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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참 거슬리네]

Author: silver구슬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4-03 11:24:31

-안 그래도 규련이하고 궁금해하던 참이야.

전화기 너머의 주인공은 가계영의 절친이자 종합병원 레지던트인 김강무다. 

명문 의료가 집안의 김강무와 재벌 3세 한규련은 계영과 함께 ‘라ON’ 시절부터 동고동락하며 도시의 추악한 이면을 정화하는 데 뜻을 같이해온 유일한 이해자들이었다.

“라ON 애들, 요즘도 한비단 미션 하러 다니나?”

-너도 그랬으면서 새삼스럽긴.

가계영 역시 금수저로 태어났으나, 부모가 악인들에게 희생되는 비극을 겪으며 세계가 무너지는 고통을 맛보았다. 

하지만 김강무와 한규련의 지원 속에 요원으로 거듭났고, 제 손으로 피의 복수를 끝낸 뒤 가문의 부와 권력을 되찾았다.

뛰어난 사업 수완으로 천문학적인 자산을 일궈낸 그는 이제 현장에서 은퇴해, 넘치는 돈과 시간을 들여 ‘한비단’에 의뢰를 넣고 요원들의 뒤를 봐주는 기묘한 취미를 즐기고 있었다.

“오늘 의료 재단 비리 USB를 들고 온 녀석, 기껏해야 열여섯이나 열일곱 정도로 보이더군.”

-돈이 급한 애였나? 실력은 제법이었나 보네. 네가 칭찬을 다 하고.

“중고등학생치고는 나쁘지 않았어. 자료도 정확했고.”

-자료는 언제 터뜨릴 거야?

“오늘.”

가계영의 처리는 전광석화 같았다. 이미 검찰청의 마리선 검사와 경찰청의 여렌 경위에게 모든 자료가 넘어간 상태였다. 

그는 불우한 출신의 요원들이 모이는 ‘한비단’에서 인성과 능력이 검증된 이들을 남몰래 후원하거나 자신의 수하로 거두기도 했다.

-계영아, 우리 아버지 재단은 조금만 건드려. 재미있는 건 내가 직접 할 거니까.

“네 아버지는 아쉬울 게 없는 양반이지.”

-그건 칭찬으로 듣지. 참, 다음 주 재개발 지역 둘러보기로 한 거 잊지 마.

그때, 맑고 화사한 미성이 휴대전화 너머에서 울렸다. 이번에는 대한민국 손꼽히는 재벌가의 망나니인 굴지의 건설회사를 운영하는 한규련이었다.

-계영아! 나 규련. 알박기하고 있다는 그 불타버린 보육원이 문제라며? 같이 가자고.

“그래.”

-난 그럼 강무랑 이제부터 제대로 한판 놀 거다! 너 진짜 안 올 거야?

“귀찮아.”

-하하, 알았다. 쉬어라.

김강무와 한규련은 오늘 밤도 술기운을 빌려 뜨거운 밤을 보낼 모양이었다. 

가계영은 설핏 미소를 지으며 통화를 종료했다. 그는 지독한 고독을 즐겼고, 혼자인 시간이 가장 편안했다. 하지만 욕조의 온도를 높이며 위스키를 들이키는 그의 눈동자엔 평소와 다른 잔상이 맺혀 있었다.

‘꼭 인생 다 산 사람처럼···.’

오늘 밤 마주했던 그 소년의 눈빛. 

그 속에 일렁이던 짙은 허무의 그림자가 가계영의 가슴을 날카롭게 긁고 지나갔다. 잔을 입술에 대자, 독한 알코올이 그 소년의 강렬한 이미지를 되살려내듯 목구멍을 타고 뜨겁게 흘러내렸다.

험한 산속을 구른 탓인지 소년에게서는 싱그러운 흙내음과 나뭇잎 향이 났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달큼하고도 야릇한 향취가 숨어 있었다. 

무기를 찾는다는 핑계로 그 몸 곳곳을 훑었을 때의 감촉이 손끝에 남아 있었다.

탄탄하면서도 말캉하고, 매끄러우면서도 묘하게 신경을 자극하던 그 기묘한 느낌. 

하마터면 녀석을 책상 위에 엎어놓고 그대로 집어삼킬 뻔했다는 사실이 가계영을 당혹스럽게 했다.

‘눈빛은 또 왜 그렇게 허무해서··· 쯧···.’

재개발 사업 구상마저 밀어낼 만큼, 소년의 텅 빈 눈동자는 가계영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헤엄쳤다.

술잔에 맺힌 차가운 물방울이 욕조의 뜨거운 물 위로 툭, 하고 떨어졌다.

***

일주일 뒤. 대형 대학병원 로비.

배우를 압도하는 외모의 두 남자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금발에 가까운 밝은 갈색 머리에 부드러운 인상을 지닌 한규련과, 그 곁에서 서늘한 조각상 같은 위용을 뽐내는 가계영이 김강무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겹겹이 에워싼 경호원들 덕분에 병원 방문객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쏠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로비의 대형 텔레비전에서는 의료계 비리 관련 뉴스가 대서특필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사람들의 시선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듯 화면에 집중했다. 

가계영은 이내 지루해졌는지 비서가 건넨 책을 읽으며 시선을 돌렸고, 한규련은 그런 계영을 보며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계영아, 이번에도 수고했어. 너 정말 대단하다.”

“별것도 아닌 일이었어.”

가계영은 늘 그랬듯 의연하고 권태로웠다. 천문학적인 자산에 명석한 두뇌, 그리고 불의를 참지 않는 올곧음까지. 한규련이 보기에 가계영은 가끔 AI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무감각하고 완벽한 존재였다. 

“규련, 강무는?”

“그러게. 우리 자기는 왜 오프인데 출근해서 사서 고생일까? 그 꼼꼼함이 매력이긴 하지만 말이야.”

규련은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병원 내부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복도 끝에서 구두 소리가 울리며 규련의 비서 김정규가 다가왔다.

“전부 처리되었습니다! 병원장에게 구속영장이 발부됐다고 합니다.”

“어휴, 빠르네.”

김 비서는 안경을 추켜올리며 반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규련은 그의 추진력을 높게 평가하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가계영에게 몸을 돌렸다.

“그나저나 우리 자기는 바쁜데 재개발 사업에서는 빼줄 걸 그랬나?”

“강무 본인이 원했어.”

“역시 다정하다니까. 아, 그건 그렇고··· 이따 여기 손 베인 것 좀 봐달라고 해야겠다. 아, 따가워.”

가계영은 한규련의 엄살을 무시한 채 책장만 넘겼다. 그때 다가온 김정규가 한규련을 보며 대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사장님, 제발 철 좀 드십시오.”

“어우, 나 같은 남자한테는 이런 철없음이 매력이라니까?”

그때, 하얀 가운을 벗으며 이지적인 분위기의 남자가 다가왔다. 김강무였다.

“규련아, 계영아, 많이 기다렸지? 미안.”

“드디어 나의 성실한 강무 등장!”

김강무는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친구들에게 합류했다. 그는 텔레비전 화면 속 뉴스를 보며 가계영에게 한마디를 건넸다.

“계영아, 저거 해결하느라 고생 많았다.”

가계영은 다시 고개를 들어 뉴스 화면을 응시했다. 의료 비리의 결정적 증거가 이번 사건의 핵심이었다는 앵커의 멘트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이번에 증거 잡아 온 한비단 요원 말이야. 꽤 대단한 미인이라던데?”

김강무의 말에 무표정하던 가계영의 눈에 순식간에 날카로운 힘이 서렸다.

“뭐?”

“엄청 예쁘장한 녀석이었나 봐. 간호사 변장을 하고 감쪽같이 파일을 빼냈다는데, 병원 관계자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으더군.”

순간, 가계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날 밤 제 품 안에서 떨리던 그 기묘한 ‘소년’의 감촉과 달큼한 향취가 뇌리를 스쳤다. 

그는 다시금 굳게 입을 다물었지만, 머릿속은 이미 겉잡을 수 없는 의구심으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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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닥치고 내게로 와(Submit to Me)!   #60. [Strength- 칠흑 속에 가려진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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