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황제 시해 미수로 폐위된 세자 이현. 약재상 연서하는 청운별궁에 약재를 배달했다가 욕실에서 쓰러진 그를 구하고, 등에 새겨진 금지된 독 ‘적련향’의 흔적을 발견한다. 비밀을 본 대가로 폐세자의 약탕을 전담하게 된 서하. 매일 밤 그의 몸에서 독을 빼낼수록 3년 전 사라진 기억이 돌아오고, 죽은 아버지가 남긴 장부에서도 같은 독의 이름이 발견된다. 그런데 치료가 끝나갈수록 폐세자는 그녀를 보내줄 생각이 없어 보인다.
View More연서하는 남자의 옷을 벗길 생각이 없었다.
적어도 청운별궁의 욕실 문을 열기 전까지는.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문틈으로 뜨거운 수증기가 한꺼번에 밀려 나왔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공기에는 여러 약재의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당귀와 천궁, 말린 생강, 그리고 오래 끓인 황기 특유의 구수한 향까지. 평생 약재를 만지며 살아온 서하에게는 눈을 감고도 구별할 수 있을 만큼 익숙한 냄새들이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낯선 향이 하나 섞여 있었다. 달았다. 꽃향이라고 하기에는 무겁고, 약향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부드러웠다. 처음에는 꿀을 태우는 듯한 단내가 났지만, 숨을 조금 더 들이마시자 코끝에 서늘한 기운이 남았다. 서하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한데.’ 청운별궁에서 주문한 약재 가운데 저런 향을 내는 것은 없었다. 더욱 이상한 것은 향을 맡은 직후 혀끝이 아주 희미하게 저릿해졌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곧장 소매로 코와 입을 가렸다. 약재를 다루는 사람에게 낯선 냄새란 두 가지 의미였다. 새로운 돈벌이가 될 물건이거나, 잘못 건드리면 목숨을 잃을 물건이거나. 그리고 지금 이 냄새는 아무래도 후자에 가까웠다. “전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서하는 욕실 안쪽을 살피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그녀가 여기까지 들어올 이유는 없었다. 오늘 해야 할 일은 약재를 배달하고 돈을 받는 것뿐이었다. 황족의 사생활을 엿볼 생각도 없었고, 청운별궁에 무슨 비밀이 숨어 있는지 알아낼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도성 변두리에 자리한 연화약방으로 청운별궁의 주문서가 들어온 것은 사흘 전이었다. 당귀 두 근, 황기 한 근, 백출과 천궁 각 반 근, 그리고 최상품의 인삼 세 뿌리. 흔히 몸을 보하는 데 사용하는 약재들이었다. 다만 주문한 수량과 품질이 지나치게 까다로웠다. 특히 인삼은 뿌리 하나에 은자 몇 냥이 오가는 최상품만을 요구했다. 서하는 주문서를 세 번 읽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직접 가져오셔야 합니다.’ 주문서를 전달한 늙은 내관이 그렇게 말했다. ‘제가요?’ ‘그렇습니다.’ ‘배달비는요?’ 내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청운별궁의 주문입니다.’ ‘그러니까요. 청운별궁까지 가려면 왕복으로 하루가 걸리는데, 그동안 약방 문을 닫아야 하잖아요.’ ‘황족의 명을 받드는 일입니다.’ ‘황족께서는 약재값만 내고 배달비는 안 주신답니까?’ 내관은 한동안 서하를 바라보았다. 아마 황족의 주문을 받고도 배달비부터 따지는 약재상은 처음이었던 모양이었다. 결국 서하는 평소 배달비의 세 배를 받아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꽤 괜찮은 장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청운별궁에 도착한 순간부터 그 생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별궁은 도성에서 반나절 떨어진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었다. 한때 황실의 피서궁으로 사용되었다는 건물은 규모만큼은 대단했다. 높다란 담장과 붉은 기둥, 처마 끝마다 매달린 풍경까지 어느 것 하나 평범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 화려함을 돌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뜰에는 낙엽이 수북했고, 연못은 물이 절반쯤 말라 있었다. 오래된 회랑에는 먼지가 쌓였으며, 곳곳에 걸린 비단 장막은 빛이 바래 있었다. 무엇보다 사람이 없었다. 정문을 지키는 병사 둘과 늙은 내관 하나. 그것이 서하가 본 사람의 전부였다. ‘약재는 안쪽 행랑에 내려놓으시오.’ ‘대금은요?’ ‘잠시 기다리시오.’ 그렇게 말한 내관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서하는 행랑 앞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해가 기울기 시작할 때까지 아무도 돌아오지 않자 슬슬 화가 났다. “돈을 주기 싫으면 처음부터 말을 하지 말든가.” 그녀는 약재 꾸러미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장부를 펼쳤다. 청운별궁에서 주문한 물건의 값은 적지 않았다. 이대로 돌아가면 약방의 한 달 살림이 흔들릴 수도 있었다. 그래서 기다렸다. 그리고 기다린 것을 후회하게 되었다. 쨍그랑! 안쪽 건물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서하는 고개를 들었다. “……뭐야?” 잠시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 그릇을 떨어뜨렸겠거니 생각하고 다시 장부를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소리가 났다. 쿵! 이번에는 묵직했다. 사람이 바닥에 쓰러질 때 나는 소리와 비슷했다. 서하는 천천히 장부를 덮었다. ‘못 들은 척하자.’ 남의 집안일에 끼어들었다가 좋은 꼴을 본 적이 없었다. 하물며 이곳은 황족이 머무는 별궁이었다. 그녀는 약재 꾸러미를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안쪽에서 낮은 신음이 들렸다. “……윽.” 서하의 발이 멈췄다. 분명 사람 목소리였다. 그녀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버지.” 돌아가신 아버지가 들었다면 분명 또 한소리했을 것이다. 사람 목숨이 달린 일 앞에서 계산기부터 두드리지 말라고. “정말이지, 돌아가시고도 사람을 귀찮게 하시네요.” 결국 서하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욕실 문을 열었다. ⸻ 욕탕 옆 바닥에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젖은 검은 머리카락이 얼굴 절반을 덮고 있었고, 얇은 속옷은 물을 잔뜩 머금은 채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한쪽 팔은 욕탕 안으로 축 늘어져 있었으며, 바닥에는 깨진 백자 잔의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서하는 문 앞에서 굳었다. 청운별궁에 머무는 황족은 한 명뿐이었다. 삼 년 전 황제를 시해하려 했다는 죄로 폐위된 전 황태자. 이현. 세상 사람들이 그를 부르는 이름은 따로 있었다. 폐세자. “……설마.” 서하는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전하?” 대답이 없었다. “저기요. 들리십니까?”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서하는 남자의 어깨를 손끝으로 건드렸다. “죽으셨습니까?” 말하고 나서야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죽은 사람이 대답할 리 없지 않은가. 그녀는 재빨리 무릎을 꿇었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목에 손가락을 대자 맥박이 느껴졌다. 살아 있었다. 다만 맥이 지나치게 빨랐다. 손등으로 이마를 짚자 뜨거운 열기가 전해졌고, 손끝은 그와 반대로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서하는 그의 손목을 잡고 맥을 다시 확인했다. 빠르다. 그러다 갑자기 느려진다. 맥이 고르게 이어지지 못하고 중간중간 끊기는 듯했다. ‘단순한 열병은 아닌데.’ 열이 심하면 맥이 빨라질 수는 있다. 그러나 이 정도로 손발의 온도가 다르고 맥의 흐름까지 불규칙한 것은 이상했다. 더구나 남자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서하는 그의 눈꺼풀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동공의 반응도 느렸다. ‘약물 때문인가?’ 그녀의 시선이 욕탕으로 향했다. 갈색 물 위에 잘게 썬 약초들이 떠 있었다. 대부분은 익숙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수증기 사이로 올라오는 달콤한 향은 여전히 낯설었다. 서하는 욕탕 가장자리에서 물을 조금 떠 작은 백자 잔에 담았다. 물의 색은 생각보다 탁했다. 당귀와 황기를 오래 끓였다고 해도 이렇게 붉은 기운이 돌지는 않는다. 그녀는 잔을 내려놓고 깨진 그릇을 살폈다. 그릇 안쪽에 옅은 붉은 막이 남아 있었다. ‘이건 또 뭐야.’ 서하는 손끝으로 만지려다가 멈췄다. 아버지는 모르는 약재를 확인할 때 절대로 함부로 맛보지 말라고 가르쳤다. 독인지 약인지 모르는 물건을 혀로 확인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했다. 그녀는 깨끗한 천으로 잔을 감싸 따로 밀어두었다. 우선 사람부터 살려야 했다. 서하는 남자의 몸을 욕탕에서 조금 더 떨어진 마른 자리로 옮겼다. 무거운 몸을 혼자 움직이느라 이마에 땀이 맺혔지만, 다행히 남자의 호흡은 이어지고 있었다. 문제는 옷이었다. 젖은 속옷의 깃이 목까지 단단히 여며져 있었다. “…….” 서하는 남자의 가슴께를 내려다보았다. “이건 치료입니다.” 대답 없는 사람에게 변명해봤자 소용없었지만 일단 말은 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매듭을 풀었다. 하나. 둘. 젖은 천이 피부에서 떨어지며 남자의 목과 쇄골이 드러났다. 서하는 잠시 멈췄다. 폐세자는 병약하다는 소문이 있었다. 유폐된 뒤 몸이 크게 망가져 제대로 걷지도 못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런데 눈앞의 남자는 소문과 조금 달랐다. 몸은 야위었지만 어깨가 넓었고, 가슴과 팔에는 오래된 상처가 여럿 남아 있었다. 특히 오른쪽 어깨에서 가슴 아래로 이어지는 흉터는 깊었다. 한때 검을 오래 다뤘던 사람의 몸이었다. ‘황태자 시절에는 무예가 뛰어났다고 했지.’ 서하는 금세 정신을 차렸다. 지금 남자의 몸을 감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가슴과 복부를 살폈다. 눈에 띄는 발진이나 상처는 없었다. 그렇다면 등도 확인해야 했다. “전하, 조금만 움직이겠습니다.” 그녀는 남자의 어깨를 받치고 몸을 옆으로 돌렸다. 쉽지 않았다. “무겁기는…….” 이를 악물고 겨우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서하의 손이 멈췄다. “……이게 뭐야.” 등 한가운데에 이상한 흔적이 있었다. 척추를 따라 세 갈래의 붉은 선이 뻗어 있었다. 처음에는 오래된 화상 자국이라고 생각했지만 가까이서 보니 달랐다. 피부가 벗겨지거나 부풀어 오른 흔적이 없었다. 오히려 피부 아래로 붉은 먹물을 흘려 넣은 것 같았다. 세 갈래의 선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뻗어 있었고, 그중 하나는 어깨뼈 아래에서 가늘게 휘어졌다. 서하는 조심스럽게 손끝을 가져갔다. 눌렀다가 뗐다. 색이 변하지 않았다. 일반적인 혈관의 붉은 기운이라면 압박에 따라 옅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선은 그대로였다. “이상하네.” 그녀는 조금 더 가까이 몸을 숙였다. 그 순간 낯선 기억 하나가 머릿속을 스쳤다. 붉은 종이. 아니, 붉은 그림이 그려진 누런 종이. 그리고 불빛. 누군가가 종이를 태우고 있었다. ‘……아버지?’ 서하는 눈을 깜빡였다. 기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버지가 약서를 태웠던 일이 있었던가. 어린 시절의 기억이라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붉은 선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대체 무슨 병이기에…….” 서하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턱. 무언가가 손목을 움켜쥐었다. “……!” 서하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조금 전까지 의식이 없던 남자의 손이었다. 그의 손아귀에는 예상보다 강한 힘이 남아 있었다. “전하?” 천천히 남자의 눈이 열렸다. 검은 눈동자였다. 열 때문에 초점은 흐릿했지만 그 안에 담긴 경계심만큼은 선명했다. “……누구냐.” 낮고 갈라진 목소리였다. 서하는 침을 삼켰다. “약재상입니다.” “약재상?” 남자의 시선이 자신의 풀어진 옷깃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다시 서하에게 돌아왔다. “내 옷을 왜 벗기고 있지?” “벗긴 게 아니라 살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예.” “내가 보기에는 조금 다른데.” “죽어가시는 분을 상대로 제가 뭘 하겠습니까?” 남자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서하는 뒤늦게 자신의 말이 꽤 불경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이현이 몸을 일으키려 했다. 서하는 반사적으로 그의 어깨를 눌렀다. “움직이지 마세요.” 순간 이현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손을 치워라.” “싫습니다.” “……뭐?” “지금 일어나시면 다시 쓰러집니다.” “네가 감히 누구에게―” “폐세자 전하께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서하는 속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망했다.’ 그런데 이현은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를 아는군.” “청운별궁에 다른 황족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더욱 이상하군.”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여자가 허락도 없이 내 몸을 살펴봤다.” “치료하려고 했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무엇을 치료했지?” 서하는 입을 다물었다. 이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엇을 보았느냐.” 심장이 내려앉았다. “아무것도요.” “거짓말.” 즉답이었다. “저는 원래 사람 몸을 봐도 금방 잊습니다.” “내가 무슨 병인지도 모르면서 옷부터 풀었다?” “열이 너무 높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게 전부입니다.” 이현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의 시선이 서하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사람의 거짓말을 찾아내려는 눈이었다. 잠시 후 그가 낮게 말했다. “내가 깨어났을 때 네 손은 등에 있었다.” 서하의 표정이 굳었다. “그건…….” “무엇이 있었지?” 그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침묵이 오히려 대답이 된 모양이었다. 이현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내 등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나?” 서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이상한 흔적이 있습니다.” “흔적?” “붉은 선입니다. 상처는 아닌 것 같고, 피부병이라고 하기에도 조금 이상합니다.” “…….” “언제부터 생겼습니까?” 이현이 대답하지 않았다. 서하는 잠시 기다렸다가 덧붙였다. “말씀해 주셔야 원인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유폐되고 반년쯤 지났을 때다.” “반년이요?” “처음에는 작은 점이었다. 어느 날부터 길게 번지더군.” 서하는 속으로 날짜를 계산했다. 이현이 폐위된 것은 삼 년 전이었다. 그렇다면 붉은 흔적이 나타난 지는 이 년 반 정도 되었다는 뜻이었다. 오래된 증상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원인을 몰랐다고?’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무리 폐세자라고 해도 황족이었다. 의원 하나 제대로 부르지 못할 처지는 아닐 텐데. “의원에게 보이셨습니까?” “보였다.” “뭐라고 하던가요?” “몸이 쇠약해져 생긴 혈맥의 이상이라고 하더군.” 서하는 다시 그의 등을 바라봤다. 그런 설명으로는 납득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반박할 근거도 없었다. “그럼 오늘은 왜 쓰러지신 겁니까?” 이현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 “무슨 뜻이지?” “약탕에 들어가 계셨잖습니까. 열이 오르기 시작한 시점을 알아야 합니다.” “…….” “전하?” 이현이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그리고 천천히 미간을 좁혔다. “잠깐.” 서하는 그의 얼굴을 살폈다. “왜 그러십니까?” “내가…….” 그의 시선이 욕탕으로 향했다. “내가 언제 들어왔지?” 서하의 손끝이 멈췄다.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내관이 약탕을 준비한다는 말은 들었다.” “그다음은요?” 이현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그다음은 기억나지 않는다.” 서하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고열 때문에 의식이 흐려지면 기억이 끊길 수도 있었다. 그 자체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등에 남은 붉은 선과 설명하기 어려운 약향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이런 일이 처음입니까?” “무엇이?” “기억이 끊기는 일 말입니다.” 이현의 표정이 완전히 굳었다. 순간 서하는 자신이 해서는 안 될 질문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삼 년 전 황궁에서 벌어진 사건. 황제가 독을 마시고 쓰러졌던 밤. 피 묻은 검을 들고 발견된 황태자. 그날 이현이 끝까지 반복했다는 말이 있었다.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 사람들은 그 말을 비겁한 변명이라고 여겼다. 서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이현은 자신이 욕탕에 들어온 과정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실례했습니다.” 서하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 이현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너도 그날 일을 알고 있군.” “도성에서 모르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나를 의심하나?” 서하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이현의 눈썹이 움직였다. “아직은?” “제가 본 것은 열이 심한 환자와 이상한 약탕, 그리고 등에 생긴 붉은 흔적뿐입니다. 그것만으로 삼 년 전 일을 판단할 수는 없지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현은 서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잡힌 손목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모르는 것을 안다고 말하지 않았다. 반역자라고 단정하지도 않았다. 그 점이 조금 뜻밖이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연서하입니다.” “연화약방?” “예.” “오늘 약재를 가져온 사람인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아직 대금도 못 받았습니다.” 이현이 잠시 말을 멈췄다. “이 상황에서 돈 이야기가 나오나?” “전하께서 살아나셔도 제가 굶어 죽으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그의 입가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웃음인지 어이없음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표정이었다. 그러나 곧 그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서하는 즉시 손목을 빼내 그의 어깨를 받쳤다. “전하!” 이현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뜨거운 이마가 서하의 어깨 가까이 내려왔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그녀의 소매를 적셨다. “정신 차리세요.” “……괜찮다.” “전혀 안 괜찮으십니다.” 서하는 그의 몸을 받친 채 문 쪽을 바라봤다. “사람을 불러야겠습니다.” “부르지 마라.” “왜요?” “누가 오는지 알 수 없으니까.” 그 말에 서하의 움직임이 멈췄다. “……무슨 뜻입니까?” 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하는 그제야 이 별궁의 기묘한 적막을 떠올렸다. 폐세자가 쓰러졌는데도 아무도 달려오지 않았다. 약탕을 준비했다는 내관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 전 이현은 누가 오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서하의 시선이 천천히 욕탕으로 향했다. ‘설마.’ 그녀는 다시 물의 색을 살폈다. 이상한 향. 붉은 막이 남은 잔. 설명할 수 없는 고열과 기억 공백. 각각은 별개의 증상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모두 같은 욕실에서 발견되었다. 서하는 결심했다. “전하, 오늘 약탕은 더 이상 사용하시면 안 됩니다.” “이유는?” “아직 모릅니다.” “모르면서?” “모르기 때문에 더 위험합니다.” 그녀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제가 가져온 약재와 다른 냄새가 섞여 있습니다. 무엇인지 확인하기 전까지는 다시 몸을 담그지 마세요.” 이현이 그녀를 바라봤다. “독이라는 뜻인가?”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누군가 나를 죽이려 했다는 말이군.” “그렇게 단정하기도 이릅니다.” “너는 참 답답하게 말하는군.” “확실하지 않은 것을 확실하다고 말하는 사람보다 낫습니다.” 서하의 대답에 이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낮게 물었다. “확인할 수 있나?” “약재와 잔에 남은 흔적을 살펴봐야 합니다. 시간이 조금 걸릴 겁니다.” “얼마나?” “모릅니다.” “또 모른다는군.” “전하께서 질문하실 때마다 정답이 나오는 신통한 약재상은 아닙니다.” 이번에는 이현의 입가에 분명한 웃음이 스쳤다. 아주 짧았다. 그러나 서하는 보았다. ‘웃을 줄도 아는 사람이었네.’ 그 생각을 하자마자 이현의 눈빛이 다시 차가워졌다. “그렇다면 네가 확인해라.” “제가요?” “네가 이상하다고 했으니.” “저는 오늘 약재를 배달하러 온 사람입니다.” “알고 있다.” “약방도 운영해야 하고요.” “그것도 들었다.” “그러니까 저는―” “연서하.” 낮게 불린 이름에 서하의 입이 다물렸다. 이현은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그녀를 바라봤다. “내가 오늘 죽었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 같으냐.” 서하의 얼굴이 굳었다. “…….” “네가 가져온 약재가 이곳에 있다. 그리고 너는 내 욕실까지 들어왔지.” 그제야 서하는 상황의 심각성을 다시 깨달았다. 폐세자가 죽었다면 가장 먼저 의심받을 사람 중 하나가 자신이었을 것이다. 이현은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내가 살아 있는 편이 네게도 유리할 것이다.” “……그건 맞습니다.” “그러니 거래하자.” 서하는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무슨 거래입니까?” “네가 내 몸에 생긴 이상과 오늘 약탕에 섞인 것을 알아내라.” “그러면요?” “네가 이곳에서 본 일 때문에 억울한 죄를 뒤집어쓰지 않도록 하겠다. 네 약방도 보호하지.” 서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게 거래입니까?” “아닌가?” “협박 같은데요.” “황궁에서는 그것도 거래라고 한다.” 서하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황궁은 참으로 이상한 동네라고. 그러나 그녀는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조건이 있습니다.” “말해라.” “약재값과 배달비는 먼저 주셔야 합니다.” “…….” “그리고 제가 쓰는 약재는 별도로 계산합니다.” 이현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또?” “제 치료 방법에는 간섭하지 마세요. 위험하다고 판단하면 약탕도 중단할 겁니다. 그리고 제가 직접 확인하지 않은 약재는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현은 서하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있습니다.” “조건이 많군.”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인데 이 정도는 받아야죠.” “말해라.” 서하는 그의 등에 남은 붉은 선을 바라봤다. “치료 중에는 몸을 살펴야 합니다. 등에 난 흔적이 어떻게 변하는지 확인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그때마다 왜 옷을 벗기느냐고 묻지 마세요.” 이현이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느릿하게 대답했다. “그건 장담하기 어렵군.” “전하.” “네가 이상한 짓을 하면 물을 수도 있지 않나.” “치료라니까요.” “아직 치료법도 모르면서?” 서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 사람과는 앞으로 상당히 피곤할 것 같았다. ⸻ 한참 뒤, 서하는 이현을 욕실 옆 온돌방에 눕혔다. 그녀가 몇 번이나 사람을 부르겠다고 했지만 이현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서하가 문밖에서 뜨거운 물과 마른 옷을 요구하자 어디선가 늙은 내관이 나타나 필요한 물건만 내려놓고 사라졌다. 서하는 내관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봤다. 그는 방 안의 폐세자가 어떤 상태인지 묻지도 않았다. 이상했다. 그러나 지금은 따질 시간이 없었다. 서하는 이현의 체온과 맥을 다시 확인하고, 마른 옷과 이불을 준비했다. 그가 직접 옷을 갈아입을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준 뒤에는 욕실로 돌아가 남은 약탕을 작은 병에 담았다. 깨진 백자 잔의 조각도 천으로 감쌌다. 그녀는 약재 꾸러미에서 가져온 작은 종이에 오늘의 상태를 기록했다. 고열. 손끝의 냉증. 불규칙한 맥. 일시적인 기억 공백. 잠시 붓을 멈췄다. 그리고 한 줄을 더 적었다. 척추를 따라 세 갈래의 붉은 선. 압박해도 색이 옅어지지 않음. 서하는 마지막 문장을 한참 바라봤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 붉은 선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단순한 피부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기묘했다. 그렇다고 특정한 독의 흔적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었다. ‘아버지라면 알았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살아생전 수많은 약재와 독초를 다뤘다. 남들이 이름도 모르는 약초를 산에서 구해 오기도 했고, 낡은 의서를 밤새 읽으며 새로운 처방을 연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인가 특정한 약서 몇 권을 꺼내 보지 않았다. 그리고 십 년 전 세상을 떠났다. 서하는 아버지의 죽음을 오래된 약재 사고 때문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날의 기억은 이상하리만큼 흐릿했다. 비가 내렸던 것 같기도 했다. 누군가 약방 문을 두드렸던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붉은빛. 그것만은 어렴풋이 기억났다. “…….” 서하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떠올려봐야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녀는 기록을 접어 품에 넣었다. 그때 뒤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무엇을 적었지?” 서하가 돌아봤다. 이현이 문턱에 기대 서 있었다. 마른 옷으로 갈아입었지만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다. “환자의 상태입니다.” “내 상태를 기록할 만큼 심각한가?” “예.” 즉답이었다. 이현이 그녀를 바라봤다. “숨기지도 않는군.” “숨긴다고 나아지는 병은 없으니까요.” 그녀는 기록을 품 안에 더 깊숙이 넣었다. “전하,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무엇이지?” “등에 생긴 붉은 선 말입니다.” 이현의 표정이 굳었다. “왜?” “처음 생겼을 때도 지금처럼 세 갈래였습니까?” 그는 잠시 생각했다. “아니다.” “그럼요?” “처음에는 점 하나였다.” “언제부터 갈라졌습니까?” “기억나지 않는다.” 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녀는 다시 종이를 꺼내 기록했다. 이현이 그녀를 바라보다 낮게 물었다. “연서하.” “네.” “너는 그 흔적을 보고 무엇을 떠올렸지?” 서하의 붓끝이 멈췄다. “……아직은 아무것도요.” “아직은?” “어디선가 비슷한 그림을 본 것 같기는 합니다.” “어디서?” 서하는 잠시 망설였다. “아버지의 약서에서요.” 이현의 눈빛이 달라졌다. “네 아버지는 의원이었나?” “약재상이었습니다. 다만 의원들보다 약을 더 많이 아는 사람이었지요.” “지금은?” “돌아가셨습니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이현은 더 묻지 않았다. 서하도 그에게 설명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 두 사람은 같은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종이 위에 그려진 세 갈래의 붉은 선. 서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현은 그것이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직 어느 쪽도 확신하지 못했다. 다만 그날 이후로 청운별궁의 약탕은 더 이상 평범한 목욕물이 될 수 없었다. ⸻ 해가 완전히 저물 무렵, 서하는 겨우 별궁을 나설 수 있었다. 다음 날 다시 와서 이현의 상태를 확인하기로 약속한 뒤였다. 대금은 이현의 명을 받은 내관이 지급했고, 별도의 치료비는 서하가 작성한 계약서에 따라 정산하기로 했다. 문제는 계약서에 적힌 직책이었다. 청운별궁 전담 약탕 관리인. 서하는 그 글자를 보자마자 얼굴을 찌푸렸다. “약탕 관리인이면 약만 관리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내관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전하의 몸에 나타난 증상을 직접 살피셔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그렇지만요.” “그러니 목욕 시중도 포함됩니다.” 서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약재를 배달하러 왔다가 폐세자의 목욕 시중을 맡게 되다니. 세상에 이런 장사가 또 있을까. 그녀는 계약서를 품에 넣으며 중얼거렸다. “배달비 세 배 받고 좋아했던 내가 바보지.” 그러나 별궁을 나서는 그녀의 표정은 마냥 어둡지만은 않았다. 품속에는 작은 병 두 개와 깨진 백자 잔의 조각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종이 한 장. 세 갈래로 뻗은 붉은 선을 그려 넣은 기록이었다. 연화약방으로 돌아가면 가장 먼저 아버지의 오래된 약서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서하는 걸음을 멈췄다. 찬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문득 욕실에서 맡았던 달콤한 향이 떠올랐다. 그 순간이었다. 귓속에서 가느다란 소리가 울렸다. 이이잉―. “……윽.” 서하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아주 짧은 통증이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오래된 기억 하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린 시절. 연화약방의 뒷방. 아버지가 화로 앞에 앉아 있었다. 그의 손에는 누렇게 바랜 약서가 들려 있었다. 어린 서하는 문틈으로 아버지를 바라봤다. ‘아버지, 뭐 해?’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약서 한 장을 찢어 불 속에 넣었다. 종이가 천천히 검게 변했다. 그 위에는 붉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꽃이었다. 아니. 꽃처럼 보이는 무언가였다. ‘아버지, 왜 태워?’ 어린 서하가 물었다. 아버지는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그녀를 돌아봤다. 평소와 달리 얼굴이 몹시 창백했다. ‘서하야.’ ‘응?’ ‘이 그림을 어디서든 보게 되면…….’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절대로 가까이 가지 마라.’ ‘왜?’ ‘그건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더 무서운 약이란다.’ 어린 서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약인데 왜 무서워?’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불길 속으로 사라지는 종이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 ‘약이 아니라…….’ 그다음 말은 들리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기억의 한가운데를 잘라낸 것처럼. 서하는 눈을 떴다. 어느새 청운별궁의 정문 앞이었다. 손끝이 차가웠다. “……뭐였지?” 그녀는 품에서 기록을 꺼냈다. 종이에 그려진 세 갈래의 붉은 선을 바라봤다. 조금 전 떠올랐던 그림과 닮아 있었다. 하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불태웠던 종이에는 분명 꽃이 그려져 있었다. 붉은 꽃. 여러 장의 꽃잎이 겹쳐진 모양. 서하는 천천히 기록을 접었다. ‘확인해 봐야겠어.’ 아버지가 남긴 약서 가운데 아직 열어보지 않은 상자가 하나 있었다. 십 년 동안 손대지 않았던 상자였다. 그 안에 답이 있을지도 몰랐다. 서하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녀는 아직 몰랐다. 자신이 맡은 환자가 단순히 병든 폐세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의 등에 생긴 붉은 흔적이 오래전 황실에서 사라진 금지된 독과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자신 역시 그 독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그날 밤. 청운별궁의 온돌방에서 이현은 홀로 눈을 떴다. 열은 조금 내려갔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흐릿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바라봤다. 손가락 끝이 떨리고 있었다. 삼 년 전에도 그랬다. 황제가 쓰러졌던 밤. 피 묻은 검을 들고 서 있었을 때도. 이현은 눈을 감았다. 그러자 기억 속에서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쨍그랑. 백자 잔. 바닥에 흩어진 붉은 물. 그리고 누군가의 목소리. ‘전하께서는…….’ 이현의 미간이 좁아졌다. ‘오늘…….’ 목소리가 멀어졌다. 그는 기억을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끝내 잡히지 않았다. 대신 오늘 만난 약재상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의 몸을 살피면서도 함부로 병명을 단정하지 않던 여자. 두려워하면서도 눈을 피하지 않던 여자.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등에 난 흔적을 보고 무언가를 떠올렸던 여자. “연서하.” 이현이 낮게 이름을 불렀다. 그녀라면 알 수 있을까. 자신이 삼 년 동안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누가 그것을 빼앗아 갔는지. 이현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때 그의 등에서 희미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척추를 따라 뻗은 세 갈래의 붉은 선. 그중 가장 짧았던 선 하나가 조금씩 길어졌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피부 아래에서 붉은 먹으로 그림을 완성하는 것처럼. 선의 끝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리고 처음으로. 붉은 꽃잎 하나가 피어났다.연서하는 아버지가 남긴 상자를 십 년 만에 열었다.정확히 말하면 열려고 했다.“……이걸 왜 이렇게 단단히 묶어 놓으신 거야?”연화약방 뒤편의 작은 창고에는 오래된 약재 상자와 의서, 먼지가 쌓인 장부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중 가장 안쪽, 햇빛조차 제대로 닿지 않는 선반 아래에 놓인 나무 상자는 다른 물건들과 확연히 달랐다.상자에는 쇠로 만든 자물쇠가 달려 있었고, 그 위로 낡은 붉은 실이 여러 번 감겨 있었다. 실은 오랜 세월이 지나 색이 바랬지만, 매듭만큼은 여전히 단단했다.서하는 쪼그리고 앉아 매듭을 살폈다.아버지는 생전에 약재를 정리할 때마다 같은 말을 반복했다.약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지만 죽이기도 한다. 그러니 모르는 약에는 함부로 손대지 말고, 누가 가져왔는지 모르는 약은 더욱 조심하라고.그런 아버지가 유독 이 상자에 대해서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정확히는 말하려 하지 않았다.어린 서하가 안에 무엇이 들었느냐고 물으면 아버지는 그저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네가 몰라도 되는 것들이란다.’그때는 단순히 값비싼 약재나 어려운 의서가 들어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이제는 달랐다.청운별궁에서 본 붉은 흔적.낯설면서도 익숙했던 달콤한 향.그리고 폐세자 이현의 기억 공백.그 모든 것이 이 상자와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아버지, 이번에는 좀 봐야겠어요.”서하는 머리꽂이를 빼 들었다. 가느다란 금속 끝을 자물쇠에 넣고 몇 차례 움직였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이럴 줄 알았으면 열쇠를 어디에 두셨는지라도 알려주시지.”결국 그녀는 창고 구석에서 작은 망치를 가져왔다.세 번쯤 내리쳤을 때 자물쇠가 부서졌다.상자 안에는 생각보다 물건이 많지 않았다.낡은 약서 세 권과 작은 청동 향로, 그리고 누렇게 변색된 종이 꾸러미 하나.서하는 먼저 약서를 펼쳤다.첫 번째 책은 평범한 본초서였다. 두 번째에는 독초의 종류와 증상, 해독에 사용되는 약재들이 기록되어 있었다.문제는 세 번째 책이었다.책의 앞부
연서하는 남자의 옷을 벗길 생각이 없었다.적어도 청운별궁의 욕실 문을 열기 전까지는.“……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문틈으로 뜨거운 수증기가 한꺼번에 밀려 나왔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공기에는 여러 약재의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당귀와 천궁, 말린 생강, 그리고 오래 끓인 황기 특유의 구수한 향까지. 평생 약재를 만지며 살아온 서하에게는 눈을 감고도 구별할 수 있을 만큼 익숙한 냄새들이었다.그런데 그 사이에 낯선 향이 하나 섞여 있었다.달았다.꽃향이라고 하기에는 무겁고, 약향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부드러웠다. 처음에는 꿀을 태우는 듯한 단내가 났지만, 숨을 조금 더 들이마시자 코끝에 서늘한 기운이 남았다.서하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이상한데.’청운별궁에서 주문한 약재 가운데 저런 향을 내는 것은 없었다. 더욱 이상한 것은 향을 맡은 직후 혀끝이 아주 희미하게 저릿해졌다는 사실이었다.그녀는 곧장 소매로 코와 입을 가렸다.약재를 다루는 사람에게 낯선 냄새란 두 가지 의미였다. 새로운 돈벌이가 될 물건이거나, 잘못 건드리면 목숨을 잃을 물건이거나.그리고 지금 이 냄새는 아무래도 후자에 가까웠다.“전하?”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서하는 욕실 안쪽을 살피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애초에 그녀가 여기까지 들어올 이유는 없었다.오늘 해야 할 일은 약재를 배달하고 돈을 받는 것뿐이었다. 황족의 사생활을 엿볼 생각도 없었고, 청운별궁에 무슨 비밀이 숨어 있는지 알아낼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도성 변두리에 자리한 연화약방으로 청운별궁의 주문서가 들어온 것은 사흘 전이었다.당귀 두 근, 황기 한 근, 백출과 천궁 각 반 근, 그리고 최상품의 인삼 세 뿌리.흔히 몸을 보하는 데 사용하는 약재들이었다. 다만 주문한 수량과 품질이 지나치게 까다로웠다. 특히 인삼은 뿌리 하나에 은자 몇 냥이 오가는 최상품만을 요구했다.서하는 주문서를 세 번 읽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직접 가져오셔야 합니다.’주문서를 전달한 늙은 내관이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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