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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hor: 청산
이건이 손목을 세게 움켜쥔 탓에 뼈마디가 저릴 만큼 아팠지만, 한소희는 그저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드릴 말씀이 없다?”

이건이 싸늘하게 비웃었다.

“북삭의 장군이라는 자가 네 허리 뒤에 무엇이 있는지까지 훤히 알고 있는데, 헌데도 짐에게 할 말이 없다는 것이냐?”

그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돌아온 뒤로 짐이 손끝 하나 대는 것조차 그리도 질색하더니... 북삭에서 남들에게 실컷 보이고 만져진 탓이었나 보구나.”

그 말을 듣고 한소희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입술이 가늘게 떨렸지만 끝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건은 손을 뻗어 한소희의 머리에 꽂힌 봉황 비녀를 뽑아냈다.

눈에는 차가운 조소만 가득했다.

“한 나라의 국모가 될 몸이라고?”

그는 비녀를 내려다보다 비웃듯 덧붙였다.

“네가 가당키나 하느냐?”

이건은 손에 들고 있던 봉황 비녀를 아무렇게나 바닥에 내던졌다.

“밖에 아무도 없느냐.”

밖을 지키던 태감이 곧장 문을 열고 들어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이건은 등을 돌린 채 차갑게 명했다.

“짐의 명을 전하라. 황후가 몸이 편찮으니 봉의궁에 머물며 몸을 돌볼 것이다. 또한 짐의 명이 있기 전까지는 궁문 밖으로 단 한 걸음도 나서지 못하게 하라.”

궁궐 안의 사람들은 윗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데 누구보다 빨랐다.

이건의 명이 내려진 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봉의궁의 궁인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가 그림자조차 보기 힘들어졌다.

올라오는 음식도 날이 갈수록 형편없었다.

처음 며칠은 그래도 따뜻한 죽과 찬반 몇 가지가 올라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식어 빠진 죽에 쉰 냄새 나는 만두가 전부였다.

그릇 가장자리에는 제대로 닦지도 않은 기름때까지 눌어붙어 있었다.

밤은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한여름에 얼음 공급까지 끊기니 묵은 상처가 땀에 젖어 가렵고 아리기를 거듭했다.

한소희는 밤새 몸을 뒤척이다 결국 차가운 돗자리 위에 옆으로 누워 뜬눈으로 날을 새우곤 했다.

불과 며칠 사이 몸이 눈에 띄게 야위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굳게 닫혀 있던 궁문이 열렸다.

이건이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짐이 너를 박대하라 명한 적도 없거늘, 대체 어찌하여 제 몸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이냐?”

한소희는 흐트러짐 없이 예를 올릴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건은 한층 가늘어진 한소희의 턱선을 한참 바라보았다.

결국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용건만 꺼냈다.

“어마마마께서 불공을 마치고 궁으로 돌아오셨다. 너를 꼭 보겠다 하시니, 어서 옷을 갈아입거라. 이 몰골로 가서 어마마마의 심기를 어지럽히지 말고.”

한소희는 고개를 숙였다.

“예, 폐하.”

수안궁(壽安宮) 안에는 은은한 단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상석에 단정히 앉아 있던 태후는 한소희가 들어오자 곧장 손짓했다.

“황후가 왔구나. 어서 이리 와 곁에 앉거라.”

태후는 한소희의 손을 잡아 곁에 앉히고 위아래로 찬찬히 살펴보았다.

이내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어찌 이리 야위었느냐?”

말을 마친 태후의 낯빛이 금세 싸늘해졌다.

곧바로 그녀의 시선은 이건에게 향했다.

“내가 궁을 비운 것이 고작 반년인데, 헌데 황후는 어쩌다 이리 되었느냐? 주상은 대체 황후를 어찌 보살핀 것이냐?”

이때 한홍난이 서둘러 앞으로 나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거들었다.

“어마마마, 노여움을 거두시옵소서. 폐하께서는 조정의 일로 하루도 편히 쉬실 날이 없으십니다. 신첩이 미처 살피지 못하여 황후마마의 처소를 자주 찾아뵙지 못한 탓이옵니다.”

그러나 말을 끝맺기도 전에 태후의 시선이 차갑게 한홍난에게 꽂혔다.

“난 지금 주상와 말을 나누고 있거는, 네가 어디 감히 끼어드느냐? 요즘 들어 갈수록 법도를 잊는구나.”

순간 한홍난의 얼굴이 굳었다.

이내 반걸음 물러나 고개를 숙였다.

“신첩이 경솔하였사옵니다. 어마마마께서 부디 노여움을 거두시옵소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소희의 눈시울이 잠시 뜨거워졌다.

어머니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새 부인을 들인 뒤부터 그녀에게 그다지 마음을 쓰지 않았다.

이 넓은 도성 안에서 한소희의 손을 잡아 주고, 자수를 놓는 법을 가르쳐 주며, 귀부인들의 온갖 뒷말을 막아 준 이는 오직 태후뿐이었다.

태후는 이건을 몇 마디 더 꾸짖고 나서야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되었다. 주상은 우선 가서 조정의 일을 보거라. 황후는 남아서 나와 이야기나 좀 나누자꾸나.”

이건은 한소희를 바라본 뒤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고 물러났다.

태후는 한소희의 손을 잡은 채 한동안 이런저런 말을 건넸다.

몸부터 추스르고, 황제에게 너무 마음을 두지 말며, 괜한 일로 속을 태우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나도 이제 나이가 들었네. 이 나이에 더 바랄 것이 무엇 있겠느냐. 그저 후궁이 조용하고 평안하기만 하면 된다. 너도 돌아왔으니, 지나간 일은 너무 마음에 품고 있지 말거라.”

그러다 문득 말머리를 돌렸다.

“소희야, 내가 듣기로 네 어머니가 생전에 따르던 이들을 네게 남겼다지?”

한소희의 눈빛이 미세하게 굳었다.

태후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요즘 들어 조정 안팎이 어수선하다. 주상도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곳곳에 군사를 써야 할 일이 많고. 네가 황후인 이상, 마땅히 황제의 근심을 덜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해서 네 어머니께서 남긴 사람들을 조정에 맡기거라. 조정에서 직접 거느리고 부리게 한다면 나라에도 이롭고 황제에게도 큰 힘이 될 것이네.”

그리고 마치 한소희를 위한다는 듯 부드럽게 한소희의 손등을 토닥였다.

“네가 황제를 위해 이만한 공을 세워 두면, 앞으로 이 후궁에서 누가 감히 너를 업신여기겠느냐.”

한소희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태후의 손에서 천천히 손을 빼냈다.

“어마마마, 그것은 어머니께서 신첩에게 남기신 유일한 사람들이옵니다.”

태후의 입가에 걸렸던 미소가 순간 굳었다.

“네 어머니는 따지고 보면 네 아버지가 예전에 들인 강호 출신 여인에 불과하네. 애초에 명문가의 안주인으로 내세울 만한 신분도 아니었지.”

태후의 목소리에서 온기가 사라졌다.

“그 여인이 남긴 자들을 고이 내놓으면 후부의 세력이고, 조정의 병력이 되는 것이니, 명분 또한 떳떳하네.”

“허나 네가 숨겨 두고 내놓지 않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사로이 병력을 거느린 것이 되고, 황실을 거스를 뜻을 품었다는 의심을 피할 수 없게 되지.”

태후는 한소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한마디 한마디가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그 죄를 철저히 캐묻는다면, 후부 일가가 참형을 당하고도 남을 중죄니라.”

한소희는 멍하니 태후를 바라보았다.

태후는 일찍이 어머니의 영전에서 그녀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었다.

“앞으로는 내가 너를 아껴 주마.”

또 언젠가는 웃으며 이런 말도 했었다.

“이 아이는 성정이 불같으니 이건과 참으로 잘 어울리는구나.”

그런데 그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

그 따뜻한 손길도.

자신을 감싸 주던 말도.

처음부터 그녀가 가진 것을 얻기 위해 베푼 호의였을 뿐이었다.

한소희는 천천히 자리에서 내려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어마마마께서 신첩에게 죄가 있다 여기신다면... 신첩은 달리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자 태후는 얼굴을 굳혔다.

“그래. 네 뜻 알았네!”

차가운 목소리가 수안궁 안에 울렸다.

“그리 나오겠다면 황후는 당분간 이 수안궁에 머물며, 무엇을 잘못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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