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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성은 방문 앞에 서 있었다. 비밀번호만 누르면 방문을 열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방은 안에서 잠글 수 있게 되어 있었지만 이 방은 특이하게도 밖에 자물쇠가 있어 안에서는 문을 열고 나올 수 없었다.
비밀번호는 자신의 생일이라서 잊어버릴 수가 없었지만 손은 선뜻 움직이지 않았다. 방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두려움이 컸다. 그 안에는 그녀의 남자친구인 선우와 유라가 있을 것이다. 바람 현장을 잡으러 온 것이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최음제를 선우에게 먹이고 유라와 이 방에 집어넣은 것이 바로 은성이었다. 그럼에도 확인하는 건 두려웠다. 둘이 엉겨있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 두려운 것일까, 아니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확인하는 게 두려운 것일까.
이러한 짓을 저지르고 두려워하고 있는 스스로가 어이가 없어 쓴웃음을 지을 때였다.
“열어줘…! 당장!!”
유라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렸다. 불길한 기운이 몸을 감쌌다. 은성이 떨리는 손으로 비밀번호를 눌렀다. 잠금이 풀리고 문을 열었다. 순간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눈 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보고 무엇도 말할 수가 없었다.
선우는 유라와 엉겨있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냐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살인사건 현장처럼 피가 여기저기 뿌려져 있었고, 선우의 몸 곳곳에는 날카로운 것에 찔린 상처가 있었다. 살인사건 현장과 다른 점이 있다면 선우의 손에 날카로운 유리파편이 들려있다는 점이었다. 그가 스스로 자신의 몸을 찌른 것이다.
“서…선우야…”
은성은 조심스럽게 다가섰으나 그는 답이 없었다. 약간의 움직임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심장이 쿵 떨어졌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까. 분명 그와 행복했을 때가 있었다. 미래를 꿈꾸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 모든 것들은 벗어나고 싶은 기억이 되었다. 그와 함께 미래를 꿈꾸었던 열아홉의 자신에게 말하고 싶었다.
‘선우를 사랑하지 마.’
그가 너를 아프게 만들거야. 그리고 너 역시도 그를 다치게 할거야.
*
종례가 끝나자마자 선우는 자신의 가방을 메고 은성의 가방을 들었다. 은성이 얼굴을 찌푸렸다.
“줘.”
“무거워. 어깨 아프다며. 학교 나가서 가방 줄게.”
다정한 선우의 말에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정말 학교 나가면 가방 바로 줘야해.”
“알았어.”
애교를 부리듯 선우가 사르르 눈웃음치면서 웃었다. 주변에 있던 여자 아이들의 입에서 낮은 탄성이 터져나왔다.
“으윽! 잘생겼는데 다정하기까지해.”
“순정만화에서 튀어나왔다. 증말”
그런 말들이 들려도 선우의 시선은 오직 은성만을 향해있었다. 키가 큰 그 때문에 올려다보느라 그녀의 목이 아플까봐 자세를 낮춘 채였다. 그는 유독 여자친구인 은성에게는 한없없이 따듯하고 다정했다.
다정한 두 사람의 모습에 같은 반 친구들은 부러운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는 이도 있었다. 운정고등학교 여신으로 불리는 유라였다. 은성과 눈이 마주쳤을 때 유라의 입술이 움직였다.
‘가정부 딸’
그러나 선우의 시선이 닿자마자 유라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사람처럼 딴청을 부렸다. 지금 화를 낸다면 자신만 우스워 질것이다. 그래서 화를 내는 대신에 보란듯이 그의 손을 잡았다.
“가자.”
“응!”
그 순간 유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가정부 딸한테 밀린 기분이 어떤 지 물어보고 싶은 것을 꾹 참고 교실을 나섰다. 복도로 나가자마자 곱지 않은 시선들이 쏟아졌다. 그들의 눈빛은 유라와 닮아있었다.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 애들의 시선도 마찬가지였다. 남학생 두명이 은성을 힐끗거렸다.
“아, 쟤가 걔야?”
“어. 가정부 딸.”
“한성그룹 회장 아들이 어떻게 자기집에서 일하는 가정부 딸하고 사귀냐.”
조롱이 가득한 말투에 선우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평소 부드럽게 보이는 그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은성과 상관없을 때였다. 그녀가 엮이는 순간 그는 달라졌다. 그 눈빛이 닿자마자 조롱하는 입이 굳게 닫혔다.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개처럼 걸음이 빨라졌다. 선우가 쫓아가려는 것을 은성이 막았다.
“됐어. 그냥 둬.”
그가 걱정스럽게 얼굴을 살폈다.
“기분 상했어?”
“기분 상할게 뭐가 있어. 내가 가정부 딸인 것도, 네가 한성그룹 로열패밀리인 것도 맞는데.”
“그게 다가 아니잖아.”
선우가 걸음을 우뚝 멈춰서고 입이 튀어나왔다. 불만이 있을 때 그가 보이는 반응이다. 은성이 애교스럽게 팔짱을 꼈다.
“난 괜찮아. 빨리 가자. 나, 피곤해”
피곤하다는 말에 그의 발걸음이 다시 움직였다. 그 모습에 그녀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저런 말들이 마음에 박힐 나이는 지났다. 어렸을 때부터 저런 말을 듣는 일이 수도 없이 많았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여섯살 때부터 같은 유치원을 다녔으니 13년이나 그런 말들을 들었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속상하기도 했으나 이내 괜찮았다. 선우가 늘 세심하게서 곁을 지켜주었던 덕이었다. 그래서 시기 어린 눈빛도 어울리지 않는다며 조롱하는 말들도 다 괜찮았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은 다 괜찮아. 나를 정말 걸리는 건 선우 너야.’
그의 시선은 가끔 다른 곳에 오래 머물렀고 그 끝에는 유라가 있었다.
짝! 선우의 얼굴이 돌아갔다. 그녀는 자신이 때리고서도 놀라서 몸을 움츠렸다.‘내가 무슨 짓을 한거지?’수많은 말들로 그를 할퀴고 상처주었다. 뺨을 때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가 멋대로 관계를 이어가려고 해서 그랬던 것이다.이렇게 대화를 나누다가 뺨을 때린 적은 한번도 없었다. 덜덜 손이 떨렸다. 놀란 그녀와 다르게 선우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태연하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집에 가자.”조수석 문을 닫아주고 그는 운전석에 올랐다. 그렇게 차가 출발했다. 은성은 창밖을 응시했다.풍경들이 빠르게 스쳐갔지만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민재가 떠났을 때가 생각났다. 호감은 무언가 시작해버리기도 전에 끝나버렸다.선우가 자신을 마음대로 쥐고 흔들려는 거 같아 미웠다. 그렇게 화가 난채로 하루하루를 살았다.그 미움에 갇혀서 누구를 만나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가 전역할 때가 가까워서야 누군가를 만나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누구를 만나?”좋아하는 거까지는 아니어도 은성에게 호감을 가진 사람은 꽤 있었다. 하지만 또 민재처럼 선우가 그 인생을 흔들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그러던 차에 바람둥이로 유명한 남자 선배가 은성에게 호감을 보였다.“은성아. 우리 만나지 않을래?”사귀다가 아니라 만나다라는 표현을 쓴 것은, 그 선배가 그런식으로 여러 사람을 만나기 때문이란 것을 알았다.
‘더 빨리 올줄 알았는데.’선우는 은성에게 사람을 붙여놓았다. 그래서 그녀가 어디를 가든 그는 쉽게 알 수 있었다. 그가 앞에 서자 몸을 비비적거리던 태용도 멈칫했다.그가 거슬린다는 듯 날카로운 시선으로 압박하자 꼬리를 내리고 은성에게서 한발자국 떨어졌다. 태용의 존재를 지워버린 것처럼 은성에게 말했다.“시간 늦었어. 그만 가자.”“싫어. 지금 나 재밌어.”하나도 재미없었다. 선우는 이를 알아차릴 것이다. 그럼에도 은성은 뻔뻔하게 우겨야 했다. 그것이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그걸 뻔히 알고 있음에도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웃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코트를 벗어서 은성의 어깨가 걸쳐주었다.“알았어. 그러면 여기있지 뭐.”둥둥둥, 시끄러운 음악은 여전히 나오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더 이상 춤에 집중하지 못했다. 몸을 흔들면서도 시선은 은성과 선우를 번갈아 보았다.마치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보려는 사람들 같았다. 음악 소리 때문에 두 사람의 대화가 들릴 리가 없는데도 말이다.은성은 그 사람들의 시선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키즈 카페 이후로 그는 이런 식으로 은성을 압박했다.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것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항상 이런식으로 그녀를 압박했다. 그것이 은성의 오기를 불러일으켰다.“그래. 그럼 마음대로 해. 나는 놀 테니까.”
‘기회’ 그 말에 정신이 들었다. 은성이 약속했다. 군대에 다녀왔을 때도 곁에 누군가가 없다면 그에게 ‘기회’를 주겠노라고.하지만 그건 곁에 누가 없을 때였다. 이번에 민재를 쫓아냈다지만 제2의 민재가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었다. 불안한 것도 잠시 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복귀할게요. 그대신 한가지 부탁 좀 들어주세요.”이어진 선우의 말을 듣고 유 실장은 고개를 끄덕거렸다.“네. 그렇게 하겠습니다.”“잠깐만 기다려요. 옷 갈아입고 나올게요.”간단하게 씻고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유 실장을 따라 차에 올랐다. 복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차가 빠르게 달렸다.유 실장에게 부탁을 했지만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다. 은성에 대해서는 다 그랬다. 이런 상황에서 군대에 가야 한다는 것이 무력하게 느껴졌다. 문득 그날이 떠올랐다.쓰러진 할머니, 뒤집어진 아빠의 차, 그리고 그 남자와 함께 있었던 엄마.선희가 남자와 키스를 나누던 모습 위로 은성과 민재가 함께 있는 모습이 겹쳐졌다.그리고 어제 화내던 모습으로 이어졌다. 은성이 민재를 신경 쓰고 있었다. 그가 아닌 다른 남자를 마음에 담았다. 그것이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그 남자를 사랑해?’그럴리 없다고 자답할 때마다 은성이 화내던 모습이 떠올랐다.“네가 선택하게 만들었겠지!!”
마원은 마케팅 원론을 학생들끼리 줄여부르는 별칭이다. 전공필수 과목으로 경영학의 꽃이라고 불렸다.민재는 복학생이었고 은성은 신입생이기에 같이 드는 강의가 이거 하나였다. 오늘 그 수업이 있었는데 그가 들어오지 않았다.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문자는 바빠서 확인을 못할 수도 있지만 수업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걱정됐다.그때 편의점 점장한테 전화가 왔다. 전화 올 이유가 없었기에 은성은 고개를 갸웃대면서 전화를 받았다.“네. 사장님.”“은성 씨, 민재 씨 대체 어떻게 된거야?”다짜고짜 대체 어떻게 된거냐고 묻는 통에 벙쪘다.“무슨 일 있었어요?”“아니 민재 씨가 어제 알바 펑크내고 문자로 그만두겠다고 통보했어.”“네?”믿을 수가 없었다. 민재는 책임감이 강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어린 동생을 부양하지도 못했을 것이다.그는 이유없이 약속에 늦지도 않았고 맡은 일을 성실하게 했다. 귀를 의심했다.사장은 분통이 터진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뭐야. 은성 씨도 모르고 있었어? 사람이 왜 이렇게 무책임해. 그것 때문에 사람 다시 뽑아야 하잖아. 요새 가뜩이나 사람 구하기 힘든데.”불평불만을 쏟아내다가 점장이 일방적으로 통화를 끊었다. 은성은 멍해진 나머지 통화가 끝났다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무책임하다는 말은 민재와 가장 안 어울
민재가 떠나고 선우는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가 원하는대로 되었다. 이제 민재는 은성의 삶에서 없어질 것이다."만나... 내가 제대했을 때는 헤어질 수도 있어. 그러니까 만나."그 말은 진심이었다. 은성은 그 어떤 남자를 만나도 된다. 하지만 자신을 제외한 그 어떤 남자도 은성을 만나서는 안되었다.그녀는 머리털 하나 다치면 안되지만 그녀에게 접근하는 남자들은 달랐다. 떼어내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할것이다.그런 면에서 민재는 현명했다. 만약 회유책에 넘어가지 않았다면 그는 장학금을 끊었을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야구 모자를 쓰고 있었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없어진 것이 신경 쓰여서 쓴 모자였다.씻고 나서 집으로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불렀다. 공식적인 자리에 나갈 때 메이크업이 필요할 때 빼고는 한번도 부른 적이 없었다.하지만 오늘은 필요했다. 민재 앞에서 기가 죽고 싶지 않았다. 선우에게는 돈도 권력도 있었다.하지만 단 하나 은성의 미소를 가지지 못했다. 그래서 그 하나를 가진 그가 밉고 싫었다.그래서 VIP라운지를 비우는 쇼까지 벌이면서 그에게 보여주었다. 그와 자신의 차이가 무엇인지.“은성이가 알면 싫어하겠지…”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선우는 이틀 후면 군대로 다시 복귀해야했다. 자신이 없는 곳에서 민재가 접근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라운지에서 나오자 대기하고 있던 유 실장이 다가왔다.&l
“네. 안녕하세요.”유 실장은 희미한 미소로 인사를 나누고는 민재를 안내했다.“이쪽으로 오시죠.”호텔 내부로 들어오니 지나가던 모든 직원들이 걸음을 멈추고 인사했다.“실장님, 안녕하십니까.”유 실장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사를 다 받아주었다. 엘리베이터에 타서야 더 이상 인사가 이어지지 않았다.한 걸음 뒤에 서서 민재는 물끄러미 유 실장을 응시했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사무적인 미소와 함께 부연했다.“회장님을 모시고 있다 보니 대부분의 직원들이 저를 압니다.”그제야 그가 비서 실장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한성그룹 회장도 아니고 그를 모시는 비서 실장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그를 알아보고 인사를 했다.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까 집 앞에서 봤을 때와 달리 보였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호텔 최상층인 37층이 다다랐다.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VIP라운지가 있었다. 앞에 있던 직원이 이번에도 유 실장을 알아보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 입에서는 인사가 아닌 다른 말이 나왔다.“기다리시고 계십니다.”알았다는 듯 유 실장이 고개를 까닥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민재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그 뒤를 따랐다.그러나 곧 벌어진 모습에는 그런 척 조차할 수 없었다. 4인이 앉을 수 있는 20개가 넘는 테이블이 깔려 있었지만
“고민할게 뭐가 있어. 유학 가서 잘 배우고 선우랑 같이 한성그룹 들어가면 되는 거지.”“엄마, 유학가고 싶은 생각 없어. 한성그룹에 들어갈 생각은 더더욱 없고.”경자는 은성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했다.“남들은 다 가고 싶어서 난리치는 유학, 너는 왜 가기가 싫어?”“내 돈으로 가는 게 아니잖아. 회장님한테 빚지고 싶지 않아.”“네가 잘 해서 한성그룹에서 일하면 되는 거야.”말이 도무지 통하지 않았다. 은성이 무엇을 걸려하는지 경자는 이해하고 싶지 않아했다. 더 이상 대화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고 은성은 자리에서 일어났
‘착각이겠지?’착각일 것이다. 선우는 자신의 남자친구였고 항상 은성에게 충실했다. 잘생긴 얼굴, 뛰어난 운동실력, 무던한 성격, 좋은 집안 모든 이들이 탐낼만한 조건을 갖고 있었지만 한번도 이성문제로 은성의 속을 썩인 적이 없었다. 사귀기 전에도 그랬다. 그러니 분명히 착각일 것이다. 그래야 했다.그런 생각을 하면서 교문을 지나 기계적으로 걸어갈 때였다. 갑자기 몸이 확 끌어당겨지더니 좁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은성을 끌어당긴 사람은 선우였다.“박선우! 깜짝 놀랐어.”“이렇게 안 하면 네가 나를 안 봐주잖아.”다시 입이 나
“한번도 사랑한다고 말한 적 없으니까…”그는 한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한적이 없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하는 유치원 시절에도, 가까운 친구이던 시절에도, 연인이 된 이후에도 단 한번조차고 말한적이 없었다. 은성이 용기내어 말해도 그는 사랑한다고 말한적이 없다.“내가 괜히 쓸데없는 거에 집착하는 건가?”겨우 한마디 말에 불과한데 고집을 부리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우의 행동은 ‘사랑한다’는 말을 넘어서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도 자꾸만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가끔 그의 시선이 유라에게 향할 때 알 수 없
“네가 가면 나도 가.”“내가 안 가면?”“나도 안가.”어이없다는 듯 그녀가 피식 웃었다.“그런게 어딨어.”“여기 있어.”고집 부리는 아이를 보는 것처럼 얼굴에 걱정이 떠올랐다.“회사 물려받으려면 유학 다녀와야하는 거 아니야?”“너랑 떨어지면서까지 가야할 정도로 회사가 의미있지 않아.”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내려다 보다 입을 열었다.“그럼 유학 가고 싶어?”“응. 가고 싶어.”선우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왔다.“왜 가고 싶은데?”“같이 유학 가면 우리 둘만 있을 수 있잖아.”어이없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