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현신의 가느다란 손끝이 수치심과 분노로 부르르 떨려왔고, 그녀는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막으려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당장이라도 오토바이를 몰아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충동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가계영이 남긴 압도적인 잔상 때문인지 발끝이 바닥에 접착제라도 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이 사람들이 진짜. 살다 살다 이토록 황당하고 억울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더니, 제 땅에 발을 들이고도 도리어 침입자 취급을 당하는 현실에 현신은 기가 찼다.
마동현 실장이 무심하게 펜을 돌리며 턱을 괴고 그녀를 응시했다.
“너, 이름이랑 거주지 좀 알려줄래?”
마동현 실장의 질문에 현신의 눈썹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입가에 맴돌던 서늘한 한숨이 목구멍에 걸려 뜨겁게 타올랐다. 요원 활동 중 소년 행세를 하기 위해 미리 허락을 받아두었던 지인의 신분을 댈까 잠시 갈등이 일었다.
“아저씨, 이런 거 엄연한 개인정보잖아요. 초면에 막무가내로 알려달라는 거 범죄 아닌가요?”
현신이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가계영의 지시를 수행하던 마동현 실장은 머쓱한 기색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럼 경찰분들 모셔놓고 정식으로 이야기할까? 여기 재개발 막으려는 과격한 주민들도 많고, 아까 그분들 업무 방해하려는 자들이 하도 설쳐서 말이야.”
잠깐, 경찰? 그 단어에 현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공권력은 요원인 그녀가 가장 멀리해야 할 존재였다. 현신은 입술을 달싹이다 결국 패배감 섞인 답변을 뱉어냈다.
그녀가 몸담은 ‘한비단’은 비영리 단체이자 국가 공익을 표방하긴 하지만, 요원의 개인적 신분까지 완벽히 보장해주지는 않았다.
국가 권력의 심장부를 도려내는 위험한 임무를 수행해야 하기에, 그들은 철저히 무국적의 그림자로 머물러야 했다. 대규모 테러 진압 시에는 공조하기도 하고 막대한 보상을 받기도 하지만, 자잘한 사건 사고에서는 스스로 몸을 사리는 것이 요원들의 피곤한 숙명이었다.
가끔은 법망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어야 일이 해결되는 경우도 허다했으니까.
“어휴, 말씀드릴게요. 이름은 이신! 생년월일은 ******이에요. 저 여기 보육원 출신이니까··· 정당한 관계자 맞아요. 조사해 보면 다 나올 거예요.”
“그래? 아, 그랬구나. 협조해 줘서 고맙다.”아까의 고압적인 태도는 어디 갔는지, 이곳 출신이라는 말 한마디에 마동현 실장의 태도가 180도 부드러워졌다.
신분이 노출되는 순간 요원으로서의 생명은 끝이기에, 현신은 마음이 무거웠지만 보육원에서 함께 자란 동생의 이름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마동현 실장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 확인을 마친 듯, 평온해진 얼굴로 다시 현신에게 말을 건넸다.
“참, 저분들 나쁜 분들 아니다. 오해하지 마.”
“알았으니까, 저 좀 그냥 빨리 보내주세요.”현신은 아무리 허락받은 신분이라 해도, 현재 병원에 누워 있는 녀석의 이름을 판 것이 못내 가슴에 걸렸다. 오늘 왜 하필 이곳에 발을 들여서 이런 수모를 겪는 건지.
자책과 후회가 뒤섞여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보육원을 둘러보던 세 남자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마동현 실장이 즉각 그들에게 보고를 올렸다.
“이름은 이신. 17세 미성년자이고, 주소지는 이곳 보육원이 마지막 기록이라고 합니다.”
“잠깐! 가계영, 김강무. 그럼 이 녀석, 그 알박기 주인에 대해 아주 잘 아는 거 아니야?”순식간에 공기가 반전되며 팽팽한 긴장감이 마당을 채웠다. 한규련은 마동현 실장의 보고가 끝나기 무섭게 방실방실 웃으며 현신에게 다가왔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일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커지고 있었다.
“꼬마야. 여기 보육원 출신이라 제집처럼 들락거린 거였구나. 미안, 이제 이해했어. 그런데 말이야, 너 여기 주인인 ‘현신’이라는 여자 잘 알지? 아는 거 있으면 우리한테 좀 들려줄래?”
한규련의 질문에 현신은 머리가 핑그르르 도는 현기증을 느꼈다.
하마터면 표정 관리에 실패할 뻔했다. 역시 이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을 설득해 땅을 사들이려는 자들이었다. 현신은 애써 고개를 숙인 채, 짓눌린 심정을 억누르며 최대한 담담하게 대답했다.
“저는··· 아무 말도 못 해 드려요.”
“왜? 그 여자도 우리한테 제대로 보상받으면 팔자 고치고 잘 살 텐데?” “여기에 불이 나는 바람에··· 아이들이 다 뿔뿔이 흩어졌어요. 여기가 사라지면··· 떠나간 형, 누나들이 돌아올 마음의 고향이 영영 없어지는 거잖아요. 그래서 안 돼요.”현신은 고개를 푹 숙인 채 허망한 시선으로 그들을 향해 읊조렸다.
요양원 운영비와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 때문에 목숨을 건 요원 일을 하며 돈을 벌어야 하는 처절한 현실인데.
화마 속에서 병을 얻은 이들을 치료하고, 언젠가 이곳을 예전처럼 재건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하루하루 사선을 넘나드는 삶.
그 숭고하고도 고통스러운 이유를 이 화려한 남자들에게 일일이 설명할 길은 없었다.
“그래? 참! 가계영, 그 여자 어디 잠적해서도 빚은 꼬박꼬박 갚고 있더라. 보통내기가 아니야. 무슨 큰 그림이라도 그리고 있는 거 아닐까?”
김강무의 가벼운 한마디에 현신은 일순 등골이 오싹해졌다.
도대체 이 사람들의 정보력은 어디까지 뻗어 있는 것인가.
현신의 몸에서 맥이 탁 풀리며 제대로 서 있기조차 버거워졌다.
*** 강남 개포동의 15평 남짓한 작은 아파트.사람 사는 온기가 좁은 복도의 냉기를 밀어내고 있었다. 주방 가스레인지 위에서는 찌개가 모락모락 김을 내뿜으며 구수한 향을 풍겼다.
선량하고 듬직한 인상에 다부진 체격을 가진, 20대 초반의 이무휼이 식탁 위에 찌개 냄비를 올리며 아내를 불렀다.
“서시온, 어서 나와서 밥 먹어.”
“이무휼, 벌써 다 차렸어? 우리 남편이 세상에서 최고네!”늘씬한 몸매에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를 지닌 서시온이 침대에서 일어나 다리를 절뚝거리며 식탁으로 향했다. 그 위태로운 뒷모습을 보며 이무휼의 입가에선 안쓰러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임무 때 사용하는 서슬 퍼런 장비들이 방안을 가득 채운 탓에 거실에 침대를 둔 터라, 이 좁은 집에서도 서시온에게는 식탁까지의 거리가 아득히 멀어 보였다.
“서시온, 어제 잘 때 다리 때문에 계속 끙끙대더니··· 좀 어때?”
“어휴, 우리 남편이 밤새 꼭 안아줘서 그런가? 아침에 일어나니까 씻은 듯이 나은 것 같아.”차마 똑바로 바라보기 힘든 미안함에 이무휼은 서둘러 의자를 빼주며 서시온의 가느다란 손을 맞잡았다.
“그나저나, 현신이 녀석 일주일째 감감무소식이네.”
둘은 잠시 말을 아끼며 벽에 걸린 달력만 보고 또 바라 보았다.
무균 병동으로 옮겨진 현신의 모습은 마치 세상의 모든 굴레를 벗어던진 침묵의 조각상 같았다.창백하게 질린 피부 위로 잔상처럼 남은 긁힌 자국들, 골절 수술과 더불어 다리 쪽에 총알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를 촘촘히 메운 소독약 냄새가 짙게 감돌았다.하지만 자신이 짊어졌던 지독한 사명을 마침내 끝냈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아니면 이 비극적인 삶으로부터 해탈한 것일까.다시는 이 가혹한 세상으로 돌아오지 않을 사람처럼, 현신은 잔물결 하나 없는 평온한 표정으로 짙은 잠에 빠져 있었다.의료진의 간곡한 만류를 물리치고, 계영은 무균실 규정에 따라 멸균 가운과 마스크, 장갑까지 갖춰 입은 채 현신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가계영에게 처음부터 현신은 그 무엇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존재였다.태어나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부류의 사람. 심장이 철렁 내려앉을 만큼 서늘하고 고운 얼굴 뒤에, 어쩌면 이리도 지독할 정도의 사명감과 정의로움을 지니고 살아온 것일까.자신의 목숨까지 내던지며 한계를 뛰어넘어 버리는 현신을 향해, 계영은 매 순간 감탄을 넘어선 아득한 존경심마저 느끼고 있었다."우리 사이엔······ 아직 남은 약속이 있잖아."하지만 이대로 영영 눈을 감고 있기엔 계영의 가슴에 차오르는 서운함과 절망이 너무도 컸다.제발 부탁이니 눈을 떠달라 속으로 빌고 또 빌어도, 현신은 조금의 동요조차 없었다."신······. 엘에프 수술이 잘 끝났어. 적어도 고맙다는 인사는 직접 들어야지."몸이 이 지경이 되어서도 사람의 정신력이란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이신이라는 아이의 신장 이식 수술도 무사히 끝났다고 하더군."심장이 터져 나갈 듯한 통증에 계영은 숨을 제대로 쉬기조차 힘들었다."다른 장기 이식과 피부 이식도 모두 성공적이었어
수술은 이미 지독한 10시간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었다.달력의 장이 넘어가며 3월 1일의 봄 햇살이 세상 밖으로 높이 떠올랐을 시간이건만, 대한종합병원 지하 비밀 수술 구역의 복도는 여전히 낮과 밤의 경계조차 아득해진 시간 속에 갇혀 있었다.벽면을 따라 흐르는 차가운 형광등 불빛 아래, 짓눌린 정적만이 둔탁하게 감돌았다.수술 시간이 길어지자 복도를 채웠던 사람들도 하나둘 자리를 비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하나하나 수술이 끝난 다른 가족들도 모두 사라졌다.현장의 긴급 수습을 위해 나선 강무와 한규련을 비롯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오열하던 무휼과 시온도 지친 몸을 이끌고 잠시 허기를 달래러 자리를 옮긴 상태였다.지금 이 사늘한 공간을 지키는 사람은 헤르만과 계영, 그리고 저 멀리 구석에서 눈물을 겨우 그친 채 불안하게 휴대전화 화면만 들여다보는 주효진이 전부였다.억겁과도 같은 10시간의 정적을 견디다 못한 헤르만이 수척해진 얼굴로 계영에게 천천히 다가왔다."엘에프에게 최주현의 간을 이식받게 만들다니······. 정말 에스는 매번 예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사람을 놀라게 하는군요."덤덤하게 던진 한마디였지만, 헤르만의 지친 눈빛 끝에는 작게나마 희망의 온기가 서려 있었다.자신을 던져 남을 구원해낸 현신만의 지독하고도 숭고한 방식이라 계영 역시 벼랑 끝으로 내몰려 바스러지던 마음을 아주 조금씩 추슬렀다."그 여자가 원래 그래. 남의 인생을 아주 흔들어 놓거든."계영의 입가에 나직한 자조가 걸렸다. 헤르만은 두 손으로 얼굴을 파묻으며 마른세수를 했다."반드시 엘에프도 살아나고, 에스도 무사히 깨어날 겁니다."깊은 한숨 끝에 묻어나는 헤르만의 목소리엔 절박한 간절함과 단단한 믿음이 동시
차디찬 어둠이 대형 수술 센터 전광판 위로 짓눌려 있었다. 달력을 넘어선 시간은 3월 1일 새벽.계절은 비로소 봄의 문턱에 들어섰다지만, 대한종합병원 수술실 앞 복도의 공기는 여전히 잔혹한 한겨울의 한복판에 멈춰 있었다.국내 최고 수준의 규모를 자랑하는 이 대형병원에는 수십 개의 수술방이 존재했지만, 오늘 밤 불이 켜진 곳은 철저히 통제된 구역이었다.김민철 원장이 그동안 온갖 불법 수술을 감행해 온 비밀 구역에서 실시되는 중이다.외부의 눈을 피하기 위해 보안요원들이 철통같이 입구를 막아선 그곳에서는 지금 여러 개의 수술실 불빛이 동시에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한쪽 수술실에서는 최주현의 몸에서 장기를 적출하는 작업과 함께 시한부의 삶을 버티던 엘에프에게 간을, 어린 이신에게 신장을 이식하는 것과 더불어 심장과 안구, 피부 등 장기 기증을 기다리던 일반인들의 수술도 대규모로 함께 이루어지는 중이었다.그리고 그 맞은편 수술실에서는 현신의 골절 수술도 진행이 되고 있었다.수술이 시작된 지 어느덧 지독한 3시간이 흐르고 있었다.거대한 절망과 찰나의 희망이 칼날 같은 긴장감 속에서 위태롭게 지켜보는 사람들의 표정엔 그림자만 가득했다.“제발······ 현신이를 좀 살려주세요······ 제발요······.”시온은 의자에 힘없이 앉은 채 두 손을 모으고 울음을 토해내며 기도를 올렸다. 그녀의 떨리는 어깨를 무휼이 말없이 감싸 안았다.무휼의 얼굴 역시 하얗게 질려 있었지만, 그는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수술실로 향했다.저 멀리 구석진 창가에는
김민철이 소유하고 운영하는 대한종합병원.이동 침대에 누워 도착한 현신은 가물거리는 의식의 줄기를 겨우 붙잡고 있었다.“현신. 이 와중에 서류 작성까지······.”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현신의 의지는 바위처럼 확고했다.끝까지 의식을 놓지 않는 현신을 둘러싸고, 마동현 실장이 뒤이어 들어섰으며 무휼과 시온 역시 병원에 도착했다.“신아! 정신 차려! 힘내!”“현신! 너 무리하지 마! 왜 이러는 거야, 대체! 당장 검사부터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시온이 울컥 눈물을 터뜨리며 현신의 차가운 손을 꼭 잡아주었고, 무휼도 현신의 상태를 살피며 소리쳤다.“빨리······.”누운 채 입술을 경련하듯 움직이며 중얼거리는 현신의 모습에, 모두는 침울한 침묵 속에서 이 비극적인 상황을 지켜보았다.무휼은 현신의 눈빛에서 낯선 위화감과 서늘한 결의를 느꼈는지, 불안한 마음에 시온의 손을 꼭 쥐며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계영은 엘에프의 이송 차량이 무사히 도착하기만을 바라며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 김민철이 강무와 함께 로비에 나타났다.“감히! 이 야밤에 나를 불러내다니! 이 해괴망측한······!”한밤중에 갑작스럽게 끌려 나온 김민철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병원이 떠나가라 고함을 지르다가, 이동 침대 위 죽어가던 최주현을 발견하자마자 얼굴색을 바꾸며 크게 외쳤다.“·&m
현신은 자신이 지금 살아 있는 것인지, 아니면 죽기 일보 직전 마지막 불꽃을 태우듯 의식이 돌아온 건지 알 수 없었다.그러나 온몸의 뼈마디가 부서져 나가는 듯한 통증, 그리고 제 얼굴을 감싸 쥔 계영의 뜨겁고 일그러진 손길만큼은 지독하게 생생했다.계영은 그녀를 안아 암반 안쪽으로 조심스레 끌어당긴 상태였고, 강무 역시 드론 통신을 통해 계영의 수신기 너머로 희미한 지시를 보태고 있었다.“······어떻게 여기까지······.”입에 피가 고여 그런지 말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네 생일에 건넸던 그 선물······ GPS를 심어 놓았어.”계영은 사색이 되어 현신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주며 그래도 차분하게 대답을 건네 주었다.설마 홍콩에서부터 계영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제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있었던 것인가.지독하고 병적인 집착. 통제 불능의 스토킹에 가까운 행태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미친 집착 덕분에 현신은 오늘 밤 목숨을 건졌다.“······진짜 너무하시네요.”“모른 척해. 넌 사선을 넘나드는 여자잖아, 벌을 주고 싶으면 줘. 달게 받을 테니까······ 살기만 해. 부탁이야. 제발.”현신은 떨리는 팔을 힘들게 밀어 올렸다.벌이라니. 이 집요하고 오만한 사내에게 줄 것은 오직 상뿐이었다. 계영의 얼
설마, 아니겠지. 실종되었던 김강무의 목소리가 들리다니.그게 아니라면 최주현이 깔아놓은 함정일까.그러나 현신은 찰나의 순간, 그를 믿기로 했다. 스러져가는 의식의 끈을 이를 악물고 부여잡은 채, 인이어 너머의 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알바생, 내 말 잘 들어! 나뭇가지는 끌어안지 마! 몸을 반대쪽으로 돌려! 절벽 같아 보여도, 바로 거기에 튀어나온 평평한 암반이 있어!]그러다 균형이라도 잃고 밑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면.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여기서 현신이 죽는다고 김민철의 죄악이 깔끔히 세탁되는 것도 아니었다. 증거는 이미 흘러넘치도록 모아두었으니까.강무의 서늘한 경고가 아니었다면 부서져가는 고목을 끌어안았을 터였다. 현신은 온몸의 신경을 짓누르는 고통을 씹어삼키며 강무가 일러준 방향으로 제 몸을 비틀어 넘겼다.털썩—.아슬아슬하게 허공을 감돌던 몸뚱이가 드디어 견고하고 차가운 바위 위로 안정되게 안착했다.이 깊은 밤, 칠흑 같은 산속. 강풍이 휘몰아치고 수색 헬기 소리마저 까마득히 멀어진 이 사지에서.[바로 그거야! 잘했어!]강무의 목소리가 통신망을 깨고 선명하게 현신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야간 투시 고글이라도 끼고서 현신의 처절한 몸부림을 똑똑히 지켜보고 있는 듯했다.그리고 그 순간, 공허한 정적을 갈라치며 또 하나의 익숙한 음성이 쏟아져 들어왔다.[현신! 임무 완수해야지! 곧 갈게! 살아만 있어 줘!]‘설마, 계영 님?’꿈이 아니었다.가계영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현신의 귓가에 번져나갔다.***계영의 피는 이미 바짝 말라붙어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십수 미터 절벽에서 추락했으니 생존율은
죄를 지었냐고.현신은 너무 많은 죄를 지어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또 거짓말을 하는 수밖에.“···아니요.”“풋, 귀엽게!”“살면서 죄 안 짓는 사람 없다. 거짓말도 죄지.”현신이 입술을 달싹이며 작게 말하자, 한규련과 김강무의 입가에 그 모습이 귀엽다며 옅은 미소가 번졌다.대기업 본사의 로비는 굵직한 해외 파트너사들과의 미팅 준비로 소란스러웠으나, 소파에 모여 앉은 이 세 남자는 마치 다른 시간대 위에 서 있는 사람들처럼 여유로웠다.지나가는 직원들이 사장과 그 거물급 친구들의 등장에 놀라 시선을
3월의 끝자락, 창밖의 공기는 여전히 냉소적이었으나 사무실 안은 화이트칼라들이 뿜어내는 기묘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서류 더미가 스치는 소리, 키보드 두드리는 소음 사이로 현신의 목소리가 섞여 들었다.“제안서 복사 끝났습니다, 최 대리님!”“어이, 알바생! 여기 오타 좀 확인해 봐.”“예, 갑니다!”현신은 기계적으로 발을 놀렸다.지금 그녀가 걸친 헐렁한 셔츠와 알바생이라는 가명은 정체를 감추기 위한 완벽한 껍데기였다.현신은 구석진 제 책상에 앉아 엘리트들이 내놓은 오만한 종이 뭉치들을 넘겨보았다. 무미건조한 숫자와
이무휼은 현신만 생각하면 미안하고 너무 무모해 스스로에게 화만 났다.“그 자식, 이제 갈 곳도 마땅치 않을 텐데······.”자신은 서시온을 돌봐야 했기에 가장 위험한 활동은 현신 혼자 보냈기 때문에 자괴감만 들었다.“우리 집이 너무 좁아서 안 오는 걸까? 아니면 혹시 뒤라도 밟힌 건가?”“임무 끝나면 원래 철저하게 몸 숨기는 녀석이니까······.”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 앉았음에도 현신에 대한 걱정 때문에 선뜻 수저를 들지 못했다. “내가 다쳐서··· 현신이가 힘든 임무는 혼자 다 도맡아 하는 것 같아.”서시온의 자
마지막 임무가 곧 끝이 난다.지긋지긋한 가면을 쓴 생활도, 사선을 넘나들며 시간에 쫓기는 삶도. 더 이상 피를 흘릴 일도, 손에 피를 묻힐 일도 없게 된다. 폐가 터질 듯 숨차게 도망갈 일도 없겠지.그 희망을 품고 문을 연다. 그동안 머물렀던 곳과 다른 세상의 향기가 밀려왔다. 성공해서 새로운 삶을 살든, 실패해서 영원한 거짓말쟁이로 남아 죽음을 맞이하든 어쨌든 오늘이면 끝이 난다.내가 그렇게 바라고 바라던 마지막 미션. 곧 시작이다. *** 1년 전, 2월의 마지막 날. 어둠이 짙게 깔린 숲속을 검은 인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