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5화

Author: 주현군
이정은 온몸의 피가 순식간에 식어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하정혁은 단번에 이정을 발견하고 경비의 제지를 뿌리치며 달려들었다.

“이 쓸모없는 년. 아빠를 봤는데도 당장 안 튀어 오고 뭐 해? 이렇게 쫓겨나게 두고 볼 거야?”

남자의 목소리는 워낙 컸기에 그 한마디에 로비에 있던 모든 시선이 이정에게 쏠렸다.

이에 이정은 주먹을 꽉 쥐었다.

“여기 회사예요. 이런 데서 소란 피우지 마세요.”

이정은 목소리를 최대한 낮췄지만, 하정혁은 침을 퉤 뱉으며 자신이 알 바가 아니라는 듯 말했다.

“회사가 뭐가 대수라고? 지금 죽게 생겼으니까 당장 돈 내놔.”

이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서 나연이 다가와 부드럽게 끼어들었다.

“아버님, 말씀 차분히 하세요. 하 비서를 찾으신 이유가 있으세요?”

나연은 한눈에 봐도 부유한 차림새이자 하정혁의 눈이 반짝였다.

“아가씨는 누구지?”

“저는 서중건 대표의 약혼녀예요.”

나연이 미소 지었다.

“하 비서의 아버님이시라면, 어려운 일이 있으시면 저희가 도와드릴 수 있어요.”

이정은 곧바로 나연을 바라봤다.

“나연 씨, 제 일에 끼어들지 마세요.”

그때, 언제 나타났는지 모르게 서 있던 중건이, 무심한 눈빛으로 이정을 훑어보면서 냉랭하게 말했다.

“하 비서, 10분 드릴 테니까 사적인 일 빨리 정리하세요.”

말투에 담긴 혐오감을 숨길 생각조차 없었다.

이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이정은 스멀스멀 올라오는 서러움을 애써 눌러 담았다.

“네, 대표님.”

“중건 씨.”

나연이 팔을 걸었다.

“하 비서한테 사적인 일이 생겼으니 프로젝트는 참여하지 않게 하는 게 좋겠어.”

그러고는 이정을 향해 다시 말했다.

“일은 신경 쓰지 말고 다녀와요. 회사 일은 제가 잘 정리할게요.”

중건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이정의 창백한 얼굴을 한 번 스쳐봤다.

“대표님, 저는 제 사적인 일로 업무에 지장을 주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나연 씨는 프로젝트에 익숙하지도 않잖아요.”

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연에 의해 끊겼다.

“하 비서는 내가 능력이 부족할까 봐 걱정되나 봐요?”

나연이 가볍게 웃었다.

“중건 씨, 걱정하지 마. 내가 하 비서보다 더 잘할게. 나 믿지?”

중건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자, 나연은 그 망설임을 알아채고는 담담히 덧붙였다.

“하 비서는 복잡한 사적인 일 때문에 아무래도 신경이 분산될 수 있잖아. 그리고 이 프로젝트는 실수하면 안 되고.”

중건은 여전히 결정하지 않은 채, 가만히 이정을 한 번 보고는 그대로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태도에 입술을 꽉 깨문 나연은 불만을 감춘 채 따라 들어갔다.

“중건아, 내 제안 별로였어?”

나연은 포기하지 않고 바짝 따라붙었다.

“아까도 봤잖아. 중건아, 저런 무뢰한 같은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면 하 비서도...”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검은 눈에 노골적인 불쾌감이 담겨 있는 중건의 눈빛을 보자 나연은 말이 턱 막혔다.

그저 중건의 시선만으로도 나연의 심장은 쿵하고 내려앉았다.

어쩔 수 없이 나머지 말들은 혼자 삭혀야만 했다.

겉으로는 아무 일 없는 얼굴이었지만 속은 뒤집혔다.

‘하 비서 이야기를 했다고 불쾌해하다니.’

그도 그럴 것이 중건에게 있어서 이정의 존재가 생각 이상으로 훨씬 클 줄은 몰랐다.

그래서 더더욱 이정을 남겨둘 수 없었다.

중건과 나연이 회사 안으로 들어간 뒤, 이정은 하정혁을 붙잡고 비상계단으로 끌고 갔다.

“빨리 돈 내놔.”

하정혁이 성급하게 재촉하자, 이정은 차가운 눈빛으로 남자의 손을 뿌리쳤다.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이정은 그 말을 하고는 송금했다.

“다시 회사에 와서 난동을 부리면 앞으로는 단 한 푼도 안 줄 거예요.”

“처음부터 내놓지 그랬어, 이 재수 없는 년아.”

하정혁은 욕을 내뱉으며 핸드폰을 꺼내 금액을 확인했다.

그러나 핸드폰의 숫자를 보자 얼굴이 또 똥을 씹은 것처럼 변했다.

“이게 다야? 지금 나를 거지 취급하는 거야?”

미친 듯이 쑤시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 이정의 목소리는 지쳐 있었다.

“엄마 수술비 방금 냈어요. 나도 이제 남은 게 많지 않으니까 아껴 써요.”

“퉤. 쓸모없는 년. 내가 널 왜 키웠는지 모르겠네. 다음 달 돈은 더 빨리 보내. 안 그러면 가만 안 둘 거니까.”

욕설을 퍼부은 하정혁은 그렇게 유유히 떠났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한 이정은 힘이 풀려서, 벽에 기댄 채 주저앉아 눈을 감았다.

하정혁은 욕심이 끝이 없는 인간이었다.

그러나 어머니 때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다행히도 지금 손에 쥔 이 프로젝트만 잘 마무리하면 적지 않은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면 어머니의 병원비는 해결될 것이고 하정혁도 잠시 막을 수 있었다.

이렇게 생각한 이정은 크게 숨을 내쉬면서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처럼 잘 정리한 뒤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유신 씨, 프로젝트 자료 정리한 프린트 저한테 넘겨주세요.”

이정이 비서 장유신에게 말했다.

“하 비서님, 이 프로젝트 책임자는 나연 씨로 바뀌어서 드릴 수 없을 것 같아요.”

유신이 망설이며 답했다.

“나연 씨로 바뀌었다고요? 누가 결정한 거요?”

이정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대표님 결정이세요.”

‘그렇게까지 빨리 길을 깔아주고 싶었나?’

로비에서 나연이 책임자 교체를 제안했을 때, 중건이 바로 수락하지 않았기에 이정은 최소한 일에서는 자신을 믿는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그건 혼자만의 착각이자 김칫국 드링킹이었다.

주먹을 꽉 쥔 이정은 화가 많이 났는지 가슴마저 크게 들썩였다.

“그래요.”

이정은 방향을 틀어 대표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간 이정이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대표님, 프로젝트 책임자 교체에 관해 설명을 해 주실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요?”

“회사 이익을 고려한 결정이에요.”

중건의 시선은 무미건조했다.

“하 비서, 아침 일로 회사 이미지에 큰 타격이 있었잖아요. 그러니 더 이상 이 프로젝트에 적합하지 않아요.”

이정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제가 직접 따낸 거예요. 대표님, 이건 그냥 이용하고 버리는 거랑 뭐가 다르죠?”

“하 비서, 왜 이렇게 흥분해요?”

대표실 안쪽 침실에서 나온 나연이 무척 억울한 듯한 얼굴로 이정을 바라봤다.

“제가 왜 이리 흥분해하는지 나연 씨가 더 잘 알고 계시잖아요.”

이정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애써 이 말을 내뱉었다.

“하 비서, 그걸 왜 저한테 화풀이하시죠?”

나연은 중건을 바라보며 말했다.

“중건 씨, 그럼 프로젝트를 다시 하 비서에게 돌려줄까? 난 오해받고 싶지 않거든.”

그러면서 덧붙였다.

“다만 아침 일을 협력사 쪽에서 알게 되면 협력을 거절할 수도 있어.”

그 말에 두 여자가 동시에 중건을 바라봤다.

한 사람은 연약했고 한 사람은 분노에 차 있었다.

서류에 서명한 중건이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 비서, 당신은 회사의 결정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는 게 아니라 실행만 하면 되는 사람이에요.”

아침 일은 이미 마무리가 되었기에 협력사에서 알 리가 없었다.

그러나 나연은 언제든 문제를 키울 수 있는 변수이기에, 중건은 그런 가능성을 남겨둘 수가 없었다.

그런 중건의 속내를 이정은 알지 못했다.

그저 지금 이정이 느끼는 건 온몸이 얼어붙는 감각뿐이었다.

정말 웃기지도 않았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 결정을 따졌지?’

나연의 앞에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를 깨닫게 되자,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없이 돌아선 이정은 비틀거리듯 자리를 떠났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대체 비서가 떠나자 재벌은 결혼 서류를 들고 울었다   제30화

    그러나 나연이 뻗은 손을 막으면서, 중건이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시간이 늦었으니 인제 그만 쉬어.”“중건아...”나연은 늘 중건의 기색을 살피는 데 능했다.평소 같았으면 이쯤에서 얌전히 물러나 방으로 올라갔을 것이다.하지만 식당에서 이정과 이신영에게 모욕을 당했고, 중건의 마음속에 아직도 이정이 남아 있다는 사실까지 겹치자 나연은 도저히 침착함을 유지할 수 없었다.나연은 중건의 손목을 붙잡았고 눈에는 순식간에 눈물이 맺혔다.“중건아, 내가 뭐 잘못했어? 왜 나를 이렇게 차갑게 대하는 거야?”약하고 서러운 목소리였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그 모습에 중건은 잠시 멈칫했다.방금 식당에 나연을 혼자 두고 온 일이 떠오르며, 마음 한쪽에 죄책감이 스쳤다.“미안해. 네 잘못은 아니야.”담담하고 감정이 실린 말은 아니지만, 나연은 그 말을 중건의 배려로 받아들였다.마음이 한결 놓인 것 같아 보였지만 표정은 오히려 더 애처로워졌다.“사과하지 않아도 돼. 중건아. 나는 괜찮으니까. 그냥 네가 편했으면 좋겠어.”나연이 손목을 붙잡자 중건은 다시 소파에 앉았다.약간의 피로감이 올라왔지만 티를 낼 수 없어 건성으로 답했다.“알았어.”“중건...”나연은 중건이 마음이 흔들렸다고 느꼈다.기회라고 판단한 순간 몸을 앞으로 기울여 남자의 품으로 파고들려고 했다.하지만 품에 안기기 직전에, 중건은 단호하게 나연을 막았다.“나연아, 늦었어.”중건은 이전보다 분명히 힘을 준 말투였으나 나연은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아랫입술을 꾹 깨문 뒤, 몸을 더 밀어 넣으며 입술을 그대로 중건의 입술 쪽으로 가져갔다.공식적으로 나연은 중건의 약혼녀였기에 공식 석상에서 중건은 충분한 체면과 자리를 보장해 줬다.하지만 나연은 중건이 자신과의 스킨십을 극도로 꺼린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필요한 경우 팔짱을 끼는 걸 제외하면, 중건은 거의 모든 스킨십을 피했다.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포옹조차 없었고 키스는 더

  • 대체 비서가 떠나자 재벌은 결혼 서류를 들고 울었다   제29화

    “장문혁 기사 불러서 데리러 오라고 해.”차갑게 그 한마디만 던진 뒤, 굳은 얼굴로 돌아선 중건은 성큼성큼 나가버렸다.그 자리에 남은 사람은 멍하니 서 있는 나연과 아직 떠나지 않은 이신영뿐이었다.이신영은 나연을 힐끗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나연 씨, 한마디 충고할게요. 앞으로는 본인을 제대로 챙겨주는 남자랑 데이트하는 게 좋아요. 이렇게 버려지는 기분은 꽤 별로잖아요.”그 말을 남긴 뒤, 오만한 웃음을 지은 이신영은 차에 올라 그대로 떠났다.혼자 남겨진 데다가 조롱까지 당하자 나연의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분을 참지 못한 채 발을 굴렀고 그저 손에 쥔 가방끈만 세게 움켜쥐었다.마치 그 가방이 이정이라도 된 것처럼 분풀이하는 모습이었다.요즘 중건은 겉보기엔 모든 게 정상처럼 보였기에, 나연은 이미 이정을 잊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지금 보니, 이정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중건에게 있어서 훨씬 중요한 존재였다.‘하이정, 이미 떠나 놓고도 아직까지 중건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다니. 뻔뻔한 년, 교활한 년 같으니라고.’나연은 속으로 이를 갈며 욕을 퍼부었다.한편 중건은 차를 몰아 자신 소유의 한 별장으로 돌아왔다.이 별장은 낮에는 가사도우미와 관리인이 드나들지만, 밤이 되면 사람 하나 없이 캄캄했다.중건은 불도 켜지 않은 채 소파에 앉았다.어둠 속에 앉아 있으니 자신의 감정이 얼마나 어긋나 있는지가 더 또렷하게 느껴졌다.한남더빌 펜트하우스는 원래는 이정이 살고 있던 곳이었다.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은 나연으로 바뀌어 있었다.그 사실을 알게 된 중건은 굳은 표정으로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이에 나연은 중건의 어머니가 열쇠를 주며 살라고 했다고 설명했다.그 일로 어머니의 체면을 깎고 싶지 않았던 중건이 더 묻지는 않았지만 그날 이후, 다시는 한남더빌 그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그때만 해도 이정은 아직 자신의 곁에 있었다.중건은 언젠가 이정을 이 별장으로 데려와 함께 살 생각이었지만, 그 무렵 일은 복잡하게 얽혀

  • 대체 비서가 떠나자 재벌은 결혼 서류를 들고 울었다   제28화

    이야기가 한창 무르익은 이정과 이신영의 테이블과 달리, 중건과 나연 쪽 분위기는 한층 더 가라앉아 있었다.괜히 먼저 찾아가 비꼬았지만 얻은 건 하나도 없었고 오히려 속만 잔뜩 상한 꼴이 되었다.나연은 체면이 말이 아니라고 느꼈다.속으로는 이정에게 계속 욕을 해댔지만, 얼굴에는 그런 기색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서문그룹을 떠난 뒤에 하 비서가 이렇게 변할 줄은 몰랐네.”나연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아쉬운 듯 말했다.하지만 그렇게 말을 해도 한참 동안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나연이 고개를 들고 보니, 중건의 시선은 온통 이정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향했다.그래서 자신의 말도 전혀 듣지 못한 모습이었다.“중건아, 중건아!”억지로 미소를 유지한 채 두 번이나 불러도 여전히 반응이 없자, 그제야 나연의 얼굴에 걸려 있던 웃음이 서서히 사라졌다.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중건 곁으로 다가간 나연은, 일부러 몸을 기울여 이정 쪽을 가로막았다.“중건아, 이것 좀 봐봐. 소매가 흐트러진 줄도 모르고.”나연은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부드러운 손길로 중건의 소매를 정리해 주었다.그 행동에 중건의 시선이 다시 나연에게로 돌아왔다.“중건아, 아까 무슨 생각 하고 있었던 거야? 내가 불러도 아무 반응도 없더니.”나연이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으나 중건은 더 말하고 싶지 않은 듯 대충 얼버무렸다.“아무것도 아니야.”조금 전 이정과 이신영이 웃으며 대화를 나누던 장면이 떠오르자, 중건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나는 신석현 씨를 만난 뒤 하 비서가 나쁜 습관을 고치고, 진지하게 한 사람만 만날 줄 알았어.”나연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그런데 보니까 내가 너무 좋게만 생각했나 봐. 역시 한 사람으로는 만족을 못 하는 성향인가 보지.”그 말로 중건의 분노를 더 자극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곧 중건의 눈길이 얼음처럼 차갑게 자신에게 향했다.“하이정이 그 남자를 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중건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물론 이유는

  • 대체 비서가 떠나자 재벌은 결혼 서류를 들고 울었다   제27화

    나연은 일부러 선의인 척 말했다.“이정 씨, 중건의 곁을 떠난 뒤 마음이 많이 힘든 건 알아요. 그래서 대체할 남자를 찾느라 자주 바뀌는 거겠죠.”“하지만 마음을 주지 않는 관계에서는 사랑이 생길 수 없어요.”“진심으로 이정 씨가 잘 지냈으면 좋겠어요. 더 이상 자신을 그렇게 함부로 대하지 않았으면 해요.”나긋나긋한 몇 마디 말로 이정을 몸을 함부로 굴리는 가벼운 여자로 만들어버렸다.그러자 이정의 시선이 차갑게 가라앉았다.“두 분 다 너무 자의식이 강한 것 같네요. 저랑 그렇게 친한 사이였나요?”중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나랑 안 친하면 누구랑 친하지?”이정은 담담하게 맞받았다.“제가 누구랑 친하든, 그건 대표님과는 상관없는 일 아닌가요?”이정은 입가를 천천히 닦으며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이 식당 음식은 꽤 괜찮은데요. 옆에서 파리처럼 윙윙거리는 소리가 나서 너무 역하네요.”이신영은 바로 뜻을 알아차리고 손을 들었다.“여기는 손님이 이렇게 방해를 받아도 그냥 두나요?”이신영과 중건 모두 이곳의 단골 VIP였다.직원은 누구 편도 들 수 없었지만, 상황상 중건이 다른 손님의 테이블 앞에 서 있는 게 문제임이 분명했다.그러자 직원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서 대표님, 주문하신 요리가 모두 준비되었는데. 자리로 안내해 드릴까요?”그 얘기는 곧 자리로 돌아가 달라는 뜻이었다.나연은 중건이 보지 못하는 각도에서 직원에게 날카롭게 눈을 흘기고는, 다시 이신영을 바라봤다.“제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이쪽은 세인컬쳐의 이신영 대표님이시죠?”이신영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대답을 대신했다.“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는데요.”나연이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대표님은 이정 씨를 잘 모르시는 것 같으세요.”“이정 씨는 예전에 저희 서문그룹에서 근무했어요. 다만 개인적인 문제로 정리된 거죠.”“대표님 안목이 좋으신 건 알겠지만, 서문그룹에서 쓰다 버린 사람을 데려가신 셈이죠.”이정이 입을 열려는 순간, 말릴 필요 없다고 손짓을

  • 대체 비서가 떠나자 재벌은 결혼 서류를 들고 울었다   제26화

    이정이 예상한 대로, 그 일이 있고 난 이후에 회사는 꽤 오랜 시간 조용했다.그 사이 이정도 협업 프로젝트들을 잇달아 완수하면서 뚜렷한 성과를 냈다.또다시 수많은 난관을 뚫고 무형문화유산 전시의 해외 협업까지 따내자, 이신영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처음 봤을 때부터 능력이 있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요.”이신영이 눈썹을 세우면서 말했다.“오늘 퇴근 후 시간 있어요? 공신 좀 대접하려고요. 마음껏 저를 탈탈 털어먹을 기회를 드릴게요.”이정은 가볍게 웃었다.“그럼 사양하지 않을게요.”저녁은 전망 좋은 회전 레스토랑으로 잡았다.격조 있는 공간에서 두 사람은 식사하며 자연스럽게 업무 이야기를 나눴고, 생각보다 대화는 잘 이어졌다.식사를 마치고 우아하게 수저를 내려놓은 이신영은 입가를 닦은 뒤 이정을 바라봤다.“이렇게 보는 이유가 있어요?”“요즘 들은 소문이 하나 있어요.”이신영이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이정 씨가 계속 주시하던 정양제약의 최신 신약이, 이미 3상 임상 시험 단계를 마쳤다고 하더군요.”이정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이신영이 말한 건 바로 어머니에게 필요한 그 약이었다.그리고 젓가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저를 조사하셨어요?”“맞아요.”이신영은 거리낌 없이 인정했다.“내가 직접 발탁한 핵심 인재인데 어느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이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사실 이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이신영은 철저한 사업가였고, 지금 자신에게 준 권한을 생각하면 신중해지는 게 당연했다.“이 이야기를 꺼내시는 건 저를 도와주실 생각인 건가요?”“참 솔직하네요.”이신영은 이정 앞에 음식을 놔주면서 말했다.“이정 씨 덕분에 회사가 얻은 게 얼마나 많은데요.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게 맞지 않겠어요?”이 말은 정확히 이정의 마음을 건드렸다.정양제약과의 협업 이후에도 꾸준히 연락을 이어갔고, 신약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물어봤지만 상대 측은 철저히 입을 닫고 있었다.그저 대체적인 것만 알고 있

  • 대체 비서가 떠나자 재벌은 결혼 서류를 들고 울었다   제25화

    그날 아침, 이정은 출근길부터 머리가 은근히 지끈거렸다.전날 밤 원영과 함께 협업 미팅을 다녀왔는데, 상대방들이 하나같이 술을 잘 마시는 사람들이었다.게다가 술 종류도 뒤섞여 있었다.아무리 이정이 술에 강하다고 해도 보드카에 와인, 맥주까지 몇 잔을 연달아 마시고 나니 거의 취한 상태였다.그래도 다행히 협업은 성사됐다.관자놀이를 눌러가며 자리로 향한 이정이 원영에게 커피를 부탁하려고 했는데, 원영이 먼저 문을 열고 들어왔다.“팀장님, 죄송해요. 그런데 큰일 났어요.”원영의 목소리는 다급했다.그와 동시에 사무실 바깥에서 날카로운 고함이 터져 나왔다.“부장이면 뒤에서 내 프로젝트를 가로채도 되는 거야? 염치도 없이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어?”이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D팀 팀장 이현유가 머리를 풀어 헤친 채 이정의 앞에 서 있었다.바닥에는 서류와 자료가 흩어져 있었고 현유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이정을 보자마자 현유는 먹잇감을 노리는 호랑이마냥 달려들었다.“나만 망하게 둘 생각 없어. 나를 이렇게 만든 사람도 가만 안 둘 거야.”달려드는 현유에 주변 사람들이 급히 붙잡았다.매니큐어를 칠한 긴 손톱이 이정의 얼굴에는 닿지 않았지만, 옆에 있던 남직원의 목을 스쳤고 곧 붉은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이정은 냉정하게 지시했다.“이 팀장님 잘 붙잡고 계세요. 다친 분은 치료받으러 가시고 나머지는 전부 자리로 돌아가시고요.”소란스러운 상황은 그제야 정리가 되었고 이정은 상황을 빠르게 파악했다.현유는 오랫동안 실적이 부진해 해고 대상에 오르내리던 인물이었다.최근 어렵게 큰 계약 하나를 따냈는데, 그 공이 이정에게 넘어갔다고 여기고 멘탈이 무너진 것이었다.문제의 계약은 전날 밤, 이정과 원영이 참석했던 바로 그 미팅이었다.이정은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이 일을 작게 수습할 수도 있었지만, 이렇게 공개적으로 난동이 벌어진 이상 명확한 설명이 필요했다.이정은 관자놀이를 누르며 전날 밤의 상황을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