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여화행은 오랫동안 침묵했다.그녀는 그저 조용히 이경의 맞은편에 앉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경을 바라보지도 않았다.그녀의 시선은 알 수 없는 곳에 머물러 있었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마치 조각상이 된 것처럼 몸을 꼼짝도 하지 않았다.낙엽이 어깨 위로 떨어져도 털어낼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마치 시간이 멈춘 듯, 주위는 적막하기만 했다.한참이 지나서야 그녀는 고개를 들어 이경에게 말했다."당장은 만날 수 없습니다.""왜요?"그 말에 이경의 숨결이 가빠졌다.여화행은 자신의 뒤에 있는 사람이 바로 남성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그럼 제 말이라도 좀 전해주시…"하지만 이경은 정작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어떤 말을 전하고 싶은지조차 머릿속이 복잡했다.자신의 허리 옆에 나비 모양 점이 있으니, 자신이야말로 그녀의 딸이라고 말해 달라고 해야 하는 걸까?하지만 이 사람들의 정체는 대체 무엇인가?남성의 곁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인가?그리고 왜 정작 남성 본인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인가?결국 이경은 말을 바꾸었다."이서영은 남성의 딸이 아닙니다."그러나 여화행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저도 압니다.""남성은 대체 당신에게 어떤 사람인 거죠?"이경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여화행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더니 문득 웃음을 지었다."꼬마 아가씨, 그 질문에는 내가 대답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을 텐데."그러자 이경은 격앙된 채 탁자를 탁 치고 벌떡 일어섰다."내가 바로 남성의 딸이라고 하면 어떡할 건데?"여화행은 순간 멈칫하더니, 이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하! 구공주, 난 그래도 그동안 널 높이 평가해 왔는데, 설마 이렇게까지 해서 다른 사람의 명예를 탐내려 할 줄은 몰랐네."이경은 아무 말 없이 차갑게 그녀를 바라보았다.방금 그녀가 한 말은 분명 충동적이었다.하지만 남성은 어쩌면 정말 이 산장 안에 있을지도 몰랐다.그렇기에 더는 참을 수 없었
"이분이 바로 저희 소장주이신 세현 공자님이십니다."예 집사는 이경의 시선을 따라 멀리 있는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자신의 소장주를 언급하는 그의 말투에는 자부심이 묻어 있었다."저희 소장주님께서는 평소 말수가 적으시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좋아하지 않으시지만, 성품은 좋으십니다.""성격이 좋다고요?"이경은 가볍게 웃었다.그녀가 아는 세자의 성격은 결코 좋지 않았다.하지만 소문에 따르면, 그는 여자들을 대할 때만 유독 까다로울 뿐 하인들에게는 그다지 모질지 않다고 했다.게다가 이번에 다시 만나고 보니, 중상을 입은 뒤 회복해서인지 왠지 모르게 예전보다 무심해 보였다.눈빛 속 폭력적인 기운은 옅어지고, 대신 차분하고 평온한 기색이 더해져 있었다.역시 마음속 짐을 내려놓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평온한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아마 지금 같은 날들이 그에게는 더 편안하고 여유로울 터였다.하지만 이상한 점은, 뒤에서 그를 조종하는 사람이 정말로 그에게 그런 평온한 삶을 주려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었다.이경은 회랑에 선 채 계속 멀리 있는 윤세현을 바라보았다.그녀의 거리낌 없는 시선을 느낀 것인지, 윤세현은 다소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그의 뒤에는 여전히 두 명의 시녀가 따르고 있었다.하지만 시녀들은 멀찍이 떨어져 있을 뿐,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했다.점점 멀어져 가는 윤세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경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당신네 장주님은 미남을 특히 좋아하시는 것 같네요."하지만 지금 이경을 만나려 하는 장주라는 사람은, 결코 그녀가 그리워하는 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녀 역시 알고 있었다."저희 장주님께서는 그런 취미는 없으십니다."예 집사는 그저 옅게 웃을 뿐 더는 설명하지 않았다.대신 앞쪽 정자를 바라보며 화제를 돌렸다."아가씨, 장주님께서 정자 아래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서 가서 만나 보시지요."그렇게 윤세현은 점점 멀어져 갔고, 끝내 보이지 않게 되었다.이경은 시선을 거두고
이경의 추측은 역시 틀리지 않았다.청지 일행은 하인들의 안내를 받아 한쪽 뜰로 배정되었다. 그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라는 것이었다.반면 이경은 집사의 직접 안내를 받아 주원으로 향했다.주원에 들어서자마자, 이경은 청신하고 속세를 벗어난 듯한 분위기를 느꼈다.마치 인간 세상 밖의 신선 세계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곳곳에는 화려한 꽃들이 만발해 있었다.한겨울인데도 꽃이 피어 있다니, 실로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아가씨, 이 뜰이 마음에 드십니까?"노집사 예 씨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경치도 아름답고, 기온까지 유난히 쾌적한데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요?"주원 안으로 들어갈수록 이상하게도 기온이 점점 따뜻해지는 듯했다.겨울이라기보다는 늦가을에 가까운 느낌이었다.약간의 서늘함만 있을 뿐, 춥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예 집사가 웃으며 말했다."산장 뒷산에는 온천이 하나 있습니다. 주인들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온천수를 산장 안으로 끌어들여 주변에 온기가 돌게 하셨지요. 덕분에 이런 겨울에도 추위를 느끼지 않는 겁니다.""아."이경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듣고 보니 정말 기발하고 대단한 방법이었다.그런데 문득 한 가지 궁금증이 들었다."그럼 여름에는 어떡하죠?"집사의 말대로라면,온천의 열기는 겨울에는 분명 공기를 따뜻하게 해줄 수 있다.하지만 여름이 되면 오히려 더 더워질 텐데 말이다.예 집사는 웃으며 대답했다."주인들께서는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으셨고, 앞으로 얼마나 더 머무르실지도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굳이 여름 일을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지요."사실 그들은 이곳에 오래 머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이경은 그 점이 의아했지만 얼굴에는 드러내지 않았다.이내 예 집사를 따라 정원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고, 아치형 문을 지나 또 다른 뜰로 들어섰다.고개를 든 이경은 순간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이게 다…"이렇게나 많은 미남들이 있다니?혹시 미남 선발 대회라도 열리고 있는 건가?앞쪽 뜰에는 새하얀 옷을 입은 미
달려 나온 이는 바로 모용서였는데, 그의 손에는 편지 한 통이 들려 있었다.그는 재빨리 이경 앞으로 다가와 웃으며 편지를 건넸다."아가씨 물건 맞으시죠?"이경은 눈썹을 찌푸렸다.그가 건넨 편지는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하지만 그 위에는 유독 눈에 띄는 글자 하나가 적혀 있었다.'세(漓)'."제 것입니다."이경은 두 손으로 편지를 받아 들며 모용서에게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이내 몸을 돌려 떠나려는 순간,모용서가 무심한 듯 물었다."아가씨께서는 어디에 머무르고 계십니까? 제가 호송해 드릴까요?""괜찮습니다. 제가 어디에 머무는지야, 사실 다들 저보다 더 잘 알고 계시잖아요."이경은 그에게 인사를 건넨 뒤 몸을 돌려 말에 올라탔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사람들은 공주가 방금 건네받은 편지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 알지 못했다.하지만 '세'라는 글자만큼은 모두가 똑똑히 보았다.하나같이 마음이 무겁고 복잡했지만, 결국 하나둘 말에 올라타 이경의 뒤를 쫓아갈 수밖에 없었다.한참을 달린 뒤에야 맨 뒤에 있던 청지가 따라붙으며 낮은 목소리로 보고했다."공주 마마, 모용 산장에서 뒤쫓아오는 사람은 없습니다."이경은 고삐를 당겨 말을 길가의 나무 아래로 천천히 몰았다.이내 말에서 내려 품속에서 편지를 꺼냈다.방금 모용서는 편지를 건네면서도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어쩌면 정말로 그 편지가 이경의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그래서 굳이 확인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보아하니 다과를 건넨 사람이든, 편지를 탁자 위에 올려둔 사람이든 모용서와는 관련이 없어 보였다.모용 가문의 다른 사람이거나, 아니면 누군가가 모용 가문의 하인들 사이에 섞여 들어온 것이 분명했다.그녀가 떠올린 건 적성산장의 사람들이었다.곧 편지를 열어 보니 예상대로 적성산장의 초청장이 들어 있었다."마마!"뜻밖의 초청장을 본 청지와 문정수는 크게 동요했다.지금 세자는 여전히 적성산장에 있었기 때문이다.그들은 당장이라도 산장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경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눈앞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사대가문 가주들의 눈동자에 스친 살기를 또렷하게 읽어냈다.밖에는 사대가문의 사람들이 곳곳에 깔려 있었다.그야말로 일촉즉발, 당장이라도 목숨을 건 싸움이 벌어질 듯한 분위기였다.다만 충돌을 원하지 않았던 모용서는 급히 상황을 수습하려 했다."아버지, 저희는 지금 정말 인재가 필요합니다. 차라리 아가씨더러…""비록 어룡성이 지금 재난에 직면해 있긴 하지만, 그 누구도 어룡성을 모욕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모용 가주의 말투에는 조금의 관용도 없었다.이 상황에서 만약 이경이 계속 사양한다면, 정말로 어룡성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는 꼴이 된다."사실 오늘 현장에는 많은 무림 고수들이 있었고, 심지어 저보다 무공이 뛰어난 고수들도 있었습니다."이경은 천천히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그녀의 태도는 시종일관 담담했다."하지만 그 고수들이 경기에 참가하지 않았다는 건, 성주 자리가 비록 권력과 부를 상징하긴 하지만 동시에 위험 또한 상징한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그러자 가주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이경은 옅게 웃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정말 그런가 보네요.""아가씨께서는 대회에 참가하기 전에, 성주로 선출된 사람은 보름 후 공물을 가지고 황성으로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하셨습니까?""그저 공물만 바치면 되는 거 아닌가요? 좋은 일이니 황실에서도 상을 내릴 텐데, 왜 다들 피하려고만 하는 거죠?"그녀의 시선이 네 명의 가주에게 향했다.하지만 네 사람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이내 모용서가 난감한 표정으로 조용히 설명했다."이번 공물은 태자 전하께 바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태자 전하께서는…"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태자 전하의… 성격이… 좀 괴팍하십니다…""알겠습니다. 그 말은 즉, 태자 전하께서 까다로우셔서 바친 공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상은커녕 오히려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뜻이군요?"성주가 되면 당연히 영광
"아가씨."그 순간, 모용서가 이경에게 다가갔다.이경은 두 손을 모아 인사를 건넸다."실력이 부족하여 더 이상 적성산장 소장주를 상대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성주 자리는 제가 감당하기에는 어려울 듯합니다."그녀는 지금 당장 적성산장으로 향해 윤세현을 찾고 싶었기에, 더 이상 성주 선출 같은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윤세현을 찾아냈으니 더 이상 지체할 필요도 없었다.적성산장 뒤에 대체 누가 있는지, 왜 윤세현의 기억이 봉인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뭐가 됐든 그녀는 윤세현을 구하리라 마음먹었다."아가씨께서는 이미 적성 소장주를 이기셨습니다."모용서는 이대로 그녀를 돌려보낼 수가 없었다.규칙대로라면 오늘 경기에서 승리한 자가 바로 성주의 후계자가 된다.게다가 지금 어룡성은 하루라도 빨리 새로운 성주를 선출해야만 했다.이 중요한 일을 어떻게 그저 대충 넘길 수 있겠는가?"도련님, 전 사실…""아가씨, 오늘 선출 대회에서 승리하셨는데 이 일을 내팽개치고 이대로 떠나신다면 그건…"모용서는 얼굴을 굳힌 채 단호한 표정으로 경고했다."그건 곧 저희 사대가문을 적으로 돌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그러자 이경은 눈썹을 찌푸리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대회장 주변에는 어느새 사람들이 하나둘씩 일어나 대회장을 빈틈없이 에워싸고 있었다.그들은 절정의 고수들은 아니었지만, 모두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이 상황에서 이경 일행이 기어코 뚫고 나가려 한다면, 온전히 살아남아 빠져나오기는 어려울 것이다.이경이 이내 청지를 향해 눈짓을 보내자, 청지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곧이어 이경은 모용서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럼 도련님께서는 제가 어떻게 하길 바라시는 겁니까?""내당으로 들어가 사대가문의 가주들을 만나셔야 합니다."모용서는 냉정하게 대답했다.이경은 다시 자신의 일행을 힐끗 바라본 뒤 손을 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좋습니다. 안내해 주시죠!"그렇게 선출 대회는 무사히 막을 내렸다.곧이어 손님들은 하나둘 자리를 떴다.청지 또한 밖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