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이현은 창문을 조금 열어두고 커피를 내렸다.
은은한 향이 방 안에 퍼졌고, 그 사이로 봄기운이 실려 들어왔다.
‘오늘도... 오는 거 맞겠지?’
핸드폰 화면엔
‘정기 청소 예약: 오늘 오후 3시, 유리’
라는 알림이 또렷하게 떠 있었지만,
그는 괜히 몇 번이고 그 문장을 다시 확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초인종이 울렸다.
띵동~그는 재빨리 걸어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환하게 웃는 유리를 보았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반짝이게 해드릴게요.”
“...어서 오세요.”
그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작아졌다는 걸 느꼈다.
그녀가 방 안으로 들어서는 짧은 순간 동안,
온도가 바뀌는 것처럼 방 안의 공기가 살짝 달라졌다.
유리는 능숙하게 장비를 꺼내 들고, 가볍게 몸을 풀었다.
“오늘은 창가 쪽부터 시작해볼게요. 햇빛이 좋으니까.”
그녀는 햇빛이 잘 드는 쪽을 먼저 정리한다는 고집이 있었다.
이현은 그걸 알고 있었다. 이제는 그녀의 청소 루틴이 익숙해졌다.
어디를 먼저 닦고, 어떤 순서로 움직이고,
어디쯤에서 슬며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쉬는지까지.
그녀가 창문을 닦을 때마다 햇빛이 유리 위에 맺히고,
손끝에 반짝이는 물방울이 일었다.
그 모습을 멀찍이 바라보며 이현은 마음속으로 조용히 되뇌었다.
‘청소 말고 다른 모습도...보고 싶다. 데이트 하자고 하면 부담느끼겠지?’
너무 빠르단 걸 안다. 그녀에 대해 아는 것도 많지 않다.
하지만 매주 이렇게 그녀를 맞이하고,
그녀가 다녀간 방을 멍하니 한참 바라보는 자신을 보면 그냥 ‘고객과 청소 전문가’로는 더는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말은...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커피잔을 하나 더 꺼내고,
그녀가 손을 털고 돌아보면 미소로 응답해주는 것밖에는.
“요즘 청소 요청 많으시죠?”
이현이 무심하게 물었다.
“조금요. 봄 되니까 다들 대청소 모드인가 봐요.”
“그래도... 여기 오는 날은 빠지지 않으시네요.”
“정기 예약이잖아요. 약속은 지켜야죠.”
그녀의 말에 이현은 웃었다.
‘약속’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기분 좋게 들릴 줄 몰랐다.
“혹시... 다른 데서 일하시다 보면
아, 여긴 정말 하기 싫다. 그런 곳도 있어요?”
“음...” 유리는 고개를 기울였다.
“사실... 그런 공간보다, 말 없이 시선만 주는 분이 더 힘들어요.
제가 막 움직이는데, 아무 말 없이 계속 보는 분들 있거든요.”
그 말에 이현은 순간 움찔했다.
‘...혹시 나?’
“그냥... 제가 불편하게 만든 거면 말해 주세요.”
“아뇨아뇨! 대표님은 달라요.
그냥... 조용히 있으시지만, 시선이 따뜻하니까요.”
그 말은 농담도 아니었고, 의식한 것도 아니었는데, 이현의 심장이 작게 툭, 하고 울렸다.
청소를 마친 뒤, 유리는 평소처럼 가볍게 정리하고 명함이 담긴 케이스를 꺼내려다 말고 웃었다.
“정기 고객님이시니까, 이건 이제 필요 없죠?”
“그럼요. 이젠 명함 없어도 외우고 있거든요.”
그녀가 문을 나서는 순간, 이현은 다시 한 번 말하고 싶었다.
‘혹시, 청소 말고도... 잠깐 커피 한 잔, 어때요?’
하지만 그 말은 목구멍까지만 올라왔다가 조용히 삼켜졌다.
아직은 이른 것 같아서.그리고 그녀가 웃으며 “다음 주에 뵐게요!”라고
말하는 그 순간이, 그 무엇보다 소중하게 느껴졌기에.
문이 닫히고 나서도 그는 그녀가 머물렀던 자리를 바라봤다.
바닥은 말끔했고, 창은 투명했다.
하지만 어쩐지 그보다 더 오래 남는 건, 그녀가 건넨 미소 하나였다.
‘다음엔... 말할 수 있을까.’
그 생각은 이현의 마음 한 켠에서 조용히 숨을 쉬었다.
말하지 않았지만, 분명하게 존재하는 설렘처럼.
* * * * * * * * *
루체빌 오피스텔 1603호.
이 주소를 검색하면 이제 지도 앱에서 ‘즐겨찾기’로 먼저 뜰 정도다.
처음 갔을 땐 낯설었고, 두 번째는 어색했지만 세 번째부터는 괜히 설렜다.
그리고 지금은... 음, 조금 이상할 만큼 마음이 간다.
“오늘도, 늦지 않게 가야지.”
유리는 도착하기 15분 전에 이미 건물 앞에 도착해 있었다.
시간을 정확히 지키는 게 프로 정신이라며 늘 말해왔지만,
사실 요즘은 조금 다르다.
‘그 사람이 먼저 문 열고 있을까?
아니면 오늘도 커피 내리고 계실까?’
그런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리고… 그건 분명히 청소 때문은 아니었다.
띵동~초인종을 누르자마자 문이 열렸다.
정확히, 두 번 울릴 틈도 없이.
이현은 오늘도 편안한 셔츠 차림으로 그녀를 맞이했다.
그의 손에는 막 내려놓은 듯한 머그잔이 들려 있었다.
“어서 오세요. 오늘도 정각이네요.”
“네, 약속은 지켜야죠.”
유리는 가볍게 웃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문득,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현관 옆 작은 신발장 위에,
누군가를 기다리듯 멀끔하게 정리된 슬리퍼 한 켤레.
그 옆에는 향긋한 캔들까지 피워져 있었다.
“...어? 이거 새로 사셨어요?”
유리는 슬리퍼를 가리키며 물었다.
“네. 유리님 오실 때 쓰시라고요. 매번 맨발로 다니시길래.”
순간, 유리는 뺨이 살짝 뜨거워졌다.
그 말이 이상하게 자꾸 마음에 걸렸다.
'오실 때', '쓰시라고', '매번'
그는, 그녀가 오는 걸... 신경 쓰고 있다는 뜻일까?
“감사해요. 저... 그런 거 잘 못 느끼거든요. 배려받는 거.”
“그러셨어요?”
“네. 늘 일로 만나니까, 신발 하나에도 괜히 감동이에요.”
이현은 아무 말 없이 웃었다.
그 웃음엔 설명도, 과장도 없었지만
그녀는 왠지 그 표정에 ‘기다렸다’는 감정이 실려 있는 것 같았다.
청소는 익숙한 루틴으로 진행됐다.
하지만 유리의 마음은 오늘따라 조금 산만했다.
서랍 정리를 하다가 괜히 손이 멈추고,
침대 커버를 정리하다 괜히 창밖을 한참 바라보기도 했다.
‘대표님이 나 기다린 걸까...
아니면 그냥 정기 청소 손님이니까 그런 걸까?’
마음 한켠에서 기대와 조심스러움이 줄다리기를 했다.
확신할 수 없지만,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그러면 안 되는데 그래도... 괜히 기분이 좋았다.
“유리님, 오늘은 창밖 많이 보시네요.”
“아... 그런가요? 햇살이 좋아서요.”
거짓말이었다. 햇살은 늘 좋았지만,
오늘은 그녀가 더 많이 흔들리고 있었다.
청소를 마친 유리는 장비를 정리하며 가볍게 물었다.
“그런데 요즘... 다른 청소 예약은 안 하시나 봐요?”
“네. 유리님만 옵니다.”
“아, 네... 그렇군요.”
그 대답이 왜 이렇게 마음에 와닿는 걸까.
그녀는 웃는 척하며 고개를 숙였고,
이현은 유리의 표정 속 아주 미세한 기쁨의 결을 느꼈다.
문을 나서기 전, 유리는 신발을 신으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다음 주에도... 슬리퍼 예쁘게 놓아둘 거죠?”
“당연하죠. 유리님 자리가 됐으니까요.”
그 말에, 유리는 고개를 돌려 웃음을 터뜨렸다.
'자리.' 그 단어는 오늘 그녀에게 가장 예쁜 말이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순간,
유리는 핸드폰을 꺼내 메모장을 열었다.
오늘도 별거 아닌 듯 특별했던 순간들을 적어두기 위해.
현관 슬리퍼. 따뜻한 커피. 웃을 때 눈이 반달 되는 거.
“자리가 됐으니까요.”
그녀는 가볍게 숨을 쉬었다. 그리고 조용히, 한 문장을 적었다.
혹시... 나 기다리셨어요?
말하지 않았지만, 오늘따라 대답은 이미 들은 것 같았다.
문 앞에 앉아 있던 이현은 어느 순간, 누군가의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낯익은 실루엣.길게 풀어 내린 머리카락. 얇은 트렌치코트. 그리고 작은 숨소리. 유진이었다.그녀는 천천히 이현에게 다가왔다.그 눈빛은 이상하게 차분했다.울지도, 웃지도 않는 얼굴."찾을 줄 알았어요."유진이 말했다.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묘하게 날이 서 있었다.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그저,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왜 이렇게까지 하세요.""왜 유리 언니만 봐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봤다."저도… 대표님을 좋아했어요."말끝이 떨렸다.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말을 이었다."처음부터요. 처음 출근하러 왔던 날, 처음 인사했을 때부터…""나는, 언니처럼 조심스럽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이렇게라도"이현은 그제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유진 씨."짧게, 단단하게."그날 밤, 전부 기억나요."유진의 손끝이 떨렸다."알아요. 저였다는 거…""근데, 그래도 괜찮았잖아요.""그래도,나를 안아줬잖아요.""그래서 나는…"이현은 고개를 저었다."그건 착각이었어요.""나는 유리 씨를 사랑합니다.."그 말은 잔인했다.하지만, 더 이상의 오해를 남기지 않으려면 지금 말해야 했다."유리 씨를, 그 사람만을 사랑했어요.""그 얼굴이 아니라, 그 사람이었어요.""그래서, 지금 여기 없는 거겠죠.""나를 알아보지 못한 사람을, 그 사람은… 용서할 수 없을 테니까."유진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잠시 후, 그녀는 한 발 물러섰다."알겠어요."짧은 대답. 담담한 눈빛."그래도 후회는 안 할 거예요.""그 순간만큼은, 대표님을 안고 있었으니까."그리고 유진은 돌아섰다.트렌치코트 자락이 흔들렸다.밤바람이 조용히 그녀를 감쌌다.아무 말도 없이. 아무 눈물도 없이. 그렇게 유진은 사라졌다.이현은 벽에 기댄 채 천천히 주저앉았다.손끝이 떨렸다.심장도, 생각도, 모든 게 조용히 무너지고 있었다.남은 건 오직 하나였다."유리 씨…"그녀를 찾아야 했다.
방 안엔 시계 소리만 가득했다.짹짹거리는 새소리도, 핸드폰 진동도, 누군가의 말 한마디도 들리지 않았다.그녀는 작은 원룸에 머물고 있었다.평소엔 일하러 잠깐 머무는 공간이었지만,지금은 유일하게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이었다.커튼을 반쯤 닫고, 창을 열었다.기대 앉은 유리는 창밖 골목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머릿속은 생각으로 가득했지만, 이상하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조용하네.”그녀가 속삭였다. 그 말조차도 허공으로 흘러 사라졌다.테이블 위엔 하루 전까지 쓰던 청소 장비가 그대로 있었다.구겨진 장갑, 정리하지 않은 천들, 방전된 무선 청소기.유리는 그것들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뻗어 장갑 하나를 들었다.그 장갑은, 이현의 사무실을 청소했던 날 처음 껴봤던 것이다.그의 책상 옆에 쌓여 있던 먼지, 정리되지 않은 서랍,그리고… 조용히 지켜보던 눈빛.그 모든 게 지금은 먼 기억 같았다.휴대폰은 하루 종일 진동조차 울리지 않았다.그녀가 알림을 꺼놨기 때문이었다.문자를 보지 않아도 전화가 와도 받지 않아도그 사람이 자신을 얼마나 애타게 찾고 있을지 사실은 다 알고 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리는 그냥, 버티고 싶었다.“지금은… 어떤 말도 듣고 싶지 않아.”낮이 지나고 해가 기울어가면서,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커피포트를 켜고, 작은 머그에 물을 붓고, 어깨에 걸쳤던 담요를 툭 떨어뜨렸다.거울 앞에 섰다.거울 속 그녀의 얼굴은 분명 유진과 같았다.그토록 많은 사람이 헷갈려 하던 그 얼굴.심지어, 그 사람조차도. 그게 분했다.아팠고, 무서웠다.‘내가, 그 사람이 안아준 얼굴이었을까.아니면 그냥, 그 얼굴이라서였을까.’그녀는 그날 밤 이후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눈물보다 깊은 상처는, 오히려 더 조용히 사람을 잠식했다.그저 먹지 않았고, 자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밤이 깊어지자 핸드폰을 다시 들었다.문자함엔 이현의 메시지가 여럿 도착해 있었다.“유리 씨, 괜찮으세요?”
“사랑은 가까워질수록, 더 뚜렷해지는 진짜를 요구한다.”햇빛이 창문을 타고 들어왔다.커튼 사이로 퍼지는 아침빛은 유난히 따뜻했지만, 방 안은 적막했다.이현은 천천히 눈을 떴다.머리가 무거웠다. 몸도, 마음도 이상하게 둔했다.옆에 누운 사람의 실루엣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긴 머리카락, 하얀 목덜미, 그리고 이불 위로 드러난 맨 어깨.그는 순간 미소 지으려다, 멈췄다.무언가 조금 달랐다. 기억은 흐릿하지 않았다.어젯밤, 분명 서로를 껴안았고, 사랑한다고 말했고, 숨결을 나눴다.그런데 그녀가 유리였다던 확신이 이상하게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그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옆에 누운 여자는 눈을 감고 잠든 채였다.그 얼굴.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어딘가 미묘하게 달랐다.입술의 곡선, 눈꼬리의 각도, 미간의 미세한 주름까지.유리는 이런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다.이현의 손끝이 천천히 그의 핸드폰을 향했다.잠금화면을 켰다.가장 최근 보낸 메시지‘할 말 있어요. 지금, 집으로 와주실 수 있나요?’그는 잠시 멈췄다.“…내가, 이 문자를 보냈던가…?”기억이 없었다. 메시지를 쓴 적이 없었다.그제야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었다.이불을 걷고 일어난 여자.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미소 지었다.“일어나셨어요?”그 말투는 유리의 말투였다.하지만, 유리의 눈빛이 아니었다.이현은 숨을 고르며 말했다.“…유진 씨죠.”그녀의 미소가 순간 굳었다.그리고, 다시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네. 맞아요.”이현은 손에 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그의 손등에서 천천히 힘이 빠졌다.“…왜 그런 짓을 했어요?”“그 밤은, 저한테도 필요했어요.”유진은 담담하게 말했다.“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느낀 적 없으세요?그 사람이 절대 몰라줄 걸 알면서도 그래도, 가지고 싶었던 감정.”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그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그의 가슴 안엔 뒤늦게 찾아온 진실보다유리의 얼굴이 무섭게 떠오르고 있었다.그녀는 이걸 봤을까.이현은
‘할 말 있어요. 지금, 집으로 와줄 수 있어요?’메시지는 짧았다. 그 어떤 장식도, 이모티콘도 없이 문장 끝조차 마침표 하나 없이 툭, 던져진 말.그럼에도 불구하고그 말은 유리의 마음을 오래도록 붙잡았다.이현의 번호였다. 평소와 다름없는 숫자 배열,익숙한 진동음, 몇 번이고 주고받던 메시지창.하지만 오늘따라 그 한 문장이 다르게 느껴졌다.'지금.'그 단어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유리를 향하고 있었다.밤공기가 차가웠다.초봄의 냄새는 따뜻하지도, 완전히 춥지도 않았지만, 유리는 괜히 겉옷을 한 번 더 여몄다.가로등 아래, 루체빌의 16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안.숫자는 조용히 오르고 있었고, 그 짧은 시간에도 마음은 수십 번을 오갔다.설렘. 기대. 그리고 아주 미세한 불안.‘혹시 무슨 일 생긴 건 아닐까.’‘아니면… 나한테 무슨 이야기 하고 싶은 걸까.’문 앞에 섰을 땐, 손끝이 먼저 멈칫했다.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기도 전,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평소 이현이 철두철미하게 잠그던 그 문이 오늘만은 조용히 열려 있었다.‘혹시 까먹은 걸까?’고개를 갸웃하며 살짝 문을 밀었고, 문은 작은 소리도 없이 열렸다.거실은 어두웠다. 불은 켜져 있지 않았고, 익숙한 라벤더 향이 코끝을 스쳤다.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유리는 신발을 벗으며 괜히 숨소리를 죽였다.살금살금, 소리 나지 않게 방 안으로 향했다.그러다 멈췄다.방 안에서 낮은 웃음소리와 숨소리가 들렸다.익숙한 목소리. 낮고, 부드럽고 사랑을 속삭이던 그 어조.“…유리야, 사랑해.”그 말이 들리는 순간, 유리의 걸음이 멈췄다.문틈은 아주 조금 열려 있었다.마치 일부러 누군가 손을 대고 멈춘 듯.그 틈 사이로, 조명이 어슴푸레 비추는 방 안.그리고 그 안에서 보인 모습.남자의 품에 안긴 여자.흘러내린 머리카락, 맨살이 드러난 어깨.밀착된 두 사람의 숨결.그리고 그 얼굴.그건, 유리의 얼굴이었다.하지만 유리는 지금, 문밖에 서 있었다.그 안에 있는 건
“좋은 사람이라는 이유로 마음까지 줄 순 없다.”금요일 오후, 이현의 사무실 복도.이현은 오후 미팅을 마치고 복귀하던 중 창가 쪽 작은 회의실 앞에서 유진과 마주쳤다.평소처럼 단정하게 묶은 머리, 살짝 바른 립컬러,그리고 여전히 흐트러짐 없는 태도.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달라져 있었다.“…회의는 잘 끝나셨어요?”유진이 먼저 말을 걸었다.“네. 유진 씨는 점심 잘 드셨어요?”“네. 좋은 이야기 많이 나눴어요. 유익한 시간이었죠.”말은 평온했지만, 그 '좋은 이야기'라는 말 한 마디에무언가 짙게 가라앉은 감정이 묻어 있었다.사무실로 돌아온 이현은 잠시 앉아있던 의자에서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았다.그리고 생각했다.‘무언가가 끝났다는 걸…그 사람보다 내가 먼저 느낄 수 있다면, 그건 내 책임이다.’그 책임이 지금 자신에게로 흘러들고 있었다.저녁이 가까워질수록, 유진의 움직임은 더 단정해졌고말투는 더 매끄러워졌지만 이현은 느낄 수 있었다.그녀가 조용히 선을 그었다는 것.그건 단절이 아니라, 정리였다.이현은 책상에 놓인 유진의 기획안 메모를 들여다보았다.간결하고 정확한 필기체. 철저하게 감정은 배제된 문장들.그 안에 어떤 마음도 실려 있지 않았다.퇴근 직전, 이현은 유진에게 다가갔다.“유진 씨.”“네, 대표님.”“시간 괜찮으시면, 잠깐 얘기 나눌 수 있을까요?”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회의실로 먼저 들어갔다.닫힌 공간 안, 짧은 정적.“유진 씨… 오늘, 유리 씨와 점심 드셨다고 들었어요.”그 말에 유진은 조용히 웃었다.“네. 저희끼리도 얘기 나눌 시간쯤은…있어야 하지 않겠어요?”“그랬겠죠.”이현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왜냐면,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그저 ‘미안하다’는 말 외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대표님.”“네.”“혹시 지금, 마음이 정해지셨나요?”그 질문은 칼처럼 날카롭지 않았다.오히려 많이 참은 사람이 마지막으로 꺼내는 말처럼 들렸
금요일. 회사 전체가 바쁘게 돌아가는 날이었다.출시 전 마지막 QA 일정이 몰린 탓에 디자인팀과 개발팀 모두 예민한 공기 속에 움직이고 있었다.유진도 책상 앞에서 계속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지만,집중은 쉽지 않았다. 그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오전 일정은 외근이라고 했지만,어디로 향했는지, 누구를 만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아니, 말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대답이었다.점심시간. 유진은 일부러 사무실에 남았다.책상 위 핸드폰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무의식적으로 화면을 켰다 껐다.이현에게 메시지를 보낼까,밥은 드셨냐고 물어볼까,그런 말조차 이제는 너무 늦어버린 것 같았다.그리고 그 순간,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대표님, 아까 그 파일 말씀하신 거 다시 확인해드릴게요.”유진은 고개를 돌렸다.이현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유리.서로 거리를 두고 걷고 있었지만, 그 거리 안에는 너무 많은 말들이 묻어 있었다.이현이 웃었다. 평소와 같은 미소였지만,유진은 그가 그 미소를 ‘누구에게’ 건넸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사무실로 돌아와 유진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이상했다. 자신이 흔들리는 이 감정이질투인지, 외로움인지조차 이제는 분간하기 어려웠다.‘내가… 놓친 걸까?’아니, 애초에 잡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오후 5시. 디자인팀 회의 중,이현은 유리와 짧게 대화를 나누고 회의실을 나갔다.유진은 남아 있던 자료를 정리하며 이현이 앉았던 자리를 잠시 바라봤다.그가 유리와 말을 나눌 땐 미묘하게 눈을 마주쳤고,서로 말이 끝나기 전부터 웃고 있었다.그건 유진이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시선이었다.그날 저녁, 유진은 루체빌 근처 카페에 혼자 앉아 있었다.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그리고 수십 번쯤 했던 생각을 다시 반복했다.‘유리는… 그 사람 앞에서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유리는 ‘청소’를 하러 갔지만, 그 공간은 단지 집 안이 아니라이현이라는 사람의 마음 한 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