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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hor: 바람의 헤아림
진우정이 휴대폰을 꺼내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용하랑 결혼 안 해요. 전에 말씀하셨던 혼사 있잖아요. 그 결혼 할게요. 그쪽 남자한테 아직 나랑 결혼할 생각 있는지 물어봐 주세요.”

진우정은 갑작스러운 심경 변화에 어머니가 경솔하다며 꾸짖을 거라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휴대폰 너머에서 시원시원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잘 생각했어. 우리 딸 이제야 정신을 차렸구나. 엄마가 지금 당장 준혁이한테 연락할게.”

송준혁이라는 이름이 진우정에게 낯설지 않았다.

두 사람은 어릴 적 죽마고우였으나 송준혁이 부모님을 따라 외국으로 가면서 자연스럽게 연락이 뜸해졌다.

진우정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면식도 없는 생판 남보다는 차라리 송준혁이 나았다. 게다가 집안 형편도 비슷했고 서로를 잘 알기에 초고속 결혼 상대로는 그만한 적임자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우정의 휴대폰에 송준혁이 보낸 메시지가 도착했다.

[어머님께 연락받았어. 언제 시간 돼? 내가 해울시로 데리러 갈게.]

진우정에게 송준혁의 메신저 연락처가 있었다. 대학 시절 대학원 준비를 하던 때 어머니가 등 떠밀어 추가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에게 메시지를 보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한참 멍하니 있다가 천천히 답장을 적어 내려갔다.

[보름 정도만 시간을 줘. 주변 정리 다 끝내고 다시 연락할게.]

심용하와 끝내기로 마음먹은 이상 뒤탈 없이 깔끔하게 매듭지어야 했다.

심용하는 드레스 샵을 나가면서 결혼반지조차 챙기지 않았다.

평소 물건 하나 잃어버리는 법 없는 꼼꼼한 성격의 심용하가 반지를 잊었다는 건 그만큼 조급했다는 증거였다.

그는 벌써 몰디브에 도착해 백소은과 여행을 즐겼다.

백소은이 보란 듯이 SNS에 두 사람의 친밀한 사진들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진우정을 향한 도발임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진우정의 시선은 사진 속 백소은이 입고 있는 핫핑크색 비치 원피스에 꽂혔다.

그 옷은 진우정이 신혼여행에 가서 입으려고 야심 차게 준비해 둔 원피스였는데 며칠 전에 배송되었다.

파리 시즌 신상이라 며칠 밤을 새우며 치열한 광클릭 끝에 겨우 구매했다.

진우정이 그 옷을 얼마나 아끼고 좋아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심용하가 상의 한마디 없이 백소은에게 가져다줬다.

손이 파르르 떨릴 정도로 분노가 치민 진우정이 심용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어떻게 나한테 묻지도 않고 가져갈 수가 있어? 네 소중한 동생 기분 맞춰주겠다고 내 옷을 가져다가 생색을 내?]

한참이 지나서야 심용하의 답장이 왔다.

[저번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그런 핫핑크는 어린애들한테나 어울려. 네 나이에 입기엔 너무 촌스럽고 과해. 고작 옷 한 벌 가지고 유난 떨지 마.]

진우정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이게 지금 인간이 할 소리야?’

사실 그녀는 백소은보다 고작 두 살 많았다. 심용하의 눈에 백소은은 애지중지 지켜줘야 할 어린애였고 진우정은 그저 촌스러운 여자였다.

진우정이 반박하려던 그때 심용하가 갑자기 돈을 송금해 왔다.

[옷값이야. 소은이한테 뭐라 하지 마. 겨우 기분이 좋아졌으니까. 소은이가 어떤 일로도 방해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녀는 망설임 없이 돈을 받았다. 이제 옷도, 이 남자도 필요 없었다.

문득 이 사실을 깨달았다. 심용하가 그녀를 함부로 대할수록 그녀는 자신을 더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더 이상 심용하와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있었는데 바로 이미 나눠준 청첩장을 회수하는 것이었다.

심용하는 화려한 결혼식이 백소은에게 자극을 줄까 봐 소규모 예식을 고집했다. 진우정은 그마저도 배려해 해울시 내의 가까운 지인과 친척들에게만 소박하게 청첩장을 돌렸었다.

결혼식이 취소되어 청첩장을 돌려달라는 소리에 친구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렇게 오래 준비해 놓고 갑자기 취소라니?”

진우정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오랫동안 준비해 온 결혼식인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긴 준비 과정 내내 진우정 혼자만 동분서주했고 심용하는 단 한 번도 신경을 쓴 적이 없었다.

어쩌면 심용하는 애초에 그녀와 결혼할 마음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진우정이 혼자 좋아서 그의 뒤를 쫓아다녔을 뿐.

이 끝도 없는 ‘술래잡기’에 진우정은 이제 지칠 대로 지쳐버렸다.

사실을 숨기고 싶지 않았던 진우정이 솔직하게 말했다.

“결혼은 할 거야. 다만 신랑이 바뀌었을 뿐이지.”

하지만 친구들은 진우정의 말을 그저 농담으로 치부했다. 그 누구도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할 거라고는 믿지 않았다.

진우정이 심용하를 얼마나 지독하게 사랑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도도한 심용하를 손에 넣으려고 그녀가 들인 공이 얼마인데 이렇게 쉽게 포기할 리가 있겠는가?

심용하가 결혼식을 미룬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진우정은 속상해하면서도 결코 화를 내거나 얼굴을 붉히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우정이 이번에도 심용하를 이해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진우정은 구태여 설명하지 않았다.

지난 6년의 청춘을 바쳐 한 가지 사실을 증명했다. 자신에게 마음이 없는 남자를 사랑하는 건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이미 쏟아버린 사랑을 되돌릴 순 없었기에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여기서 멈추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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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시 흐르기 시작한 시간   제23화

    진우정은 심용하의 친구나 동창 중 누군가가 먼저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한 것이라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집으로 돌아가는 길, 진우정이 아이에게 먹일 분유를 사러 마트에 들렀다가 캡모자를 깊게 눌러쓴 괴한에게 칼로 위협을 당하며 인질이 되고 말았다.“진우정, 넌 왜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있어? 왜 혼자서만 행복하게 살고 있냔 말이야!”진우정은 그녀를 잡은 사람이 심국해에게 쫓겨났던 백소은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챘다.마트 보안 요원들이 급히 달려와 진압봉을 든 채 백소은과 대치했고 주변에 있던 시민 중 누군가가 서둘러 경찰에 신고했다.“백소은, 진정해. 곧 경찰이 올 거라 도망갈 수도 없어. 네 인생을 이런 식으로 망치는 게 정말 가치 있다고 생각해?”백소은이 쥔 칼이 무척이나 날카로웠다. 칼날이 진우정의 피부를 스치자마자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진우정은 백소은이 그녀를 미행해 목숨까지 노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심용하의 시신을 거둔 것도 아마 그녀였을 터. 그를 향한 사랑이 거의 집착에 가까웠다.“너 자신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아이를 생각해야지. 그 어린애를 혼자 두고 떠날 셈이야? 넌 아직 젊고 기회도 있어. 제발 충동적으로 굴지 마.”백소은이 심씨 가문에서 쫓겨나긴 했지만 심용하와 이혼 절차를 밟지 않은 상태였다.법적으로 여전히 심용하의 아내였기에 사고 소식을 가장 먼저 통보받은 것도 그녀였다.그녀와 심용하는 이익 공동체였다. 심용하가 죽자 그가 짊어지고 있던 막대한 빚은 고스란히 백소은의 몫이 되었다.“네가 대체 나보다 뭐가 잘났길래 용하 오빠를 해울에서 여기 목주까지 쫓아오게 만들어? 게다가 너 때문에 죽었어. 오빠는 내 거야. 죽어서도 내 거여야 한다고!”백소은은 심용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 이미 삶의 의지를 잃었다.하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을 용기가 없었던 그녀는 타인의 손을 빌려 죽는 계획을 세웠다. 이게 백소은이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었다.진우정이 인질로 잡혔다는 연락을 받은 송준혁은 강의 중이었다는 사실도

  • 다시 흐르기 시작한 시간   제22화

    진우정이 입을 열기 전에 뒤에서 송준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왜냐고? 그 이유를 용하 씨가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아? 우정이의 진심을 먼저 저버린 것도, 상처를 준 것도 용하 씨야. 이제 와서 대체 무슨 염치로 따져 묻는 건데?”송준혁이 들고 있던 만둣국을 내려놓고 진우정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우정이는 이제 내 아내야. 혼인신고까지 마친 합법적인 부부라고. 그런데 이 시점에 내 아내한테 달려와 사랑 고백을 해? 너무 늦었다는 생각 안 들어?”“6년이라는 시간 동안 용하 씨한테는 이 관계를 되돌릴 기회가 수만 번도 더 있었어. 하지만 잘 생각해 봐. 그때 뭘 했는지.”“우정이는 용하 씨한테 빚진 게 없어. 그러니 이제 와서 사랑한다느니 후회한다느니 하는 말로 도덕적 굴레를 씌우려 하지 마. 용하 씨가 사랑한 건 처음부터 끝까지 용하 씨 자신뿐이었어.”“지금 후회하는 건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서가 아니라 용하 씨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주던 사람을 잃었기 때문이라고.”송준혁의 일침에 심용하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진우정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고 있는 모습이 심용하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심용하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네가 우리 사이가 소원해진 틈을 타서 비겁하게 끼어들었어. 네가 내 우정이를 뺏어간 거라고!”심용하의 억지에 송준혁은 단 몇 마디로 그를 침묵시켰다.“내가 없었더라도 우정이는 용하 씨랑 끝까지 가지 않았을 거야. 더 좋은 사람한테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는 여자거든. 용하 씨 곁에서 청춘을 낭비하며 시들어가야 할 사람이 아니야.”진우정은 헤어진 지 이렇게나 오래되었고 각자 결혼까지 했는데도 심용하가 여기까지 찾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심용하, 만약 오늘 날 축하해주러 온 거라면 기꺼이 환영할게. 하지만 지난 일을 들춰내며 억지를 부리러 온 거라면 그만해. 시간이 늦었어. 나랑 아기가 쉬어야 하니까 이만 가 줘.”진우정이 단호하게 내쫓았다. 심용하의 가슴속에 남은 마지막 불씨마저 꺼져 버렸다.‘하긴.

  • 다시 흐르기 시작한 시간   제21화

    심국해가 아직 몸조리 중인 백소은을 집에서 쫓아냈고 백소은이 낳은 아이 역시 보육원으로 보내버렸다.애초에 그가 백소은과 심용하의 결혼을 승낙했던 것도 그녀가 심용하의 아이를 가져서였다.심용하가 쓸모없는 인간이 되었기에 심국해는 그 아이를 그의 후계자로 키워낼 생각이었다.그래서 체면을 목숨처럼 여기던 그가 주변 사람들의 손가락질도 참고 백소은과 심용하를 결혼시켰던 것이었다.하지만 헛물만 켠 꼴이 돼버렸다. 그 아이는 심씨 가문의 핏줄이 아니었다.심국해는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그가 살아남아야 훗날 재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아들 심용하는 이미 답이 없는 상태라 마지막으로 이용하기로 했다.그는 비밀리에 자신의 재산을 해외로 빼돌린 뒤 회사 법인 명의를 심용하로 변경하여 거액의 빚을 전부 심용하에게 떠넘겼다.심용하가 법원 소장을 받았을 때는 이미 심국해가 해외로 도주한 후였다. 법원이 심용하의 모든 재산을 압류하고 은행 계좌를 동결했다.몇 생을 걸쳐도 갚을 수 없는 막대한 빚을 떠안고서야 심용하는 얼마 전 심국해가 그에게 서류에 서명하라고 했던 이유가 그를 희생양으로 삼기 위함이었음을 깨달았다.심용하에게 이제 남은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다행히 예전에 그의 도움을 받았던 몇몇 친구들이 그가 길거리에 나앉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돈을 모아 집을 얻어주었고 돌봐줄 시간제 도우미까지 붙여주었다.심용하는 매일 침대에 누워 숏폼 영상을 넘겨보며 의미 없이 시간을 보냈다.그러던 어느 날, 무심코 소연지의 SNS에 들어가 봤다가 소연지와 진우정이 함께 찍은 사진을 발견했다.사진 속의 진우정이 품에 갓난아기를 안고 있었다.[득녀를 축하해. 결혼을 잘하면 이렇게 행복하구나.]사진 속 익숙한 얼굴, 그리고 진우정의 행복한 미소를 보던 심용하는 가슴이 지독하게 아려왔다.그 행복은 원래 그의 몫이어야 했다.가슴 깊은 곳에서 사그라들었던 오기가 다시 솟구쳐 올랐다. 심용하는 지극히 충동적인 결정을 내렸다. 목주시로 가서 진우정을 만나기로 한 것이었다.

  • 다시 흐르기 시작한 시간   제20화

    진우정이 걱정할까 봐 송준혁은 구출된 후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받지 않고 매일 극심한 통증을 참아가며 집으로 돌아와 진우정을 간호했다.그 후 진우정의 상태가 안정되고 나서야 조수진이 그날 밤의 아찔했던 상황을 진우정에게 털어놓았다.“준혁이 정말 진국이야. 현장에 있던 그 많은 사람 중 아무도 네 아빠를 구하러 내려가지 못했는데 오직 준혁이만 용기를 냈어. 준혁이 아니었다면 네 아빠는 아마...”진우정은 그런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조수진의 얘기를 들은 진우정이 송준혁을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 그 바람에 송준혁의 셔츠가 눈물과 콧물 자국으로 얼룩졌다.“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 왜 숨겼냐고! 앞으로는 무슨 일이든 꼭 말해줘야 해. 숨겼다간 가만 안 둬.”송준혁이 진우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바보야, 우리 아이가 외할아버지를 못 보게 할 수는 없잖아. 장인어른은 네 아빠이기도 하지만 내 아버님이기도 해. 그러니 구하는 게 당연하지. 네가 걱정할까 봐 말 안 한 거니까 너무 뭐라 하진 마. 지금 우리 둘 다 무사하잖아?”진우정이 눈물을 머금은 채 눈앞의 송준혁을 바라보았다. 송준혁을 잃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만 하면 덜컥 겁이 났다.진우정의 배가 날이 갈수록 불러왔고 정기 검진이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다.임신한 후로 기억력이 점점 나빠진 진우정은 자주 물건을 흘리고 다녔다.송준혁의 섬세함에 그녀는 다시 한번 놀랐다. 그는 인터넷에서 아기 성장 기록 수첩을 따로 구매해 진우정의 산전 검사 결과지를 차곡차곡 정리해 보관했다.그리고 정기 검진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함께 병원에 갔고 심지어 여가 시간을 쪼개 산모 회복 교실에 등록해 임산부와 신생아를 돌보는 법까지 배웠다.진우정이 입맛이 없으면 요리를 매번 다르게 해서 만들어 주었고 한밤중에 배고프다고 하면 즉시 침대에서 일어나 밥을 차려줬다.주방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송준혁의 뒷모습을 보던 진우정이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은 뒤 조수진에게 보냈다.[엄마, 내가 찾은 건 남편이 아닌 것 같아

  • 다시 흐르기 시작한 시간   제19화

    진우정은 요즘 들어 부쩍 잠이 많아졌고 생리도 한 달 가까이 미뤄지고 있었다.송준혁이 진우정과 함께 병원을 찾았다. 검사 결과를 받아 든 그가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뻐했다.“우정아, 임신이래. 나 이제 아빠 되는 거야?”그가 들고 있는 검사 결과서를 내려다보던 진우정은 한참 후에 상황을 파악했다.“나 정말 임신한 거야?”송준혁이 검사 결과서를 진우정에게 건넸다.“응. 틀림없는 사실이야.”진우정은 손에 쥔 검사 결과서를 보면서도 선뜻 믿기지 않았다.그가 진우정의 볼을 감싸 쥐고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당분간 무조건 쉬기만 해. 집안일은 전부 나한테 맡기고 몸조리에만 신경 써. 임신하면 많이 힘들 텐데 내가 진짜 잘 돌봐줄게.”비록 진우정은 아직 엄마가 될 준비가 완벽히 되지 않았고 이 아이 역시 계획에 없었으나 송준혁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가슴속에 피어오르던 염려가 순식간에 눈 녹듯 사라졌다.‘그래. 준혁이만 옆에 있으면 내가 걱정할 일은 아무것도 없을 거야.’진우정의 임신 소식에 양가 부모님 역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해외에 있는 송준혁의 부모님이 진우정을 위해 몸에 좋은 식재료를 한가득 보내왔다. 그러고는 송준혁에게 진우정을 잘 챙겨줘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우정이는 이제부터 특별 보호 대상이니까 네가 세심하게 잘 챙겨줘야 해. 임산부는 감정 기복이 심하거든. 혹시라도 기분이 안 좋아서 너를 깨물거나 발로 차더라도 군말 말고 다 받아줘.”새로 태어날 생명 덕분에 두 집안 모두 경사 분위기였다. 그런데 진우정이 임신 3개월이 되던 때 그만 출혈을 보이고 말았다.혼비백산한 송준혁이 진우정을 데리고 유명하다는 병원 여러 곳을 다녔다. 검사 결과 유산의 징후였다. 진우정의 몸이 약한 탓에 아이를 잃을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아이를 지키기 위해 진우정은 침대에서 절대안정을 취해야만 했다.진동원과 조수진이 목주시에서 내로라하는 명의들을 집으로 불러 진우정을 진찰하게 했다.다행히 유산에 특효가 있는 처방을 얻어냈으나 그중 한 가지 약

  • 다시 흐르기 시작한 시간   제18화

    진우정은 심용하가 버진로드 위를 지나가는 걸 보고서야 지난 교통사고로 얼마나 심하게 다쳤는지를 알게 되었다.경악과 충격 너머로 심용하를 향한 안타까움이 밀려왔다.그토록 도도하고 한때 수많은 여학생의 이상형이었던 심용하가 어쩌다 이런 꼴이 되었을까?이 현실이 심용하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을지 진우정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문득 조금 후회가 밀려들었다. 만약 그때 그런 식으로 심용하에게 이별을 고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심용하가 목주시까지 쫓아오지 않았더라면 이런 비극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진우정의 감정 변화를 알아챈 송준혁이 그녀의 손을 잡고 위로했다.“너무 속상해하지 마.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르는 법이고 절대로 네 탓이 아니야.”신랑의 자리에 선 심용하의 얼굴에 웃는 기색이라곤 전혀 없이 멍한 표정만 감돌았다.그는 사회자의 진행에 맞춰 기계적으로 식순을 치렀다.심국해의 안색 역시 차갑게 굳어 있었고 유민희는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식이 시작되기 전 참았던 감정이 터져 크게 오열했다.백소은은 그녀의 하나뿐인 딸이었다. 딸이 행복하기만을 바랐건만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데다가 딸을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에게 시집을 보냈다.앞으로 남은 인생을 무슨 희망으로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결혼식 내내 분위기가 어둡기 그지없었다. 하객들 역시 그저 밥이나 한 끼 먹고 구경거리나 즐기러 온 이들이 태반이었다.식이 다 끝나기도 전에 하객의 절반 이상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진우정 역시 식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일어났다.시간이 흘러 모든 것이 변해버린 현실은 늘 씁쓸한 여운을 남기는 법이었다. 진우정은 이 음울한 감정에 더 이상 자신을 옭아매고 싶지 않았다.심용하가 송준혁과 다정히 손을 잡고 멀어져 가는 진우정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 또한 진우정의 발걸음을 따라갔다.백소은은 어쩌면 오늘 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신부일지도 모른다.머리를 쥐어짜며 수를 쓴 끝에 심용하와의 결혼에는 성공했지만 정작 그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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