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상미는 그 여자가 자신의 ‘엄마’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아이 역시 오빠의 엄마가 자신의 엄마가 되길 바랐다. 임지혜의 얼굴이 굳어지며 이를 악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강상미, 이 도움이 안 되는 녀석!’ 그녀는 나중에 강지한의 아내가 되면 그때 천천히 복수할 것을 다짐했다. 임혜자는 심태하를 바라보며 조용히 생각했다. ‘작은 도련님은 원래 말이 적지 않았나? 도련님을 볼 때마다 인사만 하고 다른 말은 하지 않던 아이였는데... 오늘 왜 이렇게 말을 많이 하지?’ ‘혹시 임지혜 씨가 마음에 들어서 엄마로 삼고 싶은 건 아닐까?’ ‘아이들은 보통 자기 엄마를 좋아하지 않나?’ ‘도대체 무슨 일이지?’ 심태하는 임혜자를 보며 말했다. “임 할머니, 동생 데리고 잠깐 나가서 놀아주세요. 저는 이모랑 얘기할게요.” 그의 목소리는 어리지만 의외로 단호하고 강한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임혜자는 본능적으로 거절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상하게도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오빠, 그 여자를 엄마라고 부르면 안 돼!” 강상미는 심태하가 엉뚱하게 임지혜를 엄마라고 부를까 봐 걱정하며 말했다. 심태하는 한 손으로 강상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오빠는 알아서 할게. 상미는 가서 놀아.” 그의 표정과 말투는 어린 아이답지 않게 예상외로 성숙하고 단호했다. 임혜자는 깜짝 놀라 잠시 멈칫했다. 수십 년간 강지한을 돌봐온 그녀는 눈앞의 심태하를 보고 순간적으로 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 닮았다는 걸 깨달았다. 정말로 너무 똑같았다. 강상미는 임지혜를 몰래 힐끗 쳐다보며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아이는 이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이 여자가 자신의 엄마가 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빠가 알아서 한다고 했으니 어쩔 수 없이 오빠를 믿기로 했다. 결국 강상미는 마지못해 임혜자를 따라 나갔다.곧 식당에는 임지혜와 심태하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이모, 앉으세요.”
“상미랑 태하가 같이 실종됐어.”전화기 너머로 남자의 저음이 들려왔고 심미연의 가슴은 마치 벼랑 끝에서 떨어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두 아이가 함께 실종되다니,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지금 어디야? 내가 데리러 갈게.” 강지한이 물었다. 심미연은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고개를 들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이럴 때일수록 반드시 차분해져야 했다. ‘지난번에도 태하가 납치당했을 때 내가 찾아냈잖아.’ ‘심며연, 정신 차려. 진정해!’ “너는 아이들을 찾아. 나는 신경 쓰지 마.”심미연은 말을 끝내고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핸드폰을 쥔 채 깊은 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임현이 그녀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변호사님, 무슨 일이에요?” 심미연은 급히 일어섰다. “태하가 실종됐어요. 오늘 재판은 임현 씨가 출석하세요. 제가 말한 대로만 하면 돼요.”그녀는 임현에게 당부하며 급히 밖으로 나갔다. 문을 나서자마자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태하가 실종됐어요. 핸드폰과 시계가 모두 수거돼서 위치 추적이 불가능해요. 위치 추적을 다시 시도하고 더 많은 인력을 투입해서 구출 작업을 진행하세요. 발견되는 대로 즉시 보고해주세요. 구출 작업은 반드시 안전하게 진행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보스.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심미연은 전화를 끊고 곧바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집에 돌아온 심미연은 급히 서재로 향했다. 컴퓨터를 켜고 심태하의 위치를 추적하기 위해 검색을 시작했다. 그때, 핸드폰에서 갑자기 메시지가 도착했다. 핸드폰 화면을 열어보니 익숙하지 않은 번호에서 문자 한 통이 와 있었다. 그 문자에는 두 글자, ‘DM’만이 적혀 있었다. 심미연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가슴을 움켜잡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심태하에게 위급한 상황일 때 이 신호를 보내라고 가르친 적이 있었다. 이 문자는 분명히 그 번호를 추적하라는 신호일 것이다.심미연은 확신이 들며 가슴이
“아빠, 나랑 오빠 데리고 여기서 나가줘요. 여기 너무 싫고 냄새도 나고 더러워요.” 강상미는 강지한의 목을 끌어안으며 투정했다. 눈에는 아직 붓기가 남아 있었다. 전에 너무 울어서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알았어.” 강지한은 담담한 표정으로 심태하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심태하, 이리 와. 나가고 얘기하자.” 그 모습은 매우 차분하고 자연스러웠다. 심태하의 감정이 매우 안정되어 보여서 큰 충격을 받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세 살짜리 아이가 아무리 강한 척 해도 속으로는 무서워하고 있었다. 심태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저는 당신이 데려가지 않아도 돼요. 당신은 그냥 당신 딸만 데려가세요.” 강지한이 그를 좋아하지 않으면 심태하도 굳이 그 사람의 사랑을 원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사람들이 충분히 사랑을 주고 있었으니까. “심태하, 오라고. 안 들리냐?” 강지한은 짜증을 섞어 말했다. ‘이 녀석이 겨우 세 살밖에 안 됐는데 왜 자꾸 나한테 도전하려 드는 거지?’ ‘정말 짜증 나 죽겠네.’ “저는 강 대표님과 가는 길이 달라요. 같이 가지 않을 거예요.” 심태하는 차갑고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걱정 마세요. 엄마가 오셔서 저를 데려갈 거예요.” 그는 엄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엄마는 분명 그의 의도를 이해할 거라고 확신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엄마가 와줄 것이라고 믿었다. 심태하는 엄마에 대한 신뢰가 확고했다. 강지한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심태하, 한마디 더 하면 바다에 던져버릴 거야.” 그는 화가 나서 일부러 심태하를 겁주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그러나 심태하는 그의 말에 눈물을 글썽이며 대답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제가 혼자 바다에 뛰어들게요. 제가 죽으면 그때는 엄마를 놔주세요. 엄마의 우울증이 겨우 나았는데 당신이 다시 엄마를 괴롭히면 병이 더 악화될 거예요. 엄마는 정말 불쌍해요.” 너무나도 영리한 아이였다. 그는 말을 마친 후 작은 발걸
지난번 문소영이 그에게 임지혜와 소개팅을 하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여자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그 여자는 강 대표님과 곧 결혼한다고 했어요. 그리고 우리가 그 여자의 행복을 방해해서 우리를 없애는 거라고 했어요.” 강지한은 그 말에 바로 반응했다. “그럴 리 없어.”그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럼 제 말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심태하의 맑고 투명한 눈이 강지한을 정통으로 바라봤다. 그 눈을 마주친 순간, 강지한은 자신도 모르게 말문이 막혔다. 그는 임지혜와는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여자와 결혼이라니, 불가능했다. 그리고 아이 때문에 그녀의 행복이 방해된다는 건 더 말이 안 되었다. “오빠, 여기로 와. 나 무서워...”강상미는 조그만 얼굴을 찡그리며 계속 심태하를 불렀다. 심태하는 웃으며 동생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오빠 여기 있어.” 강지한은 마음속의 불안을 억누르며 심태하를 쳐다봤다. “빨리 여기로 와. 그러면 아까 한 말은 없었던 걸로 해줄게.” 그는 심태하를 믿고 싶은 마음도 그렇다고 믿을 수 없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지금 그가 유일하게 생각하는 건 심태하를 자신에게 오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가 서 있는 바로 뒤에는 끝없이 펼쳐진 바다가 있었다. 아이는 한 걸음만 잘못 디디면 그대로 바다로 떨어질 수 있었다. 그 아이는 자신의 아들이었다. 그는 절대로 그 아이가 죽는 것을 지켜볼 수 없었다. “당신이 뭐라고 따져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제가 말한 건 다 사실이에요. 못 믿겠으면 이거 한 번 들어봐요. 녹음도 했어요.”심태하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강지한에게 던졌다. “여기 다 있어요. 직접 들어보세요. 제가 말한 대로라면 지금 당신이 하는 행동 후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그리고 아이는 몸을 한 번 휘둘러 바다로 뛰어들었다. 강지한은 급히 손을 뻗어 핸드폰을 잡으려 했고 그 순간 귀에 들려온 마지막
“강지한, 태하는? 우리 태하 못 봤어?” 거센 파도를 가르며 심미연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강지한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그의 뒤에 서 있던 성무진이 식은땀을 흘리며 안절부절못했다. ‘이제 어쩌지... 작은 도련님이 바다에 뛰어들었는데 이걸 심미연 씨한테 어떻게 말해?’ 심미연은 초조한 얼굴로 화물선에 뛰어올랐다. 쌓인 컨테이너를 하나씩 가뿐히 넘으며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발걸음 하나하나가 간절함과 불안으로 뒤섞여 있었다. 짭조름한 바닷바람이 거칠게 뺨을 스쳤다. 하지만 지금 그걸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그리고 곧 그녀는 강지한 앞에 섰다. 단 몇 걸음. 서로의 거친 숨소리까지 고스란히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심미연의 눈빛에는 초조함과 분노가 뜨겁게 타올랐다. 그 시선은 마치 강지한을 꿰뚫어 보기라도 할 듯 날카로웠다. 강지한은 그녀의 날 선 감정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무의식적으로 손을 움츠렸다. 그의 품에는 여전히 의식을 잃은 강상미가 안겨 있었다. 강지한의 목소리는 목구멍에서 뭉개지다 결국 잠긴 듯한 톤으로 힘겹게 흘러나왔다. “못 봤어. 지금 사람들 시켜서 찾고 있어. 상미가 기절했어. 일단 상미부터 병원으로 데려가야 해.”이 아이가 깨어나는 순간, 모든 게 들통 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아무리 숨기려 해도 진실은 드러날 수밖에 없다. 심미연의 눈에 순간적으로 숨겨진 고통이 스쳤다. 하지만 이내 단호한 표정으로 눈빛을 굳히고 강지한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이제는 그의 가슴에 닿을 듯 가까운 거리였다. “아이 내려놔. 내가 봐줄게.” 심미연은 한 치의 의심도 용납하지 않는 권위적인 목소리로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어 강상미를 받으려 했다. 강지한은 복잡한 마음이 교차하며 무의식적으로 강상미를 심미연에게 맡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강상미와 심미연을 같은 공간에 두어서는 안 되었다. 그 잔혹한 진실이 그녀 앞에 드러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저도 오빠 찾으러 갈 거예요.” 강상미는 오빠가 바다에 뛰어드는 모습만 계속 떠올리며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아픔이 밀려왔다. “상미야, 미안해.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어. 아줌마 먼저 가볼게.”심미연의 목소리는 날카로운 칼날처럼 주변의 침묵을 가르며 지나갔다. 차갑고 단호한 그녀의 목소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후회도 담기지 않았다.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녀는 급히 돌아서며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그 속도에 주변 사람들은 잠시 멍하니 서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미연아...” 강지한은 심미연의 이름을 부르며 입을 열려 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차가운 바람처럼 떨리며 식어갔다. 그의 눈에는 혼란스러운 감정들이 얽혀 있었다. 놀람, 갈망, 그리고 그 누구보다 깊은 고통이 교차하며 그의 마음을 짓눌렀다. 심미연은 그의 부름에 전혀 반응하지 않은 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녀는 결단력 있게 앞으로 나아갔다. 조금 더 멀어지자 그녀는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잠수할 사람 몇 명 보내. 지금 당장.” 말을 하면서도 그녀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고 점점 더 빨라졌다. 강지한은 심미연의 뒷모습이 점점 더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고통이 쿵쾅거렸다. 마치 누군가가 그의 심장을 움켜잡고 쥐어짜는 듯한 느낌이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그 고통은 점점 더 심해졌고 가슴 속에서 무엇인가가 터질 듯했다. “아빠, 우리도 빨리 오빠 찾아러 가요.” 그 순간, 강상미가 조용히 강지한에게 속삭였다. 강지한은 그 말을 듣고 정신을 차리며 급히 강상미를 안아 들고 화물선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성무진은 그 뒤를 조용히 따르며 아무 말 없이 따라갔다. 심미연은 한참을 걸어가다 멈춰 섰다. 그녀는 바다를 응시하며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무엇인가가 그녀의 심장을 짓누르는 듯한 아픔에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 고통
강지한의 시선이 성무진의 얼굴에 고정되며 의문을 담아 물었다. “뭔가 떠오른 거라도 있어?” ‘평소에 차분하던 애가 왜 이렇게 반응이 크지?’ 성무진은 그의 시선에 반사적으로 등을 곧게 펴며 눈빛 속의 결단력을 감추지 않았다. “그때도 심미연 씨가 바닷가에서 실종됐었잖아요. 대표님은 몇 달 동안 미친 듯이 찾아다녔고... 결국 4년이 지나서야 다시 돌아왔죠.” 강지한의 이마 근육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순간, 하나의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태하가 바다에 뛰어든 것도 누군가 의도적으로 꾸민 장면이라는 건가?’성무진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제 생각에는... 혹시 그날 작은 도련님이 진짜로 무슨 일도 당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요?’ 말을 하며 성무진은 끊임없이 강지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리고 그의 눈빛이 흔들리는 걸 보자 불안이 밀려왔다. ‘혹시 내가 선을 넘은 건가?’“일단 사람부터 찾아.” 강지한은 냉기가 서린 얼굴에도 불구하고 억눌린 감정을 애써 다잡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성무진의 말은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 심태하가 살아 있다는 확신이 들기 전까진, 직접 확인하기 전까진 단 한 순간도 방심해선 안 된다. “알겠습니다.”성무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삼켰다. 잠시 망설이다가 조십스럽게 물었다. “대표님, 이제 돌아가시죠?” 강지한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이대로 떠나면 마음이 불안해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럼 근처에 호텔이라도 잡을까요?”“그럴 필요 없어.” 강지한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심태하가 마음에 걸려선지 호텔에 가더라도 잠을 이룰 리 없었다. 오히려 뒤척이다 밤을 지샐 게 분명했다. “그럼...” 성무진이 말을 잇고자 하던 그때 강지한의 핸드폰이 울렸다. 짧은 진동음에 대화가 멈췄고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핸드폰으로 향했다. 강지한은 화면을 확인한 뒤 전화를 받았다. 그 순
심미연이 그 집에 다시 발을 들리는 순간, 문소영에게는 그것이 곧 파멸과 다름없었다. 그건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강지한은 냉소를 흘리며 차창 밖으로 깊고 검은 어둠을 바라봤다. 손끝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고 하얗게 질린 손등이 그의 감정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의 눈빛엔 얼어붙은 겨울처럼 차가운 냉기가 서려 있었다.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드는 차디찬 눈이었다. “허락 못 해? 당신이 감히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목소리는 낮았지만 날이 서 있었다. 한 마디, 한 마디 이를 악문 틈 사이로 날아드는 듯한 위협감이 있었다. “그리고 내 일에 참견하지 마세요. 당신 일이나 똑바로 하시고.” 문소영의 얼굴은 분노로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 속에서 뜨겁고 불같은 분노가 치솟았다. “강지한, 난 네 어머니야.” 목소리는 떨렸지만 그 속엔 억울함과 분노가 짙게 배어 있었다. 강지한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 속엔 따뜻함은 눈곱만큼도 없었고 오직 얼음처럼 차가운 냉기가 가득했다. 그의 눈빛은 한순간 날카로운 살기로 번뜩였다. 그 시선은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버릴 것처럼 차가운 칼날 같았다. “내 어머니는...” 그는 잠시 침묵을 깨고 단호하고 냉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미 누군가에게 잔인하게 죽임을 당했어.” 한 마디 한 마디가 마치 칼끝처럼 날카롭고 심장을 찌르는 고통과 증오로 가득했다. 그 말에 문소영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전화 너머로도 강지한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그 서슬 퍼런 기운에 온몸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린 문소영은 심장이 차갑게 식어가는 걸 느꼈다. 강지한은 여전히 앞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앞엔 어머니의 미소와 마지막 모습이 겹쳐 떠올랐다. 그 끔찍한 장면은 마치 반복 재생되는 영화를 보는 것처럼 그의 가슴을 계속해서 후벼팠다. “내 어머니의 죽음, 난 끝까지 파헤칠 거야.” 강지한은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
박유진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빛이 그녀를 감쌌고 낮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말해 봐.” 심미연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과 마주친 순간, 마음 한켠에서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마치 오래도록 감춰온 비밀이 이제야 드러날 것만 같은 예감처럼. “왜 그래, 미연아?” 박유진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따뜻했다. 그녀의 불안을 감싸 안으려는 듯 아주 섬세하게 묻는 말이었다. 심미연은 입을 열 듯 말 듯 망설였다. 떨리는 입술이 달싹이기만 할 뿐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끌어올리고 있는 건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던 진실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결심한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강지한의 딸, 강상미. 들어본 적 있지?” 박유진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아이가 왜?” 툭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그의 마음속에 조용한 파문이 일었다. ‘미연이랑 강지한의 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 지금에서야 그 아이를 말하는 걸까.’ 심미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짐하듯 눈을 감았다가 뜨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실 예전에 내가 잃어버린 내 딸... 그 애는 세상을 떠난 게 아니었어.” 그 말 한마디를 꺼내기 위해 그녀는 거의 모든 용기를 다 쏟아부었다. “정말이야?” 박유진의 목소리는 놀라움에 젖어 있었다.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그때 너 분명히 말했잖아. 아이 숨 안 쉬고 있었다고. 직접 확인했었잖아... 확신했었어.” 그 순간, 박유진의 머릿속을 스친 단 하나의 가능성. ‘설마... 지금 미연이가 말하려는 게... 그 아이가 강상미라는 말이야?’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껏 맞춰지지 않던 조각들이 하나로 이어지고 복잡하게 얽혔던 퍼즐이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박유진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손끝이 얼어붙고
박시훈은 눈을 깜빡이며 바로 앞에 있는 얼굴을 바라봤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있을 수가 있지?’ 심장이 터질 듯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심장 박동이 너무 빠른데요? 정상은 아닌 것 같네요.” 심미연은 이마를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박시훈은 민망해서 땅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왜 비정상이야... 완전 정상이거든...’ 심미연은 아무렇지 않게 그의 상처를 확인했다. 상처는 붉게 부어 있었고 피도 조금 배어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약을 꺼내 상처 위에 다시 발라주었다. 상처는 쓰라렸지만 박시훈은 이 순간이 영원히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곁에 있는 지금이 너무도 소중했다. 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상처를 감싸고 도구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마무리를 한 뒤 장갑을 벗으며 병실을 나갈 준비를 했다. “저... 방금 야식 시켜놨는데... 같이 먹고 가주면 안 돼요?” 박시훈은 괜히 목이 메여 말끝이 흐려졌다. 자신이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었다니, 스스로도 놀라웠다. ‘내가 왜 이 사람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거야...’ “저는 밤에 야식 먹는 습관 없어요.” 심미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야식 너무 자주 먹지 마요. 건강에 안 좋아요. 전 이만 갈게요. 야식 먹고 푹 쉬세요.” 그녀의 말에 박시훈은 마치 한겨울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얼어붙었다. 심지어 발끝까지 저릿했다. 그녀가 간다. 그를 남겨두고 그냥 떠나버린다. 속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심미연은 이미 등을 돌린 채 병실을 나서고 있었고 박시훈의 낙담한 얼굴은 그녀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병실을 벗어난 심미연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깊게 숨을 들이켰다. 몇 시간째 이어진 수술에, 온몸이 녹초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강지한을 살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로비로 걸어 나왔을 때 문 앞에 서 있는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심미연의 시선이 하얗게 눈처럼 샌 강준형의 머리카락에 머물렀다. 가슴 어딘가가 저릿하게 아려왔다. 만약 시간이 되돌릴 수 있다면. 그저 아무 걱정 없이 웃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땐 주저 없이 말했을 것이다. ‘네. 할게요.’그때 그녀는 강지한을 사랑했고 그의 가족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강지한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강준형이 걱정된다고 해서 그 바람을 무조건 들어줘야 할 이유도 없었다. 곁에서 조용히 그녀를 훔쳐보던 가정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모님은 역시 마음이 떠나신 거구나...’ ‘이러다 어르신 또 며칠을 우울하게 보내시겠네...’강준형도 그녀의 침묵에서 모든 걸 느낄 수 있었다. 인연이란 게 억지로 붙잡는다고 이어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비록 아쉬움은 남지만 그 역시 그녀의 선택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할아버지, 사실 저랑...”“딩.” 심미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려는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고개를 든 그녀는 곧장 부드러운 눈빛을 머금은 박유진과 눈이 마주쳤고 그 말은 다시 목구멍 깊숙이 삼켜졌다. “오빠, 여긴 어떻게 왔어?”박유진은 따뜻한 미소로 대답했다. “너 데리러 왔어.” 그리고 곧 예의를 갖춰 강준형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강준형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유진아, 너랑 미연이...?” 어딘가 모르게 다정해 보이는 둘의 분위기.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의심이 스쳤다.“할아버지, 제가 차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심미연은 사실 내일 박유진과 혼인신고를 하러 갈 거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조금 전, 강준형이 ‘강지한과 다시 잘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던 말이 떠오르자 그 말을 도저히 꺼낼 수 없었다.‘말하지 말자. 괜히 말했다가 할아버지 마음만 상할 수도 있어.”그 순간, 박유진의 손이 저절로 움켜쥐어졌다. ‘할아버지한테
하지만 정작 온지유의 칼끝을 막나낸 사람은 그다지 친하다고 할 수 없었던 박시훈이었다. 심미연의 진지한 얼굴을 본 강준형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단박에 알아챘다. 더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그를 의자에 앉히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만 앉아 계세요. 옷만 갈아입고 금방 나올게요.” “그래. 다녀오너라.” 강준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냈다. 심미연이 등을 돌려 복도로 사라지자 그는 그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곁에 서 있던 가정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요즘 사모님이 예전보다 훨씬 더 예뻐지신 것 같아요. 성격도 훨씬 부드러워지셨고요. 만약 사모님이 도련님과 다시 재결합하신다면 어르신께서도 도련님 혼자 남을까 봐 걱정 안 하셔도 될 텐데요.” 강준형은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미연이가 돌아온다면 지한이도 지금처럼 외롭진 않겠지. 상미도 엄마 손길이 필요하고... 지한이가 아무리 잘 챙긴다 해도 아빠는 아빠일 뿐이지. 엄마처럼 섬세하긴 어렵잖니. 게다가 지한이는 이노하이브를 이끄는 입장이라 상미를 온전히 돌보기엔 시간도 턱없이 부족하고 말이다.” “나중에 사모님께 슬쩍 한번 말씀드려보시는 건 어떠세요?” 가정부는 늘 심미연을 좋게 봐왔다. 도련님과 이혼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요즘 세상에 외모, 인품, 성격, 효심까지 갖춘 여자를 다시 만나긴 정말 쉽지 않으니까. 강준형은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분위기 봐서 말해보지. 미연이가 듣기 싫어하면 더는 꺼내지 않을 거다.”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가정부도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심미연이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가시죠. 할아버지.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
박시훈은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수술복을 입은 심미연을 단번에 알아봤다.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그녀의 맑고 빛나는 눈동자는 도저히 다른 사람과 헷갈릴 수 없는 것이었다. “날 좀 밀어줘.” 박시훈이 간병인에게 다급히 말했다. 간병인은 곧장 그의 휠체어를 밀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 뒤를 이어 강준형도 하인들의 부축을 받으며 심미연 쪽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미연아, 상황이 어때?” 강준형의 목소리엔 감추지 못한 초조함이 담겨 있었다. 그때 박시훈의 시선이 다시금 심미연에게로 향했다. “당신 의사예요?”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나직이 말했다. 세계 최고 해커, 그리고 의사. 그녀가 가진 아우라는 더없이 눈부셨다. 박시훈은 점점 더 그녀에게 빠져들고 있었다. “상태가 조금 위중해요. 지금은 언제 깨어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어요.” 심미연이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생명엔 지장이 없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강준형이 가장 궁금해할 말이었다. 그녀는 그걸 알고 있었고 일부러 마지막 문장을 강조했다. “그래... 다행이구나.” 강준형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심미연의 손을 꼭 잡았다. “미연아, 정말 고맙다. 수고 많았어.” 심미연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별 말씀을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어요.” 강지한은 그녀를 구해준 적이 있다. 이제 그녀가 그를 구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했다. “할아버지, 강지한이 깨어나면 병원에서 바로 연락드릴 거예요. 지금은 먼저 집에 가 계세요.” 심미연은 그의 머리 위로 보이는 은빛 머리카락을 보며 괜스레 마음 한구석이 시려왔다. 몇 년 만에 다시 본 강준형은 이전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였다. 그는 여전히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미연아, 혹시 아이 좀 데려와서 나한테 보여줄 수 있겠니?” 그는 줄곧 강지한이 그녀와 아이를 데리고 집에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도 그
심미연은 순간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강지한은 자신을 구하려다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그 순간, 이지연이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누군가 보스를 죽이려고 해요.’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오늘 밤 그 대형 교통사고는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대형 트럭을 이용해 그녀를 노렸고 때마침 강지한의 차량이 그 사이에 끼어들면서 그가 대신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게다가 차량이 폭발했다면 강지한이 그 안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생사조차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미연아?” 말이 없던 심미연을 걱정한 강준형이 다급하게 그녀를 불렀다. 전화를 끊은 줄 알고 불안해졌는지 목소리엔 떨림이 섞여 있었다. “지금 바로 갈게요. 걱정 마세요. 할아버지. 제가 꼭 강지한 살려낼게요.” 심미연은 단호하게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을 꼭 쥔 채 깊게 숨을 들이마신 그녀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장 안으로 들어가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핸드백과 폰을 챙겨 계단을 내려섰다. 그녀는 몰랐다. 서재 문 앞에 조용히 서 있던 박유진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박유진의 눈빛은 텅 빈 허공을 떠돌 듯 쓸쓸했다. 그녀가 향하는 곳이 누구인지,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가야만 했다. 강지한이 목숨을 걸고 그녀를 지켰다면 그녀는 그를 외면할 수 없었다. 아마 오늘 구청이 문을 열었더라도 심미연은 박유진과 그곳에 가지 못했을 것이다. 박유진은 마음이 아프지 않은 척 조용히 스스로를 다독였다. ‘괜찮아. 당연한 거야. 나라도 갔을 거야.’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그건 위로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을 속이는 자기합리화에 불과했다. 잠시 후, 그는 조용히 서재로 돌아가 문을 닫았다.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켰지만 화면 속 글자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엔 오직 한 사람, 심미연. 지금 그 순간에도 그녀만이 그의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
‘강 할아버지’라는 이름이 핸드폰 화면에 뜨는 순간, 박유진의 눈빛이 잠시 어두워졌다. 강지한의 할아버지.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는 건 분명 강지한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강지한이 심미연을 구하려다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을. 그래서 그녀가 당연히 그를 찾아갈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미연아, 갑자기 급한 회의가 생각났어. 먼저 전화 받아. 난 서재에서 회의 좀 하고 있을게.” 박유진의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고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 또한 신중했다. 마치 그녀의 마음을 흔들지 않기 위해 최대한 조심스레 말하려 애쓰는 듯했다. 심미연은 정신을 가다듬고 고개를 들었다. “응. 다녀와. 나도 통화 좀 할게.” 박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녀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통화 끝나면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푹 쉬어. 알았지?” “응. 오빠도 회의 끝나고 푹 쉬어.” 심미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박유진은 언제나 그녀에게 따뜻하고 세심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몇 번이나 외면하고 져버렸다. 그래서 더 미안했다. “그럼 난 먼저 갈게.” 그는 그녀의 체온을 놓치기 아쉬운 듯 한동안 손끝을 망설였지만 결국 손을 놓고 조용히 자리를 떴다. 예전에 박유진의 어머니는 그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미연이와 결혼하고 싶다면 그 아이를 절대 놓치지 마라.’ 하지만 만약... 심미연이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녀가 원하지 않는 선택을 강요하는 건 박유진이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불편해하거나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그에겐 견딜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서재 문이 조용히 닫히자 심미연은 곧장 안방으로 향했다. 소파에 앉자마자 아까 걸려온 전화를 다시 눌러 받았다. “미연아, 나야. 혹시 내가 깨운 건 아니지? 이렇게 늦은 시간에 전화해서 미안하구나.” 강준형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지쳐 있었고 그 안엔
강지한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 박시훈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뉴스 봤어. 네 카이엔이 폭발했다길래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네가 무사하니까 이제야 좀 안심이 된다.” “그 대형 트럭, 당장 확인해. 전부 조사하고 운전자는 반드시 찾아.” “알겠어. 지금 바로 확인해볼게.” 순식간에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박시훈의 표정도 금세 굳어졌다. “조금만 기다려. 바로 연락할게.” “응. 최대한 빨리.” 강지한은 단호하게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와 동시에 눈앞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마치 깊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편, 심미연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곧장 2층 서재로 향했다. 노크를 하려던 순간, 가방 안에서 핸드폰이 진동을 울렸다. 잠시 망설인 끝에 그녀는 전화를 먼저 받았다. “보스, 큰일 났어요. 누가 보스를 죽이려고 해요.” 이지연의 다급한 목소리가 그대로 귀에 박혔다. 심미연의 머릿속엔 낮에 있었던 사고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그 대형 트럭. 정말 자신을 노리고 달려든 게 맞았던 거다. 만약 그 카이엔이 없었다면 지금쯤 자신은 이 세상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지연 씨, 천천히 말해봐요.” 심미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최대한 침착하게 반응했다. ‘도대체 누가 날 죽이려는 거지?’ ‘온지유?’ 하지만 그럴 리 없었다. 온지유는 지금 그녀 손에 있고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상태다. “저도 방금 들었어요. 육현성 씨가 누군가랑 통화한 녹음이 있었는데 거기서 보스를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어요.”이지연은 숨도 고르지 못한 채 말을 쏟아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아봤어요?” 육현성이 자신을 증오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온지유까지 그녀 손에 있는 상황이니 원한을 품었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하지만 이지연이 말한 그 목소리는 육현성이 아니었다. 그게 더 혼란스러웠다. ‘그렇다면... 대체 누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