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지습은 김단의 말에 놀라서 되물었다.“김단이라고? 낭자는 정암의 누이가 아니었소?”김단은 살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그러나 곧바로 상황 판단을 마친 그녀는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저는 그분의 정혼자지요.”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눈빛이 흔들렸다.최지습은 자리에서 일어나 김단을 부축하며 물었다.“그렇다면 정암은 그 산적들에게 죽임을 당한 것입니까?”김단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울분을 터뜨리고 말았다.저 지긋지긋한 산적 놈들! 내 형제를 죽인 것도 모자라서 그와 호랑이군 명성까지 더럽혔단 말인가?무언가를 떠올린 최지습은 다시 물었다.“그럼 낭자와 소하는 무슨 관계입니까?”김단은 순간 멈칫했다. 여기서 거짓말로 얘기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그녀가 최지습 앞에서 무공을 드러냈던 순간부터 그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을 것이다. 김단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소하... 그분은 한때 제 남편이었습니다.”이 말을 듣자 최지습의 눈동자가 묘하게 흔들렸다.한때는 정암의 정혼자였다가 또 한때는 소하의 부인이라고?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인 걸까?운명의 장난 같은 이 관계가 너무 복잡했다.김단은 긴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그리고 아주 오랜 이야기들을 꺼내놓기 시작했다.그녀가 임단이었던 시절부터 시작해 장양강에 빠진 그날까지.최지습은 수많은 전장을 누비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왔지만 이렇게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는 처음 들어보았다.“임유, 그 늙은이는 점점 더 어리석어지는군.”최지습은 싸늘한 목소리로 얘기했다.그는 과거 오왕의 난이 터졌을 때를 떠올렸다.임유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전세를 놓칠 뻔했었는데 지금은 자신의 친딸조차 알아보지 못하다니!그 때문에 명색의 진산군 댁 적녀가 궐 세답방에서 무수리로 3년이란 세월을 보냈다.세상에 이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일이 또 있을까?거기다 명정 대군까지...대체 자식 교육은 어떻게 한 건지?그러나 가장 끔찍한 놈은 따로 있었다.소한!지난해 전장에서 승리를 거두고 돌아왔을
여기는 한양이 아니라 하만촌이다.그러니 여기에는 평양 원군은 없고 오직 사냥꾼 백우만 있을 뿐이다.최지습은 여전히 예전처럼 대수롭지 않게 행동했다.그런 그를 바라보던 김단도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어젯밤 너무 늦게 잠들었던 탓일까?이튿날, 김단이 눈을 떴을 때 높이 뜬 햇살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문밖에서는 바느질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그늘 아래에서 춘 숙모가 조용히 실을 꿰고 있었다.그녀는 김단이 깨어난 것을 보자 자리에서 일어나 익숙하게 죽을 떠왔다.“백우님께서 말씀하셨소. 낭자가 몸이 불편하니 나더러 조용히 있으라고 하셨는데 지금은 어떠시오? 좀 괜찮소?”춘 숙모의 관심 어린 걱정에 김단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녀의 손길은 늘 온화했기에 따뜻한 온정을 느낄 수 있었다.그녀는 텅 빈 마당을 한 번 훑어보곤 자연스럽게 물었다.“백도령은 또 칠복이를 데리고 일하러 가신 겁니까?”그러나 춘 숙모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아니. 백우님께서는 날이 밝기도 전에 장터로 갔소. 아마 급한 일이 있었던 모양이지. 칠복이는 어제 온몸이 쑤시다더니 아직도 누워 있소.”그 말을 듣자 김단은 순간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그가 이른 새벽부터 장터에 갔다고?왠지 자신과 관련된 일인 것 같았다.하지만 그가 자신을 고발하러 간 것은 아닐 터.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마음이 밀려왔다.김단은 어젯밤 그에게 아무 거리낌 없이 모든 것을 털어놓은 것이 점점 후회되기 시작했다.평양 원군이라는 이름이 주는 충격이 너무 컸다.그래서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흐트러져 버렸고 속내를 감추는 것조차 잊어버렸다.김단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스스로를 다독였다.괜찮아. 최지습은 그런 사람이 아니야.그는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하루 종일 가슴속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김단의 초조함이 극에 달할 무렵, 서서히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때마침 최지습이 대문을 밀며 모습을 드러냈다.
6번이 꽤 당돌한 말을 내뱉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지습은 당황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지난번에 술에 취한 척했던 날, 이 무리의 사람들은 김단이 춘 숙모를 불러 자신들을 돌봐주게 한 사실을 알고 난 후 그녀에게 어느 정도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오늘 그들에게 김단의 신분을 말해주면서 자연스럽게 그녀의 과거도 함께 이야기해 주었다.그녀에 대해 들은 이들은 하나같이 놀라고 경악하며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거기에 정암과의 관계까지 더해지자 김단을 향한 그들의 감정은 단순한 호감에서 보호 본능으로 바뀌었다.하지만 최지습은 6번이 그녀를 의동생으로 삼겠다는 말을 꺼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여섯째가 그냥 한 말일뿐입니다. 원하지 않는다면 강요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맞아요, 맞아! 저는 그냥 해본 소리였어요. 낭자가 부담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이들은 그녀를 의동생으로 삼고 싶다고 했지만 정작 김단의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았다.그러나 6번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김단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여섯째 도령께서 그냥 한 말이라고 했지만 저는 진지하게 들었는걸요.”조선 백성들 사이에서 전설과도 같은 존재인 호랑이군이 자신을 의동생으로 받아들이고 싶어 한다니, 오히려 그녀에게는 영광이었다.그러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김단이 “여섯째 도령”이라고 부르자 방 안은 순식간에 떠들썩해졌다.“좋습니다! 그 부드러운 목소리로 저도 한번 불러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가 몇 번째 인지 기억나십니까?”김단은 잠시 생각하다가 또렷하게 말했다.“셋째 도령님.”“맞습니다!”“그럼 저는요?”“다섯째 도령님.”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맑았다.그녀가 한 사람 한 사람 불러줄 때마다 호랑이군들의 표정이 환하게 변해갔다.그들은 모두 고아였다.부모도, 가족도, 형제도 없었다.당연히 누이도 없었다.스무 해 넘게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누군가가 다정하게 “도령님”이라 불러주니 이들은 기쁠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김단이 차례대로 이름을 부르며 모두를 도령으
옆에서 조용히 김단의 말을 듣고 있던 둘째 도령이 입을 열었다.“모두 조심합시다. 문신을 드러내지만 않는다면 문제 없을거예요. 어쨌든, 우리가 이곳에서 살아온 지도 어느덧 여덟 해나 되었습니다. 그러니 섣불리 우리를 의심하진 않을 겁니다.”그렇게 말한 후 그는 김단을 바라보며 한층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수배령은 아직 마을 안에서만 돌고 있을 뿐 그리 널리 퍼지진 않았습니다. 마을에 살고 있는 형님들이 항상 주시하고 있을 테니 혹여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바로 알려드릴게요.”그들은 이제 막 의형제로 맺어진 사이일 뿐이다.그런데 그의 말에서 그녀를 보호하려는 마음이 엿보였다.그 작은 배려가 김단의 가슴 깊숙이 스며들었다.그녀는 둘째 도령을 바라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만 얘기하시오. 오늘 우리에겐 새로운 누이가 생겼으니 즐겁게 보내야 되지 않겠소? 자, 다들 많이 드시오!”다섯째 도령이 이렇게 말하며 젓가락을 들었으나 이내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그런데 계속 ‘누이’라고 부를 순 없지 않소? 뭔가 좀 어색한데....”김단은 고개를 숙이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도령님들은 그냥 저를 편하게 ‘단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단이… 좋소! 그런데 단이는 닭 다리를 좋아하오? 이건 외래주막의 대표 요리인데!”다섯째 도령은 흡족한 얼굴로 김단의 그릇에 큼직한 닭 다리를 하나 덜어 주었다.그러자 다른 도령들도 덩달아 젓가락을 움직이며 음식들을 그녀의 그릇에 놓아주기 시작했다.그렇게 모두 함께 떠들썩하게 식사를 이어갔다.김단은 문득 불과 며칠 전에 발생한 일을 떠올렸다.그때도 이렇게 한데 모여 앉아 음식을 먹었었다.하지만 그때의 그녀는 그들 무리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끼어 있는 이방인에 불과했다.그런데 단 며칠 만에 그녀는 이들 사이에 녹아들어 있었다.그 감각은 묘하게 낯설면서도 가슴을 따뜻하게 적셨다.김단은 다섯째 도령이 덜어준 닭 다리를 들고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입안 가득 번지
마을 어귀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그 선두에 서 있는 이는 이대우. 그자였다.그는 한쪽 다리를 저는 몸을 하고도 빠른 걸음을 유지하려 애쓰고 있었다.때때로 곁에 있는 사람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굽신거리기도 했다.그런데 그의 옆에서 나란히 걷는 남자는 그와 정반대인 모습이었다.반듯한 자세, 흐트러짐 없는 걸음걸이, 단정한 옷매무새.그의 모든 움직임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정한 기품과 고고한 위엄은 이 소박한 시골 풍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그 순간 김단은 놀라야 할지 아니면 안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그 사람은 바로 소하였기 때문이다.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저기입니다! 저 낡은 집!”이대우는 숨이 차오르는 것도 잊은 채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외쳤다.그는 이틀 전 관청으로 끌려갔을 때 감옥에 갇힐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나 그곳에서 관청 관리는 그에게 손에 들고 있던 수배령을 보여주었다.그는 한눈에 수배령 속 여인을 알아보았다.김단. 그녀였다.그 순간 그는 주저 없이 관리에게 그녀의 행방을 알렸고오늘 아침, 소하가 직접 그를 찾아와 김단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라고 했다.소하는 이대우가 손가락질하는 방향을 따라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그러자 작은 나무 울타리 안에 서 있는 두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익숙한 실루엣이 그의 눈에 띄었다.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촌스러운 옷차림을 하고 있음에도 그는 단번에 그녀를 알아보았다. 찾았다.드디어 그녀를 찾았다.심장이 요동치고 걸음이 빨라졌다.이제껏 유지해 오던 고고한 품위도, 우아한 태도도 모두 잊은 채, 그는 전속력을 다해 그녀에게로 달려갔다.“단아!”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오랜 이별 끝에 다시 마주한 환희와 한때 잃어버린 것에 대한 그리움과 집착.이런 감정들이 모두 하나로 겹쳐졌다.생과 사의 경계를 넘어서 다시 얻은 이 기적 같은 순간에 그는 애타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김단의 몸이 그대로 얼어붙었다.그녀의 미세한 변화를 감지한 춘 숙모도 덩달아 긴장
방 안의 공기는 차분했지만 그 속에는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이 서려있었다.소하는 말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허름한 지붕, 바래진 문짝, 낡은 가구들.이곳에서의 삶은 몹시 궁핍해 보였다.그러나 이곳은 완전히 버려진 폐가는 아니었다.그리고 이 집의 주인은 남자일 가능성이 높았다.그때 김단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백 도령은 사냥을 하러 가셨어요.”소하는 천천히 시선을 그녀에게로 돌렸다.그녀가 자신의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그는 마음을 가다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당신을 구해준 사람이 사냥꾼이오?”김단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을 뿐 더 이상의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소하는 다시금 시선을 돌려 그녀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백 씨? 흔치 않은 성이군.”그 말에 김단의 미간이 미묘하게 좁혀졌다.그가 백우, 즉 최지습에 대해 불필요한 호기심을 가지는 걸 원치 않았다.그래서 그녀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오라버니, 저를 찾느라 오래 걸리셨나요?”소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그리고 천천히 시선을 내리깔며 쓴웃음을 지었다.“낭자가 장양강에 떨어진 그 순간부터 단 한 번도 멈춘 적 없었소.”그의 시선은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다.김단은 그가 고개를 숙이기 직전 그의 눈빛에 스친 깊은 외로움과 상실감을 똑똑히 보았다.그녀가 장양강에 빠진 지도 벌써 한 달 보름이 넘었다.그녀가 의식을 잃고 누워있을 때도,그녀가 이곳에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도,그는 그녀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그가 얼마나 많은 실망을 거듭했고 얼마나 많은 허망한 단서를 좇으며 여기까지 왔는지 김단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삼백여 리의 거리.그는 어떻게 그녀를 찾아낸 걸까?그녀는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을 텐데.“오라버니를 걱정하게 해드렸네요.”김단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소하는 그녀가 예전에 알던 김단과는 사뭇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말투 속에 어떤 평온함이 자리 잡고 있는 듯했다.그녀가
소하와 김단, 그들이 처한 상황은 너무나도 달랐다.김단은 모두에게 버려진 존재였지만, 소하는 모두에게 사랑받는 존재였다.그가 다섯 해 동안 움직이지 못하는 몸이었을지라도 구태부는 그를 다시 마주했을 때 눈물을 글썽이며 감격했고 그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체면을 내려놓기까지 했다.전하는 그의 회복 소식을 듣자마자 즉시 그를 궐로 불러들여 각별한 관심과 배려를 보여주었다.소가의 장자로 태어난 그는, 소씨 대감의 극진한 사랑과 소씨 부인의 아낌없는 애정을 받았다.소정원조차도 그를 깊이 존경하고 따랐다.소한 역시 마찬가지였다.그가 아무리 계략을 꾸미고 모든 걸 장악하려 했어도 소하에게 치명적인 해를 입히지 못했다.그는 사랑받는 존재였다.‘사랑’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그것은 때로 가장 단단한 갑옷이 되기도 하고때로는 가장 아픈 상처가 되기도 한다.김단은 시선을 내리며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자신의 두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오라버니와 함께 한양으로 돌아가라고요?”그녀의 물음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소하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가지 않아도 되오! 낭자가 원하는 곳으로 갈 생각이오. 낭자가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소!”그의 말에는 단단한 결심이 서려 있었다.그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다.김단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는 다시 한번 조용히 물었다.“그럼… 이번 생이 다할 때까지 한양으로 돌아가지 않을 건가요?”그 말에 소하는 순간 멍해졌다.‘이번 생이 다할 때까지.’생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기약 없는 시간 속에서, 영원히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을 자신이 있냐는 뜻이었다.그러나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나는 언제까지나 낭자 곁에 남을 것이오.”그녀가 영원히 한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도 영원히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그것이 그의 선택이었다.하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김단은 고요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럼, 대감님과 대감마님은요? 금군 총령의 자리는요? 그리고 전하께는 어떻
행복?소하는 순간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그는 김단을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낭자가 말하는 그 행복이… 그 사냥꾼이오?”그의 목소리는 무심한 듯했지만 그 안에는 복잡한 감정이 얽혀 있었다.그러나 그녀의 반응은 소하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당연히 아닙니다! 백도령은 그저 저를 구해주신 은인이에요.”그녀는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것은 누가 봐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반응이었다.그녀의 단호한 부정 속에서 소하는 순간적으로 헛짚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소하는 미묘하게 눈썹을 찌푸리며 낮게 읊조렸다.“나는… 그런 줄 알았소.”그녀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그도 확신할 수 없었다.김단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전 단지, 한양에서의 삶보다 이런 평범한 백성의 삶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해요.”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창밖으로 향했다.그곳에는 춘 숙모가 서 있었다. 그녀는 그늘이 있는 곳을 마다하고 굳이 마당에서 채소를 다듬고 있는 걸 보니 혹시라도 김단이 소하에게 무슨 봉변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되는 모양이었다.그녀는 수시로 집 안을 힐끗힐끗 바라보며 안절부절못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 모습에 김단의 눈가에는 저절로 따스한 미소가 번졌다.그녀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마당을 향해 밝게 웃었다.“이곳 사람들은 단순해요. 물론 나쁜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선하고 정직합니다. 그들은 태양이 떠오르면 일어나 일하고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오지요. 물질적인 것에 연연하지 않고 부와 명예에 대한 갈망이 크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저 오늘 하루를 충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이지요.”소하는 김단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바라보았다.그의 눈에 춘 숙모의 모습이 들어왔다.햇볕에 그을려 검게 빛나는 얼굴. 그 속에는 조금의 가식도, 간사함도 없는 정직한 표정이 담겨있었다.그는 김단이 왜 이곳을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한양은 너무 크고 복잡했다.억울함은 쉽게 씻어낼 수
이튿날 아침, 김단은 궁무를 맡지 않았기에 평양관저에 머물며 맹영지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탓인지 맹영지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김단의 곁에 있을 때만큼은 그녀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조용한 정원, 김단은 맹영지와 함께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계수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숙희가 건네준 과자가 들려 있었고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져있었다. 맹영지는 고개를 들어 만개한 계화를 바라보며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소하가 평양관저를 찾아왔으나 그는 맹영지와의 만남을 최대한 피하려 애썼다. 아마도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함이었을 것이다.김단은 맹영지를 바라보며 과거 소하가 왜 그리도 그녀를 칭찬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한때 소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여인답게 그녀는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하지만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가까웠던 두 사람이었는데 맹영지는 어쩌다 소하에게 독을 먹이려 했던 것일까?김단은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맹영지의 몸과 마음이 회복되면 그때 자연스럽게 그 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김단이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평양관저의 겸인이 급히 달려와 말했다.“아가씨, 맹가 사람들이 도착했습니다.”이런 큰일이 발생했으니 맹씨 집안에서 그녀를 보러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김단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겸인에게 말했다.“알겠소. 이리로 모셔오시오.”잠시 후, 맹씨 부인이 정원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김단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한 뒤 슬픈 눈으로 자신의 딸을 바라보았다. “김 의원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의원님이 아니었다면 제 딸이 그 짐승 같은 자에게 학대받으며 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입니다.”말을 마친 맹씨 부인의 눈동자가 붉어졌다.김단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이하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과찬이십니다, 맹씨 부인. 민태훈, 그 자의 말에 따르면 맹영지 아가씨의 병은 이미 4~5년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완전히 회
소한은 코웃음을 치며 말없이 등을 돌렸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소하의 조용한 목소리가 방안의 침묵을 깨뜨렸다.“이번에는 정말 잘했어.”영의정 저택에서 벌어진 일은 소한이 형벌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소하의 귀에 들어갔다. 만약 소한이 과감하게 영의정 저택에 침입하지 않았다면 김단은 쉽게 그곳을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비록 민씨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김단을 해치지 못한다고 해도 그녀가 겪었을 모욕과 고통은 상상하기 어려웠다.소하의 갑작스러운 칭찬에 소한은 많이 당황한 듯했다.“제가 충동적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때로는 그 충동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지.”소한은 아무 말 없이 그저 김단의 얼굴을 떠올렸다. 처음에 그녀도 자신을 발견하고 놀란 듯했지만 곧 냉랭한 표정으로 일관하였다. 김단은 마차에 오를 때까지 자신에게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과거의 그녀였다면 그가 나타나자마자 바로 그의 품에 안기며 그를 향해 미소 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너무나도 차갑게 변해버렸다. 자신을 외면하는 그녀가 소한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그는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를 다시금 깨달았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며 굳게 결심했다.그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해 이미 어떤 대가든 치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반 시진 후, 김단은 방 안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그러자 숙희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아가씨?”김단은 정신을 차리고 숙희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이냐?”“두 도련님께서는 모두 돌아가셨습니다.”김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금 전 발생한 일을 되새겨 보았다. 그녀는 소한이 오랫동안 계획해 온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을 선택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에도 그는 소가를 위해, 전하를 위해 심지어 임원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그러나 그녀만은 제외였다.그녀는 소한이 자신의 어머니를 걱정하는 척하며 평양관저로 따라온 것도 단지 자신의 동정심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상처
김단은 아무 말 없이 소한을 부축하며 걸었다. 궐에서 나오는 길은 유난히 길고 고요했다. 그들의 발걸음은 무겁고 느렸으며 말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궐문에 도착했을 때 소한의 마차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는 아마도 말을 타고 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상태로 다시 말을 타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된 김단은 곁에 있던 경씨에게 부탁했다.“도령님, 장군님을 먼저 집으로 모셔다 주실 수 있겠습니까?”그러자 소한이 놀란 듯 김단을 바라보며 물었다.“내게 약을 발라주지 않겠다는 것이오?”김단도 당황해하며 되물어 보았다.“소가에는 의원이 없습니까?”소한은 김단의 물음에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의 의도가 너무 노골적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어머니께서 내가 또 다쳤다는 걸 아시면 얼마나 걱정하겠소? 그러니 그냥 근처에서 치료받을 것이오. 낭자는 신경 쓰지 말고 먼저 돌아가시오.”김단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그렇다면, 먼저 평양관저로 함께 가서 약을 바르시죠.”소한은 그녀의 제안에 놀란 기색을 내비쳤다.“불편하지 않겠소?”김단은 그를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괜찮습니다.”그렇게 소한은 김단과 함께 평양관저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들을 맞이한 것은 김단의 몸종 숙희였다.소한을 발견한 그녀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그러자 김단이 숙희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차분히 말했다.“숙희야, 장군님을 객실로 안내해 주거라. 나는 약을 준비하러 가야겠구나.”그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김단의 지시를 따랐다.객실에 혼자 남은 소한은 조심스럽게 상의를 벗고 등을 드러냈다. 그의 등에는 형벌로 인한 상처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그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등을 바라보며 오늘의 형벌이 생각보다 가볍지 않았음을 깨달았다.하지만 그는 김단이 이 상처를 보면 마음 아파할 것이라 생각하며 기대감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잠시 후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약을 들고
긴장감이 맴도는 분위기 속에서 전하는 이해 안 되는 듯한 어투로 물었다,“조선의 장군인 네가, 수많은 전공을 세운 네가, 원하는 여인 하나 얻는 것이 그리 어렵단 말이냐? 어찌 김단 하나 때문에 수년간 공들여 쌓아온 모든 것을 무너뜨리려 하는 것이야? 그 낭자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느냐?”전하의 말투는 엄중했지만 그 속에는 실망과 안타까움이 섞여 있었다.그러자 소한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그렇습니다.”전하는 눈썹을 찌푸리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김 의원, 들었소?”그 순간 소한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조용히 서있는 김단이 있었다. 그녀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소한은 그녀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가 이 모든 대화를 들었다는 사실에 당황했지만 그녀의 표정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소한은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물었다.“김단, 왜 이곳에 있는 것이오?”그녀는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고 전하에게 예를 올렸다.“소녀 김단, 전하를 뵙습니다.”전하는 손짓으로 그녀를 일으키며 말했다.“일어나거라. 오늘 발생한 일에 대해 자세히 말해 보거라.”김단은 소한을 보지 않기 위해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 차분하게 사건의 전말을 설명했다. “제가 직접 목격한 바는 없습니다. 하지만 민대부를 제외하고는 영의정 댁 장남의 부인에게 감히 손을 댈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전하는 그녀의 말을 듣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맹 낭자의 상처를 확인하기 위해 두 명의 궁녀를 보내겠다. 평양관저에서 확인해 보도록 하거라.”학대의 이유가 무엇이든 맹영지는 필시 중전의 친척이었다. 만약 폭력을 가한 사람이 민대부라고 할지라도 이는 중전의 가문을 모욕하는 행위와 다름없었기에 결코 그를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전하는 소한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어쩌면 네 죄가 묻힐 수도 있겠구나.”민씨 가문의 잘못이 드러나게 된다면
소한은 곧바로 병사들과 함께 어서재에서 물러났다.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향 한 자루가 탈 정도의 시간이 흘러 있었다.소한이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본 전하는 하던 일을 멈추고 냉랭하게 물었다.“영의정이 너를 더 때리라고 명하지 않았느냐?”소한은 조용히 전하 앞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고 허리를 곧게 세운 채 대답했다.“전하의 깊은 뜻을 아는 자입니다. 그러니 더 심한 처벌을 요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전하는 코웃음을 치며 다시 물었다.“그렇다면, 내 뜻이 무엇이더냐?”소한은 고개를 들어 전하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전하께서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대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겁니다. 그래서 영의정을 불러 제가 벌을 받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게 하셨죠. 그리고 동시에 제가 전하의 사람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셨습니다. 전하께서는 영의정이 이 사실을 눈치채기 바라신 것 아니었습니까?”전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손에 들고 있던 붓을 책상에 내던지며 소리쳤다.“이 불경한 자식아! 내 너를 아낀다고 해서 이렇게 제멋대로 행동해도 된다고 생각하느냐? 영의정 저택 외에 또 어디에 첩자를 심어두었느냐?”소한은 눈을 내리깔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3품 이상의 모든 관료의 집에 첩자를 두었습니다.”그 말을 들은 전하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소한을 가리켰지만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였다.그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더니 한참 동안 방안을 서성이었다.잠시 후 그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네가 감히! 그렇게 많은 곳에 첩자를 심어두고 무슨 일을 꾸미려는 것이냐? 이렇게 행동하면 내가 소씨 집안을 멸문시켜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소한은 여전히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조용히 말했다.“저도 위험한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다섯 해 전, 저희 소가는 거의 멸문 당할 뻔했습니다.”그 해 소하가 지닌 병권은 다른 집안의 탐욕스러운 먹잇감이 되었고 그로 인해 조정의 문
김단은 그제야 잊고 있었던 민태훈을 떠올렸다.그녀는 맹영지를 몸종에게 맡기고 민태훈 곁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허벅지에 박힌 은침을 뽑아냈다.침이 빠져나가자마자 민태훈은 마치 고통에서 해방되기라도 한 듯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한 가닥의 은침이 이토록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큰 마님은 김단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그녀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말이다.그때 경씨가 마차를 몰고 도착했다. 김단과 몸종이 맹영지를 부축하며 걸어 나오자 경씨는 놀란 얼굴로 다가와 안부를 물었다.“낭자, 괜찮소?”방금 전 김단이 영의정 저택에서 곤란한 상황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소한은 급히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덕분에 한발 늦게 도착한 경씨는 자신이 더 일찍 김단을 챙기지 못한 것을 자책하며 말했다.“내가 미처 신경 쓰지 못했소.“김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대답했다.“저는 괜찮습니다. 먼저 맹 아가씨를 평양관저로 모시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그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김단과 몸종이 맹영지를 부축하며 마차에 오르자 경씨는 바로 마차를 출발 시켰다.김단은 마차에 오르기 전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조용히 서 있는 소한에게로 향했다. 소한은 그녀를 바라보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김단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소한은 그런 김단의 뒷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보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 후 소한은 곧장 궁으로 향했다.어서재에 도착한 그는 곧바로 무릎을 꿇고 앉아 오늘 영의정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전하에게 보고했다.그의 말을 들은 전하는 노여움을 감추지 못하며 소한을 꾸짖었다.“네가 감히 허락도 없이 영의정 저택을 침입했단 말이냐? 정말 대담하구나! 내가 너를 벌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느냐?”그러나 소한은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벌을 달게 받겠습니다.“전하는 그의 담담한 태도에 더 분노하며 외쳤다.“민가
김단은 민씨 부인의 말에 담긴 의미를 정확히 파악했다.보내서는 안 된다라...오늘 이 자리에서 맹영지뿐만 아니라 김단 자신도 민가를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김단은 민씨 부인이 자신의 아들을 위해 이런 결정을 내릴 줄 몰랐다.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선택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김단의 눈빛이 서서히 날카롭게 변해갔다. 그녀의 내면에서는 분노와 실망이 교차했다.큰 마님은 민씨 부인의 표정을 보고 심각한 상황임을 직감했다.맹영지의 몸에는 증거가 남아있었고 그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게 된다면 엄청난 파장을 불러올 것이다.하지만 지금 김단을 보내지 않는다면 그녀는 분명 궐로 들어가 이 일을 고발할 게 뻔했다.지금 김단을 적으로 돌린다면 그에 따른 후과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큰 마님은 사랑하는 손자를 바라보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김단을 보내면 민태훈의 입지가 위험해질 것이고 보내지 않는다면 민가 전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그러기에 그녀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그때, 한 하인이 급히 달려와 외쳤다.“큰 마님! 소 장군님께서 오셨습니다!”소 장군? 소한을 말하는 것인가?그의 이름이 언급되자 큰 마님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소한이 이렇게 빨리 이곳에 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김단도 그가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녀가 생각에 잠긴 사이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큰 마님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뵙게 되어 송구합니다.”모두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것은 당당하게 정원으로 걸어 들어오는 소한의 모습이었다.“소한, 주인의 허락도 없이 들어오다니! 대체 영의정 저택을 무엇으로 보시는 것이오? 이곳은 마음대로 들락날락할 수 있는 곳이 아니오.”소한은 그 말을 한 사람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이런 무례를 범한 것은 제 잘못입니다. 곧 전하 앞에서 사죄드리지요.”그는 정원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더니 큰 마님에게 다가가 정중히 인사했다.
머뭇거리는 그들의 모습에 김단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마님, 만약 지금 이 자리에서 저를 막으신다면 저는 곧장 궐로 가 이 모든 일을 고할 것입니다.”그녀의 말은 칼날처럼 날카로웠고 그 안에는 확고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김단의 말이 끝나자 민가의 사람들은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큰 마님은 눈썹을 찌푸리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그녀는 김단이 단순한 의원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김단은 진산군 댁의 적녀이자 평양원군의 의남매이다. 그리고 그녀는 소가의 두 형제와도 깊은 인연이 있었다. 지금 그녀를 적대시하는 것은 곧 여러 권세 있는 가문을 적으로 만드는 것과 다름없었다.큰 마님은 민태훈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통에 찬 얼굴로 땀을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그녀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그러나 동시에 마음속에는 김단에 대한 의심도 피어올랐다. 만약 그녀의 말이 과장된 것이라면 민씨 가문은 부당한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한참을 고민하던 큰 마님은 굳게 결심한 듯 민씨 부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네가 직접 확인해 보거라. 만약 낭자의 말이 거짓이라면 반드시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민씨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김단과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김단은 조심스럽게 맹영지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녀의 팔 안쪽에는 선명한 멍 자국이 여러 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민씨 부인은 숨을 들이켰다.“이런 상처가… 정말로…”그녀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자 김단은 차분하게 말했다.“다리 쪽은 더 심각합니다. 보시겠습니까?”민씨 부인은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이 상처, 정말로 태훈이의 짓입니까?”김단은 잠시 침묵하더니 그녀의 말에 대답해 주었다.“제가 직접 본 것은 아닙니다.”그 말에 민씨 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우리 태훈이는 절대 그럴 애가 아닙니다. 어릴 적부터 착하고 작은 생명도 소중히 여기던 사람이었단 말입니다.”김단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공주의 이름이 거론되자 민씨 일가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스쳤다. 그러나 큰 마님은 여전히 태연한 표정을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낭자가 공주의 명을 받고 우리 영의정 저택에 들어와 병자를 돌보는 것은 알겠소. 허나 공주의 허락 없이 사람을 해치는 것은 무엄한 일이오. 공주라 할지라도 국법을 지켜야 하지 않겠소? 그러니 함부로 공주의 이름을 빌어 협박하지 마시오.”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단은 박수를 치며 말했다.“참으로 옳은 말씀이십니다.”민가의 큰 마님은 김단이 드디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자신을 치켜세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단의 입가에는 더욱 짙은 미소가 떠올랐고 눈빛에는 경멸이 스쳤다.“공주님께서도 국법을 지키셔야 하는데 민가의 사람들은 더욱 그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민가의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를 높이며 반박했다.“그게 무슨 뜻이오? 우리 민씨 일가는 예로부터 법을 준수하며 국법에 어긋나는 일을 한 적이 없소!”“김 의원께서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 우리 민가에 누명을 씌우려는 것 아니오?” 김단은 그저 조용히 서서 그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두려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김단의 이런 차분한 태도가 큰 마님의 신경을 건드렸다.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김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큰 며늘 아씨는 중전마마의 친조카이시며 공주자가의 사촌이십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의 치료를 맡게 되었지요. 원래는 상태가 호전되고 있었으나 오늘 갑자기 증상이 악화되었습니다. 이는 분명 누군가가 큰 며늘 아씨의 회복을 방해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의원으로서 제 환자가 이곳에서 고통받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으니 제가 데려가야겠습니다. 만약 제 앞을 가로막으신다면 다음번에는 민대부님의 다리에 은침을 꽂아 버릴 것입니다.”이에 큰 마님은 지팡이를 바닥에 세게 내리치며 외쳤다.“허튼소리 마시오! 낭자의 의술이 부족해서 생긴 일을 왜 우리한테 덮어씌우려는 것이오?”“맞소! 무슨 명의의 제자라더니... 다 헛소리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