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당신을 용서한 그날부터
당신을 용서한 그날부터
Author: 물결

제1화

Author: 물결
“최 대표가 꾸민 사고, 정말 빈틈이 없더라. 경찰도 아무 문제를 못 찾았다잖아.”

“그러게. 최 대표의 첫사랑이랑 그 아들이 사고를 당했는데, 한쪽은 신장이 크게 손상돼 이식이 필요했고 다른 한쪽은 눈을 다쳐 각막 이식이 필요했대.”

“그런데 맞는 사람이 소지연 씨랑 그 아들뿐이었던 거지. 그래서 최 대표가 일부러 다시 합치자고 매달린 거래.”

“가족 자격으로 수술 동의서에 서명해서 소지연 씨의 신장과 아이의 각막을 넘기려고. 이채은 씨를 정말 끔찍이 사랑하나 봐.”

“소지연 씨도 불쌍하지. 아들이랑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잖아. 최 대표가 지금도 304호에서 이채은 씨 곁을 지키는 것조차 모르고.”

“...”

소지연은 온몸이 차갑게 식어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그녀는 믿을 수 없었다.

‘그 교통사고를 최재빈이 직접 꾸몄어?!’

‘다시 합치자고 매달린 것도 처음부터 목적이 있었어?!’

소지연은 비틀거리며 벽을 짚고서, 의사들이 말한 병실로 향했다.

문은 완전히 닫혀 있지 않았다. 문 틈 사이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재빈아, 지연 씨랑 아이한테도 한번 가 봐.”

이채은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다.

“그래도 지연 씨는 네 아내고, 유안이는... 네 친아들이잖아.”

“갈 필요 없어.”

최재빈의 목소리는 섬뜩할 만큼 차가웠다.

“이제 둘 다 쓸모없으니까.”

소지연의 숨이 턱 막혔다.

“보상은 해 줄 거야. 평생 부족하지 않게 지켜 주겠어.”

최재빈은 잠시 말을 멈춘 뒤, 이채은에게만은 믿기 힘들 정도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하지만 그게 전부야. 채은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누군지 너도 알잖아.”

이채은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유안이는...”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가 더 중요하니까.”

최재빈이 이채은의 말을 끊었다. 낮고 단호한 목소리였다.

“네 아들이 당연히 그 아이보다 중요해.”

소지연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눈물이 소리 없이 뺨을 타고 흘렀다.

최재빈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친아들에게까지 이토록 잔인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최재빈과 이채은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다.

오만할 만큼 완벽한 최재빈과 다정하고 부드러운 이채은.

주변 사람들은 두 사람이 누구보다 잘 어울린다고 입을 모았다.

그때 소지연은 최재빈의 전담 비서였다.

소지연은 오랜 시간 곁에서 최재빈이 이채은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지켜봤다.

최재빈은 이채은을 위해 도시 전체가 들썩일 만큼 사흘 내내 불꽃 행사를 열었고, 그룹의 신규 브랜드마다 이채은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을 붙였다. 경매에 나온 보석을 통째로 사들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만큼 그녀를 귀하게 여겼다.

하지만 이채은에게는 따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결국 최재빈의 마음을 거절하고 첫사랑과 결혼해서 해외로 떠났다.

최재빈은 날마다 술로 버텼고, 어느 날 만취한 채 사람을 착각하고 소지연과 하룻밤을 보냈다.

그날 이후 소지연이 임신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최재빈의 할머니가 직접 나서서 두 사람의 결혼을 밀어붙였다.

결혼한 뒤 5년 동안 최재빈은 소지연을 제대로 바라본 적조차 없었다.

두 사람의 아들 최유안이 태어난 날에도 최재빈은 분만실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심지어 유안이 자신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소지연이 모든 기대를 접고 이혼을 요구하자, 최재빈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 돌변했다.

소지연을 되찾겠다며 집요하게 매달렸고, 그녀를 구하려다 화재 현장에서 죽을 뻔하기까지 했다.

최재빈은 소지연과 최유안을 품에 안고 처음으로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사랑해. 둘 다 사랑해. 나 한 번만 용서해 주면 안 될까?”

최유안은 너무 기뻐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소지연의 목을 꼭 끌어안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아빠가 우리 사랑한대. 우리가 아빠 용서해 주면 안 돼?”

소지연은 결국 마음이 약해졌다. 정말로 최재빈이 돌아온 줄 알았다.

하지만 모든 게 거짓이었다.

최재빈이 재결합을 원한 이유는 오직 이 사고 때문이었다.

법적인 가족이라는 이유로 소지연의 신장을 떼어 내고, 아들의 각막까지 빼앗기 위해서였다.

곁에 서 있던 최유안의 작은 몸도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유안도 모든 이야기를 들어 버린 것이다.

“엄마...”

유안이 울음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 눈... 정말 아빠가 가져간 거야?”

그 질문은 가슴 한가운데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 아팠다.

소지연은 사고 당일을 떠올렸다. 피투성이가 된 최유안을 품에 안고 병원으로 뛰어 들어오며 처절하게 외치던 최재빈의 모습이 떠올랐다.

수술실 앞에서 밤새 무릎을 꿇고, 제발 아들의 눈만은 살려 달라며 의사들에게 매달리던 모습도 떠올랐다.

그 모든 게 연기였던 것이다.

소지연은 더는 버틸 수 없었다. 아들을 품에 안고 몸을 돌려 달렸다.

비상계단으로 뛰어든 소지연은 어두운 계단에 주저앉아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유안아, 저 사람은 네 아빠가 아니야. 이제 다시는 네 아빠가 될 수도 없어.”

“엄마랑 멀리 떠나자. 네가 제일 좋아하는 영웅 영화처럼 이름도 바꾸고 새로 시작하는 거야. 최재빈이 다시는 우리를 찾지 못하게. 그래도 괜찮겠어?”

최유안은 여전히 떨리는 몸으로 소지연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그럼... 영웅은 새로 눈도 생겨?”

소지연의 눈물이 아이의 가느다란 머리카락 위로 떨어졌다.

“생길 거야. 엄마가 약속할게. 어떻게든 다시 볼 수 있게 해 줄게.”

소지연은 말없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머릿속에 무모하다 못해 위험한 계획 하나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최재빈이 이채은을 그토록 사랑한다면...

그렇다면 직접 보게 해 줄 생각이었다.

자신과 아들 모두가 그가 가장 사랑하는 이채은의 손에 ‘죽는’ 모습을...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당신을 용서한 그날부터   제21화

    최재빈이 갑자기 웃었다. 웃음 속에는 끝을 알 수 없는 씁쓸함이 가득했다.떨리는 손으로 정장 단추를 풀더니 셔츠까지 거칠게 걷어 올렸다.왼쪽 배를 가로지른 흉터가 길게 남아 있었다. 두껍고 울퉁불퉁한 상처는 보기에도 섬뜩했다.봉합 자국도 아직 완전히 아물지 않아서 붉게 부어 있었다.“지연아, 유안아. 이것 좀 봐...” 최재빈은 두 사람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나 정말 신장 기증 수술을 받았어... 내가 진짜 잘못했다는 걸 알아. 이걸로 조금이라도 갚은 게 될까?”“나한테 기회를 한 번만 주면 안 돼? 용서해 주면 안 될까?”임이안은 겁을 먹고 엄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임지연은 아들이 보지 못하도록 눈을 가린 채 최재빈의 불안정한 표정을 바라봤다. 마음 한쪽이 싸늘해졌다.“다음 주에는 눈 수술도 받을 거야. 내가 유안이 눈을 빼앗았으니까 내 눈도 내놓을게.” 최재빈은 비틀거리며 한 걸음 다가왔다. 표정에는 광기에 가까운 절박함이 어려 있었다.“이 정도면 돼? 이러면 너희가 다시 돌아올 수 있어?”“지연아, 대답해 줘. 제발 말 좀 해!”더는 참지 못한 심주현이 앞으로 나서면서 최재빈의 얼굴을 주먹으로 강하게 때렸다.퍽!최재빈은 그대로 넘어져서 빗물이 고인 바닥에 처박혔다. 코에서 피가 쏟아졌다.그런데도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고개를 젖히고 웃었다. 웃음소리가 빗소리와 뒤섞이면서 텅 빈 거리에 퍼졌다.“이제 알았어...” 최재빈은 얼굴의 피와 빗물을 손으로 닦았다. 갑자기 눈물이 흘러내리면서 남자의 목소리에는 깊은 무력감이 묻어 있었다.“그날 네가 그렇게 말한 건 그냥 나를 쫓아내려고 한 거였구나. 너희는 평생 나를 용서하지 않을 거고...”“최재빈.” 임지연은 복잡한 표정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혹시 알아?” 아들의 눈을 가리던 손을 내리고 조용하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예전에는 매일 밤 잠들기 전에 생각했어. 당신도 우리가 겪은 고통을 똑같이 느끼게 만들 방법이 없을까 하고.”최재빈의 눈동자가 크게

  • 당신을 용서한 그날부터   제20화

    그날 최재빈을 단호하게 돌려보냈지만, 그 뒤 보름 동안 임지연은 하루도 마음 편히 지내지 못했다.임이안을 유치원에 데려다줄 때마다 주변에 수상한 사람이 없는지 몇 번씩 확인했다. 퇴근길에 뒤에서 발소리만 들려도 화들짝 돌아봤다.한밤중에 악몽을 꾸다 깨어나는 날도 있었다. 최재빈이 찾아와 아들을 빼앗아 가는 꿈이었다.임지연은 알지 못했다. 최재빈은 매일 멀지 않은 곳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아침에 임지연이 집을 나설 때도, 임이안을 유치원에 들여보낼 때도, 늦은 퇴근길에 혼자 걸어갈 때도 마찬가지였다.최재빈은 가까이 다가가지 않은 채 멀리서 모자의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그러던 어느 날 거센 눈보라가 몰아쳤고, 임지연은 늦은 시간까지 야근했다.대중교통 운행마저 중단되어 결국 눈보라를 뚫고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그때 뒤에서 빠르게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다가오지 마!” 임지연은 곧바로 몸을 돌려 호신용 스프레이를 앞으로 겨눴다.최재빈은 그 자리에 그대로 굳었다.검은 코트에는 눈이 가득 붙어 있었고, 손에는 포장도 뜯지 않은 새 우산이 들려 있었다.“나는 그냥... 우산을 주려고 왔어.” 최재빈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 하지만 자신을 혐오하듯 바라보는 임지연의 눈길에 가슴이 쓰라렸다.“그런데... 네 곁에 있던 그 남자는 왜 이런 날에도 너랑 이안을 혼자 두는 거야?”임지연은 스프레이를 최재빈의 눈 쪽에 정확히 겨냥한 채 차갑게 말했다. “당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니야. 이제 내 앞에서 사라져. 얼굴만 봐도 역겨우니까.”“하지만...” 최재빈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붙잡으려 했지만 임지연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멀어졌다.그리고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흔들리는 눈빛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오래도록 임지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최재빈은 마침내 뭔가 결심한 듯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사라졌다.그 뒤 최재빈은 정말 임지연 앞에 직접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현관 앞에 정체를 알 수 있는 물건들이 가끔 놓여

  • 당신을 용서한 그날부터   제19화

    새벽 3시, 북유럽의 작은 마을에는 눈이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최재빈은 사진에서 확인한 하얀 목조 주택 앞에 서 있었다. 언제부터 기다렸는지 검은 코트 위에는 두꺼운 눈이 쌓여 있었다.속눈썹에는 하얀 서리가 맺혔고 손가락은 추위에 자줏빛으로 변했지만, 최재빈은 불이 켜진 2층 창문만 집요하게 바라봤다.창문 너머로 임지연이 임이안에게 잠들기 전 읽어 줄 동화책을 펼치고 있었다.“엄마, 주현 아빠는 언제 돌아와?” 임이안이 졸린 눈을 비비며 물었다.“주현 아빠는 요즘 다른 지역에 일이 있어서 갔어. 며칠 뒤에 돌아올 거야.” 임지연은 아들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부드럽게 대답했다.불을 끄기 전 임지연은 습관처럼 창밖을 한번 바라봤다.그 한 번의 시선으로 숨이 멎을 듯이 굳어졌다.눈밭에 서 있는 사람은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알아볼 수 있었다.최재빈이었다.‘어떻게 여기를 찾아왔어?’‘이름도 바꾸고 이렇게 멀리까지 떠나왔는데...’‘대체 어떻게 우리를 찾은 걸까?’임지연은 두 손을 세게 움켜쥐었다. 지난 5년 동안 겪었던 끔찍한 기억이 한꺼번에 머릿속을 덮치면서, 몸이 저절로 떨리기 시작했다.“엄마?” 임이안이 잠결에 엄마를 불렀다.“아무것도 아니야. 자자.” 임지연은 떨림을 억누르며 창문을 잠그고 커튼을 닫았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을 참지 못해 커튼 사이로 계속 밖을 확인했다.최재빈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깨와 머리 위로 눈이 잔뜩 쌓여 있어서, 멀리서 보면 얼어붙은 조각상 같았다.임지연은 그날 밤 내내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날이 희미하게 밝아 오자 조용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현관 앞에서 오랫동안 망설이며 문을 열지 못했다.하지만 위층에서 잠든 임이안을 생각하자 더는 피할 수 없었다.문을 여는 동시에 찬바람과 눈발이 집 안으로 밀려들었다. 가슴도 함께 차갑게 식었다.최재빈은 정말 밤새 문 앞을 떠나지 않고 서 있었다.“지연아...” 입술이 파랗게 질린 최재빈이 갈라진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두 눈은 붉게

  • 당신을 용서한 그날부터   제18화

    그날 이후 최재빈은 집에서 과거 CCTV 영상을 계속 돌려봤다. 자신이 소지연 모자를 수도 없이 오해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하지만 진실을 알고 보상하려고 했지만... 이미 사과할 기회조차 사라진 뒤였다.최재빈은 집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고 혼자 집 안에 틀어박혔다. 세 사람이 함께 살았던 공간과 이제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소지연의 흔적만 매일 바라봤다.그제야 자신이 모자에게 얼마나 무관심했는지 깨달았다.두 사람을 믿어 준 적도 없었고 제대로 걱정하거나 돌봐 준 적도 없었다.영상 속에서 마른 몸으로 끊임없이 집안일을 하던 소지연과 차갑게 외면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칼로 베이는 듯했다.술로 정신을 흐리지 않으면, 밀려드는 절망을 버티며 하루를 보내기도 어려웠다.그러던 어느 날, 집사가 겁먹은 얼굴로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최재빈은 며칠째 제대로 씻지도 않고 옷도 갈아입지도 않은 상태였다. 집 안에는 독한 술 냄새가 가득했다.“누가 들어오라고 했어. 나가!”최재빈이 차갑게 소리쳤다.“대표님... 사모님이 살아 계신 흔적을 찾은 것 같습니다!”최재빈은 벌떡 몸을 일으키고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집사를 바라봤다. 믿기 어렵다는 듯 목소리가 떨렸다.“말도 안 돼. 그날 내가 직접 두 사람의 시신을 봤어...”“그런데 어떻게 살아 있을 수 있지?”말을 하는 동안에도 목소리와 몸이 계속 떨렸다.집사가 조심스럽게 설명을 이어 갔다. “사모님께서 예전에 생활이 어려운 산간 지역 아이들을 위해 후원금을 보내신 적이 있습니다. 어제 그쪽 단체에서 집으로 감사 편지가 왔습니다.”“자세히 알아보니 사모님께서 후원하던 아동 지원 사업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예전에 쓰시던 계좌에서는 더 이상 돈이 나가지 않지만...”“해외 계좌 하나에서 지금도 정기적으로 후원금이 입금되고 있습니다.”최재빈의 눈에 오랜만에 생기가 돌아왔다. 믿음이라기보다 광기에 가까운 희망이 차올랐다.“정말이야?”“그럴 줄 알았어. 나는 알고 있었

  • 당신을 용서한 그날부터   제17화

    그 무렵, B시.이채은은 고급 브랜드 매장에서 가방을 고르고 있었다.새로 나온 악어가죽 가방에는 수천만 원대의 가격표가 붙어 있었지만, 이채은은 망설이지 않고 직원에게 포장해 달라고 했다.한시원은 옆에서 이채은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계속 떼를 썼다.“엄마! 나 저 로봇 사 줘! 어제 사 준다고 했잖아!”“알았어. 사 줄게, 다 사.” 이채은은 짜증스럽게 미간을 찌푸린 채 건성으로 대답하고 카드를 내밀었다.최재빈에게 받은 가족카드를 바라보며, 오늘 밤에는 어떻게 말해야 새 차까지 받아낼 수 있을지 계산하고 있었다.그때 핸드폰이 울렸다.화면에 뜬 ‘최재빈’이라는 이름을 본 이채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응, 재빈아?” 전화를 받은 목소리는 평소처럼 부드럽고 다정했다.“나 지금 시원이랑...”하지만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평소의 다정함도 애정도 없었다.[지금 집으로 돌아와.]최재빈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무슨 방법을 써서든 30분 안에 내 앞에 와.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이채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재빈이 나에게 왜 이런 태도를 보이는 거야?’‘설마 뭔가 알아낸 건가?’‘그럴 리가 없을 텐데...’크루즈선 CCTV는 돈을 써서 이미 지웠고, 소지연 모자의 시신이 발견됐다는 사실도 확인했다.모든 일은 빈틈없이 끝났어야 했다. 그날 자신이 한 말과 행동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엄마?” 한시원이 짜증을 내며 이채은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겼다.“내 장난감 언제 사 줄 건데!”머릿속이 복잡해진 이채은은 아이를 달랠 여유도 없이 손을 잡아끌고 급히 매장을 나섰다.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차창 밖 풍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운전대를 너무 세게 쥔 나머지 손톱이 핸들 가죽을 파고들 정도였다. 이채은은 마음속으로 계속 자신을 달랬다.‘괜찮아. 재빈이 알 리 없어.’집 문을 열고 들어간 이채은은 평소 환하게 밝혀져 있던 집 안이 어둠에 잠겨 있는 것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 당신을 용서한 그날부터   제16화

    임이안이 퇴원하는 날, 심주현은 직접 차를 몰고 모자를 데리러 왔다.병실 문 앞에 선 심주현은 흰 가운 대신 짙은 회색 코트를 입고 있었고, 손에는 해바라기 모양의 작은 가방을 들고 있었다.“아저씨!” 기뻐하며 달려간 임이안이 심주현의 다리를 끌어안았다.아이와 눈높이를 맞춰서 앉으면서 심주현이 부드럽게 물었다. “눈은 아직 아파?”임이안은 얌전히 고개를 저었다. 눈을 감싼 붕대 끝을 살짝 들추자 아직 붉은 기운이 남은 눈가가 보였다.심주현은 아이의 볼을 아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앞으로 매주 수요일마다 아저씨가 데리러 와서 같이 검사 받으러 갈까?”짐가방을 든 채 옆에 서 있던 임지연은 조금 망설이다가 물었다.“그렇게까지 하면 선배가 너무 힘들지 않아요?”“이게 뭐가 힘들어?” 심주현은 임지연이 든 가방까지 자연스럽게 받아 들었다.“어차피 가는 길도 비슷한데.”임지연은 그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병원은 도시 동쪽 끝에 있고 자신들이 사는 곳은 서쪽 끝이었다. 같은 방향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멀었다.그래도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 심주현이 임이안을 뒷좌석에 앉히고 안전벨트를 꼼꼼하게 매 주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봤다.차는 사람이 거의 없는 넓은 거리를 지나갔다. 임이안은 창가에 붙어서 길가의 순록 조형물이 몇 개인지 세고 있었다.심주현은 룸미러로 아이를 한 번 바라본 뒤 임지연에게 말했다.“다음 주 수요일이 내가 쉬는 날이야. 그날이면 이안도 눈에 감은 붕대를 완전히 풀 수 있어.”“그러니까 검사 끝나고 셋이 놀이공원에 갈까?”임지연은 난처한 듯 눈썹을 살짝 모았다. 심주현이 얼마나 바쁜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겨우 얻은 휴일에 아이까지 데리고 놀이공원에 가면 심주현은 제대로 쉬지도 못할 것이다.“걱정하지 마, 지연아. 수술 잘 끝난 기념이라고 생각하면 돼.” 심주현은 운전대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대학 다닐 때 네가 말했잖아. 언젠가 가정을 꾸리면 아이랑 자주 밖에 놀러 다니고 싶다고. 가능하면 매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