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이현은 창문을 조금 열어두고 커피를 내렸다.
은은한 향이 방 안에 퍼졌고, 그 사이로 봄기운이 실려 들어왔다.
‘오늘도... 오는 거 맞겠지?’
핸드폰 화면엔
‘정기 청소 예약: 오늘 오후 3시, 유리’
라는 알림이 또렷하게 떠 있었지만,
그는 괜히 몇 번이고 그 문장을 다시 확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초인종이 울렸다.
띵동~그는 재빨리 걸어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환하게 웃는 유리를 보았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반짝이게 해드릴게요.”
“...어서 오세요.”
그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작아졌다는 걸 느꼈다.
그녀가 방 안으로 들어서는 짧은 순간 동안,
온도가 바뀌는 것처럼 방 안의 공기가 살짝 달라졌다.
유리는 능숙하게 장비를 꺼내 들고, 가볍게 몸을 풀었다.
“오늘은 창가 쪽부터 시작해볼게요. 햇빛이 좋으니까.”
그녀는 햇빛이 잘 드는 쪽을 먼저 정리한다는 고집이 있었다.
이현은 그걸 알고 있었다. 이제는 그녀의 청소 루틴이 익숙해졌다.
어디를 먼저 닦고, 어떤 순서로 움직이고,
어디쯤에서 슬며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쉬는지까지.
그녀가 창문을 닦을 때마다 햇빛이 유리 위에 맺히고,
손끝에 반짝이는 물방울이 일었다.
그 모습을 멀찍이 바라보며 이현은 마음속으로 조용히 되뇌었다.
‘청소 말고 다른 모습도...보고 싶다. 데이트 하자고 하면 부담느끼겠지?’
너무 빠르단 걸 안다. 그녀에 대해 아는 것도 많지 않다.
하지만 매주 이렇게 그녀를 맞이하고,
그녀가 다녀간 방을 멍하니 한참 바라보는 자신을 보면 그냥 ‘고객과 청소 전문가’로는 더는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말은...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커피잔을 하나 더 꺼내고,
그녀가 손을 털고 돌아보면 미소로 응답해주는 것밖에는.
“요즘 청소 요청 많으시죠?”
이현이 무심하게 물었다.
“조금요. 봄 되니까 다들 대청소 모드인가 봐요.”
“그래도... 여기 오는 날은 빠지지 않으시네요.”
“정기 예약이잖아요. 약속은 지켜야죠.”
그녀의 말에 이현은 웃었다.
‘약속’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기분 좋게 들릴 줄 몰랐다.
“혹시... 다른 데서 일하시다 보면
아, 여긴 정말 하기 싫다. 그런 곳도 있어요?”
“음...” 유리는 고개를 기울였다.
“사실... 그런 공간보다, 말 없이 시선만 주는 분이 더 힘들어요.
제가 막 움직이는데, 아무 말 없이 계속 보는 분들 있거든요.”
그 말에 이현은 순간 움찔했다.
‘...혹시 나?’
“그냥... 제가 불편하게 만든 거면 말해 주세요.”
“아뇨아뇨! 대표님은 달라요.
그냥... 조용히 있으시지만, 시선이 따뜻하니까요.”
그 말은 농담도 아니었고, 의식한 것도 아니었는데, 이현의 심장이 작게 툭, 하고 울렸다.
청소를 마친 뒤, 유리는 평소처럼 가볍게 정리하고 명함이 담긴 케이스를 꺼내려다 말고 웃었다.
“정기 고객님이시니까, 이건 이제 필요 없죠?”
“그럼요. 이젠 명함 없어도 외우고 있거든요.”
그녀가 문을 나서는 순간, 이현은 다시 한 번 말하고 싶었다.
‘혹시, 청소 말고도... 잠깐 커피 한 잔, 어때요?’
하지만 그 말은 목구멍까지만 올라왔다가 조용히 삼켜졌다.
아직은 이른 것 같아서.그리고 그녀가 웃으며 “다음 주에 뵐게요!”라고
말하는 그 순간이, 그 무엇보다 소중하게 느껴졌기에.
문이 닫히고 나서도 그는 그녀가 머물렀던 자리를 바라봤다.
바닥은 말끔했고, 창은 투명했다.
하지만 어쩐지 그보다 더 오래 남는 건, 그녀가 건넨 미소 하나였다.
‘다음엔... 말할 수 있을까.’
그 생각은 이현의 마음 한 켠에서 조용히 숨을 쉬었다.
말하지 않았지만, 분명하게 존재하는 설렘처럼.
* * * * * * * * *
루체빌 오피스텔 1603호.
이 주소를 검색하면 이제 지도 앱에서 ‘즐겨찾기’로 먼저 뜰 정도다.
처음 갔을 땐 낯설었고, 두 번째는 어색했지만 세 번째부터는 괜히 설렜다.
그리고 지금은... 음, 조금 이상할 만큼 마음이 간다.
“오늘도, 늦지 않게 가야지.”
유리는 도착하기 15분 전에 이미 건물 앞에 도착해 있었다.
시간을 정확히 지키는 게 프로 정신이라며 늘 말해왔지만,
사실 요즘은 조금 다르다.
‘그 사람이 먼저 문 열고 있을까?
아니면 오늘도 커피 내리고 계실까?’
그런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리고… 그건 분명히 청소 때문은 아니었다.
띵동~초인종을 누르자마자 문이 열렸다.
정확히, 두 번 울릴 틈도 없이.
이현은 오늘도 편안한 셔츠 차림으로 그녀를 맞이했다.
그의 손에는 막 내려놓은 듯한 머그잔이 들려 있었다.
“어서 오세요. 오늘도 정각이네요.”
“네, 약속은 지켜야죠.”
유리는 가볍게 웃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문득,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현관 옆 작은 신발장 위에,
누군가를 기다리듯 멀끔하게 정리된 슬리퍼 한 켤레.
그 옆에는 향긋한 캔들까지 피워져 있었다.
“...어? 이거 새로 사셨어요?”
유리는 슬리퍼를 가리키며 물었다.
“네. 유리님 오실 때 쓰시라고요. 매번 맨발로 다니시길래.”
순간, 유리는 뺨이 살짝 뜨거워졌다.
그 말이 이상하게 자꾸 마음에 걸렸다.
'오실 때', '쓰시라고', '매번'
그는, 그녀가 오는 걸... 신경 쓰고 있다는 뜻일까?
“감사해요. 저... 그런 거 잘 못 느끼거든요. 배려받는 거.”
“그러셨어요?”
“네. 늘 일로 만나니까, 신발 하나에도 괜히 감동이에요.”
이현은 아무 말 없이 웃었다.
그 웃음엔 설명도, 과장도 없었지만
그녀는 왠지 그 표정에 ‘기다렸다’는 감정이 실려 있는 것 같았다.
청소는 익숙한 루틴으로 진행됐다.
하지만 유리의 마음은 오늘따라 조금 산만했다.
서랍 정리를 하다가 괜히 손이 멈추고,
침대 커버를 정리하다 괜히 창밖을 한참 바라보기도 했다.
‘대표님이 나 기다린 걸까...
아니면 그냥 정기 청소 손님이니까 그런 걸까?’
마음 한켠에서 기대와 조심스러움이 줄다리기를 했다.
확신할 수 없지만,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그러면 안 되는데 그래도... 괜히 기분이 좋았다.
“유리님, 오늘은 창밖 많이 보시네요.”
“아... 그런가요? 햇살이 좋아서요.”
거짓말이었다. 햇살은 늘 좋았지만,
오늘은 그녀가 더 많이 흔들리고 있었다.
청소를 마친 유리는 장비를 정리하며 가볍게 물었다.
“그런데 요즘... 다른 청소 예약은 안 하시나 봐요?”
“네. 유리님만 옵니다.”
“아, 네... 그렇군요.”
그 대답이 왜 이렇게 마음에 와닿는 걸까.
그녀는 웃는 척하며 고개를 숙였고,
이현은 유리의 표정 속 아주 미세한 기쁨의 결을 느꼈다.
문을 나서기 전, 유리는 신발을 신으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다음 주에도... 슬리퍼 예쁘게 놓아둘 거죠?”
“당연하죠. 유리님 자리가 됐으니까요.”
그 말에, 유리는 고개를 돌려 웃음을 터뜨렸다.
'자리.' 그 단어는 오늘 그녀에게 가장 예쁜 말이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순간,
유리는 핸드폰을 꺼내 메모장을 열었다.
오늘도 별거 아닌 듯 특별했던 순간들을 적어두기 위해.
현관 슬리퍼. 따뜻한 커피. 웃을 때 눈이 반달 되는 거.
“자리가 됐으니까요.”
그녀는 가볍게 숨을 쉬었다. 그리고 조용히, 한 문장을 적었다.
혹시... 나 기다리셨어요?
말하지 않았지만, 오늘따라 대답은 이미 들은 것 같았다.
평일 저녁. 루체빌의 불은 늘 그랬듯 따뜻하게 켜져 있었지만,그 안을 채우는 공기는 어느 날보다 조금 더 무거웠다.이현은 귀가하자마자 양복 상의를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어두고, 말없이 노트북을 열었다.유리는 부엌에서 조용히 국을 데우고 있었고,그의 숨소리 하나에도 조심스레 마음을 기울였다.식탁에 앉았지만, 그날의 밥상엔 말이 적었다.“오늘 회의 많았어요?”유리가 먼저 조심스레 물었다.“네. 보고도 길고… 신제품 일정이 좀 당겨졌어요.”이현은 젓가락을 들었지만 숟가락에 밥을 올리기까지 조금 오래 걸렸다.그의 손끝은 피곤했고, 눈빛엔 뭔가 정리되지 않은 무게가 내려앉아 있었다.유리는 그를 바라보다 더 묻지 않기로 했다.저녁을 마치고 이현은 노트북 앞에 다시 앉았고,유리는 설거지를 마친 뒤 거실 소파에 조용히 앉아 책을 폈다.같은 공간에 있지만 서로가 다른 리듬으로 앉아 있는 시간.그건 이제 익숙한 함께의 형태였지만, 오늘만큼은 그 틈이 살짝 벌어진 것 같았다.이현은 화면을 내려다보다 문득 말을 꺼냈다.“유리 씨.”“응.”“요즘… 내가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유리는 책을 덮고 고개를 돌렸다.“어떤 부분에서요?”“회사에서는 이제 ‘대표답게’ 더 많은 걸 끌어야 하고,집에 오면 당신한테 너무 무심해지는 것 같고…나 뭔가… 두 쪽 다 어중간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그 말은 조용하지만, 단단히 눌러 참았던 마음의 기울기였다.유리는 소파에서 천천히 일어나 이현 옆에 조용히 앉았다.그리고 그의 노트북 화면을 살짝 닫으며 말했다.“이현 씨. 당신이 회사에서 어떤 모습인지는 내가 다 알 수 없지만 집에서의 당신은 지금도 충분히 내 남편이에요.”“하지만…”“내가 바라는 건 일을 덜 하라는 게 아니에요. 당신이 나 때문에 스스로를 갈라놓지 않았으면 해요.”이현은 고개를 떨궜다.유리는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사람은 하루에 하나만 완벽할 수 있어요. 그게 회사일 수도 있고, 우리의 하루일 수도 있죠.나는 그 하루가
비행기는 저녁 무렵 김포에 도착했다.신혼여행 내내 따뜻한 날씨와 낯선 풍경을 걸어온 두 사람은짐이 가볍지 않음에도 발걸음만큼은 한결 느슨하고 여유로웠다.택시가 루체빌 앞에 멈췄을 때, 유리는 창밖으로 펼쳐진 익숙한 거리의 불빛을 한참 바라보다 말했다.“집이네요.”이현은 짧게 웃었다.“그러게요. 다녀온 것 같기도 이제야 진짜 시작하는 것 같기도 해요.”현관 앞에 서자, 유리가 먼저 문을 열었다.익숙한 소리. 익숙한 냄새. 그 안에서 두 사람은 동시에 ‘돌아왔다’는 감각을 조용히 맞았다.루체빌 거실. 가방은 그대로 바닥에 놓였고, 두 사람은 말없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오랜만에 맞이한 그 공간은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만,그 속에서의 마음은 분명 달라져 있었다.“여기 조명, 이제 좀 어둡게 느껴지지 않아요?”유리가 물었다.“그래요. 여행지에서 햇살이 워낙 강했으니까.”“그럼 우리, 이 조명도 조금 바꿔볼까요?”“좋아요. 결혼 후 첫 집 손보기.”둘은 그렇게, 평범한 변화의 시작을 다정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밤이 깊어갈수록 짐은 서서히 풀어졌고, 수건은 세탁기에 들어갔고,기념품은 식탁 한편에 줄지어 놓였다.유리는 여행지에서 사 온 작은 유리 종을 창가 선반 위에 올려두며 말했다.“이거, 햇빛 들어오면 맑은 소리 날 것 같아요.”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 소리 들을 때마다, 그날 골목 걷던 우리가 떠오를 거예요.”“그리고 그날 우리 마음도.”새벽 무렵, 유리는 부엌에서 조용히 머그잔을 꺼냈다.속이 허전하다는 말을 꺼내지 않아도 이현은 물을 데우고 있었다.“역시 우리, 말 안 해도 잘 통해요.”유리가 웃으며 말했다.“함께 산다는 게 그런 거잖아요. 같이 안 말해도, 같은 쪽으로 느껴지는 것.”이현은 머그잔을 건네며 말했다.“내일부터는 출근이에요.”“그러네요. 다시 일상.”유리는 머그잔을 양손으로 감싸쥐고 창밖을 바라보았다.“근데 이현 씨. 이제부터는 일상도 좀 다른 것 같지 않아요?”“어떤 점에서요?”
비행기는 제시간에 도착했다.창밖으로 펼쳐진 바다는 서울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넓고 깊어 보였고,하늘은 말 그대로 ‘휴가를 위한 색’이었다.유리와 이현은 공항에서부터 손을 잡은 채 이동했다.오래 걸리지 않는 거리였고,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은 서로에게 익숙하지 않은 나라, 익숙하지 않은 시간대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었다.숙소는 바다와 가까운 언덕 위에 있었다.테라스가 넓었고, 하얀 커튼이 바람을 따라 천천히 흩날렸다.짐을 내려놓자마자, 유리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이 바람… 이현 씨, 여기 소리 들어봐요.”이현은 뒤에서 조용히 다가와 그녀 옆에 섰다.둘은 말없이 테라스 밖 바람소리와 파도소리를 들었다.조용하다는 말보다, 평화롭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순간이었다.점심을 먹기 위해 작은 로컬 식당을 찾았고, 유리는 메뉴판을 보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음… 고수 들어간 음식 괜찮아요?”이현은 웃었다.“내가 고수 잘 못 먹는 거 그새 잊었어요?”“아, 맞다. 그때 쌀국수집에서도 몰래 빼줬었죠.”“결혼했다고 입맛까지 같아지는 건 아니니까.”유리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맞아요. 다르다고 느끼는 게, 같아지려 애쓰는 것보다 훨씬 사랑스럽네요.”그 말은 오랜 연애보다 더 깊은 이해였다.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햇살은 점점 부드러워지고 있었고, 이현은 마트에 들러 유리에게 아이스크림 하나를 건넸다.“결혼 첫 여행 기념. 아이처럼 하나씩.”유리는 아이스크림을 받아들며 말했다.“그럼 오늘 하루, 우리 둘 다 아이처럼 굴어요.”“이미 당신 눈빛이 초등학교 방학 첫날이에요.”저녁 무렵. 숙소 테라스.두 사람은 나란히 발을 내밀고 바람을 맞으며 앉아 있었다.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조용히 입을 열었다.“이현 씨, 나 오늘 하루종일… 계속 당신이 낯설게 느껴졌어요.”“왜요?”“평소보다 말이 적고, 주변 잘 챙기고, 작은 거에 더 웃고 그런 당신을 보면서,'아, 이 사람은 내가 아직 다 모르는
결혼식 당일. 맑고 단정한 하늘 아래,서울의 작은 정원 예식장은 이른 아침부터 조용한 기척들로 분주했다.꽃은 유리의 취향대로 심플한 들꽃 위주로 꾸며졌고,웨딩홀 입구엔 두 사람이 직접 손으로 적은 간판이 세워져 있었다.“누구도 대신하지 않은 마음, 우리가 끝까지 함께 쓴 하루.”이현은 신랑 대기실에서 화이트 셔츠 위에 재킷을 입고 있었다.공찬이 사회자 대본을 손에 들고 농담 섞인 톤으로 말했다.“이 형… 긴장했네. 딱 봐도 손에 땀 났어.”이현은 웃지 않았다.다만 정면의 거울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지금 내 마음은 단 한 가지 생각밖에 없어.”“뭔데?”“내가 저 사람 앞에 서는 순간, 절대 흔들리면 안 된다는 거.”공찬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가 말장난을 멈췄다는 건,그 순간의 감정이 장난으로는 감당이 안 된다는 걸 의미했다.유리는 신부대기실에서 드레스를 입고 앉아 있었다.거울 속의 그녀는 조용했고, 부드러웠으며,지금껏 살아온 모든 시간이 고스란히 어깨에 걸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어머니와는 이른 아침 짧은 전화로 인사를 마쳤고,이현의 어머니는 직접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한 번 정리해주고 나서 손을 꼭 잡아주었다.“내가 이현이 키우면서 한 번도 내 손으로 어깨를 만져준 적이 없는데…오늘 이렇게 네 드레스 잡아주니까 괜히 눈물 날 뻔했어.”유리는 잠시 눈을 감고 말했다.“이젠… 저 사람 어깨는 제가 감쌀게요.”결혼식은 정오 정각에 시작되었다.입장곡은 두 사람이 처음 비를 함께 맞으며 걷던 골목에서 들리던 낡은 재즈 한 곡이었다.유리의 발끝이 천천히 예식장 중앙으로 다가올 때, 이현은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다시 떴다.그 순간, 그는 단 한 사람만을 보고 있었다.그 눈빛 안엔 “사랑해”보다 더 오래 견디는 말이 담겨 있었다.‘내가 앞으로 지키고 싶은 건, 지금 저 눈동자 속에 담긴 망설임 없는 마음이다.’사회자의 멘트가 조용히 이어지고,이현과 유리는 서로의 손을 맞잡은 채 서약서를 꺼내 들었다.이현
유리는 아침 일찍 일어났다.햇살은 조용히 창문 틈 사이로 스며들었고, 식탁 위에는 전날 밤부터 펼쳐둔 메모가 놓여 있었다.‘드레스 리허설 / 7월 12일 오후 2시’그 아래엔, 볼펜으로 작게 그려진 반지 모양 낙서가 있었다.그리고 그 옆에 적힌 짧은 문장.‘이현 씨 손에 반지를 끼우는 날을 상상했다. 이젠, 그 날이 내 손끝 안에 있다.’유리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입꼬리를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오늘은 사랑을 실감하는 날이었다.드레스샵. 유리는 하얀 드레스를 입은 채, 거울 앞에 조용히 서 있었다.어깨 라인을 부드럽게 감싸는 레이스, 허리선을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실루엣,그리고 조명이 스치는 결마다 다르게 반짝이는 드레스의 표면.옷을 입은 자신을 바라보며 유리는 잠시 멈춰 섰다.자신이 여기에 서 있는 것이, 누군가를 위해 아니라‘지금의 나’를 위해서라는 걸 처음으로 온전히 실감하는 순간이었다.“이현 씨, 들어오셔도 돼요.”커튼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현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그리고 그를 바라본 순간, 유리는 웃으며 물었다.“어때요?”이현은 한참 말없이 서 있었다.그는 눈으로 천천히 유리를 바라보았다.얼굴에서, 손끝에서, 서 있는 자세에서 그녀가 지금 얼마나 단단해졌는지를 그는 알고 있었다.“예쁘다는 말로는 부족해요. 지금 당신은… 이름보다 먼저 ‘조유리’ 같아요.”그 말에 유리는 작게 숨을 쉬었다.“이상하게, 오늘 따라 더 떨리는 것 같아요. 이제 다가오고 있구나, 싶어서.”이현은 그녀에게 다가가 거울 앞에서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감싸쥐었다.“떨려도 돼요. 우린 오래 준비했고, 그만큼 천천히 다가왔으니까.”“그리고 지금, 당신을 마주한 내 앞엔 확신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요.”드레스샵을 나선 두 사람은 근처 한강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드레스에서 갈아입은 유리는 다시 편안한 옷차림으로 돌아왔지만,이현의 눈엔 여전히 그녀가 ‘드레스를 입은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식장 음악은 뭐로 할까요?”
아침 식탁 위에 놓인 달력.6월의 마지막 줄이 조금씩 흐려져 가고 있었다.이현은 커피를 내리며 달력의 한 칸을 오래 바라보다가 볼펜을 들어 조용히 작은 원을 그렸다.‘7월 28일’그는 조심스럽게 옆 숫자들까지 채워넣기 시작했다.‘장소 미팅’‘스튜디오 방문’‘청첩장 초안’그 하나하나가 마치 수험생이 계획표를 적듯 단정했고, 그 단정함 속엔 묘한 설렘이 묻어 있었다.유리는 부엌 문턱에 기대어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물었다.“드디어 본격적으로 시작해요?”이현은 돌아보지 않고,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이제 정말 미룰 수 없게 됐죠. 우리 약혼 반지 낀 지, 벌써 한 달이에요.”유리는 조용히 그 옆에 다가와 앉았다.“나는 사실… 그날 이후로 ‘결혼’이란 말을 입에 담기 조금 조심스러웠어요.”“왜요?”“지금까지 너무 많은 말들을 설명해오느라 지쳤나 봐요.근데 이젠… 아무 말 안 해도, 그냥 그날이 와줬으면 좋겠어요.”그 말은 다정한 한숨 같았다. 이현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그러면, 오늘부터는 우리가 말하기보다 하나씩 해나가요.”“그래요. 첫 스텝은… 뭐부터 해요?”“우선, 엄마한테 말씀부터 드려야겠죠.”그 말에 유리는 작게 웃었다.“그게 첫 번째 미션이군요.”그날 오후, 두 사람은 이현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도예 공방을 찾았다.조용한 음악, 흙냄새, 그리고 오랜 시간 손끝으로 물건을 빚어온 공간의 기운이 두 사람의 긴장을 잠시 덜어주었다.“이현아. 유리 씨.”어머니는 먼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유리는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잘 지내셨어요, 어머님.”“그동안 오랜만이네. 근데… 오늘은 뭔가 얼굴빛이 다르다?”이현은 조용히 엄마 옆에 앉았다.“엄마. 우리, 정식으로 결혼 준비 시작하려고요.”그 말에 어머니는 한참을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내가 너한테 바랐던 건 성공도 아니고, 회사도 아니었어.그저 옆에 누군가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길 바랐지.”유리는 조용히 숨을 들이
그날 밤, 이현은 평소보다 늦게 퇴근했다.책상 위에 올려둔 커피잔은 이미 식어 있었지만,잔향만은 여전히 그의 손끝을 붙잡고 있었다.유진의 말투, 눈빛, 그리고 마지막에 남긴 한 마디.“내일은 대표님 차례예요.”그 말은 장난처럼 가볍게 흘러나왔지만,묘하게도, 이현의 가슴 한구석을 오래도록 눌렀다.그녀는 확실히 직진하는 사람이었다.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단정한 옷차림에 숨겨진 강단,눈을 피하지 않는 솔직한 태도,말보다 진심이 먼저 도착하는 사람.하지만 이현은, 아직 확신할 수 없었다.그 감정의 방향이 어디로
이현의 사무실 인근, 회사 사람들이 자주 찾는 브런치 카페.점심시간보다 조금 빠른 11시 40분,이현은 약속보다 조금 먼저 도착해 있었다.잠시 후, 유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단정한 셔츠에 차분하게 묶은 머리, 가벼운 립스틱.하지만 오늘의 유진은 어딘지 조금 더 여성스럽고 부드러워 보였다."대표님, 오래 기다리셨어요?""아뇨. 저도 방금 왔어요."둘은 마주 앉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하나씩 집어 들었다.초반의 대화는 주로 업무적인 이야기로 흘러갔다.어제 있었던 코드리뷰, 팀 내 협업 프로세스, 작은 UI 수정 건까
이현의 회사, '엔프로소프트'는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신작 게임의 개발이 본격화되며 프로젝트 규모가 두 배로 커졌고,자연스럽게 사람을 더 충원해야 하는 시점이 된 것이다."대표님, 오늘 개발팀 면접 일정 있으신 거 아시죠?"비서의 말에 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중에 괜찮은 사람 있으면 좋겠네요."오후가 되자 면접이 하나둘 이어졌고,그렇게 개발팀 마지막 순서가 호출되었다.문이 열리고, 지원자가 들어섰다.이현은 서류에 시선을 두고 있다가,고개를 드는 순간 손에 들고 있던 펜을 놓칠 뻔했다.그녀는 유리였다
유리는 오늘도 청소 가방을 등에 메고, 익숙한 듯 발끝에 힘을 주며 건물 입구로 향했다.‘루체빌 오피스텔 1603호. 오후 3시 예약.’아침에 확인했던 알림이 떠오르자, 그녀는 자연스레 속으로 중얼거렸다.“3시. 좋아, 딱 햇살 잘 드는 시간.”햇볕이 유리창을 타고 떨어지는 오후 세 시의 방은 대체로 기분이 좋다.먼지도 반짝이고, 바닥도 더 잘 닦이고,무엇보다 사람 마음도 괜히 가벼워지는 시간대랄까.“오늘도 반짝반짝하게 만들어 드려야지.”혼잣말을 하며 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등에 멘 가방 속에는 각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