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 후.김단은 처마 아래에 앉아 있었다. 왼쪽에는 한 하녀가 그녀를 위해 해바라기씨를 까고 있었고, 오른쪽에는 다른 하녀가 참외를 썰고 있었다.사흘이 지나도록 김단은 여전히 소한을 만나지 못했다.하지만 이 두 자매의 사정은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두 사람은 사촌 자매였다. 왼쪽의 하녀는 초아, 오른쪽 하녀는 혜인이였다.그들은 한양 출신이 아니었으며, 고향은 머나먼 변방 도성이었다.전쟁 때문에 가족을 모두 잃은 자매는, 그들을 구해준 소한을 따라 한양으로 오게 되었다.그들에게 소한은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었기에, 그에 대한 충성심은 절대적이었다.물론 그들은 김단에게도 극진한 예의를 갖추었다.사흘 동안 자매는 성심성의껏 김단을 모셨다. 하지만 유독 이곳이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절대 말해주지 않았다.자매는 소한의 허락 없이는 이곳에 대한 정보를 조금도 누설하지 않았다.김단은 사흘 동안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했지만, 이 저택에 대한 단서를 거의 찾지 못했다.대문과 후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호위가 지키고 있어 빠져나갈 수 없었다.다른 하인들도 김단을 보면 가볍게 예를 표할 뿐, 불필요한 말을 전혀 하지 않았다.김단은 한밤중에 도망치려는 시도도 해보았다.하지만 초아와 혜인은 번갈아 밤을 지새우며 그녀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결국,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렇게 처마 아래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것뿐이었다.“부인, 참외 좀 드시지요. 씨도 다 골라냈습니다!”혜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참외 한 조각을 건넸다. 그녀의 얼굴에는 순수한 미소가 가득했다.하지만 그녀의 얼굴을 보며 김단은 숙희를 떠올렸다.갑작스러운 그녀의 실종에, 숙희는 겁에 질렸을 것이다. 그녀는 숙희가 울고 있지는 않은지 걱정했다.숙희는 분명 소하를 찾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소하도 소한이 그녀를 납치한 사실을 모를 것이다.설령 알더라도, 그녀를 구해낼 수 있을까?계속 울고 있는 숙희는 이각도 달래지 못할 것이다.그러다 숙희가 눈이라도 다치면 어떡
“……”김단은 초아와 혜인이 소한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소한이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김단은 가느다란 눈썹을 찡그리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대체 무엇을 하려는 것입니까? 어찌 저를 이곳에 가둔 것입니까?”소한의 얼굴에 서린 미소가 잠시 굳었으나,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유지했다. 그의 깊고 어두운 눈동자 속에 촛불이 반사되어 반짝였다.“가둔 것이 아니오. 나는 단지, 우리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고 싶었을 뿐이오.”다시 시작할 기회를.그러나 김단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그녀는 소한을 바라보며 입가에 조소를 띠었다.“기회라니요? 삼 년 전, 소 장군께서는 저에게 어떤 기회도 주지 않으셨습니다.”삼 년 전, 그들은 모두 임원의 편에 서 있었고, 그녀가 해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소한의 날카로운 눈빛에 그녀는 아무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그때 그렇게 그녀를 저버려놓고, 어찌 이제 와서 다시 그녀를 가두는 것일까?김단이 삼 년 전의 일을 언급하자, 소한의 가슴은 마치 칼로 찢기는 듯한 아픔이 스쳤다.그가 한 걸음 다가서자, 김단은 반사적으로 세 걸음 물러났다. 그녀는 비녀를 꼭 쥐고 방어 태세를 갖췄다.그 모습을 본 소한은 멈춰 섰다. 그는 깊은숨을 들이쉰 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삼 년 전은 오해였소. 나는 임원이 낭자를 모함한 줄 몰랐소. 나는...”“더는 듣고 싶지 않으니, 그만하십시오!”김단은 차갑게 그의 말을 끊었다.삼 년 전, 그가 오해했다는 건 그녀도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날, 임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임가 사람들도 침묵했다. 그녀를 몰아세운 것은 겨우 한 하녀, 명희뿐이었다.하녀의 말로 그녀를 의심했다니, 참 우스운 일이 아닌가?김단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아른거렸다.“장군께서 왜 이러시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분명 예전엔 저를 마음에 두지 않으셨잖습니까? 어찌 이제 와서 저를 깊이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입니까? 정녕 저를 좋아하는 것
그 흉터 하나하나가 마치 소한이 그녀를 얼마나 신경 썼는지를 증명하는 듯했다.김단의 눈에는 저절로 눈물이 고였다.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가슴에 있는 깊은 흉터를 살며시 어루만졌다. 그녀의 손끝이 마치 병기처럼 차가웠다.그녀는 갑자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아픕니까?”소한의 미간이 불현듯 움찔했다.아프냐고?그 말은 그녀가 예전에 정암에게 물었던 말이다.그는 그녀와 정암이 어떻게 서로를 품에 안았는지 직접 목격하였다. 그렇기에 순간, 가슴 가득 좋지 않은 감정이 얽혀버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그러나 그녀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눈물이 마침내 그녀의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그리고 그녀의 부드럽고도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정암은 분명히 많이 아팠을 것입니다.”그녀는 정암의 몸에도, 바로 이곳에,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던 것을 보았다.병사들이 소한을 위해 막아낸 칼이 그의 몸을 뚫었다고 말했었다.그녀는 그때 정암은 분명, 아주 많이 아팠을 것이라 생각했다.소한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 순간, 그녀가 그의 상처를 보고도, 여전히 정암을 떠올릴 줄은.그는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녀의 차가운 손끝을 피하며, 숨조차 거칠어졌다.“낭자, 어찌 이렇게 잔인한 것이오...”지금 그녀가 떠올리는 사람이 소하라면, 이렇게 마음이 아프지는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그녀가 떠올린 사람은 정암이었다.대체 그는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을까?무엇을 해야, 죽은 사람을 이길 수 있을까?마치 필사적으로 버티려는 듯, 소한의 떨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분명, 낭자를 지켜온 사람은 나였소. 낭자, 잘 생각해 보시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늘 낭자를 지켜줬소…”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단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그녀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마치 우스운 광경을 보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인정합니다. 임원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임학 오라버니와 장군께서 저를 지켜줬지요. 하지만 임원이 나타나
“저와 함께한 시간들을 잊지 않으신 장군께 고마울 따름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도 세답방에서 천한 신세로 지냈을 것이지요. 장군의 크나큰 은혜에 감사드리나, 다만 한 가지만 청을 드려도 될까요? 부디,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 저를 위한 것이라고는 하지 마시옵소서.” “저는 그럴 만한 그릇이 못 되옵니다.” 마지막 한 마디는 무쇠 방망이처럼 소한의 가슴을 내리치는 것 같았다. 충격에 뒤로 물러선 소한은 걸상에 발이 걸려 하마터면 뒤로 쓰러질 뻔하였다. 그 소리가 다소 컸던 탓인지, 밖에 있던 혜인과 초아가 허겁지겁 뛰어 들어왔다. 그러자 소한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누가 너희더러 들어오라 하였느냐! 당장 나가라!” 그러나 혜인과 초아는 나란히 무릎을 꿇는 것이었다.“아씨, 부디 장군님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장군께서는 진심으로 아씨를 아끼시고 계십니다! 아씨께서 찾으신다는 말에 부상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오셨나이다!” “누가 입을 함부로 놀리라 하였느냐! 물러가라!” 소한은 다시금 날카롭게 꾸짖었다.그들의 은인이 이토록 처참한 모습으로 남겨지는 것을 차마 두고 볼 수 없었던 혜인과 초아는 계속해서 간청하고 싶었으나 소한의 살기 어린 눈빛에 끝내 눈물을 삼키며 밖으로 나갔다.김단은 잠시 멍해졌다.‘부상?’ 다쳤단 말인가? 그녀는 무의식중에 그의 몸을 살폈다. 가슴 쪽에는 별다른 흔적이 보이지 않았으나, 팔뚝에 길게 그어진 상처가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게다가 벗어둔 옷에는 여기저기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채찍을 후려친 상처와 비슷했다.탐색하는 듯한 김단의 시선에 그제야 소한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아버지께서 벌을 내리시긴것 뿐이니, 괜찮소.” 그의 팔뚝의 흔적은 사흘 전의 것으로 보이나 옷에 남은 핏자국은 아직도 선명한 것을 보니 이는 단순한 벌이 아니었다. 그제야, 혜인과 초아가 기를 쓰며 항변했던 것이 이해되었다. 김단은 깊이 숨을 들이쉬고 나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소한은 결국 떠났다. 패전한 장수처럼 비틀거리며 물러갔다. 김단은 홀로 방에 앉아 흔들리는 촛불을 바라보며, 밤새 한숨조차 붙이지 못하였다. 원래는 어젯밤의 다툼 이후, 소한도 분명 깨달았으리라 생각했다. 그녀는 더 이상 그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다음 날 아침, 혜인과 초아가 그녀를 모시러 왔을 때, 여전히 입을 모아 그녀를 ‘부인님’이라 부르고 있었다. 그러다 닷새가 되던 날, 소한은 아예 저택으로 거처를 옮기고 말았다. 하인들이 책을 한 무더기씩 안으로 옮기는 모습을 본 김단은 미간을 찌푸렸다. 하인들을 따라 서재로 들어서니 책장 앞에서는 하인들이 서책을 정리하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문서들을 책상 위에 펼쳐 놓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머문 곳에는 군무 관련 서적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김단의 가슴이 순간 철렁 내려앉았다. ‘이제 아예 군에도 나자기 않겠다는 것인가?’ 그녀의 기척을 느낀 하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였다. “부인께 문안드리나이다.” 그러한 호칭들이 귀에 거슬렸지만, 그들에게 화를 낸들 소용이 없음을 알기에 그저 어굴을 굳힌 채 담담히 물었다.“소한은 어디 있느냐?” “나를 찾았소?”그때, 문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부러 부드럽게 가다듬은 그의 음성에 김단은 눈썹 사이가 더욱 깊이 파였다. 소한은 평상복 차림에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만 입가엔 푸른 멍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에게 주먹질을 당한 것이 분명하였다. 김단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차분히 물었다. “도대체 무엇을 하고 싶은 것입니까?” 그는 대답 대신 주변의 하인들을 스윽 바라보았다. “모두 나가거라.” 하인들은 즉시 명을 받들어, 머리를 숙이고는 하나둘 서재를 떠났다. 그제야 소한은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은 그대가 나를 쉬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란 것은 잘 알고 있소. 하지만 당신이 나를 허락하는 그날까지 기다릴 것이오.” 소한의 고집스러운 성격을 김단
서신은 매우 짧았고 화려한 문장도 없었다. 혜인과 초아의 눈에는 그저 평범한 서신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 서찰을 소한에게 보여드렸다.소한은 서신을 받아 들고 한번 훑어보았다. 그의 깊은 눈빛에는 단 한 점의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 그러더니 담담히 입을 열었다. “전해라.” “예.” 혜인과 초아는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자, 소한의 눈빛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김단이 이곳에 머물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소한도 알고 있었다.그녀는 정말 서신 한 편으로 구원을 바라고 있는 것인가?이제는 누구도 그녀를 그의 곁에서 데려갈 수 없음을 그녀는 왜 아직도 깨닫지 못했단 말인가?서신을 받아 든 숙희는 순간 얼이 빠지고 말았다.“이것은 확실히 아가씨의 필체입니다!” 숙희는 감격한 나머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요 며칠 그녀는 눈물도 말라 버릴 정도로 울고 또 울었다.곁에 있던 왕철이 편지를 살펴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씨의 글씨체를 알아보진 못하지만, 몸이 평안하다 말씀하셨으니 안심해도 될 것 같소.” 그러나 숙희는 흐느끼기 시작했다.“아씨는 저를 안심시키려고 이리 적으신 겁니다. 아씨를 소한 장군이 데려간 것이 틀림없습니다! 크게 다치지 않으셨다 하더라도, 그 마음이 얼마나 괴로우시겠습니까!” 왕철 역시 그녀의 말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서신의 내용을 곱씹을수록 너무나 이상했다.“하지만 말이오, 매화나무는 자주 물을 줄 필요가 없지 않소? 그런데 어찌하여 굳이 그것을 언급했단 말이오?” 그 말에 숙희도 순간 멍해졌다. 그러고 보니, 예전부터 매화당에서 지낸 아가씨께서 매화나무는 자주 물을 줄 필요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물을 주라는 말을 남기셨단 말인가? 숙희는 얇디얇은 서찰을 손에 쥔 채 몇 번이고 살펴보았으나, 별다른 단서를 찾지 못했다. 고민하던 그녀는 마침내 결심했다. “차라리 소하 도련님께 가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녀가
그날 밤. 김단은 침상에 누웠으나, 이리저리 뒤척이며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숙희가 ‘그 밖’이라는 단서는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지만, ‘물을 자주 주라’는 당부가 이상하다는 것쯤은 분명히 깨달을 것이다. 숙희가 이를 알아채지 못했다면 반드시 소하를 찾을 터였다.그리고 ‘그 밖’에 대한 단서는, 소하라면 분명히 파악할 것이다. 그러나 정작 김단 자신도 이곳이 정말 성 밖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는 줄곧 여기에 갇혀 있었고 한 번도 밖으로 나가지 못했기 때문이다.하인들 또한 모두 함구하고 있었으므로, 그녀의 모든 추측은 단지 그녀 스스로가 유추한 것이었다.그녀가 저택의 높은 담장을 지나칠 때마다, 밖에서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기에 매우 외진 곳에 위치해 있다고 짐작했다. 더불어, 밤을 꼬박 새우고 맞은 새벽, 그녀는 문득 짙은 물안개를 보았다. 이는 분명, 저택 근처에 물이 있다는 뜻이었다. 강이든, 샘물이든, 어쨌든 반드시 물과 가까이에 있었다. 자신의 추측이 정확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실낱같은 희망은 있었다.부디.... 하루빨리 이곳을 떠날 수 있기를. 다음날.소한은 아침 일찍 저택을 나섰다. 비록 군무를 이곳에서 보고 있었지만, 조정의 조참에 참석하는 일은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조정으로 향하던 그를 누군가가 막아서는 것이었다.그자는 바로 임학이었다.“소한! 내 누이를 어디에 숨겼느냐!” 임학은 말 위에서 소한을 내려다보며 외쳤다. 불길처럼 타오르는 눈빛에 분노가 서려 있었고, 수일간 쌓인 피로로 얼굴은 초췌하였다. 거멓게 자란 수염이 그의 피곤한 상태를 대변해 주었다. 며칠 동안, 김단을 찾느라 그는 온몸이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도둑이나 장물아비를 찾을 때는 날쌨던 수하들이 정작 김단을 찾아야 할 때는 모두 무용지물이었다.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김단이 소한에게 끌려갔다는 것이었다.그것이 아니라면 지금 온 거리를 헤매며 그녀를 찾고 있을 이는 소한이어야 했다.
임학은 이렇게 순순히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오늘 이 자리에서 김단의 행방을 캐낼 수는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오랜 고민 끝에, 그는 천천히 길을 내어주었다. 소한도 그제야 말 위로 올라타 궁으로 향했다. 그가 임학의 곁을 지나칠 때 낮지만 분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너의 이런 행동이 그녀의 미움을 산다는 것을 왜 아직도 모른 것이냐?”소한의 몸이 순간 움찔했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 역시 당연히 생각해 본 일이었다. 그러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그녀가 다른 이를 사랑하는 것을 지켜보느니, 차라리 이렇게라도 해야 했다. -소한은 왼팔의 상처를 대충 싸매고 조정으로 향했다. 황제는 그를 보자마자, 얼굴빛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조참이 끝난 후, 소한을 남겨 두었다. 넓은 대전안에 소한은 단정히 무릎 하나를 꿇었다. 황제는 용상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며, 깊은 분노가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반드시 그 여인을 가져야겠다는 것이냐?”소한이 입을 열었다.“오직 그녀만을 원하나이다!”“허나 전에 했던 말과 너무 다르지 않느냐! 여기에서 내가 분명 후회할 것이라고 경고하지 않았더냐? 한데 그때 너는 어찌 대답하였느냐!”소한은 침묵하였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날도, 그리고 지금도. 그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모든 것은 그가 선택한 길이니 어찌 후회할 수 있겠는가. 호언장담했었다. 그러나 형과 다정하게 서 있는 김단의 모습과 형의 눈빛이 점차 사랑으로 물드는 것을 보았을 때 소한은 깨달았다.그는 한때, 그녀가 아니어도 된다고 믿었다.그러나 그녀를 잃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그녀는 그의 만병통치약이었다.그녀 없이는, 이성을 놓아버리기 일쑤라 미쳐버릴 것 같았다. 숨 쉴 수조차 없었다.후회가 밀려왔다.너무나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는 중이었다.그녀의 곁을 지키지 못했던 모든 선택을, 그녀를 위해 끝까지 싸우지 못했던 모든 순간들.
이튿날 아침, 김단은 궁무를 맡지 않았기에 평양관저에 머물며 맹영지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탓인지 맹영지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김단의 곁에 있을 때만큼은 그녀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조용한 정원, 김단은 맹영지와 함께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계수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숙희가 건네준 과자가 들려 있었고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져있었다. 맹영지는 고개를 들어 만개한 계화를 바라보며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소하가 평양관저를 찾아왔으나 그는 맹영지와의 만남을 최대한 피하려 애썼다. 아마도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함이었을 것이다.김단은 맹영지를 바라보며 과거 소하가 왜 그리도 그녀를 칭찬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한때 소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여인답게 그녀는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하지만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가까웠던 두 사람이었는데 맹영지는 어쩌다 소하에게 독을 먹이려 했던 것일까?김단은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맹영지의 몸과 마음이 회복되면 그때 자연스럽게 그 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김단이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평양관저의 겸인이 급히 달려와 말했다.“아가씨, 맹가 사람들이 도착했습니다.”이런 큰일이 발생했으니 맹씨 집안에서 그녀를 보러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김단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겸인에게 말했다.“알겠소. 이리로 모셔오시오.”잠시 후, 맹씨 부인이 정원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김단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한 뒤 슬픈 눈으로 자신의 딸을 바라보았다. “김 의원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의원님이 아니었다면 제 딸이 그 짐승 같은 자에게 학대받으며 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입니다.”말을 마친 맹씨 부인의 눈동자가 붉어졌다.김단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이하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과찬이십니다, 맹씨 부인. 민태훈, 그 자의 말에 따르면 맹영지 아가씨의 병은 이미 4~5년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완전히 회
소한은 코웃음을 치며 말없이 등을 돌렸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소하의 조용한 목소리가 방안의 침묵을 깨뜨렸다.“이번에는 정말 잘했어.”영의정 저택에서 벌어진 일은 소한이 형벌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소하의 귀에 들어갔다. 만약 소한이 과감하게 영의정 저택에 침입하지 않았다면 김단은 쉽게 그곳을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비록 민씨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김단을 해치지 못한다고 해도 그녀가 겪었을 모욕과 고통은 상상하기 어려웠다.소하의 갑작스러운 칭찬에 소한은 많이 당황한 듯했다.“제가 충동적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때로는 그 충동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지.”소한은 아무 말 없이 그저 김단의 얼굴을 떠올렸다. 처음에 그녀도 자신을 발견하고 놀란 듯했지만 곧 냉랭한 표정으로 일관하였다. 김단은 마차에 오를 때까지 자신에게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과거의 그녀였다면 그가 나타나자마자 바로 그의 품에 안기며 그를 향해 미소 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너무나도 차갑게 변해버렸다. 자신을 외면하는 그녀가 소한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그는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를 다시금 깨달았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며 굳게 결심했다.그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해 이미 어떤 대가든 치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반 시진 후, 김단은 방 안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그러자 숙희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아가씨?”김단은 정신을 차리고 숙희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이냐?”“두 도련님께서는 모두 돌아가셨습니다.”김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금 전 발생한 일을 되새겨 보았다. 그녀는 소한이 오랫동안 계획해 온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을 선택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에도 그는 소가를 위해, 전하를 위해 심지어 임원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그러나 그녀만은 제외였다.그녀는 소한이 자신의 어머니를 걱정하는 척하며 평양관저로 따라온 것도 단지 자신의 동정심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상처
김단은 아무 말 없이 소한을 부축하며 걸었다. 궐에서 나오는 길은 유난히 길고 고요했다. 그들의 발걸음은 무겁고 느렸으며 말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궐문에 도착했을 때 소한의 마차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는 아마도 말을 타고 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상태로 다시 말을 타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된 김단은 곁에 있던 경씨에게 부탁했다.“도령님, 장군님을 먼저 집으로 모셔다 주실 수 있겠습니까?”그러자 소한이 놀란 듯 김단을 바라보며 물었다.“내게 약을 발라주지 않겠다는 것이오?”김단도 당황해하며 되물어 보았다.“소가에는 의원이 없습니까?”소한은 김단의 물음에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의 의도가 너무 노골적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어머니께서 내가 또 다쳤다는 걸 아시면 얼마나 걱정하겠소? 그러니 그냥 근처에서 치료받을 것이오. 낭자는 신경 쓰지 말고 먼저 돌아가시오.”김단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그렇다면, 먼저 평양관저로 함께 가서 약을 바르시죠.”소한은 그녀의 제안에 놀란 기색을 내비쳤다.“불편하지 않겠소?”김단은 그를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괜찮습니다.”그렇게 소한은 김단과 함께 평양관저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들을 맞이한 것은 김단의 몸종 숙희였다.소한을 발견한 그녀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그러자 김단이 숙희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차분히 말했다.“숙희야, 장군님을 객실로 안내해 주거라. 나는 약을 준비하러 가야겠구나.”그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김단의 지시를 따랐다.객실에 혼자 남은 소한은 조심스럽게 상의를 벗고 등을 드러냈다. 그의 등에는 형벌로 인한 상처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그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등을 바라보며 오늘의 형벌이 생각보다 가볍지 않았음을 깨달았다.하지만 그는 김단이 이 상처를 보면 마음 아파할 것이라 생각하며 기대감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잠시 후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약을 들고
긴장감이 맴도는 분위기 속에서 전하는 이해 안 되는 듯한 어투로 물었다,“조선의 장군인 네가, 수많은 전공을 세운 네가, 원하는 여인 하나 얻는 것이 그리 어렵단 말이냐? 어찌 김단 하나 때문에 수년간 공들여 쌓아온 모든 것을 무너뜨리려 하는 것이야? 그 낭자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느냐?”전하의 말투는 엄중했지만 그 속에는 실망과 안타까움이 섞여 있었다.그러자 소한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그렇습니다.”전하는 눈썹을 찌푸리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김 의원, 들었소?”그 순간 소한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조용히 서있는 김단이 있었다. 그녀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소한은 그녀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가 이 모든 대화를 들었다는 사실에 당황했지만 그녀의 표정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소한은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물었다.“김단, 왜 이곳에 있는 것이오?”그녀는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고 전하에게 예를 올렸다.“소녀 김단, 전하를 뵙습니다.”전하는 손짓으로 그녀를 일으키며 말했다.“일어나거라. 오늘 발생한 일에 대해 자세히 말해 보거라.”김단은 소한을 보지 않기 위해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 차분하게 사건의 전말을 설명했다. “제가 직접 목격한 바는 없습니다. 하지만 민대부를 제외하고는 영의정 댁 장남의 부인에게 감히 손을 댈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전하는 그녀의 말을 듣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맹 낭자의 상처를 확인하기 위해 두 명의 궁녀를 보내겠다. 평양관저에서 확인해 보도록 하거라.”학대의 이유가 무엇이든 맹영지는 필시 중전의 친척이었다. 만약 폭력을 가한 사람이 민대부라고 할지라도 이는 중전의 가문을 모욕하는 행위와 다름없었기에 결코 그를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전하는 소한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어쩌면 네 죄가 묻힐 수도 있겠구나.”민씨 가문의 잘못이 드러나게 된다면
소한은 곧바로 병사들과 함께 어서재에서 물러났다.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향 한 자루가 탈 정도의 시간이 흘러 있었다.소한이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본 전하는 하던 일을 멈추고 냉랭하게 물었다.“영의정이 너를 더 때리라고 명하지 않았느냐?”소한은 조용히 전하 앞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고 허리를 곧게 세운 채 대답했다.“전하의 깊은 뜻을 아는 자입니다. 그러니 더 심한 처벌을 요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전하는 코웃음을 치며 다시 물었다.“그렇다면, 내 뜻이 무엇이더냐?”소한은 고개를 들어 전하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전하께서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대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겁니다. 그래서 영의정을 불러 제가 벌을 받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게 하셨죠. 그리고 동시에 제가 전하의 사람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셨습니다. 전하께서는 영의정이 이 사실을 눈치채기 바라신 것 아니었습니까?”전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손에 들고 있던 붓을 책상에 내던지며 소리쳤다.“이 불경한 자식아! 내 너를 아낀다고 해서 이렇게 제멋대로 행동해도 된다고 생각하느냐? 영의정 저택 외에 또 어디에 첩자를 심어두었느냐?”소한은 눈을 내리깔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3품 이상의 모든 관료의 집에 첩자를 두었습니다.”그 말을 들은 전하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소한을 가리켰지만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였다.그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더니 한참 동안 방안을 서성이었다.잠시 후 그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네가 감히! 그렇게 많은 곳에 첩자를 심어두고 무슨 일을 꾸미려는 것이냐? 이렇게 행동하면 내가 소씨 집안을 멸문시켜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소한은 여전히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조용히 말했다.“저도 위험한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다섯 해 전, 저희 소가는 거의 멸문 당할 뻔했습니다.”그 해 소하가 지닌 병권은 다른 집안의 탐욕스러운 먹잇감이 되었고 그로 인해 조정의 문
김단은 그제야 잊고 있었던 민태훈을 떠올렸다.그녀는 맹영지를 몸종에게 맡기고 민태훈 곁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허벅지에 박힌 은침을 뽑아냈다.침이 빠져나가자마자 민태훈은 마치 고통에서 해방되기라도 한 듯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한 가닥의 은침이 이토록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큰 마님은 김단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그녀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말이다.그때 경씨가 마차를 몰고 도착했다. 김단과 몸종이 맹영지를 부축하며 걸어 나오자 경씨는 놀란 얼굴로 다가와 안부를 물었다.“낭자, 괜찮소?”방금 전 김단이 영의정 저택에서 곤란한 상황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소한은 급히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덕분에 한발 늦게 도착한 경씨는 자신이 더 일찍 김단을 챙기지 못한 것을 자책하며 말했다.“내가 미처 신경 쓰지 못했소.“김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대답했다.“저는 괜찮습니다. 먼저 맹 아가씨를 평양관저로 모시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그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김단과 몸종이 맹영지를 부축하며 마차에 오르자 경씨는 바로 마차를 출발 시켰다.김단은 마차에 오르기 전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조용히 서 있는 소한에게로 향했다. 소한은 그녀를 바라보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김단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소한은 그런 김단의 뒷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보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 후 소한은 곧장 궁으로 향했다.어서재에 도착한 그는 곧바로 무릎을 꿇고 앉아 오늘 영의정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전하에게 보고했다.그의 말을 들은 전하는 노여움을 감추지 못하며 소한을 꾸짖었다.“네가 감히 허락도 없이 영의정 저택을 침입했단 말이냐? 정말 대담하구나! 내가 너를 벌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느냐?”그러나 소한은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벌을 달게 받겠습니다.“전하는 그의 담담한 태도에 더 분노하며 외쳤다.“민가
김단은 민씨 부인의 말에 담긴 의미를 정확히 파악했다.보내서는 안 된다라...오늘 이 자리에서 맹영지뿐만 아니라 김단 자신도 민가를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김단은 민씨 부인이 자신의 아들을 위해 이런 결정을 내릴 줄 몰랐다.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선택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김단의 눈빛이 서서히 날카롭게 변해갔다. 그녀의 내면에서는 분노와 실망이 교차했다.큰 마님은 민씨 부인의 표정을 보고 심각한 상황임을 직감했다.맹영지의 몸에는 증거가 남아있었고 그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게 된다면 엄청난 파장을 불러올 것이다.하지만 지금 김단을 보내지 않는다면 그녀는 분명 궐로 들어가 이 일을 고발할 게 뻔했다.지금 김단을 적으로 돌린다면 그에 따른 후과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큰 마님은 사랑하는 손자를 바라보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김단을 보내면 민태훈의 입지가 위험해질 것이고 보내지 않는다면 민가 전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그러기에 그녀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그때, 한 하인이 급히 달려와 외쳤다.“큰 마님! 소 장군님께서 오셨습니다!”소 장군? 소한을 말하는 것인가?그의 이름이 언급되자 큰 마님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소한이 이렇게 빨리 이곳에 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김단도 그가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녀가 생각에 잠긴 사이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큰 마님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뵙게 되어 송구합니다.”모두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것은 당당하게 정원으로 걸어 들어오는 소한의 모습이었다.“소한, 주인의 허락도 없이 들어오다니! 대체 영의정 저택을 무엇으로 보시는 것이오? 이곳은 마음대로 들락날락할 수 있는 곳이 아니오.”소한은 그 말을 한 사람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이런 무례를 범한 것은 제 잘못입니다. 곧 전하 앞에서 사죄드리지요.”그는 정원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더니 큰 마님에게 다가가 정중히 인사했다.
머뭇거리는 그들의 모습에 김단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마님, 만약 지금 이 자리에서 저를 막으신다면 저는 곧장 궐로 가 이 모든 일을 고할 것입니다.”그녀의 말은 칼날처럼 날카로웠고 그 안에는 확고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김단의 말이 끝나자 민가의 사람들은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큰 마님은 눈썹을 찌푸리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그녀는 김단이 단순한 의원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김단은 진산군 댁의 적녀이자 평양원군의 의남매이다. 그리고 그녀는 소가의 두 형제와도 깊은 인연이 있었다. 지금 그녀를 적대시하는 것은 곧 여러 권세 있는 가문을 적으로 만드는 것과 다름없었다.큰 마님은 민태훈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통에 찬 얼굴로 땀을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그녀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그러나 동시에 마음속에는 김단에 대한 의심도 피어올랐다. 만약 그녀의 말이 과장된 것이라면 민씨 가문은 부당한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한참을 고민하던 큰 마님은 굳게 결심한 듯 민씨 부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네가 직접 확인해 보거라. 만약 낭자의 말이 거짓이라면 반드시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민씨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김단과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김단은 조심스럽게 맹영지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녀의 팔 안쪽에는 선명한 멍 자국이 여러 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민씨 부인은 숨을 들이켰다.“이런 상처가… 정말로…”그녀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자 김단은 차분하게 말했다.“다리 쪽은 더 심각합니다. 보시겠습니까?”민씨 부인은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이 상처, 정말로 태훈이의 짓입니까?”김단은 잠시 침묵하더니 그녀의 말에 대답해 주었다.“제가 직접 본 것은 아닙니다.”그 말에 민씨 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우리 태훈이는 절대 그럴 애가 아닙니다. 어릴 적부터 착하고 작은 생명도 소중히 여기던 사람이었단 말입니다.”김단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공주의 이름이 거론되자 민씨 일가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스쳤다. 그러나 큰 마님은 여전히 태연한 표정을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낭자가 공주의 명을 받고 우리 영의정 저택에 들어와 병자를 돌보는 것은 알겠소. 허나 공주의 허락 없이 사람을 해치는 것은 무엄한 일이오. 공주라 할지라도 국법을 지켜야 하지 않겠소? 그러니 함부로 공주의 이름을 빌어 협박하지 마시오.”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단은 박수를 치며 말했다.“참으로 옳은 말씀이십니다.”민가의 큰 마님은 김단이 드디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자신을 치켜세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단의 입가에는 더욱 짙은 미소가 떠올랐고 눈빛에는 경멸이 스쳤다.“공주님께서도 국법을 지키셔야 하는데 민가의 사람들은 더욱 그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민가의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를 높이며 반박했다.“그게 무슨 뜻이오? 우리 민씨 일가는 예로부터 법을 준수하며 국법에 어긋나는 일을 한 적이 없소!”“김 의원께서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 우리 민가에 누명을 씌우려는 것 아니오?” 김단은 그저 조용히 서서 그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두려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김단의 이런 차분한 태도가 큰 마님의 신경을 건드렸다.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김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큰 며늘 아씨는 중전마마의 친조카이시며 공주자가의 사촌이십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의 치료를 맡게 되었지요. 원래는 상태가 호전되고 있었으나 오늘 갑자기 증상이 악화되었습니다. 이는 분명 누군가가 큰 며늘 아씨의 회복을 방해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의원으로서 제 환자가 이곳에서 고통받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으니 제가 데려가야겠습니다. 만약 제 앞을 가로막으신다면 다음번에는 민대부님의 다리에 은침을 꽂아 버릴 것입니다.”이에 큰 마님은 지팡이를 바닥에 세게 내리치며 외쳤다.“허튼소리 마시오! 낭자의 의술이 부족해서 생긴 일을 왜 우리한테 덮어씌우려는 것이오?”“맞소! 무슨 명의의 제자라더니... 다 헛소리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