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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깊었고, 속초의 바다는 검은 유리처럼 번들거렸다.
파도는 고요하지 않았으나, 이상하게도 잔잔했다.
마치 모든 소리를 삼켜버리겠다는 듯, 꾸준히 모래를 때리며 부서지고 있었다.
차수연은 바다 앞에 홀로 서 있었다.
병원을 나온 지 몇 시간이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하얀 가운을 벗어 던질 때까지만 해도,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무겁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소리만이 메아리쳤다.
삐~
심장 모니터가 뱉어낸 냉정한 평탄선.
“타임 오브 데스(Time of death)…” 동료의 굳은 목소리.
그 순간 수연의 가슴은 산산이 부서졌다.
“내가… 죽였어.”
목구멍 깊숙이 박혀 있던 고백이 파도에 섞여 사라졌다.
차트는 거짓말이었다. 수술 전 환자의 상태와 실제 상태는 달랐다.
협착 부위도, 수치도, 과거 이력도 하나도 맞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메스를 쥔 건 그녀였으니까.
천재라 불렸던 의사가, 단 한 번의 실패로 사람을 보냈다.
병원에서 쏟아지던 시선들이 떠올랐다.
동정과 경멸, 그리고 은근한 조롱.
‘역시 완벽한 사람은 없어.’
‘한 번의 실패로 끝이다.’
그 속삭임들이 귓가를 찢듯 울렸다.
수연은 천천히, 파도 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발목이 젖고, 종아리까지 파도가 차올랐다.
물은 차갑고 잔인했다.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지만,
오히려 그 차가움이 위안이었다. 더 깊이 들어가면,
이 고통도, 이 죄책감도, 이 기억도 사라질 것이다.
허리, 가슴, 어깨. 파도가 몸을 삼켜갔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바닷물이 입술에 닿았다. 시야가 흐려졌다.
“죄송합니다…”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그 순간..
“거기서 뭐 하는 겁니까!”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파도 소리를 뚫고 들려왔다.
그러나 수연의 귀에는 희미하게만 맺혔다.
그녀는 그대로 바다 속으로 몸을 던졌다.
찬 물이 온몸을 덮쳤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고, 팔은 허공을 긁듯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점점 힘이 빠졌다. 어둠은 깊고, 바다는 끝이 없었다.
손끝은 차갑고, 발은 바닥을 잃었다. 산소는 사라지고, 시야는 검게 깔렸다.
‘죽어도… 괜찮아.’
의식은 그렇게 사라지려 했다.
그러나, 거센 물살을 가르며 다가오는 또 다른 온기.
강한 팔이 허리를 감싸 안았다.
바닷속에서 그녀의 몸을 끌어올리는 힘.
누군가 거침없이 그녀를 품에 안았다.
“버텨요!”
남자의 목소리가 물속에서 뭉개져 들렸다.
수연의 몸은 무력하게 늘어졌다.
그녀의 머리칼이 물에 흩날리며 얼굴을 가렸다.
남자는 그녀의 팔을 어깨에 걸치고, 발로 바닷속을 힘껏 찼다.
심장이 갈라질 듯 쿵쾅거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겨우 수면 위로 올라왔을 때, 남자는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다.
눈은 감겨 있었고, 입술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안 돼…”
그는 입술을 닫고, 곧바로 인공호흡을 시도했다.
차가운 바닷물이 그녀의 입에서 쏟아졌다.
가슴 압박을 번갈아가며 반복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숨이 붙지 않았다.
“버텨!”
그는 다시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숨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가슴을 압박했다. 몇 차례 더 반복하자,
아주 약하게, 거의 미약하게, 그녀의 몸이 움찔했다.
그러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두면… 안 돼.”
바닷가에서 병원까지는 꽤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를 등에 업고,
젖은 몸으로 어둠 속을 달렸다. 모래가 다리에 달라붙고,
차가운 바람이 몸을 갈랐다.
그러나 등에 업힌 그녀의 무게는 결코 무겁지 않았다.
오히려 살아 있다는 증거 같았다.
“조금만 더… 버텨요.”
숨을 몰아쉬며 달렸다.
밤거리를 지나, 병원 불빛이 보였다.
응급실 자동문이 열리자, 간호사들이 놀란 얼굴로 달려왔다.
“환자! 익수입니다! 의식 없음!”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스트레처가 도착하고, 의료진이 달려들었다.
그녀의 젖은 몸이 들려 올려졌다.
심전도 모니터가 붙고, 산소 마스크가 씌워졌다.
의료진의 빠른 목소리가 교차했다.
“맥박 약해요!”
“기도 확보!”
“에피네프린 준비!”
그는 응급실 문 앞에서 멈춰섰다.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었다. 그저 유리창 너머로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후 3일 동안, 그녀는 깨어나지 않았다.
새하얀 병실, 커튼 너머로 비치는 아침 햇살.
그녀는 산소 줄에 의지한 채 조용히 누워 있었다.
그녀 곁에는 언제나 한 남자가 있었다.
바닷속에서 그녀를 끌어낸 그 남자. 강우혁.
그는 침대 곁에 앉아 묵묵히 그녀를 지켜보았다.
일도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았다.
왜인지 모르게, 이 여자를 두고 가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리고 3일째 되는 날.
수연의 눈꺼풀이 아주 느리게 떨렸다.
긴 잠에서 깨어나듯, 서서히 시야가 열렸다.
천장의 희미한 불빛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의식 돌아옵니다!”
간호사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 순간, 우혁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신이 드세요?”
그가 다급히 물었다.
수연은 흐린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목이 말라, 입술이 잘 열리지 않았다.
겨우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여기가… 어디죠?”
“병원이에요. 괜찮으세요?”
“…….”
그녀는 시선을 흔들며 주위를 살폈다.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머릿속이 텅 빈 듯했다.
“이름… 말씀해주실 수 있어요?”
간호사가 물었다.
수연은 입술을 열었다.
그러나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름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모르겠어요.”
병실 안 공기가 순간 멎었다.
우혁은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 저릿했다.
분명 몇 일 전, 바닷속에서 죽음과 맞닿아 있던 여자인데
지금은 마치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 같았다.
그는 조용히 그녀의 곁에 서서, 흔들리는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이제부터, 내가 지켜야 할 사람인가.”
그리고, 두 사람의 운명은 그렇게 다시 시작되었다.
흰 커튼이 병실을 조용히 가르고 있었다.
심전도 모니터가 미약한 리듬을 기록하고 있었고,
산소 줄이 숨결에 맞춰 오르내렸다.
세 번째 아침, 닫혀 있던 그녀의 눈이 열렸다.
차수연. 그러나 이제는 그 이름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죠…?”
낯선 천장을 바라본 채 그녀가 내뱉은 첫 마디였다.
간호사들이 안도와 놀람이 섞인 표정으로 달려왔다.
활력징후를 체크하는 손길이 분주했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붙은 모든 기계들이 마치 남의 것처럼 낯설었다.
“이름 말씀해주실 수 있어요?”
간호사가 조심스럽게 물었을 때, 그녀는 오래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생각이 안 나요… 아무것도요.”
순간,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문 앞에서 지켜보던 남자가 발걸음을 옮겼다.
젖은 구두로 달려와 그녀를 병원까지 업고 왔던 사람, 강우혁이었다.
그동안 그는 제대로 잠을 자지도 못한 얼굴이었다.
“괜찮으세요?”
낮은 목소리가 다가왔다. 그녀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이상하게 익숙한 따뜻함이 있었다.
“누구세요…?”
“그날 밤, 바다에서 당신을 끌어낸 사람입니다.”
그의 대답은 짧았지만 묵직했다.
수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기억은 텅 비어 있었고, 단지 가슴 한쪽에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움찔거렸다.
병원 회진이 끝난 뒤,
의사들은 그녀의 상태에 대해 조심스러운 결론을 내렸다.
“뇌 손상은 없습니다. 신체적으로도 큰 문제는 없어요.
다만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에서 스스로 기억을 차단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시적 기억 상실, 혹은 심리적 방어기제일 수 있습니다.”
그 설명을 들으며 수연은 고개를 숙였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있었다. 이름도, 집도, 직업도, 가족도.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었다.
그때, 우혁이 나섰다.
“그럼… 당분간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
의사는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환자가 안정을 찾는 게 우선입니다.
혼자 두기보다는 곁에서 지켜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 말에 병실 안의 시선이 잠시 우혁에게 향했다.
그는 조용히 숨을 고른 뒤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가 돌보겠습니다.”
수연은 놀란 눈길로 그를 바라봤다.
“저를요?”
“지금 상황에서 가장 안전한 방법입니다. 혼자 두는 건 위험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강압적이지 않았다.
그날 저녁, 두 사람은 병원을 나섰다.
차창 너머로 바닷바람이 스며들었고, 도로 위 가로등 불빛이
차례대로 흘러갔다. 수연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이름도, 아무것도 모르는데… 폐만 끼치는 거 아닌가요?”
우혁은 잠시 시선을 창밖으로 두었다가 대답했다.
“당신은 바다에서 혼자 죽어가던 사람이에요.
제가 본 건 그뿐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이렇게 살아 있잖아요. 그게 전부입니다.”
그의 말은 담담했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도착한 곳은 속초 시내의 한 오피스텔이었다.
바다와 가까워 창문을 열면 파도 소리가 스며드는 곳.
실내는 정갈했고, 군더더기 없는 가구들이 단정하게 놓여 있었다.
“여기가… 집이에요?”
“네. 당분간은 이곳에서 지내면 됩니다.”
그는 짐짓 무심하게 말하며 냉장고 문을 열어 생수를 꺼냈다.
그녀의 손에 건네며 덧붙였다.
“불편하면 말씀하세요. 최대한 맞춰드리겠습니다.”
수연은 컵을 잡으며 손끝이 떨렸다.
낯선 곳, 낯선 사람. 그러나 바닷속에서 자신을 끌어안던
그 팔의 힘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 누구보다 따뜻했다.
“고마워요.”
짧은 말 한마디가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우혁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오랫동안 밤을 새운 탓인지 눈가에 피곤이 묻어 있었지만, 그 눈빛은 단단했다.
“…당신이 살아난 게, 다행입니다.”
그 말에 수연은 고개를 숙였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가슴 깊은 곳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날 밤, 낯선 공간에서의 첫날밤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응급호출음이 한 번 울리고 끊겼다. 뒤이어 더 급한 톤으로 두 번, 세 번. 인공심박기 알람과 겹쳐 소리가 엇박자로 복도를 찢었다.“소아응급! 다발성 외상, 흉부 타격 의심! 집도의 호출!”전달음은 짧고 선명했다. 수연의 얼굴에서 망설임이 사라졌다. 그녀는 흰 코트를 의자 위에 던져두고 복도를 내달렸다.소아응급실은 이미 작은 소란으로 들끓고 있었다. 초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들것 위에서 희미하게 몸을 떨었고, 보호자는 입술을 깨물며 울음을 참고 있었다. 청진기의 차가운 금속이 피부 위에 닿자 아이의 숨은 더 얕아졌다.“산소 마스크, 사이즈 작은 거. 포화도 떨어지는 중이에요. 흉부 X-ray 곧장, 혈액 가스 채혈 들어갑니다.”간호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자리잡는 사이, 수연은 손끝으로 늑골 라인을 따라 압통을 확인했다. 손상 부위가 좁지 않았다. 깊은 호흡을 요구하자 아이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기흉 가능성 높습니다. 흉관 삽입 준비.”“마취는” 레지던트가 묻자 수연이 고개를 저었다.“국소로 충분합니다. 시간 없어요. 흉부 전벽, 삼각지점 잡고… 여긴 제가.”손이 들어가고, 금속이 살을 벌렸다. 짧은 신음 뒤로 공기가 빠져나가는 소리가 ‘스스’하고 새어 나왔다. 모니터 파형이 조금씩 안정되며 포화도가 회복선을 그리기 시작했다.“좋아요. 더 깊이 가지 마세요. 흉관 고정.”보호자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차올랐지만, 수연은 차분함을 놓지 않았다.“지금부터는 시간이 도와줄 겁니다. 저는 옆방 환자 확인하고 곧 돌아올게요.”그녀가 장갑을 벗는 순간, 의무기록실 쪽 복도에서 언성이 높아졌다. 전산팀장이 압수수색을 진행하는 이들과 설전을 벌이는가 싶더니, 카메라를 든 누군가가 뒤섞여 들어왔다. 불청객이었다. 재킷 깃에 달린 보도기관 배지가 번쩍였다.“촬영은 불가합니다.” 수연이 외투 소매로 입구를 막아섰다. “환자와 보호자의 동의 없이 카메라를 들이미는 건 인권침해에
해가 완전히 기울자 도시 위로 불빛들이 하나둘 켜졌다. 유리창 너머로 번지는 네온사인은 무심하게 반짝였지만, 오피스텔 안의 공기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수연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손등 위로 떨어진 조명이 희미하게 그림자를 드리웠고, 그 시선은 한참 동안 창밖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었다.우혁은 맞은편에 앉아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오랜 침묵 끝에 그는 입술을 열었다.“교수님.” 평소와 다름없는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묘하게 굵직한 떨림이 배어 있었다. “아니… 수연 씨. 이제는 당신에게 꼭 말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그의 눈빛은 결심으로 단단히 굳어 있었고, 수연의 심장은 순간적으로 빨라졌다. 밤마다 스쳐 지나가는 기억의 파편들, 준호가 남긴 증언의 조각들, 그리고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확신이 지금 눈앞의 그를 가리키고 있었다.“그날, 다섯 해 전….” 우혁이 말을 이으려던 순간, 날카로운 진동음이 방 안 공기를 가르며 울렸다. 휴대전화였다. 병원 비상 호출이었다.수연은 본능적으로 전화를 집어 들었다.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다급했다.“교수님, 응급실입니다! 대량 출혈 환자가 들어왔습니다. 교통사고로 심폐정지 상태, 당장 수술이 필요합니다!”순간 방 안의 공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우혁의 고백은 한순간에 멈춰 섰고, 수연의 눈빛은 단호하게 바뀌었다. 그녀는 이미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준비해 주세요. 곧 내려가겠습니다.”응급실은 전쟁터였다. 피로 얼룩진 스트레처 위에 실린 환자는 의식을 잃은 채 축 늘어져 있었고, 의료진의 손길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심장 압박을 이어가는 레지던트의 이마에는 땀이 맺혀 흘러내렸다.“흉부 손상 심각합니다! 맥박 잡히지 않습니다!”“혈압 측정 불가!”그 순간, 수연이 들어섰다. 흰 가운 자락이 휘날리며 수술 준비 구역으로 곧장 들어갔다. 그녀의 눈빛은 차갑게 빛났고, 손끝은 떨림 하나 없이 움직였다.흉부 절개 준비하세요. 대동맥 손상 의심됩니
아침 햇살은 병원 유리창을 스치며 희미하게 복도를 채웠다. 밤새 이어진 응급 상황의 긴장감은 아직 가시지 않았고, 환자실 앞에 서 있는 의료진의 표정은 무겁기만 했다. 차수연은 새벽부터 한 걸음도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지만, 단 한순간도 집중을 놓지 않았다.병실 문이 열리자 안에서 나오는 간호사가 작게 말했다.“교수님, 환자가 다시 의식을 회복했습니다. 짧게 대화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수연의 발걸음은 무겁게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기계음이 일정한 리듬을 그리며 울리고 있었고, 하얀 시트 위의 박준호는 마치 오랜 꿈에서 깨어난 듯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의 시선이 수연을 붙잡았다.“교수님….” 갈라진 목소리였지만 분명한 인식이 담겨 있었다.수연은 의자에 앉으며 낮게 응답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아직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준호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목소리에 힘을 조금 실었다.“저… 말해야겠습니다. 오래 묻어둔 이야기라… 더 늦으면 안 될 것 같아서요.”수연은 숨을 죽였다. 그가 전하려는 말이 지난밤 중단되었던 그 진실과 이어져 있다는 걸 직감했기 때문이다.“그날… 제 심장은 이미 멎어가고 있었습니다. 다른 의사들은 모두 포기했죠. 하지만 교수님만은 끝까지 손을 떼지 않았습니다. 저는 희미한 의식 속에서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뜨겁고 단호한 손길을.”수연은 가슴이 저릿해졌다. 그러나 준호의 다음 말은 그녀의 눈빛을 더욱 흔들어놓았다.“그리고… 제 옆에서 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눈물이 가득 고인 목소리로 제발 살려 달라… 애원하던 사람이. 그 사람의 절박함이… 제 심장을 붙잡아준 힘이었을지도 모릅니다.”수연의 손끝이 떨렸다. 기억 속 파편과 준호의 말이점점 맞춰지며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갔다. 어젯밤 그녀가 거의 확신에 이르렀던 바로 그 목소리.“그 사람… 누구였나요?” 수연은 조심스럽게 물었다.준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대답을 이어가려 했지만,갑자기 문이
밤은 도시 위로 천천히 내려앉았지만, 병원 복도는 결코 잠들지 않았다. 창백한 형광등 불빛 아래, 환자의 신음과 기계음이 뒤섞여 이어졌고, 긴급 호출을 알리는 경보음은 때때로 공기를 갈라냈다. 긴 하루가 저물었음에도 차수연의 어깨에는 피로 대신 긴장이 감돌았다. 그녀는 회복실 앞에서 한참 동안 서성이며 박준호의 상태를 지켜보고 있었다.문틈 사이로 비친 그의 얼굴은 아직 창백했지만, 의식은 조금씩 또렷해지고 있었다. 그 순간을 기다리던 듯 수연의 가슴은 알 수 없는 두려움과 기대감으로 조여왔다. 다섯 해 전의 조각난 기억과 오늘의 장면이 겹쳐져, 마치 시간이 원을 그리듯 다시 돌아온 기분이었다.문이 열리자, 간호사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님, 환자가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수연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침대 곁에 섰다. 준호의 눈동자가 느릿하게 열리더니, 그녀를 향해 멈췄다.“…교수님….” 그의 목소리는 약했지만, 분명했다. “다시… 또 살려주셨군요.”수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말, 바로 다섯 해 전에도 똑같이 들었던 말이었다. 그녀는 손끝이 떨리는 걸 애써 숨기며 차분히 답했다.“당신이 다시 숨을 쉴 수 있게 된 건… 제 손이 아니라, 당신의 몸이 끝까지 버텨준 덕분이에요. 너무 오래 말하지 말고 쉬세요.”그러나 준호는 고개를 미약하게 저었다.“그날…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다들 포기했는데… 교수님만… 제 심장을 붙잡고 있었죠. 옆에서… 울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제발… 살려 달라며…”수연의 눈빛이 흔들렸다. 기억 속 파편과 그의 증언이 겹쳐졌다. 그날 심장을 움켜쥐던 자신의 손, 그리고 옆에서 들리던 간절한 목소리.“누구였나요?” 수연은 낮게 물었다.준호는 입술을 떨며 힘겹게 대답했다.“…그 사람이….”말이 끝나기 전에 갑자기 모니터 경보음이 울렸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요동치기 시작했고, 간호사들이 급히 몰려왔다.“혈압 급강하! 산소 공급 유지하세요!”수연은 곧장
수연은 떨리는 숨을 내쉬며 창밖을 바라봤다.“이제 확신해요. 제가 그날 살려낸 환자가 준호 씨라면, 왜 제 기억은 그렇게 지워져 있었을까요. 그리고… 그 기억 속에서 들렸던 또 다른 목소리는 대체 누구였을까요.”잠시 정적이 흘렀다. 우혁은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 눈빛 속에 깊은 고뇌가 스쳐갔다. 마치 무언가 알고 있지만, 지금은 말할 수 없다는 듯한 기묘한 침묵이었다.수연은 그의 눈빛에서 미묘한 떨림을 읽었다. 그러나 그 순간, 간호사가 다급히 달려와 회복실 상황을 보고했다.“교수님, 환자가 의식을 되찾으려 합니다.”수연은 급히 들어갔다. 준호는 산소마스크를 쓴 채 천천히 눈을 떴다. 흐릿한 시선이 그녀를 비추는 순간, 입술이 미세하게 움직였다.“…교수님… 다시… 살려주셨군요.”그 말에 수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분명, 다섯 해 전에도 그가 같은 말을 했었다.회복실 밖으로 나온 수연은 숨을 고르며 우혁을 향해 중얼거렸다.“기억이… 점점 또렷해져요. 하지만, 이상해요. 분명 그날, 준호 씨의 곁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제가 손을 놓지 못하도록 붙잡던….”말을 멈춘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우혁은 그대로 서 있었지만, 손끝이 미세하게 움찔거렸다.멀리서 창밖으로 보이는 어둠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민도혁의 그림자는 더욱 서늘해지고 있었다.“차수연, 기억을 되찾는 게 두렵지 않나? 그게 결국 널 무너뜨릴 열쇠가 될지도 모르지.”도혁의 낮은 중얼거림은 어둠 속에 묻혔지만, 그의 눈빛은 확실히 결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회복실 안은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울 만큼 고요했다. 환자의 심박 모니터가 규칙적인 파형을 그리며 작은 비프음을 냈고, 그 소리가 마치 생명이 붙어 있다는 유일한 증거처럼 울려 퍼졌다.박준호는 여전히 창백했지만, 희미하게 눈을 떴다. 산소마스크 너머로 그의 시선이 수연을 붙잡았다.“…교수님….”그 목소리는 마치 다섯 해 전의 그날
법정 안은 시작부터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공기 자체가 무겁게 내려앉아 숨쉬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판사가 입장하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고, 다시 앉자마자 검사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본 법정은 새로운 증거를 제출합니다. 당시 수술실 내 CCTV 전체 기록입니다. 여기에는 피고인 차수연이 차트를 확인하고, 환자 상태를 인지한 뒤에도 무리하게 수술을 강행한 장면이 명확히 담겨 있습니다.”스크린에 영상이 재생됐다. 화면 속 수연은 차트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간호사와 짧게 대화를 나눈 뒤, 곧바로 수술에 들어가는 모습이었다. 겉보기엔 확실히 무리한 강행처럼 보였다. 방청석 곳곳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검사는 목소리를 높였다.“피고인은 이미 환자가 수술을 견딜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모한 선택을 했고, 결과적으로 환자는 사망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명백한 과실 아닙니까?”시선이 모두 수연에게 몰렸다. 그녀는 숨을 고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영상은 단편적인 모습만 보여줄 뿐입니다. 당시 환자의 심장은 언제 멎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약했습니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습니다. 그 자리에 서 있던 의사라면 누구라도 수술을 선택했을 겁니다.”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주변의 시선은 냉담했다.검사는 비웃듯 말을 이어갔다.“책임을 피하려는 궤변일 뿐입니다. 의사라면 환자의 생존 가능성을 고려했어야 합니다. 차수연 교수, 당신의 오만이 한 생명을 앗아간 겁니다.”법정 안은 술렁였고, 판사가 망치를 두드리며 정숙을 명했다. 하지만 수연의 마음속은 거칠게 요동쳤다. 억울함과 분노, 그리고 끝내 지켜내지 못한 환자에 대한 죄책감이 동시에 밀려왔다.그때, 변호인 측에서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재판장님, 제출된 영상은 분명히 조작 가능성이 있습니다. 원본 파일의 메타데이터 분석을 요청합니다.”판사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좋습니다. 원본 분석을 위해 자료를 확보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