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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참 거슬리네]

Author: silver구슬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4-03 11:24:31

-안 그래도 규련이하고 궁금해하던 참이야.

전화기 너머의 주인공은 가계영의 절친이자 종합병원 레지던트인 김강무다. 

명문 의료가 집안의 김강무와 재벌 3세 한규련은 계영과 함께 ‘라ON’ 시절부터 동고동락하며 도시의 추악한 이면을 정화하는 데 뜻을 같이해온 유일한 이해자들이었다.

“라ON 애들, 요즘도 한비단 미션 하러 다니나?”

-너도 그랬으면서 새삼스럽긴.

가계영 역시 금수저로 태어났으나, 부모가 악인들에게 희생되는 비극을 겪으며 세계가 무너지는 고통을 맛보았다. 

하지만 김강무와 한규련의 지원 속에 요원으로 거듭났고, 제 손으로 피의 복수를 끝낸 뒤 가문의 부와 권력을 되찾았다.

뛰어난 사업 수완으로 천문학적인 자산을 일궈낸 그는 이제 현장에서 은퇴해, 넘치는 돈과 시간을 들여 ‘한비단’에 의뢰를 넣고 요원들의 뒤를 봐주는 기묘한 취미를 즐기고 있었다.

“오늘 의료 재단 비리 USB를 들고 온 녀석, 기껏해야 열여섯이나 열일곱 정도로 보이더군.”

-돈이 급한 애였나? 실력은 제법이었나 보네. 네가 칭찬을 다 하고.

“중고등학생치고는 나쁘지 않았어. 자료도 정확했고.”

-자료는 언제 터뜨릴 거야?

“오늘.”

가계영의 처리는 전광석화 같았다. 이미 검찰청의 마리선 검사와 경찰청의 여렌 경위에게 모든 자료가 넘어간 상태였다. 

그는 불우한 출신의 요원들이 모이는 ‘한비단’에서 인성과 능력이 검증된 이들을 남몰래 후원하거나 자신의 수하로 거두기도 했다.

-계영아, 우리 아버지 재단은 조금만 건드려. 재미있는 건 내가 직접 할 거니까.

“네 아버지는 아쉬울 게 없는 양반이지.”

-그건 칭찬으로 듣지. 참, 다음 주 재개발 지역 둘러보기로 한 거 잊지 마.

그때, 맑고 화사한 미성이 휴대전화 너머에서 울렸다. 이번에는 대한민국 손꼽히는 재벌가의 망나니인 굴지의 건설회사를 운영하는 한규련이었다.

-계영아! 나 규련. 알박기하고 있다는 그 불타버린 보육원이 문제라며? 같이 가자고.

“그래.”

-난 그럼 강무랑 이제부터 제대로 한판 놀 거다! 너 진짜 안 올 거야?

“귀찮아.”

-하하, 알았다. 쉬어라.

김강무와 한규련은 오늘 밤도 술기운을 빌려 뜨거운 밤을 보낼 모양이었다. 

가계영은 설핏 미소를 지으며 통화를 종료했다. 그는 지독한 고독을 즐겼고, 혼자인 시간이 가장 편안했다. 하지만 욕조의 온도를 높이며 위스키를 들이키는 그의 눈동자엔 평소와 다른 잔상이 맺혀 있었다.

‘꼭 인생 다 산 사람처럼···.’

오늘 밤 마주했던 그 소년의 눈빛. 

그 속에 일렁이던 짙은 허무의 그림자가 가계영의 가슴을 날카롭게 긁고 지나갔다. 잔을 입술에 대자, 독한 알코올이 그 소년의 강렬한 이미지를 되살려내듯 목구멍을 타고 뜨겁게 흘러내렸다.

험한 산속을 구른 탓인지 소년에게서는 싱그러운 흙내음과 나뭇잎 향이 났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달큼하고도 야릇한 향취가 숨어 있었다. 

무기를 찾는다는 핑계로 그 몸 곳곳을 훑었을 때의 감촉이 손끝에 남아 있었다.

탄탄하면서도 말캉하고, 매끄러우면서도 묘하게 신경을 자극하던 그 기묘한 느낌. 

하마터면 녀석을 책상 위에 엎어놓고 그대로 집어삼킬 뻔했다는 사실이 가계영을 당혹스럽게 했다.

‘눈빛은 또 왜 그렇게 허무해서··· 쯧···.’

재개발 사업 구상마저 밀어낼 만큼, 소년의 텅 빈 눈동자는 가계영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헤엄쳤다.

술잔에 맺힌 차가운 물방울이 욕조의 뜨거운 물 위로 툭, 하고 떨어졌다.

***

일주일 뒤. 대형 대학병원 로비.

배우를 압도하는 외모의 두 남자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금발에 가까운 밝은 갈색 머리에 부드러운 인상을 지닌 한규련과, 그 곁에서 서늘한 조각상 같은 위용을 뽐내는 가계영이 김강무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겹겹이 에워싼 경호원들 덕분에 병원 방문객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쏠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로비의 대형 텔레비전에서는 의료계 비리 관련 뉴스가 대서특필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사람들의 시선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듯 화면에 집중했다. 

가계영은 이내 지루해졌는지 비서가 건넨 책을 읽으며 시선을 돌렸고, 한규련은 그런 계영을 보며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계영아, 이번에도 수고했어. 너 정말 대단하다.”

“별것도 아닌 일이었어.”

가계영은 늘 그랬듯 의연하고 권태로웠다. 천문학적인 자산에 명석한 두뇌, 그리고 불의를 참지 않는 올곧음까지. 한규련이 보기에 가계영은 가끔 AI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무감각하고 완벽한 존재였다. 

“규련, 강무는?”

“그러게. 우리 자기는 왜 오프인데 출근해서 사서 고생일까? 그 꼼꼼함이 매력이긴 하지만 말이야.”

규련은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병원 내부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복도 끝에서 구두 소리가 울리며 규련의 비서 김정규가 다가왔다.

“전부 처리되었습니다! 병원장에게 구속영장이 발부됐다고 합니다.”

“어휴, 빠르네.”

김 비서는 안경을 추켜올리며 반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규련은 그의 추진력을 높게 평가하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가계영에게 몸을 돌렸다.

“그나저나 우리 자기는 바쁜데 재개발 사업에서는 빼줄 걸 그랬나?”

“강무 본인이 원했어.”

“역시 다정하다니까. 아, 그건 그렇고··· 이따 여기 손 베인 것 좀 봐달라고 해야겠다. 아, 따가워.”

가계영은 한규련의 엄살을 무시한 채 책장만 넘겼다. 그때 다가온 김정규가 한규련을 보며 대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사장님, 제발 철 좀 드십시오.”

“어우, 나 같은 남자한테는 이런 철없음이 매력이라니까?”

그때, 하얀 가운을 벗으며 이지적인 분위기의 남자가 다가왔다. 김강무였다.

“규련아, 계영아, 많이 기다렸지? 미안.”

“드디어 나의 성실한 강무 등장!”

김강무는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친구들에게 합류했다. 그는 텔레비전 화면 속 뉴스를 보며 가계영에게 한마디를 건넸다.

“계영아, 저거 해결하느라 고생 많았다.”

가계영은 다시 고개를 들어 뉴스 화면을 응시했다. 의료 비리의 결정적 증거가 이번 사건의 핵심이었다는 앵커의 멘트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이번에 증거 잡아 온 한비단 요원 말이야. 꽤 대단한 미인이라던데?”

김강무의 말에 무표정하던 가계영의 눈에 순식간에 날카로운 힘이 서렸다.

“뭐?”

“엄청 예쁘장한 녀석이었나 봐. 간호사 변장을 하고 감쪽같이 파일을 빼냈다는데, 병원 관계자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으더군.”

순간, 가계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날 밤 제 품 안에서 떨리던 그 기묘한 ‘소년’의 감촉과 달큼한 향취가 뇌리를 스쳤다. 

그는 다시금 굳게 입을 다물었지만, 머릿속은 이미 겉잡을 수 없는 의구심으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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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닥치고 내게로 와(Submit to Me)!   (완결 작가인사)

    사랑하고 존경하는 굿노벨 독자님들, 안녕하세요. 작가 [silver구슬]입니다.그동안 부족한 글이었음에도 에 큰 사랑을 보내주신 독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외전 는 굿노벨 심사가 끝나는 대로 9월 1일부터 매일 한국 시간 오전 1시 5분에 헤르만의 이야기로 차근차근 선보일 예정입니다.지난 4월 12일 굿노벨에서 연재를 시작한 이후, 단 하루도 쉬지 않고 글로 찾아뵈었습니다. 사실 다른 작품을 작업하고 공모전에도 도전하면서 진행했던 터라 만만치 않은 여정이었습니다. 조금 의욕이 과했나 싶기도 했네요.한국에서 출간되어 나름대로 좋은 성과를 냈던 완성 원고가 있었지만, 매일 정해진 시간에 예약 등록을 하는 작업은 정말 쉽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 하지만 또 그 힘겨움 만큼이나 큰 희열을 느꼈습니다. 무엇보다 제 취향껏 쓴 글이라, 수년 만에 다시 진행한 퇴고 작업마저 가슴 뭉클하고 즐거웠습니다.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분께서 읽어주셨고, 덕분에 글로벌 4개 국어 서비스까지 도전하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이었습니다.그동안 읽어주신 님/ 댓글 주신 님/ 보석주신 님/ 이 글의 편집을 도와주신 Yino Song 님/게다가 대단한 드라마와 영화를 자문하시는 종로 경찰서 및 광역 수사대에서 근무하신 이회림 형사님/의학 자문을 해주신 송X전문의 의사 선생님 등 모두 모두 감사합니다.라ON(요원 양성 기관) - 한비단(한국 비밀 첩보 단체) - 빅토리아(세계 요원 양성 기구)로 이어지는 이 세계관을 처음 떠올린 건 중학교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연습장에 끄적끄적 메모하며 혼자 구상했던 설정이었는데, 몸이 아파 갑작스레 시간이 생겼을 때 집필을 시작하면서 지금의 'silver구슬'이라는 부캐릭터가 탄생했습니다.매일 글을 쓰며 마음을 다스린 덕분일까요. 회복에 집중하여 무사히 건강의 이무를 되찾았고, 지금은 직장 생활도 잘 이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정기검진을 받으며 꾸준히 건강을 살피고 있지만, 덤으로 얻은 삶이라 생각

  • 닥치고 내게로 와(Submit to Me)!   #222(최종완결) 그냥 제게 와 주소서

    새벽. 현신이 잠든 얼굴을 가만히 살피고 나서야 계영은 조용히 거실로 나올 수 있었다.현신이 최주현을 만나기 전, 마지막 미션을 위해 고뇌하며 아침을 맞이했던 그날이 계영의 머릿속에 또렷이 스쳤다. ‘네가 바라보았을 풍경이 바로 이거였구나.’창밖의 서울 시내는 청회색이 감도는 묘한 정적과 밝음을 품고 있었다.계영은 작게 심호흡을 하고 엘에프에게 전화를 걸었다.- 켄즈 대표. 참 빨리도 전화하는군.“용건만 말해. 다음 행선지는 어디야?” -이해가 빠르니 좋군. 영국 런던.유럽을 좀 더 확실하게 장악하려는 엘에프의 거대한 계획이 엿보였다.“현신을 보내주고 싶지 않아.”- 글쎄. 약속을 잘 지키는 에스라서.계영은 다시 생각이 깊어졌다. 잠시 두 눈을 서울 상공으로 향했다.“······현신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 나는 당연히 현신 옆에 설 거고.”- 뭐, 혹처럼 붙겠다는 건가?“그래, 그리고 난 그녀를 옥스퍼드로 데려가고 싶어. 어때, 교차점이 되었지?”계영은 돌발적으로 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국내든 국외든 현신은 대학생이 되고 싶어 하는 꿈이 있었다.그때 엘에프는 계영의 마음을 잘 읽어 내기라도 하듯 천천히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그거 알고 있나? 나의 사랑스러운 에스는 똑똑해서 예전에 그곳 대학에 합격했던 이력도 있어. 나 역시 그래서 런던으로 좌표를 잡았지.계영은 너무 놀라 순간 가슴이 뛰었다. 이미 엘에프는 자신과 같은 마음이었던 건가. “재미있군. 그럼 나도 그녀 옆에서 평생교육원(Department for Continuing Education) 과정이나 다녀야겠어.”- 켄즈 대표. 어지간히도 질척거리는 사내 같아.“빠르면 올해 10월 학기(Michaelmas Term)를 다니면 되니, 영국은 당장 가야겠어.”엘에프와는 그렇게 의견의 일치가 빠르게 되어 통화를 마무리 지었다.늘 느끼는 것이지만, 엘에프와는 몇 마디 나누지 않아도 금세 명확한 답을 도출해 내는 게 참 신기할 따름이었다.고개를 들어 보니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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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닥치고 내게로 와(Submit to Me)!   #220. 행복도 강제로 누릴 수 있답니다

    현신을 먼저 보낸 뒤, 주효진은 엘에프와 티타임을 이어 나갔다.헤르만도 오늘 밤은 주효진에게 맡기고 넘버들을 데리고 일을 처리하러 나갔기에 둘만의 시간은 아주 달콤하기만 했다.“어머, 당신 너무한 거 아니에요? 신은 참 불공평해.” “그대, 그 예쁜 입으로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효진은 홍차와 마카롱, 타르트, 과일, 당고, 샌드위치까지 지지대가 휘어질 정도로 간식을 세팅해 두었다.“아픈 사람이 이렇게 섹시해도 돼요? 얼굴만 보면 당장이라도 나를 안아 들고 호텔로 직행할 것처럼 에너지가 넘치는데. 자, 어서 먹고 벌떡 일어나요.” “거듭 말하지만, 이 디저트를 다 먹으면 없던 병도 생길 것 같아.” “잘 먹어야 낫죠!”엘에프가 햇살처럼 환하게 웃으며 바라보았다.“어머, 당신 화났어요? 아하, 술이 없어서 그렇구나?” “이제 나를 좀 아는군.”효진은 딸기를 콕 찍어 엘에프에게 건네며 활짝 웃었다.“당신, 꽤 위험한 남자였더군요.” “당연한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니, 난 그게 더 놀라운데.” “그쪽 위험한 거 말고요. 우리 JJ그룹 주가가 내부 요인으로 휘청거렸는데, 당신이 바로 사업 파트너로 지정해 준 덕에 주식이 폭등 중이에요.”엘에프는 무심하게 딸기를 받아먹고는 포크를 내려놓았다.“나랑 헤르만도 돈 벌려고 투자한 거야.” “우리 집 재산을 늘려 주고 섹시하게 유약한 척을 해도 소용없어요. 당신이랑 나는 서로 즐기는 사이일 뿐이에요. 알죠?” “그대는 그래서 매력적이야.” “난 전 대륙을 누비는 프리마돈나가 될 때까지 절대 가정을 꾸리지 않을 거거든요.”엘에프가 팔짱을 낀 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앞으로 난 그대 공연에서 '브라바'를 더 오래 외칠 수 있게 되었군.” “올해도, 내년에도, 후년에도 내 공연 보러 와줘요. 아, 못 참겠네. 나랑 키스해요.”효진이 슬며시 병상 침대 위로 올라왔다.“이런, 취향이 또 바뀌겠어.” “당신에게 가을과 겨울이 생겼다니 기뻐요.” “그대, 화장 안 한 얼굴이 근사하군. 물론 옷

  • 닥치고 내게로 와(Submit to Me)!   #219. 이제 달콤한 길만 걸을 예정입니다

    역시 이것도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흐르는 눈물을 엘에프가 닦아 주었다.웃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눈물만 나왔다.가계영이 엘에프를 믿고 둘만의 시간을 보내라며 '선물'이라는 표현까지 쓰다니.“······엘에프 선배, 기분 나쁘신가 봐요.” “그래. 내가 좋을 리가 없잖아? 레이디를 울리는 건 취향이 아니거든.”이리도 아름답게 웃으면서 하는 소리라니.농담이라도 던지고 싶었지만 가벼이 굴 수 없었다. 진심으로 이 애증의 남자가 이제는 꼭 가족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이리 와.”엘에프는 웃음기를 거두고 덤덤한 표정으로 현신을 바라보았다.현신이 침상에 걸터앉아 그와의 거리를 좁혔다. 그가 손을 뻗어 현신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마치 복잡한 마음을 다 안다는 듯 다정한 손길이었다. “그래도 선배 살리고 싶었는데······ 내 손으로 해냈어요.”엘에프의 짙은 보라색 눈동자에 따스한 미소가 번졌다. 여전히 아름답고, 신비롭게 사람을 홀리는 눈이었다.“왜 매번 살려?”현신은 울지 않기 위해 울먹이면서도 입을 삐죽거렸다.“선배, 저 때문에 총까지 맞아 가며 나 살려 줬잖아요. 나도······ 그날 딱 살기 싫었는데.” “그날은 네가 원했어. 한국에 오고 싶다고 했잖아.”틀린 말이 없었다. 키맨을 찾으려했던 것은 바로 현신의 의지였다. 현신은 울컥해서 목이 따끔거렸지만, 깊게 숨을 마시며 감정을 가라앉혔다.“네. 그 지옥은 제가 선택했어요.” “게다가 악당의 간이 왜 내 몸에 붙어 있는 거야?” “악당에게 벌주려고요.”그때 엘에프의 듣기 좋은 웃는 목소리가 현신의 귓전을 파고들었다.“맘에 안 들어. 앞으로 제대로 몸을 좀 혹사해야겠군.”현신은 대꾸 대신 싱겁게 웃어 버렸다. 이 와중에도 엘에프는 느긋하게 남 일처럼 말하고 있었다.“내 병, 언제 눈치챘어?”이제 심각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건가. 계영이 주고간 주스를 한 모금 마신 현신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분당에서 번지점프할 때 무언가 이상했어요. 그 뒤로도 계속

  • 닥치고 내게로 와(Submit to Me)!   #218. 나도 이제 웃고 싶습니다

    마음이 급해진 김민철은 갑자기 여러 권의 장부를 꺼내 놓으며 설명을 시작했다.그의 시선이 닿는 곳은 가계영도, 한규련이나 김강무도 아니었다. 바로 오늘의 주인공이자 자신에게 철퇴를 내릴 전권을 쥐게 된 현신을 향해 있었다.“내가 원하는 건 세상이 바로 서는 거야.”김민철이 한비단 코드 타워로서 역할을 해냈다는 증거물에는 악행만 적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과거 한비단에서 세운 업적과 굵직한 사건들, 그리고 제법 바르게 세워진 정의로운 결과물도 나열되어 있었다.수기로 작성된 매우 낡은 수첩부터 최근 엑셀로 정리되어 출력된 파일까지. 현신이 직접 살펴보니 그것들은 수십 년 전부터 완수된 한비단의 임무 목록이었다. 초창기 임무에는 현신이 태어나기도 훨씬 전의 날짜가 적혀 있었고, 세월이 흘러 검정 잉크가 보라색과 파란색으로 번져 버렸지만 여전히 알아볼 수 있게 정돈되어 있었다.“난 내 아버지로부터 이것을 물려받았을 때, 요원들의 그 피땀 어린 노력을 감사하게 생각했어.”최근 장부를 보니 현신이 해낸 임무도 적혀 있었다. 계영을 처음 만난 의료 비리, 서울에서 증거를 확보한 경찰 비리, 한규련 회사 침입 사건까지. 모두 실제 일어난 사실이었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해결하지 못한 사건을 한비단에서 정의로 이끈 역사가 나열된 상태였다.“우리 회사 창립기념일 침입 사건은 결국 배후가 백사장이었네? 그럼 엘에프는 뭐야. 도와주러 온 거였어? 날 지키라고 의뢰했잖아?” “알바생을 홍콩으로 데려간 것도 결국 엘에프가 구해주려 한 거였군.”장부에는 현신이 나라의 기밀을 유출하려는 배신자 요원이라고 누명이 씌워진 데다가, 심지어 H건설 기술을 빼돌리려는 산업 스파이 목록에도 올라 있었다.“에스, 난 그냥 최주현을 계속 믿은 것뿐이야. 네가 심지어 엘에프를 부추겨 빅토리아를 무너뜨리고 가계영도 휘둘러서 한비단을 세상에 드러내 와해하려는 인물인 줄 알았어. 널 죽이려고 한 건 사과할게.”현신은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이어 펼쳐진 자료는 한비단의 회계장부였다

  • 닥치고 내게로 와(Submit to Me)!   #10. [숨결의 거리, 0밀리미터]

    죄를 지었냐고.현신은 너무 많은 죄를 지어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또 거짓말을 하는 수밖에.“···아니요.”“풋, 귀엽게!”“살면서 죄 안 짓는 사람 없다. 거짓말도 죄지.”현신이 입술을 달싹이며 작게 말하자, 한규련과 김강무의 입가에 그 모습이 귀엽다며 옅은 미소가 번졌다.대기업 본사의 로비는 굵직한 해외 파트너사들과의 미팅 준비로 소란스러웠으나, 소파에 모여 앉은 이 세 남자는 마치 다른 시간대 위에 서 있는 사람들처럼 여유로웠다.지나가는 직원들이 사장과 그 거물급 친구들의 등장에 놀라 시선을

  • 닥치고 내게로 와(Submit to Me)!   #9. [은밀하게 침범하는 그들]

    3월의 끝자락, 창밖의 공기는 여전히 냉소적이었으나 사무실 안은 화이트칼라들이 뿜어내는 기묘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서류 더미가 스치는 소리, 키보드 두드리는 소음 사이로 현신의 목소리가 섞여 들었다.“제안서 복사 끝났습니다, 최 대리님!”“어이, 알바생! 여기 오타 좀 확인해 봐.”“예, 갑니다!”현신은 기계적으로 발을 놀렸다.지금 그녀가 걸친 헐렁한 셔츠와 알바생이라는 가명은 정체를 감추기 위한 완벽한 껍데기였다.현신은 구석진 제 책상에 앉아 엘리트들이 내놓은 오만한 종이 뭉치들을 넘겨보았다. 무미건조한 숫자와

  • 닥치고 내게로 와(Submit to Me)!   #8. [내 걱정 좀 하는 건가?]

    이무휼은 현신만 생각하면 미안하고 너무 무모해 스스로에게 화만 났다.“그 자식, 이제 갈 곳도 마땅치 않을 텐데······.”자신은 서시온을 돌봐야 했기에 가장 위험한 활동은 현신 혼자 보냈기 때문에 자괴감만 들었다.“우리 집이 너무 좁아서 안 오는 걸까? 아니면 혹시 뒤라도 밟힌 건가?”“임무 끝나면 원래 철저하게 몸 숨기는 녀석이니까······.”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 앉았음에도 현신에 대한 걱정 때문에 선뜻 수저를 들지 못했다. “내가 다쳐서··· 현신이가 힘든 임무는 혼자 다 도맡아 하는 것 같아.”서시온의 자

  • 닥치고 내게로 와(Submit to Me)!   #7. [자꾸 내게 이러시면]

    현신의 가느다란 손끝이 수치심과 분노로 부르르 떨려왔고, 그녀는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막으려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당장이라도 오토바이를 몰아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충동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가계영이 남긴 압도적인 잔상 때문인지 발끝이 바닥에 접착제라도 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이 사람들이 진짜. 살다 살다 이토록 황당하고 억울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더니, 제 땅에 발을 들이고도 도리어 침입자 취급을 당하는 현실에 현신은 기가 찼다. 마동현 실장이 무심하게 펜을 돌리며 턱을 괴고 그녀를 응시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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