물었다. 임혜자는 급히 손가락에 입을 대며
임혜자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세 살짜리 아이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강씨 가문에서 강상미가 다른 아이들보다 똑똑하다고 느꼈던 그녀는 지금 심태하를 보며 그가 훨씬 더 뛰어난 아이임을 알게 되었다. 역시 도련님과 사모님의 자식답게 좋은 유전자를 물려받은 아이들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 할머니, 왜 서 계세요? 빨리 가세요.” 심태하는 낮은 목소리로 재촉했다. 임혜자는 정신을 차리고 급히 대답했다. “네. 지금 가요.” 그녀는 말을 마친 후 서둘러 식당을 나갔다. 심태하는 핸드폰을 꺼내 몰래 메시지를 하나 보낸 뒤 다시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얌전히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했다. 임혜자는 임지혜를 따라 들어오며 그 장면을 보고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 그림 속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예쁜 아이가 식탁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다. 그 모습은 아주 귀엽고 사랑스러웠으며 마치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처럼 느껴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그 아이를 좋아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강상미는 임혜자의 손을 잡고 들어왔고 오빠가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 것을 보고는 급히 임혜자의 손을 뿌리치며 심태하에게 달려갔다. “오빠, 나도 먹여줘.” 아이는 식탁 옆에 서서 작은 입을 벌리며 큰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 모습은 정말 귀여웠다. 심태하는 샌드위치를 동생의 입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자, 먹어.” 그 순간, 임지혜는 심태하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 아이는 도대체 누구지?’ ‘강지한과 너무 닮았잖아?’ 임지혜는 잠시 놀란 후 불쾌한 감정이 밀려왔다. 그녀는 아침 일찍 쇼핑몰에 가서 장난감도 사고 예쁜 옷도 샀으며 한 시간 넘게 차를 타고 왔다. 강지한과 결혼하려면 강상미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했기에 애써 잘해보려 했지만 강상미는 전혀 마음을 열지 않아 그녀는 점점 화가 났다. 그런데 이제 심태하까지 나타나니 더욱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강상미는 그 여자가 자신의 ‘엄마’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아이 역시 오빠의 엄마가 자신의 엄마가 되길 바랐다. 임지혜의 얼굴이 굳어지며 이를 악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강상미, 이 도움이 안 되는 녀석!’ 그녀는 나중에 강지한의 아내가 되면 그때 천천히 복수할 것을 다짐했다. 임혜자는 심태하를 바라보며 조용히 생각했다. ‘작은 도련님은 원래 말이 적지 않았나? 도련님을 볼 때마다 인사만 하고 다른 말은 하지 않던 아이였는데... 오늘 왜 이렇게 말을 많이 하지?’ ‘혹시 임지혜 씨가 마음에 들어서 엄마로 삼고 싶은 건 아닐까?’ ‘아이들은 보통 자기 엄마를 좋아하지 않나?’ ‘도대체 무슨 일이지?’ 심태하는 임혜자를 보며 말했다. “임 할머니, 동생 데리고 잠깐 나가서 놀아주세요. 저는 이모랑 얘기할게요.” 그의 목소리는 어리지만 의외로 단호하고 강한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임혜자는 본능적으로 거절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상하게도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오빠, 그 여자를 엄마라고 부르면 안 돼!” 강상미는 심태하가 엉뚱하게 임지혜를 엄마라고 부를까 봐 걱정하며 말했다. 심태하는 한 손으로 강상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오빠는 알아서 할게. 상미는 가서 놀아.” 그의 표정과 말투는 어린 아이답지 않게 예상외로 성숙하고 단호했다. 임혜자는 깜짝 놀라 잠시 멈칫했다. 수십 년간 강지한을 돌봐온 그녀는 눈앞의 심태하를 보고 순간적으로 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 닮았다는 걸 깨달았다. 정말로 너무 똑같았다. 강상미는 임지혜를 몰래 힐끗 쳐다보며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아이는 이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이 여자가 자신의 엄마가 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빠가 알아서 한다고 했으니 어쩔 수 없이 오빠를 믿기로 했다. 결국 강상미는 마지못해 임혜자를 따라 나갔다.곧 식당에는 임지혜와 심태하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이모, 앉으세요.”
“상미랑 태하가 같이 실종됐어.”전화기 너머로 남자의 저음이 들려왔고 심미연의 가슴은 마치 벼랑 끝에서 떨어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두 아이가 함께 실종되다니,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지금 어디야? 내가 데리러 갈게.” 강지한이 물었다. 심미연은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고개를 들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이럴 때일수록 반드시 차분해져야 했다. ‘지난번에도 태하가 납치당했을 때 내가 찾아냈잖아.’ ‘심며연, 정신 차려. 진정해!’ “너는 아이들을 찾아. 나는 신경 쓰지 마.”심미연은 말을 끝내고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핸드폰을 쥔 채 깊은 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임현이 그녀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변호사님, 무슨 일이에요?” 심미연은 급히 일어섰다. “태하가 실종됐어요. 오늘 재판은 임현 씨가 출석하세요. 제가 말한 대로만 하면 돼요.”그녀는 임현에게 당부하며 급히 밖으로 나갔다. 문을 나서자마자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태하가 실종됐어요. 핸드폰과 시계가 모두 수거돼서 위치 추적이 불가능해요. 위치 추적을 다시 시도하고 더 많은 인력을 투입해서 구출 작업을 진행하세요. 발견되는 대로 즉시 보고해주세요. 구출 작업은 반드시 안전하게 진행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보스.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심미연은 전화를 끊고 곧바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집에 돌아온 심미연은 급히 서재로 향했다. 컴퓨터를 켜고 심태하의 위치를 추적하기 위해 검색을 시작했다. 그때, 핸드폰에서 갑자기 메시지가 도착했다. 핸드폰 화면을 열어보니 익숙하지 않은 번호에서 문자 한 통이 와 있었다. 그 문자에는 두 글자, ‘DM’만이 적혀 있었다. 심미연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가슴을 움켜잡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심태하에게 위급한 상황일 때 이 신호를 보내라고 가르친 적이 있었다. 이 문자는 분명히 그 번호를 추적하라는 신호일 것이다.심미연은 확신이 들며 가슴이
“아빠, 나랑 오빠 데리고 여기서 나가줘요. 여기 너무 싫고 냄새도 나고 더러워요.” 강상미는 강지한의 목을 끌어안으며 투정했다. 눈에는 아직 붓기가 남아 있었다. 전에 너무 울어서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알았어.” 강지한은 담담한 표정으로 심태하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심태하, 이리 와. 나가고 얘기하자.” 그 모습은 매우 차분하고 자연스러웠다. 심태하의 감정이 매우 안정되어 보여서 큰 충격을 받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세 살짜리 아이가 아무리 강한 척 해도 속으로는 무서워하고 있었다. 심태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저는 당신이 데려가지 않아도 돼요. 당신은 그냥 당신 딸만 데려가세요.” 강지한이 그를 좋아하지 않으면 심태하도 굳이 그 사람의 사랑을 원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사람들이 충분히 사랑을 주고 있었으니까. “심태하, 오라고. 안 들리냐?” 강지한은 짜증을 섞어 말했다. ‘이 녀석이 겨우 세 살밖에 안 됐는데 왜 자꾸 나한테 도전하려 드는 거지?’ ‘정말 짜증 나 죽겠네.’ “저는 강 대표님과 가는 길이 달라요. 같이 가지 않을 거예요.” 심태하는 차갑고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걱정 마세요. 엄마가 오셔서 저를 데려갈 거예요.” 그는 엄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엄마는 분명 그의 의도를 이해할 거라고 확신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엄마가 와줄 것이라고 믿었다. 심태하는 엄마에 대한 신뢰가 확고했다. 강지한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심태하, 한마디 더 하면 바다에 던져버릴 거야.” 그는 화가 나서 일부러 심태하를 겁주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그러나 심태하는 그의 말에 눈물을 글썽이며 대답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제가 혼자 바다에 뛰어들게요. 제가 죽으면 그때는 엄마를 놔주세요. 엄마의 우울증이 겨우 나았는데 당신이 다시 엄마를 괴롭히면 병이 더 악화될 거예요. 엄마는 정말 불쌍해요.” 너무나도 영리한 아이였다. 그는 말을 마친 후 작은 발걸
지난번 문소영이 그에게 임지혜와 소개팅을 하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여자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그 여자는 강 대표님과 곧 결혼한다고 했어요. 그리고 우리가 그 여자의 행복을 방해해서 우리를 없애는 거라고 했어요.” 강지한은 그 말에 바로 반응했다. “그럴 리 없어.”그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럼 제 말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심태하의 맑고 투명한 눈이 강지한을 정통으로 바라봤다. 그 눈을 마주친 순간, 강지한은 자신도 모르게 말문이 막혔다. 그는 임지혜와는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여자와 결혼이라니, 불가능했다. 그리고 아이 때문에 그녀의 행복이 방해된다는 건 더 말이 안 되었다. “오빠, 여기로 와. 나 무서워...”강상미는 조그만 얼굴을 찡그리며 계속 심태하를 불렀다. 심태하는 웃으며 동생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오빠 여기 있어.” 강지한은 마음속의 불안을 억누르며 심태하를 쳐다봤다. “빨리 여기로 와. 그러면 아까 한 말은 없었던 걸로 해줄게.” 그는 심태하를 믿고 싶은 마음도 그렇다고 믿을 수 없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지금 그가 유일하게 생각하는 건 심태하를 자신에게 오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가 서 있는 바로 뒤에는 끝없이 펼쳐진 바다가 있었다. 아이는 한 걸음만 잘못 디디면 그대로 바다로 떨어질 수 있었다. 그 아이는 자신의 아들이었다. 그는 절대로 그 아이가 죽는 것을 지켜볼 수 없었다. “당신이 뭐라고 따져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제가 말한 건 다 사실이에요. 못 믿겠으면 이거 한 번 들어봐요. 녹음도 했어요.”심태하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강지한에게 던졌다. “여기 다 있어요. 직접 들어보세요. 제가 말한 대로라면 지금 당신이 하는 행동 후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그리고 아이는 몸을 한 번 휘둘러 바다로 뛰어들었다. 강지한은 급히 손을 뻗어 핸드폰을 잡으려 했고 그 순간 귀에 들려온 마지막
“강지한, 태하는? 우리 태하 못 봤어?” 거센 파도를 가르며 심미연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강지한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그의 뒤에 서 있던 성무진이 식은땀을 흘리며 안절부절못했다. ‘이제 어쩌지... 작은 도련님이 바다에 뛰어들었는데 이걸 심미연 씨한테 어떻게 말해?’ 심미연은 초조한 얼굴로 화물선에 뛰어올랐다. 쌓인 컨테이너를 하나씩 가뿐히 넘으며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발걸음 하나하나가 간절함과 불안으로 뒤섞여 있었다. 짭조름한 바닷바람이 거칠게 뺨을 스쳤다. 하지만 지금 그걸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그리고 곧 그녀는 강지한 앞에 섰다. 단 몇 걸음. 서로의 거친 숨소리까지 고스란히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심미연의 눈빛에는 초조함과 분노가 뜨겁게 타올랐다. 그 시선은 마치 강지한을 꿰뚫어 보기라도 할 듯 날카로웠다. 강지한은 그녀의 날 선 감정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무의식적으로 손을 움츠렸다. 그의 품에는 여전히 의식을 잃은 강상미가 안겨 있었다. 강지한의 목소리는 목구멍에서 뭉개지다 결국 잠긴 듯한 톤으로 힘겹게 흘러나왔다. “못 봤어. 지금 사람들 시켜서 찾고 있어. 상미가 기절했어. 일단 상미부터 병원으로 데려가야 해.”이 아이가 깨어나는 순간, 모든 게 들통 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아무리 숨기려 해도 진실은 드러날 수밖에 없다. 심미연의 눈에 순간적으로 숨겨진 고통이 스쳤다. 하지만 이내 단호한 표정으로 눈빛을 굳히고 강지한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이제는 그의 가슴에 닿을 듯 가까운 거리였다. “아이 내려놔. 내가 봐줄게.” 심미연은 한 치의 의심도 용납하지 않는 권위적인 목소리로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어 강상미를 받으려 했다. 강지한은 복잡한 마음이 교차하며 무의식적으로 강상미를 심미연에게 맡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강상미와 심미연을 같은 공간에 두어서는 안 되었다. 그 잔혹한 진실이 그녀 앞에 드러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
박유진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빛이 그녀를 감쌌고 낮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말해 봐.” 심미연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과 마주친 순간, 마음 한켠에서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마치 오래도록 감춰온 비밀이 이제야 드러날 것만 같은 예감처럼. “왜 그래, 미연아?” 박유진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따뜻했다. 그녀의 불안을 감싸 안으려는 듯 아주 섬세하게 묻는 말이었다. 심미연은 입을 열 듯 말 듯 망설였다. 떨리는 입술이 달싹이기만 할 뿐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끌어올리고 있는 건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던 진실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결심한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강지한의 딸, 강상미. 들어본 적 있지?” 박유진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아이가 왜?” 툭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그의 마음속에 조용한 파문이 일었다. ‘미연이랑 강지한의 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 지금에서야 그 아이를 말하는 걸까.’ 심미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짐하듯 눈을 감았다가 뜨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실 예전에 내가 잃어버린 내 딸... 그 애는 세상을 떠난 게 아니었어.” 그 말 한마디를 꺼내기 위해 그녀는 거의 모든 용기를 다 쏟아부었다. “정말이야?” 박유진의 목소리는 놀라움에 젖어 있었다.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그때 너 분명히 말했잖아. 아이 숨 안 쉬고 있었다고. 직접 확인했었잖아... 확신했었어.” 그 순간, 박유진의 머릿속을 스친 단 하나의 가능성. ‘설마... 지금 미연이가 말하려는 게... 그 아이가 강상미라는 말이야?’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껏 맞춰지지 않던 조각들이 하나로 이어지고 복잡하게 얽혔던 퍼즐이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박유진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손끝이 얼어붙고
박시훈은 눈을 깜빡이며 바로 앞에 있는 얼굴을 바라봤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있을 수가 있지?’ 심장이 터질 듯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심장 박동이 너무 빠른데요? 정상은 아닌 것 같네요.” 심미연은 이마를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박시훈은 민망해서 땅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왜 비정상이야... 완전 정상이거든...’ 심미연은 아무렇지 않게 그의 상처를 확인했다. 상처는 붉게 부어 있었고 피도 조금 배어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약을 꺼내 상처 위에 다시 발라주었다. 상처는 쓰라렸지만 박시훈은 이 순간이 영원히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곁에 있는 지금이 너무도 소중했다. 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상처를 감싸고 도구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마무리를 한 뒤 장갑을 벗으며 병실을 나갈 준비를 했다. “저... 방금 야식 시켜놨는데... 같이 먹고 가주면 안 돼요?” 박시훈은 괜히 목이 메여 말끝이 흐려졌다. 자신이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었다니, 스스로도 놀라웠다. ‘내가 왜 이 사람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거야...’ “저는 밤에 야식 먹는 습관 없어요.” 심미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야식 너무 자주 먹지 마요. 건강에 안 좋아요. 전 이만 갈게요. 야식 먹고 푹 쉬세요.” 그녀의 말에 박시훈은 마치 한겨울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얼어붙었다. 심지어 발끝까지 저릿했다. 그녀가 간다. 그를 남겨두고 그냥 떠나버린다. 속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심미연은 이미 등을 돌린 채 병실을 나서고 있었고 박시훈의 낙담한 얼굴은 그녀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병실을 벗어난 심미연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깊게 숨을 들이켰다. 몇 시간째 이어진 수술에, 온몸이 녹초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강지한을 살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로비로 걸어 나왔을 때 문 앞에 서 있는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심미연의 시선이 하얗게 눈처럼 샌 강준형의 머리카락에 머물렀다. 가슴 어딘가가 저릿하게 아려왔다. 만약 시간이 되돌릴 수 있다면. 그저 아무 걱정 없이 웃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땐 주저 없이 말했을 것이다. ‘네. 할게요.’그때 그녀는 강지한을 사랑했고 그의 가족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강지한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강준형이 걱정된다고 해서 그 바람을 무조건 들어줘야 할 이유도 없었다. 곁에서 조용히 그녀를 훔쳐보던 가정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모님은 역시 마음이 떠나신 거구나...’ ‘이러다 어르신 또 며칠을 우울하게 보내시겠네...’강준형도 그녀의 침묵에서 모든 걸 느낄 수 있었다. 인연이란 게 억지로 붙잡는다고 이어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비록 아쉬움은 남지만 그 역시 그녀의 선택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할아버지, 사실 저랑...”“딩.” 심미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려는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고개를 든 그녀는 곧장 부드러운 눈빛을 머금은 박유진과 눈이 마주쳤고 그 말은 다시 목구멍 깊숙이 삼켜졌다. “오빠, 여긴 어떻게 왔어?”박유진은 따뜻한 미소로 대답했다. “너 데리러 왔어.” 그리고 곧 예의를 갖춰 강준형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강준형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유진아, 너랑 미연이...?” 어딘가 모르게 다정해 보이는 둘의 분위기.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의심이 스쳤다.“할아버지, 제가 차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심미연은 사실 내일 박유진과 혼인신고를 하러 갈 거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조금 전, 강준형이 ‘강지한과 다시 잘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던 말이 떠오르자 그 말을 도저히 꺼낼 수 없었다.‘말하지 말자. 괜히 말했다가 할아버지 마음만 상할 수도 있어.”그 순간, 박유진의 손이 저절로 움켜쥐어졌다. ‘할아버지한테
하지만 정작 온지유의 칼끝을 막나낸 사람은 그다지 친하다고 할 수 없었던 박시훈이었다. 심미연의 진지한 얼굴을 본 강준형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단박에 알아챘다. 더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그를 의자에 앉히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만 앉아 계세요. 옷만 갈아입고 금방 나올게요.” “그래. 다녀오너라.” 강준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냈다. 심미연이 등을 돌려 복도로 사라지자 그는 그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곁에 서 있던 가정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요즘 사모님이 예전보다 훨씬 더 예뻐지신 것 같아요. 성격도 훨씬 부드러워지셨고요. 만약 사모님이 도련님과 다시 재결합하신다면 어르신께서도 도련님 혼자 남을까 봐 걱정 안 하셔도 될 텐데요.” 강준형은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미연이가 돌아온다면 지한이도 지금처럼 외롭진 않겠지. 상미도 엄마 손길이 필요하고... 지한이가 아무리 잘 챙긴다 해도 아빠는 아빠일 뿐이지. 엄마처럼 섬세하긴 어렵잖니. 게다가 지한이는 이노하이브를 이끄는 입장이라 상미를 온전히 돌보기엔 시간도 턱없이 부족하고 말이다.” “나중에 사모님께 슬쩍 한번 말씀드려보시는 건 어떠세요?” 가정부는 늘 심미연을 좋게 봐왔다. 도련님과 이혼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요즘 세상에 외모, 인품, 성격, 효심까지 갖춘 여자를 다시 만나긴 정말 쉽지 않으니까. 강준형은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분위기 봐서 말해보지. 미연이가 듣기 싫어하면 더는 꺼내지 않을 거다.”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가정부도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심미연이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가시죠. 할아버지.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