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3월의 끝자락, 창밖의 공기는 여전히 냉소적이었으나 사무실 안은 화이트칼라들이 뿜어내는 기묘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서류 더미가 스치는 소리, 키보드 두드리는 소음 사이로 현신의 목소리가 섞여 들었다.
“제안서 복사 끝났습니다, 최 대리님!”
“어이, 알바생! 여기 오타 좀 확인해 봐.” “예, 갑니다!”현신은 기계적으로 발을 놀렸다.
지금 그녀가 걸친 헐렁한 셔츠와 알바생이라는 가명은 정체를 감추기 위한 완벽한 껍데기였다.
현신은 구석진 제 책상에 앉아 엘리트들이 내놓은 오만한 종이 뭉치들을 넘겨보았다. 무미건조한 숫자와 텍스트의 나열은 요원 시절 배운 스킬 중 하나였기에 거뜬히 해냈다.
그때였다.
“읏.”
찰나의 쓰라림이 손가락 끝을 스쳤다.
날카롭게 날이 선 A4 용지의 단면이 무방비한 살점을 깊게 파고든 것.
백지 위로 붉은 혈조가 번져나갈까 제 손보다 보고서부터 살폈다.
현신은 속으로 짧은 혀를 찼다. 짐승 같은 감각을 가진 요원답지 않은 실수였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다친 손가락을 입에 물고 쪽, 빨아 올렸다.
비릿한 철분 향이 입안 가득 퍼지며 감각을 깨웠다.
“어이, 아기처럼 손가락은 왜 물고 있어? 야하게.”
낮게 침잠된 목소리가 고막을 긁었다.
현신의 어깨가 눈에 띄게 딱딱하게 굳었다. 어느 부분이 야하다는 건지.
“윽, 닌자세요?”
놀란 눈을 치켜뜨자, 언제 다가왔는지 김강무가 기분 나쁠 정도로 빤히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회사의 오너인 한규련의 죽마고우이자 의사라는 남자.
그는 인기척도 없이 현신의 사적인 영역 안으로 바싹 들어와 있었다.
“닌자는 무슨. 네가 둔한 거지.”
“오신 줄도 몰랐네요.” “예쁘네.”이 남자. 왜 이리 시선이 예리한지.
“예?”
“손가락 말이야. 유독 희고 가늘어서, 꼭 여자애 손 같거든.”농담처럼 던지는 말이었지만, 그 너머엔 묘한 관찰욕이 서려 있었다.
현신은 무심하게 시선을 돌렸다.
불타버린 보육원에서 가계영과 이들을 마주쳤던 그날, 정체가 탄로 날 뻔했던 아찔한 전율이 여전히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듯했다.
그럼에도 적의 심장부인 이곳에 발을 들인 것은 본능적인 선택이었다.
거물일수록 가장 가까운 곳에 두어야 그들의 패를 읽을 수 있으니까.
[주 5일, 선택적 4시간 근무. 숙소 및 간식 제공. 월 200만 원.]
이 파격적인 조건은 현신에게 완벽한 은신처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계산 밖의 변수가 있었다.
사장실을 제집 안방처럼 드나드는 이 남자들의 집요하고도 노골적인 관심이었다.
“알바생, 손 예쁘다니까. 이리 내놔 봐.”
“이 정도로 안 죽습니다, 강무 선생님.”현신이 건조하게 대꾸하며 몸을 비틀었지만, 강무는 집요했다.
그의 시선이 현신의 입술에 머물다 손가락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이렇게 톡톡 튕기면 더 만져보고 싶잖아. 이리 와, 내가 치료해 줄게.”
강무의 커다란 손이 현신의 가느다란 손목을 덥석 낚아챘다.
요원으로서의 반사 신경을 억누르느라 현신의 미간에 옅은 경련이 일었다.
지금의 자신은 그저 갈 곳 없는 가난한 아르바이트생일 뿐이다. 현신은 결국 몸에 힘을 뺀 채, 그의 이끌림에 따라 터덜터덜 로비로 향했다.
*** 로비 끝, 통유리창 너머로 오후의 잔광이 쏟아지는 소파에 강무가 먼저 자리를 잡았다.그는 옆자리를 툭툭 치며 현신을 앉혔다.
그리고는 현신의 손을 제 무릎 위로 가져가 조심스럽게 살폈다.
“너희들,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낮게 깔린, 그러나 공기를 팽팽하게 긴장시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신의 심장이 찰나의 순간 박동을 멈추었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림자의 주인은 가계영이었다.
완벽하게 재단된 블랙 슈트 차림의 그는 존재만으로도 공간의 압력을 바꾸어 놓는 법을 알았다.
강무는 아랑곳하지 않고 현신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받았다.
“계영아 왔냐? 우리 귀한 알바생 부상당해서 특별 진료 중이다.”
부상이라니. 민망한 현신은 김강무를 한번 본 뒤 시선을 돌리자 가계영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의 매서운 눈동자가 현신을 아래위로 훑었다.
마치 겹겹이 두른 옷 너머의 진실을 도려내려는 듯, 그의 시선은 집요하고도 뜨거웠다.
현신은 그 타오르는 듯한 시선을 피하려 애써 먼 곳을 응시했다.
“애 데리고 뭐 하는 거야.”
가계영의 시선은 어느덧 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만지고 있는 강무의 손에 가 있었다.
“베였는데 손가락을 쪽쪽 빨고 있잖아. 그게 얼마나 자극적인지 알아? 내가 대신 빨아주고 싶을 정도라니까.”
“윽!”듣기만 해도 거북한 김강무식 농담에 현신의 등에는 소름이 돋았다.
“그건 범죄라고 했을 텐데.”
가계영이 으르렁거리듯 말하자, 김강무의 낄낄거리며 웃는 소리가 소음처럼 흩어졌다.
현신은 이들의 장난감처럼 취급받는 상황이 불쾌했다.
이를 어쩌나.
이들에게 둘러 쌓이면 절로 어깨가 늘 움츠러들었다. 그때 가계영이 가까워질수록 풍겨오는 진한 우드 향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압도적인 남성미가 사방에서 조여오는 기분이었다.
“너희들, 사장실 안 오고 여기서 뭐 해? 우리 알바생 또 괴롭히는 거야?”
이번엔 한규련까지 가세했다.
어느덧 현신은 세 남자에게 둘러싸인 형태가 되었다.
한규련은 호들갑을 떨며 현신의 반대쪽 손목을 잡아챘다.
“사내놈 손목이 왜 이렇게 가늘어? 부러지겠네. 강무야, 내 손도 좀 봐줘.”
현신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좌강무, 우규련.
이미 양손을 빼앗겨 버려 시선을 둘 곳조차 마땅치 않았다. 이 잘난 남자들은 마치 애완동물을 돌보듯 자신을 살피고 있었다.
“너무 열심히 하지 마. 너 다치는 거 보기 싫으니까.”
장난기를 거둔 강무의 다정한 말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현신은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그때,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가계영의 구두 끝동이 보였다.
그가 천천히 상체를 숙였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현신의 정수리에 닿을 듯 가까워졌다.
주변의 소음이 멀어지고, 오직 가계영의 낮은 숨소리만이 선명해졌다.
“고개 들어.”
명령조의 목소리에 현신이 천천히 눈을 들어 그를 응시했다.
가계영의 짙은 눈동자 속에는 기묘한 갈증과 풀리지 않는 의구심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가 커다란 손을 뻗어 현신의 턱끝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닿은 피부 사이로 불꽃이 튀는 듯한 전율이 일었다.
“죄지었어? 왜 눈을 못 마주쳐?”
가계영의 엄지손가락이 현신의 입술 언저리를 느릿하게 훑었다.
남장 아래 숨겨진 가느다란 목울대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그에게 들킬까 자신은 더 몸을 웅크리게 되었다.
그와의 거리는 숨소리조차 공유될 만큼 위험하게 좁혀져 있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굿노벨 독자님들, 안녕하세요. 작가 [silver구슬]입니다.그동안 부족한 글이었음에도 에 큰 사랑을 보내주신 독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외전 는 굿노벨 심사가 끝나는 대로 9월 1일부터 매일 한국 시간 오전 1시 5분에 헤르만의 이야기로 차근차근 선보일 예정입니다.지난 4월 12일 굿노벨에서 연재를 시작한 이후, 단 하루도 쉬지 않고 글로 찾아뵈었습니다. 사실 다른 작품을 작업하고 공모전에도 도전하면서 진행했던 터라 만만치 않은 여정이었습니다. 조금 의욕이 과했나 싶기도 했네요.한국에서 출간되어 나름대로 좋은 성과를 냈던 완성 원고가 있었지만, 매일 정해진 시간에 예약 등록을 하는 작업은 정말 쉽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 하지만 또 그 힘겨움 만큼이나 큰 희열을 느꼈습니다. 무엇보다 제 취향껏 쓴 글이라, 수년 만에 다시 진행한 퇴고 작업마저 가슴 뭉클하고 즐거웠습니다.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분께서 읽어주셨고, 덕분에 글로벌 4개 국어 서비스까지 도전하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이었습니다.그동안 읽어주신 님/ 댓글 주신 님/ 보석주신 님/ 이 글의 편집을 도와주신 Yino Song 님/게다가 대단한 드라마와 영화를 자문하시는 종로 경찰서 및 광역 수사대에서 근무하신 이회림 형사님/의학 자문을 해주신 송X전문의 의사 선생님 등 모두 모두 감사합니다.라ON(요원 양성 기관) - 한비단(한국 비밀 첩보 단체) - 빅토리아(세계 요원 양성 기구)로 이어지는 이 세계관을 처음 떠올린 건 중학교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연습장에 끄적끄적 메모하며 혼자 구상했던 설정이었는데, 몸이 아파 갑작스레 시간이 생겼을 때 집필을 시작하면서 지금의 'silver구슬'이라는 부캐릭터가 탄생했습니다.매일 글을 쓰며 마음을 다스린 덕분일까요. 회복에 집중하여 무사히 건강의 이무를 되찾았고, 지금은 직장 생활도 잘 이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정기검진을 받으며 꾸준히 건강을 살피고 있지만, 덤으로 얻은 삶이라 생각
새벽. 현신이 잠든 얼굴을 가만히 살피고 나서야 계영은 조용히 거실로 나올 수 있었다.현신이 최주현을 만나기 전, 마지막 미션을 위해 고뇌하며 아침을 맞이했던 그날이 계영의 머릿속에 또렷이 스쳤다. ‘네가 바라보았을 풍경이 바로 이거였구나.’창밖의 서울 시내는 청회색이 감도는 묘한 정적과 밝음을 품고 있었다.계영은 작게 심호흡을 하고 엘에프에게 전화를 걸었다.- 켄즈 대표. 참 빨리도 전화하는군.“용건만 말해. 다음 행선지는 어디야?” -이해가 빠르니 좋군. 영국 런던.유럽을 좀 더 확실하게 장악하려는 엘에프의 거대한 계획이 엿보였다.“현신을 보내주고 싶지 않아.”- 글쎄. 약속을 잘 지키는 에스라서.계영은 다시 생각이 깊어졌다. 잠시 두 눈을 서울 상공으로 향했다.“······현신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 나는 당연히 현신 옆에 설 거고.”- 뭐, 혹처럼 붙겠다는 건가?“그래, 그리고 난 그녀를 옥스퍼드로 데려가고 싶어. 어때, 교차점이 되었지?”계영은 돌발적으로 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국내든 국외든 현신은 대학생이 되고 싶어 하는 꿈이 있었다.그때 엘에프는 계영의 마음을 잘 읽어 내기라도 하듯 천천히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그거 알고 있나? 나의 사랑스러운 에스는 똑똑해서 예전에 그곳 대학에 합격했던 이력도 있어. 나 역시 그래서 런던으로 좌표를 잡았지.계영은 너무 놀라 순간 가슴이 뛰었다. 이미 엘에프는 자신과 같은 마음이었던 건가. “재미있군. 그럼 나도 그녀 옆에서 평생교육원(Department for Continuing Education) 과정이나 다녀야겠어.”- 켄즈 대표. 어지간히도 질척거리는 사내 같아.“빠르면 올해 10월 학기(Michaelmas Term)를 다니면 되니, 영국은 당장 가야겠어.”엘에프와는 그렇게 의견의 일치가 빠르게 되어 통화를 마무리 지었다.늘 느끼는 것이지만, 엘에프와는 몇 마디 나누지 않아도 금세 명확한 답을 도출해 내는 게 참 신기할 따름이었다.고개를 들어 보니 하늘
드디어 3월 중순.현신과 계영은 현관문을 들어서자마자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의 입술을 맞대며 배시시 미소를 주고받았다.“또 몇 달은 지난 것 같아요. 계영 님의 집은 올 때마다 늘 새롭네요.” “이제야 나도 맘 편히 발 뻗고 자겠다.”그 나지막한 고백에 현신은 가슴 한구석이 찡해졌다. 자신 때문에 그동안 이 남자의 심장이 얼마나 철렁거렸을지 감히 가늠조차 되지 않아 그저 죄송할 따름이었다.“죄송해요, 계영 님.”현신이 조심스레 사과하자, 계영은 다시금 그녀의 입술을 입맞춤으로 가볍게 훔쳐내며 다정한 시선을 맞추었다.“현신. 그래도 이번엔 달랐어. 네가 반드시 돌아올 거라고 믿었으니까.”계영은 가슴 정장 안쪽 주머니에서 샛노란 황금 손수건을 꺼내 보여주었다. 그러고는 다정한 손길로 주머니에 다시 쓱 넣으며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고마움과 면목 없음이 얽혀 현신은 천천히 손을 올려 제 목덜미를 더듬었다.“저도 이제 습관처럼······ 이 목걸이가 제 몸의 일부가 된 것 같아요. 계영 님의 마음이 저를 몇 번이고 살려줬어요.”이번 사건은 물론, 지난 JJ창립기념일 파티 때도 목걸이만큼은 계영이 준 것을 꼭 걸고 싶어 일부러 목이 올라오는 하이넥 드레스를 고르고 골라 입었었다. 결국 그 집요하고도 깊은 애정이 담긴 목걸이 덕분에 현신은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현신은 계영의 큰 손을 끌어당겨 목걸이가 닿아 있는 제 쇄골 위에 살포시 올려놓았다.“항상 걸어줘서 고마워.” “우리는 이렇게 늘 마음이 이어져 있었네요.”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깊은 숨결 속에 담긴 진심이 고스란히 전해졌다.그리고 참아왔던 계영의 열망이 폭발하듯 현신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침실로 걸어갈 여유조차 없었다. 두 사람은 성마른 손길로 서로의 옷을 허물어뜨리며 거실 소파 위로 엉켜 내렸다.거친 신음과 뜨거운 숨소리가 거실 가득 울려 퍼졌다. 지옥 같은 고난을 버텨낸 뒤 찾아온 관계는 한층 더 격정적이었고, 공간 전체를 활활 태울 듯 뜨겁게
현신을 먼저 보낸 뒤, 주효진은 엘에프와 티타임을 이어 나갔다.헤르만도 오늘 밤은 주효진에게 맡기고 넘버들을 데리고 일을 처리하러 나갔기에 둘만의 시간은 아주 달콤하기만 했다.“어머, 당신 너무한 거 아니에요? 신은 참 불공평해.” “그대, 그 예쁜 입으로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효진은 홍차와 마카롱, 타르트, 과일, 당고, 샌드위치까지 지지대가 휘어질 정도로 간식을 세팅해 두었다.“아픈 사람이 이렇게 섹시해도 돼요? 얼굴만 보면 당장이라도 나를 안아 들고 호텔로 직행할 것처럼 에너지가 넘치는데. 자, 어서 먹고 벌떡 일어나요.” “거듭 말하지만, 이 디저트를 다 먹으면 없던 병도 생길 것 같아.” “잘 먹어야 낫죠!”엘에프가 햇살처럼 환하게 웃으며 바라보았다.“어머, 당신 화났어요? 아하, 술이 없어서 그렇구나?” “이제 나를 좀 아는군.”효진은 딸기를 콕 찍어 엘에프에게 건네며 활짝 웃었다.“당신, 꽤 위험한 남자였더군요.” “당연한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니, 난 그게 더 놀라운데.” “그쪽 위험한 거 말고요. 우리 JJ그룹 주가가 내부 요인으로 휘청거렸는데, 당신이 바로 사업 파트너로 지정해 준 덕에 주식이 폭등 중이에요.”엘에프는 무심하게 딸기를 받아먹고는 포크를 내려놓았다.“나랑 헤르만도 돈 벌려고 투자한 거야.” “우리 집 재산을 늘려 주고 섹시하게 유약한 척을 해도 소용없어요. 당신이랑 나는 서로 즐기는 사이일 뿐이에요. 알죠?” “그대는 그래서 매력적이야.” “난 전 대륙을 누비는 프리마돈나가 될 때까지 절대 가정을 꾸리지 않을 거거든요.”엘에프가 팔짱을 낀 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앞으로 난 그대 공연에서 '브라바'를 더 오래 외칠 수 있게 되었군.” “올해도, 내년에도, 후년에도 내 공연 보러 와줘요. 아, 못 참겠네. 나랑 키스해요.”효진이 슬며시 병상 침대 위로 올라왔다.“이런, 취향이 또 바뀌겠어.” “당신에게 가을과 겨울이 생겼다니 기뻐요.” “그대, 화장 안 한 얼굴이 근사하군. 물론 옷
역시 이것도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흐르는 눈물을 엘에프가 닦아 주었다.웃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눈물만 나왔다.가계영이 엘에프를 믿고 둘만의 시간을 보내라며 '선물'이라는 표현까지 쓰다니.“······엘에프 선배, 기분 나쁘신가 봐요.” “그래. 내가 좋을 리가 없잖아? 레이디를 울리는 건 취향이 아니거든.”이리도 아름답게 웃으면서 하는 소리라니.농담이라도 던지고 싶었지만 가벼이 굴 수 없었다. 진심으로 이 애증의 남자가 이제는 꼭 가족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이리 와.”엘에프는 웃음기를 거두고 덤덤한 표정으로 현신을 바라보았다.현신이 침상에 걸터앉아 그와의 거리를 좁혔다. 그가 손을 뻗어 현신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마치 복잡한 마음을 다 안다는 듯 다정한 손길이었다. “그래도 선배 살리고 싶었는데······ 내 손으로 해냈어요.”엘에프의 짙은 보라색 눈동자에 따스한 미소가 번졌다. 여전히 아름답고, 신비롭게 사람을 홀리는 눈이었다.“왜 매번 살려?”현신은 울지 않기 위해 울먹이면서도 입을 삐죽거렸다.“선배, 저 때문에 총까지 맞아 가며 나 살려 줬잖아요. 나도······ 그날 딱 살기 싫었는데.” “그날은 네가 원했어. 한국에 오고 싶다고 했잖아.”틀린 말이 없었다. 키맨을 찾으려했던 것은 바로 현신의 의지였다. 현신은 울컥해서 목이 따끔거렸지만, 깊게 숨을 마시며 감정을 가라앉혔다.“네. 그 지옥은 제가 선택했어요.” “게다가 악당의 간이 왜 내 몸에 붙어 있는 거야?” “악당에게 벌주려고요.”그때 엘에프의 듣기 좋은 웃는 목소리가 현신의 귓전을 파고들었다.“맘에 안 들어. 앞으로 제대로 몸을 좀 혹사해야겠군.”현신은 대꾸 대신 싱겁게 웃어 버렸다. 이 와중에도 엘에프는 느긋하게 남 일처럼 말하고 있었다.“내 병, 언제 눈치챘어?”이제 심각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건가. 계영이 주고간 주스를 한 모금 마신 현신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분당에서 번지점프할 때 무언가 이상했어요. 그 뒤로도 계속
마음이 급해진 김민철은 갑자기 여러 권의 장부를 꺼내 놓으며 설명을 시작했다.그의 시선이 닿는 곳은 가계영도, 한규련이나 김강무도 아니었다. 바로 오늘의 주인공이자 자신에게 철퇴를 내릴 전권을 쥐게 된 현신을 향해 있었다.“내가 원하는 건 세상이 바로 서는 거야.”김민철이 한비단 코드 타워로서 역할을 해냈다는 증거물에는 악행만 적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과거 한비단에서 세운 업적과 굵직한 사건들, 그리고 제법 바르게 세워진 정의로운 결과물도 나열되어 있었다.수기로 작성된 매우 낡은 수첩부터 최근 엑셀로 정리되어 출력된 파일까지. 현신이 직접 살펴보니 그것들은 수십 년 전부터 완수된 한비단의 임무 목록이었다. 초창기 임무에는 현신이 태어나기도 훨씬 전의 날짜가 적혀 있었고, 세월이 흘러 검정 잉크가 보라색과 파란색으로 번져 버렸지만 여전히 알아볼 수 있게 정돈되어 있었다.“난 내 아버지로부터 이것을 물려받았을 때, 요원들의 그 피땀 어린 노력을 감사하게 생각했어.”최근 장부를 보니 현신이 해낸 임무도 적혀 있었다. 계영을 처음 만난 의료 비리, 서울에서 증거를 확보한 경찰 비리, 한규련 회사 침입 사건까지. 모두 실제 일어난 사실이었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해결하지 못한 사건을 한비단에서 정의로 이끈 역사가 나열된 상태였다.“우리 회사 창립기념일 침입 사건은 결국 배후가 백사장이었네? 그럼 엘에프는 뭐야. 도와주러 온 거였어? 날 지키라고 의뢰했잖아?” “알바생을 홍콩으로 데려간 것도 결국 엘에프가 구해주려 한 거였군.”장부에는 현신이 나라의 기밀을 유출하려는 배신자 요원이라고 누명이 씌워진 데다가, 심지어 H건설 기술을 빼돌리려는 산업 스파이 목록에도 올라 있었다.“에스, 난 그냥 최주현을 계속 믿은 것뿐이야. 네가 심지어 엘에프를 부추겨 빅토리아를 무너뜨리고 가계영도 휘둘러서 한비단을 세상에 드러내 와해하려는 인물인 줄 알았어. 널 죽이려고 한 건 사과할게.”현신은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이어 펼쳐진 자료는 한비단의 회계장부였다
죄를 지었냐고.현신은 너무 많은 죄를 지어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또 거짓말을 하는 수밖에.“···아니요.”“풋, 귀엽게!”“살면서 죄 안 짓는 사람 없다. 거짓말도 죄지.”현신이 입술을 달싹이며 작게 말하자, 한규련과 김강무의 입가에 그 모습이 귀엽다며 옅은 미소가 번졌다.대기업 본사의 로비는 굵직한 해외 파트너사들과의 미팅 준비로 소란스러웠으나, 소파에 모여 앉은 이 세 남자는 마치 다른 시간대 위에 서 있는 사람들처럼 여유로웠다.지나가는 직원들이 사장과 그 거물급 친구들의 등장에 놀라 시선을
이무휼은 현신만 생각하면 미안하고 너무 무모해 스스로에게 화만 났다.“그 자식, 이제 갈 곳도 마땅치 않을 텐데······.”자신은 서시온을 돌봐야 했기에 가장 위험한 활동은 현신 혼자 보냈기 때문에 자괴감만 들었다.“우리 집이 너무 좁아서 안 오는 걸까? 아니면 혹시 뒤라도 밟힌 건가?”“임무 끝나면 원래 철저하게 몸 숨기는 녀석이니까······.”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 앉았음에도 현신에 대한 걱정 때문에 선뜻 수저를 들지 못했다. “내가 다쳐서··· 현신이가 힘든 임무는 혼자 다 도맡아 하는 것 같아.”서시온의 자
현신의 가느다란 손끝이 수치심과 분노로 부르르 떨려왔고, 그녀는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막으려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당장이라도 오토바이를 몰아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충동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가계영이 남긴 압도적인 잔상 때문인지 발끝이 바닥에 접착제라도 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이 사람들이 진짜. 살다 살다 이토록 황당하고 억울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더니, 제 땅에 발을 들이고도 도리어 침입자 취급을 당하는 현실에 현신은 기가 찼다. 마동현 실장이 무심하게 펜을 돌리며 턱을 괴고 그녀를 응시했
마지막 임무가 곧 끝이 난다.지긋지긋한 가면을 쓴 생활도, 사선을 넘나들며 시간에 쫓기는 삶도. 더 이상 피를 흘릴 일도, 손에 피를 묻힐 일도 없게 된다. 폐가 터질 듯 숨차게 도망갈 일도 없겠지.그 희망을 품고 문을 연다. 그동안 머물렀던 곳과 다른 세상의 향기가 밀려왔다. 성공해서 새로운 삶을 살든, 실패해서 영원한 거짓말쟁이로 남아 죽음을 맞이하든 어쨌든 오늘이면 끝이 난다.내가 그렇게 바라고 바라던 마지막 미션. 곧 시작이다. *** 1년 전, 2월의 마지막 날. 어둠이 짙게 깔린 숲속을 검은 인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