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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or: 청산
한소희는 상궁이 자신을 법당 안으로 끌고 가는 동안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마마께서 폐하의 근심을 덜어 드릴 뜻이 없으시다면, 부처님 앞에 무릎 꿇고 지난 일을 곰곰이 돌아보시지요. 마음을 돌리실 때까지 일어나실 수 없습니다.”

쾅!

문이 닫히고 곧이어 자물쇠까지 채워졌다.

그렇게 한소희는 그 자리에서 꼬박 하루 동안 무릎을 꿇었다.

이미 쇠약해진 몸으로 밤늦도록 버티던 그녀는 한밤중이 훌쩍 지나서야 몸이 휘청하더니 그대로 방석 옆에 쓰러지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몽롱한 정신 사이로 매캐한 탄내가 스며들었다.

한소희는 번쩍 눈을 떴다.

뒤편에서는 시커먼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대들보의 단청은 이미 검게 그을렸고, 불티가 후두둑 떨어졌다.

한소희는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하루 종일 꿇고 있던 무릎은 말을 듣지 않았다.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다시 바닥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불이야...!”

연기에 잠긴 목소리로 간신히 외치자, 그제야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다급한 발소리와 비명이 뒤엉켰다.

잠시 뒤 태감 둘이 불에 뒤틀린 문을 걷어차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두 사람은 한소희의 양팔을 붙잡아 거의 끌다시피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바닥에 내려놓이자 한소희는 가슴을 움켜쥔 채 숨이 넘어갈 듯 기침을 쏟아냈다.

그때 겉옷만 급히 걸친 태후가 황급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도 여러 궁인을 거느리고 성큼성큼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불길이 완전히 잡혔을 무렵에는 법당의 절반이 이미 무너져 내린 뒤였다.

태후의 낯빛이 싸늘하게 굳었다.

“멀쩡하던 법당에 어찌 불이 났단 말이냐?”

태후는 마당 아래 엎드려 있는 궁인들을 차갑게 훑어보았다.

“샅샅이 조사하라.”

태후 곁을 모시는 태감은 이미 넋이 반쯤 나간 얼굴이었다.

그는 사람들을 데리고 안팎을 모조리 뒤졌다.

한참 뒤, 태감 둘이 어린 궁녀 하나를 끌고 와 바닥에 거칠게 내팽개쳤다.

궁녀는 땅에 엎드리자마자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태후마마, 살려 주시옵소서! 폐하, 살려 주시옵소서! 소인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옵니다... 귀, 귀비마마께서 소인에게 불을 지르라 하셨사옵니다!”

마당 안이 삽시간에 술렁였다.

한홍난은 순간 안색이 새하얗게 질리며 저도 모르게 반 걸음 물러섰다.

궁녀는 겁에 질린 나머지 두서없이 말을 쏟아냈다.

“마마께서 일이 끝나면 은자를 두둑이 주고 궁 밖으로 내보내 주겠다 하셨사옵니다. 소인이 잠시 욕심에 눈이 멀어 그만... 태후마마,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시옵소서!”

“무엄하다!”

한홍난이 날 선 목소리로 꾸짖었다.

그러고는 곧장 이건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붉어진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폐하, 신첩과 황후마마는 비록 한어머니에게서 태어나지는 않았으나, 이 궁 안에서 신첩에게 남은 유일한 혈육은 황후마마뿐이옵니다. 신첩이 어찌 마마를 해하려 이런 짓을 꾸미겠사옵니까?”

한홍난은 배 위에 손을 얹으며 울먹였다.

“더구나 신첩은 폐하의 아이를 품고 있사옵니다. 밤낮으로 이 아이의 복을 빌기에도 모자랄 판에, 어찌 천벌 받을 그런 흉악한 짓을 저지르겠사옵니까?”

그때 어린 궁녀는 쿵쿵 소리가 나도록 두 번 더 머리를 조아리더니, 황급히 소매 속에서 비녀 하나를 꺼내 들었다.

“소인은 거짓을 고한 것이 아니옵니다! 이 비녀가 바로 귀비마마께서 소인에게 내려 주신 것이옵니다!”

궁녀는 떨리는 손으로 비녀를 높이 받쳐 들었다.

“마마께서 직접 몸에 지니시던 물건이라 하셨사옵니다. 점당포에 가져가면 은자를 제법 받을 수 있으니, 증표로 잘 간직하고 있으라 하셨사옵니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비녀로 향했다.

그것은 해당화 무늬를 새긴 옥비녀였다.

옥은 맑고 윤기가 돌았으며, 비녀 몸체에는 금을 입혀 화려함을 더했다.

그 순간, 이건의 눈빛이 굳었다.

그는 눈앞에 놓인 비녀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한소희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삼 년 전 상원절, 이건은 손수 그 비녀를 한소희의 머리에 꽂아 주었다.

그때 한소희는 얼굴을 들고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예쁩니까?”

그러자 그는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너는 무엇을 해도 예쁘네.”

그 뒤로 한소희는 매일 그 비녀를 꽂고 다녔고, 단 한 번도 몸에서 떼어 놓은 적이 없었다.

이건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차갑게 굳은 시선이 한소희에게 꽂혔다.

“한소희.”

이건은 한소희 이름 석 자를 또렷이 내뱉었다. 목소리에는 살얼음 같은 노기가 서려 있었다.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감히 사람을 사주해 불을 지르게 하고, 그 죄를 홍난이에게 씌우려 하다니! 짐이 눈이 멀어 친히 내린 물건도 알아보지 못할 줄 알았느냐?”

그 말을 듣고 한소희는 고개를 들었다.

연기를 들이마신 탓에 목소리가 심하게 갈라져 있었다.

“신첩이 한 일이 아니옵니다. 저 비녀는 이미 오래전에...”

“아직도 발뺌을 하는구나.”

그때 태후가 싸늘하게 말을 끊었다.

그녀는 한소희를 차갑게 훑어본 뒤 이건에게 시선을 돌렸다.

“주상, 황후는 황후로서의 본분을 저버렸고, 불당에 불을 놓은 것도 모자라 귀비에게 죄까지 뒤집어씌우려 했다. 어느 죄목 하나 가볍지 않다. 이 어미가 보기에는 황후의 자리를 폐하고 서인으로 강등한 뒤 냉궁에 가두어, 평생 나오지 못하게 해야 마땅하다.”

이건이 입을 열기도 전에 한홍난이 갑자기 앞으로 나섰다.

“어마마마, 폐하. 언니가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렀다 하나, 그래도 신첩의 친언니이옵니다.”

한홍난은 애처로운 얼굴로 이건을 올려다보았다.

“부디 신첩과 뱃속의 아이를 보아서라도 한 번만 선처해 주시옵소서. 언니도 순간의 어리석음에 그릇된 짓을 저질렀을 뿐, 죽어 마땅한 죄를 지은 것은 아니지 않사옵니까.”

한홍난은 잠시 말을 고른 뒤 더욱 부드럽게 덧붙였다.

“차라리 고된 일을 시켜 제 잘못을 뉘우치게 하시면 족하옵니다. 굳이 사람을 끝까지 몰아세우실 이유가 있겠사옵니까?”

이건은 무릎을 꿇고 한소희를 위해 선처를 구하는 한홍난을 바라보았다.

그토록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끝까지 대의를 먼저 생각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건의 눈빛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러다 다시 한소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의 얼굴은 온통 그을음투성이였다. 그런데도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무릎을 꿇은 채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었다.

마침내 이건이 입을 열었다.

“귀비가 너를 위해 이토록 청하니, 짐도 중히 벌하지 않겠네. 대신 너에게 내린 봉인을 거두고, 오늘부터 장춘궁에 가서 귀비의 곁에서 몸소 시중을 들거라.”

이건은 서늘한 눈빛으로 한소희를 바라보았다.

“귀비는 만삭에 가까워 곧 해산을 앞두고 있네. 네가 곁에서 정성껏 보필하여 모자가 무사하다면 이번 일은 더는 묻지 않겠다.”

잠시 뒤, 이건의 목소리가 한층 더 냉랭해졌다.

“허나 홍난이나 아이에게 털끝만 한 일이라도 생긴다면... 짐은 결코 너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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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달빛 아래 묻은 마음   제19화

    창령산에는 유난히 일찍 봄이 찾아왔다.쌓였던 눈이 채 녹기도 전에 산허리의 늙은 복숭아나무에는 연분홍빛 꽃이 가지마다 앞다투어 피어났다.약초밭 가에 쪼그려 앉은 한소희는 고승훈을 따라 새로 돋은 약초 싹을 한 포기씩 옮겨 심느라 손톱 밑까지 온통 흙투성이였다.곁에 쪼그려 앉은 고승훈은 능숙한 손길로 모종을 옮기면서도 잔소리를 잊지 않았다.“그 줄은 모종 사이가 너무 좁소. 더 자라면 뿌리끼리 엉킬 것이오.”한소희는 고개도 들지 않고 대꾸했다.“잘못되면 고 의원님 책임입니다.”“내 책임이라니?”고승훈은 코웃음을 쳤다.“여기에 있는 약초들은 하나같이 귀한 것들이라네.”말은 그렇게 하나, 손으로는 이미 한소희가 삐뚤빼뚤 심어 놓은 모종의 자리를 하나씩 바로잡고 있었다.그렇게 지낸 지도 어느덧 이 년이 가까워졌다.한소희의 몸에 남아 있던 옛 상처는 모두 나았고, 칼솜씨도 금란이 이제야 봐 줄 만하다고 할 정도로 늘었다.이듬해 춘분(春分), 산 아래 장터에 다녀온 금란이 도성에서 온 서신 한 통을 가져왔다도성에 남아 있던 옛 부하들이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보낸 서신에는 짤막한 글 몇 줄만 적혀 있었다.서신을 다 읽은 한소희는 종이를 반듯하게 접어 뜰 한쪽의 돌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마침 부엌에서 약재를 넣은 국을 끓이던 고승훈이 고개를 내밀어 한소희의 안색을 살폈다.“무슨 일이오?”“이건이 황실 종친 가운데 다섯 살짜리 아이를 양자로 들여 태자로 세웠습니다. 며칠 전에는 황위를 물려주고 출가하겠다고 천하에 알렸고요.”국자를 든 고승훈의 손이 잠시 멈췄다가 이내 다시 솥 안의 국물을 저었다.“그렇구려.”무심히 대꾸했던 그는 잠시 뒤 한마디를 덧붙였다.“그러다 속세로 돌아오거든 나를 찾아오라 하시오. 대머리에 쓰는 약이 있으니.”한소희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허리를 숙일 만큼 소리 내어 웃었다.고승훈은 웃음을 터뜨린 한소희를 말없이 바라보다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고는, 몸을 돌려 약재를 넣고 끓이던 냄비를 화덕에서 들어 내렸다.

  • 달빛 아래 묻은 마음   제18화

    이건은 떠났다.빗속으로 멀어지는 말발굽 소리가 이내 거센 빗소리에 삼켜졌고, 산문 밖에 선 한소희는 일행이 어두운 빗속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마당으로 돌아오자 금란이 생강차 한 사발을 들고 처마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갔습니까?”“갔다.”생강차를 모두 마신 한소희는 빈 사발을 처마 아래 돌 탁자에 내려놓았다.“금란아, 도성에 남아 있는 사람들과 아직 연락이 닿느냐?”금란의 표정이 단번에 굳어졌다.“연락할 수 있습니다.”“그쪽 움직임을 철저히 살피라고 해라. 한홍난은 결코 만만한 자가 아니다. 감히 역모를 일으켰다면, 아버지가 쥔 병권만 믿고 나선 것은 아닐 테니, 배후에 반드시 누군가 더 있을 것이다.”금란은 망설이다 결국 입을 열었다.“아씨, 혹시... 폐하가 걱정되시는 겁니까?”“나는 누구도 걱정하지 않는다.”한소희는 흐트러진 겉옷을 여몄다.“그저 그 부녀가 뜻을 이루게 두고 싶지 않을 뿐이다.”금란은 한동안 한소희를 바라보았으나 더는 묻지 않고, 곧장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홀로 돌아가던 한소희는 비가 그친 뒤의 맑고 서늘한 산 공기를 들이마시며 몇 걸음 옮기다가, 갑자기 가슴을 짓누르는 통증에 길가의 나무를 짚고 허리를 숙여 두어 번 기침했다.“비를 맞지 말라 했건만, 말은 도통 듣지 않는군.”산길 모퉁이에는 바람막이 등불을 든 고승훈이 서 있었다.그는 곧장 다가와 다짜고짜 두 손가락으로 한소희의 손목을 짚더니, 이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냉기가 또 한 겹 깊이 스며들었소.”고승훈은 맥을 짚던 손을 거두며 못마땅한 어조로 말했다.“지난 석 달 동안 치료한 보람이 하나도 없구려.”한소희가 허리를 곧게 폈다.“그렇게 심하지는 않습니다.”“심한지 아닌지는 그대가 정할 일이 아니오.”고승훈은 잠시 한소희를 바라보다가 문득 시선을 돌렸다.“함께 내 처소로 가시게. 오늘 밤은 약을 한 첩 더 써야겠소.”“고 의원님.”한소희가 부르자 그는 걸음을 멈췄지만 돌아보지는 않았다.“감

  • 달빛 아래 묻은 마음   제17화

    한소희는 목검의 손잡이를 힘껏 움켜쥐었다.식혀 둔 차를 주전자에 담아 오던 금란은 그 말을 듣자 미간을 찌푸리며 한소희를 돌아보았다.“아씨, 제가 가서 돌려보내겠습니다.”“그럴 필요 없다.”한소희는 목검을 칼걸이에 내려놓으며 담담히 말했다.“무릎을 꿇고 싶다면 그대로 두어라.”한소희는 금란이 건넨 질그릇 사발을 받아, 식혀 둔 차를 천천히 한 모금씩 마셨다.“계속한다.”곧 목검이 나무 말뚝을 내리치는 소리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고, 아까보다 묵직해진 타격음이 끊임없이 이어졌다.두 차례의 베기 수련을 마칠 무렵,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졌다.동쪽에서 밀려온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낮은 천둥이 산등성이를 울리는 가운데, 흙냄새를 머금은 바람이 수련장으로 거세게 들이쳤다.콩알만 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을 때, 한소희는 마침 마지막 일격을 끝낸 참이었다.한소희는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처마 아래에 선 채, 수건으로 목검에 맺힌 빗물을 닦았다.그때 오늘 밤 보초를 맡은 젊은이가 산 입구 쪽에서 다급히 달려오더니, 얼굴을 타고 흐르는 빗물을 훔치며 입을 열었다.“아씨, 그자가 아직도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빗줄기는 갈수록 굵어졌고, 기왓장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금란은 한소희의 곁으로 다가가 목소리를 낮췄다.“아씨, 비가 너무 많이 내립니다. 산길에 고인 물이 벌써 발목을 넘었으니, 반 시진만 더 내리면 계곡물이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날 겁니다.”한소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때 뒤에서 고승훈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이대로 폭우가 쏟아지면 언제 계곡물이 들이닥칠지 모르오. 하필 그자가 무릎을 꿇은 곳이 물길이 지나는 자리요.”금란의 안색이 달라졌다.“아씨, 제가 가서 당장 떠나라고 하겠습니다.”“네 말은 듣지 않을 것이다.”한소희는 목검을 칼걸이에 돌려놓았다.“한번 마음먹은 일은 누가 말려도 듣지 않는 자다.”빗줄기는 더욱 거세졌고, 그 순간 하늘을 가른 번개가 수련장 전체를 섬뜩하리만큼 하얗게 밝

  • 달빛 아래 묻은 마음   제16화

    “아씨.”한소희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자 금란이 다시 불렀다.“떠나지 않겠다.”한소희가 말을 끊자 금란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아씨...”“금란아.”한소희는 산비탈 아래에 자리한 푸른 기와와 흰 담의 집들을 바라보았다.“이 사람들은 창령산에서 얼마나 오래 살았지?”금란은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마님 때부터 함께해 온 이들도 있고, 가장 늦게 들어온 이들조차 이곳에 터를 잡은 지 십여 년은 되었습니다.” “십수 년을 살아온 터전인데, 어찌 나 하나 때문에 하루아침에 떠나라고 할 수 있겠느냐?”가벼운 목소리로 물었지만 금란은 선뜻 답하지 못했다.“산 남쪽의 약초밭은 고 의원의 스승님이 일구신 곳이다. 거의 이십 년 동안 약초를 심고 가꾸어 이제야 제대로 된 밭이 되었지.”“네 수련장도 삼 년 동안 흙을 거듭 다진 끝에야 이토록 단단해졌다. 오복이를 비롯한 몇몇에게는 이 산이 조상 대대로 묘를 써 온 곳이기도 하고.”한소희는 한 곳씩 손으로 가리키다가 마지막으로 산허리의 울창한 숲을 가리켰다.“내 어머니의 의관총(衣冠塚)도 이곳에 있다.”금란은 한동안 한소희를 바라보다 나직이 웃었다.“방금 하신 말씀은 마님께서 예전에 하셨던 말씀과 꼭 같으십니다.”금란은 고개를 젓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떠나지 않으시려면 대비를 철저히 해야 합니다. 수련장 주변의 초소를 삼 리 밖까지 넓히고, 밤에는 보초를 두 배로 세우겠습니다. 앞으로 다시 그자를 마주치시더라도 절대 혼자 만나셔서는 안 됩니다.”한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다.”금란이 무언가 더 말하려던 찰나, 등 뒤에서 느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야기는 다 끝났소?”돌아보니 고승훈이 약초 광주리 곁에 서서, 그 안에서 골라낸 약재 몇 가지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몇 번 뒤집어 보던 그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팼다.“지어 둔 약을 팔아 오라고 했더니 약은 그대로 가져오고, 골칫거리만 한 무더기 달고 왔구려. 읍내 약방에서는 이 약들을 한 할이나 더

  • 달빛 아래 묻은 마음   제15화

    “아셨다 해도 저를 조금 일찍 궁 밖으로 내보내셨을 뿐이겠지요. 폐하와 한홍난의 혼사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말입니다.”“짐은 단 한 번도 너를 걸림돌이라 여긴 적이 없다.”이건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고, 목울대가 한 차례 크게 움직였다.“예, 그러셨지요.”한소희는 그의 손아귀에서 제 손목을 천천히 빼냈다.“폐하께서는 제 불같은 성정이 마음에 들지 않아, 폐하의 짝이 될 자격이 없다고 여기셨을 뿐입니다. 그래서 계략을 꾸미고 거짓 연극까지 벌여 저를 북삭으로 보내 삼 년을 살게 하셨지요. 돌아온 뒤에는 제 이복동생의 시녀가 되어 전각 문 앞에 무릎 꿇고 그 아이가 해산하는 소리까지 듣게 하셨고요.”“처음부터 끝까지 폐하께서는 저를 걸림돌이라 여기신 적이 없으셨겠지요. 애초에 폐하의 마음속에서 저는 그만한 의미조차 없는 사람이었으니까요.”이건의 눈동자가 순간 가늘어졌다.“아니다.”그는 이를 악물고 힘겹게 말을 이었다.“짐이 너를 찾아온 것은...”“무엇 때문입니까?”한소희는 이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한홍난의 본모습이 드러나고 나서야 폐하만 바라보던 한소희라는 여인이 있었다는 사실이 떠오르셨습니까?”“그런 것이 아니다.”이건은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만큼 주먹을 움켜쥐었다.“소희야, 지난날에는 짐이 너에게 몹쓸 짓을 했다. 짐이 눈이 멀어 사람을 잘못 보았고,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질렀다. 허니 짐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다오.”“필요 없습니다.”한소희는 약초 광주리를 어깨 위로 추켜메고 몸을 비껴 이건의 곁을 지나쳤다.“폐하께서는 이 나라의 왕이시니, 누구에게도 사과하실 필요가 없으십니다.”두어 걸음 옮기자 암위 하나가 앞으로 나서서 길을 막았지만, 한소희는 돌아보지 않았다.“폐하께서는 오랫동안 사람을 풀어 저를 찾으셨고, 도성에서부터 이 장터까지 쫓아오셨지요. 허나 폐하께서는 제가 북삭에 있는 삼 년 동안, 어떤 곳에서 살았는지, 무슨 고초를 겪었는지, 몸에 얼마나 많은 상처를 안고 돌아왔는지를 아십니까?”등 뒤에서는

  • 달빛 아래 묻은 마음   제14화

    그날 밤 이후, 한소희는 더욱 혹독하게 자신을 몰아붙였다. 동이 트기도 전부터 달이 중천에 걸릴 때까지 칼을 휘둘렀고, 그러는 동안 부러뜨린 목검만 세 자루였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는 딱지가 앉았다가 다시 터지기를 거듭한 끝에 거칠고 단단한 굳은살이 박혔다. 한밤중에 금란이 약을 갈아 주려고 붕대를 풀자 땀에 불어 하얗게 변한 상처 가장자리로 여린 붉은 살이 벌어져 있었다. 약을 바르던 금란의 손길이 잠시 멎더니,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씨, 고 의원님께서도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이대로 계속 무리하시면 묵은 상처가 낫기도 전에 새 상처부터 덧나서, 머지않아 몸을 상하게 될 거라 하셨습니다.”한소희는 아무 대꾸 없이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도록 내버려 둔 채, 창밖에 드리운 캄캄한 밤하늘만 바라보았다. 사흘째 해 질 무렵, 마지막 베기 동작을 끝낸 한소희는 두 손으로 무릎을 짚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새로 깎은 목검을 품에 안고 곁에 서 있던 금란은 한소희가 몸을 일으켜 다시 칼을 받으려 하자 끝내 입을 열었다. “아씨,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으시지요.” 목검을 향해 뻗던 한소희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금란은 더 캐묻지 않고 그저 목검을 건네며 말했다. “칼로 적은 벨 수 있어도 마음속 응어리까지 벨 수는 없습니다.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제게 털어놓으십시오. 혹 말씀하고 싶지 않으시면, 소인이 곁에서 함께 수련하겠습니다.”한소희는 목검을 받아 들고 손가락에 힘을 주더니, 한참 뒤에야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금란아, 나는 참 쓸모없는 사람이지?” 금란은 오랫동안 말이 없다가 한소희의 어깨를 힘주어 두드렸다. “아씨,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에도 침착하게 살길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가장 어려운 고비는 이미 넘으셨으니, 남은 것은 서두르지 말고 하나씩 해 나가시면 됩니다.” 한소희는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목검을 움켜쥐고 다시 나무 말뚝 앞으로 다가갔다. 고승훈이 수련장을 지나갈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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