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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Author: 주현군
중건은 이미 사건의 진상을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씨 집안과 이씨 집안의 결혼은 양가의 이해 관계가 걸린 중대 사안이었고, 맞은편에는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협업사의 이의연 대표가 앉아 있었다.

그랬기에 중건은 나연의 체면을 깎을 수 없었다.

“사과하세요.”

중건의 목소리가 들리자, 이정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이정은 잠시 멍한 얼굴로 중건을 바라봤고, 남자가 자신에게 사과하라고 말하고 있다는 걸 확인했다.

“대표님, 이 일에는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누군가 조작해서 저를 모함한 겁니다.”

“예전에 하 비서와 일할 때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기본적인 실수를 할 줄은 몰랐네요.”

쯧쯧 혀를 차면서, 이의연은 사과를 기다리는 눈빛으로 이정을 바라보았다.

중건 옆에 선 나연은 슬쩍 입꼬리를 올렸고, 눈에는 승리의 기색이 가득했다.

“대표님, 저는 진상을 밝히고 싶습니다.”

탁하는 소리와 함께 금속 펜이 책상 위로 떨어졌다.

곧이어 중건의 강한 압박이 담긴 목소리가 울렸다.

“사과하세요. 아니면 해고예요. 선택은 본인이 하세요.”

이미 말투에 인내심이 없어진 걸 보고 이정은 더 말해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았다.

이정은 잠시 침묵하다 고개를 숙이고 이를 악물었다.

“이 대표님, 죄송해요. 이 프로젝트로 인해 발생한 손해는 제가 최선을 다해 만회하겠습니다.”

그러나 이의연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말했다.

“그래도 나연 씨는 대처가 참 빠르더군요. 사고가 나자마자 수습에 나서서 다시 보게 됐어요.”

나연은 수줍게 고개를 숙였다.

“중건 씨 일이 곧 제 일이니 마땅히 제가 해야 할 일이죠.”

그 화목한 장면을 보며 이정의 마음은 더 차가워졌다.

중건이 진실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중건은 자신을 선택지에서 지워버렸다.

이미 무감각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심장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날카로운 통증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멍한 상태로 하루를 보내고 퇴근 시간이 됐다.

“하 비서, 오늘 저녁에 중건 씨랑 술자리가 있는데 제가 알코올 알레르기가 있어서요. 같이 가 주시죠?”

나연이 미소 지으며 이정을 막아섰는데, 속셈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이는 명백히 자기 대신에 술을 마시라는 말이었다.

“거절할게요. 다른 분을 찾으세요.”

이에 나연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근데 하 비서 말고는 다들 익숙하지 않아서 좀 불안하거든요.”

그때 뒤에서 다가온 중건이 사람 없는 구석으로 이정을 불렀다.

“하 비서, 오늘 술자리에 나연 씨랑 같이 가요.”

그 말에 이정은 냉소했다.

“대표님, 저는 대표님 비서지, 나연 씨 비서가 아니에요.”

“2천만 원, 가면 줄게요.”

이정은 중건이 나연을 위해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단순한 술자리 대타로 아무나 불러도 될 일을, 첫사랑 기분 좋게 하겠다고 2천만 원을 꺼내 들다니.’

이정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들어 중건의 눈을 마주봤다.

“3천만 원 주시면 갈게요.”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가 이정을 잠시 응시하더니 이내 답했다.

“좋아요.”

“그러면 거래 성사됐네요.”

이정이 선뜻 수락하자, 중건은 마음 한구석이 왠지 불편한지 비웃듯이 말했다.

“돈만 주면 뭐든지 하는 건가요?”

이정은 어깨를 으쓱했다.

“네, 상관없어요.”

“아주 좋네요.”

중건의 눈이 가늘어졌지만 더이상 말하지 않고 돌아섰다.

파티장은 잔이 부딪치는 소리로 가득했다.

중건은 절제된 고급스러운 검은 수트를 입고 조각처럼 빼어난 외모를 드러냈다.

그리고 나연은 은빛 드레스를 입고 값비싼 액세서리와 완벽한 메이크업으로 중건의 팔장을 끼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의 모습은 누가 봐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이정은 단정한 짙은 남색 원피스를 입고 둘의 뒤쪽에 서 있었는데, 어떻게 봐도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한 덤으로 보였다.

“하 비서, 이 대표님이 술을 권하시는데 대표님 위가 안 좋으니까 대신 마셔줘요.”

나연의 부드러운 말에 이정이 술잔에 가득 찬 보드카를 바라보자, 벌써부터 위장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그러나 말을 꺼내려는 순간, 중건의 무심한 시선이 느껴졌다.

“마시죠.”

보드카를 원샷하자 목에서부터 위까지 불길처럼 타올랐다.

그러나 숨을 고를 새도 없이 이번엔 레드와인을 내밀면서, 나연이 미소를 지었지만 눈에는 조롱이 가득했다.

“하 비서, 임선아 사모님도 술을 권하셨는데 대신 마셔줘요.”

장재훈 대표, 오주형 이사, 이연화 사모님까지 나연의 웃음 섞인 안내에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서 대표님 곁에는 정말 인재가 많네요.”

“하 비서, 술 참 잘 마시네요.”

칭찬은 칼날처럼 억지웃음을 짓고 있는 이정을 찔렀다.

얼마나 마셨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고 위스키, 와인, 보드카가 뒤섞여 위가 뒤틀렸다.

이정은 화장실의 세면대에 몸을 지탱한 채 헛구역질을 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고, 알코올이 위를 태우는 느낌에 숨 쉬는 것조차 화끈거렸다.

거울 속 얼굴은 창백했지만, 이정은 오래 머물지 못하고 정리한 뒤 다시 파티장으로 돌아갔다.

중건의 옆에 기대고 있던 나연이 이정을 보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는데, 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잠시 후, 나연이 귀에 손을 대며 외쳤다.

“귀걸이가 없어졌어. 네가 선물해 준 다이아 귀걸이가 사라졌어.”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주변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다.

곧 파티장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잃어버렸으면 다시 사 주면 되잖아.”

중건이 담담히 말하자 나연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중건 씨. 그건 재회 선물이라서 정말 중요해. 꼭 찾아야 해.”

사람들이 하나둘 의견을 내는데, 나연은 갑자기 무언가 떠올린 듯 이정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눈물 맺힌 얼굴로 말했다.

“아까 내 옆에 있었던 사람은 하 비서뿐이었잖아요. 혹시...”

말을 끝내지 않았지만 모두 그 말의 뜻을 이해했다. 곧 의심과 경계가 섞인 시선이 이정에게 쏠렸다.

“설마 서 대표님 비서가...”

“집안 사정이 어렵다더라고요. 어머니도 중환자라던데...”

수군거림이 비수가 되어 가슴에 박히자, 이정은 식은땀이 맺힌 채 테이블을 붙잡았다.

“나연 씨.”

목소리는 쉬었지만 분명했다.

“저는 귀걸이를 가져간 적 없어요.”

나연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가져갔다는 말은 아니에요. 아마 실수로 걸렸을 수도 있어서요.”

그러고는 중건을 향해 울먹였다.

“중건 씨, 그 귀걸이는 정말 중요해. 그래서 그런데 몸수색을 해보면 안 될까?”

‘몸수색이라.’

이정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들었다. 이는 결과와 상관없이 노골적인 모욕이었다.

수군거림은 더더욱 거세졌고 이정은 이를 악물고 중건을 바라봤다.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차갑고 무거운 얼굴이었다.

침묵은 이미 긍정의 의미인지라 이정의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무려 5년이었고 둘 사이에 최소한의 신뢰쯤은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러나 모든 건 오직 혼자만의 착각이었던 것이 확실해지면서, 이정은 마음이 완전히 식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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