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이정은 핵심 프로젝트팀에서 빠진 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변두리 자리로 내려갔다.

지루하고 따분한 일들을 한가득 처리하고 나서야 겨우 퇴근 시간이 됐다.

막 짐을 정리하던 순간 핸드폰이 날카롭게 울렸다. 석현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그러자 이정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아 곧바로 받았다.

“우리 엄마한테 무슨 일 생겼어?”

[어, 30분 전에 상태가 악화했는데, 방금 내가 일단은 안정은 시켰어. 시간 되면 병원으로 한번 와줘.]

“그래, 지금 바로 갈게.”

석현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급하게 오지 마. 여기엔 내가 있을 테니까 오는 길 조심해.]

전화를 끊자마자 이정은 택시를 잡아 병원으로 달렸다.

차 안에서 우연히 문자 한 통을 보았는데 문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카드 출금 잔액부족.]

‘이게 말이 돼?’

이정은 이상하다고 느꼈다.

얼마 전 분명 돈을 넣어둔 카드였는데, 출금이 되고 이렇게 빨리 잔액이 부족해질 리가 없었다.

의문을 안은 채 병원에 도착한 이정은 먼저 박수련을 보러 갔다.

“엄마, 어때요?”

긴장한 이정이 박수련의 상태를 살피자, 여자는 이정의 손을 잡고 달랬다.

“이정아, 걱정하지 마. 나 괜찮아.”

괜찮다고 말해도 창백한 안색이 이정의 가슴을 옥죄었다.

이에 석현도 옆에서 말했다.

“걱정하지 마. 당장은 위험하지 않으니까.”

이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8번 병상 환자 보호자분, 마침 오셨네요. 빨리 수납하세요. 안 그러면 어머님이 내일 쓸 약이 없어요.”

이정은 바로 그 부분이 의심스러웠다.

이에 박수련에게 몇 마디 말한 뒤 이정은 곧바로 병원내 은행 창구로 갔다.

“안녕하세요. 이 카드는 병원비 전용 카드인데 내역 좀 확인해 주세요. 며칠 전에 입금했는데 그새 없어졌더라고요. 혹시 어떤 문제가 있었던 건가요?”

이정이 카드 번호를 부르자, 키보드를 두드리던 직원이 이정을 힐끗 보고 말했다.

“고객님, 며칠 전에 입금하신 건 맞는데요. 바로 출금이 됐어요. 이건 병원과는 관련이 없어요.”

‘출금이 됐다고?’

이정은 미간을 찌푸렸다.

“누가 어떻게 출금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이에 직원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본인이 출금하신 게 아니라면 실물카드가 아니라는 가정하에서는 인터넷 뱅킹으로 출금하셨을 확률이 높죠.”

“그리고 최근에 어렴풋이 기억나는 분은 있어요. 남자였는데 행색이 좋지 않아 보였거든요. 치아도 누렇고 성격도 안 좋았어요.”

“그 분이 출금과 관련된 인터넷 뱅킹하는 방법을 물어보셨어요.”

언제 계좌와 비밀번호를 알아냈는지 모르지만, 이 짓거리를 할 사람은 하정혁 단 한 명뿐이었다.

‘그 인간이 엄마 치료비까지 손대다니!’

엄청난 분노에 휩싸인 이정은 결국 다시 돈을 내고 다시 병실로 돌아갔다.

석현은 이미 다른 일로 나갔고 병실에는 어머니만 남아 있었다.

박수련은 병상에 누운 채 멍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발소리가 들리자마자 기대에 찬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가, 이정인 걸 확인하자 미묘하게 실망하는 기색이 스쳤다.

“이정아, 너였구나. 나는 네가 가버린 줄 알았어.”

그 실망한 표정이 이정의 가슴을 후벼 팠다.

또한 박수련이 누구를 기다리는지 이정은 잘 알고 있었다.

“엄마, 기다리지 마요. 그 사람은 엄마 보러 안 올 거니까요.”

이에 박수련이 이정을 나무라듯 바라봤다.

“무슨 소리야. 네 아빠는 바빠서 그래. 시간 나면 올 거야.”

너무나도 순진한 말에 이정은 비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엄마, 인제 그만 상상해요. 엄마 치료비까지 빼서 도박하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한테 무슨 정이 남아 있겠어요?”

이정은 조심스럽게 설득했다.

“엄마, 이혼해요. 제발.”

그러나 박수련은 즉시 눈을 부라렸다.

“그 사람은 네 아빠야. 우리가 이렇게 오래 함께 살았는데, 어떻게 이혼을 그렇게 쉽게 말해?”

이정은 참아왔던 말이 터졌다.

“그 사람은 남편도 아빠도 아니에요. 그냥 짐승이에요.”

하정혁의 온갖 행동이 떠오르자, 이정은 감정이 흔들렸다.

곧 박수련의 눈가가 젖어들면서 이정의 손을 꼭 잡았다.

“이정아, 엄마는 평생 너랑 네 아빠만 보고 살았어. 이렇게 오래 살았는데 나더러 이혼하라니. 나는 그렇게는 못 하겠어.”

“그럼 나는 어쩌라고요? 엄마.”

이정은 눈물이 번진 눈으로 박수련을 바라봤다.

“그 사람이 돈 달라고 나를 괴롭히는 거 엄마도 다 알잖아요. 엄마는 나를 뭐로 생각해요?”

박수련은 아무 말이 없었다.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박수련을 바라보던 이정은 갑자기 모든 게 지쳤다. 너무 피곤했고, 너무 무력했다.

비틀거리면서 일어난 이정은 병상 옆에서 눈물을 훔쳤다.

그러고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병실을 나왔다.

다음 날, 이정이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무슨 일 있어요?”

이정은 자신을 힐끔거리던 직원을 붙잡고 묻자, 그 직원이 말했다.

“하 비서님, 아직 모르세요? 대표님이 방금 엄청 화내셨어요. 얼른 가보세요.”

이정은 대표실로 향했는데 문은 열려 있었다.

문 앞에 다다르자, 서류 한 장이 곧장 날아와 이정 발 앞에 거칠게 떨어졌다.

이정은 잠시 멈칫했다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갔다.

넓은 사무실 안에는 사람들이 둥그렇게 서 있었다.

모두 고개를 숙인 채 떨고 있었고, 공기는 폭풍전야처럼 무거웠다.

한쪽 소파에는 예전에 함께 일한 이의연이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는데,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책상 앞에 앉은 중건은 입술을 꽉 다문 채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이었다.

그 옆에서 나연이 연한 분홍색 옷차림으로 중건 곁에 서서, 허리를 숙여 조곤조곤 달래고 있었다.

나연이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하 비서, 이제야 왔네요. 프로젝트에 이렇게 큰 문제가 터졌는데도, 책임자는 태평하게 다니시다니 멘탈이 참 좋으세요.”

이정이 도발에 반응하지 않고 중건을 바라보자, 남자가 딱딱하게 말했다.

“설명해 보세요.”

이정은 책상 위에 남아 있던 서류 한 장을 집어 빠르게 훑어보자 상황이 무엇인지 바로 파악됐다.

바닥에 흩어진 서류들을 훑다가 그 중 한 장을 주워 눈앞에 들었다.

“이 프로젝트는 저는 이미 계속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했어요. 제 기억에는 나연 씨가 맡아서 계속 밀어붙인 거 아닌가요?”

그러자 나연은 무고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하 비서, 나를 모함하면 안 되시죠. 서류 마지막에 서명한 건 하 비서잖아요.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이정은 서류 맨 끝을 펼치자 거기에는 분명 이정의 서명과 도장이 있었다.

그러자 이정은 한 번 쓱 보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대표님, 이 서명은 위조예요.”

나연이 눈을 크게 떴다.

“책임을 회피하려고 그런 거짓말까지 해요?”

이정은 나연을 보지 않고 중건만 바라봤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서명은 위조할 수 있다고 쳐요. 그러면 도장은요?”

이정은 중건의 깊고 차가운 눈과 마주 보고 또렷하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CCTV 확인을 요청하죠, 대표님. 다들 알잖아요. 제 자리 옆 CCTV가 고장 났었어요.”

이정은 나연을 바라봤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며칠 전에 수리 기사가 와서 새 걸로 교체했죠.”

“CCTV 만 확인하면 누가 제 도장을 가져가서 조작했고, 회사에 손해를 입혔는지 바로 드러나요.”

이정은 나연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친 모습을 똑똑히 바라봤다.

곧 소파에 앉아 있던 이의연이 입을 열었다.

“대표님, 저는 오늘 해명을 들으러 온 거예요. CCTV 확인하는 거 기다릴 인내심 없어요.”

이정은 예의 바르고 부드러운 미소를 걸었다.

“이 대표님, 죄송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 안에 반드시 답을 드릴게요.”

그때,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지금 하 비서가 나를 대신해 말해요?”

이정의 몸이 굳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대표님.”

중건은 옆에 서 있는 나연을 한번 흘끗 봤다.

애써 억지로 버티는 그 표정 밑에 숨겨진 불안함과 초조함을 중건은 단번에 꿰뚫어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