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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作者: 윤서완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18 12:00:33

샤워를 마치고 은성이 나왔다. 도희의 옷을 입은 터라 아이가 어른 옷을 입은 것처럼 팔 다리 기장이 길었다. 평소였다면 그 모습을 보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었을 것이다. 그러나 은성도 도희도 웃지 않았다. 도희는 말없이 바지 밑단과 팔 소매를 접어주었다. 은성은 소파에 기대어 감각이 마비된 사람처럼 멍하니 있었다. 도희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물을 수가 없었다.

‘선우 오빠 일이겠지.’

은성의 젖은 옷을 정리하다가 주머니에서 반지 케이스를 찾았다. 007작전을 벌이면서 도희가 사다 나른 바로 그 반지였다. 케이스 안에는 두개의 반지가 있어야 하건만 하나의 반지만 있었다. 오늘 은성은 선우에게 깜짝 서프라이즈를 해주겠다고 했다.

“유학 갈 결심했어! 그동안 선우 애를 태웠으니까 선물해주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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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달콤하고 잔인한 나의 세계   31화

    은성이 무미건조한 눈으로 말했다.“그걸 왜 저한테 물어봐요? 상대한테 물어봐야지.”“현남친이 아니면 전남친 아니야? 내가 이렇게 보여도 상도덕은 있거든.”살짝 드러난 하얀 어깨를 으쓱 올리는 모습이 꽤나 유혹적이었다. 왜 주변에 그렇게 남자가 많은지 알거 같았다.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잘 되길 빌게요. 지금은 시제마저 하죠.”“알았어. 되게 무섭네.”해나는 미련이 남는다는 듯 선우를 한번 더 끈적하게 훑고 돈을 세었다. 그러면서도 입술은 쉬지 않았다.“그런데 전남친 돈 많나보다. 스무살 밖에 안됐는데도 에스텔라를 타고.”“집이 부유해요.”“오오. 흥미가 더 당긴다. 아저씨가 생각나기도 하고.”해나는 아저씨가 누구인지 물어봐주길 바라는 눈치였지만 그래서 은성은 더욱 물어보지 않았다. 그러나 기어코 답은 이어졌다.“나 아주 어렸을 때 날 챙겨주던 아저씨가 있었거든.”평소와 다르게 그녀의 얼굴에는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건 은성이 알바는 아니었다.“가보겠습니다.”그 말과 동시에 그녀는 미리 챙겨둔 가방을 가지고 편의점을 떠났다. 닫히는 문 소리를 들으면서 해나가 귀엽다는 듯 피식 웃었다.“그런 표정을 지으면서 잘 되길 빈다고?”

  • 달콤하고 잔인한 나의 세계   30화

    선우의 말문이 막혔다. 이제 더 이상 연인이 아니다. 그렇다고 친구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친구라는 역할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 같았다. 하지만 연인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라면 둘의 관계는 무엇일까. 부모의 고용으로 엮인 관계? 그건 더더욱 싫었다. 그런 그의 생각을 고스란히 읽기라도 한듯 은성이 입을 열었다.“무슨 관계라는 걸 말할 수 없는 사이에서 그런 말 주제 넘어.”선우가 멍해진 그 순간 은성은 손을 뿌리치고 나왔다. 발걸음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으나 눈가는 촉촉했다.*식당 밖으로 나와서 거리를 걸었다. 여기서 편의점까지는 빨리 걸어서 30분이 걸렸다. 그러니 시간을 맞춰서 가려면 걸음을 서둘러야 했다. 그러나 발걸음이 무거웠다. 축 처진 어깨가, 말문이 막힌 얼굴이 떠올라 마음을 괴롭게 했다.“언니. 괜찮아?”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도희가 뒤를 따르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은성은 싱긋 웃어 보였다.“언제부터 거기 있었어?”“언니가 가게에 나오기 전부터.”“선우랑 말하는 거 들었어?”도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씁쓸한 미소가 은성의 입가에 맺혔다.“언제쯤 우리는 완전히 끝낼 수 있을까?”“…”반년을 사귀었고, 그 2배 정도 되는 기간 동안 헤어진 상태였다. 그런데도 은성과 선우 모두 이 관계를 완전히 놓지 못했다. 

  • 달콤하고 잔인한 나의 세계   29화

    일주일에 한번씩 그는 자연스럽게 만난척 이렇게 불쑥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필요한 부분을 충족시켰다. 일주일 전에는 본가에서 많은 짐을 들고 자취방으로 와야 했다.“나도 학교에 갈일 있는데 태워다 줄까?”이주 전에는 책을 빌려야했는데 도서관에서 책이 보이지 않아서 난감했다.“그 책 나 갖고 있는데 빌려줄까?”그런식으로 그는 필요할 때마다 그녀의 삶에 나타났다. 답하지 않고 그를 지그시 응시했다. 그는 그런 시선마저 달게 삼켰다. 평소 사탕을 먹을 수 없는 아이가 허겁지겁 사탕을 입에 넣는 거 같았다.‘언제까지 이럴건데?’‘네가 나를 다시 봐줄때까지.’‘지치지도 않아?’‘지치지 않아.’아무말도 이어지지 않았음에도 눈빛으로는 많은 대화가 오갔다. 둘만의 세계가 있는 것 같았다. 불편함을 느낀 사람은 도희였다.“언니, 우리 학식가자.”선우가 등장한 그 순간부터 도희는 입맛이 싹 달아나는 경험을 했다. 학식에 가자고 하는 건 그냥 이 자리를 피하고 싶어서 한 말이다. 은성은 잠시 고민하더니 도희를 보고 말했다.“같이 밥 먹자. 선우가 밥 사준다잖아. 돈 굳고 얼마나 좋아.”“아니야. 언니. 나 정말 학식이 먹고 싶어.”밥은 무엇을 먹는가 보다 누구랑 훨씬 중요했다. 선우와 불편하게 진수성찬을

  • 달콤하고 잔인한 나의 세계   28화

    그를 따라 가니 골목에 익숙한 검은색 승용차가 보였다. 뒷문을 열자 선희가 보였고, 그 옆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녀가 시선을 앞에 둔채 물었다.“은성이는 오늘 들어오겠다고 해요?”“네.”답을 듣고서야 마음이 놓인다는 듯 선희의 표정이 풀렸다.“아침에도 말했지만 은성이한테 더 이상 어떤 압박도 주지 마세요. 원하는대로 하게 둬요.”“네… 회장님.”“그만 가보세요.”경자가 깊게 고개를 숙이고 내렸다. 잠시 후 유 실장가 차에 올랐고 검은색 승용차는 골목을 떠났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차가 있던 자리를 응시하며 경자가 중얼거렸다.“선우가 마음을 접게 할 생긱이신가?”선희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가지는 분명했다. 지금 은성을 압박한다면 그녀는 하나 뿐인 가족이자 딸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허억…! 허억….!”은성이 거친 호흡을 내쉬면서 캠퍼스를 달렸다. 벚꽃이 피기 시작한 캠퍼스의 모습은 아름다웠지만 그런 것을 볼 여유따위는 없었다. 9시 정각에 강의실로 들어섰다. 뒤에 앉아있는 도희가 여기라는 듯 팔을 들어 흔들었다. 그쪽으로 가서 앉기 무섭게 바로 안 교수가 들어섰다.“출석 먼저 부르겠습니다.”“휴우!”안도의 한숨을 쉬는 은성을 보면서 도희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응시했다.“언니, 학교 바로 앞에 살면서 왜 늦어?”“원래, 가까이 사는 애들이 더 늦는 거야.”뻔뻔한 말투에 도희가 피식 웃었다. 은성의 가출이후 4개월이 지났다. 가출은 고작 하루밤이었지만 그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수능 성적이 나왔고 최종적으로 세정대에 합격했다. 결정되지마자 은성은 기다렸다는 듯이 집을 구해서 지금 학교 앞에 살고 있었다. 출석을 다 부른 안 교수가 수업을 하려고 분필을 잡았다.“지난 시간에는 경영의 구성요소 중 하나인 경영 주체에 대해 배웠습니다. 오늘은 경영 객체에 대하여…”그때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안 교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러나 들어온

  • 달콤하고 잔인한 나의 세계   27화

    4교시가 끝나자마자 교실에서 나왔다. 늘 따라다니던 시선도 발걸음도 오늘 없었다. 오늘 교실을 들어섰을 때가 생각났다.선우는 은성보다 늦게 교실에 도착했다. 오자마자 자신에게 올거란 예상과 다르게 그는 그저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내가 집에서 나왔다는 것도 모르는 건가.’경자가 자신의 부재를 알게 되는 즉시 선우에게 연락을 했을 터였다. 의아함을 느끼는 그때 그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네가 원하는대로 할게. 그러니까 집에 들어가.]문자를 확인하고 그와 눈이 마주쳤다. 애틋함이 가득한 눈빛은 화가 났다. 저 눈빛 때문에 그를 놓는 것이 더 힘들었다. ‘그래도 진심이 있었을거야’ 그런 미련들이 끝도 없이 올라왔다.“그딴 게 진심이면 너무 값싼거 아니야?”스스로의 생각을 비웃으며 고개를 단호하게 돌렸다. 선우는 정말 그의 말대로 했다. 4교시 동안 말 한마디 걸지 않았다. 오죽하면 같은 반 아이들이 이상 기류를 눈치채고 선우와 은성을 번갈아 보기도 했다. 그는 계속 다가가고 그녀는 계속 무시하는 상태에서 다른 양상을 보인다는 것을 그 누구라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교문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나지막히 중얼댔다.“정말 포기한 건가.”그는 그렇게 쉽게 포기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미움이든 사랑이든 모든 쉽게 놓지 못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이성과 접촉했을 때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니까 지금은 그냥 물러선거야.”묘하게 안도가 됐다. 그걸 인지한 순간 발걸음이 멈춰졌다. 무엇에 안도한단 말인가. 아직 완전히 선우가 자신을 포기 하지 않았다는 것에? 아니다. 그런 것에 안도하는 것이 아니다.“적어도 지금 날 힘들게 하지 않잖아.”변명 같은 말을 중얼거리면서 다시 걸어가는 그때 교문에 서 있는 누군가가 보였다. 경자였다. 그녀는 은성을 보고 안도했다가 열이 나는지 미간을 찌푸렸다.“한은성!”“엄마를 학교에서 보는 날도 있네.”“너 어떻게 그렇게 집을 나가? 내가 얼마나 걱정…”“날 걱정한 건 맞아? 회장님 댁에서 더 이상 일 못

  • 달콤하고 잔인한 나의 세계   26화

    CCTV를 보면 은성이 어떻게 나갔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선우는 집으로 달려갔다. 예상대로 CCTV에는 은성이 찍혀 있었다. 집에 돌아오고 한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커다란 가방을 들고 나왔다. 집 밖에 있는 CCTV를 확인했다. 대로로 나간 거까지 확인됐지만 그 이후로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갔는지는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대로에 있는 건물 CCTV를 확인한다면 은성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곧바로 밖으로 나가려는 그때 선희가 선우를 잡았다.“놔주세요.”“뭘 할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하지 마.”선우에게서 반항적인 눈빛이 떠올랐다.“한성그룹 회장님으로서 명령하는 건가요?”“네 행동이 은성이를 더 지치게 만들고 있어. 모르겠어?”“그럼 어떻게 해요? 은성이는 자꾸 멀어지려고만 하는데…! 나는 잡을 게 아무것도 없는데 그럼 어떻게 하냐고!!”그가 절규하듯 소리쳤다. 이런 아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서 선희도 당황스러웠다. 그는 그 어느때보다 불안해보였다. 소중한 것을 잃어본 자만 아는 절박한 불안감이 그를 뒤흔들고 있었다.“한시간만 줘. 은성이 어디있는지 내가 찾아낼게. 하지만 가지는 마.”“…왜요?”“은성이를 완전히 잃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렇게 쫓아가지 마. 약속할 수 있어?”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은성은 그가 가진 전부였다. 그러니 그 전부가 도망치려는데 어떻게 쫓아가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런다면 정말 은성이 숨어버릴지도 모른다. 선희의 말은 기분 나빴지만 사실이었다.“약속…할게요.”바로 선희가 유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유 실, 한시간 내로 은성이 소재 파악해줘.”*부스스 눈을 떴다. 깜깜한 동굴 같은 곳이 눈에 들어왔다. 화들짝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그 동굴에서 나왔다. 그제야 찜질방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아… 어제 여기 왔지.”가방을 싸들고 집에서 나왔지만 막상 갈 곳이 없었다. 도희의 집이 가장 먼저 떠올랐지만 지난번에 이어 민폐를 끼치는 거 같아서 싫었다. 그곳에 간다면 선

  • 달콤하고 잔인한 나의 세계   25화

    화가 난 경자의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은성은 차분한 얼굴로 받아쳤다. 가슴이 들끓수록 냉정해져야 했다. 그래야 이 지긋 지긋한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응. 그게 아니면 대체 왜 그렇게 선우랑 나를 엮지 못해서 난리야? 내가 마음이 식었다잖아.”“선우같이 너 아껴주는 사람이 어딨어. 유학 다녀와서 선우 일 도와주면 좀 좋아? 다 너 잘되라고…”더 이상 참지 못한 은성이 벌떡 일어나

  • 달콤하고 잔인한 나의 세계   23화

    날카로운 물건에 찔린 것처럼 어깨가 움츠러 들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유라의 말이 맞았다. 선우는 그 익숙함을 놓지 못하는 것 뿐이다. 닿을 수 있는 존재를 놓치 못하는 거 뿐이었다. 그러나 그걸 유라 앞에서 인정할 정도로 은성은 멍청하지 않았다. 그녀는 돌아서서 할 수 있는 가장 얄미운 표정을 지었다.“그 말 박선우한테 좀 전해줘. 계속 안 헤어지려고 들러붙는 거 정말 지긋지긋하거든.”“미친년…!”부들거리는 모습을 비웃어주고 돌아

  • 달콤하고 잔인한 나의 세계   3화

    “네.”긴장한 은성이 무슨 일이냐는 듯 선우를 봤다. 선우는 빙그레 웃을 뿐 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도 선희도 찻잔을 향해 손을 뻗었고 아주 잠시 손이 닿았다. 더러운 것이라도 만진것처럼 손을 황급하게 거둬드린 그가 구토를 했다.“우욱…!”스치는 접촉에도 그의 몸은 정직하게 반응했다.선우가 화장실로 달려갔다. 은성은 따라가고 싶었지만 선희의 눈치가 보여서 가지 못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가득했다. 이 세상에 불편한 모자 사이는 많았지만 잠깐 손이 닿는 접촉만으로도 이렇게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경우는 없었다. 한성그

  • 달콤하고 잔인한 나의 세계   1화

    은성은 방문 앞에 서 있었다. 비밀번호만 누르면 방문을 열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방은 안에서 잠글 수 있게 되어 있었지만 이 방은 특이하게도 밖에 번호키가 있어 안에서는 문을 열고 나올 수 없었다.비밀번호는 자신의 생일이라서 잊어버릴 수가 없었지만 손은 선뜻 움직이지 않았다. 방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두려움이 컸다. 그 안에는 그녀의 남자친구인 선우와 유라가 있을 것이다. 바람 현장을 잡으러 온 것이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최음제를 선우에게 먹이고 유라와 이 방에 집어넣은 것이 바로 은성이었다. 그럼에도 확인하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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