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안 그래도 규련이하고 궁금해하던 참이야.
전화기 너머의 주인공은 가계영의 절친이자 종합병원 레지던트인 김강무다.
명문 의료가 집안의 김강무와 재벌 3세 한규련은 계영과 함께 ‘라ON’ 시절부터 동고동락하며 도시의 추악한 이면을 정화하는 데 뜻을 같이해온 유일한 이해자들이었다.
“라ON 애들, 요즘도 한비단 미션 하러 다니나?”
-너도 그랬으면서 새삼스럽긴.
가계영 역시 금수저로 태어났으나, 부모가 악인들에게 희생되는 비극을 겪으며 세계가 무너지는 고통을 맛보았다.
하지만 김강무와 한규련의 지원 속에 요원으로 거듭났고, 제 손으로 피의 복수를 끝낸 뒤 가문의 부와 권력을 되찾았다.
뛰어난 사업 수완으로 천문학적인 자산을 일궈낸 그는 이제 현장에서 은퇴해, 넘치는 돈과 시간을 들여 ‘한비단’에 의뢰를 넣고 요원들의 뒤를 봐주는 기묘한 취미를 즐기고 있었다.
“오늘 의료 재단 비리 USB를 들고 온 녀석, 기껏해야 열여섯이나 열일곱 정도로 보이더군.”
-돈이 급한 애였나? 실력은 제법이었나 보네. 네가 칭찬을 다 하고.
“중고등학생치고는 나쁘지 않았어. 자료도 정확했고.”
-자료는 언제 터뜨릴 거야?
“오늘.”
가계영의 처리는 전광석화 같았다. 이미 검찰청의 마리선 검사와 경찰청의 여렌 경위에게 모든 자료가 넘어간 상태였다.
그는 불우한 출신의 요원들이 모이는 ‘한비단’에서 인성과 능력이 검증된 이들을 남몰래 후원하거나 자신의 수하로 거두기도 했다.
-계영아, 우리 아버지 재단은 조금만 건드려. 재미있는 건 내가 직접 할 거니까.
“네 아버지는 아쉬울 게 없는 양반이지.”
-그건 칭찬으로 듣지. 참, 다음 주 재개발 지역 둘러보기로 한 거 잊지 마.
그때, 맑고 화사한 미성이 휴대전화 너머에서 울렸다. 이번에는 대한민국 손꼽히는 재벌가의 망나니인 굴지의 건설회사를 운영하는 한규련이었다.
-계영아! 나 규련. 알박기하고 있다는 그 불타버린 보육원이 문제라며? 같이 가자고.
“그래.”
-난 그럼 강무랑 이제부터 제대로 한판 놀 거다! 너 진짜 안 올 거야?
“귀찮아.”
-하하, 알았다. 쉬어라.
김강무와 한규련은 오늘 밤도 술기운을 빌려 뜨거운 밤을 보낼 모양이었다.
가계영은 설핏 미소를 지으며 통화를 종료했다. 그는 지독한 고독을 즐겼고, 혼자인 시간이 가장 편안했다. 하지만 욕조의 온도를 높이며 위스키를 들이키는 그의 눈동자엔 평소와 다른 잔상이 맺혀 있었다.
‘꼭 인생 다 산 사람처럼···.’
오늘 밤 마주했던 그 소년의 눈빛.
그 속에 일렁이던 짙은 허무의 그림자가 가계영의 가슴을 날카롭게 긁고 지나갔다. 잔을 입술에 대자, 독한 알코올이 그 소년의 강렬한 이미지를 되살려내듯 목구멍을 타고 뜨겁게 흘러내렸다.
험한 산속을 구른 탓인지 소년에게서는 싱그러운 흙내음과 나뭇잎 향이 났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달큼하고도 야릇한 향취가 숨어 있었다.
무기를 찾는다는 핑계로 그 몸 곳곳을 훑었을 때의 감촉이 손끝에 남아 있었다.
탄탄하면서도 말캉하고, 매끄러우면서도 묘하게 신경을 자극하던 그 기묘한 느낌.
하마터면 녀석을 책상 위에 엎어놓고 그대로 집어삼킬 뻔했다는 사실이 가계영을 당혹스럽게 했다.
‘눈빛은 또 왜 그렇게 허무해서··· 쯧···.’
재개발 사업 구상마저 밀어낼 만큼, 소년의 텅 빈 눈동자는 가계영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헤엄쳤다.
술잔에 맺힌 차가운 물방울이 욕조의 뜨거운 물 위로 툭, 하고 떨어졌다.
*** 일주일 뒤. 대형 대학병원 로비.배우를 압도하는 외모의 두 남자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금발에 가까운 밝은 갈색 머리에 부드러운 인상을 지닌 한규련과, 그 곁에서 서늘한 조각상 같은 위용을 뽐내는 가계영이 김강무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겹겹이 에워싼 경호원들 덕분에 병원 방문객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쏠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로비의 대형 텔레비전에서는 의료계 비리 관련 뉴스가 대서특필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사람들의 시선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듯 화면에 집중했다.
가계영은 이내 지루해졌는지 비서가 건넨 책을 읽으며 시선을 돌렸고, 한규련은 그런 계영을 보며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계영아, 이번에도 수고했어. 너 정말 대단하다.”
“별것도 아닌 일이었어.”
가계영은 늘 그랬듯 의연하고 권태로웠다. 천문학적인 자산에 명석한 두뇌, 그리고 불의를 참지 않는 올곧음까지. 한규련이 보기에 가계영은 가끔 AI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무감각하고 완벽한 존재였다.
“규련, 강무는?”
“그러게. 우리 자기는 왜 오프인데 출근해서 사서 고생일까? 그 꼼꼼함이 매력이긴 하지만 말이야.”
규련은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병원 내부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복도 끝에서 구두 소리가 울리며 규련의 비서 김정규가 다가왔다.
“전부 처리되었습니다! 병원장에게 구속영장이 발부됐다고 합니다.”
“어휴, 빠르네.”
김 비서는 안경을 추켜올리며 반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규련은 그의 추진력을 높게 평가하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가계영에게 몸을 돌렸다.
“그나저나 우리 자기는 바쁜데 재개발 사업에서는 빼줄 걸 그랬나?”
“강무 본인이 원했어.”
“역시 다정하다니까. 아, 그건 그렇고··· 이따 여기 손 베인 것 좀 봐달라고 해야겠다. 아, 따가워.”
가계영은 한규련의 엄살을 무시한 채 책장만 넘겼다. 그때 다가온 김정규가 한규련을 보며 대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사장님, 제발 철 좀 드십시오.”
“어우, 나 같은 남자한테는 이런 철없음이 매력이라니까?”
그때, 하얀 가운을 벗으며 이지적인 분위기의 남자가 다가왔다. 김강무였다.
“규련아, 계영아, 많이 기다렸지? 미안.”
“드디어 나의 성실한 강무 등장!”
김강무는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친구들에게 합류했다. 그는 텔레비전 화면 속 뉴스를 보며 가계영에게 한마디를 건넸다.
“계영아, 저거 해결하느라 고생 많았다.”
가계영은 다시 고개를 들어 뉴스 화면을 응시했다. 의료 비리의 결정적 증거가 이번 사건의 핵심이었다는 앵커의 멘트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이번에 증거 잡아 온 한비단 요원 말이야. 꽤 대단한 미인이라던데?”
김강무의 말에 무표정하던 가계영의 눈에 순식간에 날카로운 힘이 서렸다.
“뭐?”
“엄청 예쁘장한 녀석이었나 봐. 간호사 변장을 하고 감쪽같이 파일을 빼냈다는데, 병원 관계자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으더군.”
순간, 가계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날 밤 제 품 안에서 떨리던 그 기묘한 ‘소년’의 감촉과 달큼한 향취가 뇌리를 스쳤다.
그는 다시금 굳게 입을 다물었지만, 머릿속은 이미 겉잡을 수 없는 의구심으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현신은 머리가 아찔했다.자신의 입으로 한국에 가겠다고 지르긴 했으나, 그곳에 안전하게 잠입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엘에프의 조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하지만 막상 그 화려한 엘에프의 곁에서 팔짱을 끼고 상류층 사람들 사이를 누벼야 한다니,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혔다.분명 수많은 취재진이 몰릴 것이고, 내로라하는 정·재계 인사들이 가득할 터였다. 심지어 누구보다 주효진의 아버지가 개최하는 행사이니 그녀 또한 반드시 참석하지 않겠는가.“그건 불가능해요.”현신의 단호한 거절에 옆에 있던 헤르만이 웬일로 고개를 끄덕였다. 늘 무심하게 방관만 하던 헤르만이 동조해 주자, 현신은 눈을 반짝이며 도와달라는 듯 그에게 구원의 시선을 보냈다.그러자 헤르만은 미간을 좁히더니 손가락으로 현신의 어깨를 콕 집어내며 또박또박 딱딱한 음성을 건넸다.“엘에프, 이 럭비공 같은 녀석을 파트너라고 데려가면 사람들이 비웃을 거다. 상류층 예법도 전혀 모른 채 쭈뼛거릴 게 뻔한데, 네 명성에 금만 가지 않겠어?”문제라는 게 그것을 두고 한 말이었나.현신은 황당함에 눈을 부릅떴다. 헤르만의 독설을 그대로 듣고만 있을 수가 없어 곧바로 반박을 뱉어냈다.“헤르만 선배, 말씀이 좀 심하시네요. 저 몸으로 하는 건 다 잘해요! 예법도 배우면 익힐 수 있다고요. 하지만······ 엘에프 선배랑 그렇게 가는 건 싫어요. 다른 방법으로 잠입할 거예요.”“하긴, 한국 최고 상류층 중에서도 가장 영향력 있는 인간들 틈바구니에서 네가 어떻게 버티겠어. 차라리 웨이터로 위장하는 게 낫겠지.”“딱 그거예요. 전 거기 임시 고용
같은 시각, 대한민국.서울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한규련의 회사 사장실에는 오랜만에 기묘한 침묵과 함께 팽팽한 온기가 감돌았다.대주주 총회를 완벽하게 마무리 지은 뒤 사장실로 자리를 옮긴 가계영, 한규련, 그리고 김강무가 한자리에 모여 조용히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어느덧 밤이 깊어 창밖은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아늑한 실내에는 따뜻한 공기가 감돌았으나, 유리창 너머로 흩날리는 하얀 눈발은 계절이 완연한 한겨울임을 실감 나게 해주었다.늦은 식사를 마친 직후였기에, 찻잔을 만지작거리는 세 사람의 손길에는 여유가 스쳤다.“이렇게 셋이서 조용히 모이니까, 왠지 옛날 생각이 좀 나네.”한규련이 먼저 부드럽게 운을 뗐다. 그 말에 가계영은 들고 있던 찻잔 속의 맑은 액체를 가만히 응시했다.지난여름, 그 지독했던 계절에 현신이 제 곁을 떠나버린 이후로 세상은 벌써 시린 겨울로 접어들어 있었다. 홍콩에 워낙 오랫동안 머물다 온 탓인지, 그에게는 대한민국의 시간만이 유독 그 자리에 멈춰 서 있는 것만 같았다.여전히 말문을 닫고 있는 가계영의 깊은 눈동자에 언뜻 새하얀 한기가 스쳤다. 감회가 새롭다 못해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게 시려 오는 시간이었다.“그러게 말이야. 이맘때쯤 되니까 우리 마성의 알바생 생각도 좀 나고.”김강무 역시 찻잔을 입술에 대며 넌지시 한마디를 얹었다.가계영은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경청할 뿐, 굳이 감정을 표출하지 않았다. 향긋한 차를 한 모금 머금으며, 그는 오직 내면의 깊은 심연 속으로만 타오르는 집착을 삼켜냈다.‘다시 여름이 돌아오면······.’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온전히 편안해진 상태의 현신을 제 품에 안고 마주할
엘에프의 입가에 걸린 잔혹한 미소는 서서히 지워지고 있었지만, 그의 깊은 눈동자에는 기묘하리만치 희미한 평온함이 깃들었다.“감히 내 명령을 어긴 못된 부하에게 이런 상을 주다니. 내가 참 대단한 보스군, 에스. 네가 그토록 좋아하는 넘버전을 하니까 그렇게나 좋아?”현신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셔츠 깃을 흠뻑 적시며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네.”엘에프는 헤르만의 옆을 느릿하게 지나쳐 앞으로 걸어오더니, 땀에 젖은 현신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선배······. 지금 제가 땀이 많이 나서 좀 지저분합니다.”“넌 특별하니 괜찮아.”금세 변덕스럽게 표정을 지워낸 엘에프는 소름 끼치도록 다정한 손길로 현신의 얼굴과 목덜미를 깊게 쓸어내렸다.묘하게 신경을 자극하는 기분에 더해 보는 눈까지 의식한 현신은 슬그머니 몸을 물렸다.그리고 새 수건을 가져와 엘에프의 손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하얗고 고운 얼굴과 달리, 그의 손에는 확실히 거친 굳은살이 박여 있었고 크고 작은 흉터들이 가득했다. 그가 지나온 험난한 세계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손이었다.“어라, 왜 이리 친절해?”“선배도 제게 특별하니까요.”현신의 덤덤한 대답에 엘에프는 표정을 싹 지운 채, 그녀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듯 기민한 눈빛으로 관찰하기 시작했다.“너, 또 뭐 부탁할 거 있지?”역시 뱀처럼 촉이 좋은 엘에프였다. 현신은 침을 삼키며 본론을 꺼냈다.&ldqu
‘······아. 다행이다.’현신은 이것이면 되었다고 여겼다.무휼이 무사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더 바랄 것이 없었다.그녀의 극적인 안도감을 눈앞에서 지켜보던 효진은 신기하다는 듯 다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뭐야, 이게 뭐라고. 이상 없다니······ 그렇게 다행인 거야?”“네. 정말 좋은 소식이네요. 감사해요, 효진 님.”현신이 고개를 깊게 끄덕이며 진심 어린 활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효진은 다시 특유의 생글생글한 미소를 띠고 현신의 귓가로 살짝 다가와 비밀스럽게 속삭였다.“쉿. 더 있어. 잠깐, 이건 진짜 비밀 같아.”효진은 메신저 화면을 스크롤해 문자 하나를 더 현신에게 보여주었다. 대체 무슨 이야기일까, 현신은 의문을 품은 채 효진의 영리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JJ그룹 창립기념일, 자택에서 열리는 파티에 모든 사건의 열쇠 등장. ]화면 가득 박힌 문자를 현신은 보고 또 보면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설날 마지막 날에는 항상 우리 집 행사를 하거든. 그게 아빠 회사 창립기념 파티인데······. 난 이게 도통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더라.”모든 사건의 열쇠라니.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현재 사경을 헤매며 행방이 묘연한 무휼이 제 목숨과 맞바꿔 알아낸 정보가 분명했다.결코 허투루 넘길 수 없는 중대한 단서였다.그리고 위험을 무릅쓰고 상하이까지 직접 찾아와 정보를 전해준 효진
12월 중순의 상하이는 제법 쌀쌀함을 품고 있었다.상하이의 뒷골목은 낮인데도 빛이 잘 들지 않아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낡은 건물 사이로 흙바닥의 먼지가 부유하여 시야가 흐릿하게 번져갔다.현신은 평소라면 호텔 밖으로 마음대로 나설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발걸음은 상하이의 거친 거리 한복판으로 향하고 있었다.지역 토착 조직에 납치된 동료 넘버 두 명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조직의 규율을 어기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엘에프와 헤르만이 잠시 해외 출장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벌어진 사태였다.다른 상위 넘버들은 이미 구출 작전을 포기한 상태였고, 결국 현신은 자신 이하 하위 넘버들을 대동해 푸동 외곽의 낡은 건물 사이로 숨어들었다.화려한 마천루가 일색인 와이탄 구역과 달리, 이곳은 음습하고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우리 넘버 두 명은 이제 데려가겠습니다!”이곳을 점거하고 있던 지역 세력 20여 명은 현신이 이끈 무리에 의해 순식간에 제압당했다. 그리고 이곳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는 현신이 예를 갖춰 직접 상대했다.‘운동을 제법 한 사람이네. 하지만 전문 꾼은 아니야.’상대가 먼저 단검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검격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현신은 반사적으로 왼쪽으로 몸을 틀며 오른발로 허공을 찼다. 발끝에 정확히 맞았는지 둔탁한 파찰음이 공중으로 거칠게 튀어 올랐다.뒤이어 명치에 꽂힌 뒤꿈치가 상대의 갈비뼈 사이를 매섭게 파고들었다. 거구의 남자가 앓는 소리를 내며 허물어지듯 무릎을 꿇었다.피비린내와 땀 냄새가 뒤섞인 거친 숨소리가 섞인 변명이 귓전을 파고들었다.“어린 분이··&
상하이의 겨울밤은 차고 웅장했다.통유리창 너머로 몰아치는 12월의 강바람이 이곳 로열 스위트룸까지는 닿지 않을 텐데도, 맞은편에 앉은 현신의 가녀린 어깨는 유독 시리고 추워 보였다.하지만 엘에프는 제 손끝 아래서 잘게 떨리는 그녀의 손가락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속으로 기묘한 감각을 삼켰다.‘더는 흔들리는 어린아이가 아니군.’처음 제 손아귀에 들어왔을 때의 현신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고 부서질 듯 연약한 아이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 가계영이라는 거대한 파도에 부딪치며 살아남은 현신의 눈빛은 몰라보게 성숙해져 있었다.뿐만 아니라, 어느새 제 눈에 너무나도 짙은 ‘여자’의 향취를 풍기는 현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 자체가 엘에프에게는 생경하고도 신기한 경험이었다. 제 판 위에서 이토록 아름답게 진화하는 피스는 본 적이 없었으니까.엘에프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녀의 영혼을 독촉했다.“대답해. 나의 에스.”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소유욕 짙은 음성이 방 안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찰나의 정적.현신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이내 그녀의 손이 거침없이 뻗어 나왔다.탁-!정적을 깨부수며 화이트 퀸(Queen)이 판 위를 강하게 내리쳤다. 엘에프의 블랙 킹을 정면으로 겨누는 완벽한 신의 한 수였다.현신이 고개를 들어 엘에프의 깊은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 보며 선언했다.“체크메이트(Checkmate). 선배는 졌어요.”엘에프의 매끄러운 이마가 실그림자를 그리며 까딱였다.사실 그에게 오늘 체스 게임은 이겨도 그만, 져도 그만인 지루한 시간 때우기용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번뜩이는 승부욕과 두려움을 지워낸 현신의 변화무쌍
가계영은 짧게 심호흡을 하며 옥상 정원의 탁 트인 전경을 훑었다. 유리 벽 너머의 풍경은 평화로웠지만, 이곳의 공기는 김강무의 분노로 인해 날카롭게 베일 듯 서슬 퍼런 상태였다.예상대로 강무는 펄펄 뛰며 발끈했다. 항상 옆을 보지 말고, 밑바닥 인간에게 지나친 동정심을 갖지 말라며 냉정한 직언을 서슴지 않던 친구였기에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계영은 미동도 없이 그 분노를 받아냈다. 이미 가슴 깊은 곳에서 녀석이라는 존재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버린 탓에, 그 어떤 충고도 그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아무리 생각해도 이 녀석
“······안 고쳐 주셔도 돼요. 저 그냥 갈게요.”현신은 바닥만 응시하며 모기만 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 같은 그 뒷모습이 못내 마음에 걸려, 강무는 떠나려는 현신의 손목을 거칠게 붙잡았다.“규련이에게도 안 돼. 그 회사에서도 나와.” “네. 알고 있어요. 당연히 그곳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거예요.”현신의 눈물은 멈출 줄 몰랐다. 잡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연신 눈가를 훔쳐냈지만, 젖어가는 손등 위로 새로운 물방울이 계속해서 번졌다. 그 무구하고 처연한 항복을 보고 있자니, 강무는 자신이 세상에 둘도
엘에프의 기묘한 행동은 이미 선을 넘었고, 현신은 이 기묘한 오해의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 강무에게 사실을 고할 필요를 느꼈다.“일단,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관계는 아니에요.”강무가 비릿하게 입매를 비틀며 콧방귀를 뀌었다. 낮게 깔린 조소가 차 안을 가득 채웠다.“설마.” “···정말 사귀는 사이라면, 사람을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어놓고 혼자 버스 타게 내버려 두겠습니까?” “그건 그렇군. 몸은 좀 어때?”강무가 건넸던 독한 진통제가 아니었으면, 현신
‘정말 환장하겠네.’현신은 이 상황을 설계한 김강무를 당장이라도 멱살이라도 쥐고 싶었다. 그가 이 레스토랑을 예약해 주며 데이트 잘하라는 제안을 던졌을 때, 이런 끔찍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제 손으로 가계영에게 현신의 데이트 상대를 확인시켜 주려 하다니.취미가 고약하다 못해 악취가 나는 강무를 향해 현신은 차가운 눈길을 보냈지만, 정작 오늘 제일 경악한 사람은 강무 본인인 듯했다.“진짜 데이트하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