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주효진과 엘에프, 헤르만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거짓말처럼 턴테이블의 음악도 뚝 끊겼다. 찬란했던 축제의 막이 내린 것이다.
“드디어 우리뿐이네? 앙큼한 알바생. 아니, 보육원 부지 소유자 현신 양.”
규련이 넌지시 던진 그 한마디가 기폭제가 되어, 장내의 공기는 순식간에 차갑게 빙결되었다.
현신 역시 도망치듯 매달려 있던 웃음기를 완전히 지워낸 채 그들과 정면으로 눈을 마주했다.
이 서늘한 침묵 속에서 제일 먼저 행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현신은 주저 없이 깊은 숨을 들이켜며 사죄의 고개를 숙였다.
“여러분들께는 진심으로 죄송했습니다. 제가 한비단 소속 요원이었기에 신분을 철저히 숨겨야만 하는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소년 행세를 하며 여러분들을 속이고 기만했습니다. 진심으로 송구합니다.”
진심 어린 사과가 언제나 완벽한 면죄부를 가져다주
현신은 그래도 세상에 신이 존재한다고 믿고 싶었다.엘에프는 자신에게 지독할 만큼 집요하게 파고드는 인물이었지만, 동시에 법망을 비웃는 악인들을 잔혹하게 응징해 온 단죄자이기도 했다.그렇기에 때로는 이런 사람 하나쯤은 세상에 오래 살아남아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곤 했다.그리고 뒤늦게야 알게 되었다. 아직 성별조차 모호했던 그 어린 시절부터, 핏빛 가득한 험한 세상에서 그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현신의 방패가 되어 주었다는 사실을 말이다.그를 살려준 하늘에 마음 깊이 감사했다. 또 그를 구하기로 한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비로소 확신했다.당장 찾아가 엘에프의 무사함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지만, 계영은 면회가 어려울 것이라며 현신을 다정하게 말렸다.그저 그가 무사히 깨어나 주었다는 사실 하나에 감사하며, 조용히 엘에프의 쾌유를 비는 수밖에 없었다."계영 님, 정말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네요."살다 살다 엘에프의 무사함을 바라며 그를 보고 싶어 하는 날이 올 줄이야."그럼. 살다 보면 이렇게 좋은 날도 맞이하는 법이지."역시 옛말은 틀린 게 하나 없었다.모든 일은 시간이 지나간 뒤에야 비로소 진실이 모습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현신은 이토록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서야 깨닫고 있었다.그리고 제 인생도 앞으로는 결코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아련한 예감이 계영의 다정한 미소를 통해 가슴 깊이 전해져 왔다.***가계영이 마련한 삼엄한 경호 속에서 입원 생활을 이어간 지 어느덧 일주일이 흘렀다.빅토리아 측에서 작정만 한다면 언제든 이 병원을 습격할 수도 있는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가계영과 엘에프, 김민철을 비롯해 헤르만, 한규련, 김강무, 그리고 이제는 위험인물로 지정된 현신
마침내 저녁이 되었다.계영은 가슴 가득 차오르는 안도감을 느꼈다.지독하게 길었던 시간이 마침내 흘러갔고,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한 온기로 둘러싸여 있었다. 현신이 눈을 떴고, 자신을 향해 시선을 마주해 주었으니 그에게는 더 바랄 것이 없었다.오랫동안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사명도 내려놓은 채, 계영은 마침내 마음 놓고 환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현신만 무사하다면 이제 자신에게 일어날 그 어떤 일도 상관없었다. 모든 정밀 검사 결과, 이제 기력만 회복하면 된다는 담당의의 긍정적인 소견을 들으니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중환자실에서 나온 현신이 VIP 병실로 옮겨진 후, 모두와의 면회도 이어졌다. 헤르만을 제외한 한규련, 김강무, 그리고 주효진까지 병실을 찾아와 그녀의 의식 회복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돌아갔다.하루 종일 곁을 지키며 안절부절못하던 무휼과 시온도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넨 뒤에야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모두가 남기고 간 달뜬 온기가 병실에 은은하게 맴돌았고, 현신은 차근차근 검사와 처치를 받으며 서서히 회복의 수순을 밟아 나갔다.소독을 위해 다가온 간호사가 수술 부위를 소독하며 물었다."왜 진통제 요청을 안 하세요? 소독할 때 통증이 상당할 텐데 비명도 안 지르시네요.""아······. 그럼 부탁드릴게요. 참, 간 이식 환자는 아직인가요?"현신은 눈을 뜨고 나서 그래도 엘에프의 안부가 가장 궁금했다.하지만 아직 그가 의식을 찾지 못했기에 다들 걱정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이런 현신을 바라보며 계영은 안타까운 한숨과 함께 그녀의 머리를 가만히 쓸어넘겨 주었다.여전히 하얗고 고운 얼굴, 찰랑이는 금발 위로 울긋불긋 남은 상처들을 볼 때마
무균 병동으로 옮겨진 현신의 모습은 마치 세상의 모든 굴레를 벗어던진 침묵의 조각상 같았다.창백하게 질린 피부 위로 잔상처럼 남은 긁힌 자국들, 골절 수술과 더불어 다리 쪽에 총알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를 촘촘히 메운 소독약 냄새가 짙게 감돌았다.하지만 자신이 짊어졌던 지독한 사명을 마침내 끝냈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아니면 이 비극적인 삶으로부터 해탈한 것일까.다시는 이 가혹한 세상으로 돌아오지 않을 사람처럼, 현신은 잔물결 하나 없는 평온한 표정으로 짙은 잠에 빠져 있었다.의료진의 간곡한 만류를 물리치고, 계영은 무균실 규정에 따라 멸균 가운과 마스크, 장갑까지 갖춰 입은 채 현신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가계영에게 처음부터 현신은 그 무엇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존재였다.태어나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부류의 사람. 심장이 철렁 내려앉을 만큼 서늘하고 고운 얼굴 뒤에, 어쩌면 이리도 지독할 정도의 사명감과 정의로움을 지니고 살아온 것일까.자신의 목숨까지 내던지며 한계를 뛰어넘어 버리는 현신을 향해, 계영은 매 순간 감탄을 넘어선 아득한 존경심마저 느끼고 있었다."우리 사이엔······ 아직 남은 약속이 있잖아."하지만 이대로 영영 눈을 감고 있기엔 계영의 가슴에 차오르는 서운함과 절망이 너무도 컸다.제발 부탁이니 눈을 떠달라 속으로 빌고 또 빌어도, 현신은 조금의 동요조차 없었다."신······. 엘에프 수술이 잘 끝났어. 적어도 고맙다는 인사는 직접 들어야지."몸이 이 지경이 되어서도 사람의 정신력이란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이신이라는 아이의 신장 이식 수술도 무사히 끝났다고 하더군."심장이 터져 나갈 듯한 통증에 계영은 숨을 제대로 쉬기조차 힘들었다."다른 장기 이식과 피부 이식도 모두 성공적이었어
수술은 이미 지독한 10시간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었다.달력의 장이 넘어가며 3월 1일의 봄 햇살이 세상 밖으로 높이 떠올랐을 시간이건만, 대한종합병원 지하 비밀 수술 구역의 복도는 여전히 낮과 밤의 경계조차 아득해진 시간 속에 갇혀 있었다.벽면을 따라 흐르는 차가운 형광등 불빛 아래, 짓눌린 정적만이 둔탁하게 감돌았다.수술 시간이 길어지자 복도를 채웠던 사람들도 하나둘 자리를 비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하나하나 수술이 끝난 다른 가족들도 모두 사라졌다.현장의 긴급 수습을 위해 나선 강무와 한규련을 비롯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오열하던 무휼과 시온도 지친 몸을 이끌고 잠시 허기를 달래러 자리를 옮긴 상태였다.지금 이 사늘한 공간을 지키는 사람은 헤르만과 계영, 그리고 저 멀리 구석에서 눈물을 겨우 그친 채 불안하게 휴대전화 화면만 들여다보는 주효진이 전부였다.억겁과도 같은 10시간의 정적을 견디다 못한 헤르만이 수척해진 얼굴로 계영에게 천천히 다가왔다."엘에프에게 최주현의 간을 이식받게 만들다니······. 정말 에스는 매번 예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사람을 놀라게 하는군요."덤덤하게 던진 한마디였지만, 헤르만의 지친 눈빛 끝에는 작게나마 희망의 온기가 서려 있었다.자신을 던져 남을 구원해낸 현신만의 지독하고도 숭고한 방식이라 계영 역시 벼랑 끝으로 내몰려 바스러지던 마음을 아주 조금씩 추슬렀다."그 여자가 원래 그래. 남의 인생을 아주 흔들어 놓거든."계영의 입가에 나직한 자조가 걸렸다. 헤르만은 두 손으로 얼굴을 파묻으며 마른세수를 했다."반드시 엘에프도 살아나고, 에스도 무사히 깨어날 겁니다."깊은 한숨 끝에 묻어나는 헤르만의 목소리엔 절박한 간절함과 단단한 믿음이 동시
차디찬 어둠이 대형 수술 센터 전광판 위로 짓눌려 있었다. 달력을 넘어선 시간은 3월 1일 새벽.계절은 비로소 봄의 문턱에 들어섰다지만, 대한종합병원 수술실 앞 복도의 공기는 여전히 잔혹한 한겨울의 한복판에 멈춰 있었다.국내 최고 수준의 규모를 자랑하는 이 대형병원에는 수십 개의 수술방이 존재했지만, 오늘 밤 불이 켜진 곳은 철저히 통제된 구역이었다.김민철 원장이 그동안 온갖 불법 수술을 감행해 온 비밀 구역에서 실시되는 중이다.외부의 눈을 피하기 위해 보안요원들이 철통같이 입구를 막아선 그곳에서는 지금 여러 개의 수술실 불빛이 동시에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한쪽 수술실에서는 최주현의 몸에서 장기를 적출하는 작업과 함께 시한부의 삶을 버티던 엘에프에게 간을, 어린 이신에게 신장을 이식하는 것과 더불어 심장과 안구, 피부 등 장기 기증을 기다리던 일반인들의 수술도 대규모로 함께 이루어지는 중이었다.그리고 그 맞은편 수술실에서는 현신의 골절 수술도 진행이 되고 있었다.수술이 시작된 지 어느덧 지독한 3시간이 흐르고 있었다.거대한 절망과 찰나의 희망이 칼날 같은 긴장감 속에서 위태롭게 지켜보는 사람들의 표정엔 그림자만 가득했다.“제발······ 현신이를 좀 살려주세요······ 제발요······.”시온은 의자에 힘없이 앉은 채 두 손을 모으고 울음을 토해내며 기도를 올렸다. 그녀의 떨리는 어깨를 무휼이 말없이 감싸 안았다.무휼의 얼굴 역시 하얗게 질려 있었지만, 그는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수술실로 향했다.저 멀리 구석진 창가에는
김민철이 소유하고 운영하는 대한종합병원.이동 침대에 누워 도착한 현신은 가물거리는 의식의 줄기를 겨우 붙잡고 있었다.“현신. 이 와중에 서류 작성까지······.”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현신의 의지는 바위처럼 확고했다.끝까지 의식을 놓지 않는 현신을 둘러싸고, 마동현 실장이 뒤이어 들어섰으며 무휼과 시온 역시 병원에 도착했다.“신아! 정신 차려! 힘내!”“현신! 너 무리하지 마! 왜 이러는 거야, 대체! 당장 검사부터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시온이 울컥 눈물을 터뜨리며 현신의 차가운 손을 꼭 잡아주었고, 무휼도 현신의 상태를 살피며 소리쳤다.“빨리······.”누운 채 입술을 경련하듯 움직이며 중얼거리는 현신의 모습에, 모두는 침울한 침묵 속에서 이 비극적인 상황을 지켜보았다.무휼은 현신의 눈빛에서 낯선 위화감과 서늘한 결의를 느꼈는지, 불안한 마음에 시온의 손을 꼭 쥐며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계영은 엘에프의 이송 차량이 무사히 도착하기만을 바라며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 김민철이 강무와 함께 로비에 나타났다.“감히! 이 야밤에 나를 불러내다니! 이 해괴망측한······!”한밤중에 갑작스럽게 끌려 나온 김민철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병원이 떠나가라 고함을 지르다가, 이동 침대 위 죽어가던 최주현을 발견하자마자 얼굴색을 바꾸며 크게 외쳤다.“·&m
이 남자.적이라면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여유롭지만 비틀린 웃음을 짓는 그의 아름다운 얼굴은 매우 차가웠고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살기를 풍겼다. 검은 머리의 검은 눈, 그리고 검은색 슈트까지 입은 그는 한 마리의 굶주린 재규어처럼 번득여댔다.그때, 남자는 현신의 뒷머리를 낚아채기 위해 손을 뻗었다. 겨우 그의 손목을 잡고 공격을 저지시킨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는 다시 현신을 돌리려고 했으나, 반대로 발목을 차이면서 주먹으로 남자의 배를 한 방 공격했다.휙!그 순간 쿵-, 현신의 관자놀이가 책상에 내리찍히는 불
마지막 임무가 곧 끝이 난다.지긋지긋한 가면을 쓴 생활도, 사선을 넘나들며 시간에 쫓기는 삶도. 더 이상 피를 흘릴 일도, 손에 피를 묻힐 일도 없게 된다. 폐가 터질 듯 숨차게 도망갈 일도 없겠지.그 희망을 품고 문을 연다. 그동안 머물렀던 곳과 다른 세상의 향기가 밀려왔다. 성공해서 새로운 삶을 살든, 실패해서 영원한 거짓말쟁이로 남아 죽음을 맞이하든 어쨌든 오늘이면 끝이 난다.내가 그렇게 바라고 바라던 마지막 미션. 곧 시작이다. *** 1년 전, 2월의 마지막 날. 어둠이 짙게 깔린 숲속을 검은 인영이
-안 그래도 규련이하고 궁금해하던 참이야.전화기 너머의 주인공은 가계영의 절친이자 종합병원 레지던트인 김강무다. 명문 의료가 집안의 김강무와 재벌 3세 한규련은 계영과 함께 ‘라ON’ 시절부터 동고동락하며 도시의 추악한 이면을 정화하는 데 뜻을 같이해온 유일한 이해자들이었다.“라ON 애들, 요즘도 한비단 미션 하러 다니나?”-너도 그랬으면서 새삼스럽긴.가계영 역시 금수저로 태어났으나, 부모가 악인들에게 희생되는 비극을 겪으며 세계가 무너지는 고통을 맛보았다. 하지만 김강무와 한규련의 지원 속에 요원으로 거듭났고, 제 손
독일 출신이자 이탈리아 대 부호 엘에프는 집요하게 동양인 여인의 유두를 비틀어 올리며 숨결을 앗아갔다. 그리고 갑자기 힘을 빼고 피부를 스치는 듯한 가벼운 애무로 전환해 그녀의 모든 신경을 곤두세웠다.여성은 허리를 요염하게 비틀면서 몸을 돌리려던 그때, 그는 이내 여성의 허리를 잡더니 피스톤질에 속도를 가했다.“하······!”남성은 다시 여성의 등에 입을 맞추면서 이번에는 엉덩이를 한번 거칠게 잡아 쥐었다. 그리고···.찰싹! 찰싹!한 대, 두 대. 그 엉덩이를 소리 나게 때리자, 여성에게서는 “앗! 읏!” 짧은 비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