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서재의 불은 켜지지 않았다. 열린 금고에서 새는 푸른 빛과 창밖 도시의 불빛만이 두 사람 사이를 갈랐다.
세아는 파일을 펼쳤다. 첫 장은 인수합병 승인서였다. 도헌이 말한 대로 거짓이었다. 서명란에는 강태성 회장의 이름과 도헌의 도장이 나란히 찍혀 있었다. 그녀는 한 장씩 넘겼다. 숫자, 계약 조항, 병원 기록. 손끝이 점점 차가워졌다.
마지막 장에서 손이 멈췄다.
기획서도 승인서도 아니었다. 손으로 쓴 편지였다. 익숙한 필체였다. 어린 시절 생일마다 받던 카드 위의 글씨. 모서리가 살짝 기울어지는 아버지의 글씨였다.
[세아야. 이 글을 읽는다면 네가 강도헌 대표를 만났다는 뜻이다. 회사를 판 건 내 선택이었다. 강태성에게 빼앗기느니, 그의 아들에게 넘기고 너를 맡기는 길을 택했다. 그 아이는 나를 막으려 했다. 끝까지.]
세아의 숨이 끊겼다.
그 아래, 날짜가 있었다. 3개월 전.
“……3년 전이 아니라, 3개월 전.”
목소리가 갈라졌다. 도헌이 한 걸음 다가왔다.
"맞아."
"아버지는 돌아가신 게……."
"오 비서관이 그렇게 말했겠지. 유언이라는 단어를 썼을 거고."
도헌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한도식 회장님은 살아 계셔. 3년 전 쓰러진 뒤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가, 올해 봄에 눈을 뜨셨어. 내가 모셨어. 강태성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 내 이름으로 된 병실에."
세아의 손에서 편지가 떨어졌다.
"그걸…… 3개월이나."
"당신이 입사한 날 전에 알려야 했어. 못 했어."
"왜요!"
그녀의 목소리가 터졌다. 눈이 뜨거워졌다.
"왜 못 했는데요! 3년을 원수라고 믿으며 살았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줄 알고, 당신 목에 칼을 겨눌 생각만 하면서!"
"당신이 사라질까 봐."
도헌의 목소리가 낮게 부서졌다.
"아버지가 살아 계신다는 걸 알면 당신은 복수를 멈추겠지. 그럼 이 계약도 필요 없어지고. 내 곁에 있을 이유도 없어지고."
“…….”
"비겁하지. 알아. 당신이 나를 죽이려고 온 걸 알면서, 나는 당신이 계속 오기를 바랐어."
짝.
세아의 손이 그의 뺨을 쳤다. 서재 안에 소리가 울렸다. 도헌은 고개를 돌리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붉어진 뺨 위로 그가 천천히 시선을 돌려 그녀를 보았다.
"한 번 더."
“……뭐라고요.”
"받을 만하니까. 한 번 더 쳐도 돼."
세아의 눈에서 눈물이 굴러떨어졌다. 분노와 안도와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이 한꺼번에 가슴을 찢었다. 그녀는 그의 가슴을 주먹으로 쳤다. 한 번, 두 번. 힘이 빠질 때까지. 도헌은 맞으면서도 그녀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
“……미워요.”
"알아."
"정말 미워요."
"알아. 그래도."
그가 그녀의 이마에 이마를 댔다.
"곁에 있어 줘."
세아는 한참 숨을 몰아쉬다가, 그의 목에 걸린 채 풀려 있던 넥타이를 낚아챘다. 감색 실크가 손에 감겼다. 눈물에 젖은 눈이 어두워졌다.
“……대표님.”
"응."
"벌을 받겠다고 하셨죠."
도헌의 시선이 넥타이로 내려갔다가 천천히 올라왔다. 숨이 달라졌다.
“……세아.”
"정해 둘 게 있어요. 멈춰야 할 때 쓰는 말."
"제100조."
"네?"
"계약서 마지막 조항. 100일째 밤. 그 말이 나오면 전부 멈춰. 내 쪽도, 당신 쪽도."
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서재 소파로 밀어 앉혔다. 그가 순순히 앉았다. 그녀가 그의 손목을 모아 쥐고 넥타이를 감았다. 한 바퀴, 두 바퀴. 너무 조이지 않게, 그러나 풀리지 않게. 매듭을 짓는 손가락이 떨렸다. 도헌은 그 떨림을 지켜보며 입술을 열었다.
"괜찮아. 당신이 원하는 만큼."
“……입 다물어요.”
"네, 실장님."
그 호칭에 세아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낮의 직함이 이런 곳에서 이런 목소리로 불리자 온몸에 열이 번졌다. 그녀는 그의 무릎 위로 올라앉았다. 묶인 손이 그녀의 허리 옆에서 허공을 맴돌았다. 잡고 싶은데 잡지 못하는 손. 그 사실이 더없이 짜릿했다.
"지금부터 대표님은 만지면 안 돼요."
“……그건 벌이 너무 가혹한데.”
“3년 치예요.”
세아가 그의 목덜미에 입술을 얹었다. 이로 살짝 물자 그의 어깨가 움찔했다. 쇄골, 가슴, 맥박이 뛰는 자리마다 입술이 머물렀다. 셔츠의 남은 단추를 하나씩 풀 때마다 그의 숨이 거칠어졌다. 도헌이 이를 악물고 뒤로 머리를 젖혔다. 묶인 손목의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세아…… 부탁이야."
"뭘요."
"당신이 말해 줘. 어디까지 해도 되는지."
"아직이요."
그녀가 허리를 천천히 움직였다. 천 너머로 맞닿은 열기가 서로를 달구었다. 도헌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세아의 손이 그의 뺨을 감쌌다. 아까 때린 자리를 엄지로 쓸었다.
"미워요. 그런데."
“…….”
"다른 사람이 만지는 건 더 싫어요."
도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가 그 귓가에 입술을 대고 낮게 속삭였다.
"이제 풀어 줄게요. 대신 약속해요. 오늘은 나만 봐요. 눈 감지 말고."
넥타이가 풀리는 순간 그의 팔이 그녀를 감아 안았다. 갇혀 있던 시간만큼 간절한 힘이었다. 소파 위에서 몸이 뒤집히고, 서류가 바닥으로 쏟아졌다. 입술이 부딪치고, 그의 손이 그녀의 어깨와 허리와 허벅지를 이제야 허락받은 듯 미친 듯이 쓸어내렸다. 세아의 등이 가죽 위에서 휘었다. 가쁜 숨, 끊긴 이름, 맞닿은 열기. 멀리 책상 위 스탠드가 흔들려 벽에 그림자를 일렁였다.
"세아, 사랑…… 아니."
그가 말을 삼켰다.
“……뭐라고요.”
"아무것도."
"말해요."
"제13조야. 먼저 말하면 지는."
세아가 숨을 몰아쉬며 웃었다. 눈가가 젖은 채로.
"이미 졌잖아요. 둘 다."
그 말이 마지막 방어선을 무너뜨렸다. 도헌이 그녀를 끌어안았고, 방 안에는 오래도록 숨소리와 이름만이 남았다.
새벽 4시.
세아는 소파 위에서 도헌의 가슴에 기대어 있었다. 책상 위 휴대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는 오 비서관.
도헌이 눈을 떴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세아가 손을 뻗어 화면을 열었다.
[약속하신 시간이 지났습니다. 파일은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한세아 양, 아버님이 계신 병실의 위치는 이미 회장님께서 알고 계십니다.]
도헌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안 돼.”
그가 벌떡 일어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병원에 아무도 못 갔는데. 위치를 안다는 건."
세아의 심장이 철렁했다.
"누군가 안에서 알린 거예요."
"그래. 내 사람 중에."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도헌이 낮게 말했다.
"병실 앞에 지금 누가 있는지, 나도 모른다."
새벽 3시, 병원 7층 705호.문을 열기 전 세아는 도헌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차가웠다. 3년 동안 가슴에 묻어 둔 장면 앞에 선 사람의 손이었다."같이 들어가요."“……내가 먼저 들어가야 해.”"그럼 제가 뒤에서 손 잡고 있을게요."도헌이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밀었다. 침대 위에서 한도식 회장이 상체를 세우고 앉아 있었다. 야윈 얼굴에 눈빛만은 3년 전 회장실의 그 눈이었다. 곁에는 이은서가 앉아 그의 손을 쥐고 있었다.도헌은 문턱에서 멈췄다. 세아의 손을 놓고 침대 앞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었다."회장님. 3년 전 그날 저는.""자네가 안 도망쳤다면."한 회장이 그의 말을 끊었다. 낮고 갈라졌지만 또렷한 목소리였다."내 딸은 지금 여기 없었을 걸세."도헌이 고개를 들었다."쓰러지는 순간에도 나는 의식이 있었네. 눈은 못 떠도 귀는 열려 있었지. 자네가 38초 만에 구급차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어. 그리고 강태성의 사람이 와서 서류를 가져오라고 하는 것도 들었고."“…….”"자네가 서류를 들고 나간 건 도망이 아니었어. 그 서류가 홍기범 손에 넘어가면 세아가 먼저 다쳤을 거야. 자네는 그걸 몸으로 막은 거고, 나는 그걸 알았네."도헌의 어깨가 무너졌다. 세아는 문가에서 숨을 죽였다. 그가 처음으로 소리 내어 우는 것을 보았다. 한 회장이 손을 뻗어 그의 어깨에 얹었다. 3년 전 풀려 버렸던 그 손이 이번에는 단단히 쥐었다."제77조는 어떻게 된 겁니까.""자네가 초안을 쓰고, 내가 병상에서 한 줄을 보탰지. 마지막 문장.""제4항이요?""아니. 제2항."세아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다만 파기하지 않는다면, 갑은 을에게 평생의 갱신을 청구한다."도헌이가 이 조항을 쓴 날 내게 물었지. 이 아이를 평생 묶어 둬도 되겠느냐고. 나는 이렇게 답했네. 묶는 게 아니라 청구하는 거라면 허락하겠다고. 선택은 세아가 하는 거니까."이은서가 눈가를 훔치며 웃었다."이 사람, 입은 거칠어도 딸 일에는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어요.
"제3항, 읽어 봤어?"새벽 1시 20분. 도헌은 눈을 뜬 채 천장을 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깨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세아의 손에는 푸른 글씨가 아직 남은 종이가 들려 있었다.“……언제부터 깨어 있었어요.”"당신이 종이를 집었을 때부터.""그럼 문자도 봤겠네요.""봤어."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댔다. 시트가 허리께로 흘러내렸다. 달빛이 어깨와 가슴의 선을 따라 얕게 흘렀다. 세아의 시선이 잠깐 거기 머물렀다가, 이내 단단하게 그의 눈으로 돌아왔다.“3년 전 병실에 처음 들어간 사람. 그게 당신이죠.”"맞아."“8화에서 말했잖아요. 그날 병원에 있던 사람이 당신이었다고. 거기서 말을 끊었고요.”"끊은 게 아니라 못 했어."도헌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목소리가 낮고 갈라졌다."아버지가 쓰러진 날 밤, 나는 한진정밀 회장실에 있었어. 인수 서류를 들고. 당신 아버지가 서명하기 직전에 나를 불러서 말씀하셨어. 오래 해 온 일을 넘기는 게 무섭다고. 그리고 내 손을 잡으셨지. 그 손에서 힘이 빠지는 걸, 내가 가장 먼저 느꼈어."세아의 숨이 얕아졌다."구급차는요.""내가 불렀어. 11분이 아니라 38초 만에. 그런데 기록에는 11분 뒤로 남아 있어. 홍기범이 내 호출 기록을 지웠거든. 그리고 나는."그가 말을 삼켰다.“……나는 그 자리에서 도망쳤어. 아버지가 시킨 대로 서류를 들고 먼저 나왔어. 쓰러진 사람을 두고. 3년 동안 잠을 못 잔 이유야. 눈을 감으면 그 손이 풀리는 감각이 돌아와서.”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종이를 내려놓고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침대 위로 무릎을 올리고 그의 앞에 앉았다. 손을 뻗어 그의 왼쪽 가슴 위에 올렸다.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그 얘기를 77일째에 하려고 했어요?""아니. 평생 안 하려고 했어."“…….”"그런데 당신이 계약서를 열었으니까.""당신, 진짜."세아가 이를 악물다가 숨이 새는 웃음을 흘렸다. 눈가가 젖었다.“3년 동안 그걸 혼자 안고, 저한
오후 2시 40분, 태성타워 52층.이사회 20분 전이었다. 도헌의 집무실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고, 블라인드는 반쯤 내려와 있었다. 세아는 그의 넥타이를 매 주다 말고 손을 멈췄다. 그의 손이 그녀의 허리 뒤에서 아주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대표님. 여긴 사내입니다.""알아.""제7조 기억하시죠. 절대 들키지 않는다.""기억하니까 문을 잠갔지."도헌이 그녀를 책상 모서리로 몰았다. 세아의 허벅지 뒤가 차가운 상판에 닿았다. 그가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 옆 서류 더미를 짚었다. 1화에서 서류장 앞에 그녀를 가뒀던 바로 그 자세였다. 그때와 달랐던 건 두 사람 다 이제 서로의 체온을 안다는 점이었다."그날 당신이 내 앞에서 '업무에 적절하지 않다'고 했지.""지금도 적절하지 않아요.""그래서 더 좋은 거 아닌가."“……정말, 못 말려.”세아가 그의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매듭이 반쯤 풀렸고, 두 사람의 입술이 부딪쳤다. 숨을 죽여야 하는 곳이라 입맞춤은 더 깊고 더 조용했다. 그의 손이 정장 재킷 아래로 들어가 블라우스 위로 허리선을 따라 느리게 올라갔다. 천 한 겹 너머로 전해지는 손바닥의 열이 목덜미까지 번졌다. 세아가 입술 사이로 낮은 숨을 흘리자, 그가 그 소리를 삼키며 속삭였다."소리 내면 밖에 들려.""당신이 그렇게 만지니까.""그럼 참아."“……못 참으면요.”"그럼 내가 막아야지."그가 그녀의 입술을 다시 덮었다. 세아의 손가락이 그의 셔츠 깃 안으로 파고들어 쇄골 위를 눌렀다. 책상 위 펜꽂이가 흔들려 달그락 소리를 냈고, 두 사람이 동시에 굳었다. 문밖에서 비서실 직원이 지나가는 구두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멀어지기까지 둘은 이마를 맞댄 채 숨만 쉬었다. 심장 소리가 서로의 가슴에서 겹쳐 울렸다.“……이게 제일 위험해요.”"뭐가.""이 정도에서 멈춰야 한다는 거요."도헌이 낮게 웃으며 그녀의 입술 가장자리를 엄지로 닦았다. 번진 립스틱 자국이 그의 손끝에 남았다. 그는 그것을 자기 입술에 한 번 가져다
오전 11시, 태성타워 지하 3층 주차장.민재는 검은 세단에 기대어 서 있었다. 평소의 가벼운 웃음은 없었다. 넥타이는 풀려 있었고 눈 밑에는 밤새 잠들지 못한 흔적이 짙었다. 도헌의 얼굴과 닮은 그늘이었다."왔네, 형.""형이라고 부르지 마. 어제까지 내 목에 칼을 대던 놈이.""그럼 뭐라고 불러? 사촌 형님?"민재가 웃었다. 웃음이 입가에서 부서졌다."나도 어젯밤에 알았어. 내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왜 나한테 형 뒤만 쫓게 했는지. 형이 지분을 가졌으니까, 나는 형을 흔들 미끼였던 거야. 형이 무너지면 내가 대신 앉는 그림. 그 노인네는 처음부터 우리 둘 다 장기 말로 키운 거고."세아는 도헌의 팔 옆에서 민재의 얼굴을 살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의 눈은 아니었다. 너무 많이 맞아서 맞는 법을 아는 사람의 눈이었다."내일 이사회가 아니라 오늘 오후 3시야. 아버지가 시간을 당겼어. 안건은 '대표 직무정지'. 형이 정신적으로 불안정하다는 의사 소견서까지 준비해 놨더라.""의사 소견서?"“3년 치 수면제 처방 기록. 형이 직접 받아 온 거잖아.”도헌의 턱이 굳었다. 세아가 그의 손등을 가만히 감쌌다."그래서 오라고 한 이유가 뭐죠.""이걸 보여 주려고."민재가 재킷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냈다. 어젯밤 사라졌던 그 봉투였다. 세아의 눈이 커졌다.“……훔쳐 간 게.”"지키려고 가져간 거야. 아버지가 서재에서 뒤질 걸 알았으니까. 근데 이상한 게 있어."민재가 봉투 속 계약서 마지막 장을 꺼내 펼쳤다. 제77조 아래, 한 줄이 비어 있었다."여기 뭔가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봐도 백지야. 형이 쓴 마지막 문장이 있다고 했잖아. 불에 대 봤고, 약품도 써 봤고, 형 손에 쥐여 보기도 했고.""내 손?""형은 열 번을 잡아도 아무것도 안 나타났어. 그런데 이 종이가 말했지. 마지막 문장은 윤세아의 손만 알아본다고."도헌이 천천히 세아를 바라보았다. 눈빛이 이상하게 가라앉았다.“……그게 무슨 뜻이야. 나는 그런 걸 쓴 적.”"
병실의 공기가 멈췄다.문가에 선 도헌의 시선이 세아의 어머니 손에 들린 서류 봉투에 꽂혔다. 겉면에 적힌 자기 이름이 낯설게 보였다."그게 뭡니까.""앉거라, 도헌아."한도식 회장이 침대 위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도헌은 앉지 않았다. 세아가 다가가 그의 소매 끝을 말없이 쥐었다. 그제야 그가 한 걸음 안으로 들어왔다.이은서가 봉투를 열었다. 누렇게 바랜 출생 기록과 사진 한 장이 나왔다. 젊은 남자가 갓난아기를 안고 웃고 있었다. 눈매가 도헌과 똑같았다."강태호. 강태성의 형이다. 그리고 네 친아버지고."도헌의 손끝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무슨 소리입니까.”"스물세 해 전, 강태호는 태성그룹의 적통이었다. 강태성은 차남이었고. 형이 교통사고로 죽던 날 밤, 서재에서 서류가 한 장 바뀌었다. 나는 그 자리에 있었다."세아의 어머니가 떨리는 손으로 사진을 쓸었다."태호 씨의 아내는 출산 직후 숨졌고, 갓난아기 앞으로 지분 전부가 상속됐다. 강태성은 그 아이를 자기 호적에 올렸다. 아들로 키우면 지분을 후견인으로서 쥘 수 있으니까."“…….”"그가 너를 그렇게 키운 이유다. 네가 스스로 힘을 갖기 전에 늘 두려움과 죄책감으로 묶어 두려고."도헌은 오래 말이 없었다. 창밖으로 구름이 지나갔고, 병실 벽에 그림자가 느리게 밀려갔다. 그가 낮게 웃었다. 웃음이 아니라 숨이 새는 소리였다."그래서 제가 3년 동안 한 번도 잠들지 못했군요. 뭔가 잘못됐다는 걸, 몸이 먼저 알았나 봅니다.""도헌 씨."세아가 그의 손을 잡았다. 그는 돌아보지 않은 채 그 손을 되잡았다. 너무 세게, 놓으면 쓰러질 사람처럼.“……나가겠습니다. 잠깐만.”그가 병실을 나갔다. 세아가 따라 나가려 하자 한도식 회장이 그녀를 불렀다."세아야. 지금 그 아이에게 필요한 건 위로의 말이 아니다. 그냥 곁이다.""알아요, 아버지."밤 10시 정각.세아는 도헌의 집 현관 앞에 섰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불은 꺼져 있었고, 거실 창으로 도시의 야경만 쏟
“77조를 쓴 사람은 누구예요?”아침 햇살이 안가 거실의 유리창을 가로질렀다. 도헌은 막 눈을 뜬 참이었다. 세아는 소파 맞은편에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간밤의 온기가 남은 어깨 위로 그의 셔츠가 헐렁하게 걸려 있었지만, 눈빛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병원에서 연락 왔어?”"어머니가 읽지 말고 먼저 당신에게 물으라고 하셨어요. 조항을 쓴 사람이 정말 아버지냐고."도헌의 시선이 처음으로 옆으로 미끄러졌다. 1화에서 세아를 정면으로 훑던 남자가, 지금은 그녀의 눈을 피하고 있었다."대답해요."“……내가 썼어.”세아의 숨이 얕아졌다."한도식 회장님은 동의만 하셨어. 병상에서 눈을 뜨신 날 내가 조항 초안을 보여 드렸고, 그분은 고개를 끄덕이셨지. 자기가 쓰게 했다고 말씀하신 건 당신이 나를 덜 미워하게 하려던 거야.""왜 거짓말을 시켰어요.""그 조항의 진짜 목적을 당신이 알면 안 됐으니까.""진짜 목적이 뭔데요."도헌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3년 동안 잠들지 못한 남자의 얼굴이 아침 빛 아래 낱낱이 드러났다."나는 위험한 사람이야, 세아. 아버지의 피를 받았고, 아버지가 가르친 방식으로 컸어. 가진 걸 지키려다 가두고, 놓치기 싫어서 숨기고. 당신 아버지를 숨긴 것도, 당신에게 말하지 않은 것도 그 방식이었어."“…….”“77조는 당신이 아니라 나를 묶는 조항이야. 계약이 새어 나가면, 당신이 위험해지면, 내가 먼저 떠나야 하도록. 내가 당신을 집어삼키기 전에 나를 막을 장치가 필요했어.”침묵이 길었다. 세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분노보다 먼저 올라온 건 이상한 아픔이었다. 이 남자는 자기 자신을 제일 못 믿고 있었다."그럼 아버지가 쓰게 했다는 말은요.""내가 당신 아버지 이름을 빌렸어. 미안해.""봉투 안에는 뭐가 더 있어요."“……그건 못 말해. 읽힌 건 민재 손이고, 내용은.”"도헌.""세아, 제발.""한 번만 더 피하면 저 나갈 거예요."그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