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오피스텔 문이 닫히자 적막이 방 안을 채웠다.
바다 소리가 창 너머로 아득히 스며들었고,
천장 조명은 은은하게 두 사람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
수연은 현관에 서서 주위를 천천히 둘러봤다.
낯선 가구, 깔끔하게 정리된 책장, 벽에 걸린 시계.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전혀 기억에 없는 풍경이었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익숙하지 않은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세제와 커피, 그리고 희미한 종이 냄새.
“편하게 앉으세요.”
우혁이 신발을 벗으며 말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거실로 걸어 들어갔지만,
수연은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이곳이 안전한지, 자신이 정말 머물러도 되는지, 확신이 없었다.
그의 시선이 그녀에게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거실로 향했다.
“오늘은 많이 힘들었을 겁니다. 씻고 쉬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그의 말투는 차분했으나 지나치게 무심하지도 않았다.
그녀를 배려하려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욕실에서 나온 뒤, 수연은 거실 한쪽에 앉아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고 있었다.
흰 티셔츠와 회색 추리닝 바지를 건네받아 입은 그녀의 모습은,
어쩐지 아이처럼 순수해 보였다.
우혁은 부엌에서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고 있었다.
“배고프지 않아요? 제대로 식사 못 했을 텐데.”
그녀는 망설이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조금요.”
그가 건네준 컵라면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수연은 젓가락을 들어 조심스럽게 면을 집어 올렸다.
첫 입을 삼키자, 뜨거운 국물이 혀를 데우며 내려갔다.
오래 비어 있던 위장이 따뜻해졌다.
그녀는 그제야 눈을 감고 작은 숨을 내쉬었다.
“맛있어요?”
우혁의 질문에 그녀는 놀란 듯 눈을 뜨고는, 수줍게 웃었다.
“네… 생각보다요.”
짧은 웃음이 흘러나왔지만, 그 웃음은 방 안의 공기를 달라지게 했다.
식사를 마친 뒤, 우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회사 업무 메일을 확인하는 듯했지만,
시선은 자주 그녀 쪽으로 흘러갔다.
책상 앞에 앉아 작은 손거울을 바라보던 그녀는 곧 거울을 내려놓았다.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은 낯설었다.
누구인지 모를 여자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이목구비는 분명 자기 것이었지만,
그 속에 담긴 모든 이야기는 사라져 있었다.
“혹시…”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우혁이 고개를 들었다.
“저… 예전에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그는 대답을 서두르지 않았다. 눈빛이 깊어졌다.
“솔직히,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말을 고르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 아닐까요?”
그녀는 시선을 떨구었다. ‘살아 있다’는 말이 왜 이렇게 무겁게 다가오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말이 가슴에 닿는 순간, 눈가가 뜨겁게 젖었다.
밤이 깊어졌다. 우혁은 작은 방 하나를 정리해 그녀에게 내주었다.
침대 시트와 이불을 새로 갈아주며 말했다.
“불편하더라도 당분간은 여기서 지내요. 안전이 제일 중요하니까.”
그녀는 문 앞에 서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으신 건가요? 낯선 사람인데.”
“낯설더라도, 지금은 곁에 누군가 있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대답은 단순했지만, 설득력이 있었다.
방 안에 들어와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을 때,
그녀는 비로소 하루 종일 억눌러 왔던 긴장이 풀려나는 걸 느꼈다.
머릿속은 여전히 공허했지만, 옆방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상한 안심이 찾아왔다.
거실에서 혼자 남은 우혁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책상 위에 놓인 그의 웨어러블 기기가 미약하게 불빛을 깜빡였다.
가슴 속은 여전히 불안정했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덜 무거웠다.
창밖 바다는 밤새도록 파도를 몰아쳤다.
그러나 이 작은 오피스텔 안에서는, 누군가를 지켜내야 한다는
새로운 의지가 조용히 불을 지피고 있었다.
햇살이 커튼 틈새로 비집고 들어왔다.
하얀 빛이 천천히 방 안을 물들이며, 침대 위에서 잠든
여자의 얼굴에 닿았다. 수연은 이마를 찌푸리며
몸을 조금 웅크렸다. 머릿속은 여전히 텅 빈 공간 같았지만,
꿈속에서는 알 수 없는 손길이 느껴졌다.
차갑고도 뜨거운, 심장을 두드리던 감각.
조용히 눈을 뜨자 낯선 천장이 보였다.
잠시 숨을 고르며 주위를 살폈다.
이곳은 어제 처음 발을 들인 공간이었다.
아직 익숙하지 않아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곁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만큼은 알 수 있었다.
살며시 문을 열자, 거실에서는 커피 향이 은은히 퍼지고 있었다.
부엌 쪽에서 컵을 들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넓은 어깨와 차분한 움직임. 그 모습은 그녀의 불안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일어나셨군요.”
우혁이 돌아보며 말을 건넸다.
그의 얼굴에는 긴 밤을 새운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담담했다.
“잠은 좀 잤습니까?”
수연은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덕분에요.”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속에는 감사와 안도가 섞여 있었다.
식탁 위에는 간단한 아침이 준비되어 있었다.
빵, 달걀프라이, 따뜻한 우유.
그녀는 수줍은 듯 젓가락을 들고 한입 삼켰다.
음식이 목을 타고 내려가는 순간, 공허했던 속이 조금 채워지는 듯했다.
“맛은 괜찮습니까?”
그의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오랜만에 따뜻한 음식을 먹는 기분이에요.”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놀라 입술을 다물었다.
언제 마지막으로 음식을 먹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나 몸은 분명 오래 굶주린 것처럼 반응했다.
우혁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당분간은 몸부터 회복하는 게 중요합니다. 기억은… 천천히 돌아오겠죠.”
수연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어제 병원에서 들었던 의사의 말이 떠올랐다.
스스로 기억을 닫아버렸다는 추측.
그렇다면 자신이 무엇을 외면하고 있는 걸까.
아침을 마치고, 그는 회사에 들러야 한다며 차림을 정리했다.
회색 정장 재킷을 걸치고 노트북 가방을 들어 올리자,
집 안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녀는 순간 불안이 밀려와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혹시… 오래 비우시는 건가요?”
그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그녀가 스스로 놀란 듯 손을 놓았다.
“죄송해요. 그냥… 혼자 있으면 좀 무서울 것 같아서.”
우혁은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미묘한 흔들림이 있었다.
결국 그는 가방을 내려놓았다.
“오늘은 집에서 일 보겠습니다. 혼자 두는 게 아직은 위험하니까요.”
수연의 눈에 미약한 안도감이 번졌다.
작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 웃음을 본 순간,
그의 가슴 어딘가가 알 수 없이 저릿해졌다.
오전 내내, 그는 노트북 앞에 앉아 메일을 확인하고 회의 전화를 이어갔다.
그녀는 거실 소파에 앉아 창밖 바다를 바라보았다.
파도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낯선 공간이었지만, 바다의 리듬은 이상하게도 마음을 안정시켰다.
그녀는 무심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가늘고 긴 손가락, 관절에 남은 작은 흔적들.
왠지 모르게, 이 손은 단순히 누군가의 손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무엇을 했던 손인지 떠올릴 수는 없었다.
그때, 부엌에서 컵을 씻던 우혁의 손등이 눈에 들어왔다.
힘줄이 도드라진 단단한 손.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미묘하게 시선을 피했지만, 그녀는 이상하게 눈을 뗄 수 없었다.
점심 무렵, 그는 함께 식사하자며
근처 시장에서 사 온 반찬을 꺼냈다.
그녀는 서툴게 젓가락을 움직이며 물었다.
“대표님… 맞으시죠?”
“네, 스타트업을 운영합니다.”
“어떤 일을 하시는 건가요?”
우혁은 잠시 머뭇거리다 간단히 설명했다.
“건강 데이터를 다루는 일을 합니다.
사람들의 몸을 기록하고, 지키는 일이라고 할 수 있죠.”
그 말에 그녀는 가슴이 순간적으로 뛰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몸을 지킨다’는 단어가 묘하게 가슴을 울렸다.
“멋지네요.”
그녀가 낮게 말했다.
그는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이 살아 있어야… 제 일이 의미가 있습니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 울림은 컸다.
그녀의 볼이 서서히 붉어졌다.
밤이 다시 찾아왔다. 작은 방에 혼자 누워 눈을 감으려 했지만,
쉽게 잠들지 않았다. 온몸이 긴장으로 굳어 있었고,
머릿속은 공허하게 비어 있었다.
그때, 거실에서 들려오는 가벼운 타이핑 소리.
일정한 리듬이 묘하게 자장가처럼 들렸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고마워요.”
그 말은 문밖으로 닿지 않았지만,
어쩐지 거실에 앉아 있는 그 남자에게
전달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새벽의 공기는 차가웠지만, 병원 복도 끝에서 스며드는 햇살은 따뜻했다.윤지아는 창가에 기대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하얀 김이 그녀의 입술 사이로 피어오르며 공기 속으로 녹아들었다.병원은 늘 같은 풍경이었다.기계음, 발자국, 환자의 숨소리.그 모든 익숙한 소리들 속에서도,그녀는 매일 조금씩 다른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오늘은 라벤더 정원이 문을 연 지 정확히 15년째 되는 날이었다.그녀는 그 숫자가 믿기지 않았다.처음 이 정원이 생겼을 때만 해도,그저 ;의미 있는 시도' 정도로 여겨졌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은 세계 각국의 의사와 연구자들이 이곳을 찾아왔다.병원의 한 구석에 불과했던 정원이 이제는 생명과 회복의 상징이 되었다.“원장님, 이쪽으로 오세요.”젊은 간호사가 그녀를 불렀다.정원 앞에는 새로 심은 라벤더 묘목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그녀가 다가서자 아이들이 줄을 서서 그녀를 바라봤다.병원에서 회복 중인 아이들, 작은 손에 흙이 묻은 채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이 꽃 이름 아는 사람?”지아가 물었다.아이들 중 한 명이 손을 번쩍 들었다.“라벤더요! 향기 나는 꽃이에요!”“맞아요.”지아는 무릎을 굽혀 아이의 눈높이에 맞췄다.“그런데 이 꽃은 향기만 좋은 게 아니라, 사람 마음도 편하게 만들어줘요.누군가가 그걸 믿고 처음 심었거든요.”“누가요?”또 다른 아이가 물었다.지아는 잠시 미소 지었다.“두 사람이요. 서로를 아끼고, 환자를 사랑했던 사람들.”그녀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정원의 한켠으로 향했다.라벤더 사이에 작은 표석이 있었다.“우리가 함께 있었던 모든 시간은 결국 한 사람의 삶을 지탱하는 향기로 남았다.”-강우혁 & 차수연그 문장을 볼 때마다,지아는 마치 시간의 문을 살짝 열어보는 기분이 들었다.정오가 가까워지자 기자들과 병원 관계자들이 정원에 모였다.오늘은 라벤더 프로젝트의 새로운 확장 계획이 발표되는 날이었다.지아는 연단에 섰다.그녀의 뒤로, 정원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유리창
윤지아는 새벽부터 잠을 이루지 못했다.창문을 열면 라벤더 향이 바람을 타고 들어왔다.익숙한 향이었지만, 그날은 유난히 진하게 느껴졌다.마치 누군가가 다가와 속삭이는 것처럼 오늘은 꼭 와야 한다고, 기다리고 있다고.병원 기념관 한켠에는 라벤더 프로젝트의 기록 전시가 준비되고 있었다.10년 동안 이어온 시간,그 안에 담긴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그리고 그 모든 시작이 되었던 두 사람.강우혁과 차수연.지아는 조심스레 전시 패널을 정리하고 있었다.손끝에 닿는 오래된 사진,붉은 원으로 표시된 수술 메모,환자들의 감사 편지. 그 속엔 숫자보다도 더 많은 온기가 담겨 있었다.“원장님, 이거… 여기로 옮길까요?”보조 스태프의 목소리에 지아는 고개를 들었다.그가 가리킨 건 유리 프레임 속의 한 장의 사진이었다.라벤더 정원 한가운데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웃는 두 사람의 모습.“그래요. 제일 앞에 두세요.”지아의 목소리가 잠시 떨렸다.“그 사진이… 이 모든 이야기를 시작하게 했으니까요.”행사는 오후 세 시에 시작됐다.대강당 안은 따뜻한 조명으로 가득했다.무대 뒤편의 대형 스크린엔‘라벤더 프로젝트 10주년, 그리고 그 이후’라는 문장이 걸려 있었다.지아는 연단에 올랐다.그녀의 시선은 객석 한가운데,한 칸 비워둔 두 좌석에 잠시 머물렀다.라벤더 모양의 리본이 조용히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오늘 우리는, 두 사람의 이름을 다시 부르기 위해 모였습니다.”지아의 목소리가 울렸다.“그들은 의사였지만, 무엇보다 한 사람의 삶을 끝까지 붙잡은 ‘사람’이었습니다.그리고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그 향기를 다시 느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영상이 재생됐다. 기록실에서의 인터뷰, 수술실의 긴장된 공기,정원 벤치에서 서로에게 건네던 미소. 사람들은 숨죽여 그 장면을 바라봤다.어떤 이는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닦았다.지아는 화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자신도 모르게 손끝이 떨렸지만, 그 떨림은 슬픔이 아니라, 감사였다.행사가 끝
병원 옥상 정원은 또 한 번의 계절을 맞았다.라벤더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햇살은 그 위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윤지아는 난간에 기대어 바람에 스치는 잎사귀 소리를 한참 동안 들었다.지난겨울, 병원은 큰 변화를 겪었다.새로운 인공심장 연구팀이 꾸려졌고,라벤더 프로젝트는 국내를 넘어 해외 병원들과 협력 연구로 확대되었다.언제나 그랬듯 지아는 바쁘게 움직였지만, 이상하게도 올해의 봄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그건 아마도… 병원 한켠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한 사람 때문일 것이다.“원장님, 차트 서명 완료하셨나요?”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문 틈 사이로 고개를 내민 사람은 신입 펠로우, 이현우였다.한때 라벤더 정원의 토양을 바꾸겠다고 나서던 청년.이제는 스스로 수술대에 서는 법을 배워가고 있었다.“네, 들어와요.”지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현우는 파일을 들고 다가와 조심스레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어제 심장외과 팀에서 회의했는데요.라벤더 프로젝트의 신규 케이스 중 한 분이 해외에서 수술 받은 적이 있다고 합니다.그 병원… 이름이 좀 낯익더라고요.”지아가 고개를 들었다.“어디요?”“서울제중심장센터요. 기록을 보니까… 주치의가 강우혁 교수로 되어 있더라고요.”순간, 공기가 멈췄다.그 이름이 입 안에서 맴도는 동안,시간이 미세하게 뒤로 흘러가는 느낌이었다.“…그래요.”지아는 눈을 깜빡였다.“그럼, 환자분 기록을 다시 검토해요.혹시 그때 남은 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네, 원장님.”현우가 고개를 숙이고 나가자, 지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멀리서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살짝 스치는 빗줄기가 유리창에 부딪히며 투명한 선을 그렸다.그녀는 이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다시 당신 이름을 듣게 될 줄은 몰랐어요.”며칠 뒤, 지아는 그 환자를 직접 보기로 했다.중년의 남자, 심근 절개 부위의 섬유화가 예상보다 심했고,과거 수술로 이식된 판막 근처엔 작은 혈전이 보였다.그녀는
오전 회진을 마치고도 병동의 공기는 좀처럼 가벼워지지 않았다. 수술 대기 중인 소아 환자의 어머니는 팔짱을 낀 채 창밖만 바라보고, 새로 입원한 중년 남성은 심전도 패치가 꺼질까 봐 손을 가슴에 대고 가만 서 있었다. 윤지아는 노트를 닫아 포켓에 넣고, 차트를 끌어안은 채 숨을 길게 내쉬었다. 라벤더 정원이 병원의 한복판에 만들어진 뒤로, 향기는 분명 사람들의 어깨를 조금은 내려앉게 했지만 두려움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의사는 향기보다 더 정확한 무언가를 내밀어야 한다.“윤 원장님.” 의무기록팀장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아카이브 정리하다가, 이걸 발견했습니다.”얇은 외장하드 하나가 그녀의 손에 건네졌다. 라벨에는 낡은 볼펜 글씨로 두 단어가 쓰여 있었다. 보고. 기록. 뒷면 구석엔 작은 이니셜-K.W.H.와 C.S.Y.지아는 잠깐 손끝에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강우혁과 차수연이 공동 서명을 올린 병원 자료는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순간, 둘은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도 각자 자리에서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함께 만든 흔적을 만지는 일은 늘 조심스러웠다. 가느다란 유리잔을 들어 올릴 때처럼.“보안실에서 열람하세요. 영상 파일이라… 용량이 큽니다.” 팀장이 덧붙였다.보안실은 오후 빛이 닿지 않는 복도 끝에 있었다. 문을 닫으니 바깥 소음이 일시에 꺼졌다. 지아는 모니터를 켜고 외장하드를 연결했다. ‘라벤더_프로젝트_프리브리핑’, ‘응급OP_리뷰_내시경캡쳐’, 그리고 마지막에 ‘Two_Seats_Final.mp4’. 두 개의 의자. 정원의 중심에 놓인 그것들. 파일 이름만으로도 목구멍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재생 버튼을 눌렀다.잡음 섞인 프레임이 잠시 흔들린 뒤, 화면이 또렷해졌다. 기록실의 오래된 조명 아래, 회색 니트와 흰 셔츠의 남자, 그리고 옅은 미소의 여자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카메라가 초점을 잡는 동안, 두 사람의 손이 테이블 아래에서 스치듯 닿았다 떨어지는 게 보였다. 그
햇살이 병원 건물의 유리벽에 부딪혀 반사될 때, 윤지아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오늘은 ‘라벤더 정원’ 개관식이 열리는 날이었다.몇 년의 시간 끝에 완성된 그 공간은 단순한 식물원이나 추모공간이 아니었다.그건 ‘두 사람의 약속’이 물리적인 형태로 세상에 남은, 살아 있는 증거였다.정원 입구에는 아직 봉인된 현판이 하얀 천으로 덮여 있었다.그녀의 시야에 환한 보라빛이 스며들 듯 번졌다.바람에 흩날리는 향기가 익숙했다.라벤더. 언제나 그들이 남긴 이야기를 불러오는 향기.기념식 준비를 마친 스태프들이 분주히 움직였고,언론의 카메라가 세워지며 조명이 켜졌다.지아는 여전히 조용히 서 있었다.그녀의 손에는 오래된 펜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차수연이 썼던 펜.잉크는 거의 말라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늘 품고 다녔다.그 펜은 기억의 무게 를 지닌 물건이었다.“윤 원장님, 잠시 후 10분 남았습니다.”보좌관의 목소리가 들렸지만,지아는 잠시 하늘을 바라봤다.푸른 하늘 위로 얇은 구름이 떠 있었고, 그 틈으로 부드러운 빛이 쏟아졌다.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교수님, 대표님… 오늘은 당신들의 약속이 완성되는 날이에요.”정원은 병원 한가운데 자리했다.유리 온실의 형태를 띠고 있었지만,어디서도 볼 수 없는 따뜻한 구조였다.라벤더 화단은 빙 둘러 동그랗게 배치되어 있었고,중앙에는 작은 의자 두 개가 나란히 놓였다.그 의자는 그들 의 자리였다.의도적으로 이름표는 붙이지 않았다.누구의 자리라 규정하기보단,함께 있었던 사람들의 상징이 되길 바랐기 때문이다.식이 시작되자 병원 관계자들과 언론, 환자 가족들,그리고 오랜 동료들이 자리를 채웠다.지아는 단상 앞에 서서 마이크를 잡았다.“라벤더 정원은, 단순히 한 병원의 상징이 아닙니다.이곳은 누군가를 위해 싸우고, 버티고,그리고 사랑했던 모든 사람의 흔적을 품은 공간입니다.”그녀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하지만 손끝은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지아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가을비가 그친 병원 정원에는 낙엽이 절반쯤 물들어 있었다.윤지아는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며칠째 이어지는 회의와 연구 일정 때문에 몸은 지쳤지만, 머릿속은 이상하게 또렷했다.그녀는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되뇌었다.끝난 이야기도, 누군가의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진행 중일 수 있다.라벤더 프로젝트의 자료를 정리하던 중이었다.기록실 한쪽 서랍, ‘Private’이라 손글씨로 적힌 파일박스를 옮기다 무언가 작은 노트 하나가 떨어졌다.가죽 표지, 모서리의 미세한 균열, 그리고 볼펜으로 눌러 쓴 이름.차수연.그녀는 본능적으로 손끝이 떨렸다.표지를 열자, 안쪽에 잔잔하게 번진 잉크 자국이 있었다.‘201X년 3월, 봄비가 처음 내리던 날부터.’그 문장 하나로 이미 마음 한가운데 무언가가 부서지는 듯했다.지아는 조용히 의자에 앉아 페이지를 넘겼다.그 안에는 의료 기록이 아닌, 한 사람의 온전한 감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오늘은 이상하게 그 사람의 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익숙하게 들리던 구두의 리듬이 사라지고 나니 복도는 너무 길다.그가 떠난 게 아니라, 내 하루에서 사라진 것 같다.”“누군가를 잃는다는 건, 그 사람과의 대화뿐 아니라내 안의 목소리 하나가 사라지는 일이구나.”지아는 손끝으로 글자 자국을 천천히 따라갔다.잉크가 눌린 자리에 손톱이 걸렸다.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그 필압에서 느껴지는 건 고통보다도 다짐에 가까웠다.다음 페이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나는 여전히 그가 심장 수술 때 쓰던 펜을 사용한다.그 펜은 잉크가 조금씩 새고 있지만, 그 새는 흔적이 마치 그 사람의 목소리 같다.조용히, 하지만 확실하게 내 옆을 스친다.”그녀는 숨을 고르며 다음 장을 넘겼다.종이 한쪽이 반쯤 찢어져 있었고, 거기엔 짧은 문장이 남아 있었다.“나는 아직도 그를 ‘대표님’이라 부를까,아니면, 그가 마지막에 바랐던 대로 우혁 씨라고 불러야 할까.”지아는 속으로 답했다.둘 다 맞아요. 그건 존경과 사랑이 동시에 남아
밤이 내려앉은 병원 본관 앞에는 수십 명의 기자들이 몰려 있었다.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거리고, “차수연은 어디 있습니까?”라는 질문이 연신 날아들었다. 그 중심에 민도혁이 서 있었다. 완벽하게 맞춘 수트 차림, 눈썹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얼굴. 그는 마치 자신이 정의의 대변자인 듯 미소를 지었다.“차수연 교수는 불과 몇 달 전, 환자를 수술 도중 사망에 이르게 했습니다. 오늘 봉사 현장에서 잠시 보여준 행동은 그 죄를 덮기 위한 쇼에 불과합니다. 병원은 의료사고를 저지른 자를 두 번 다시 수술실에 세울 수 없습니다.
밤이 깊었지만 오피스텔의 불빛은 꺼지지 않았다.우혁은 노트북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긴장된 공기가 방 안에 감돌았다. 그의 눈가엔 피로가 드리워져 있었지만, 손끝은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다.“여기… 드디어 연결이 잡혔습니다.”그는 마우스를 움직이며 접속 로그를 확대했다. 수연이 다가와 숨을 죽였다. 화면에는 외부 계정이 남긴 접속 경로가 표시되어 있었다.“병원 본관 서버실, 특정 시각. 그리고 이 접속은 관리자 권한을 가진 계정으로만 가능했습니다. 더구나, 이 계정이 사용된 기기의 고유 번호가 남아
늦은 밤, 병원 기록실. 형광등이 희미하게 깜빡이고, 서류 더미 위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수연은 여전히 오래된 차트를 손끝으로 더듬고 있었다. 페이지마다 스며든 잉크 냄새가 낯설면서도 어쩐지 익숙했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장면들은 분명히 현실의 파편인데, 이름을 붙이려 하면 흩어져 버렸다.숨이 가빠지고 가슴이 조여왔다. 그녀는 메스를 들고 필사적으로 움직이던 자신의 손을 떠올렸다. 심장이 멎어가는 환자, 절망 속에서도 끝내 맥박을 되살리던 순간. 그때 들려왔던 비명 같은 심전도 소리와 환자의 가슴이 다시 뛰던 울
밤은 깊었지만, 수연은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오피스텔 창문 너머로 흩뿌려진 불빛들이 검은 하늘 위에서 은근한 떨림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 하루 종일 이어진 기자들의 질문, 민도혁의 날 선 공격,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혁이 남긴 한 마디가 계속 귓가를 맴돌았다.“어쩌면… 그때 저를 살린 사람이 교수님일지도 모릅니다.”그 말이 진실일 리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가슴은 심하게 요동쳤다. 기억 속 흐릿한 얼굴이 분명 누군가의 생존을 의미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