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서유리는 스무 살에 우지호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스물두 살에 그의 아내가 되었다. 결혼 후 다섯 해가 지나도록 아이는 없었지만 우지호는 집안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늘 그녀만을 감쌌다. 그때만 해도 다들 서유리가 그의 전부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지호에게 혼외자가 있다는 사실이 터져 나왔다. 그는 폭우 속에서 온종일 무릎 꿇고 변명했다. 모든 것이 실수였다며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이고 오직 그녀만을 사랑하겠노라 맹세했다. 이에 서유리는 아이는 받아들이되 아기 엄마는 물러나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내 아기 엄마 백은채가 우씨 저택에 들어와 태교에 전념하기 시작했고 우지호는 그녀를 위해 회의를 빼먹고 서유리를 제쳐두면서까지 그녀와 바람 쐬러 다니기 바빴다. 심지어 서유리와의 약속을 번번이 백은채 때문에 뒤로 미루기 일쑤였다. 서유리가 처음으로 이혼을 꺼냈을 때 그는 욕실에서 손목을 그었다. 유서에는 그녀와 백년해로하지 못한다면 죽음도 달게 받겠다는 내용이었다. 두 번째 이혼 요구에는 다급하게 그녀를 붙잡았다. 그러나 반복되는 갈등 끝에 우지호는 점차 무뎌져 갔다. 아흔아홉 번째 싸움, 서유리는 집을 나갔고 우지호는 더는 그녀를 쫓지 않았다. 어차피 돌아올 거라 믿었으니까. 하지만 서유리는 비 내리는 그 밤에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혼외자의 존재를 알게 된 바로 그날이었다. 서유리는 망설임 없이 전화를 걸었다. “편집장님, 그 종군기자 자리, 제가 가겠습니다.” 상대는 외지 발령이라 외부와의 연락이 어렵고 남편의 동의도 필요하다고 일렀다. 이에 서유리는 차분하게 답했다. “남편과는 이혼할 거예요. 정확히 일주일 뒤에 출발하겠습니다.” 이제 우지호는 그 어디에서도 서유리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Lihat lebih banyak그날 밤, 우지호는 아주 이상한 꿈을 꾸었다.바로 서유리가 교통사고로 죽는 꿈이었다.꿈속에서 그녀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싸늘하게 식어가는 와중에도 마지막 힘을 다해 그에게 속삭였다.“지호야, 우리... 이혼해. 다음 생에는 다시는 널 만나고 싶지 않아.”우지호는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은 채 꿈에서 소스라치게 깨어났다.창밖, L국의 달은 크고 둥글었지만, 어딘가 차갑고 슬픈 빛을 띠었다.그는 창가로 다가가 망원경을 집어 들었다. 멀리서 희미하게 빛나는 작은 기자단이 보였다.서유리가 바로 저곳에 있었다.그가 더 이상 발을 들일 수 없는 세상에서 분발하고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었다.‘이제 그만 놓아주자.’한 목소리가 우지호의 마음속에서 나지막이 속삭였다.‘너는 이미 그녀의 반평생을 망쳤는데 설마 미래까지 망치려는 거야?’‘너는 그녀가 원하는 자유를 줄 수 없고 그녀가 원하는 존중도 줄 수 없어.’‘네가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바로 그녀의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거야.’우지호는 천천히 망원경을 내려놓았다.텅 빈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무력감이 무엇인지 절실하게 느꼈다.세상에서 가장 비싼 다이아몬드를 살 수 있고, 부대 하나의 스케일이 되는 물자를 동원할 수 있지만, 서유리의 진심 어린 미소를 되살 수 없었고, 그녀가 한 번이라도 뒤돌아보게 할 수도 없었다.우지호는 크게 잘못했고 철저하게 실패했다.그는 몸을 돌려 휴대폰을 들고서 진 비서에게 전화했다.“진 비서.”목소리는 전례 없이 피로했고 잔뜩 갈라져 있었다.“국내로 돌아가는 가장 빠른 항공권 예약해.”이제 그만 놓아줘야 할 때가 되었다.L국을 떠나기 전날, 우지호는 선행을 하나 했다.바로 역외 재단을 통해 ‘전선 보도 연맹’에 익명으로 거액을 기부한 것이다.그 돈은 특정 용도로 지정되었다. 엘리가 속한 사진 기자 소대를 위해 모든 장비를 최신형으로 교체하고 그들에게 최고 수준의 안전 보장과 의료 지원을 제공하는 데 사용하도록 했다.모든 걸 마치고
한편, 우지호는 서유리에게서 거절당한 뒤에도 L국을 떠나지 않았다.그는 기자단에서 멀지 않은 작은 마을에 거금을 들여 집을 임대한 후, 진 비서를 국내로 돌려보냈다.“공민준이라는 남자, 최대한 자세히 조사해.”진 비서는 우지호의 음울한 표정을 보며 감히 더 묻지 못하고 밤새 국내로 날아갔다.곧이어 공민준의 자료와 그의 약혼녀 사진이 전달되었다.우지호는 사진 속에서 다정하게 웃고 있는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분노 대신 묘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국내에 약혼자가 있었어?”그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눈가에는 병적인 기쁨이 번뜩였다.무언가를 깨달은 것만 같았다.서유리는 연기하는 것이었다. 일부러 공민준과 가깝게 지냈고 일부러 그에게 냉랭하게 굴었다. 자극하고 복수해야 했으니까.이 생각은 우지호의 마음속에 뒤틀린 안도감을 불러일으켰다.그녀가 아직 자신을 신경 쓰고 있다고, 그렇다면 자신에게도 기회가 있는 거라고 말이다.결국 그는 전략을 바꾸었다.서유리에게 강제로 돌아가자고 요구하는 대신 물 흐르듯 스며드는 방식으로 자신의 회유 계획을 시작했다.오늘은 약품을 보내고, 내일은 채소와 과일을 보내고, 모레는 또 발전기를 보냈다.꼭 마치 인심 좋은 산타클로스처럼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최고의 물품들을 끊임없이 이 척박한 종군기자단으로 공수했다.그러던 어느 날 오후, 또다시 사람들을 이끌고 방탄조끼와 헬멧을 가져왔을 때, 서유리가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그녀의 다리 부상이 아직 완전히 낫지 않아 걸을 때마다 약간 절뚝거렸다.“지호야, 보내준 물품들은 정말 고마워.”서유리는 그의 앞에 다가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모두 일괄적으로 등록하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드릴 거야.”그녀의 말투는 공손했지만, 거리감이 느껴졌다. 마치 전혀 상관없는 자선 단체 책임자와 대화하는 듯했다.우지호의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았다.“유리야, 아직도 나한테 화난 거지?”그는 한 발짝 다가서며 거리를 좁히려 했다.“내가 잘못했어. 더 이상 그 남자를 이용해서 날
서유리는 잠시 멍해졌다. 공민준이 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한편 공민준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사람이 흔들다리를 조마조마하게 건널 때,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빨리 뛰게 돼. 만약 이때 우연히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되면 이런 상황이 유발한 심장 박동을 상대를 향한 설렘으로 착각하게 되는 거야.”그의 목소리는 매우 평온했다. 마치 평범한 심리학 개념을 설명하는 듯했지만, 서유리는 순간 모든 것을 깨달았다.그녀의 뺨이 자신도 모르게 뜨거워졌다.그랬다. 공민준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그녀가 자신에게 가져서는 안 될 감정을 품었고 그 미세한 감정 변화까지 전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끄집어내거나 모호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품위 있고 온화한 방식으로 일깨워 주었다.그는 서유리에게 말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향하는 그녀의 복잡하고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환경 속에서 생긴 착각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이다.그것은 의존이자 존경, 그리고 전우애였지만 유독 사랑만은 아니었다.서유리는 마음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솟구쳐 잠깐의 당혹감과 부끄러움을 씻어냈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전례 없는 명확함과 해방감이었다.그녀는 공민준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진심으로 웃었다. 그것은 솔직하고 편안한 웃음이었다.“민준 씨, 고마워요.”일깨워줘서도, 거절해줘서도 아닌 그저 단순하게 고맙다는 말만 건넸다.‘고마워요, 모든 남녀 관계가 모호함과 집착으로 흘러갈 필요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줘서.’‘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 힘으로 단단히 설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요. 더 이상 어떤 남자도 구원의 동아줄로 삼을 필요가 없어졌어요.’공민준도 웃었다. 그의 미소에는 약간의 칭찬이 담겨 있었다.“유리 넌 아주 훌륭한 기자야. 너의 재능과 끈기는 어떤 감정에도 얽매여서는 안 돼. 이곳에 온 것은 누구를 피하기 위해서도, 또 누구를 잊기 위해서도 아니야. 진정한 너 자신을 찾아야 해.”‘진정한 나
‘그러게.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민준 씨는 단지 리더로서 책임을 다했을 뿐이잖아.’서유리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이런 자신이 정말 우스꽝스러웠다. 남자의 상처로 마음이 부서질 대로 부서졌으면서 하찮은 선의에 어떻게 또 헛된 상상이나 하고 있다니.“어쨌든 정말 고마웠어요.”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려 떠났다.떠나가는 서유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공민준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는 시선을 거두고 자신에게 붕대를 감아주던 팀 닥터에게 말했다.“좀 살살 감아줘요. 제 약혼녀가 보면 죽을병에 걸린 줄 알겠어요.”팀 닥터는 쾌활한 서양인이었다. 공민준의 말에 그는 큰 소리로 웃었다.“알았어요. 미스터 공은 정말 못 말리는 팔불출이라니까요.”그들의 대화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근처에서 발걸음을 멈춘 서유리의 귀에 고스란히 닿았다.‘약혼녀라... 민준 씨는 이미 약혼녀가 있었구나.’서유리의 마음속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아주 미세한 실망감이 있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듯한 안도감이었다.‘잘됐네.’그녀는 스스로에게 말했다.명확한 경계를 가진 리더는 서유리가 해서는 안 될 헛된 생각을 완전히 접게 해주었다. 또한 그를 존경할 만한 선배이자 함께 싸우는 동료로만 여기도록 더 명확하게 해주었다.그날 이후, 서유리의 마음가짐은 완전히 달라졌다. 뉴스 기사의 접근 방식부터 복잡한 정세 속 자기 보호 기술까지 적극적으로 공민준에게 질문하기 시작했다.공민준 역시 자신의 경험을 아낌없이 그녀에게 전수했다. 불타는 전쟁터의 어둠 속에서 마치 등대처럼 그녀에게 나아갈 방향을 비춰주었고 새롭고 넓은 세상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서유리는 꼭 마치 메마른 스펀지처럼 영양분을 미친 듯이 흡수했다. 그녀는 더 이상 우지호에게 의존하며 살아가던 여린 꽃잎 같은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비바람을 막아줄 수 있는 나무로 성장하고 있었다.그녀는 이 일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시작했다. 생명을 걸고 진실을 추구하는 이 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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