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아니에요.”신시아는 깔끔하게 부인했지만 심장은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너무 빨리 뛰고 있었다.정우진이 물끄러미 신시아를 응시했다.“아는 사이야?”서른 살 전후인 박도영은 흰 피부에 가느다란 눈매, 가르마까지 있는 머리는 정말 스타일리시하기 그지없었다.마르고 약해 보이는 체형 때문에 정우진 옆에 서면 더욱 가냘파 보였다.목소리 또한 맑고 듣기 좋았으며 부드럽고 세심한 유형으로 꽤 친근감이 있었다.신시아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대표님, 지원이 출산 후 6개월 검진 예약을 하러 왔어요. 그분의 담당 의사가 퇴직하셔서 박도영 선생님께 예약을 잡으라고 하더라고요.”김지원도 신시아와 같은 산부인과 의사가 담당했기에 함께 박도영에게 인수인계되었다.박도영이 정우진과 신시아를 번갈아 보자 정우진이 간결하게 박도영에게 신시아의 신분을 설명했다.“내 부하직원이야.”“그렇구나.”박도영이 바로 대답했다.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정우진은 그제야 신시아에게서 시선을 옮겼다.“먼저 갈게.”이 말은 박도영에게 한 것인지 신시아에게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다만 정우진이 가겠다는 말에 신시아는 재빨리 옆으로 비켰다.“안녕히 가세요.”고개를 숙인 채 시선은 남자의 곧고 긴 두 다리만 바라봤다.정우진이 멀어진 후에야 시선을 거두고 박도영을 바라보았다.“박 선생님, 정 대표님이랑 아는 사이예요?”고개를 끄덕였던 박도영은 이내 다시 저었다.“아니요. 그냥 공통으로 아는 사람이 있는 정도예요.”신시아는 잠시 생각하다가 김지원의 서류를 박도영에게 건넸다.“선생님, 이건 제 친구의 진료 기록이에요. 받아주세요.”서류를 받아 든 박도영은 신시아의 손에 또 한 부가 있는 것을 보았다.“이건...”“한 부 더 출력했어요.”신시아가 웃으며 말했다.“기록 이관 부탁드립니다. 저는 볼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진료 기록을 가방에 넣고 박도영에게 깍듯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한 뒤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하지만 병원
간호사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주임 의사 선생님이 해외에서 오신 분이라 워낙 유명하셔서 많은 분들이 검진을 오세요. 기록을 일찍 이관하시면 선생님이 우선적으로 진료를 봐주셔서 다음 산부인과 검진 때 예약이 안 되는 문제도 피하실 수 있어요.”경원 병원은 국내에서 으뜸가는 병원이라, 의사마다 예약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신시아가 처음 산부인과를 찾았을 때도 암표상을 통해 예약했다. 나중에 산부인과 검진 기록을 등록하고 내부적으로 예약을 할 수 있게 된 후에야 조금 수월해졌다.“그럼 기록 이관 예약을 잡아주세요. 이관할 때 미리 알려주시고요.”“내일 시간 괜찮으시면 내일 오시면 돼요. 내일 오전에 선생님이 이관 처리를 위해 특별히 시간을 내셨어요.”내일은 수요일이라 오전에는 회의가 없었다. 구창 그룹과의 프로젝트도 정상 궤도에 있어 휴가를 낼 수 있었다.신시아는 내일 가겠다고 말한 뒤 정우진에게 휴가 신청을 내기 위해 퇴근 전에 꼭대기 층 사무실을 찾았다.사무실 문을 두드리자 남자의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어와.”문을 밀고 들어간 신시아는 정우진이 창가에서 전화 통화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흰색 와이셔츠 소매를 팔뚝까지 걷어 올리고 한 손은 주머니에 넣은 상태였다. 파란 핏줄이 팔뚝 위에 또렷하게 드러났다.뒤돌아보며 신시아에게 기다리라는 듯 손짓하자 신시아는 사무실 중앙에 서서 조용히 기다렸다.“돌아왔으니 한 번은 봐야지. 내일 저녁에 내가 자리를 만들어서 환영 파티를 해주마.”“그럼 오전에 너한테 한 번 들를게, 그리고 저녁에 다시 보자.”정우진은 책상 앞으로 돌아와 컴퓨터에 있는 일정표를 확인했다.내일 오전에는 회의 일정이 없어, 자리를 비울 수 있었다.전화를 끊고 신시아를 바라보며 물었다.“무슨 일이야?”“대표님, 내일 오전에 개인 일이 있어서 반차를 내고 싶습니다.”말을 마친 신시아는 정우진의 눈빛이 꽤나 차가워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정우진은 그녀가 장건우를 만나러 가는 건지 묻고 싶었다.하지만 입술만
신시아는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팠다.‘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어떤 메시지에도 답변하지 않고 일단 출근부터 했다.지하 주차장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1층에 도착했을 때 엘리베이터가 멈추며 많은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왔다.“신 비서님, 안녕하세요! 신 비서님, 축하드려요!”“신 비서님, 남자친구 정말 잘생겼네요.”“정말 잘 어울려요! 해외 유학파라면서요?”엘리베이터 안에서 사람들이 신시아에게 축하 인사를 쏟아냈다.신시아는 살짝 웃어 보일 뿐,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았다.가방을 17층에 두고 꼭대기 층 비서실로 올라가 오혜린에게 지난밤 일을 설명했다.“제가 유라 씨에게 제대로 말씀드리지 않아서 이렇게 큰 오해가 생긴 거예요. 저야 상관은 없지만 실장님이 오해하지는 마셨으면 해요. 건우한테도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지 말아 주세요.”그 말을 들은 오혜린은 한참을 멍해 있더니 신시아의 말이 다 끝나고 난 후에야 상황을 파악했다.“신 비서가 정 대표님 곁에 있는 게 아직도 불안해서 은유라 씨가 일부러 그런 거지?”“그렇게 이해하셔도 돼요.”신시아는 워낙 똑똑한 오혜린이 제대로 말하면 바로 알아챌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오혜린은 다소 실망한 듯했다.“정말로 사귀는 줄 알았는데... 에휴, 물론 억지로 할 건 아니지. 다행히 건우한테는 묻지 않았어, 또 괜히 기대하게 할 뻔했잖아.”오혜린의 입을 통해서만 장건우의 귀에 들어가지 않으면 되었다. 그러면 장건우는 누가 말하든 그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오혜린과 오해를 푼 신시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회사 단톡방에 올라온 이야기에 대해서는 별도의 해명을 하지 않기로 했다.프런트의 젊은 직원은 출근해서야 지난밤 뉴스를 보게 되었다.그래서 장건우가 자주 신시아에게 국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폭로했다.원래 조용했던 단톡방은 다시 들썩이기 시작했다.오전 10시, 신시아는 정우진을 따라 회의에 참석했다.정우진 곁에서 회의록을 작성하고 있는데 진동으로 맞춰놓은 휴대폰이 끊임없이 울
정우진의 시선은 곧바로 장건우에게 향했지만 바로 모른 척했다.“그래? 잘 모르는데.”말을 마치고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회사 전체에 소문이 자자하던데 오빠는 아직도 몰라?”은유라가 빠른 걸음으로 정우진 뒤에 따라붙었다.하지만 그녀가 어떻게 말하든, 정우진은 짧은 대답만 내놓을 뿐이었다.‘모른다’, ‘잘 모르겠다’, ‘그래?’ 등등...몇 분 후, 두 사람이 차에 오르자 신시아는 바로 시동을 걸었다. 차량은 이내 어둠을 가르며 앞으로 내달렸다.조용한 차 안, 정우진의 몸에 밴 담배 냄새와 술 냄새가 섞여 차 안에 점차 퍼져 나갔다.차 창문 옆에 앉은 정우진은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야경만 물끄러미 바라봤다.“시아 씨.”은유라가 먼저 침묵을 깨며 신시아를 부르자 신시아가 백미러를 통해 그녀를 바라보았다.“유라 씨, 무슨 일 있나요?”“미크로 사람이랑 사귄다면서요? 그 얘기 진짜예요?”은유라는 정우진의 표정을 흘끗흘끗 살폈다.신시아 또한 은유라가 갑자기 이토록 사적인 질문을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몰래 정우진의 표정을 살피는 모습을 보고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아직 그런 단계는 아니에요.”애매모호한 대답이었지만 은유라의 귀에는 부인하려는 뜻으로 들렸다.“시아 씨 말은 아직 공개할 단계가 아니라는 뜻인가요?”신호등이 있는 교차로에서 신시아가 브레이크를 밟았다.시간이 일분일초 흘렀다. 파란불로 바뀌기 직전, 신시아가 콧소리로 짧게 대답했다.“음...”원하는 대답을 얻은 은유라는 만족스럽게 웃었다.“아까 그 사람 봤는데 꽤 잘생겼더라고요.”정우진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지만 차 안에는 숨 막힐 듯한 압박감이 퍼져 나갔다.은유라는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하지만 신시아는 어쩐지 시간이 갈수록 호흡조차 힘겨웠다.그래서 은유라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그래요?”“네.”말을 마친 은유라는 정우진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물론 우리 오빠만큼 잘생기진 않았지만.”신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하긴, 정 대표님과 비교할
“지금은 근무 시간이에요.”정우진의 맑으면서도 차가운 시선에는 술기운이 잠긴 듯한 아른거림이 섞여 있었다.신시아는 침착하게 설명했다.“은유라 씨가 따라오지 말라고 하셨어요. 게다가 나중에 정 대표님과 은유라 씨를 차로 모셔다드려야 해요.”장건우는 정우진과 만난 횟수가 많지 않았다.이전에 몇 번 만났을 때는 정우진이 소문처럼 그렇게 소통하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하지만 오늘따라 정우진은 왠지 모르게 상대방을 머뭇거리게 하는 싸늘함이 풍겼다.입을 열어 인사를 하려고 했지만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그래.”목젖을 꿀꺽 움직인 정우진은 두 글자를 내뱉은 뒤 신시아 옆에 있는 등나무 의자에 걸터앉았다.다소 불편한 듯 손끝으로 이마를 짚고 있었다.“따뜻한 물 한 잔 갖다 드릴게요.”신시아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몸을 돌려 홀 안으로 들어갔다.“정 대표님.”장건우는 그 틈을 타 인사를 건넸다.하지만 정우진은 그 말이 들리지 않은 듯 오로지 손끝으로 미간만을 꾹꾹 눌렀다.미간 사이에는 어느새 손에 눌린 자국이 남아 있었다.장건우는 유유히 베란다에서 자리를 떴다. 그 사이 신시아도 그의 시야에서 사라진 상태였기에 진승현의 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몇 분 후, 신시아는 따뜻한 물 한 잔을 들고 베란다로 돌아왔다.등나무 의자에 기대어 앉은 정우진은 두 손을 몸 위에 가지런히 얹은 채 열 손가락을 서로 교차해 깍지를 끼고 있었다.두 눈을 살짝 감고 있어 위엄이 느껴지는 얼굴에 약간의 피로가 스며든 느낌이었다.물을 조용히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신시아는 다시 홀 안으로 들어가 웨이터에게 얇은 담요를 부탁해 정우진에게 덮어주었다.모든 것을 마친 뒤 홀 안으로 들어가 베란다 문 옆에서 지켰다.몇몇 사람들이 정우진에게 축하 인사를 하러 오려 했지만 신시아가 모두 돌려보냈다.술자리는 어느새 중반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정우진이 남아 있는 이유는 그저 은씨 가문에게 비즈니스 거물들과 인사를 나눌 기회를 더 많이 주기 위해서였다.은
정우진은 몇 초간 침묵하다가 중저음의 목소리로 물었다.“나보다 나은가 보지?”이 남자 역시 요리를 할 줄 알았다. 자주 하는 건 아니었지만 신시아에겐 그 기억이 꽤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당연히 대표님과는 비교가 안 되죠.”신시아가 예의 바른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말 한마디로 정우진과 장건우 사이의 거리감이 명확하게 갈렸다.정우진의 얼굴에 미묘한 불쾌감이 스쳤다.17층에 엘리베이터가 멈춘 후 신시아가 먼저 내렸다.그녀의 손에 들린 보온 도시락통이 유독 눈에 거슬리는 정우진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남자의 미간이 좁혀지고 짙은 눈동자 깊은 곳에 복잡한 감정이 일렁였다.신시아는 도시락통을 돌려준다는 핑계로 장건우와 만날 약속을 잡았다.[저녁에 연회장에서 만나.]장건우는 저녁에 회사 대표 진승현과 함께 연회장에 올 예정이었다.오후 3시, 신시아는 은씨 저택으로 향해 은유라를 태웠다.오늘 은유라는 연둣빛 원피스 차림에 옅은 화장을 한 채였다. 그 모습에선 명문가 따님 특유의 귀티가 흘렀다.반면 신시아는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붙던 이전 스타일과 달리 넉넉한 핏이라 배를 완벽하게 가려주었다.임신 사실을 알고 있는 은유라는 신시아의 아랫배를 빤히 훑어보았다.‘정말 감쪽같네. 임신한 티가 전혀 안 나잖아.’차 문밖에서 대기하던 신시아, 은유라는 그녀를 아래위로 한참 훑어보고 나서야 느릿하게 차에 올랐다.신시아는 말없이 문을 닫고 운전석으로 돌아와 호텔을 향해 차를 몰았다.“우진 오빠는 왜 나를 데리러 안 왔대요?”차에 타자마자 은유라가 투덜거렸다.“대표님은 국제회의 일정이 있으십니다.”신시아가 사실대로 답했다.“근데 왜 하필 시아 씨냐고요?”은유라는 이제 신시아를 보는 것조차 기분이 잡쳤다.“임 비서님이 휴가를 내셔서요.”그 대답에 은유라는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한 시간 후, 호텔 3층 연회장에 도착했다.신시아는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대고 은유라와 함께 올라갔다.굽 없는 신발을 신었음에
하선재가 몰락하며 위약금을 더 이상 물어줄 수 없게 됐고 이로써 신시아도 백영을 못 떠나게 됐다.그녀의 앳된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숨길 수 없었다.정우진은 날카로운 턱선을 드러내고 혀로 뺨 안쪽을 굴리면서 무척 태연한 척했지만, 눈빛만큼은 폭풍전야처럼 험악했다.“신 비서도 하 대표가 몹시 걱정되는 모양인데 그럼 백영 그룹을 대표해서 병문안 다녀와. 11시 회의 전까지는 돌아와야 해.”신시아는 순간 깨달았다. 하선재와 정우진이 만났고 방금 들었던 녹음 파일도 그들의 대화였다.그렇다면 어젯밤에 일어난 일일까?“왜?”정우진은
“시아 데려가고 싶어? 원한다면 실력으로 쟁취해 보던가.”정우진은 몸을 돌려 룸으로 향했다.하선재는 그의 뒤를 쫓으며 호탕하게 웃었다.“신 비서도 불러와서 직접 물어볼 배짱은 없나 봐, 정 대표?”말을 이어가는 동안 정우진은 이미 방 안으로 들어와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며 다른 의자 위로 발을 올렸다.그의 무심한 움직임은 하선재가 바로 옆자리에 앉는 것을 단호하게 막아섰다.“걔는 아직 누군가를 선택할 자격 같은 거 없어.”일개 고아 출신의 비서가 아무리 능력이 출중하다 한들 그들을 선택할 만큼의 그릇은 못 된다.하선재는
통화를 이어가면서 신시아는 가방을 챙겨 들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정우진 곁을 스쳐 지나갈 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다행히 정우진은 그녀를 뒤쫓지 않았다.신시아는 드디어 낮은 목소리로 하선재의 말에 응수했다.“하지만 제 문제는 제 방식대로 해결할 겁니다. 하 대표님은...”뚜... 뚜...전화기 너머로 바쁜 신호음이 울렸다.하선재가 먼저 전화를 끊어버린 것이었다.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신시아는 황급히 안에 올랐다. 갑작스러운 이 통화를 마음에 새겨두지 않았다.커다란 대표이사실 안, 정우진은 통유
화장실에서 신시아는 방금 먹었던 저녁을 모조리 게워냈다.위가 텅 비자 헛구역질하며 신물까지 토해냈다.얼마나 지났을까. 허리를 굽히고 있던 그녀의 등 뒤로 커다란 손바닥이 툭 얹혔다. 정우진이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따뜻한 온기를 전했다.“괜찮아?”남자의 물음에 신시아는 고개를 저었다.“아... 네. 대표님은 나가 계세요. 괜히 더러운 꼴 보지 말고요.”정우진은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넸다.“다 정리하고 병원 가자. 데려다줄게.”“괜찮습니다.”신시아는 입을 한 번 헹구고 변기 물을 내렸다. 이어서 티슈를 두 장 뽑아 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