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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흐르기 시작한 시간

다시 흐르기 시작한 시간

Oleh:  바람의 헤아림Tamat
Bahasa: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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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정과 심용하의 결혼식이 보름 앞으로 다가온 시점에 심용하가 또다시 결혼식을 미루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동생인 백소은의 병이 도졌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백소은이 당장 몰디브 바다를 보러 가자며 울고불고 심용하를 들볶아댔다. 이 결혼식을 준비한 지 벌써 2년이 되었다. 진우정은 이제 더 이상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심용하가 이 결혼을 원하지 않는다면 신랑을 갈아치워 버리면 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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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b 1

제1화

심용하가 피팅 중이던 턱시도를 황급히 벗어던지더니 휴대폰을 들어 몰디브행 가장 빠른 비행기 표를 예매했다.

“결혼식은 며칠 뒤로 미루자. 장인어른과 장모님께는 네가 잘 좀 말씀드려 줘.”

연애한 지 6년, 진우정은 심용하가 백소은 때문에 그녀를 내팽개친 게 대체 몇 번째인지 이젠 세는 것조차 무의미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결혼식에 대한 행복한 설렘에 젖어 있었건만 지금 진우정의 눈동자에서는 빛이 서서히 꺼져가고 있었다.

백소은 때문에 결혼식이 몇 번이나 미뤄진 탓에 진우정이 친척과 지인들 사이에서 웃음거리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억울함과 서러움이 가슴을 짓눌러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야속하게도 눈가에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항공권 예매를 마친 후 심용하가 고개를 돌린 그때 눈물범벅이 된 진우정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멈칫했다가 다소 찔리는 기색으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너도 알잖아, 소은이가 아픈 거. 기분 안 맞춰 주면 또 자해할지도 몰라. 그냥 내버려 두면 안 돼.”

진우정이 입을 열기 전에 심용하의 휴대폰이 울렸다. 백소은에게서 온 재촉 전화였다.

심용하가 비행기 표는 다 예매했으니 바로 집으로 데리러 가겠다며 일단 짐부터 싸라고 다정하게 백소은을 달랬다.

통화를 끝내고 다시 진우정을 쳐다보는 심용하의 눈빛에 조금 전의 미안함 따위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 지금 가야 해. 안 그러면 비행기 놓쳐. 드레스 피팅 다 끝나면 알아서 택시 타고 들어가.”

진우정이 성큼성큼 멀어지는 심용하의 뒷모습을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대학 시절 심용하는 학과 내에서도 도도하고 차갑기로 유명했고 그를 쫓아다니는 여학생들이 줄을 섰다.

진우정이 2년 동안이나 끈질기게 심용하에게 대시한 끝에 겨우 이 도도한 남자의 마음을 얻어낼 수 있었다.

어렵게 얻은 사랑이었기에 진우정은 이 사랑을 더없이 아꼈다. 늘 그를 배려했고 맞춰 줬으며 다른 여자들처럼 투정을 부리거나 떼를 쓴 적도 없었다.

하지만 온 진심을 다 쏟아부어도 진우정을 향한 심용하의 태도는 늘 미지근했다.

분명 연인 사이였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언제나 손에 잡히지 않는 거리감이 감돌았다.

원래는 심용하의 성격이 무뚝뚝해서 그런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백소은이 다쳤을 때 안절부절못하던 심용하의 모습을 본 순간 깨달았다. 심용하는 결코 감정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백소은이 심용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다만 두 사람의 특수한 관계 때문에 심용하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백소은은 아프다는 핑계로 진우정과 심용하의 관계를 휘젓고 다녔고 그때마다 심용하는 다정하게 그녀를 다독이고 달래주었다.

가끔 진우정은 심용하와 백소은 두 사람의 사랑 연극에 들러리로 이용당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기분은 정말 구역질이 날 정도로 더러웠다.

지난 6년 동안 진우정도 손을 놓아버릴까 몇 번이고 고민했다. 하지만 그녀가 포기하려 할 때마다 심용하가 먼저 자세를 낮추며 그녀를 붙잡았다.

악순환의 반복 속에서 진우정의 마음은 이미 절망으로 가득 찼다. 온기와 희망이 빠져나갔고 남은 거라곤 쓸쓸함뿐이었다.

예전의 진우정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긍정적이고 밝았으며 온몸에서 생기가 넘쳐흐르던 여자였다.

그러나 지금은 작은 일에도 예민해졌고 하루 종일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신세타령꾼처럼 변해 버렸다.

일방적인 양보가 본래 모습마저 잃게 만든 것이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던 진우정은 자신이 문득 너무나 낯설고 불쌍하게 느껴졌다.

더 이상 심용하와 이런 소모적인 관계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심용하가 두 사람의 관계를 이토록 가볍게 여긴다면 진우정 역시 결혼식 전에 신랑감을 갈아치워 버리면 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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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심용하가 피팅 중이던 턱시도를 황급히 벗어던지더니 휴대폰을 들어 몰디브행 가장 빠른 비행기 표를 예매했다.“결혼식은 며칠 뒤로 미루자. 장인어른과 장모님께는 네가 잘 좀 말씀드려 줘.”연애한 지 6년, 진우정은 심용하가 백소은 때문에 그녀를 내팽개친 게 대체 몇 번째인지 이젠 세는 것조차 무의미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결혼식에 대한 행복한 설렘에 젖어 있었건만 지금 진우정의 눈동자에서는 빛이 서서히 꺼져가고 있었다.백소은 때문에 결혼식이 몇 번이나 미뤄진 탓에 진우정이 친척과 지인들 사이에서 웃음거리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억울함과 서러움이 가슴을 짓눌러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야속하게도 눈가에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항공권 예매를 마친 후 심용하가 고개를 돌린 그때 눈물범벅이 된 진우정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멈칫했다가 다소 찔리는 기색으로 변명을 늘어놓았다.“너도 알잖아, 소은이가 아픈 거. 기분 안 맞춰 주면 또 자해할지도 몰라. 그냥 내버려 두면 안 돼.”진우정이 입을 열기 전에 심용하의 휴대폰이 울렸다. 백소은에게서 온 재촉 전화였다.심용하가 비행기 표는 다 예매했으니 바로 집으로 데리러 가겠다며 일단 짐부터 싸라고 다정하게 백소은을 달랬다. 통화를 끝내고 다시 진우정을 쳐다보는 심용하의 눈빛에 조금 전의 미안함 따위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나 지금 가야 해. 안 그러면 비행기 놓쳐. 드레스 피팅 다 끝나면 알아서 택시 타고 들어가.”진우정이 성큼성큼 멀어지는 심용하의 뒷모습을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대학 시절 심용하는 학과 내에서도 도도하고 차갑기로 유명했고 그를 쫓아다니는 여학생들이 줄을 섰다.진우정이 2년 동안이나 끈질기게 심용하에게 대시한 끝에 겨우 이 도도한 남자의 마음을 얻어낼 수 있었다.어렵게 얻은 사랑이었기에 진우정은 이 사랑을 더없이 아꼈다. 늘 그를 배려했고 맞춰 줬으며 다른 여자들처럼 투정을 부리거나 떼를 쓴 적도 없었다.하지만 온 진심을 다 쏟아부어도 진우정을 향한 심용하의 태도는 늘 미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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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진우정이 휴대폰을 꺼내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엄마, 나 용하랑 결혼 안 해요. 전에 말씀하셨던 혼사 있잖아요. 그 결혼 할게요. 그쪽 남자한테 아직 나랑 결혼할 생각 있는지 물어봐 주세요.”진우정은 갑작스러운 심경 변화에 어머니가 경솔하다며 꾸짖을 거라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휴대폰 너머에서 시원시원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잘 생각했어. 우리 딸 이제야 정신을 차렸구나. 엄마가 지금 당장 준혁이한테 연락할게.”송준혁이라는 이름이 진우정에게 낯설지 않았다.두 사람은 어릴 적 죽마고우였으나 송준혁이 부모님을 따라 외국으로 가면서 자연스럽게 연락이 뜸해졌다.진우정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면식도 없는 생판 남보다는 차라리 송준혁이 나았다. 게다가 집안 형편도 비슷했고 서로를 잘 알기에 초고속 결혼 상대로는 그만한 적임자가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진우정의 휴대폰에 송준혁이 보낸 메시지가 도착했다.[어머님께 연락받았어. 언제 시간 돼? 내가 해울시로 데리러 갈게.]진우정에게 송준혁의 메신저 연락처가 있었다. 대학 시절 대학원 준비를 하던 때 어머니가 등 떠밀어 추가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에게 메시지를 보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한참 멍하니 있다가 천천히 답장을 적어 내려갔다.[보름 정도만 시간을 줘. 주변 정리 다 끝내고 다시 연락할게.]심용하와 끝내기로 마음먹은 이상 뒤탈 없이 깔끔하게 매듭지어야 했다.심용하는 드레스 샵을 나가면서 결혼반지조차 챙기지 않았다.평소 물건 하나 잃어버리는 법 없는 꼼꼼한 성격의 심용하가 반지를 잊었다는 건 그만큼 조급했다는 증거였다.그는 벌써 몰디브에 도착해 백소은과 여행을 즐겼다.백소은이 보란 듯이 SNS에 두 사람의 친밀한 사진들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진우정을 향한 도발임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진우정의 시선은 사진 속 백소은이 입고 있는 핫핑크색 비치 원피스에 꽂혔다.그 옷은 진우정이 신혼여행에 가서 입으려고 야심 차게 준비해 둔 원피스였는데 며칠 전에 배송되었다.파리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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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진우정이 나눠줬던 청첩장을 모두 회수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그때 심용하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심용하의 목소리가 다소 잠겨 있었다.“이미 돌린 청첩장들 일단 다시 거둬들여. 결혼은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소은이 상태가 여전히 불안정해서 그래. 지금 괜히 자극하고 싶지 않아.”심용하는 진우정이 동의하지 않을 것을 대비해 늘 그렇듯 그녀를 몰아세울 도덕적 명분까지 준비했다.그런데 진우정이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덤덤한 말투로 대답했다.“알았어.”심용하는 순간 멍해졌다. 휴대폰 너머로도 느껴질 만큼 진우정의 태도가 평소와 달랐다.사실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남이 그녀의 물건에 손대는 것을 진우정이 얼마나 싫어하는지. 하지만 그는 백소은을 위해 진우정의 그 예민한 경계선을 무시해 버렸다.돈을 보낸 것도 진우정이 계속 따질까 봐서였다. 예전에는 잘 먹히던 방법이었는데 이번에 진우정이 군말 없이 돈을 받아버리자 오히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심용하가 마른 입술을 적시며 멋쩍게 말을 이었다.“소은이 때문에 네가 마음고생을 하고 있다는 거 알아. 내가 약속할게. 이번엔 꼭 의사 선생님 말씀 잘 듣게 해서 하루빨리 병을 고칠 수 있도록 노력할게.”“오빠, 물 다 받아놨어. 오빠가 씻을 차례야.”그때 백소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심용하가 오해하지 말라고 말하려는데 진우정이 이미 전화를 가차 없이 끊어버렸다.진우정은 이 상황이 기가 찼다.백소은의 진단서에 조울증이라 적혀 있었지만 그녀는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저 아픈 것을 핑계 삼아 심용하를 곁에 붙들어 두기만 했다.심용하가 내뱉는 약속은 영원히 현금화할 수 없는 부도 수표와 같았다.마음이 차갑게 식어버린 진우정이 미련 없이 짐을 싸기 시작했다. 옷이 그리 많지 않아 캐리어 하나면 충분했다.6년 동안 살아온 집이라 곳곳에 진우정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침대 협탁 위에 놓인 심용하와의 커플 사진, 주방에 걸린 진우정 전용 분홍색 앞치마, 화장실 컵 걸이에 나란히 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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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백소은은 몰디브에 남아 심용하를 기다리는 대신 바로 다음 날 병원으로 쫓아왔다.병상에 누워 링거를 맞고 있는 진우정을 보자마자 백소은의 얼굴에 노골적인 경멸이 서렸다.“제법 그럴싸하게 연기하네? 그런데 넌 불쌍한 척밖에 할 줄 몰라? 이런 식상한 수작은 용하 오빠한테나 먹혀.”진우정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었다.과거 진우정이 심용하의 마음을 얻으려 애쓰던 시절 비를 흠뻑 맞으며 남자 기숙사 앞에서 밤새 그를 기다렸던 일을 비꼬는 것이었다.그날 밤은 빗줄기가 지독하리만치 굵었다. 진우정이 심용하에게 주려고 고심해서 고른 기타를 품에 안은 채 빗속에 서 있었다.얇은 셔츠가 비에 젖어 몸에 달라붙었고 차가운 빗방울이 얼굴을 사정없이 때렸다. 하지만 빗속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는데도 심용하는 거들떠보지 않았다.진우정은 사랑을 얻지 못한 게 무슨 대수냐면서 스스로를 다독이며 포기하려 했었다.그런데 그때 심용하가 마음을 돌려 사귀어 보자고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감히 범접할 수 없었던 남자와 사귀게 되었다.그날의 비로 사랑을 얻었으나 대신 지독한 폐렴을 얻었다.나중에 병은 나았지만 후유증이 남았다. 지난 몇 년 동안 기온이 떨어지거나 감기에 걸리면 진우정은 기침에 시달려야 했다.진우정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심용하를 쳐다봤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심용하가 나서서 그녀를 감싸주기를 바랐다.하지만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심용하가 결코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공격적으로 몰아붙이는 백소은을 참아주다 보니 이제는 속병이 날 지경이었다.어차피 곧 심용하와 헤어질 생각이기에 이 여우 같은 백소은에게 더는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었다.진우정이 차갑게 맞받아쳤다.“연기라면 내가 널 따라갈 수 있겠어? 하지만 이런 수작 부려봤자 아무 소용 없어. 넌 평생 심용하의 여동생으로밖에 살 수 없을 테니까.”진우정의 말에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백소은이 미친 듯이 진우정에게 달려들었다.그녀가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막는 과정에서 손등에 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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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지난 며칠 동안 진우정으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자 송준혁은 내심 초조해졌다.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우정아, 결혼식 준비는 이미 시작했어. 네 쪽 상황은 어때? 정리 다 됐어?”진우정이 입을 열기 전까지 송준혁은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혹여나 그녀가 후회한다면서 결혼하지 않겠다고 할까 봐 두려웠다.그녀는 송준혁에게 지금의 상태를 들키지 않으려고 재빨리 감정을 조절한 뒤 코를 훌쩍이며 대답했다.“응, 거의 다 정리됐어. 요 며칠 사업적인 일들만 마무리하고 바로 갈게. 결혼식 준비는 네가 수고 좀 해줘.”진우정의 대답에 송준혁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워낙 세심한 성격이었기에 그녀의 사소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목소리가 왜 이렇게 쉬었어?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요즘 해울의 기온이 많이 떨어졌다던데 나갈 때 옷 따뜻하게 챙겨 입어. 너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잖아.”송준혁의 다정한 당부에 진우정의 가슴 한구석으로 몽글몽글한 온기가 번져 나갔다.“혹시라도 무슨 일 생기면 꼭 나한테 전화해. 혼자 끙끙 앓지 말고. 이제 내가 있으니까 속상하지 않게 지켜줄게.”진우정이 나지막하게 말했다.“내 몸은 내가 잘 챙길게. 걱정하지 마.”전화를 끊고 창밖을 내다보았다.조금 전까지 먹구름이 가득하던 하늘이 어느새 맑게 개어 있었다. 지금 그녀의 마음처럼.한편 심용하는 백소은을 집에 데려다주는 길 내내 불길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예감에 휩싸였다.그가 백소은에게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소은아, 너 자꾸 이러면 안 돼. 우정이가 어찌 됐든 내 미래 와이프가 될 사람이잖아.”미래 와이프라는 말에 백소은의 눈에서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그녀가 입술을 파르르 떨며 심용하에게 물었다.“오빠, 나 이젠 오빠 인생에 방해만 되는 존재지?”심용하는 백소은의 눈물에 유독 약했다. 결국 마음이 약해져 해명을 늘어놓았다.“그런 뜻이 아니야. 우정이가 내 곁에 6년이나 있었어. 내가 책임지지 않으면 사람들한테 손가락질받을 거야.”그제야 백소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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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진우정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이틀 동안 심용하는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심용하의 SNS를 확인해봤더니 예상대로 또 백소은과 함께 있었다. 배경 화면조차 백소은의 셀카였고 업로드된 모든 게시물이 예외 없이 그녀와 관련된 것들이었다.이보다 더 어이없는 일이 있을까?명색이 여자친구인 진우정은 그의 SNS에 단 한 번도 등장한 적이 없었다.예전 같았으면 가슴이 무너져 내리고 감정이 소용돌이쳤을 것이다. 심용하와 함께한 6년은 진우정을 생기 넘치던 여자에서 원망만 가득한 여자로 변하게 했다.“이렇게 엉망인 사랑이라면 차라리 놓아버리는 게 마음이 편해.”진우정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몸 상태가 어느 정도 회복된 후 진우정은 소지품을 정리하고 퇴원 절차를 밟았다.해울시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소연지를 만나야 했다.소연지는 진우정의 둘도 없는 절친으로 대학교 졸업 후 함께 해울시에 정착했다. 진우정은 사랑을 위해, 소연지는 창업을 위해서였다.두 사람은 함께 작은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다.“연지야, 이 카페 내 지분 너한테 싼값에 줄게. 부모님한테 고향 내려가서 결혼하겠다고 했어. 이제 다시는 해울에 안 올 거야.”“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심용하를 포기하고 딴 남자랑 결혼한다고?”소연지가 귀를 의심하며 경악한 표정으로 진우정을 쳐다봤다.진우정은 친구가 이런 반응을 보일 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전의 진우정은 심용하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으니 말이다.이제 와 생각하니 제 얼굴에 침 뱉기나 다름없었다.그녀가 애써 담담한 척하며 미소를 지었다.“응. 며칠 내로 주변 정리 다 하고 내려가려고. 그때 가서 너 꼭 내 들러리 서줘야 한다?”이 카페는 두 사람의 피땀이 어린 곳이었다. 진우정이 이곳의 지분까지 넘기겠다는 건 정말로 떠날 결심을 굳혔다는 뜻임을 소연지도 눈치챘다.“그래 잘 생각했어. 한 남자한테만 목매선 안 되지. 친구로서 네 결정 응원할게.”두 사람은 계약서를 작성하고 서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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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심국해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전혀 몰랐던 모양이었다.“안 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청첩장까지 다 돌려놓고.”심용하가 고개를 푹 숙였다. 결혼식을 미루겠다는 말을 심국해에게 꺼낼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었는데 진우정이 먼저 말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진우정이 대답을 심용하에게 넘겼다.“그건 용하한테 물어보세요. 용하가 내린 결정이니까요.”심국해가 심각한 표정으로 심용하를 쳐다보며 쏘아붙였다.“결혼보다 중요한 일이 뭐가 있어? 청첩장도 다 돌렸는데 우리 집안을 웃음거리로 만들 작정이야?”심용하가 입을 열기 전에 백소은이 먼저 나서서 애교를 부렸다.“아빠, 오빠 탓하지 마세요. 오빠가 결혼식을 미룬 건 다 저 돌봐주려고 그런 거예요.”심국해가 불같이 화를 냈다.“뭐? 소은이 너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는데 어쩜 이렇게 철이 없어? 네 엄마가 평소에 어떻게 가르쳤길래 이 모양이야?”백소은이 심국해의 친딸은 아니었지만 유민희가 심씨 가문으로 들어온 이후 심국해는 그녀를 친딸처럼 애지중지하며 키웠다.평소 큰소리 한번 내지 않던 심국해가 이토록 화를 내자 백소은이 충격을 받은 듯 눈물을 뚝뚝 흘리며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이제 속이 시원해?”심용하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백소은의 뒤를 쫓아갔다.“왜 애한테 소리를 질러요? 소은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당신 절대 가만 안 둬요!”유민희가 진우정을 매섭게 째려봤다가 씩씩거리며 위층으로 올라갔다.“우정아, 잠깐만 앉아 있어. 소은이 엄마랑 얘기 좀 하고 올게.”유민희를 달래기 위해 심국해도 서둘러 위층으로 향했다.이미 여러 번 본 광경이라 진우정은 놀랍지도 않았다. 다만 자꾸만 반복되는 이 상황이 넌더리가 날 정도로 지겨웠다.백소은이 이토록 심용하와 진우정의 사이를 헤집어 놓을 수 있었던 건 심용하의 편애와 유민희의 방임과 다름없는 훈육 때문이었다.그녀가 그 집안의 금지옥엽이라면 진우정도 부모님의 소중한 딸이었다.진우정은 당장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어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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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비행기에 오르기 전 진우정이 송준혁에게 항공편 번호를 보냈다.몇 시간의 비행 끝에 비행기가 마침내 목주 공항에 착륙했다.진우정이 한 손으로 캐리어를 끌며 다른 한 손으로 송준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나 도착했어. 어디야?]메시지를 전송하자마자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그곳에 송준혁이 한 그루의 곧은 소나무처럼 우뚝 서 있었다. 차분하고 지적인 분위기를 풍기던 그가 진우정을 보자마자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그러고는 성큼성큼 다가가 품에 안고 있던 숄을 진우정의 어깨에 둘러준 뒤 캐리어를 건네받았다.“요 며칠 목주의 기온이 많이 떨어졌어. 비행기에서 막 내렸으니까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해.”송준혁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할 나위 없이 다정했다. 그 세심한 배려에 진우정의 마음속에 몽글몽글한 온기가 스며들었다.“우리 결혼식 때문에 부모님이 사흘 전에 귀국하셨어. 네가 오늘 온다니까 바로 만나고 싶어 하셨는데 비행기 타고 오느라 피곤할 것 같아서 푹 쉬고 나서 만나자고 일단 말려뒀어.”“집에 데려다줄게. 내 여동생이 공항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여동생?”송준혁이 웃으며 설명했다.“아, 내가 말을 안 했구나. 송빛나라고 부모님이 외국에서 입양하신 아이인데 올해 열여덟 살 대학생이야. 내가 너 마중 나간다고 하니까 껌딱지처럼 꼭 따라오겠다고 우기더라고.”진우정이 너무 예민해진 탓인지 여동생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자꾸만 백소은이 떠올랐다.하지만 송빛나를 마주한 순간 진우정의 불안감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송빛나는 장난기가 가득하고 영특해 보이는 소녀였다. 백소은과 전혀 달랐고 진우정을 보는 눈빛에 적대감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와, 우리 새언니 진짜 예쁘다! 오빠가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 이제 알겠네요. 저도 새언니가 너무 마음에 들어요.”송빛나가 한 가지 사실을 폭로했다.“사실 오빠가 귀국해서 일하겠다고 고집 피운 거 다 새언니 잡으려고 그런 거였거든요. 그런데 한발 늦는 바람에... 그래도 결국 이렇게 다시 만나게 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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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나 먼저 갈게. 오랜만에 본가에 온 거라 부모님이 많이 보고 싶어 하실 거야. 일단은 부모님이랑 오붓하게 얘기 나눠.”송준혁은 진우정을 집까지 바래다준 뒤 다음 날 양가 가족이 모여 결혼식 세부 사항을 확정 짓기로 약속하고 자리를 떴다.송준혁이 가자마자 진우정의 어머니 조수진이 송준혁의 칭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준혁이 정말 진국이더라. 너한테 평생 잊지 못할 꿈같은 결혼식을 해주고 싶다면서 목주시에 있는 좋은 호텔이란 호텔은 다 돌아다니며 예식장을 골랐어. 식장 디자인까지 몇 개나 짜왔더라고.”“엄마가 보기엔 준혁이 너한테 진심이야. 그러니 심용하는 이제 깨끗이 잊어버리고 앞으로 준혁이랑 행복하게 살 생각만 해. 엄마는 네가 분명 행복해질 거라고 믿어.”사실 조수진에게도 걱정이 없는 건 아니었다.딸이 6년 동안이나 심용하를 일편단심으로 사랑해 온 걸 알기에 혹여나 이번 결정이 일시적인 충동은 아닐지, 나중에 심용하의 사탕발림 말 몇 마디에 다시 흔들리지는 않을지 내심 불안했다.만약 그렇게 된다면 송씨 가문 사람들을 볼 면목이 없을 것이다.진우정이 조수진의 걱정을 눈치채고 확신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이미 결정한 건 절대 후회 안 해요.”다음 날 오전, 송준혁이 진우정과 그녀의 부모님을 데리러 왔다.송준혁의 부모님은 이미 식당 룸에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 진우정이 룸 안으로 들어간 그때 한쪽에 놓인 정교한 함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송준혁의 어머니 성혜미가 진우정을 보자마자 반갑게 손을 잡았다. 두 눈에 숨길 수 없는 애정이 가득했다.“우정아, 이게 몇 년 만이니. 어쩜 이렇게 예쁘게 컸어? 우리 준혁이가 정말 복도 많지.”송준혁의 아버지 송기철 역시 싱글벙글한 표정이었다.“우정이는 어릴 때부터 참 예뻤어. 이런 아이가 내 며느리가 된다니 나도 정말 기쁘구나.”어릴 적 두 집안이 같은 동네에 살 때부터 성혜미와 송기철은 진우정을 무척이나 아꼈다.성혜미는 입버릇처럼 진우정이 그녀의 딸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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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두 번째 함 안에는 은행 카드 세 장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비밀번호는 전부 네 생일로 해뒀어. 첫 번째 카드는 준혁이 월급 카드야. 앞으로 경제권은 네가 쥐도록 해.”“두 번째 카드에 20억이 들어있는데 나랑 준혁이 아버지가 주는 출산 지원금이야. 물론 이건 아이 하나 키우는 비용으로 생각한 거고 만약 둘째까지 가질 생각이 있다면 이 카드에 20억을 더 입금해 줄게.”“그리고 이 세 번째 카드는... 만에 하나 준혁이가 너를 힘들게 한다면 네가 언제든지 새 삶을 시작할 수 있게 해줄 밑천이야. 물론 이 카드는 네가 영원히 쓸 일이 없기를 바란다만.”성혜미가 두 번째 함을 다 소개한 뒤 세 번째 함을 열었다. 그 안에 부동산 등기 등본과 계약서 한 부가 들어있었다.“준혁이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이 대학가 근처라 좀 번잡할 거야. 이건 우리가 준비한 신혼집이야.”해울시는 영향력이 큰 핵심 도시였다. 목주시가 해울시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발전한 도시였다.그런 곳에 위치한 100평이 넘는 별장이라면 시세만 해도 수십억을 호가할 것이다.진우정이 대략 계산해 봐도 송씨 가문에서 이번에 내놓은 예물만 최소 40억 원에 달했다.똑같이 결혼 얘기가 오갔음에도 심씨 가문 사람들은 진우정이 심용하를 사랑한다는 점을 이용해 예물은커녕 예식조차 최대한 간소하게 치르려 했었다.두 집안이 진우정을 대하는 태도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진우정의 아버지 진동원이 즉각 화답했다.“이렇게까지 마음을 써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두 아이가 맺어지게 되어 집사람과 나도 진심으로 기뻐요.”“나도 상가 거리에 있는 가게 몇 개와 현금 20억을 딸아이 혼수로 줄 생각이에요. 아이들이 행복하게 잘 살 수만 있다면 부모로서 뭐든 해줄 수 있어요.”송씨 부부와는 오랜 지기라 서로를 속속들이 잘 알만큼 정이 깊었다. 게다가 인품이 올바른 송준혁이 진우정을 오랫동안 마음에 품어왔다.진우정이 송준혁에게 시집간다면 반드시 행복해지리라 진동원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다만 마음 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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