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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낯선 집, 낯선 온기

Auteur: 데이지
last update Dernière mise à jour: 2026-03-04 20:31:51

오피스텔 문이 닫히자 적막이 방 안을 채웠다. 

바다 소리가 창 너머로 아득히 스며들었고, 

천장 조명은 은은하게 두 사람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

수연은 현관에 서서 주위를 천천히 둘러봤다. 

낯선 가구, 깔끔하게 정리된 책장, 벽에 걸린 시계.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전혀 기억에 없는 풍경이었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익숙하지 않은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세제와 커피, 그리고 희미한 종이 냄새.

“편하게 앉으세요.”

우혁이 신발을 벗으며 말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거실로 걸어 들어갔지만, 

수연은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이곳이 안전한지, 자신이 정말 머물러도 되는지, 확신이 없었다.

그의 시선이 그녀에게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거실로 향했다. 

“오늘은 많이 힘들었을 겁니다.  씻고 쉬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그의 말투는 차분했으나 지나치게 무심하지도 않았다. 

그녀를 배려하려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욕실에서 나온 뒤, 수연은 거실 한쪽에 앉아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고 있었다. 

흰 티셔츠와 회색 추리닝 바지를 건네받아 입은 그녀의 모습은, 

어쩐지 아이처럼 순수해 보였다.

우혁은 부엌에서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고 있었다. 

“배고프지 않아요? 제대로 식사 못 했을 텐데.”

그녀는 망설이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조금요.”

그가 건네준 컵라면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수연은 젓가락을 들어 조심스럽게 면을 집어 올렸다. 

첫 입을 삼키자, 뜨거운 국물이 혀를 데우며 내려갔다. 

오래 비어 있던 위장이 따뜻해졌다. 

그녀는 그제야 눈을 감고 작은 숨을 내쉬었다.

“맛있어요?”

우혁의 질문에 그녀는 놀란 듯 눈을 뜨고는, 수줍게 웃었다. 

“네… 생각보다요.”

짧은 웃음이 흘러나왔지만,  그 웃음은 방 안의 공기를 달라지게 했다.

식사를 마친 뒤, 우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회사 업무 메일을 확인하는 듯했지만, 

시선은 자주 그녀 쪽으로 흘러갔다. 

책상 앞에 앉아 작은 손거울을 바라보던 그녀는  곧 거울을 내려놓았다.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은 낯설었다. 

누구인지 모를 여자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이목구비는 분명 자기 것이었지만, 

그 속에 담긴 모든 이야기는 사라져 있었다.

“혹시…”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우혁이 고개를 들었다.

“저… 예전에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그는 대답을 서두르지 않았다. 눈빛이 깊어졌다.

“솔직히,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말을 고르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 아닐까요?”

그녀는 시선을 떨구었다. ‘살아 있다’는 말이  왜 이렇게 무겁게 다가오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말이 가슴에 닿는 순간, 눈가가 뜨겁게 젖었다.

밤이 깊어졌다. 우혁은 작은 방 하나를 정리해 그녀에게 내주었다. 

침대 시트와 이불을 새로 갈아주며 말했다.

“불편하더라도 당분간은 여기서 지내요.  안전이 제일 중요하니까.”

그녀는 문 앞에 서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으신 건가요? 낯선 사람인데.”

“낯설더라도, 지금은 곁에 누군가 있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대답은 단순했지만, 설득력이 있었다.

방 안에 들어와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을 때, 

그녀는 비로소 하루 종일 억눌러 왔던 긴장이 풀려나는 걸 느꼈다. 

머릿속은 여전히 공허했지만, 옆방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상한 안심이 찾아왔다.

거실에서 혼자 남은 우혁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책상 위에 놓인 그의 웨어러블 기기가 미약하게 불빛을 깜빡였다. 

가슴 속은 여전히 불안정했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덜 무거웠다.

창밖 바다는 밤새도록 파도를 몰아쳤다. 

그러나 이 작은 오피스텔 안에서는, 누군가를 지켜내야 한다는 

새로운 의지가 조용히 불을 지피고 있었다.

햇살이 커튼 틈새로 비집고 들어왔다. 

하얀 빛이 천천히 방 안을 물들이며, 침대 위에서 잠든 

여자의 얼굴에 닿았다. 수연은 이마를 찌푸리며 

몸을 조금 웅크렸다. 머릿속은 여전히 텅 빈 공간 같았지만, 

꿈속에서는 알 수 없는 손길이 느껴졌다. 

차갑고도 뜨거운, 심장을 두드리던 감각.

조용히 눈을 뜨자 낯선 천장이 보였다. 

잠시 숨을 고르며 주위를 살폈다. 

이곳은 어제 처음 발을 들인 공간이었다. 

아직 익숙하지 않아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곁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만큼은 알 수 있었다.

살며시 문을 열자, 거실에서는 커피 향이 은은히 퍼지고 있었다. 

부엌 쪽에서 컵을 들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넓은 어깨와 차분한 움직임. 그 모습은 그녀의 불안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일어나셨군요.”

우혁이 돌아보며 말을 건넸다.

 그의 얼굴에는 긴 밤을 새운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담담했다.

“잠은 좀 잤습니까?”

수연은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덕분에요.”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속에는 감사와 안도가 섞여 있었다.

식탁 위에는 간단한 아침이 준비되어 있었다. 

빵, 달걀프라이, 따뜻한 우유.

그녀는 수줍은 듯  젓가락을 들고 한입 삼켰다. 

음식이 목을 타고 내려가는 순간,  공허했던 속이 조금 채워지는 듯했다.

“맛은 괜찮습니까?”

그의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오랜만에 따뜻한 음식을 먹는 기분이에요.”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놀라 입술을 다물었다. 

언제 마지막으로 음식을 먹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나 몸은 분명 오래 굶주린 것처럼 반응했다.

우혁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당분간은 몸부터 회복하는 게 중요합니다.  기억은… 천천히 돌아오겠죠.”

수연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어제 병원에서 들었던 의사의 말이 떠올랐다. 

스스로 기억을 닫아버렸다는 추측. 

그렇다면 자신이 무엇을 외면하고 있는 걸까.

아침을 마치고, 그는 회사에 들러야 한다며 차림을 정리했다. 

회색 정장 재킷을 걸치고 노트북 가방을 들어 올리자, 

집 안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녀는 순간 불안이  밀려와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혹시… 오래 비우시는 건가요?”

그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그녀가 스스로 놀란 듯 손을 놓았다.

“죄송해요. 그냥… 혼자 있으면 좀 무서울 것 같아서.”

우혁은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미묘한 흔들림이 있었다. 

결국 그는 가방을 내려놓았다.

“오늘은 집에서 일 보겠습니다.  혼자 두는 게 아직은 위험하니까요.”

수연의 눈에 미약한 안도감이 번졌다. 

작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 웃음을 본 순간, 

그의 가슴 어딘가가 알 수 없이 저릿해졌다.

오전 내내, 그는 노트북 앞에 앉아 메일을 확인하고  회의 전화를 이어갔다.

그녀는 거실 소파에 앉아  창밖 바다를 바라보았다.

파도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낯선 공간이었지만, 바다의 리듬은 이상하게도 마음을 안정시켰다.

그녀는 무심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가늘고 긴 손가락, 관절에 남은 작은 흔적들. 

왠지 모르게, 이 손은 단순히 누군가의 손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무엇을 했던 손인지 떠올릴 수는 없었다.

그때, 부엌에서 컵을 씻던 우혁의 손등이 눈에 들어왔다. 

힘줄이 도드라진 단단한 손.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미묘하게 시선을 피했지만, 그녀는 이상하게 눈을 뗄 수 없었다.

점심 무렵, 그는 함께 식사하자며 

근처 시장에서 사 온 반찬을 꺼냈다. 

그녀는 서툴게 젓가락을 움직이며 물었다.

“대표님… 맞으시죠?”

“네, 스타트업을 운영합니다.”

“어떤 일을 하시는 건가요?”

우혁은 잠시 머뭇거리다 간단히 설명했다.

“건강 데이터를 다루는 일을 합니다. 

사람들의 몸을 기록하고, 지키는 일이라고 할 수 있죠.”

그 말에 그녀는 가슴이 순간적으로 뛰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몸을 지킨다’는  단어가 묘하게 가슴을 울렸다.

“멋지네요.”

그녀가 낮게 말했다.

그는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이 살아 있어야…  제 일이 의미가 있습니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 울림은 컸다. 

그녀의 볼이 서서히 붉어졌다.

밤이 다시 찾아왔다. 작은 방에 혼자 누워 눈을 감으려 했지만, 

쉽게 잠들지 않았다. 온몸이 긴장으로 굳어 있었고,

 머릿속은 공허하게 비어 있었다.

그때, 거실에서 들려오는 가벼운 타이핑 소리. 

일정한 리듬이 묘하게 자장가처럼 들렸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고마워요.”

그 말은 문밖으로 닿지 않았지만, 

어쩐지 거실에 앉아 있는 그 남자에게 

전달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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