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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당신이 쓴 조항

Author: 유니버쓰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9 13:21:27

“77조를 쓴 사람은 누구예요?”

아침 햇살이 안가 거실의 유리창을 가로질렀다. 도헌은 막 눈을 뜬 참이었다. 세아는 소파 맞은편에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간밤의 온기가 남은 어깨 위로 그의 셔츠가 헐렁하게 걸려 있었지만, 눈빛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병원에서 연락 왔어?”

"어머니가 읽지 말고 먼저 당신에게 물으라고 하셨어요. 조항을 쓴 사람이 정말 아버지냐고."

도헌의 시선이 처음으로 옆으로 미끄러졌다. 1화에서 세아를 정면으로 훑던 남자가, 지금은 그녀의 눈을 피하고 있었다.

"대답해요."

“……내가 썼어.”

세아의 숨이 얕아졌다.

"한도식 회장님은 동의만 하셨어. 병상에서 눈을 뜨신 날 내가 조항 초안을 보여 드렸고, 그분은 고개를 끄덕이셨지. 자기가 쓰게 했다고 말씀하신 건 당신이 나를 덜 미워하게 하려던 거야."

"왜 거짓말을 시켰어요."

"그 조항의 진짜 목적을 당신이 알면 안 됐으니까."

"진짜 목적이 뭔데요."

도헌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3년 동안 잠들지 못한 남자의 얼굴이 아침 빛 아래 낱낱이 드러났다.

"나는 위험한 사람이야, 세아. 아버지의 피를 받았고, 아버지가 가르친 방식으로 컸어. 가진 걸 지키려다 가두고, 놓치기 싫어서 숨기고. 당신 아버지를 숨긴 것도, 당신에게 말하지 않은 것도 그 방식이었어."

“…….”

“77조는 당신이 아니라 나를 묶는 조항이야. 계약이 새어 나가면, 당신이 위험해지면, 내가 먼저 떠나야 하도록. 내가 당신을 집어삼키기 전에 나를 막을 장치가 필요했어.”

침묵이 길었다. 세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분노보다 먼저 올라온 건 이상한 아픔이었다. 이 남자는 자기 자신을 제일 못 믿고 있었다.

"그럼 아버지가 쓰게 했다는 말은요."

"내가 당신 아버지 이름을 빌렸어. 미안해."

"봉투 안에는 뭐가 더 있어요."

“……그건 못 말해. 읽힌 건 민재 손이고, 내용은.”

"도헌."

"세아, 제발."

"한 번만 더 피하면 저 나갈 거예요."

그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붉었다.

"봉투에는 계약 종료 후 내 재산과 지분 전체를 당신에게 이양한다는 문서가 있어. 강태성이 그걸 알면 당신을 노리는 이유가 하나 더 생기는 거야. 그래서 숨겼어."

세아는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다 천천히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이없고 아프고 사랑스러운 웃음이었다.

“……정말, 미친 사람이네요.”

"알아."

"당신 전부를 줄 거면서, 저한테는 한마디도 안 하고."

"당신이 받아 줄 리 없었으니까."

"그건 제가 정해요."

세아가 한 걸음 다가섰다. 그의 앞에 멈춰 서서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올렸다. 도헌의 눈이 그녀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이건 벌이에요. 제 허락 없이 제 몫을 정한 벌."

“……뭐든 받을게.”

"뭐든 받는다는 말, 위험한 줄 알죠."

"당신한테만 해 본 말이야."

세아의 입술이 그의 입술을 덮었다. 이번에는 위로도 약속도 아니었다. 화난 입맞춤이었다. 그의 아랫입술을 이로 지그시 물고, 놓았다가, 다시 깊이 파고들었다. 도헌이 낮게 숨을 삼켰다. 그의 손이 허공에서 머뭇거리다 그녀의 허리 위에 멈췄다.

“……만져도 돼?”

"아직이요."

"세아."

"제가 말할 때까지. 오늘은 제가 벌주는 날이에요."

그의 손이 소파 등받이를 움켜쥐었다. 세아는 그의 무릎 사이로 한 발을 올리고,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천천히, 일부러 그의 눈을 보면서. 드러난 가슴과 어깨 위로 아침 햇살이 내려앉았다. 그녀의 손끝이 그의 쇄골에서 가슴, 복부의 선을 따라 느리게 내려갔다. 닿을 듯 말 듯, 때로는 손톱 끝으로 스치듯. 그가 목울대를 움직이며 눈을 감으려 했다.

"눈 감지 마요."

“……당신, 진짜.”

“3년 치 벌이라고 했잖아요.”

그녀의 입술이 그의 목에서 어깨로 내려가 맥이 뛰는 곳에서 오래 머물렀다. 이로 살짝 물자 그의 허리가 소파에서 움찔 들렸다. 낮은 신음이 목 안쪽에서 번졌다. 그가 손으로 등받이를 으스러지도록 쥐었다. 서고 싶은데 서지 못하는 사람의 떨림이었다.

"세아…… 이제."

"말해 봐요. 뭐가 필요한지."

"당신."

"더 정확하게."

"당신 손이. 당신 입술이. 당신이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그 대답에 세아의 숨이 흔들렸다. 그녀가 천천히 셔츠 자락을 어깨에서 내렸다. 천이 팔을 타고 미끄러지는 동안 도헌의 시선이 그녀를 따라 내려갔다. 눈동자가 어두워졌다. 거친 숨이 두 사람 사이에서 뒤엉켰다.

"이제 해도 돼요."

그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세계가 뒤집혔다. 도헌이 그녀를 소파 위로 눕히고 그 위에 몸을 겹쳤다. 참았던 만큼 격하고, 오래 기다린 만큼 간절한 입맞춤이었다. 입술이 목선을 훑고, 가슴 사이를 지나고, 허리 위에서 멈췄다. 그의 손이 그녀의 허벅지를 쓸어 올리자 세아의 등이 활처럼 휘었다. 햇빛이 맨살 위에서 흔들렸다.

“……도헌.”

"응."

"거기서, 말고."

"어디."

“……알면서.”

"알아. 당신 입으로 듣고 싶어."

세아가 얼굴을 붉히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가 낮게 웃고, 그 웃음이 입술이 되어 그녀의 살갗 위로 번졌다. 숨이 끊기고, 손가락이 그의 머리칼을 움켜쥐고, 이름이 끝없이 불렸다. 맞닿은 몸이 하나의 리듬으로 오르내렸다. 처음에는 서로를 확인하듯 천천히, 곧 파도처럼 깊게, 마지막에는 말도 호흡도 잃을 만큼 가까이. 세아의 손톱이 그의 등에 길게 자국을 남겼고, 그는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묻은 채 이름을 삼키듯 불렀다.

긴 떨림이 지나간 뒤에도 두 사람은 오래 떨어지지 않았다.

정오 무렵, 세아는 도헌의 가슴 위에 턱을 괴고 누워 있었다. 시트 위로 햇빛이 길게 누웠다.

"하나만 말해 줘요."

"뭐든지."

"저한테 전부를 주려던 이유. 사랑해서예요, 미안해서예요?"

도헌은 대답 대신 그녀의 손을 잡아 손등에 입술을 댔다.

"제13조."

"그 조항은 고쳤잖아요. 먼저 마음을 준 쪽이 이긴다고."

"그럼 내가 이겼네."

“……그게 대답이에요?”

"아직 77일이 안 됐어. 그날이 오면 제대로 말할게. 당신 눈을 보고."

세아가 웃으며 그의 가슴을 가볍게 쳤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따뜻했다. 모든 거짓이 걷힌 뒤의 침묵이 이렇게 가벼울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때 도헌의 휴대폰이 울렸다. 병원의 최 이사였다.

"대표님. 한도식 회장님과 이은서 여사님이 두 분을 급히 찾으십니다. 20년 전 일에 대해 말씀하실 게 있다고."

세아가 몸을 일으켰다. 통화를 끊은 도헌이 그녀를 보았다.

"세아. 가기 전에 하나만."

"뭔데요."

"어머니가 무슨 말을 하시든, 나는 당신 곁에 있어."

그 문장이 이상하게 불길하게 들렸다.

병실 문이 열렸다. 나란히 앉은 두 노인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이은서가 딸의 손을 잡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아야. 먼저 말해 둘게. 너는 도식 씨의 딸이다. 그건 의심하지 마라."

세아의 심장이 가라앉았다.

"그런데 20년 전 그 서재에서, 나는 강태성에게서 다른 걸 받았다."

그녀가 낡은 서류 봉투를 꺼냈다. 겉에는 세아가 아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강도헌 — 출생 관련 기록]

도헌이 문가에서 걸음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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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 3시, 병원 7층 705호.문을 열기 전 세아는 도헌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차가웠다. 3년 동안 가슴에 묻어 둔 장면 앞에 선 사람의 손이었다."같이 들어가요."“……내가 먼저 들어가야 해.”"그럼 제가 뒤에서 손 잡고 있을게요."도헌이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밀었다. 침대 위에서 한도식 회장이 상체를 세우고 앉아 있었다. 야윈 얼굴에 눈빛만은 3년 전 회장실의 그 눈이었다. 곁에는 이은서가 앉아 그의 손을 쥐고 있었다.도헌은 문턱에서 멈췄다. 세아의 손을 놓고 침대 앞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었다."회장님. 3년 전 그날 저는.""자네가 안 도망쳤다면."한 회장이 그의 말을 끊었다. 낮고 갈라졌지만 또렷한 목소리였다."내 딸은 지금 여기 없었을 걸세."도헌이 고개를 들었다."쓰러지는 순간에도 나는 의식이 있었네. 눈은 못 떠도 귀는 열려 있었지. 자네가 38초 만에 구급차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어. 그리고 강태성의 사람이 와서 서류를 가져오라고 하는 것도 들었고."“…….”"자네가 서류를 들고 나간 건 도망이 아니었어. 그 서류가 홍기범 손에 넘어가면 세아가 먼저 다쳤을 거야. 자네는 그걸 몸으로 막은 거고, 나는 그걸 알았네."도헌의 어깨가 무너졌다. 세아는 문가에서 숨을 죽였다. 그가 처음으로 소리 내어 우는 것을 보았다. 한 회장이 손을 뻗어 그의 어깨에 얹었다. 3년 전 풀려 버렸던 그 손이 이번에는 단단히 쥐었다."제77조는 어떻게 된 겁니까.""자네가 초안을 쓰고, 내가 병상에서 한 줄을 보탰지. 마지막 문장.""제4항이요?""아니. 제2항."세아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다만 파기하지 않는다면, 갑은 을에게 평생의 갱신을 청구한다."도헌이가 이 조항을 쓴 날 내게 물었지. 이 아이를 평생 묶어 둬도 되겠느냐고. 나는 이렇게 답했네. 묶는 게 아니라 청구하는 거라면 허락하겠다고. 선택은 세아가 하는 거니까."이은서가 눈가를 훔치며 웃었다."이 사람, 입은 거칠어도 딸 일에는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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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전 11시, 태성타워 지하 3층 주차장.민재는 검은 세단에 기대어 서 있었다. 평소의 가벼운 웃음은 없었다. 넥타이는 풀려 있었고 눈 밑에는 밤새 잠들지 못한 흔적이 짙었다. 도헌의 얼굴과 닮은 그늘이었다."왔네, 형.""형이라고 부르지 마. 어제까지 내 목에 칼을 대던 놈이.""그럼 뭐라고 불러? 사촌 형님?"민재가 웃었다. 웃음이 입가에서 부서졌다."나도 어젯밤에 알았어. 내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왜 나한테 형 뒤만 쫓게 했는지. 형이 지분을 가졌으니까, 나는 형을 흔들 미끼였던 거야. 형이 무너지면 내가 대신 앉는 그림. 그 노인네는 처음부터 우리 둘 다 장기 말로 키운 거고."세아는 도헌의 팔 옆에서 민재의 얼굴을 살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의 눈은 아니었다. 너무 많이 맞아서 맞는 법을 아는 사람의 눈이었다."내일 이사회가 아니라 오늘 오후 3시야. 아버지가 시간을 당겼어. 안건은 '대표 직무정지'. 형이 정신적으로 불안정하다는 의사 소견서까지 준비해 놨더라.""의사 소견서?"“3년 치 수면제 처방 기록. 형이 직접 받아 온 거잖아.”도헌의 턱이 굳었다. 세아가 그의 손등을 가만히 감쌌다."그래서 오라고 한 이유가 뭐죠.""이걸 보여 주려고."민재가 재킷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냈다. 어젯밤 사라졌던 그 봉투였다. 세아의 눈이 커졌다.“……훔쳐 간 게.”"지키려고 가져간 거야. 아버지가 서재에서 뒤질 걸 알았으니까. 근데 이상한 게 있어."민재가 봉투 속 계약서 마지막 장을 꺼내 펼쳤다. 제77조 아래, 한 줄이 비어 있었다."여기 뭔가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봐도 백지야. 형이 쓴 마지막 문장이 있다고 했잖아. 불에 대 봤고, 약품도 써 봤고, 형 손에 쥐여 보기도 했고.""내 손?""형은 열 번을 잡아도 아무것도 안 나타났어. 그런데 이 종이가 말했지. 마지막 문장은 윤세아의 손만 알아본다고."도헌이 천천히 세아를 바라보았다. 눈빛이 이상하게 가라앉았다.“……그게 무슨 뜻이야. 나는 그런 걸 쓴 적.”"

  • 대표님, 야간 특약은 100일입니다   17화. 당신의 피가 아니라, 당신의 이름

    병실의 공기가 멈췄다.문가에 선 도헌의 시선이 세아의 어머니 손에 들린 서류 봉투에 꽂혔다. 겉면에 적힌 자기 이름이 낯설게 보였다."그게 뭡니까.""앉거라, 도헌아."한도식 회장이 침대 위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도헌은 앉지 않았다. 세아가 다가가 그의 소매 끝을 말없이 쥐었다. 그제야 그가 한 걸음 안으로 들어왔다.이은서가 봉투를 열었다. 누렇게 바랜 출생 기록과 사진 한 장이 나왔다. 젊은 남자가 갓난아기를 안고 웃고 있었다. 눈매가 도헌과 똑같았다."강태호. 강태성의 형이다. 그리고 네 친아버지고."도헌의 손끝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무슨 소리입니까.”"스물세 해 전, 강태호는 태성그룹의 적통이었다. 강태성은 차남이었고. 형이 교통사고로 죽던 날 밤, 서재에서 서류가 한 장 바뀌었다. 나는 그 자리에 있었다."세아의 어머니가 떨리는 손으로 사진을 쓸었다."태호 씨의 아내는 출산 직후 숨졌고, 갓난아기 앞으로 지분 전부가 상속됐다. 강태성은 그 아이를 자기 호적에 올렸다. 아들로 키우면 지분을 후견인으로서 쥘 수 있으니까."“…….”"그가 너를 그렇게 키운 이유다. 네가 스스로 힘을 갖기 전에 늘 두려움과 죄책감으로 묶어 두려고."도헌은 오래 말이 없었다. 창밖으로 구름이 지나갔고, 병실 벽에 그림자가 느리게 밀려갔다. 그가 낮게 웃었다. 웃음이 아니라 숨이 새는 소리였다."그래서 제가 3년 동안 한 번도 잠들지 못했군요. 뭔가 잘못됐다는 걸, 몸이 먼저 알았나 봅니다.""도헌 씨."세아가 그의 손을 잡았다. 그는 돌아보지 않은 채 그 손을 되잡았다. 너무 세게, 놓으면 쓰러질 사람처럼.“……나가겠습니다. 잠깐만.”그가 병실을 나갔다. 세아가 따라 나가려 하자 한도식 회장이 그녀를 불렀다."세아야. 지금 그 아이에게 필요한 건 위로의 말이 아니다. 그냥 곁이다.""알아요, 아버지."밤 10시 정각.세아는 도헌의 집 현관 앞에 섰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불은 꺼져 있었고, 거실 창으로 도시의 야경만 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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