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청소 요청지가 오랜만에 낯선 동네였다.
햇살이 잘 드는 아파트 12층,
주방은 넓었고 거실엔 분홍빛 쿠션이 가득했다.
“따님이 있으신가 봐요.”
유리는 핑크색 인형이 놓인 소파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자잘한 먼지를 흡입기로 쓸어내면서, 머릿속은 오히려 고요했다.
정기 예약 이외의 고객을 맡는 건 오랜만이었다.
그동안은 스케줄 대부분이 루체빌 1603호.
이현의 공간이 거의 유리의 주간 루틴이 되다시피 했으니까.
‘그러고 보면 요즘, 다른 집 느낌이 좀 낯설다.’
허리를 숙이다가, 폰이 진동했다.
[이현]
유리님, 혹시 방향제 병에 붙인 포스트잇… 직접 쓰신 거예요?
순간, 손끝이 멈췄다. 문자 하나였을 뿐인데,
그 이름 석 자가 공간 전체의 온도를 바꾸는 것처럼 느껴졌다.
유리는 천천히 폰을 들여다봤다.
메시지는 짧았고, 아주 사적인 내용도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 가슴이 간질거릴까.
‘직접 썼죠. 그걸 누가 대신 써줘요...’
답장을 하려다 말고, 그냥 웃어버렸다.
이름만 봐도 이렇게 마음이 붕 뜨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유리]
네. 손글씨 별로죠?
사실... 조금 부끄러웠어요.
보내고 나서 괜히 후회가 됐다.
너무 가볍게 쓴 건가, 아니면… 아예 답장을 안 했어야 했나?
하지만 곧.
[이현]
아니요, 그 글씨 덕분에 그 병이 더 오래 남을 것 같아요.
유리님 손끝이 묻은 것처럼요.
‘유리님 손끝이 묻은 것처럼.’
유리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거실은 여전히 정리 중이었고, 소파 위에 먼지 한 톨 없이
닦아낸 인형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지만 그 순간 유리의 마음은,
정리되지 못한 감정들로 꽤나 어질러져 있었다.
청소를 마친 후, 의뢰인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다 유리는 잠깐 걸음을 멈췄다.
폰 화면을 다시 켜고, 그의 메시지를 한 번 더 읽었다.
딱히 특별한 문장은 아니었는데,
읽을수록 그가 그녀를 아주 조용하고 섬세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문득, 다음 주 루체빌 스케줄이 떠올랐다.
벌써 가고 싶어졌다.
집에 돌아오는 길.
버스 창밖으로 넘어가는 햇살을 보며 유리는 생각했다.
‘그 사람은, 내 청소 루틴의 한 칸이 아니라 마음속 어디쯤 깊이 들어와 있었구나.’
그걸 오늘에서야 제대로 알았다.
그리고, 그런 그를 조금 더 보고 싶어졌다.
'그런 마음을… 혼자만 안다는 건, 꽤 설레면서도 외로운 일이야.'
하지만 유리는 아직 그걸 말로 꺼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다음 청소날,
그를 위한 새로운 뭔가를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번엔 말없이 두고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 * * * * * * * *
오전 내내, 유리는 바느질을 했다.
평소라면 청소 도구 손질로 시간을 보냈겠지만,
오늘은 마음이 손끝까지 따라왔다.
네이비 체크 무늬 천. 가볍고 흡수 잘 되는 리넨 원단.
가장자리를 조심스럽게 접고, 실로 한 땀씩 감아 마무리했다.
‘딱히 특별한 의미는 없고요, 그냥… 청소하다 땀 닦으시라고.’
그렇게 말할 생각이었다.
너무 무겁게도, 그렇다고 너무 가볍게도 들리지 않게.
마음은 늘 조심스럽고, 그 조심스러움이 때로는 가장 진심일 때가 있다.
루체빌 1603호 문 앞에 섰을 때,
유리는 손바닥 안에서 수건이 담긴 작은 봉투를 한 번 꼭 쥐었다.
띵동~ 문이 열렸다.
이현은 오늘도 따뜻한 미소로 그녀를 맞이했다.
그런데 왠지 오늘은 더 반가운 눈빛이었다.
“어서 오세요. 오늘은 좀 늦으신 줄 알았어요.”
“5분 일찍 온 거예요.”
“그래요? 5분이 길게 느껴졌나 봐요.”
그 말에 유리는 순간 가슴이 콩 하고 울렸다.
이현의 말 한마디가, 요즘 자꾸만 그런 식으로 그녀의 평정을 흔들었다.
청소는 평소처럼 흘러갔다.
이젠 어떤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도 익숙해졌고,
물걸레질을 시작하면 이현은 항상 부엌 근처로 조용히 자리를 옮겼다.
마치 그녀의 동선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한 배려.
그런 섬세함이 유리는 좋았다.
정리를 마치고,ㅜ가방을 닫기 직전.
유리는 손을 뻗어 작은 종이봉투를 꺼냈다.
“이거...”
“...?”
“사실 그냥 드리려고 했는데, 타이밍을 놓쳤어요.”
이현은 고개를 갸웃하며 봉투를 받아들었다.
조심스럽게 열자, 안에는 손으로 정성껏 만든 수건이 있었다.
은은한 풀 냄새와 함께, 끝자락에 작은 자수가 수줍게 놓여 있었다.
‘Y.’
유리. 혹은, You.
그는 조용히 수건을 펼치며 말했다.
“이거... 직접 만드신 거예요?”
“네. 그냥... 청소하시다가, 아니, 아니. 요즘 부쩍 따뜻해져서 땀도 나고 그러실까 봐.”
말을 하면서도 유리는 점점 목소리가 작아졌다.
“이걸 왜 만들었을까 싶으면서도,
계속 만들고 있었어요. 손이 멈추질 않더라고요.”
이현은 말없이 수건을 만지작거렸다.
부드러운 감촉, 작은 바느질 선.
그 하나하나가 그녀의 마음을 대신하고 있다는 걸 그는 너무도 선명하게 느꼈다.
“고맙습니다....이건 아껴서 써야겠네요.”
그 말에 유리는 웃었다.
아끼지 말고 쓰세요라고 말하려다 그만뒀다.
가끔은 그 사람의 마음속 어딘가에 '아끼고 싶은 존재’로 남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문 앞에서 작별 인사를 나누려던 순간, 이현이 조심스레 말했다.
“유리님.”
“네?”
“오늘은 청소보다, 이 선물이 더 따뜻했어요.”
그 말은 길지 않았지만, 유리는 문이 닫힌 뒤에도 한참 동안 마음속에서 그 문장을 되뇌었다.
그리고, 다음 청소 날엔 ‘일’ 말고 ‘대화’도 준비해가야겠다고 조용히 마음먹었다.
그날 밤, 이현은 수건을 책상 위에 펼쳐두었다.
쓰지 않고, 그냥 바라보며. 작은 글자 ‘Y’를 손끝으로 톡톡 건드리며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Your Y. 그럴 수 있을까요?’
아직은 말하지 못했지만, 조금씩 감정은 말을 찾아가고 있었다.
문 앞에 앉아 있던 이현은 어느 순간, 누군가의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낯익은 실루엣.길게 풀어 내린 머리카락. 얇은 트렌치코트. 그리고 작은 숨소리. 유진이었다.그녀는 천천히 이현에게 다가왔다.그 눈빛은 이상하게 차분했다.울지도, 웃지도 않는 얼굴."찾을 줄 알았어요."유진이 말했다.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묘하게 날이 서 있었다.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그저,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왜 이렇게까지 하세요.""왜 유리 언니만 봐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봤다."저도… 대표님을 좋아했어요."말끝이 떨렸다.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말을 이었다."처음부터요. 처음 출근하러 왔던 날, 처음 인사했을 때부터…""나는, 언니처럼 조심스럽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이렇게라도"이현은 그제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유진 씨."짧게, 단단하게."그날 밤, 전부 기억나요."유진의 손끝이 떨렸다."알아요. 저였다는 거…""근데, 그래도 괜찮았잖아요.""그래도,나를 안아줬잖아요.""그래서 나는…"이현은 고개를 저었다."그건 착각이었어요.""나는 유리 씨를 사랑합니다.."그 말은 잔인했다.하지만, 더 이상의 오해를 남기지 않으려면 지금 말해야 했다."유리 씨를, 그 사람만을 사랑했어요.""그 얼굴이 아니라, 그 사람이었어요.""그래서, 지금 여기 없는 거겠죠.""나를 알아보지 못한 사람을, 그 사람은… 용서할 수 없을 테니까."유진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잠시 후, 그녀는 한 발 물러섰다."알겠어요."짧은 대답. 담담한 눈빛."그래도 후회는 안 할 거예요.""그 순간만큼은, 대표님을 안고 있었으니까."그리고 유진은 돌아섰다.트렌치코트 자락이 흔들렸다.밤바람이 조용히 그녀를 감쌌다.아무 말도 없이. 아무 눈물도 없이. 그렇게 유진은 사라졌다.이현은 벽에 기댄 채 천천히 주저앉았다.손끝이 떨렸다.심장도, 생각도, 모든 게 조용히 무너지고 있었다.남은 건 오직 하나였다."유리 씨…"그녀를 찾아야 했다.
방 안엔 시계 소리만 가득했다.짹짹거리는 새소리도, 핸드폰 진동도, 누군가의 말 한마디도 들리지 않았다.그녀는 작은 원룸에 머물고 있었다.평소엔 일하러 잠깐 머무는 공간이었지만,지금은 유일하게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이었다.커튼을 반쯤 닫고, 창을 열었다.기대 앉은 유리는 창밖 골목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머릿속은 생각으로 가득했지만, 이상하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조용하네.”그녀가 속삭였다. 그 말조차도 허공으로 흘러 사라졌다.테이블 위엔 하루 전까지 쓰던 청소 장비가 그대로 있었다.구겨진 장갑, 정리하지 않은 천들, 방전된 무선 청소기.유리는 그것들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뻗어 장갑 하나를 들었다.그 장갑은, 이현의 사무실을 청소했던 날 처음 껴봤던 것이다.그의 책상 옆에 쌓여 있던 먼지, 정리되지 않은 서랍,그리고… 조용히 지켜보던 눈빛.그 모든 게 지금은 먼 기억 같았다.휴대폰은 하루 종일 진동조차 울리지 않았다.그녀가 알림을 꺼놨기 때문이었다.문자를 보지 않아도 전화가 와도 받지 않아도그 사람이 자신을 얼마나 애타게 찾고 있을지 사실은 다 알고 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리는 그냥, 버티고 싶었다.“지금은… 어떤 말도 듣고 싶지 않아.”낮이 지나고 해가 기울어가면서,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커피포트를 켜고, 작은 머그에 물을 붓고, 어깨에 걸쳤던 담요를 툭 떨어뜨렸다.거울 앞에 섰다.거울 속 그녀의 얼굴은 분명 유진과 같았다.그토록 많은 사람이 헷갈려 하던 그 얼굴.심지어, 그 사람조차도. 그게 분했다.아팠고, 무서웠다.‘내가, 그 사람이 안아준 얼굴이었을까.아니면 그냥, 그 얼굴이라서였을까.’그녀는 그날 밤 이후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눈물보다 깊은 상처는, 오히려 더 조용히 사람을 잠식했다.그저 먹지 않았고, 자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밤이 깊어지자 핸드폰을 다시 들었다.문자함엔 이현의 메시지가 여럿 도착해 있었다.“유리 씨, 괜찮으세요?”
“사랑은 가까워질수록, 더 뚜렷해지는 진짜를 요구한다.”햇빛이 창문을 타고 들어왔다.커튼 사이로 퍼지는 아침빛은 유난히 따뜻했지만, 방 안은 적막했다.이현은 천천히 눈을 떴다.머리가 무거웠다. 몸도, 마음도 이상하게 둔했다.옆에 누운 사람의 실루엣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긴 머리카락, 하얀 목덜미, 그리고 이불 위로 드러난 맨 어깨.그는 순간 미소 지으려다, 멈췄다.무언가 조금 달랐다. 기억은 흐릿하지 않았다.어젯밤, 분명 서로를 껴안았고, 사랑한다고 말했고, 숨결을 나눴다.그런데 그녀가 유리였다던 확신이 이상하게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그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옆에 누운 여자는 눈을 감고 잠든 채였다.그 얼굴.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어딘가 미묘하게 달랐다.입술의 곡선, 눈꼬리의 각도, 미간의 미세한 주름까지.유리는 이런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다.이현의 손끝이 천천히 그의 핸드폰을 향했다.잠금화면을 켰다.가장 최근 보낸 메시지‘할 말 있어요. 지금, 집으로 와주실 수 있나요?’그는 잠시 멈췄다.“…내가, 이 문자를 보냈던가…?”기억이 없었다. 메시지를 쓴 적이 없었다.그제야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었다.이불을 걷고 일어난 여자.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미소 지었다.“일어나셨어요?”그 말투는 유리의 말투였다.하지만, 유리의 눈빛이 아니었다.이현은 숨을 고르며 말했다.“…유진 씨죠.”그녀의 미소가 순간 굳었다.그리고, 다시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네. 맞아요.”이현은 손에 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그의 손등에서 천천히 힘이 빠졌다.“…왜 그런 짓을 했어요?”“그 밤은, 저한테도 필요했어요.”유진은 담담하게 말했다.“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느낀 적 없으세요?그 사람이 절대 몰라줄 걸 알면서도 그래도, 가지고 싶었던 감정.”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그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그의 가슴 안엔 뒤늦게 찾아온 진실보다유리의 얼굴이 무섭게 떠오르고 있었다.그녀는 이걸 봤을까.이현은
‘할 말 있어요. 지금, 집으로 와줄 수 있어요?’메시지는 짧았다. 그 어떤 장식도, 이모티콘도 없이 문장 끝조차 마침표 하나 없이 툭, 던져진 말.그럼에도 불구하고그 말은 유리의 마음을 오래도록 붙잡았다.이현의 번호였다. 평소와 다름없는 숫자 배열,익숙한 진동음, 몇 번이고 주고받던 메시지창.하지만 오늘따라 그 한 문장이 다르게 느껴졌다.'지금.'그 단어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유리를 향하고 있었다.밤공기가 차가웠다.초봄의 냄새는 따뜻하지도, 완전히 춥지도 않았지만, 유리는 괜히 겉옷을 한 번 더 여몄다.가로등 아래, 루체빌의 16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안.숫자는 조용히 오르고 있었고, 그 짧은 시간에도 마음은 수십 번을 오갔다.설렘. 기대. 그리고 아주 미세한 불안.‘혹시 무슨 일 생긴 건 아닐까.’‘아니면… 나한테 무슨 이야기 하고 싶은 걸까.’문 앞에 섰을 땐, 손끝이 먼저 멈칫했다.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기도 전,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평소 이현이 철두철미하게 잠그던 그 문이 오늘만은 조용히 열려 있었다.‘혹시 까먹은 걸까?’고개를 갸웃하며 살짝 문을 밀었고, 문은 작은 소리도 없이 열렸다.거실은 어두웠다. 불은 켜져 있지 않았고, 익숙한 라벤더 향이 코끝을 스쳤다.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유리는 신발을 벗으며 괜히 숨소리를 죽였다.살금살금, 소리 나지 않게 방 안으로 향했다.그러다 멈췄다.방 안에서 낮은 웃음소리와 숨소리가 들렸다.익숙한 목소리. 낮고, 부드럽고 사랑을 속삭이던 그 어조.“…유리야, 사랑해.”그 말이 들리는 순간, 유리의 걸음이 멈췄다.문틈은 아주 조금 열려 있었다.마치 일부러 누군가 손을 대고 멈춘 듯.그 틈 사이로, 조명이 어슴푸레 비추는 방 안.그리고 그 안에서 보인 모습.남자의 품에 안긴 여자.흘러내린 머리카락, 맨살이 드러난 어깨.밀착된 두 사람의 숨결.그리고 그 얼굴.그건, 유리의 얼굴이었다.하지만 유리는 지금, 문밖에 서 있었다.그 안에 있는 건
“좋은 사람이라는 이유로 마음까지 줄 순 없다.”금요일 오후, 이현의 사무실 복도.이현은 오후 미팅을 마치고 복귀하던 중 창가 쪽 작은 회의실 앞에서 유진과 마주쳤다.평소처럼 단정하게 묶은 머리, 살짝 바른 립컬러,그리고 여전히 흐트러짐 없는 태도.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달라져 있었다.“…회의는 잘 끝나셨어요?”유진이 먼저 말을 걸었다.“네. 유진 씨는 점심 잘 드셨어요?”“네. 좋은 이야기 많이 나눴어요. 유익한 시간이었죠.”말은 평온했지만, 그 '좋은 이야기'라는 말 한 마디에무언가 짙게 가라앉은 감정이 묻어 있었다.사무실로 돌아온 이현은 잠시 앉아있던 의자에서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았다.그리고 생각했다.‘무언가가 끝났다는 걸…그 사람보다 내가 먼저 느낄 수 있다면, 그건 내 책임이다.’그 책임이 지금 자신에게로 흘러들고 있었다.저녁이 가까워질수록, 유진의 움직임은 더 단정해졌고말투는 더 매끄러워졌지만 이현은 느낄 수 있었다.그녀가 조용히 선을 그었다는 것.그건 단절이 아니라, 정리였다.이현은 책상에 놓인 유진의 기획안 메모를 들여다보았다.간결하고 정확한 필기체. 철저하게 감정은 배제된 문장들.그 안에 어떤 마음도 실려 있지 않았다.퇴근 직전, 이현은 유진에게 다가갔다.“유진 씨.”“네, 대표님.”“시간 괜찮으시면, 잠깐 얘기 나눌 수 있을까요?”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회의실로 먼저 들어갔다.닫힌 공간 안, 짧은 정적.“유진 씨… 오늘, 유리 씨와 점심 드셨다고 들었어요.”그 말에 유진은 조용히 웃었다.“네. 저희끼리도 얘기 나눌 시간쯤은…있어야 하지 않겠어요?”“그랬겠죠.”이현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왜냐면,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그저 ‘미안하다’는 말 외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대표님.”“네.”“혹시 지금, 마음이 정해지셨나요?”그 질문은 칼처럼 날카롭지 않았다.오히려 많이 참은 사람이 마지막으로 꺼내는 말처럼 들렸
금요일. 회사 전체가 바쁘게 돌아가는 날이었다.출시 전 마지막 QA 일정이 몰린 탓에 디자인팀과 개발팀 모두 예민한 공기 속에 움직이고 있었다.유진도 책상 앞에서 계속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지만,집중은 쉽지 않았다. 그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오전 일정은 외근이라고 했지만,어디로 향했는지, 누구를 만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아니, 말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대답이었다.점심시간. 유진은 일부러 사무실에 남았다.책상 위 핸드폰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무의식적으로 화면을 켰다 껐다.이현에게 메시지를 보낼까,밥은 드셨냐고 물어볼까,그런 말조차 이제는 너무 늦어버린 것 같았다.그리고 그 순간,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대표님, 아까 그 파일 말씀하신 거 다시 확인해드릴게요.”유진은 고개를 돌렸다.이현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유리.서로 거리를 두고 걷고 있었지만, 그 거리 안에는 너무 많은 말들이 묻어 있었다.이현이 웃었다. 평소와 같은 미소였지만,유진은 그가 그 미소를 ‘누구에게’ 건넸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사무실로 돌아와 유진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이상했다. 자신이 흔들리는 이 감정이질투인지, 외로움인지조차 이제는 분간하기 어려웠다.‘내가… 놓친 걸까?’아니, 애초에 잡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오후 5시. 디자인팀 회의 중,이현은 유리와 짧게 대화를 나누고 회의실을 나갔다.유진은 남아 있던 자료를 정리하며 이현이 앉았던 자리를 잠시 바라봤다.그가 유리와 말을 나눌 땐 미묘하게 눈을 마주쳤고,서로 말이 끝나기 전부터 웃고 있었다.그건 유진이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시선이었다.그날 저녁, 유진은 루체빌 근처 카페에 혼자 앉아 있었다.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그리고 수십 번쯤 했던 생각을 다시 반복했다.‘유리는… 그 사람 앞에서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유리는 ‘청소’를 하러 갔지만, 그 공간은 단지 집 안이 아니라이현이라는 사람의 마음 한 구