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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숨결의 거리, 0밀리미터]

Author: silver구슬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4-12 19:31:58

죄를 지었냐고.

현신은 너무 많은 죄를 지어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또 거짓말을 하는 수밖에.

“···아니요.”

“풋, 귀엽게!”

“살면서 죄 안 짓는 사람 없다. 거짓말도 죄지.”

현신이 입술을 달싹이며 작게 말하자, 한규련과 김강무의 입가에 그 모습이 귀엽다며 옅은 미소가 번졌다.

대기업 본사의 로비는 굵직한 해외 파트너사들과의 미팅 준비로 소란스러웠으나, 소파에 모여 앉은 이 세 남자는 마치 다른 시간대 위에 서 있는 사람들처럼 여유로웠다.

지나가는 직원들이 사장과 그 거물급 친구들의 등장에 놀라 시선을 거두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강무야, 그나저나 꼬맹이 치료 끝났어? 어서 가자.”

“참, 잊고 있었네. 이 녀석 귀여운 얼굴 구경하느라 정신이 팔려서.”

결국, 긴 손가락을 유려하게 놀리던 강무의 ‘병원 놀이’는 현신의 손가락에 하얀 밴드를 정성스레 붙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현신은 이 기묘한 침입자들이 부담스러우면서도, 예우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강무 선생님, 감사합니다.”

“사람이 말이야, 긴장한 것하고 기가 죽은 것은 엄연히 달라. 너는 참 재미있어.”

“···네?”

“가진 것 없는 아이치고는 눈빛이 너무 당당하거든. 누군가를 그렇게나 경계한다는 건, 네가 세상의 뒷면을 너무 많이 안다는 뜻이기도 한데···.”

날카로운 통찰력을 지닌 강무의 눈빛이 다시금 현신을 물끄러미 훑었다.

마치 현신이 겹겹이 두른 거짓을 한 꺼풀씩 벗겨내려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때, 옆에 있던 한규련이 현신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능글맞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 자식 맞아. 되게 재미있고 똑똑한 녀석이라니까. 나도 안 그래도 연구 좀 해보려고. 하하!”

“연구?”

“총무과장 말이, 이 녀석 서류 검토 실력이 보통이 아니라더라고. 제안서 흐름도 딱딱 잡아내고, 영어 문법이랑 철자 틀린 것까지 귀신같이 잡아낸다나? 덕분에 총무과 서류 질이 몰라보게 높아졌대. 하하!”

아차, 싶었다.

탕비실의 달콤한 간식을 얻어먹는 재미에, 전직 요원의 본능을 죽이지 못하고 과하게 실력을 발휘한 것이 화근이었다.

한규련이 그저 놀고먹는 한량인 줄 알았는데, 그는 회사의 말단 구석에서 벌어지는 작은 소문조차 놓치지 않고 있었다.

현신의 뺨이 민망함으로 살짝 달아올랐다.

“의외네. 그럼 공부 제대로 해야지.”

가계영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는 현신의 눈동자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무거운 진심을 얹었다.

“없는 놈들은 공부든 기술이든, 뭐라도 제 손에 쥐어야 제대로 살아남는 법이다.”

“···네.”

그의 시선이 마치 거대한 파도처럼 현신을 압박해왔다.

부담감을 이기지 못한 현신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이자, 김강무가 한규련의 어깨를 두드리며 사장실 쪽으로 고갯짓을 했다.

“규련아, 사업 보고서 좀 미리 보자. 나중에 회의하다 심장마비 오기 싫으면 미리 진찰도 좀 받고.”

“맞다, 가자 가. 계영아, 넌 이 귀염둥이랑 좀 놀고 있어.”

한규련은 가계영에게 묘한 눈짓을 남기며 로비를 떠났다.

순식간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현신은 갑자기 현기증이 도는 것을 느꼈다.

하필이면, 이 세 남자 중 가장 속을 알 수 없고 위험한 가계영과 단둘이 남게 되다니.

불길했던 예감이 등줄기를 타고 서늘하게 흘러내렸다.

***

가계영은 요즘 지독한 불면증과 싸우고 있었다.

머릿속엔 온통 ‘이신’이라는 이름의 이 눈앞에 있는 소년뿐이었다.

아이돌 뺨치는 미소년이라는 둥, 성실하다는 둥 떠들던 규련의 말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람을 홀리는 그 투명한 눈동자와, 곁에 서기만 해도 들끓는 피를 가라앉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뜨겁게 달구는 듯한 청량한 체향이 문제였다.

세상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라 자부하던 가계영이었지만, 요즘의 그는 녀석을 보기 위해 이곳에 방문하는 횟수가 늘었다.

“너 공부해. 알겠지? 없는 놈들은 공부해야 해.”

그의 낮은 목소리에 현신이 흠칫 놀라며 몸매를 고쳐 잡았다.

평범한 셔츠와 청바지 차림이었지만, 녀석의 사소한 몸짓 하나하나에는 반듯한 기품이 배어 있었다.

‘유복하게 살다가 집안이라도 망한 건가.’

가계영은 그래서 인지 자신의 어린 시절 같았을까 봐 자꾸 주변을 서성이게 되었다.

불편해 하는 기색이 역력한데도, 자꾸만 손을 뻗어 저 마른 어깨를 쥐어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거짓말이다. 학교 다시 다니고 공부할 거지?”

현신은 뜨끔한 듯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말려 들어간 붉은 입술이 하얀 치아 사이에서 짓눌리며 탐스러운 빛을 냈다. 가계영의 시선이 그 붉은 점 아래로 끈적하게 머물렀다.

“당장은 사정이 있어서 힘들지만··· 언젠가는 하고 싶어요.”

“언젠가?”

“제 신변에 어수선한 것들 좀··· 해결할 건 해결하고 나면요.”

횡설수설하는 목소리엔 긴장이 가득했지만, 가계영은 그 흔들리는 눈빛 속에서 고고한 자존심을 읽어냈다.

고운 아이였다.

그 머릿속을 헤집어보고 싶을 만큼, 자꾸만 신경을 긁어대는 존재.

그때였다.

복도 너머에서 서늘하고 이질적인 분위기가 로비로 쏟아져 들어왔다.

“Schön, Sie zu sehen.(반갑습니다.)”

“Willkommen.(환영합니다.)”

그건 독일어였다.

그런데 그 순간 제 눈앞에 이신이 흠칫 놀라더니 갑자기 몸을 돌렸다. 

***

현신은 설마 설마 하며 독일어가 흘러나오는 쪽으로 시선을 슬쩍 돌려 보았다.

어수선한 무리 한가운데, 현실감을 상실한 듯한 외모의 남자들이 나타났다.

각도에 따라 은빛과 푸른빛, 그리고 불길한 보랏빛이 도는 머릿결을 가진 사내.

그리고 그 옆에는 강철처럼 단단한 체격에 은회색 눈동자를 지닌, 돈과 권력을 무기로 휘두르는 포식자 무리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

이탈리아에서 현신이 목숨을 걸고 도망쳐 나왔던 그 악몽의 주역들이 확실했다.

가계영이 기민하게 고개를 돌려 그들을 마주하려는 순간이었다.

지금까지 조용히 서 있던 자신이 번개 같은 속도로 가계영의 등 뒤로 숨어들자 그가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자신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그의 값비싼 슈트의 등자락을 작게 움켜쥐었다.

“쉿. 계영 님··· 잠깐만, 저 좀 숨겨 주세요. 제발요.”

“뭐?”

황당함에 가계영이 고개를 돌려 등 뒤를 살폈다.

현신의 작은 이마가 그의 단단한 등 근육에 콩, 하고 맞닿았다.

눈을 질질 감은 채 어린아이처럼 몸을 웅크린 그녀는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사시나무 떨듯 몸이 바르르 떨렸다.

“너 왜 이래?”

가계영이 등 너머로 자신을 보려 했지만 현신은 더 몸을 작게 웅크린 뒤 자신의 가슴을 그의 등에 갖다 대었다.

공포 때문인지, 혹은 그의 넓은 등을 끌어 안은 것 같은 밀착을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부탁드려요··· 살려주세요. 제발···.”

현신은 이제 두 눈을 꽉 감아 버렸다. 어린아이처럼 눈을 감으면 제 몸이 사라지는 마법을 믿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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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닥치고 내게로 와(Submit to Me)!   #129. 새장을 벗어날 희망, 면죄부(免罪符)

    이틀 뒤, 호텔 최상층.현신은 엘에프가 점유하고 있는 펜트하우스 바로 옆 회의실에 소집되었다.사방이 방음벽으로 차단된 정적 속에서 상위 넘버 서른 명과 어제 늦은 밤 급하게 귀국한 엘에프, 그리고 헤르만이 마주 앉아 있었다.회의석 말단에 앉은 현신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운 좋게 마카오 상황을 정리하긴 했지만, 다쳐 나간 지하 넘버들을 목격한 잔상이 뇌리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아 마음이 무거웠다.게다가 해외 일정을 마친 엘에프가 기어코 이 공식적인 회의 석상에 자신을 동석시킨 탓에, 목덜미를 짓누르는 긴장감이 한층 더 팽팽해졌다.브리핑이 끝난 뒤, 엘에프는 상위 넘버들을 물리고 현신과 헤르만만 남겨둔 채 사적인 담소를 나누는 자리를 자연스럽게 유도했다.“컨디션은 나쁘지 않군.”“엘에프, 안색이 요즘 좋아 보여.”헤르만의 말대로 엘에프는 현신이 봐도 무언가 사는 재미를 찾은 사람처럼, 눈에 띄게 활력이 넘쳤다.“대신 나의 에스는 제대로 먹고는 다니는 건가? 그새 얼굴이 더 작아졌군.”현신은 말없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손으로 제 뺨을 만졌다. 요즘 입맛이 돌 리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시간만 흐르기를 바라며 매일 아침 휴대전화 속 달력의 날짜만 확인하는 것이 그녀의 일상이었다.“운동량이 부쩍 늘어서 그런지 도통 입맛이 없더라고요. 잘 챙겨 먹을게요.”현신이 적당히 둘러대자, 헤르만이 빔프로젝터 스크린에 아시아 지도를 띄우며 본격적인 비공식 브리핑을 시작했다.“엘에프, 에스 덕분에 지하 넘버들을 이끌고 마카오로 넘어가 소요 사태를 깔끔하게 정리했어. 중국 본토 세력이 홍콩 쪽 국경을 침범하려던 움직임은 내가 차단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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