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MELDEN선우는 방으로 돌아왔다.
고용인이 모두 퇴근한 이후라 집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그의 방 역시 고요했다. 알수 없는 위화감이 방에서 느껴졌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모든 물건은 위치에 그대로 있었다.
“은성이가 없어서 그런가봐.”
털썩 침대에 걸터앉았다. 은성과 함께 침대에 누워있었던 그날이 떠올랐다. 이제 곧 매일 밤 그녀와 함께 잠들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분명 무슨 일이 있어서 연락이 안되는 것일 뿐 내일이면 돌아올 것이다.
“은성이는 내일 돌아올거야.”
반드시 그럴 것이다. 묘한 불안감을 괜한 감정으로 치부하며 같은 말을 몇번이고 되뇌였다.
*
다음날 선우는 아침도 먹지 않고 도희의 집으로 갔다. 은성의 얼굴을
선우의 말문이 막혔다. 이제 더 이상 연인이 아니다. 그렇다고 친구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친구라는 역할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 같았다. 하지만 연인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라면 둘의 관계는 무엇일까. 부모의 고용으로 엮인 관계? 그건 더더욱 싫었다. 그런 그의 생각을 고스란히 읽기라도 한듯 은성이 입을 열었다.“무슨 관계라는 걸 말할 수 없는 사이에서 그런 말 주제 넘어.”선우가 멍해진 그 순간 은성은 손을 뿌리치고 나왔다. 발걸음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으나 눈가는 촉촉했다.*식당 밖으로 나와서 거리를 걸었다. 여기서 편의점까지는 빨리 걸어서 30분이 걸렸다. 그러니 시간을 맞춰서 가려면 걸음을 서둘러야 했다. 그러나 발걸음이 무거웠다. 축 처진 어깨가, 말문이 막힌 얼굴이 떠올라 마음을 괴롭게 했다.“언니. 괜찮아?”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도희가 뒤를 따르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은성은 싱긋 웃어 보였다.“언제부터 거기 있었어?”“언니가 가게에 나오기 전부터.”“선우랑 말하는 거 들었어?”도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씁쓸한 미소가 은성의 입가에 맺혔다.“언제쯤 우리는 완전히 끝낼 수 있을까?”“…”반년을 사귀었고, 그 2배 정도 되는 기간 동안 헤어진 상태였다. 그런데도 은성과 선우 모두 이 관계를 완전히 놓지 못했다. 
일주일에 한번씩 그는 자연스럽게 만난척 이렇게 불쑥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필요한 부분을 충족시켰다. 일주일 전에는 본가에서 많은 짐을 들고 자취방으로 와야 했다.“나도 학교에 갈일 있는데 태워다 줄까?”이주 전에는 책을 빌려야했는데 도서관에서 책이 보이지 않아서 난감했다.“그 책 나 갖고 있는데 빌려줄까?”그런식으로 그는 필요할 때마다 그녀의 삶에 나타났다. 답하지 않고 그를 지그시 응시했다. 그는 그런 시선마저 달게 삼켰다. 평소 사탕을 먹을 수 없는 아이가 허겁지겁 사탕을 입에 넣는 거 같았다.‘언제까지 이럴건데?’‘네가 나를 다시 봐줄때까지.’‘지치지도 않아?’‘지치지 않아.’아무말도 이어지지 않았음에도 눈빛으로는 많은 대화가 오갔다. 둘만의 세계가 있는 것 같았다. 불편함을 느낀 사람은 도희였다.“언니, 우리 학식가자.”선우가 등장한 그 순간부터 도희는 입맛이 싹 달아나는 경험을 했다. 학식에 가자고 하는 건 그냥 이 자리를 피하고 싶어서 한 말이다. 은성은 잠시 고민하더니 도희를 보고 말했다.“같이 밥 먹자. 선우가 밥 사준다잖아. 돈 굳고 얼마나 좋아.”“아니야. 언니. 나 정말 학식이 먹고 싶어.”밥은 무엇을 먹는가 보다 누구랑 훨씬 중요했다. 선우와 불편하게 진수성찬을
그를 따라 가니 골목에 익숙한 검은색 승용차가 보였다. 뒷문을 열자 선희가 보였고, 그 옆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녀가 시선을 앞에 둔채 물었다.“은성이는 오늘 들어오겠다고 해요?”“네.”답을 듣고서야 마음이 놓인다는 듯 선희의 표정이 풀렸다.“아침에도 말했지만 은성이한테 더 이상 어떤 압박도 주지 마세요. 원하는대로 하게 둬요.”“네… 회장님.”“그만 가보세요.”경자가 깊게 고개를 숙이고 내렸다. 잠시 후 유 실장가 차에 올랐고 검은색 승용차는 골목을 떠났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차가 있던 자리를 응시하며 경자가 중얼거렸다.“선우가 마음을 접게 할 생긱이신가?”선희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가지는 분명했다. 지금 은성을 압박한다면 그녀는 하나 뿐인 가족이자 딸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허억…! 허억….!”은성이 거친 호흡을 내쉬면서 캠퍼스를 달렸다. 벚꽃이 피기 시작한 캠퍼스의 모습은 아름다웠지만 그런 것을 볼 여유따위는 없었다. 9시 정각에 강의실로 들어섰다. 뒤에 앉아있는 도희가 여기라는 듯 팔을 들어 흔들었다. 그쪽으로 가서 앉기 무섭게 바로 안 교수가 들어섰다.“출석 먼저 부르겠습니다.”“휴우!”안도의 한숨을 쉬는 은성을 보면서 도희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응시했다.“언니, 학교 바로 앞에 살면서 왜 늦어?”“원래, 가까이 사는 애들이 더 늦는 거야.”뻔뻔한 말투에 도희가 피식 웃었다. 은성의 가출이후 4개월이 지났다. 가출은 고작 하루밤이었지만 그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수능 성적이 나왔고 최종적으로 세정대에 합격했다. 결정되지마자 은성은 기다렸다는 듯이 집을 구해서 지금 학교 앞에 살고 있었다. 출석을 다 부른 안 교수가 수업을 하려고 분필을 잡았다.“지난 시간에는 경영의 구성요소 중 하나인 경영 주체에 대해 배웠습니다. 오늘은 경영 객체에 대하여…”그때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안 교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러나 들어온
4교시가 끝나자마자 교실에서 나왔다. 늘 따라다니던 시선도 발걸음도 오늘 없었다. 오늘 교실을 들어섰을 때가 생각났다.선우는 은성보다 늦게 교실에 도착했다. 오자마자 자신에게 올거란 예상과 다르게 그는 그저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내가 집에서 나왔다는 것도 모르는 건가.’경자가 자신의 부재를 알게 되는 즉시 선우에게 연락을 했을 터였다. 의아함을 느끼는 그때 그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네가 원하는대로 할게. 그러니까 집에 들어가.]문자를 확인하고 그와 눈이 마주쳤다. 애틋함이 가득한 눈빛은 화가 났다. 저 눈빛 때문에 그를 놓는 것이 더 힘들었다. ‘그래도 진심이 있었을거야’ 그런 미련들이 끝도 없이 올라왔다.“그딴 게 진심이면 너무 값싼거 아니야?”스스로의 생각을 비웃으며 고개를 단호하게 돌렸다. 선우는 정말 그의 말대로 했다. 4교시 동안 말 한마디 걸지 않았다. 오죽하면 같은 반 아이들이 이상 기류를 눈치채고 선우와 은성을 번갈아 보기도 했다. 그는 계속 다가가고 그녀는 계속 무시하는 상태에서 다른 양상을 보인다는 것을 그 누구라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교문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나지막히 중얼댔다.“정말 포기한 건가.”그는 그렇게 쉽게 포기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미움이든 사랑이든 모든 쉽게 놓지 못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이성과 접촉했을 때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니까 지금은 그냥 물러선거야.”묘하게 안도가 됐다. 그걸 인지한 순간 발걸음이 멈춰졌다. 무엇에 안도한단 말인가. 아직 완전히 선우가 자신을 포기 하지 않았다는 것에? 아니다. 그런 것에 안도하는 것이 아니다.“적어도 지금 날 힘들게 하지 않잖아.”변명 같은 말을 중얼거리면서 다시 걸어가는 그때 교문에 서 있는 누군가가 보였다. 경자였다. 그녀는 은성을 보고 안도했다가 열이 나는지 미간을 찌푸렸다.“한은성!”“엄마를 학교에서 보는 날도 있네.”“너 어떻게 그렇게 집을 나가? 내가 얼마나 걱정…”“날 걱정한 건 맞아? 회장님 댁에서 더 이상 일 못
CCTV를 보면 은성이 어떻게 나갔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선우는 집으로 달려갔다. 예상대로 CCTV에는 은성이 찍혀 있었다. 집에 돌아오고 한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커다란 가방을 들고 나왔다. 집 밖에 있는 CCTV를 확인했다. 대로로 나간 거까지 확인됐지만 그 이후로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갔는지는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대로에 있는 건물 CCTV를 확인한다면 은성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곧바로 밖으로 나가려는 그때 선희가 선우를 잡았다.“놔주세요.”“뭘 할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하지 마.”선우에게서 반항적인 눈빛이 떠올랐다.“한성그룹 회장님으로서 명령하는 건가요?”“네 행동이 은성이를 더 지치게 만들고 있어. 모르겠어?”“그럼 어떻게 해요? 은성이는 자꾸 멀어지려고만 하는데…! 나는 잡을 게 아무것도 없는데 그럼 어떻게 하냐고!!”그가 절규하듯 소리쳤다. 이런 아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서 선희도 당황스러웠다. 그는 그 어느때보다 불안해보였다. 소중한 것을 잃어본 자만 아는 절박한 불안감이 그를 뒤흔들고 있었다.“한시간만 줘. 은성이 어디있는지 내가 찾아낼게. 하지만 가지는 마.”“…왜요?”“은성이를 완전히 잃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렇게 쫓아가지 마. 약속할 수 있어?”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은성은 그가 가진 전부였다. 그러니 그 전부가 도망치려는데 어떻게 쫓아가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런다면 정말 은성이 숨어버릴지도 모른다. 선희의 말은 기분 나빴지만 사실이었다.“약속…할게요.”바로 선희가 유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유 실, 한시간 내로 은성이 소재 파악해줘.”*부스스 눈을 떴다. 깜깜한 동굴 같은 곳이 눈에 들어왔다. 화들짝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그 동굴에서 나왔다. 그제야 찜질방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아… 어제 여기 왔지.”가방을 싸들고 집에서 나왔지만 막상 갈 곳이 없었다. 도희의 집이 가장 먼저 떠올랐지만 지난번에 이어 민폐를 끼치는 거 같아서 싫었다. 그곳에 간다면 선
화가 난 경자의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은성은 차분한 얼굴로 받아쳤다. 가슴이 들끓수록 냉정해져야 했다. 그래야 이 지긋 지긋한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응. 그게 아니면 대체 왜 그렇게 선우랑 나를 엮지 못해서 난리야? 내가 마음이 식었다잖아.”“선우같이 너 아껴주는 사람이 어딨어. 유학 다녀와서 선우 일 도와주면 좀 좋아? 다 너 잘되라고…”더 이상 참지 못한 은성이 벌떡 일어나 소리질렀다.“필요 없어. 나 잘되라는 거 필요없다고! 그러니까 제발 이상 강요하지 마.”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문을 쾅 닫고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와서도 거친 호흡은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어찌 되지 않는 분노가 뒤흔들었다.“대체 왜 나를 이렇게 몰아세워…!”선우와 헤어지겠다고 한거 뿐이다. 그런데 경자는 은성이 무슨 큰 죄를 지은것처럼 자꾸 몰아세웠다. 선우는 자신을 사랑하지도 존중하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이상 한걸음도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감이 그녀를 괴롭혔다. 가장 큰 가방을 떠내 마구잡이로 물건을 쓸어담았다. 그리고 경자가 씻으러 들어간 틈을 타서 가방을 가지고 나왔다.“여기만 아니면 돼.”그 말을 반복하면서 발걸음을 옮겼다.*어스푸름한 새벽, 선우는 힘없이 침대에 누워있었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계속 어제 은성의 모습이 떠올랐다.“박선우, 너는 내가 왜 알바하는지 몰라?”
날카로운 물건에 찔린 것처럼 어깨가 움츠러 들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유라의 말이 맞았다. 선우는 그 익숙함을 놓지 못하는 것 뿐이다. 닿을 수 있는 존재를 놓치 못하는 거 뿐이었다. 그러나 그걸 유라 앞에서 인정할 정도로 은성은 멍청하지 않았다. 그녀는 돌아서서 할 수 있는 가장 얄미운 표정을 지었다.“그 말 박선우한테 좀 전해줘. 계속 안 헤어지려고 들러붙는 거 정말 지긋지긋하거든.”“미친년…!”부들거리는 모습을 비웃어주고 돌아
샤워를 마치고 은성이 나왔다. 도희의 옷을 입은 터라 아이가 어른 옷을 입은 것처럼 팔 다리 기장이 길었다. 평소였다면 그 모습을 보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었을 것이다. 그러나 은성도 도희도 웃지 않았다. 도희는 말없이 바지 밑단과 팔 소매를 접어주었다. 은성은 소파에 기대어 감각이 마비된 사람처럼 멍하니 있었다. 도희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물을 수가 없었다.‘선우 오빠 일이겠지.’은성의 젖은 옷을 정리하다가 주머니에서 반지 케이
“삼촌, 이거 삼촌이 좋아하시는 정명진 작가 그림이예요.”“고맙구나.”김치원 명예회장의 산수연은 친척들과 교분이 있는 사람들로 붐볐다. 치원의 곂에서 선희는 그림자처럼 손발 역할을 했다. 반면 선우는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있었다. 중간중간 치원의 시선이 불퉁하게 선우를 응시했다. 유일한 손자가 곁을 지키지 않는 것이 불만스러운 것이다.“흠흠!”헛기침으로 불편한 심기를 표현하였으나 선우는 그쪽을 쳐
은성은 바로 답하지 못하고 선우의 얼굴을 살폈다. 그의 입술이 초조하게 달싹였다. 긍정의 답을 기대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거절할까 불안했다. 그러한 선우의 감정을 은성은 고스란히 느꼈다. 좋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러기에는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다.“둘이만 있고 싶어서 같이 가고 싶은 거야?”“응. 둘이서만 있고 싶어.”선우는 자세를 낮춰 은성을 올려다 봤다. 그 모습이 마치 선택을 기다리는 아이 같았다. 다른 무언가가 섞이지 않은 순수한 눈빛, 그것이 용기를 불어넣었다.“한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유라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