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혜자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세 살짜리 아이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강씨 가문에서 강상미가 다른 아이들보다 똑똑하다고 느꼈던 그녀는 지금 심태하를 보며 그가 훨씬 더 뛰어난 아이임을 알게 되었다. 역시 도련님과 사모님의 자식답게 좋은 유전자를 물려받은 아이들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 할머니, 왜 서 계세요? 빨리 가세요.” 심태하는 낮은 목소리로 재촉했다. 임혜자는 정신을 차리고 급히 대답했다. “네. 지금 가요.” 그녀는 말을 마친 후 서둘러 식당을 나갔다. 심태하는 핸드폰을 꺼내 몰래 메시지를 하나 보낸 뒤 다시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얌전히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했다. 임혜자는 임지혜를 따라 들어오며 그 장면을 보고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 그림 속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예쁜 아이가 식탁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다. 그 모습은 아주 귀엽고 사랑스러웠으며 마치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처럼 느껴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그 아이를 좋아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강상미는 임혜자의 손을 잡고 들어왔고 오빠가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 것을 보고는 급히 임혜자의 손을 뿌리치며 심태하에게 달려갔다. “오빠, 나도 먹여줘.” 아이는 식탁 옆에 서서 작은 입을 벌리며 큰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 모습은 정말 귀여웠다. 심태하는 샌드위치를 동생의 입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자, 먹어.” 그 순간, 임지혜는 심태하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 아이는 도대체 누구지?’ ‘강지한과 너무 닮았잖아?’ 임지혜는 잠시 놀란 후 불쾌한 감정이 밀려왔다. 그녀는 아침 일찍 쇼핑몰에 가서 장난감도 사고 예쁜 옷도 샀으며 한 시간 넘게 차를 타고 왔다. 강지한과 결혼하려면 강상미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했기에 애써 잘해보려 했지만 강상미는 전혀 마음을 열지 않아 그녀는 점점 화가 났다. 그런데 이제 심태하까지 나타나니 더욱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강상미는 그 여자가 자신의 ‘엄마’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아이 역시 오빠의 엄마가 자신의 엄마가 되길 바랐다. 임지혜의 얼굴이 굳어지며 이를 악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강상미, 이 도움이 안 되는 녀석!’ 그녀는 나중에 강지한의 아내가 되면 그때 천천히 복수할 것을 다짐했다. 임혜자는 심태하를 바라보며 조용히 생각했다. ‘작은 도련님은 원래 말이 적지 않았나? 도련님을 볼 때마다 인사만 하고 다른 말은 하지 않던 아이였는데... 오늘 왜 이렇게 말을 많이 하지?’ ‘혹시 임지혜 씨가 마음에 들어서 엄마로 삼고 싶은 건 아닐까?’ ‘아이들은 보통 자기 엄마를 좋아하지 않나?’ ‘도대체 무슨 일이지?’ 심태하는 임혜자를 보며 말했다. “임 할머니, 동생 데리고 잠깐 나가서 놀아주세요. 저는 이모랑 얘기할게요.” 그의 목소리는 어리지만 의외로 단호하고 강한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임혜자는 본능적으로 거절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상하게도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오빠, 그 여자를 엄마라고 부르면 안 돼!” 강상미는 심태하가 엉뚱하게 임지혜를 엄마라고 부를까 봐 걱정하며 말했다. 심태하는 한 손으로 강상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오빠는 알아서 할게. 상미는 가서 놀아.” 그의 표정과 말투는 어린 아이답지 않게 예상외로 성숙하고 단호했다. 임혜자는 깜짝 놀라 잠시 멈칫했다. 수십 년간 강지한을 돌봐온 그녀는 눈앞의 심태하를 보고 순간적으로 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 닮았다는 걸 깨달았다. 정말로 너무 똑같았다. 강상미는 임지혜를 몰래 힐끗 쳐다보며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아이는 이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이 여자가 자신의 엄마가 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빠가 알아서 한다고 했으니 어쩔 수 없이 오빠를 믿기로 했다. 결국 강상미는 마지못해 임혜자를 따라 나갔다.곧 식당에는 임지혜와 심태하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이모, 앉으세요.”
“상미랑 태하가 같이 실종됐어.”전화기 너머로 남자의 저음이 들려왔고 심미연의 가슴은 마치 벼랑 끝에서 떨어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두 아이가 함께 실종되다니,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지금 어디야? 내가 데리러 갈게.” 강지한이 물었다. 심미연은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고개를 들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이럴 때일수록 반드시 차분해져야 했다. ‘지난번에도 태하가 납치당했을 때 내가 찾아냈잖아.’ ‘심며연, 정신 차려. 진정해!’ “너는 아이들을 찾아. 나는 신경 쓰지 마.”심미연은 말을 끝내고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핸드폰을 쥔 채 깊은 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임현이 그녀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변호사님, 무슨 일이에요?” 심미연은 급히 일어섰다. “태하가 실종됐어요. 오늘 재판은 임현 씨가 출석하세요. 제가 말한 대로만 하면 돼요.”그녀는 임현에게 당부하며 급히 밖으로 나갔다. 문을 나서자마자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태하가 실종됐어요. 핸드폰과 시계가 모두 수거돼서 위치 추적이 불가능해요. 위치 추적을 다시 시도하고 더 많은 인력을 투입해서 구출 작업을 진행하세요. 발견되는 대로 즉시 보고해주세요. 구출 작업은 반드시 안전하게 진행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보스.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심미연은 전화를 끊고 곧바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집에 돌아온 심미연은 급히 서재로 향했다. 컴퓨터를 켜고 심태하의 위치를 추적하기 위해 검색을 시작했다. 그때, 핸드폰에서 갑자기 메시지가 도착했다. 핸드폰 화면을 열어보니 익숙하지 않은 번호에서 문자 한 통이 와 있었다. 그 문자에는 두 글자, ‘DM’만이 적혀 있었다. 심미연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가슴을 움켜잡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심태하에게 위급한 상황일 때 이 신호를 보내라고 가르친 적이 있었다. 이 문자는 분명히 그 번호를 추적하라는 신호일 것이다.심미연은 확신이 들며 가슴이
“아빠, 나랑 오빠 데리고 여기서 나가줘요. 여기 너무 싫고 냄새도 나고 더러워요.” 강상미는 강지한의 목을 끌어안으며 투정했다. 눈에는 아직 붓기가 남아 있었다. 전에 너무 울어서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알았어.” 강지한은 담담한 표정으로 심태하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심태하, 이리 와. 나가고 얘기하자.” 그 모습은 매우 차분하고 자연스러웠다. 심태하의 감정이 매우 안정되어 보여서 큰 충격을 받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세 살짜리 아이가 아무리 강한 척 해도 속으로는 무서워하고 있었다. 심태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저는 당신이 데려가지 않아도 돼요. 당신은 그냥 당신 딸만 데려가세요.” 강지한이 그를 좋아하지 않으면 심태하도 굳이 그 사람의 사랑을 원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사람들이 충분히 사랑을 주고 있었으니까. “심태하, 오라고. 안 들리냐?” 강지한은 짜증을 섞어 말했다. ‘이 녀석이 겨우 세 살밖에 안 됐는데 왜 자꾸 나한테 도전하려 드는 거지?’ ‘정말 짜증 나 죽겠네.’ “저는 강 대표님과 가는 길이 달라요. 같이 가지 않을 거예요.” 심태하는 차갑고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걱정 마세요. 엄마가 오셔서 저를 데려갈 거예요.” 그는 엄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엄마는 분명 그의 의도를 이해할 거라고 확신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엄마가 와줄 것이라고 믿었다. 심태하는 엄마에 대한 신뢰가 확고했다. 강지한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심태하, 한마디 더 하면 바다에 던져버릴 거야.” 그는 화가 나서 일부러 심태하를 겁주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그러나 심태하는 그의 말에 눈물을 글썽이며 대답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제가 혼자 바다에 뛰어들게요. 제가 죽으면 그때는 엄마를 놔주세요. 엄마의 우울증이 겨우 나았는데 당신이 다시 엄마를 괴롭히면 병이 더 악화될 거예요. 엄마는 정말 불쌍해요.” 너무나도 영리한 아이였다. 그는 말을 마친 후 작은 발걸
지난번 문소영이 그에게 임지혜와 소개팅을 하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여자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그 여자는 강 대표님과 곧 결혼한다고 했어요. 그리고 우리가 그 여자의 행복을 방해해서 우리를 없애는 거라고 했어요.” 강지한은 그 말에 바로 반응했다. “그럴 리 없어.”그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럼 제 말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심태하의 맑고 투명한 눈이 강지한을 정통으로 바라봤다. 그 눈을 마주친 순간, 강지한은 자신도 모르게 말문이 막혔다. 그는 임지혜와는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여자와 결혼이라니, 불가능했다. 그리고 아이 때문에 그녀의 행복이 방해된다는 건 더 말이 안 되었다. “오빠, 여기로 와. 나 무서워...”강상미는 조그만 얼굴을 찡그리며 계속 심태하를 불렀다. 심태하는 웃으며 동생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오빠 여기 있어.” 강지한은 마음속의 불안을 억누르며 심태하를 쳐다봤다. “빨리 여기로 와. 그러면 아까 한 말은 없었던 걸로 해줄게.” 그는 심태하를 믿고 싶은 마음도 그렇다고 믿을 수 없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지금 그가 유일하게 생각하는 건 심태하를 자신에게 오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가 서 있는 바로 뒤에는 끝없이 펼쳐진 바다가 있었다. 아이는 한 걸음만 잘못 디디면 그대로 바다로 떨어질 수 있었다. 그 아이는 자신의 아들이었다. 그는 절대로 그 아이가 죽는 것을 지켜볼 수 없었다. “당신이 뭐라고 따져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제가 말한 건 다 사실이에요. 못 믿겠으면 이거 한 번 들어봐요. 녹음도 했어요.”심태하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강지한에게 던졌다. “여기 다 있어요. 직접 들어보세요. 제가 말한 대로라면 지금 당신이 하는 행동 후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그리고 아이는 몸을 한 번 휘둘러 바다로 뛰어들었다. 강지한은 급히 손을 뻗어 핸드폰을 잡으려 했고 그 순간 귀에 들려온 마지막
“강지한, 태하는? 우리 태하 못 봤어?” 거센 파도를 가르며 심미연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강지한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그의 뒤에 서 있던 성무진이 식은땀을 흘리며 안절부절못했다. ‘이제 어쩌지... 작은 도련님이 바다에 뛰어들었는데 이걸 심미연 씨한테 어떻게 말해?’ 심미연은 초조한 얼굴로 화물선에 뛰어올랐다. 쌓인 컨테이너를 하나씩 가뿐히 넘으며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발걸음 하나하나가 간절함과 불안으로 뒤섞여 있었다. 짭조름한 바닷바람이 거칠게 뺨을 스쳤다. 하지만 지금 그걸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그리고 곧 그녀는 강지한 앞에 섰다. 단 몇 걸음. 서로의 거친 숨소리까지 고스란히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심미연의 눈빛에는 초조함과 분노가 뜨겁게 타올랐다. 그 시선은 마치 강지한을 꿰뚫어 보기라도 할 듯 날카로웠다. 강지한은 그녀의 날 선 감정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무의식적으로 손을 움츠렸다. 그의 품에는 여전히 의식을 잃은 강상미가 안겨 있었다. 강지한의 목소리는 목구멍에서 뭉개지다 결국 잠긴 듯한 톤으로 힘겹게 흘러나왔다. “못 봤어. 지금 사람들 시켜서 찾고 있어. 상미가 기절했어. 일단 상미부터 병원으로 데려가야 해.”이 아이가 깨어나는 순간, 모든 게 들통 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아무리 숨기려 해도 진실은 드러날 수밖에 없다. 심미연의 눈에 순간적으로 숨겨진 고통이 스쳤다. 하지만 이내 단호한 표정으로 눈빛을 굳히고 강지한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이제는 그의 가슴에 닿을 듯 가까운 거리였다. “아이 내려놔. 내가 봐줄게.” 심미연은 한 치의 의심도 용납하지 않는 권위적인 목소리로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어 강상미를 받으려 했다. 강지한은 복잡한 마음이 교차하며 무의식적으로 강상미를 심미연에게 맡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강상미와 심미연을 같은 공간에 두어서는 안 되었다. 그 잔혹한 진실이 그녀 앞에 드러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저도 오빠 찾으러 갈 거예요.” 강상미는 오빠가 바다에 뛰어드는 모습만 계속 떠올리며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아픔이 밀려왔다. “상미야, 미안해.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어. 아줌마 먼저 가볼게.”심미연의 목소리는 날카로운 칼날처럼 주변의 침묵을 가르며 지나갔다. 차갑고 단호한 그녀의 목소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후회도 담기지 않았다.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녀는 급히 돌아서며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그 속도에 주변 사람들은 잠시 멍하니 서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미연아...” 강지한은 심미연의 이름을 부르며 입을 열려 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차가운 바람처럼 떨리며 식어갔다. 그의 눈에는 혼란스러운 감정들이 얽혀 있었다. 놀람, 갈망, 그리고 그 누구보다 깊은 고통이 교차하며 그의 마음을 짓눌렀다. 심미연은 그의 부름에 전혀 반응하지 않은 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녀는 결단력 있게 앞으로 나아갔다. 조금 더 멀어지자 그녀는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잠수할 사람 몇 명 보내. 지금 당장.” 말을 하면서도 그녀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고 점점 더 빨라졌다. 강지한은 심미연의 뒷모습이 점점 더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고통이 쿵쾅거렸다. 마치 누군가가 그의 심장을 움켜잡고 쥐어짜는 듯한 느낌이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그 고통은 점점 더 심해졌고 가슴 속에서 무엇인가가 터질 듯했다. “아빠, 우리도 빨리 오빠 찾아러 가요.” 그 순간, 강상미가 조용히 강지한에게 속삭였다. 강지한은 그 말을 듣고 정신을 차리며 급히 강상미를 안아 들고 화물선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성무진은 그 뒤를 조용히 따르며 아무 말 없이 따라갔다. 심미연은 한참을 걸어가다 멈춰 섰다. 그녀는 바다를 응시하며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무엇인가가 그녀의 심장을 짓누르는 듯한 아픔에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 고통
강지한의 시선이 성무진의 얼굴에 고정되며 의문을 담아 물었다. “뭔가 떠오른 거라도 있어?” ‘평소에 차분하던 애가 왜 이렇게 반응이 크지?’ 성무진은 그의 시선에 반사적으로 등을 곧게 펴며 눈빛 속의 결단력을 감추지 않았다. “그때도 심미연 씨가 바닷가에서 실종됐었잖아요. 대표님은 몇 달 동안 미친 듯이 찾아다녔고... 결국 4년이 지나서야 다시 돌아왔죠.” 강지한의 이마 근육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순간, 하나의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태하가 바다에 뛰어든 것도 누군가 의도적으로 꾸민 장면이라는 건가?’성무진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제 생각에는... 혹시 그날 작은 도련님이 진짜로 무슨 일도 당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요?’ 말을 하며 성무진은 끊임없이 강지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리고 그의 눈빛이 흔들리는 걸 보자 불안이 밀려왔다. ‘혹시 내가 선을 넘은 건가?’“일단 사람부터 찾아.” 강지한은 냉기가 서린 얼굴에도 불구하고 억눌린 감정을 애써 다잡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성무진의 말은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 심태하가 살아 있다는 확신이 들기 전까진, 직접 확인하기 전까진 단 한 순간도 방심해선 안 된다. “알겠습니다.”성무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삼켰다. 잠시 망설이다가 조십스럽게 물었다. “대표님, 이제 돌아가시죠?” 강지한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이대로 떠나면 마음이 불안해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럼 근처에 호텔이라도 잡을까요?”“그럴 필요 없어.” 강지한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심태하가 마음에 걸려선지 호텔에 가더라도 잠을 이룰 리 없었다. 오히려 뒤척이다 밤을 지샐 게 분명했다. “그럼...” 성무진이 말을 잇고자 하던 그때 강지한의 핸드폰이 울렸다. 짧은 진동음에 대화가 멈췄고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핸드폰으로 향했다. 강지한은 화면을 확인한 뒤 전화를 받았다. 그 순
나민희는 원래 진운혁을 제거하기 위해 강혁승이 이용했던 사람인데 진운혁은 운이 좋아 결국 살아남았다.그동안 강혁승은 수많은 사람을 죽였고 손에 묻은 피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심미연은 재빨리 진운혁의 팔을 잡고 속삭였다.“스승님...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에요?”그녀는 어렵게 진실을 밝혀냈고 이제 막 행동에 나서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관련자들이 하나둘씩 다 경찰에 붙잡히고 있었다.온지유는 경찰을 보자마자 얼굴이 하얘져 그대로 병실 밖으로 도망쳤다. 그러자 심미연은 고민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뒤쫓기 시작했다.이번엔 절대 놓치면 안 된다. 온지유는 반드시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심미연은 이번엔 진짜로 끝장을 내고 싶었다.온지유는 너무 급하게 달리다가 결국 도로 한가운데로 갔고 차에 치여 그대로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 심미연이 헐레벌떡 달려갔을 때 온지유는 간신히 숨만 붙어 있는 상태였다.심미연을 본 온지유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한 자 한 자 말하기 시작했다.“나... 절대... 너한테... 안 져...”심미연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이미 졌어. 아주 오래전에.”온지유는 눈을 크게 뜨고 억울함을 품은 채 숨을 거두었다. 말 그대로 눈을 감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그 뒤를 쫓아온 육현성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바닥에 쓰러진 온지유를 보자 미친 사람처럼 달려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지유야, 괜찮아! 너 안 죽어. 내가 바로 응급실로 데려갈게!”심미연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동안의 일들이 머릿속에서 필름처럼 스쳐 지나갔다.온지유는 결국 강지한에 대한 집착 때문에 모든 걸 망쳤지만 다행히 그녀는 그 지옥에서 일찍 빠져나왔다.“왜 이러고 서 있어? 날씨도 더운데.”뒤에서 부드럽고 따뜻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미연이 화들짝 놀라며 돌아보니 박유진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엔 깊은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오빠, 진성에 있는 거 아니었어? 여긴 어쩐 일
강지한은 오늘 이 자리에서 모든 장애물을 치워버리면 이제는 심미연과 함께 평온하게 살 수 있을 것이고 아무도 그들을 방해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심미연은 강지한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강지한,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설마 그도 그녀처럼 모든 진실을 파헤친 걸까?‘아니,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하지만 강지한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다 보면 알 거야.”설명은 하지 않겠다는 그의 담담한 말투가 더 무서웠다.심미연은 그를 노려보았고 입을 열기도 전에 갑자기 끔찍한 비명이 울렸다.“아아악!”고개를 확 돌린 그녀는 강혁승이 온지유의 머리채를 거칠게 휘어잡은 장면을 목격했다. 원래도 험악했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져 거의 괴물처럼 보일 지경이었다.“이 자식, 당장 그 손 놔!”육현성이 달려와 주먹을 날렸지만 그의 형편없는 싸움 실력으로는 역부족이었고 그는 주먹을 몇 번 주고받다가 땅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병실은 곧 아수라장이 됐고 심미연은 본능적으로 강지한 쪽을 흘끗 쳐다봤다. 놀랍게도 그는 여전히 평온했다. 마치 모든 걸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그 순간 병실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 하나가 또 들어섰다. 심미연은 숨이 멎는 듯한 충격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전속력으로 달려갔다.“스승님! 여기엔 어쩐 일이세요!”그녀는 진운혁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저... 정말 스승님 맞으세요?”진운혁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나야.”심미연은 결국 참았던 감정이 터져 소리 내 울었다.“다시는 못 뵐 줄 알았어요...”“바보 같은 녀석, 울지 마. 너한테 전할 말이 있어.”그 말에 심미연은 재빨리 눈물을 닦았다.“말씀하세요, 스승님!”진운혁은 곧장 문소영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마치 날이 선 칼 두 자루 같았다.“문 여사님, 저 기억하죠?”문소영은 놀라운 침착함으로 말했다.“아뇨. 누구신지 모르겠는데요.”“몇 년 전에 그쪽이 서연아를 죽이려고 사주한 그날, 제가 그 현장을 목격했었습니다.”
육현성이 입가를 만지며 말했다.“이진영, 네가 감히 나한테 주먹질을 날려? 내가 집에 가서 이다은 저년을 아주 제대로 혼쭐 내줄 거야. 이번엔 최소 몇 달은 못 일어날걸?”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같이 기고만장했다.“보아하니 육씨 가문이 요즘 꽤 살 만한가 보네. 감히 나 이건명의 딸을 건드려?”이건명이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육현성의 뺨을 힘껏 후려쳤다.“감히 어디서 제멋대로 굴어!”그는 자신의 앞날을 위해 딸을 육씨 가문에 시집보냈었다. 그래도 육씨 가문은 4대 가문 중 하나인데 비록 육현성이 이다은을 사랑하진 않더라도 최소한의 예우는 할 줄 알았다.그래서 이다은이 이혼하겠다고 했을 땐 괜히 유난 떠는 줄 알았는데 방금 그 모든 생각이 송두리째 무너졌다. 이다은이 육씨 가문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이제야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이건명의 등장에 육현성은 순식간에 기세가 꺾였다. 아무리 육씨 가문이 돈 많고 배경 있는 집이라도 지금의 이건명을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었다.“아버님, 화내지 마세요. 이건 오해예요. 저는 전혀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육현성이 다급히 변명하려 들었다.“됐어. 변명은 필요 없어.”이건명이 이다은의 손을 꽉 잡았다.“다은아, 미안해. 아빠가 잘못했어. 너 이혼하고 싶으면 해. 내가 최고로 실력 좋은 변호사를 붙여줄게.”이다은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아빠가... 나를 이렇게 감싸준다고? 늘 냉정하기만 했던 사람이?’그때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들렸다.“정말 감동적인 부녀지간이네요. 좋은 아버지십니다, 정말.”이진영이 자신의 아버지를 조롱하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본 순간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그... 그쪽이 왜 여기 있어요?”강혁승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는 한 모금 빨아 연기를 뿜으며 웃었다.“나요? 부모 찾으러 왔죠.”이미 이진영이 그의 정체를 눈치챘기에 더 숨길 이유도 없었다. 오늘 이 자리에 이 사람들이 모두 모인 것도 하늘의 뜻이라 생각한 강혁승은 오늘 결판을 보려 했다.“너...
“문자를 보낸 건 그 여자가 아니라 나예요!”강혁승의 음울한 얼굴에 스며든 미소는 왠지 모르게 오싹했다.이건명의 시선이 그의 얼굴에 멈췄다. 얼굴에 난 깊은 흉터만 아니었다면 이건명 본인과도 놀랍도록 닮은 얼굴이었다.하지만 그의 아내가 낳은 자식은 이다은, 이진영 남매 둘뿐이었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누구란 말인가?“건명 씨는 여기 왜 왔어요? 어서 나가요!”문소영이 다급하게 외쳤고 목소리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왜 이렇게 쫓아내려고 안달이에요? 여기까지 왔는데 문제는 해결하고 가야죠.”강혁승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고 그의 눈빛엔 싸늘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왜 저 사람한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 저 사람이랑은 아무 관련도 없어!”문소영은 이건명을 붙잡아 두고 싶지 않았다.심미연은 눈을 가늘게 떴다.‘이 와중에도 이건명을 감싸려 하다니, 그래도 한때는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이었나 보네.’“관련이 없다고요? 저 사람이 내 아버지인데?”강혁승은 조소를 띤 채 반문했다.“내가 저 사람이 수십 년 동안 도와준 일들을 전부 알고 있는데 한 번 읊어볼까요?”문소영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헛소리하지 마!”“입 다물지 못해!”이건명이 서늘한 눈빛으로 강혁승을 노려보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하지만 마음속으로는 큰일 났다고 생각했다.‘저 자식이 모든 걸 알고 있단 말이야?’심미연은 입술을 깨문 채 이건명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방원호가 넘겨준 자료가 전부 사실이었던 것이다.하지만 이건명이 한 여자를 위해 불법까지 저질렀다는 건 예상 밖이었다. 진심으로 사랑해서였을까?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던 걸까?“심미연, 이리 와!”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심미연이 깜짝 놀라 돌아보니 깊고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그는 의식이 없었는데 분위기는 여전히 무게감이 있었다. 이런 것이 바로 한 회사를 이끄는 대표만의 카리스마와 아우라인가.“멍하니 있지 말고 어서 오라고.”강지한의 말에 심미연은 정신을
문도현은 심미연의 표정이 굳은 걸 보고 머리를 쉴 새 없이 굴리기 시작했다.‘안 되겠어. 일단 지금 이 상황부터 어떻게든 모면해야 해.’하지만 심미연은 그렇게 쉽게 속을 여자가 아니었다. 그가 아무 말이나 둘러대면 단번에 꿰뚫어 볼 게 뻔했다.‘어쩌지?’그때 마침 심미연의 휴대폰이 울렸다.“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요.”“네, 가서 일 봐요. 난 여기 있을게요!”문도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심미연은 대답도 제대로 못 하고 황급히 사무실을 나섰다.문도현은 기지개를 한껏 켠 뒤 슬며시 일어나 그녀의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책상 위에 액자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그 안에 심미연이 다른 사람과 같이 찍은 사진이 한 장 있었다.그런데 그 사진 속에서 심미연의 옆에 박유진이 서 있는 걸 본 순간 문도현은 마치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박유진이랑 심미연이 왜 같이 있어? 말도 안 돼! 절대 이 둘이 이어지게 두면 안 돼!’문도현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홱 돌아서 사무실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때 마침 임현이 문을 열고 들어오다 그와 정면으로 부딪쳤다.“아야! 아이고, 아파라...”임현이 낮게 신음하며 얼굴을 찡그렸다.하지만 문도현은 그녀를 밀치고 나가버렸다.임현은 어이없다는 듯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아니, 누가 건드리기라도 했나? 왜 저렇게 화가 나 있지?”마침 그때 심미연이 다시 들어왔다.“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어요? 문 대표님은요?”“방금 나가면서 저랑 부딪혔어요. 엄청 화난 얼굴이던데요? 아무 말도 안 하고 나가더라고요.”임현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저 남자, 감정 기복 진짜 심하네.’“잘됐네요. 나 급한 일이 있어서 나가야 해요. 오늘은 임현 씨가 사무실 좀 맡아줘요.”심미연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방을 챙겨 들고 서둘러 나가버렸다.방금 강지한이 의식을 되찾았다고 한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에게 직접 물어봐야 했다.그가 어떻게 그녀가 교통사고를
문도현의 치명적인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떠올랐고 깊고 그윽한 눈빛엔 묘하게 사람 마음을 사로잡는 기운이 스쳤다. 그 눈으로 마음속 깊은 비밀까지 꿰뚫어 볼 것만 같았다.“정말 여기서 얘기할 거예요?”그는 나직하면서도 묘하게 귀를 간질이는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사진이라도 찍으면 어쩌려고요?”그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하면서도 이상하리만치 매혹적이었다. 마치 한 음절 한 음절이 심장을 울리는 현처럼 듣는 이의 감정을 툭툭 건드렸다.유흥가를 오래 드나든 남자답게 문도현의 말투나 몸짓 하나에도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서려 있었다. 그의 존재만으로도 상대방은 쉽게 그에게 빠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 뒤에 자리 잡은 견고한 집안 배경은 그의 존재에 신비로움과 권위를 덧씌웠다. 한 번만 눈빛을 주고받아도 수많은 여자가 그를 위해 기꺼이 심연으로 빠져들곤 했다.심미연은 가늘고 곧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그래요. 그럼 위에 올라가서 얘기하죠.”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차 문을 잠그고는 성큼성큼 앞서 걸었다. 그녀의 발걸음엔 흔들림 없는 결의가 담겨 있었다. 아무리 개인적으로 복잡한 감정이 얽혀 있더라도 문도현은 사건을 의뢰하러 온 손님이었다. 심미연은 일과 사적 감정을 분명히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문도현의 시선은 무심결에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라인을 훑고 지나갔다. 그러자 곧 뇌리에 수많은 기억의 파편이 번뜩이듯 스쳐 지나갔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길들지 않은 야수 하나가 깨어나는 느낌이었다.이제야 그는 자신이 여자에게 설레는 감정을 잃은 게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다만 평범한 여자들에게 더 이상 설레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흔한 여자들은 이제 그의 마음을 건드릴 수 없지만 심미연은 예외였다.그 순간 심미연의 차분하고 냉정한 목소리가 그의 흐트러진 정신을 다시 현실로 끌어당겼다.“문 대표님께서 소송을 의뢰하신다네요. 임 변호사님께서 맡아주세요.”“알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문 대표님.”임현이 공손하게 몸을 살짝 기울이며 안내했
심미연은 흩날리던 생각을 차분히 거두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궁금한 듯 물었다.“우리 태하 진짜 똑똑하네.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거야?”아직 겨우 세 살이지만 심태하의 마음은 놀랄 만큼 세심하고 예민했다. 또렷한 눈망울은 마치 세상의 감정 흐름을 꿰뚫어 보는 듯했고 그렇게 꼼꼼히 살피는 모습에 심미연은 종종 놀라곤 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박유진이 심태하를 정성스럽게 길러온 시간이 아이를 이토록 똑똑하고 배려 깊게 자라게 만든 것이다.“아까 아빠랑 통화할 때 엄마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어요. 뭔가 걱정하는 게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저한테 말 걸었을 때도 평소처럼 웃고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엄마가 혹시 슬픈 건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어요.”심태하의 말은 또렷하면서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단어 하나하나에 엄마를 향한 깊은 애정과 이해가 담겨 있었다.심태하가 보기에 박유진이 집에 있을 땐 심미연은 늘 기분이 좋아 보였고 환하게 웃는 얼굴이 참 예뻤다.“엄마가 안 웃었어?”심미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녀석, 정말 못 말려.’겨우 세 살에 이 정도인데 나중에 더 크면 얼마나 영리해질지.“네, 안 웃었어요.”심태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심태하의 목소리는 여전히 앳됐지만 말투는 왠지 어른스러웠다. 꼭 사람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기라도 한 듯했다.심미연의 마음은 그 말 한마디에 확 풀렸다. 그녀는 아들의 코끝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자, 얼른 아침 먹자.”그녀의 말투엔 아낌없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이 아이는 정말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다.“아빠가 보고 싶으면 아빠한테 전화하면 되죠!”심태하가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윙크했다.‘나도 아빠가 보고 싶은데 엄마가 안 보고 싶을 리가 없지. 맞아, 분명 그럴 거야!’심미연은 그 말에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네 말대로 할게.”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박유진이 보고 싶지만 그에게 전화하진
하지만 그 깊은 애정과 놓기 싫은 마음은 오히려 박유진을 현실이라는 갈림길 앞에서 망설이게 만들었다.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심미연만 괴로운 상황에 빠질 것이라는 걸. 그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자신의 망설임으로 인해 흐려지는 건, 그녀의 세상이 자신 때문에 흔들리는 건 차마 보고 있을 수 없었다.그렇다고 그녀를 놓아버리면 영원히 잃게 될 텐데... 그 아픔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박유진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아빠, 왜 말이 없으세요? 허락한 거죠?”심태하의 목소리는 천진난만하게 들떴다. 마치 머릿속에 따뜻한 한 가족의 그림이 그려지기라도 한 듯.‘아빠가 돌아오면 엄마랑 나랑 셋이 모여 저녁 먹고 같이 웃고 얘기하고...’심태하의 마음속에서 그려낸 가장 순수한 행복의 모습이었다.그러나 그 순수한 소망 앞에서 박유진의 마음은 송곳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그는 알고 있다. 이번 결정을 가볍게 내려서는 안 된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게 하려면 정말 신중해야 했다.하지만 사랑과 책임 사이에서 그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그는 지금 사랑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심미연과 아이를 지킬 방법을 찾고 있다.하지만 그런 길이 과연 있을까? 이 선택은 너무나도 어려웠다.“아빠, 나 이렇게 열심히 얘기하고 있는데 왜 아무 말도 안 해요?”심태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미간을 찌푸렸다.평소 같았으면 박유진은 재밌는 얘기도 해주고 자기 말에 웃어주었을 텐데, 오늘따라 너무 이상했다.‘혹시... 내가 말실수했나?’그때 박유진의 다급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심태하의 귀에 들려왔다.“태하야, 곧 비행기가 이륙해서 아빠가 휴대폰을 꺼야 돼. 오늘 밤에 다시 이야기하자. 꼭이야.”박유진은 심미연을 당장이라도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고 말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네! 알겠어요, 아빠! 그럼 오늘 밤에 꼭 통화해요. 약속했으니까 안 하면 안 돼요!”심태하의 목소리에 눈치채기 힘든 외로움이 살짝 섞여 있었다.
심미연은 멍해졌고 아까 자신이 박유진에게 연락을 시도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날아온 건 단 한 줄의 차갑고 무미건조한 메시지. 기대했던 목소리는 끝내 들을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 아들 심태하가 전화를 걸자 박유진은 놀랍게도 전화를 받았다.“아빠, 지금 어디예요? 이틀 뒤면 제 생일이에요! 아빠가 놀이공원 같이 가자고 했던 거 잊으시면 안 돼요!”심태하의 말투엔 아이 특유의 해맑은 기쁨이 가득 담겨 있었고 단어 하나하나가 살아서 튀어나오는 듯했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박유진의 목소리는 한겨울 얼음도 녹일 만큼 다정했다.“아빠 지금 진성으로 가는 비행기 타러 가는 중이야. 곧 이륙이라 휴대폰 꺼야 해. 진성에 도착하면 바로 전화할게. 약속!”그 말에는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득 실려 있었다.사실 박유진은 심태하가 생일 이야기를 할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어젯밤에 워낙 정신이 없어 그런 중요한 약속마저 깡그리 잊고 있었던 것이다.“아빠가 보내준 선물 잘 받았어요!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심태하는 아직 다 하지 못한 말이 많은 듯 아빠에게 털어놓고 싶은 게 가득한 눈치였다.박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햇살이 쏟아져 내려 유난히 눈부셨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가늘게 떴고 그 강렬한 빛이 속눈썹 아래에 그림자를 드리웠다.그 순간 그의 마음속엔 오로지 한 사람, 심미연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그녀와 떨어져 있는 모든 시간이 하나같이 그리움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그리움이 너무 커서 박유진은 당장이라도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달려가고 싶을 만큼 벅찼다.“아빠... 지금 너무 힘들죠? 그럼 회사 팔고 그냥 집으로 돌아와요. 제가 돈 많이 벌어서 아빠랑 엄마 다 먹여 살릴게요!”심태하의 순수한 눈빛에 진심 어린 다짐이 담겨 있었다. 그에겐 돈을 많이 벌어서 가족을 지킬 거라는 꿈이 있었다.심미연은 그런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통통한 볼살에 아직 아기 티가 남았지만 심태하의 마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